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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avelli's peace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by FraisGout 2020. 8. 20.

  이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 힘을 주는 무언가가 그이 상상력과 지성을 자극하면서, 그를 축 늘어진 시골의 분위기 속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개똥지빠귀와는 사뭇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는 마치 고목에 다시 싹이 돋은 듯한 기분에서 시내 출입이 더 잦아지고 그곳에 더 기분 좋게 머물렀다.  루첼라이 원은 영원히 문을 닫아버렸지만, 이제 또 다른 정원이 그에게 열려 있었다.  산 프레디아노 성문 밖의 야코포 르노차이오 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곳은 문인도 펄학자도 자주 들리는 곳이 아니며, 학식 있는 쟁론이 들려오는 곳도 아니었다.  대신에 그곳에서는 향연이 열리며, 음식도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였다.  포르나차이오는 하층 시민plebeo 출신의 부자였지만, 귀족들이라고 해서 그의 집을 멸시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특히 피렌체에서라면 편견까지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카르피에서의 농담들에도 불구하고 미식가인 마키아벨리에게는 그 자체가 큰 매력이었으리라.  그리고 또한 바르베라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녀는 매력 만점의 젊은 가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녀와 벗하고 싶어했으며, 친구들도 한동안 그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이에 대한 첫 언급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신임 교황에게 하례를 드리러 갔던 베토리가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 쓴 1524년 2월 5일자 편지에 나타난다.  (니롤로 마키아벨리에게 안부 부탁하네.  그리고 그에게 전해 주게나.  저녁 시간에 오랫동안 기다려도 종내 열리지 않는 여기 이 문옆에 서 있는 것보다는 때때로 포르나차이오가 내는 저녁 식사를 바르베라와 함께 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말일세. )
  사실 마키아벨리는 친구나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그녀에게 끌려들고 있었다.  바르베라는 가까이하기 어려울 만큼의 큰 매력을 지닌 그런 여자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가난한 처지의 몰락한 (신군주) 같은 그에게는 그것이 다만 한동안이나마 자신이 무엇을 정복하며 지배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을 법하다.  그는 그러한 환상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아는 시인이었고, 게다가 불우한 시절을 보내면서 그러한 생각을 연장하며 그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을 터득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것은 56세의 남자가 겪을 수 있는 , 때로는 활기차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작은 연애 사건이었다.  혹은 스스로의 기분과 여인의 기질에 따라 환히 타오르는 듯하다가도 금방 사그라드는 조그만 모닥불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녀는 중년의 연인인 그가 비록 재능 외엔 가진 것이 없어도 다정하게 굴었다.  물론 가끔은 애정 어린말로 그를 놀려대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의 재치를 좋아했고, 그의 재능에 이끌렸다.  위대함이란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소원하게도 하지만, 또 때로는 사소한 일에서조차도 빛을 발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법이다.  이들 둘 사이에는 보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키아벨리가 죽은 지 17년이나 된 1544년에 와서 어떻게 바르베라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와의 좋은 추억 속에 담긴 애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녀의 소송 사건을 도와달라고 로렌초 리돌피에게 청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복잡한 것이긴 해도,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니콜로는 자신의 양처 마리에타를 사랑했다.  그녀는 다정한 아내이자 부지런한 주부였으며 동시에 사랑하는 아이들의 엄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칼리말라의 옷감 장수에게도 언제나 충분한 것은 아니었던 이러한 역할들만으로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힘들었다.  시골집이며 숲이며 새 잡는 여흥이며 모두가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지만, 그것도 그에게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아꼈지만 마음이 넓을 수는 없었던 마리에타 역시도 바로 그런 집이며 숲이며 새 잡기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주 포르나차이오의 만찬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바르베라도 그곳에 있었다.  (클리치아 Clizia)가 탄생한 곳도 바로 이러한 만찬과 모임에서 였다.  그 얼마 전, 카추올라 극단이 몬텔로로에 있는 베르나르디노 디 조르다노의 저택에서 (만드라골라)를 상연한 적이 있었다.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바스티아노 다산 갈로가 배경을 그린 무대였다.  포르나차이오는 자신의 연금 상태가 풀린 것을 축하할 목적으로 1525년 1월 13일에 열기로 한 잔치 마당에서 이 장관을 재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만드라골라)를 무대에 올리는 데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을 때, 마키아벨리는 인심이 후한 주인에 보답하려고 했건 또는 바르베라를 즐겁게 해주려고 했건 간에,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새로운 희극 작품을 선보이는 쪽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곧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나, 잔칫날은 멀지 않았고 시간은 빠듯했다.  불쑥 제의를 하긴 했으나 써놓은 것이라곤 아직 한 자도 없는 데다 무엇을 쓸 것인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인지라, 이번 같은 경우라면 고전 시대의 희극을 토대로 각색하는 도리밖엔 딴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플라우투스의 (카시나 Casina)를 모형으로 삼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이것이 그냥 우연한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포함해서 모든 것 모든 사람을 놀려대곤 했는데, 이 새로운 희극에서는 바로 자신의 애정 행각들을 재미의 도마위에 올렸다.  비록 그가 자신에 의해 피렌체인 니코마코(이름의 아이러니라니! 그 첫 음절들은 바로 자신으 것과 같지 않은가)로 둔갑한 스탈리노네 만큼 나이가 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바르베라에게 보낸 몇몇 편지와 시구들 속에는 약간 우울한 어조로 자신의 뒤늦은 연애 사건을 희롱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못마땅한 건
  당신이 아니야 차라리 나 자신이지.
