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는 언제나 법률상의 결점을 시민들의 능력으로 보완해 왔으나, 이 즈음에 들어 상층 시민 cittadini migliori일수록 공직에서 더 소외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평시민들의 시기로 인해 마음이 이반되고 불만과 경계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재력을 국가를 위해 쓰려들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이익 관계와 세력간의 각축속에서 구습들이야말로 공화국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었다. 극히 짧은 임기의 정무위원을 추첨으로 선출하는 이상한 방식 때문에, 종종 아무런 능력도 경험도 없는 인물들이 권좌에 앉게 될 뿐 아니라 그들 역시 공직에 대한 경험을 쌓기도 전에 그 직에서 물러아야만 했다. 이러저러한 난맥상이 초래한 결과는 당시 공화국이 겪은 재난들 속에서 잘 나타나 있었다.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결국 모두들 정부를 개혁하고자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국정의 기초이자 상징인 대평의회를 폐지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심 그것을 무척 바라는 사라들 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평시민 정부의 틀을 유지하되 베네치아의 소평의회 I Pregiti(원로원적 성격을 띤 베네치아의 통치기구. 베네치아에서는 pregado라고 함 - 옮긴이)와같이 거의 유력 시민 회의 il consiglio di ottimati에 해당하는 소수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직제을 도입하여 공화국의 중대 현안을 다루자는 안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평시민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으므로, 결국은 당분간 종신제 곤팔로니에레를 임명하여 시기를 봐가면 좀 덤 충분한 고려 아래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절충안에 불과하였다. 최초의 (종신 곤팔로니에레)를 선택하는 일은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력 시민과 평시민의 요구 사이에 끼인 상태였으므로, 결국 평범한 인물이 권좌에 오르는 것이 낙착되었다. 선출은 대평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가장 똑똑한 인물보다는 평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뽑힐 가능성이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 여러 계층이 두루 받아들일만한 성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에로 소데니가 바로 그 같은 인물이었다. 명문가 출신의 상층 시민이었던 그는 평화기였다면 자신의 소임을 재무 잘 해나갈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서나 사절에서나 소임을 매우 잘 해나갈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서나 사절에서나 자기 차례를 거부한 적이 없었으므로 평시민 정부의 강력하나 지지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공직에 기용되고, 또 그것이 다른 인물들의 공직 기피 때문임을 알지 못한)평시민들은 결코 유력 시민들이 만족스러워 할 만한 선택은 아니었으나, 모든 점을 감안할 때 공화국으로서는 괜찮은 결과였다.
이는 마키아벨리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성실하고 헌신적이 자세로 국정에 임했던 마키아벨리는 곧 그와 비슷한 성향인 소데리니의 눈에 띄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마키아벨리의 날카로움, 기민함, 단호함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이 모든 품성은 관대하기만 해서는 안되는 곤팔로니에게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나쁜 점은 나타내고 좋은 점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약간 건방진 듯하면서 장난기 어린 태도에다, 처음 만남 평범한 사람들과는 잘 부딪혀서 그들에게 자신을 오만하거나 혹은 묘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그런 성품 때문에, 우리의 니콜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반면, 그를 오랫동안 잘 알고 그의 예의바름과 재능을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뛰어난 인물로 비쳤다. 우리는 훗날 그가 소데리니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과의 친분을 맺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과거에 소데리나가 여기저기 많은 공적을 옮겨 다니는 동안, 서기국 일으 통해 그와 지속적으로 접촉한 바 있었다. 또한 바로 전에 있었던 우르비노 사절단에서 그의 동생인 주교와 동행했을때에도 마키아벨리는 곧 주교의 마음을 얻었었는데, 이 역시 신임 곤팔로니에레의 마음을 열게 해준 열쇠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그의 취임 즉시 10인위원회 명의의 공한과 함께 사적인 축하의 편지를 쓴 것으로 보이나. 그가 소데리니의 동생인 주교에게 라틴어로 편지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소데리니의 동생인 주교에게 라틴어로 격식을 갖추어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리고 주교는 곧 답장을 보내어, 그의 (품위 있는)편지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가문과 국가를 위해 애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때쯤 발렌티노는 왕에게 자신의 변호하기 위해 급히 가서는 프랑스식의 무책임한 사면뿐 아니라, 이제는 희생양이 되어버린 비텔로초로부터 치타 디 카스텔로를 돌려받고, 나아가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으로 왕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벤티볼리오로부터 볼로냐를 차지해도 좋다는 백지 위임장을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보르자의 이러한 복귀는 피렌체인들에게 다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를 더 두려워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의 성공 도구였던 소군주들, 즉 비텔리를 비롯하여 오르시니 가, 빌리오니 가,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판돌표 페트루치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보르자가 자신들의 무덤을 파는 데 오히려 일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이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는지 숙고하기 시작하였다.
