아르노 강이 사보나롤라의 몸을 불태운 화형의 찌꺼기를 여전히 실어 보내고 있을 때, 피렌체 공화국에서는 그 수도사의 체포 직후 시작된 하나의 혁명이 조용히 마감되고 있었다. 읍도파(읍도파, I Piagnoni :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파를 반대파가 깔보는 투로 부르던 말 - 옯긴이) 관리들은 모두 관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는 반대파 사람들로 채워졌다. 처음에는 10인 위원회 I Dieci, 8인감찰위원회 gli Otto di Guardia, 정무위원회i Collegi della Signoria등이 폐지되었고, 점차 하위 관직까지 사보라롤라에 반대하거나 혹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와는 무관한 사람들에게로 넘어갔다. 당시 그에게 더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일수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기국에서 해임된 읍도파들 중에서 (피렌체 시(시) 찬가 De illust ratione urbis Florentiae)라는 시를 썼던 휴머니스트 우골리노 베리노 외에, 제2서기국의 서기장이었던 알레싼드로 부라치(혹은 브라체시)가 들어 있었다. 브라치는 때때로 격노파(격노파, kli Arrabbiati: 성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보나롤라의 개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가리킴 - 옮긴이) 성향의 정무위원회와 읍도판 지지의 10인위원회 사이에 끼어 일을 어렵사리 처리해 나깆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사보나롤라에 대한 교황의 분노를 달래보려고 끝까지 노심초사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브르키엘로 풍의 풍자 시인이자 유려한 라틴 시인이었던2) 그의 후임으로 80인회 il Consiglio degli Ottanta는 무명의 청년인 니콜로 디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를 임명하였다.
비록 마키아벨리 가(가)가 도시의 유력 가문은 아니었다 해도, 그 기원조차 불분명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발 디 페사에서 도시로 이주해 왔으며, 몬테스페르톨리의 옛 군주들과 혈연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은 곧 좋은 시민이 되었다. 빌라니 연대기에는 마키아벨리가가 1260년의 대패배 이후 피렌체서 쫓겨났다가 뒤에 (전면 복귀한)교황파의 주요 가문으로서, 바르바도리 가, 카니자니 가, 소데리니 가와 함께 을트라느노 구(구)의 (이름 있는 시민 집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도시의 많은 관직을 역임했는데, 그 중에서 21명의 곤팔로니에레 gonfaloniere(르네상스기 피렌체의 최고 행정 수반인 정무위원회 의장을 가리키던 관직명. 베네치아의 도제Doge에 해당된다. 중세 이탈리아 도식국가에는 민병대를 보유할 수 있는 행정구역 gonfalone들이 있었는데, 곤팔로니에레란 중앙 정부에 대해 그러한 구역을 책임지는 관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원래의 말뜻 그대로 보자면, 군기(군기, gonfalone)를 든 기수라는 의미이다. 이를 정무위원장이나 정무총감 혹은 행정장관 등으로 옮기는 것은 마치 왕과 같이 더 높은 직위 아래에 있는 하위직인 듯한 인상을 주므로 적적치 않다고 생각된다. 비이탈리아권의 학자들 역시 대개 원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 옮긴이)와 54명의 정무위원 periore(조합의 요직이나 정무위원회의 위원을 가리키는 말. 원래는 교회의 주요한 직책들{나라와 시기에 따라 다양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옮긴이)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도시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일한 사람은 지롤라모라는 인물로, 그는 과두 정부에 공공연이 반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추방되었다가 결국은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3)
마키아벨리 가가 (부유 시민 poploani grasssi)으로서 품위 있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보다는 발 디 페사에 소유한 토지 덕분이었다. 당시 다른 가계들에 비해 사정이 좋지 않았던 곳은 베르나르도 디 니폴로 디 부오닌세냐 집안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형편이 빈한한 것을 들어 그가 아마도 사생아 가계 출신이 아닌가 의심했으며, 나로서는 믿기 힘들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뒤에 그가 사생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토토 마키아벨리의 유산을 상속받아 형편이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극히 절약하지 않으면 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힘든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법학 박사였던 그는 마르카에서 회계사 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5)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피렌체에서 그는 법률가로서 일한 적이 거의 없었고 간혹 그런 기회가 있었다해도 보수는 극히 적었다. 