  내가 알고 실토하건대
  그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더 싱싱한 젊음을 사랑해야 해.
  이 시구들은 운율은 다르지만 거의 같은 표현을 빌려 희극의 칸초네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래, 이사랑에 빠진 늙은이야
  그 일은 불타는 젊은이에게 맡겨두는 쪽이 더 나았을 텐데.
  전기 작가든 문학사가든 여태까지 고려에 넣지 않았던 작품의 이러한 기원은 지금까지도 해명되지 않고 있던 (만드라골라)와 (클리치아)간의 예술적 가치의 큰 차이를 쉽게 설명해 준다.  앞의 경우는 솟구치는 감흥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온 것이었고, 뒤의 경우는 포르나차이오가 열고 싶어하는 잔치에 시간을 대어야 하는 상황에서 비교적 냉정한 마음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작품의 도덕적 목적성을 상정하여 고안되었던 둘로 접은 글판의 가설은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클리치아)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그는 플라우투스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고, 당시의 풍취에 따라 자유롭게 그것을 따오기도 하며, 때로는 내용을 지어내고 새로이 바꾸기도 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급히 작품을 써내려갔다(그의 이러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속에서 진정 새롭고도 신선한 것은 그 문체이며 피렌체인 특유의 재치이다.  그것은 비록 (만드라골라)의 기지와는 비할 수 없다 해도, 원본의 고전극보다는 종종 더 나은 데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야말로 그 작품이 영감의 세례를 별로 받지 않고 급히 씌워졌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몇 주 동안 (피렌체사)를 한쪽으로 제쳐놓았을 것이다.  아니면 둘을 동시에 쓰고 있었을 수도 있다.  역사를 쓰다가 싫증이 나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 희극으로 가는 식으로 말이다.
  공연의 밤이 왔다.  포르나차이오는 호화찬란한 연회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에는 물론 몇 달 전 교황이 공화국의 수반으로 내정하여 보낸 어린 이폴리토 데 메디치를 필두로, (도시의 저명 인사들과 당시 권력층에 있던 고위 공직자들이 모두 초청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주요 인사들에 뒤이어 중간층 시민들 cittadini mezzani과 그보다 하층 시민들도 함께 초대되었다. (이미 퍼진 명성으로 인해 모두가 보고 싶어했던 )그 연극이 드디어 막을 올렸다.  무대 배경과 무대 면은 바스티아노 다 산 갈로, 일명 아리스토텔레라 불린 바로 그 사람이 맡았고, 바바리에 따르면 이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다).
  연회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화려함 덕분으로 연극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 소문은 피렌체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물론 곧이곧대로 모두 믿을 바는 못 디지만, 당시 모데나의 총독으로 있던 필리포데 네를리는 마키아벨리에게 부친 1525년 2월 22일자 편지에서 농담조의 과장을 섞어 이렇게 쓰고 있다.  (자네의 희극 작품은 어디에서나 이름을 날리고 있네.  내가 이러한 소문을 친구의 편지에서 전해 들었다고는 생각지 말게나.  난 그것을 여행객들로부터 들었다네.  그들은 길을 가며 산 프레디아노 성문에서의 그 화려했던 장관과 그 멋있었던 광경들을 외치고 다닐 정도라네.  그러한 장관을 어찌 토스카나 안에서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겠나.  여기에서도, 그리고 나아가 알프스너머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그런데 자신이 도덕적으로 뭔가 낫다는, 위선이랄까 혹은 질시랄까에서 (클리치아)와 그 저자를 구설수에 올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네를리 자신이 바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농담 섞인 축하의 말을 바로 며칠 후,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 바르베라의 (꽁무니를 쫓아 다니면서) (그게 무슨 잘난 일이라고 그 이야기를 희극으로) 썼느냐고 비난하며 (마키아)의 행동을 심하게 나무랐다.  그는 독설을 끝내면서, 델 네로에게 (자신의 이름은 말하지 말고) 무언가 좀 조치를 취해 보라고 촉구하였다.  델 네로는 니콜로의 처남이었으므로, 이는 가계내에서 그를 귀찮게 만들려는 위선적 간계였던 셈이다.