보르자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은 피렌체 공화국에게나 어제의 적들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들은 판돌포 페트루치를 통해 접근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파랑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피렌체는 이러한 기미가 분명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종립을 지키면서 발렌티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발렌티노가 피렌체와의 동맹을 모색하기 위해 사절을 이몰라로 보내 주기를 청했을 때에도, 그들은 자산들이 알레싼드로 6세의 환속과 건달 아들을 싫어하는 이상으로 그와의 동맹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그와 계속 접촉하면서 가까이서 그들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보르자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파악해 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마키아벨리를 그에게로 보냈다.
그는 최대한 속력으로 말을 달리라는 훈령을 받고 1502년 10월 6일 길을 떠났다. 그는 이 훈령을 곧이곧대로 따랐는데, 이는 그의 일행이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자 스카르페리아에서 짐과 하인들을 뒤에 남겨둔 빌린 말을 타고 이몰라까지 단신으로 달려간 데서 잘 나타난다. 다음날 도착 즉시 그는 (승마복 차림 그대로)발렌티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몇 마디 서로 반가운 듯이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임무를 설명하였다. 말의 요점인즉, 피렌체인들은 오르시니 가와 빌리오니 가, 빌텔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마조네에서 소집된 구수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프랑스 왕 및 wqkffpsxlsh와의 친선을 확고히 지키기 위해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발렌티노는 이러한 배려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는 한때 자신과 같은 편이었다가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자신과 공화국 모두에게 손해를 입히고 약탈을 자행하고 배신을 일삼았다고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그 (패잔병 집단)을 애써 경멸하면서, 그들이 부추겼던 우르비노 공국의 반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설사 그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을 다시 되찾는 방법까지 잊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왕이 이탈리아에 있고 교황이 여전히 살아 잇는 한, 이 둘이 (환히 밝혀주는 불을 끌 만큼 물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다면 결코 자신을 쉽사리 없애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과 공화국 사이를이간질하는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를 제거한 뒤, 서롤 힘을 합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 리가 (그러한 동맹의 세부 사항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하였다.)
다음날,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왕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내용의 프랑스 발 편지를 몇 통 보여주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발렌티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아는 마키아벨리는 편지의 서명을 이전에 프랑스로부터 받은 편지들의 경우와 비교 확인해 보라고 10인 위원회에 요청하는 시중함을 보였다. 또한 그는 발렌티노의 새로운 동맹 제안을 전했으며, 아울러 용병 대장들의 변절 이후 얼 마 안 남은 군대의 세부사항을 보명, 기병, 포병, 현재 소집중인 새로운 군대, 그리고 다른국가와의 관계, 자신의 신민들과의 관계별로 조목조목 전달하였따.