대신 그는 사려 깊고 엄격하게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을 관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최근까지도 아려져 있진 않았던 베르나르도의 (비망록 Libro di Ricordi)이라는 귀중한 자료가 발굴됨으로써, 우리는 그가 비록 본성보다는 궁핍 때문이겠지만 약간 인색한 편이며, 주의 깊은 성격에다 다소 괴팍한 데가 있으나 그렇다고 저급하지는 않은 인물이었음을 알게되었다. 그는 돈 문제에 신경을 쓰면서도 공부가 주는 위안도 아는 사람이었다. 베르나르도는 결코 사치할 만한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으며 안락은커녕 최소한의 생활도 유지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때로는 책 살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야말로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결점이자 동시에 유일한 열정이었다. 그는 언제나 아직 철하지 않은 책을 사서 스스로 제본하는 애정을 보였으며, 때로는 채식(채식)을 가하기도 하였다. 만일 책을 사지 못하면 즉시 그것을 빌려 보았으며, 법률서뿐 아니라 인문학에 관한 책들도 읽었다. 피렌체에 인쇄술이 소개된 것은 그가 비망록을 쓰기 시작한 지 불과 사 년전의 일이었으나, 인쇄본을 멀리한 당시의 부유한 애서가들과는 달리 그는 탐욕스럽다고 하 만큼 그 이점을 이용하였다. 그는 초기의 피펜체 인쇄업자들 중 하나인 니콜로 델라 마냐로부터 인쇄 예정인 리비우스의 책 한 부를 받아 그 속에 나오는 지명을 색인하는 일을 맡았다. 12첩의 종이를 쓰면서 무려 아홉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애쓴 대가로 드디어 그는 자신이 열망하던 책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 베르나르도에게서 1469년 5월 3일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태어났다. 위로는 이미 프리마베라와 마르게리타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진 누나가 둘 있었으며, 남동생을 재산을 남겨준 아저씨의 이름을 따서 토토라고 불리웠다. 어머니는 바르톨로메야 데 넬리오, 그 집안의 한 가문록 작가는 그녀가 몇 편의 종교시를 썼다고 말한 바 있으나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모계 유전에 관한 현대의 유전학 이론들에 비추어볼 때, 니콜로의 일생을 불태웠던 시적 재능이 어디에서 연유했는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전적이든 본받아서든 간에 공부에 대한 애정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베르나르도의 기록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유년기 공부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1476년 5월 6일 니콜로는 마테오라는 선생으로부터 라틴어 공부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도나텔로 Donatello)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일곱 살이었는데, 이 나이는 당시의 교육적 통례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다음 해에 들어 그는 산 베네데토 교회의 바티스타 다 포피를 새로운 문법 선생으로 맞게 되었다. (소년은 많은 노력을 했고, 또 그것을 참을성 있게 견뎌냈다......,) 지루하게 마련인 유년기의 공부 짬짬이, 그는 아마도 아버지의 초라한 시골집이 있던 산탄드레아의 숲이나 혹은 외가의 시골집을 둘러싼 무젤로의 몬테부이아노 성벽 폐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뛰어다녔을 것이다. 1480년에 그는 산수도 함께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르나르도는 한 해 전에 그의 친척 두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피렌체인들을 희생시킨 전염병에 걸려 몸져 누웠으나 기적적으로 회복 된 후 빈약한 수입과 함께 식구가 줄어들었음을 신고하면서 아이들에 대해 (니콜로는 11살, 토토는 5살로 둘 다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다음해에 두 아니가 파올로 다 론칠리오네라는 선생에게 공부를 배우고 있음을 보게 된다. 토토가 (도나텔로)를 붙잡고 씨름하는 동안, (니콜로는 어느 정도 라틴어를 하게 되었다). 즉 로마의 말로 이미 짤막한 글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가 결혼할 무렵에야 겨우 라틴어를 배웠다는 조비오의 악의적인 말이 거짓임을 말해 준다.(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그의 말에 현혹되고 있다.!)