  그 무렵 이미 수정 작업이 끝난 (피렌체사)를 직접 헌정하려는 생각에서, 마키아벨리는 (클리치아)의 상연 얼마 후 로마로 돌아가는 친구 베토리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당시 dEjs 다른 생각들을 심중에 품고 있었음이 분명한 교황은 베토리를 보자마자 즉시 마키아벨리의 근황과 함께 책이 끝났는지의 여부를 물어왔다.  베토리는 로렌초의 죽음까지 작업이 완료되었으며, 자신이 그 일부를 읽어보았는데, 좋은 것 같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혼란스러운 정황이 아니었다면 벌써 직접 그것을 헌정하러 왔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교황은 일단 겉으로는 (아무렴, 와야지! 어째 그 책은 반갑고 기쁘게 읽힐 것 같구먼)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베토리는 질시 때문인지 차가운 성격 탓인지는 모르지만, 교황 레오네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마키아벨리의 희망을 서둘러 미리 막아버리려고 하였다.  교황의 말을 전한 3월 8일자 편지에서, 그는 (시기가 책을 읽고 바치기에는 좋지 않기 때문에) 과연 직접 책을 들고 와야 하는지 어떤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하며 억지로 김을 빼놓았다.  그리고는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최근 교황의 기분으로 보아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 뻔한 일에 자네를 굳이 오라고 하고 싶지가 않다네.) 그는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도 똑같은 내용을 써보냈다.
  책을 읽고 그것을 바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 얼마 전인 2월 24일, 제국 군은 파비아에서 프랑스 군을 무찔렀고, 그로 인해 결국 교황은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와 연합을 뜻한다고 보이는 몇몇 조약들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왕자신은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막강한 힘을 가진 에스파냐의 위협아래 놓이게 되었다.  클레멘테는 돈도 군대도 잃은 채, 정복자의 뜻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처지에 놓였다.  교황은 레오네에게는 영민함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다만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을 의미할 뿐인 갈팡질팡 정책을 밀고 나가, 서둘러 4월 초하루에 황제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 덕분으로, 교황과 황제는 당시 (카이사르의 그늘 아래) 프렌체스코 스포르차(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아버지인 프란체스코(1401-66)가 아니라, 로도비코의 둘째아들인 프렌체스 마리아를 가리킨다.  그는 1521-1524년, 1529-1535년 동안에 밀라노 공이었다-옮긴이)가 소유하고 있던 밀라노 공국을 함께 지키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황제는 교회령 국가들 (그가 페라라 공으로부터 빼앗아 주겠다고 약속한 레초를 포함해서)과 피렌체 국 그리고 그곳에서 메디치 가의 세력을 지켜주겠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같은 조약에 따르면, 교회령 국가를 지켜주고 메디치 가의 지배를 인정해 주는 대가로 피렌체인들은 관례가 그렇듯이 황제에게 십만 두카토를 지불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피렌체에서 교황, 황제 동맹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축제가 아무런 흥을 내지 못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평화를 희생해서 교황의 안전을 보증받았던 조약도 그 안도감이 오래가지 않았다.  항제는 총독을 통해 자신 명의로 된 조약을 비준하였으나, 헤초 문제를 비롯한 부속 조항들에 대해서는 비준이 연기되었다.  황제의 좋지 않은 성품을 알리는 징후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 가운데에서 교황은 당시 이미 유럽 정치의 중심 축이 되어 있던 마드리드궁에 조카인 살비아티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여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동행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과거에 추기경에 대한 충성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는 (전술론)이 인쇄되었을 때, 로마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그이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추기경의 궁에서 일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그의 부친인 야코포였다.  그는 기품 있는 노인이자 훌륭한 시민이었다.  추기경의 자줏빛 옷조차도 언제나 아버지의 꾸지람을 면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5월 3일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마키아벨리를 거명한 사람도 바로 야코포였다.  그리고 13일에 그는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었다.  (네가 더불어 자문을 구할 만한 서기관으로 내가 보기엔 니콜로 마키아벨 리가 제일 적임자인 듯하구나.  내가 이에 대해 성하께 말씀올렸으나 아직 결정을 내리시지 않고 계신다.  어떻게 하실지 두고 보자꾸나.)