벌써 이 첫 번째의 편지에서부터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니콜로 발로리가 이에 앞장섰다. 마키아벨리는 이미 피스토이아에 사절로 가 잇는 동안 일을 잘 처리해 그의 신임을 얻은 바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정무위원의 위치에 올라 젊은 서기장을 치하하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그는 거듭거듭 마키아벨리의 편지쓰기와 판단력을 칭찬해 마지 않앗다. 그는 편지에서 (모두가 당신만큼만 한다면 실수는 일어나지 않을 텐데!)라고 썼다. 또 그는 11월 1일 공직에 취임할 예정인 새 곤팔로니에레에게 얘기하여 마키아벨리에겍 30두카토의 격려금을 보내도록 하엿다. 그 직후 쓴 편지에서 그는 돈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노를 다루는 방법이나 출중한 판단력에다 힘이 넘치는 편지 내용에 대한 자신의 공적. 사적 찬사로써 모자라는 액수를 메우게 해달라고 말하였다.
비아조 부오나코르시 역시 그를 찬양하였는데, 언제나 니콜로의 예찬자였던 그는 때로는 연인의 질투심이 묻어나는 듯한 편지를 쓰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번은 그조차도 감연히 마키아벨리를 비판하고 나선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편지를 씀에 있어서 자신의 그 간명하고 명쾌한 판단은 좀 유보해 두고 단지 사실들을 전달하는데 거쳤어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비아조가 지적한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당시 발로리가 칭찬해 마지 않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사람 좋은 비아조가 그를 비판한 것은 그가 마키아벨리를 경외했기 때문이고 그러한 경외심은 또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러한 애정은 이성적 판단보다 더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이는 다음의 솔직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부디 신의 가호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를.)
적어도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니콜로는 그 건달 같은 군주의 모든 행적을 자신의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되씹어봄으로써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뤼지 델라 스투파가 자신이 사절로 가 있던 플랑스로부터 니콜로에게 쓴 편지 속에서 (기류의 변화와 함계 이러한 품성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예리하게 만든다) 고 말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군주를 좋아하엿따. 그의 이름은 체사레엿고 그의 일생은 그 이름에 값하는 것이었다. 그의 군기에는 (체사레냐 무(무) 냐)라는 명문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탈리아어 (체사레 Cesare)란 라틴어 (카이사르 Caesar), 즉 황제란 뜻임 - 옮긴이). 그는 정복과 계략을 거듭하면서 (하늘과 행운의 도움으로) 피렌체 성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그때 이후 줄곧 마키아벨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그가 마키아벨래의 호감을 얻게 된 것은 여전히 승리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던 몬테펠트로의 웅장한 성채에서 그를 접견했을 때였다. 용병 대장들과 휘하 소국들과 그리고 운명까지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당시에조차도 그를 좋아하는 마키아벨리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10월 17일 적들은 그나마 그의 수중에 남아 있던 소수의 군세마저 궤멸시켜 버렷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빼앗았던 모든 것을 잃은 채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처지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참고 숨기고 가다리면서, 또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신민을 다독거리고 요새를 강화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체사레는 그 사이사이에 이미 평화를 위태롭게 할 조짐을 보이고 잇던 반군 수장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속삭임으로써 (그, 일부를 이탈케) 하력고 시도하였다. 그는 많은 비용을 감수하면서, 프랑스, 로마, 밀라노, 레라라 등지에 끊임없이 전령을 보내 협상을 하거나 무기와 친선과 군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사용한 수단과 그 결과를 만사에서 절약을 지향하는 피렌체 공화국의 경우와 비교하고 있다. 그는 이몰라체류 2주쯤 되는 어느 날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제가 여기 온 이후, 그는 우리 정부가 두 해 동안에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의 큰 금액을 전령과 사절의 비용으로 다 써버렸습니다.) 그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동료 시민들이 스스로의 지지갑에서 돈을 지불해야 한는 반면, 체사레의 돈은 교황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며, 교황은 추기경들을 마치 닭장 속의 닭처럼( 이 비유는 베체치아 대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좋은 값에 만들어서는 잔치에 쓸 요량으로 살찌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마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보다 악한 정도에서 열 배는 아래인 어떤 피렌체인은 단지 그가 교수대에 서는 것을 보고 싶어했겠지만 말이다. 카미아벨리가 발렌티노를 좋아한 것은 그가 강력한 국가를 이룩한 상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발렌티노 공이 외교와 전쟁에서 보여준 불국의 끈기, 그 저동성과 분별력, 숨김과 가장의 능력 그 능숙한 정책과 기민한 실천력에 찬사를 보냇다. 그의 인생 행로는 마키아벨리를 현혹시켰고, 특히 그가 그 과정에서 보여준 신념은 더욱 그러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를 요모조모 뜯어가며 연구하엿고, 그가 자신의 마음에 새겨준 모든 말드과 사실들을 남김없이 피렌체에 알렸다. 한번은 그가 친구 비아조에게 프르타프코스의 (영웅전 Vite)을 보내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그가 이미 마음속으로 현재의 경험과 과거의 사실들을 서로 새롭게 비교하려 했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으리라.
