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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avelli's peace25

신이 내린 글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얘기해 나가면서 정작 그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바꾸어 말해서, 이 책에서는 단지 그 수목에서 어떤 과일이 어떤 식으로 열렸는지를 보여주는 데 그쳤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정치사상적 변천은 좋든 싫든 많은 부분 바로 이러한 품성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었다. 이는 이미 나에 앞서 다른 이들이 지적했던 점이었다. 사실 그의 글에 대해 피렌체의 대 산문 작가인 지노 카포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진중한 듯하다가도 경멸 조로 돌아섬으로써 당시 칭송과 인기를 함께 누렸던 그의 문체, 그것이 지닌 비할 데 없는 대담성과 힘.(...)나의 생각으로는, 그의 교의가 드물지 않게 지고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도 작가로부터 풍겨져 오는 바로 그러한 인상 덕분인 것이다.) 그리.. 2020. 8. 20.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 죽음이란 결국은 사람들 각자에게 합당한 이름과 안식을 선사하는 법이지만, 그것이 마키아벨리에게 처음으로 가져다준 것은 무자비한 공격과 오명 분이었다. 불운은 그의 생애를 통해 그렇게도 그를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마치 화형주처럼 그 피곤한 영혼의 유해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시대의 배경은 바르게 바뀌었고, 반면 인간의 본성은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렌체의 서기장은 (비록 위대했지만 동시에 불운했기 때문에 죄악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한 교황의 은총과 특권으로 인쇄되었던 그 불멸의 저작들은 이제 다른 교황에 의해 탄핵을 받고 금서화되었다. 반마키아벨리즘의 아버지이자 자식인 그 악명 높은 (마키아벨리즘)은 프랑스 땅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는 언젠가 프랑스인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모.. 2020. 8. 20.
결말 육십 세 가량의 나이에, 머리는 기울어졌고 얼굴은 심적, 정신적 고뇌로 찌들린, 지치고 불행해 보이는 한 가엾은 남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라고 알려져 있는 피렌체 소재 채색 테라코타 흉상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니다. 지치고 고뇌에 찬 얼굴 아래로 예리하면서도 재기 어린 조소를 날리는 그 애수에 찬 표정은 바로 그의 특징 그대로이다. 만약 이 초상이 그의 것이라면, 어떠한 작가의 글도 마키아벨리의 비극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설사 그의 모습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그의 생애와 나의 책이 이르른 바로 이 시점에서 내가 상상한 그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그의 서간집을 읽을 때, 특히 그가 마지막 순간에 쓴 편지들을 읽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음속으로 이 고통스런 모습을, 삶의 활력.. 2020. 8. 20.
육십 평생에 (기도하라, 유대의 왕이여! 그대에게 사면을 내리노라.) 그 사악한 돈 우고와 에스파냐의 장군들이 공손하지만 완강하게 그 div에서 무릎을 꿇고는 자신들이 저지른 신성 모독적인 무도 행위를 사면해 달라고 요구하자, 클레멘테 7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피렌체식 조소 외엔 메디치 교황이 그 정복자들에게 달리 되갚아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라서 그는 넉 달 간의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동안 롬바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콜론나파를 사면하고 협정을 준수한다는 표시로 필리포 스트로치를 인질로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트로치는 교황의 인척일 뿐 아니라 몸값이 무려 백만 두카토를 넘는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조약은 체격되었고, 이제 그가 이를 지키려고 하는 한, 그의 편에서 보자면.. 2020. 8. 20.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이며 비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그가 역사 집필로 다시 돌아갈 당시 입에 올린 것 외에는 비극 작품을 쓴 적도 없고 또 그렇게 하려고 작정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속은 자신이 (군주론) 마지막 장에서 기원한 일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군주들을 마치 극 속에서처럼 준엄하게 꾸짖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비극적 생각들로 가득하였다. 그는 이미, 대 로렌초의 죽음에 뒤따른 (외세의 침략)에서 출발하여 미켈란젤로식의 단축법으로 묘사된 기만과 오류의 미로를 거쳐, 앞에서 말한 최근의 편지에서 스스로 예언한 그 치명적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힘찬 필치로 그려내고 있었다. (모로네는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 공국은 빼앗기고 말았지.) 그에게는 자신이 그리고 있던 비극 작품의 마지막 막 마지막 장처럼.. 2020. 8. 20.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 힘을 주는 무언가가 그이 상상력과 지성을 자극하면서, 그를 축 늘어진 시골의 분위기 속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개똥지빠귀와는 사뭇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는 마치 고목에 다시 싹이 돋은 듯한 기분에서 시내 출입이 더 잦아지고 그곳에 더 기분 좋게 머물렀다. 루첼라이 원은 영원히 문을 닫아버렸지만, 이제 또 다른 정원이 그에게 열려 있었다. 산 프레디아노 성문 밖의 야코포 르노차이오 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곳은 문인도 펄학자도 자주 들리는 곳이 아니며, 학식 있는 쟁론이 들려오는 곳도 아니었다. 대신에 그곳에서는 향연이 열리며, 음식도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였다. 포르나차이오는 하층 시민plebeo 출신의 부자였지만, 귀족들이라고 해서 그의 집을 .. 2020.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