  그 기품 있는 노인은 바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품행과 풍속에서 매우 엄격한 사람이어서, 아들의 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무뚝뚝하게 꾸짖곤 하였다.  이로 보아, 이러한 측면에서 니콜로에게 붙어다니던 악평은 사람들이 주장하던 바와는 달리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야코포가 떠도는 얘기들보다는 사실적 측면을 더 중시했든지.  하지만 교황의 망설임은 결국 그 제의를 거절하는 쪽으로 가고 말았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정치적인 혹은 도덕적인 생각에서 였는지 아니면 그를 다른 데 쓰기 위함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야코포가 아들에게 보낸 5월 17일자 편지에서 (교황께서 꺼려하니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만 접어야 되겠다)고 한 말이나, 24일자 편지에서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고 한 말뿐이다.  애석할지니!  그가 서기관으로 동행했더라면, 그 사행은 새로운 의미를 가졌을 텐데.  새로운 경험을 한 마키아벨리의 머리에서 또 무엇이 나왔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처럼 이베리아 행이 좌절되고, 아마 모든 일이 이미 끝난 뒤 이를 알게 되었을 법한 마키아벨리는 결국 로마로 가서 (피렌체사)를 교황에게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5월의 마지막 며칠 간을 이용하여 길을 떠났다.  교황이 그를 맞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친절하고 다정한 것이었으리라는 점은 6월 9일 클레멘테가 자신의 사금고에서 그에게 120두카토 금화를 답례로 주도록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로마에 올 때 책 하나만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 특유의 열정으로 피력하여 교황의 냉정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를 단시간 내에 돌려놓는 데 성공햇던 것이다.  교황은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자신의 정책 어디가 나쁜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스스로 우유부단했던 관계로, 언제나 결단력 있는 정복자의 희생물이었던 것이 지금까지 그의 타성적 행로였다.  인색한 성품 때문에 병사라고 제대로 있을 리 없었고, 레오네가 했던 것과는 달리 관직가 성직록 판매도 주저하니 수중에 돈도 있을리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나쁜 교황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훌륭한 세속 군주가 되기를 망설이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미 해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병대 제도였다.  이야말로 그의 위대한 생각이자 오래전부터 내건 깃발이 아니었던가!  교황과 자문관들, 살비아티, 사돌레토, 심지어는 목석 같은 숌버그조차도 설복되어 그의 말에 넘어가버렸다.  로마냐 사람들을 무장시켜라!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사돌레토가 쓴 교황의 급전을 가지고 당시 파엔차에 머물고 있었던 로마냐 총독, 즉 친구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에게로 보내졌다.  비상한 질병에는 비상한 치유책이 요구된다는 것이  그 급보의 요지였다.  따라서 총독은 니콜로 마키아벨 리가 말하는 바를 주의 깊게 듣고 즉시 그에 대한 의견을 적어 보내야만 했다.  그것은 중대한 일이었다.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사안은 매우 중대하며, 바로 여기에 교회령 국가뿐 아니라 전 이탈리아, 나아가서는 거의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의 안위가 달려 있노라.)  이제 남은 일은 이러한 열정과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열정이 과연 총독의 냉담함을 녹일 것이지 아니면 도리어 얼어붙게 할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온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오는 이유에 대해서, 귀차르디니는 이미 로마의 교황궁에 심어둔 자신의 측근 체사체 콜롬보를 통해 듣고 있었다.  그는 6월 18일 자로 쓴 그에 대한 답장에서, 즉시 그의 영민하고도 실제적인 마음에 맨 처음 떠오른 의문을 써 보냈다.  (나를 대신하여 교황이 어떤 목적으로 이를 계획했는지를 물어보라.  만약 그것이 당면한 위험을 면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조치는 도저히 제때 시행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멀리 보고 있었고 귀차르디니는 가까운 것을 보고 있었다.  교황은 항상 그랬듯이 목표를 단기적인 데 둘 것인지 장기적인 데 둘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사전 귀뜀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엔차에 도착하였다.  그는 새로운 열정으로 충만된 책 6월 10일이나 11일에 로마를 떠났던 것 같다. (피렌체사)에 대한 보수를 좀더 올려 받으려는 자신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기다려보지도 않은 상태에서였다.  21일 귀차르디니는 그의 측근에게 교황의 사절이 왔으며 그의 임무를 들었다고 썼다.  이 첫 편지에서 그는 적어도 그러한 계획에 담긴 위대하고도 고귀한 정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고 말한다.  (만일 그것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성하께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도 가장 쓸모 있고 칭송할 만한 업적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효과를 논하는 데 이르자, 그는 자신의 용의주도하고 냉혹한 실제론에 입각하여 친구의 고결한 이상론을 서둘러 격하시켰다.  그는 그 조치가 성공할 경우 뒤따를 이익은 (그것이 명약관화하다는 이유로) 뒤로 제쳐두고, 또 비록 이 사람들의 품성이 자기들과는 다르다 해도, 자신에게는 (사람들을 무장시키는 것이 별로 어렵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같은 것도 없음)을 미리 전제한 뒤, 그는 이 조치가 합당치 않은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하였다.  그 지방을 분열시키는 뿌리깊은 사적, 정치적 반목, 사람들의 애국심을 전제하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안과는 달리 교회를 달가워하지 않는 그곳 사람들의 성향, 교황의 복안과는 달리 빈한한 마을들에서 끌어모으기가 쉽지 않을 관련 비용 등등.  