반면 니콜로는 그리스어를 배운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아마 초보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결코 그를 학자로 만들 생각이 없었으며 니콜로 자신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생각이 어떻든 간에 그러기에는 아마 돈이 모자랐을 것이다. 그가 읽었던 것들은 분명히 그 시대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듯한 구절들을 외우면서 숙독했을 그런 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성년이 되어 말했던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가 마치 위대한 소명처럼 바로 이러한 유년시절에 시작되었을 것임을 상상하고 또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읽게 되는 역사가인 유스티누스 Marcus Junianus Justinus17)(기원전 3세기경에 살았던 로마 역사기. 필리푸스 시대의 역사 Historiarum Philippicarum)를 썼는데, 이는 기원전 1세기경 폼페이우스 트로구스기 쓴 같은 제목의 책을 요약한 것임 - 옮긴이)는 그의 아버지의 서가에 없었지만 사려 깊은 베르나르도는 재빨리 그것을 빌려서 니콜로가 12살이 되어 이미 (라틴어를 하고 있을) 무렵에야 되돌려주었다. 반면 그는 비온도의 (로마제국사Deche)(폴라비오 비온도 {1392-1463}의 역사서 Historiaurm ab inclinatione Romanourm decades(1437-1442)는 그 제목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바와는 달리, 고대 로마제국사가 아니라, 5세기경의 서로마제국의 쇠망에서부터 바로 자신의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의 행적을 중심으로 다룬, 현재의 관점으로는 최초의 유럽 중세사이다. 서양에서는 이 책명을 줄여서 흔히 Decades(=Deche)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역사서가 10권씩으로 묶여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옮긴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더욱이 리비우스의 저술들도 소장하고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아마도 어렵게 색인 작업을 한 대가로 얻었음직한 그 저술들을 1486년에 제본한 것 같다. 당시 17세였던 니콜로는 그 귀중한 책을 찾으러 제본업자에게 갔으며, 아버지가 시골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제본비 조로 (붉은 포도주 세병과 식초 한 병)을 주었다. 아버지의 이와 같은 기록들을 읽노라면, 니콜로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나는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되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마키아벨리가 고전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고 중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당시 피렌체의 가장 명망 있는 휴머니스트들의 학식과 비교한 것으로, 최근의 연구는 그 의미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는 라틴 자가들 중 오직 역사가들에게만 관심을 가졌을 뿐) 이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번역된 희극 작품들을 베끼거나 모방했을 뿐 아니라 그 유명도와 인기에 연연함이 없이 시들을 읽었다. 그는 단테에 매혹되어 라틴 시인들 중에서도 가장 단테적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루크레티우슬 옮기어 베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각별히 즐거운 일이다. 그는 필사본 혹은 활자본 상태의 라틴어 번역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헤로디아노스,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를 일고 인용하였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마키아벨리의 교양과 고전적 바탕이라는 문제에 관해 다룬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거나 암묵적으로 인용했거나 또는 적어도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는 작가들의 일람표 하나라도, 고전 고대에 대한 그의 인식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져 온 지식의 범위를 크게 넓혀줄 것이다. 단정하기는 힘들겠지만, 그가 분명히 연구하거나 읽은 저술가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면 우리가 마찬가지로 불분명하게 알고 잇는 여러 사실들이 다른 각도에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키아벨리의 인생을 중반에 이르기까지 살찌웠던(고대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였음이 틀림없다. 그 이후의 생애는 보다 더 (현대사에 대한 오랜 경험) 속에서 보내게 되며, 우리는 다음의 장들을 통하여 이러한 편력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먼저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스스로 목격했던 사건들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뒤에 말했듯이, 인생 초년에 보고 들었던 것들이 (젋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바, 이는 (모든 인생행로에서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것이었다. 그가 인간 행위에 대해 내세운 보편 진리들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을 법하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시대는 그 스스로 보는 바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던 기억 덕분으로, 피렌체의 옛 생활 방식을 여전히 접할 수 있던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소길드 세력의 약호로 1382년에 성립되어 1387년 개혁되고 1393년에는 마소 델리 알비치에 의해 조직이 개선, 강화된 유력 시민 정부 il governo di Ottimati는 공화국에 유례 없는 행복과 위대함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단테가 카차귀다 시대의 코무네(코무네0 정부를 그린 것만큼은 절제 있고 품격이 높지는 못하지만, 메디치 가의 집권으로 부패가 만연하기 전, 니콜로 다 우차노와 마소 델리 알비치 시대의 피렌체는 여전히 도덕이 살아 있던 도시였다. 부가 넘치고 상업이 활발하며 세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영민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던 당시의 건축물들은 최상의 모습을 뽐냈다. 뒤에 사보나롤라가 경멸 조로 말했듯이, 비록 종교적 성소롤 지어졌던 건물이 사실은 각 가문의 무기고로 이용되기는 했지만, 코지모 데 메디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도시의 기질을 안다. 우리는 50년도 못 가 쓰러지겠지만 이 건물들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이러한 절제된 화려함을 예술적 품위와 문학적 우아함으로 세련미를 더했다. 공적 의례는 장엄성을 과시한 반면, 사적 생활은 이탈리아 어느 곳보다도 높은 수준의 문화와 예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통치력은 훌륭한 법률보다는 지도의 덕성에서 나왔다. 비록 정치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직에 선임되었고 그 중 소수는 직접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지만, 설사 불의와 권력 남용의 경우가 있었다 해도 그것조차 정의의 외양을 가지고 적절한 정도를 넘지 않도록 배려되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침해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정치적 인물을 훈련시키는 이러한 어려운 과정은 관직에 들어가기 전, 이미 도시의 명망 잇는 사람들의 상점이나 사무실에서 이 평민적 도시에 어울리는 소박한 방식으로 행하여졌다. 그들의 명망은 재산보다는 분별력에 연유한 것으로, 그들은 결코 최고위의 관직에서 중대한 국가사를 맡은 뒤에도 자신들의 사무실과 상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단순 소박하다는 면에서 그들은 훌륭한 전기 작가인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가 비교한 바 있는 (그러한 고대 로마인들과) 매우 닮아 있었다. 사실 우아함을 갖춘 로마적 자유가 있다고 찬양해 마지않았던 당시 한 시임의 말과 같이 15세기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 역시 종종 그랬던 것처럼 인물과 사건들을 로마의 경우와 비교하고자 하는 유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정당화 될 수 있었을 듯하다.
