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십년기 ) 민병대
전쟁은 멀리 나폴리 왕국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프랑스와 행로를 같이하고 잇던 피렌체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에 사자로 가 있는 동안 계속해서 전쟁 소식을 전해 달라는 닦달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전투가 없다가 그가 떠난 직후인 12월 28일, 프랑스 군은 가릴리라노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에스파냐 균의 잘 닦인 군기와 보병대의 용맹성, 그리고 운과 재주를 겸비한 지휘관 콘살보 덕분이었다. 패전군은 설상가상으로 겨울의 매서운 날씨와 싸워야만 했다. 피에로 데 메디치 역시 바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다 익사했는데, 이는 시종 멍청하고도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프랑스 군의 궤멸로 인한 실망과 불안이 더 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피렌체의 평시민 정부는 피에로의 이 같은 죽음에 축하라도 보내야 할 판이었다. 나폴리 왕국 내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리고 에스파냐 군에 대패한 데다가, 스위스 막시밀리안의 의중은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루이 왕은 장차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지 에도 너무 바빠 동맹국을 돌본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우려되는 바는 콘살보가 프랑스를 롬바르디아에서도 축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그 첫 타격이 토스ㅌ카나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이미 피사에다 지지 기반을 만들어놓았으며, 시에나 루카에서도 여러 계획들을 진행시키는 등 그곳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로마냐 문제까지 끼어 있는 상황에서, 피렌체인들로서는 마치 대장군(콘살보의 별명 - 옮긴이)의 망치와 베네치아의 모루 사이에 놓여 있는 심정이었다.
따라서, 피렌체인들이 사태가 얻허게 돌아가는지, 왕의 준비 태세와 의중이 어떠한지를 즉즉시 파악하고자 햇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하여 1504년초, 그들은 당시 피렌추올라에 가 잇떤 니콜로 발로리르 사절로 보냈다. 그는 이미지로 따나기에 앞서, 그에게 도움이 될 만환 일을 일러주기 위해 급히 그곳으로 파견되었던 마키아벨리로보터 지시 사항을 들었다. 하지만 서기장에게는 또 다른 긴여행이 기다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발로리가 아직 궁정에 도달하기도 전데, 콘살보의 의중에 대해서는 새 정보를 알아냈지만 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공화국은 애가 타사 다시금 마키아벨리를 급히 그에게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단히 긴급을 요하는) 자신의 임무를 두고 6일안에 도착해 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사실 그렇게 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키아벨리를 파견한 일은 좀 이사하게 보일 수도 잇다. 왜냐하면, 피렌체는 이미 왕의 궁정에 새로운 훈령을 주어 신임 대사를 보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편지로 지시만 내리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굳이 마키아벨리를 보내게 된 것은 s서신 우송이 미답지가 못하다는 이유 말고도, 그가 이 모든 협상의 추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잇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사람들, 특히 곤팔로니에레가 그의 판단력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는 1504년 1월 19일자로 그에게 내려진 훈령 속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당신의 이번 여행은 현재 진행중인 준비 상황을 관찰하고, 그것데 대한 당신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첨부하여 우리에게 '즉시' 알려주는 것이다.) 그들은 그곳 주재 대사의 판단을 믿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월 20일 길을 떠난 마키아벨리는 22일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지시받은 대로 그곳의 프랑스 사령관인 샤를 당브와즈를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즉 프랑스의 도움이 없다면, 피렌체로서는 그냥 앉아서 점령당하든가 아니면 점령하려는 자들과 협정을 맺을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앙브와즈는 이에 대해, 자신은 콘살보가 침입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설사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왕이 우방을 결코 못 본 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무제를 궁정에 상세히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러한 조치는 사절로서 바라던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와 헤어지며, 그는 큰소리로 (아무 걱정 말라)고 소리쳤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에 보내는 편지에다 자신의 프랑스어 실력을 슬쩍 뽐내면서, 이 말을 전하고 있다.