그는 이러한 난점들을 제시하는 것은 반드시 교황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만일 이 같은 것이 충분히 감안된 다음이라면, 그것을 무시하든 또는 그에 대처하든 간에 (성하께서 한때 당신의 영광과 위해함을 드높이리라 생각하셨던 그 계획에 합당하도록 모든 성심 성의를 아끼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교황에게 보일 목적으로 귀차르디니가 그의 측근에게 쓴 6월 23일자 편지에도 같은 이유들이 그리 다르지 않은 말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따로 보낸 훈령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최대한 면밀하게 교황의 언행을 관찰하여 나에게 그 모든 것을 알려주기 바라네.)  그는 물론 숌버그와 살비아티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원했을 것이다.  다음날, 마키아벨리는 사돌레토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새로운 편지 한 통을 써 보냈고(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이 역시 교황에게 전해졌다.  그의 편지는 문제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베르니의 유명한 소네트에서 희화화된 바 있는 클레멘테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망설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파엔차에서는 귀차르디니아 마키아벨리가 서로 상반되는 이유로 고민하며 교황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어느 정도까지 이 친구의 실제적인 논변에 설복당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이 사안은 물론 다른 모든 문제에서도 그 소심한 교황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불운과 오해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총독 친구와의 토론과 함께, 그가 제공하는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에서 위안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가운데서도 멀리 두고 온 가족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은행에 예금하라고 얼마간의 돈을 보내려 했던 것이다.  이 돈은 그 당시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받았던 것 중 상당 부분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즉 바로 (피렌체사)의 저술에서 장차 딸 바치나의 결혼 지참금으로 쓰일 돈이 나왔던 것이다.  아니 언젠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7월 8일, 교황은 여전히 숙고의 결과를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귀차르디니는 측근으로하여금 그에게 자신들이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하명도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므로, 부디 사돌레토에게 빨리 명을 전하도록 재촉해 주십사)고 (마키아벨리의 안에 대한 결정)을 재차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사돌레토는 이미 6일자로 마키아벨리에게 그와 귀차르디니의 편지를 교황에게 전했다는 소식을 알려온 바 있다.  이쨌든 교황의 답은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날을 잡아 다시금 문의하였으나, 답은 여전히 더 생각해야겠으니 마키아벨리는 당분간 파엔차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그 달 26일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나, 기다릴 만큼은 기다렸다는 생각이 든 데다가 (자신의 일도 보아야 했으므로)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래서 귀차르디니는 콜롬보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교황에게 알리고, 덧붙여서 (성하의 명이 있을 시엔 언제라도 그곳으로 달려갈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점을 주지케 하라고 지시하였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이미 교황 자신보다 앞서 그의 결정, 아니 그의 끝없는 망설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기 작가라면 누구나 그가 새로운 실망감으로 크게 가슴 아파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마음속으로 아픔을 느꼈을 법하지마나 그러한 심정을 전하는 말은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있다.  게다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가 실제적 성향의 귀차르디니에 의해 제기된 구체적 반론들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는지도 알지 못한다.  귀차르디니는 그러한 계획이 훌륭한 것이라는 점은 부인치 않았으나, 다만 그것이 바로 그 시점에 교회령 국가의 사람들, 특히 그 지방의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데서는 반대의 뜻을 나타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이 점에서 다소나마 위안을 얻었으리라.
  비록 실망하기는 했어도, 그는 이러한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귀차르디니가 그에게 베풀어준 친절과 환대가 아니다.  그는 전지 작가들의 말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를 결코 차갑게 대하지 않았다.  사실, 총독 관저의 한 지붕 아래 같이 머물렀을 파엔차에서의 이렇게 오랜 체류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더욱 다정하고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총독은 자신의 거만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 편지에서 친구가 그를 (고명한)이라는 경칭을 붙여 부른 데 대해 그만두지 않으면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겠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한 (품위있는 궁인)이 그에게 보여준 다른 종류의 환대인 것이다.  7월 2일,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에게 쓴 편지에서 익살 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네가 떠난 후, 마리스코타가 자네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면서 자네의 예법과 언변을 격찬했지 뭔가.  나 역시 자네에게 항상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터라 듣기가 좋았다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독같은 어조로 8월 3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내가 마리스코타로부터 얼마나 찬사를 받았는지를 전해 준 자네의 편지를 받고 보니,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내가 받아왔던 어떤 칭찬보다도 더 기쁘다네.)