이들 피렌체의 유력 시민들은 경쟁적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글은 평민 귀족으로서, 분명코 인민 주권의 형식을 초대한 존중하려던 사람들이었다. 인민들은 그들을 (동등자 중 일인자)와 같은 존재로 간주하면서 그들의 통치 아래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들은 지도자들의 지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시장이나 상점 혹은 선술집에 앉아 정무궁Palazzo에서 진행되는 극히 세련되고 섬세한 정치 게임을 받아들였다. 우리 시대의 입헌 군주와 같이, 인민들은 다만 명목상의 주권에 만족하면서 정치를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맡게 놓았던 것이다.
메디치 가 역시 그들이 지배한 처음 50년간은 이러한 게임의 힘든 규칙을 지켰고, 그것을 잘 준수할수록 더 나은 통치를 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앞서의 과두정권 아래서 향유되었던 풍습과 삶과 만족감이 코지모든 피에로든 또는 로렌초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일인 통치 아래서도 얼마간 지속되었다. 합법적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성의 군주였던 그들은 끊임없이 신변을 경계하면서도 무력으로 통치하기보다는 결코 신민이 아닌 동등 시민들의 동의에 의거하여 다스렸던 것이다. 이러한 평민 군주들은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묘한 방식으로 그들이 선호하는 인물을 장관 지게 앉히고 통혼과 관직 분배로 부와 호의에 균형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질시와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며, 거의 모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배려였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나 째는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은 바로 그 해였다. 코지모의 뒤를 이어 피렌체의 시민 군주가 된 피에로는 그 자리를 다시 아들인 로렌초와 주리아노엑 물려주었다. 마키아벨리는 볼테라의 발란(1472)에서 야기된 무자비한 복수와 신의의 파기를 알기에는 당시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1478년 파치 가 사건이 발생했을 때쯤에는 이미 라틴 자가들을 읽고 있었다. 그때 그는 도시의 명망가라는 인물들이 자신들의 질시와 원한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최악의 교황이었던 시스토 4세의 묵인 아래 그의 조카들이 허망한 탐욕으로 음모를 꾀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음모자들 중에는 피사 대주교와 교황의 혈족인 젊은 추기경 리아리오도 들어 있었다. 음모를 실행하기 위해 택한 시간과 장소는 성체 봉현 미사가 있던 성당이었다. 줄리아노는 사해되었으나 로펜초는 죽음을 면하였다. 대주교와 많은 공범자들은 그들이 헛되이 차지하려 했던 정무궁 창 밖으로 목이 매달렸으며, 길거리에서 군중들에 의해 찢긴 그들의 시체는 여러 날 동안 참혹스러운 광경을 연출하였다.