발렌티노 역시 그의 드높은 위신과 에스파냐, 로마적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이보잘 것없는 지위의 서기장을 결코 불쾌하게 생각지 않았다. 흑자가 그렇게 믿고 또 쓰고 있는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가 사절로 가 있는 동안 발렌티노의 마키아벨리즘을 흡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생각이 되겠지만, 그가 마키아벨리에게 이례적일 만큼 접견을 쉽사리 그것도 장시간 허용했던 사실이나 양자간 대화의 성격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심 없는 피렌체 사람의 재능과 격식 없고 날카로운 판단력이 발렌티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명확해 보인다.
어쨌든 당분간 보르자는 계속해서 피렌체와의 협정을 고집하였다. 히지만 피렌체는 통상 그렇듯이 말로는 좋은 듯이 하면서도 그것을 행동을 옮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변명이란 이 일을 왕에게 알리고 그의 동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히지만 한 주일 한 주일 시간은 흘러가도 답은 오지 않았다. 발렌티노는 비록 여전히 우호적이긴 했지만 그 특유의 놀랍고도 초연한 태도로 자신의 새로운 방식에 따를 것을 재차 촉구하였다. 그에게 정말로 중요했던 것은 이미 물의를 빚어왔던 자신의 용병료, 즉 세례 요한의 상이 새겨진 양질의 피오리노 금화였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에게는 자신의 나라 피렌체를 위해 이 펜싱 선수와 겨루어야 하는 임무가 맡겨졌으며,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피렌체 정부가 그에게 준 무디고 녹쓴 무기를 가지고 이 일을 해냈다. 어느 날 둘은 피렌체 공화국이 새로이 고용한 만토바 후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발렌티노가 물었다. (그래, 당시네 정부가 나에게 맡긴 일은 뭐요?) 마키아벨리는 이에 대해 전하는 일을 맡기보다는 일을 끌어가실 분이라고 농담 조로 응답하였다.
왕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변명이 더 이상 먹혀들어가지 않자, 피렌체인들은 이제 교황과 의논하고 싶다고 말을 바꾸었고, 이어서 다시 소데리니 주교를 프랑스로 보냈으니 모든 결정은 그 결과에 달렸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발렌티노는 압력을 넣을 요량으로, 그가 오르시니 가 및 비텔로초와 거의 조약을 체결하기 지적이며, 그렇게 되면 피렌체인들은 매우 난처한 지경에 처할 것이라고 들러대었다. 마키아벨리로서는 만약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돈으로 발렌티노와의 친선을 사는 데에 기꺼이 일만 두카토 정도는 걸 마음이 있었으나 정무위원회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그는 결국 어느 날 피렌체가 그에게 무언가 괜찮은 일감을 주기는 힘든 처지에 있으며, 그렇다고 사소한 일을 맡기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할 도리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발렌티노의 한 관리가 용병료라는 말이 적절치 않다면 수고비로 명복을 바꿀 수도 있다고 제의하자, 마키아벨리는 이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피렌체가 발랜티노와의 친선에 단돌 한 두카토도 내지 않으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관측했듯이 그들간의 친선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쓸모없는 것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피렌체 정무위원회는 그 즈음 마키아벨리와 발렌티노 사이의 모든 협상과 논의를 중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그래서 친구 비아조는 피렌체 발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르 다음과 같이 놀려대었다. (이보게 니콜로, 자넨 허탕을 쳤어, 아마 자네는 발렌티노의 마음에 들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네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앞서 어떤 때보다도 더 본국으로의 귀환을 정부에 요청하게 되었다. 그가 귀환하고 싶어하는 데는 자신이 10인위원회에 보낸 편지에 적힌 것 말고도 상당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그에게는 가사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고, 게다가 당시 집 사정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외국 출장중에 자신과 공화국의 품위를 위해 버는 액수보다 돈을 더 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아마 인색한 정무위원회로서는 그리 달갑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저는 제 몫으로 돈을 쓸 수 도 있었고 또 지금은 그러한 돈을 공작으로부터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돈은 바라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그럴 만한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일은 우리 정부에게나 제 자신에게나 결코 명예롭지 못한 것이라 생각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도 제가 한푼 두 푼 비용을 구걸하다시피 하면서도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 주실 줄 믿습니다.)