  이제 이 두 명의 위대한 정치가는 서로 더 자주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파엔차 체류 동안 친구에게 약속하기를, 그가 직접 둘러보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대리인의 자격으로 사놓았던 부동산 한 건과 앞으로 살까 계획하고 있는 다른 한 건을 둘러보고 그 결과를 알려주기로 한 바 있었다.  그는 8월 3일자로 현지를 찾아본 소감을 적어보냈는데, 여기에는 그가 산 카쉬아노의 시골에서 생활한 덕을 보았다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피노키에토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얘기하겠네(여기서 'Finocchieto'란 회향풀이나 그 열매를 뜻하는 'fnocchio'에다 축소형 어미를 단 것으로, '피노키에토로 시작한다'는 말은 당시 식사 끝에 관습적으로 붙이는 어구였다.  또한 피노키오란 말에는 남색가라는 속어적 듯도 들어 있으므로,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뉘앙스들을 버무려 귀차르디니에게 농담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옮긴이).  무엇보다 먼저 얘기하고 싶은 점은 부근 3밀리오 안에는 무언가 괜찮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일세.  한마디로 흡사 바위투성이의 아라비아 Arabia Petreia(요즘으로 보면 아카바 북쪽, 요르단 남서부의 험준한 지역.  그 중심지가 페트라 Petra이기 때문에 'Petreia'란 형용사형이 스이고 있다-옮긴이)와 같다고나 할까.  집은 나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생활에 불편하게 보여서 결코 좋다고도 하기 힘드네.  방이 비좁은 데다 창문은 너무 높다랗게 붙어 있어서, 마치 지하 감옥 같은 느낌이네.  앞쪽에는 풀밭이랄까 하는 것이 약간 있더군.  나가는 길은 모두가 가파른데, 단지 한군대만이 100브라초('braccio'란 토스카나 지방에서 쓰던 넓이의 단위로, 1브라초는 약 0.3364평방미터이다-옮긴이) 가량 평지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네.  게다가 언덕배기 아래에 묻혀 있어서 기것해야 시야가 반 밀리오나 된까...) 그는 귀차르디니에게 이 당을 파는 편이 낫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팔든 그대로 가지고 있든 당분간은 이것저것 주변 시설들을 정비해 두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이렇게 주변 시설을 정비해 두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중 어느쪽으로든 유익할 듯 싶네.  첫째, 만일 자네가 그것을 판다고 했을 때, 그곳을 둘러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 흥정을 붙일 수 있을 것일세.  지금 상태로는... 자네처럼 물건을 보지 않았던 사람 같으면 모를까 누구도 그것을 사려고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네.  설사 자네가 그것을 그냥 가지고 있겠다고 해도, 그렇게 정비를 해둠으로써 이곳의 질 좋은 포도주를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을 것이고, 자네가 언젠가 이곳에 오더라도 실망해서 죽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귀차르디니의 무뚝뚝한 마음을 자극하고 질러대는 익살 기가 다분히 묻어 있다.  이에 대해 귀차르디니 역시 피노키에토의 집 스스로가 일인칭으로 말하도록 하는 익살 조의 훈계담으로 답하였다.  그 집 아니 그곳 시골의 요정은 마키아벨리의 심술에 찬 평가를 평소 누구에게나 잘 보이려 하는 쉬운 여자와 어울리곤 하는 그의 습관 탓으로 돌렸다.  오직 자신의 주인만을 섬기고자 하는 정숙한 여인의 무덤덤함을 그는 높이 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외양에 머물지 말고 그 본질을 찾았어야만 했다.  귀차르디니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자네의 바르바라가 자네에게 깨닫게 해 주었어야 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비록 그 이름은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뜻하지만(이탈리아어로 '바르바라 barbara'란 야만적이라는 뜻.  여기서 그녀의 이름을 본래의 바르베라가 아닌 바르바라로 바꾸어 부른 것도 이런 의도에서이다-옮긴이),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안에는 온 도시를 감싸안을 만한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라네.)