교황은 줄리아노의 죽음에 대해 어색한 위로의 말을 전한 뒤,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진 대주교보다는 자신의 혈족으로 당시 억류 중이던 추기경에 각별한 관심을 표하였다. 추기경은 결국 풀려났으나, 뒤에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교황은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자신과 {나폴리}왕의 모든 세력을 규합하여 피렌체를 공격)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마키아벨리주의적 교의를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26) 교황은 세속적인 무기를 쓰기 전에, 먼저 정신적 무기로 로렌초와 장관들을 파문에 처함과 아울러 도시 전체를 금력으로 묶어버렸다. 니콜로의 말처럼, 이러한 조치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무기는 이미 그것의 옹용과 사용자의 악명으로 무뎌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정신적 공격이 피렌체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군대의 공격으로 그들은 지쳤고 마침내는 포초 임페리알레에서의 패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는 용병대의 전례 없는 비겁성에서 기인했는데, 이는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었고 특히 니콜로에게는 대단히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피렌체사 Istorie fiorentine)에서 이에 관해 언급하기 오래 전, 이미 마음속에 그 일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아니 메디치 가는 로렌초의 대담한 결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남자답게 이 전쟁의 책임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나폴리 왕의 손에 맡김으로써 결국 명예를 손상치 않고 평화를 얻어내었다. 물론 이에 대해 교황은 즉시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피렌체에서 로렌초의 명성을 최고조에 달했다. (니콜로가 어른이 되어 썼듯이)(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릇 어떤 일에 대한 평가는 원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그 결과에 달려 있는 법인 것이다.
그 뒤에 발생한 사건들은 로렌초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는 이미 정치적 지략을 발휘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세력 균형을 시도하고 있었다. 당시의 어떤 전쟁에서도 피렌체 공화국의 영토는 침범받지 않았다. 단지 평화라는 한마디를 하고 숨을 거둔 시스토 4세의 주음과 함께 막을 내린 롬바르디아 전쟁이나, 피렌체가 새로운 교황 인노첸초 8세에 대항하여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와 동맹한 제후들의 전쟁(1486)에서도 피렌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제 17살이 된 니콜로는 후자의 전쟁을 통해 용병의 경악스러운 행태에 대한 관찰의 새로운 자료를 모을 기회를 얻었으며, 왕의 행동으로부터 (현명한) 군주라면 (신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잔혹하다는 악명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지 또는 한번 한 약속을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어떻게 파기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신의 파기의 기술을 그에게 더 장 보여 준 인물은 인노첸초의 뒤를 이은 새 교황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2 princip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레싼드로 6세는 남을 속이는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언제나 속일 사람들을 찾아내었다.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어떤 것을 설득하고 또 굳게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만은 항상 성공하였다.) 그는 이와 유사한 책략을 이탈리아의 여러 궁정에서의 일상사와, 인근 로마냐에서 빈번했던 가족 학살(1488)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자유는 장갑(장갑)으로 은폐된 로렌초의 철권 아래서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1470년 1471년 사이, 1480년 1490년에 각각 10년 간격으로 행해진 개혁으로 정보 요직은 점점 더 로렌초의 측근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로써 그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졌다. 자유의 쇠퇴와 함께, 앞서 말한 바 있던 도시의 옛 생활 방식도 사라져갔으며, 이제는 다만 적어도 그 마지막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한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시대의 변화와 다른 궁정들의 영향 아래 운명적으로 유입된 부패는 정치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풍숩마저 물들였으나, 로렌초는 이를 오히려 통치상의 일환으로 이용하였다. 미키아벨리의 세대가 파행적 사회상을 민감하게 느끼게 된 것도 정확히 바로 이 시기였다. 뒤에 피렌체인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그 같은 부패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그는 당시의 부패상을 더욱 직설적이고 신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잇다. (다름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파멸시킬수록 더 지혜롭고 존경받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 역시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당시는 사치와 오락, 호색과 남색(남색)(이른바(피렌체의 악습)이라 불리던 것)이 만연하고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사라져가던 때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그리고 마키아벨리도 언급하고 잇는 바와 같이), 도덕의 이완은 종교의 쇠퇴를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세속적 악습은 사제와 수도사들의 부패에 일부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들이 빚어낸 결과적 현상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안레싼드로 6세가 교황에 즉위한 이후 로마에서 나타났다. 세간의 이러한 악습과 로렌초의 부패한 통치에 반기를 들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질타의 목소리를 드높인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위대한 수도사는 1482년부터 1487년 사이 피렌체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별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1490년 중반에 돌아온 그는 이민 끊임없는 설교와 명상과 기도로 강해져 있었으며 충고와 계시를 통해 스스로의 소명을 확신하고 있었다. 복귀 후 자신이 행산 새로운 설교 방식이 호응을 얻은 데 고무된 그는, 악습과 그것으로 악명 놓은 이물들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로렌초는 협박과 회유로 그를 침묵시켜 보려고 했으나, 그는 로렌초의 최근 개혁을 격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로렌초가 1492년에 죽고 이어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으로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의 정권이 정복되자, 사보나롤라는 투쟁의 승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예언자이자 성인의 삶을 사는 임룰로 존경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약탕과 내란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고 새로운 평시민 정부 governo popolare(여기서 (평시민 popole)이라 함은, 귀족적 신분인 상층의 부유 시민 popolani grassi 및 유력 시민 ottimati, gran야, maggiori과 하층인 소시민popolo minuto사이에 위치하는 계층으로, 그 구성 요소는 시간과 장소에 딸라 다양하게 변하지만 주로 조합의 마스터나 중간 이상의 상인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때에 따라 사회 계층을 평시민과 소시민의 둘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 경우 평시민에는 상층의 시민 계층까지 포함된다. 이들은 시민 계급 박R의 대중들 moltitudine과는 rqnsaudgl 구별된다. 시민들로 이루어진 대평의회 Consiglio maggiore의 구성원 수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귀족 공화정과 평시민 공화정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이 책 곳곳에서 나오는 (평시민 정부)란 곧 후자의 경우이다 - 옮긴이)를 통해 자유를 고무하고 촉진시민 데 대해 감사하였다.