편지에는 쓰지 않았지만, 마키아벨리가 돌아오려는 또 다른 이유들 중 하나는 가엾은 아내 마리에타의 불평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의 불평을 막기 위해서 이번 출장이 8일 정도면 끝날 것이라고 말해 놓았으나, 이제 벌써 8주가 지나고 보니 그녀의 심정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혼자 지내기가 싫었던 그녀는 생질인 피에로 델 네로의 집으로 가버렸다. 그곳에서 남편도 돈도 없는 자시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된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도 재산도 모두 내동대이쳐 버렸다는 자괴감에서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잘아려 있지 않지만 그를 매우 근심케 한 듯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관직을 재임용받을 시한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당사자가 본국에 없다는 사실이 언제나 불리하게 작용함을 알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출장중에 자신의 관직을 잃게 될까 우려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친구들은 곤판로니에레가 그를 특히 좋아하고 또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거듭 이야기했으며, 곤팔로니에레가 그에게 보낸 편지도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재임용 문제에 대해 알라만노 살비아티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그 동안 공적으로 보아 재임용에 관해 부탁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정부 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특히 피렌체인들의 마음 씀씀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스스로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보오나코르시에게서 온 소식 역시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로는 새 정부가 먼저 서기들의 봉급을 깎고 나서, 이어 그들 자체를 줄이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관계하는 두 서기국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없는 동안, 제2서기국은 제1서기장인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관장 아래 있었으나, 서기보들의 말로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그는 또 대학 쪽에도 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지금 난 내 일과 당신 일에다 강의까지 겹쳐서 죽을 지경이네.) 그를 대신해서 10인위원회 일을 하고 있었던 그의 친구 비아조는 편지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자네가 맡던 일을 보고 있는데,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일에 대해 또는 동료들에 대해 새로운 소식들을 전해 주곤 했는데, 그들은 언제나 서로 다투거나 운수 사나운 일을 당하곤 했다. 예컨데 안드레아 디 로몰로가 주사위 노름에 푹 빠져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안토니오 델라 발레와 안드레아가 노름 때문에 사무실에서 다투다가 안드레아가 안토니오를 발로 차 그의 등허리를 다치게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했던 것이다. 물론 사무실에서의 이러한 장난들이 음담패설로 윤색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보다 좀더 그럴 듯하고 기발한 이야기를 그에게 전해 준 사람은 다른 서기보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가 겪은 재수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루는 어수룩한 정무위원 한 사람이 갑자기 방에 들어와서는 (어이, 어이, 이것 좀 받아써보게) 하고 소리쳤는데, 다른 동료들은 모두 슬금슬금 도망쳐 버리고 자기만 잡혀서 그 지겨운 글을 받아써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지들은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우울한 보르자의 궁에서 빠져나와 잠시나마 톡톡 튀는 피렌체의 분위기를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그 역시(모두들 포복절도하게 만든) 자신의 이야기로 답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남아 잇지 않다. 그가 친구들에게 쓴 다른 편지들로 미루어볼 때, 이는 이탈리아 문학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귀환을 원했던 모든 이유들에 앞서 무엇보다 결정적인 사실은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그가 그렇게 탄원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신의 귀환 문제를 좀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실제보다 더 아픈 척했는지 어떤지는 자세히 알 지 못한다. 