  바르베라.  바로 여기에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망각과 교황의 미적거림과 계속해서 마키아벨리의 인생사를 넘보는 희생과 치욕을 잊어버리는 길이 있었다.  바르베라와 그 사이의 쓴 사랑 이야기는 마키아벨리가 보낸 도시에서의 단순한 심심풀이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한 이야기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바로 같은 달 8월에 배당관 accopiatore(르네상스가 피렌체의 관직 선출 과정에서 관직 보유의 자격자들을 각 관직으로 배당하여 정부를 구성하는 책임을 맡은 관리-옮긴이)들이 마침내 그의 피선거권을 되살려주었을 때(그렇다고 그가 더 이상 서기관 직에 머물지 않고 정무관이나 곤팔로니에레라도 되어서 정무궁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필리포 데 네를리는 그 특유의 심술 섞인 어조로 그같이 좋은 일은 다름아닌 (바르베리아 Barberia(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대를 가리키는 옛 이름.  역시 앞의 '바르바라' 경우처럼, 마키아벨리의 애인 이름을 슬쩍 바꾸어 그를 놀리기 위해 쓴 말-옮긴이)로부터) 온 호의의 결과라고 편지에서 그를 놀릴 정도였다.
  어쨌든 이제 운명은 그에게 호의적인 듯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피렌체사)에 대한 보수를 올리기 위해 감행했던 짧은 로마 여행 동안 뿌려놓았던 씨앗은 싹이 터서 곧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었다.  지난 7월말, 프란체스코 델 네로는 그에게 필리포 스트로치가 교황에게서 좋은 시식을 전해 들었다고 편지로 알려왔다.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학 당국자는 교황에게서 (마키아벨리에게 스투디오화로 100피오리노가 아니라 금화로 100두카토를 지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학교 금화가 아닌 진짜 금화로 100피오리노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원래보다 곱절의 돈이었다.
  뒤이어 8월 19일, 레반테 감독위원회는 한 베네치아인이 일단의 피렌체 상인들에게 가한 투르크식 덮어씌우기(원래 투르크인들이 오리엔트 지방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 데서 나온 말-옮긴이) 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를 베네치아로 파견하였다.  이는 별 것 아닌 임무였으나, 그로서는 머리에서 곰팡내를 걷어내고 아울러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을)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는 또한 가는 길에 총독 친구에게 들러 그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고(그가 귀차르디니에게 편지에서 썼던 것처럼), 더불어 당시 날로 절박해지고 있던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소화를 돕고 변을 잘 통하게 해준다는 유명한 환약의 처방전을 그에게 써 보냈는데, 이는 평소에 그로 하여금 (원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혹은 그토록 잦았던 일신상의 쓰라린 일들을 삭이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렇게 해서 그는 베네치아로 갔고 일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베네치아 주재 교황 사절이나, 친구인 베토리가 만나보라고 한 루도비코카노사 주교 등과 함께 정치에 관해 얘기를 나우었다.  나는 그가 이외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설사 그랬다 해도 필리포 데 네를 리가 평소의 냉소적인 어투로 편지에서 섰듯이 이삼천 두카토씩이나 따지는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9월 16일, 그는 되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났다.  오는 길에 그가 총독 친구와 같이 보낸 날은 불과 며칠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피렌체에 도착한 것은 그 달 말이었다.  돌아온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귀차르디니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편지들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만드라골라)이다.  지금은 유실되었지만 8월 12일자 편지에서 귀차르디니는 이 작품을 크게 칭찬하면서 그곳 파엔차에서 무대에 올리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를 했다.  앞서 마키아벨리는 그 희극의 대본 한 부를 그에게 증정했던(직접 혹은 우편으로) 것이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자네가 메쎄르 니차를 좋아한다니 기쁘구먼.  만약 이번 사육제 때에 그것을 상연하고 싶다면, 우리가 가서 도와줌세)라고 답하였다.  그 뒤 10월 13일, 귀차르디니는 재차 편지를 보내, 스스로 피렌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게 작품 속의 몇몇 피렌체식 농담과 속담류의 뜻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새로 편지를 써서 이에 답하였는데, 이야말로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재치가 넘친다.  (사실 난 이 써레 작업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마치 티모테오 신부처럼 수많은 책들을 훑어 보았다네.  결국 부르키엘로의 작품들 속에서 나에게 딱 어울리는 것을 찾아냈지.  그의 소네트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네.
  황제가 쳐들어올까 두려워
  실패 냄비를 사절로 보냈지...
  하지만 피에솔레의 써레도 뒤따라갔다네...
  이 소네트는 나에게는 매우 불가사의하게 보이는데, 잘 살펴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실패 냄비를 보냈지만 지금은 실패가 마카로니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지.  나에게는 이 점이야말로 시간은 돌고 돌아도 사람은 언제나 같은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이네. (...)   부르키엘로가 피에솔레의 써레를 들고 나온 것은 그것이 토스카나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네.  티투스 리비우스의 두 번째 십년기에서 보듯이, 이 농기구를 처음으로 고안해 낸 게 바로 피에솔레 사람들 아닌가 말이야.  어느 날 한 농부가 써레로 땅을 고르고 있었는데, 전에는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두꺼비 한 마리가 깜짝 놀라서 저게 뭔가 하고 지켜보고 있었지.  그렇데, 아 그 써레란 놈이 다가오더니 발톱으로 등을 두 번도 더 할퀴어대는 것 아니겠나.  써레가 지나간 후, 등을 심하게 긁힌 것을 안 두꺼비는 이렇게 외쳤다지.  '다시는 돌아오지 마!' 이 외침 소리는 세월 따라 속담이 되어,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때면 '두꺼비가 써레에게 말하듯이'라고 한다네.)