당시 25세였던 마키아벨리는 이 새로운 정부가 정확히 평시민적이라는 점에서는 만족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지에서 온 수도사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국가를 종교, 즉 신에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의 생각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마키아벨리는 적어도 자신의 저술들 속에서 종교를 국가, 즉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그가 읍도파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고 오히려 그 반대파인 격노파의 일원일 것이라고 생각함직 하지만, 이 파의 열성적 인물들 명단에는 결코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더욱이 그는 교회의 부패와 로마의 악덕 성직자들 그리고 사악한 사제들에 대항한 사보나롤라의 정치적 업적을 필연코 높이 평가했을 것이며, 설사 그가 자신과 피렌체인들의 기질에 따라 한때 그 몰락한 영웅을 조롱했다고 해도, 좀더 깊고 진지한 생각을 가진 뒤부터는 사보나롤라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에 관해 확실한 날짜가 기입된 최초의 글이자 그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문서들 중 하나로, 리차르도 베키에게 1498년 3월 9일자로 보낸 편지가 있다. 이 속에서 당시 교황의 (분노에 굴복한) 사보나롤라가 주교좌 대성당의 연단에서 물러나 산 마르코 성당에서 행한 두 편의 설교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회에서 한 첫 설교 두 편이었다. 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이제 교황의 정신적 무기와 가톨릭 연명의 세속적 압박과 함께, 피렌체인의 상인적 교활성과 쉽사리 과거를 망각하는 불안정한 기질 때문에 무너져가고 있었다. 사보나롤라의 선의와 그로 하여금 설교케 하고 종국에는 화형주에 조용히 몸을 맡기게 했던 고결한 이상을 생각할 때, 이 위대한 수도사를 (시류에 영합하고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둘러댔던) 사기꾼이라고 혹평하였던 마키아벨리의 편지는 아마도 오늘날 별로 읽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쯤은 익살로 씌어졌던, 친국에게 보낸 이 편지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과 친구들 간의 재미를 위하여 피렌체인 특유의 독설적 기질을 선보이고 있었을 뿐이다. 더욱이 당시 그는 29세, 한창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좋아하고 사보나롤라가 금지시켰다. 화려하고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나이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젊은이에게 교황에 대하여 요구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사실 로드리고 보르자는 그로부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서 피렌체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한때는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다른 무기 없이 오직 설교만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수복을 꿈꾸었던 인물로 화형주로 보냈던 것이다. 이 화형주는 마키아벨리가 사인(사인)에서 공인(공인)으로 생활을 바꾸기 전에 사림들 사이에서 배운 마지막 교훈이었다.
지금까지 마키아벨리 시대의 사악한 교훈들을 짤막하게 간추려보았다. 비록 자신의 저술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람들과 세상사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도덕적 판단에 얽매이지 않은 채 논리적 엄격성을 유지하면서 결론을 끌어내는 남다른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관찰과 논증으로부터 도출해 낸 대체로 과학적인 고찰들이 반드시 그 자신의 감정과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이론 속에서는 거의 언제나 이성적인 것이 감정을 압도하였으나, 행동에 있어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둘은 항상 결합되어 그것들로 충만된 마음속에서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게 될 것이었다.