하지만 11월 22일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틀 전 열이 심했으며, 지금도 틍증은 여전합니다.) 12월 6일에는 또 이렇게 썼다. (열이틀째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들것에 실려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렌체 정부는 그를 귀환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들것에 실려서라도 발렌티노의 뒤를 쫓아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발렌티노 공작은 전군을 휘몰아 이곳저곳 집적거릴 것이었고, 이 와중에서 누군가가 분명히 손해를 입게 되겠지만 불똥이 어디로 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피렌체인들은 공작의 이러한 움직임과 가능하다면 그의 속마음까지도 가까이서 지켜볼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그 일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정부의 무리한 요구에 참다 못한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정무위원회에는 죄송한 말이지만, 명심해야 할 점은 누구도 그러한 일들을 알아맞추기란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이곳의 군주는 만사를 그 자신이 혼자 결정하나는 것입니다. 공상이나 꿈같은 일은 쓰려고 하지 않는 다음에야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 사람들을 모아야만 하고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저는 지금 최선을 다해 시간을 쪼개어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피렌체에서는 마키아벨리가 보낸 편지들을 읽고 상황을 분석했지만, 발렌티노의 첫 일격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목하고 있었다. 단지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가 사태를 관망하면서 군세를 모으고 있으며, 그리하여 적이 그를 치기 전에 그가 적을 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점은 이미 보르가 패배하여 군세를 상실했던 그 당시부터 내내 마카아벨리가 의심 많은 정무위원회에 보고해 온 사실이었다. 11월 19일, 여느 때처럼 발렌티노와 사담을 나누게 된 그는, 자신이 항상 그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예측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사절로 온 첫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겨놓았더라면 (발렌티노에게는 그것이 마치 예언처럼 보였으리라는 것)을 아첨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자신감 속에서 감히 이야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말했으나, 대체로 (발렌티노는 혼자이고 적은 다수이므로 그러한 추론의 연결고리는 쉽사리 끊어질 수도 있음)을 주지시켰다.
사실 평화는 바야프로 가까이 와 있었다. 발렌티노느 마음이 바뀐 프랑스 왕이 다시 휘하에 받아들인 벤티볼리오뿐만 아니라 그가 주도면밀한 계산 아래 (반군 무리에서 꾀어낸) 그 진중치 못한 오르시니 가의 인물들과도 화평을 맺었으며, 이에 다른 반군 우두머리들도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조네에서 공모자들을 묶어놓았던 결속의 끝이 끊어지게 된 데는 왕과 교황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발렌티노의 끈질긴 위장도 한몫을 하였다. 그에게는 어제의 적들과 그럴 듯하게 쌓아놓은 유대를 파기해 버리는 것 역시 쉬운 일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세상사가 흘러가는 방식이라는 점은 마키아벨리가 (특히 오늘날 신의라는 것이 얼마나 유명무실한가를 생각하게 하면서) (이처럼 평화가 도래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전쟁을 분비하는 발렌티노의 태도에 대해) 10인위원회에 써보낸 편지에 예견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비텔로초가 발렌티노에게 (복종과 감사의 정이 넘치는 )편지를 보냈음을 10인위원회에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발렌티노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읽거나 알아채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가 무슨일을 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문제에 관해 무언가 견해를 말하라면...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곧 맞아떨어지게 된다.