  우리는 여기서 익살 조의 박식(리비우스의 두 번째 십년기까지도!)과 학자연하는 희극적 색조와 교화의 대 황제 정책을 향한 풍자가 두드러짐을 본다.  마카로니란 사행 길에 이 훌륭한 서기장을 대동하지 못했던 살비아티 추기경을 뜻한다(마카로니(이탈리아어로는 마케로니 maccheroni)에는 바보, 멍청이란 뜻도 숨어 있다-옮긴이).  그는 이 사행에서 귀차르디니가 (이탈리아사)에서 말했듯이 (그는 자신의 주인보다 더 정력적이지도 확고하지도 못했다).  그의 주인이란 물론 교황 클레멘테였다.  마키아벨리의 편지들이 모두가 걸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이 마지막 편지들은 메쎄르 니차의 말을 빌리자면 갈수록 빛이 난다.  그는 10월 20일 직후에 슨 편지에서, 교황으로부터 귀차르디니의 딸들에게 줄 지참금을 더 많이 받아내는 방법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하다가,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모로네(밀라노 공의 비서 지롤라모 모로네.  21장 첫부분 참조-옮긴이)는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 공국은 빼앗기고 말았지.  그리고 그가 무력해졌으니 다른 무든 군주들도 그럴 것이고, 달리 무슨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네.  '그저 하늘의 뜻일 뿐.'
  알라냐에서 돌아오는 백합을 보네.
  그리고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등등...
  (이 시구가 비유하고 있는 것은 미남왕 필립(1268-1314)과 교황들 간에 일어났던 분쟁이다.  알라냐란 프랑스 사제들에 대한 왕권의 확대를 추구한 필립 왕과 불화를 빚었던 교황 보니파초 8세의 궁전이 있었던 로마 동남쪽의 아냐니를, 그리고 백합이란 프랑스를 말하며, 알라냐에서 돌아오는 백합(프랑스 왕가의 문장)이란 필립 왕의 사절이었던 길로메 드 노가레가 교황을 모욕하고 돌아온 사건을 비유하고 있다.  두 번재 줄의 구절을 완성하면,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 (본문의 바로 다음을 볼 것)인데, 이는 단테의 (신곡) (연옥편), XX, vv. 86-87에 나오는 구절을 약간 변형시킨 것으로, 여기서 그는 위그 카페의 입을 빌려 자신의 후손들을 꾸짖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지적 맥락을 감안할 때, 결국 마키아벨리는 이 시를 통해, 이탈리아가 설사 프랑스의 편에 선다고 해도 스스로를 위협하는 신성로마 황제 칼 5세의 세력을 제어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옮긴이)
  '이 시구는 자네도 알겠지.  나머지는 혼자 스스로 읽어보게나.'  우리 한번 즐거운 사육제를 보내자구.  바르베라에게는 방 하나를 주어 탁발승들과 지내도록 하겠네.  만약 그들이 그녀에게 빠지지 않는다면 돈을 받지 않겠어.  마리스코타에게 날 천거해서 연극이 어디서 상연될 것인지 알게 해주게나.  자네에게 좋은 때가 언제쯤인지도.  (피렌체사)에 대한 보수를 100두카토까지 올려 받았다네.  이제 다시 글쓰기가 시작되었고, 난 우리를 이 자리로 오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 군주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중이라네.)
  (그저 하늘의 뜻일 뿐.)  이제 비극은 5막에 이르렀고, 그 주제는 이탈리아였다.  그 비극적 힘은 모두 그의 이 짤막한 글 속에 들어 있다.  (신변잡기)로부터 파멸적인 정책에 대한 묵시론적인 보편 판단으로, 그리고 단테가 놀라운 예견력으로,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
  라고 읊은 시구 속의 한 줄기 섬광 같은 예언으로부터 만사 태평의 사육제적 즐거움 속으로 갑작스레 옮겨가는 그 구절들 속에 말이다.  바로 여기에 마키아벨리의 모든 것이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그의 시대와 이탈리아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그같은 말을 한 뒤, 편지의 말미에다 농 반 진 반으로 이렇게 서명하였다.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이며 비극 작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  그야말로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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