사실 피렌체인은 성격상 괴팍한 측면들을 많이 지니고 있었는데, 단테는 이 중 하나를 가리켜 (괴짜bizzarro)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는 곧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수사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피렌체인의 이러한 기질을, 변덕스러우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한결같고 가혹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감미로운 가운데 그것을 발샟메하고 또 성숙시킨 그곳의 토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피렌체의 땅은 추위와 더위에 의해, 아니 그보다는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길들여져야 하는 단단한 돌덩이들로 되어 있어서 열성적이고도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피렌체인의 기질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가혹하고 심술궂은 데가 있다. 이는 아마도 도시민의 세련성 아래 가혹함의 불꽃이 번쩍이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신랄한 풍자와 그 유명한 조소적 태도는 반드시 유쾌함과 선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약간 경박함마저 풍기는 이들의 쾌활성을 입증하고 상징하는 말로, 흔히 로렌초 데 메디치의 (바코와 아리안아의 개선 Trionfo 야 baccoe 야 arianna)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후렴구를 싫증날 만큼 되풀이 인용하고 있지만, 정작 이렇듯 유쾌한 삶의 외양 밑에 똑같은 정도로 우울하고 씁쓸한 내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아무리 덧없다 해도
하고 싶은 대로 즐기라.
내일이면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리니.
피렌체인의 기질을 잘 이해하려면 결코 다음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여기서 가장 육욕적인 사육제 노래가 동일한 음조와 운율을 가지고 다만 가사만 바뀐 채,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헌신적으로 만들어진 성가로서 불렸던 것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 또한 그 같은 종류의 노래들이나 (만드라골라) 같은 희곡과 함께 (참회 권유 Esortazione alla penitenza)처럼 경건한 내용의 글을 썼다고 해서, 하등 놀랄 일도 장난으로 돌려버릴 일도 아니다. 이 도시에서는 풀치의 가장 피렌체적인 서사시 (모르간테 Morgante)에서도 나타나는바와 같이 불경함과 경건함이 끊임없이 뒤섞이고 있었다. 또한 사보나롤라의 놀라운 개혁과 함께 로렌초의 이교적 시대나 그의 화형 이후 한 행정관이 (신을 찬미하라. 이제 우리는 다시 쾌락을 즐길 수 있으리니)라고 천명했던 바의 격노파와 동무파i Compagnacci(피렌체의 반사보나롤라 졍파를 일컬음 - 옮긴이)의 비행들이 번갈아서 일어났던 것이다.
피렌체의 정치 생활 역시 치열하고 변화 무쌍한 대립상에 의해 지배되는 그 같은 성향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모든 구가들 중에서 최악의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법률보다는 정치 지도자들이 오히려 나았던 이 도시에서 16세기의 위대한 정치 저술가 세 명(마키아벨리, 귀차르디니, 도나토 잔노티를 일컬음 - 옮긴이)(그 중 마키아벨리가 으뜸이지만)이 모두 나왔다는 것은 얼핏 이상스러운 우연인 듯도 하겠지만 사실 논리적으로는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원래 옛 자치 도시의 자유로부터 기원하였으나 단지 의심이 많고 시기심이 강하며 조급하고 변덕스러운 일상적 기질에 의존함으로써 이후 괴상한 모습으로 바뀌고 변화해 온 결함투성이의 정치 체제 이면에는, 극히 어려운 상황 아래서 남을 통치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통치하는 법을 익히도록 해준 정치적 교훈의 유익한 경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위정자는 악법으로 인해 장애를 받았으며, 관리는 법률만큼이나 자주 바뀌었고, 외교 사절은 모호하고도 제한된 권한 외에는 아무런 권위도 부여받지 못하였다. 심지어 (참주 I tiranni)조차도, 앞서 살필 바와 같이, 도시의 기질에 맞추어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구정을 유지하고 매일매일 그것을 확인하며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간계로써 통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피렌체의 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표방했던 (살피고 준비하라,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신조는 파에솔레와 아느로 강 사이에서 생겨난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15세기 피렌체의 국정술(국정술) 학파에도 놀랄 만큼 꼭 맞는 말이었다. 니콜로 마카아벨리가 자라난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 학파에서였다.