12월 9일 발렌티노는 군대를 체세나로 이동시켰고, 마키아벨리는 이틀 뒤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는데, 그것은 몸도 돈도 좋은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자신이 설사(상황이 돌아가는 대로 따른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위협조의 편지까지 쓴 바 있었다. 이에 대해 소데리니는 (지금 무엇보다 긴급한 일은 당신의 경비를 조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답장과 함께 그에게 25두카토의 돈을 보내왔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어려운 형편을 크게 도닥거려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당신은 그곳에서 무슨일이 진행되는 지를 계속 주시하면서 수시로 상황을 보고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그쪽 형편이 불리는 대로 당신의 복귀를 주선할 것이며, 그때까지도 발렌티노공과 계속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우리는 당신의 후임자를 임명할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도 당분간은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일을 충실히 봐지기 바라오)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해나갔음은 물론이다. 곤팔로니에레의 처방이 그에게 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세나에서의 상황 판단은 이몰라에서보다 결코 더 쉬워 보이지 않았다. 누구는 발렌티노가 나폴리 왕국으로 진격해 들어갈 것이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베네치아에 대적하기 위해 라벤나와 체르비아로 갈 것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가 먼저(자신을 모욕되게 했고 나라까지도 거의 잃게 하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위인들을 확실히 처리하려)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단지 방관자에 불과하지 또는 그이 행동을 부추기는 배후의 힘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교황은 로마에서 사태가 이렇게 지연된 데 대해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로는 그가 큰 소리로 (이 창녀의 자식 같은 놈, 이 사생아 같은 놈!) 하면서 그를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포도주 맛을 속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란 화를 내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속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는 법인 것이다.
12월 26일, 발렌티노는 4일 전 갑자기 그곳을 떠난 프랑스 창기병을 제외한 모든 군세를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의 행동을 미리 짐작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구한 억측과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는 떠나면서, 한때 로마냐 사람들을 다스리는 데에 자신의 충실한 도구였던 그 권세 있고 잔혹했던 라미로 로르콰의 둘로 절단된 시체를 시 광장에 두고 갔다.((군주론) 7장에 나오는 동일 인물 라미오 데 오르코의 예를 참조할 것 - 옮긴이). 이 피비린내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는 자신의 부하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를 털어내고, 스스로가 (부하의 자리를 그 공과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로운 군주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숨기려 하였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유명한 사건 역시 그로부터 어떤 교훈과 행위 규범을 끌어낼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주목하였다.
바로 그 12월 26일, 그리고 그 해의 남은 마지막 5일 동안, 사태는 마치 체스판에서처럼 연이어 숨가쁘게 돌아갔다.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는 발렌티노의 이름 아래 그 명령을 받들어 세니갈리아르 점령하였다. 그는 그의 군세를 숨기기 위해서 병사들을 소규모 분대로 편성하여 파노로 이동시켰는데, 정작 그 자신은 그곳에서 매우 신속하게 세니갈리아로 달려갔다. 도중에 비텔로초, 파올로 오르시니, 그라비나 공작 등과 우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만난 그는, 그들과 화기애애하게 담소하면서 자신이 군대 일부를 거느리고 그 동시에 입성하엿따. 도착 후, 그는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신호를 보내면 즉시 장군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뒤, 보르자니 가와 비텔리의 군대를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이미 파노에서 발렌티노로부터 이 일에 대해 슬쩍 암시를 받앗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 이 혼란의 장면을 목격하였다. 사태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는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10인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약탈이 진행중이고, 지금 시각은 23시입니다. 저는 매우 걱정이 됩니다. 이 편지를 전해 줄 사람을 찾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올리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이 내일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비텔로초와 올리베로토에겍 그 해의 말일은 곧 자신들의 생에서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다른 둘의 처형은 교황이 오르시니 추기경과 그 가문의 나머지 인물들을 잡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의 행위는 물론 죄악이었지만, 그것은 완벽한 일격이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에게는 발렌티노라는 인물이 커다란 모습으로 다가왔다.