이 정을 끝내면서 나는 30대의 문턱에 들어선 마키아벨리의 초상을 간략히 그려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형상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던 바로 그 모습만큼이나 이해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한 뛰어난 인물을 과연 자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우려가 앞선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무려 450년간이나 이해해 보려고 애써왔으나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종종 냉소주의 때문에 비난받아 왔으나, 이는 실상(스스로의 논리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의 신념)에 다름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가 이 위대한 이상주의자의 냉횩한 현실주의와 이 낙관주의자의 비관주의를 염두에 두고 그를 이원론적 입장에서 분석한다고 해도 하등 놀랄 일이 못 된다. 그는 (반인 반수의 존재)인 켄타우로스의 모습으로 간주되는 그 자신의 정치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먼저 지노 카포니가 그에 대해 쓴 그을 인용하면서 시작해 보자. 그의 말은 진실이므로 풀어쓸 수도 있겠지만, 글의 묘미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하여 그대로 옮겨보겠다. (그의 지성은 우아하고 풍요로웠으며 품행은 거침이 없었다. 이해력은 놀랄 만큼 뛰어났으나 반드시 세상사가 그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 그는 정치를 아탈리아가 느끼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높았고 이상은 원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힘은 헛되이 소진되고 위대성은 부패하여 수단의 부재와 전망 속에서 마치 패배 후 진흙탕에 처박힌 로마군의 독수리 깃발처럼 다만 엎드려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오히려 종교를 고귀한 것으로서 존중하였으며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사랑하였다. 그는 종교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든 잘못된 정치 제도에 분노하였으며, 그리하여 그것을 조소하고 공격하였고 악덕으로 규정하여 자신의 마음에서 축출해 버렸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와 같았고 또한 이탈리아 역시 그러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그와 같았으나 아탈리아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실상 다른 어느 곳보다 피렌체의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즉 그는 미덕과 악덕의 측면들이 불가피하게 더 부각되어 보이는 그러한 확대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특기할 만한 악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론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을 결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통해 과도한 활력과 애정을 분출하고자 하였다.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남에게는 매우 관대했고 자녀들에게는 자애로웠으며 무엇보다 정직했고 조국과 자유를 사랑하였다.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누구보다도 더 저열한 인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 스스로가 위대함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다 숨기려 하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좋은 점은 감추고 덜 좋은 점은 내보이는 편이었다. 사실 그는 스스로가 실제보다 더 낮아 보였으며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동류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고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만일 사람들이 선하기만 하다면 자신의 몇몇 사악한 권고들이 (더 이상 소용없게 될 것) 임을 씁쓸한 어조로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저열함을 속속들이 맛보고 언제나 선인이 악인에게 굴복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이를 자신의 재능으로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법칙으로 재구성해 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악인의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그는 차라리 선인 쪽에 끼일 인물이었다.
카포니는 마키아벨리가 종교를 애호하였으며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글 거의 어디에서나 비록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예민하고도 열정적인 시인의 정신을 엿볼 수가 있는데, 무릇 시가 있는 곳에 진정코 사악한 것은 없는 법인 것이다. 그러나 선은 사라져가고 악인 만연함을 보면서 그의 정신은 반란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렇게 쓰디쓴 격언들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거나 또는 쓴웃음을 통하여 그것을 표출하였다. 그는 스스로의 웃음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선하고 고귀한 것을 따르고 믿는 자신의 감정을 비웃었다. 또한 좀더 일찍 그렇게 하지 못한 자산을 조소하였다.
그의 성격이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다음의 8행시에 그려진 작화상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씌어진 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의 심정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바라네. 하지만 바람은 나를 더욱 괴롭게만 하네.
나는 우네. 하지만 울어도 가슴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네.
나는 웃네. 하지만 웃어도 마음은 허망하기만 하네.
나는 태우네. 하지만 불꽃은 밖으로 피어나지가 않네.
나는 내가 보고 내가 느끼는 것들이 두렵기만 하네.
모든 것들이 나에게 새로운 고통을 주네.
그래도 바라면서, 나는 울고 웃고 태우며,
또 내가 듣고 보는 것들을 두려워하네.
휴머니즘의 아들이지만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방탕한 자식 같은 존재였던 그는, 자신의 학문에서보다 더욱 정신면에서 휴머니스트들과 다른 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여 (류트)를 배우고 (책)을 읽으며 교양을 쌓았다. 반면 당시 놀라울 만큼 발전되었던 시작예술에 대한 언급은 그의 글을 통해 단 한번 나타날 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이다. (이 지방(......) 앞서 발한 바처럼 한때 사멸했던 시와 그림과 조작들을 되살려내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그야말로 다름 아닌 고전 고대의 용맹성과 질서가 되살아나기를 바랐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균형이 잘 잡히고 중키의 호리호리한 풍모에 당차고 대담하든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은 검었고 안색은 희었지만 약간 창백하였다. 머리는 동그랗고 작았으며 이마가 높은 편이었다. 그의 두 눈은 빛났으며 굳게 다문 얇은 입술에는 언제나 약간 조소 어린 웃음이 머금어져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를 그린 몇 종류의 훌륭한 초상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마키아벨리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만났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만이 그 희미하면서도 뜻 모를 미소의 의미를 충실히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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