새벽 2시경, 보르자는 그를 불러 (더없이 환한 얼굴로) 자신의 성공을 자축하였다. 그리고는 피렌체인들로서는 (매우 똑똑하고 솔깃하게 들리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인즉,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적이었던 그들을 없앨 수 있다면 아마 2O만 두카토라도 쉽게내놓았을 것이고, 또 (설사 그랬다 해도) 결코로 자신이 한 것만큼(그렇게 깨끗이 그들을 제거할 수는 없었을)바로 그 시점에 그들을 없애준데 대해 감사해야 하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치타 디 카스텔로와 페루자 공략에 일조할 군대를 보내줄 것을 피렌체에 요구하였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 편지를 썼다. 그러나 발렌티노의 움직임은 이 편지들을 가재고 간 전령들보다 더 빨랐다. 1503년 1월 1일, 그는 이미 전군을 몰아 코리날도에 가 있었으며, 3일에는 사쏘페라토에, 그리고 5일에는 괄도에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그날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치타 디 카스텔로의 사절들로부터 항복의 뜻을 전해 받았고, 이튿날에는 페루자의 사절들이 역시 같은 의사를 표명해 왔다. 그들의 말로는 도시민들이 (두카 두카) (두카란 공작이라는 뜻 - 옮긴이)하고 발렌티노의 이름을 외치면서 일어났으며, 잠파올로 발리오니는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의 얼마 남지 않은 잔당을 이끌고 황급히 시에나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에나 판돌포 페트루치 역시 발렌티노의 발톱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보다 더 안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판돌포는 1487년 36세의 나이로 시에나의 정권을 장악한 뒤, 자신의 장인을 암살하고 마조네 가를 부추겨 보르자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도록 만든 인물임 - 옮긴이)
페루자도 시에나도 들었네
히드라의 숨소리를.
두 참주는 도망쳤네
그의 분노를 피해.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랜 후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썼다. 당시 이히드라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진격을 계속해 나갔다. 8일 그는 아씨시에 있었고, 10일에는 토르차노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시에나 사건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 도시에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페트루치를 내쫓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피렌체가 이 일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는 의중을 내보였다. 그의 군대는 이제 시에나의 속령인 큐시를 향하고 있었다. 발렌티노와 또 한번 긴 말의 공방전을 나눈 치타 델라피에베에서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 속에는 자신이 되풀이해서 올렸던 진언을 받아들여 그들이 마침내 발렌티노에 보내는 대사로 명망 인사인 야코포 살비아티를 임명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20일, 판돌포 역시 히드라로부터 도망치고 잇을 때, 마키아벨리는 보르자 진영을 떠나 피렌체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는 23일 집으로 돌아왔다.
마키아벨리으 사절 임무는 보르자의 그 은밀한 심중에서 복수의 계획이 처음 싹 튼 때에 시작하여 1502년말 피로 물든 복수극이 일어나던 그 비극적인 날 밤에 끝난 셈이었다. 그가 이러한 사적의 기간을 통해 얻은 유일한 결실이 유명한 (발렌티노가 비텔로초 비텔리 등을 죽이는데 사용한 방법에 관한 묘사 Descrizione del modo tenuto dal Duca Valentino nell'sammazzare Vitellozzo Vitelli ecc)인데, 이는 복수극의 전말을 보고서 형식이 아닌 순수한 문학 작품의 형식으로 짤막하게 묘사해 놓은 것이다. 그르나 이 작품을 그 사건에 관한 공식 서한들과 비교해 본 학자들에 따르면, 실제와는 다르게 묘사하거나 또는 사시을 과장하면서 서건의 과정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로르 이상화라려 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는 다만 그 군주가 지닌 어떤 품성과 조건들을 각별히 칭송했을 뿐이며, 그리하여 마치 화가가 자신의 이상저인 그림을 위해 삶으로부터 어떤 측면들을 취하는 것과 같이, 그도 이러한 품성과 조건들을 어떤 추상적인 군주상에 대입시켜 당시의 다른 군주들 속에서 그러한 요소들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비록 그런 인물을 찾지는 못했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이 이 사절 임무중 보르자란 선생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해 왔고, 우리 역시 그것을 이 자에서 지적한 바 잇다. 이 말의 뜻은, 무언가 분명히 위대하고 기억될 만한 행적, 무언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러한 행적 앞에서, 그는 그로부터 과학적 이론들을 끌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흔히 생각하듯이 마키아벨리가 바로 오직 그때 그곳에서 마키아벨리즘을 배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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