그는 다음날 밀라노를 떠나, 27일 왕이 잇는 리용에 도착하였다. 밀라노에서 뺏겼던 시간을 뺀다면, 그는 6일만에 오겠다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대사부터 만나러 갔다. 이 두 니콜로는 서로 오랜 친구 사이였고,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99쪽을 보라 - 옮긴이), 발로리는 마키아벨리에게 정감 어린 편지들을 보내곤 했던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는 한 통의 편지에서 더욱 정겨운 마음이 느껴진다. (나는 형제가 없기 때문에, 당신을 나의 형제처럼 생각하고 싶소. 당신도 그렇게 대해 주었으면 하오. 이는 우리끼리의 약속이오) 따라서 둘의 사이는 틀림없이 좋았을 것이므로, 발로리가 10인위원회의 명으로 그에게 온 마키아벨리와 같이 분별 있는 사람을 괜히 의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문필가로 약간을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대사는 스스로 보고서를 쓴 뒤 혼자 서명하였다. 다른 임무에다 그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독자적인 보고서를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지에서의 시간을 통틀어서 그가 쓴 편지는 두 통뿐이었다. 그 중 중요한 내용을 담은 첫 번째 편지의 경우, 그는 단지 발로리가 쓴 것을 확인하고 추인 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가 곤팔로니에레와 내밀한 편지를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당시 왕은 그간의 실패로 심신이 피로한 상태라 접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니콜로는 다음날 루앙을 만났다. 앞서는 두 명의 사절 중 하위 직급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이제 상위 직급의 위치에서 그에게 신임장을 수여하고 자신이 온 이유를 밝혔다. 그는 루앙에게 콘살보와 베네치아에 관해서, 그리고 주변의 적대적인 공화국들과 피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의 말인즉 일러하였다.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은 왕이 무엇을 도와 줄 수 있는지, 또 피렌체가 과연 그것에 의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만약 우방이 도와주지 못한다면 적과 악수하는 수 밖에 또다른 도리가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추기경은 (불쾌하다는 듯이 화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불평 조로, 피렌체인들은 프랑스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느냐고 되받았다. 다음은 발로리의 전언이다. (그러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매우 능숙한 솜씨로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구하려 한다면 우선 어떻게 성벽을 지킬 것이가를 숙고해야 한다는 점과 교황과 시에나와 페루자가 콘살보에 대한 방여벽ㅇ 역할을 할 서이라는 점을 주지시켰습니다.) 추기경은 교황와 시에나는 믿을 수 있을까? 페루자는 교황의 것인가? 라는 말을 되묻듯이 되풀이하고는 이야기를 중단시켜 버렸다.
다음날, 추기경은 발로리와 마키아베리에게 좀더 누그러진 태도로 대하였다. 그는 현재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두 왕들 간에 휴전 협상이 진행중임을 전했다. 그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여부가 다음주쯤이면 결정 나겠지만, 어는 경우든 피렌체는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상황이 휴전으로 갈지 또는 프랑스의 강력한 도움으 받는 것이 될지, 어느 족이든 확실한 사실을 피렌체에 보고할 수 있을 때까지는 떠나는 일을 연기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30일, 그들은 왕을 접견하여, 앞서 루앙에게 한 이야기를 그에게 다시 되풀이했고 역시 똑같은 대답을 받았다. 피렌체의 두 사절과 프랑스 궁정의 다른 두 인물 간에도 똑같은 내용의 설전이 오갔다. 그 중 하나는 로베르테였고, 다른 하나는 투키디데스를 번역한 클로도 드 세이쎌이었는데, 발로리는 그들을 향해 (재빨리 일급의 서기관들을 파련한) 피렌체의 기민성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일급의 서기관들)을 파견한 것도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다. 11일 휴전 협정이 맺어졌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3년이었고 양측은 각각의 동맹국들을 거명할 수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프랑스는 피렌체를 지명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물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출발을 연기하다가, 3월초가 되어서야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우리는 그가 언제 피렌체에 도착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4월 2일 피옴비노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임무는 당시 시에나의 영토 안에서 전쟁 준비로 의심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잇는 데 대해 그 곳 지방 연주와 의견을 나누면서, 피렌체는 그의 영지가 보존되기를 원하므로 서로의 공동 이익을 위해 그를 도울 의사가 있음을 알린 뒤, 그로 하여금 피렌체와의 옛 우호 관계를 재개하도록 권유하는 것이었다. 공화국으로서는 다른 나라가 자신의 소극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실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예비 임무들을 진지하게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파견된 주요한 목적은 훈령 끝머리에 나타나 잇는 대로, 그쪽 지역에서는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어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영주의 모든 품성들, 사람들의 성향, 시에나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또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등을 면밀히 관찰하기 바라오.)
파쎄리니의 허풍과는 달리,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그곳 영주와 그가 다스리는 영지의 가치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서기장은 며칠안에 일을 끝내고는 서기국의 편지 쓰는 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사로 싸우던 두 나라 왕이 휴전 협정을 체결하자, 그곳은 갑작스런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로마냐 쪽의 베네치아인들은 이제 그들이 획득했던 영토로 만족하고 있었다. 호전적이었던 교황의 역시 호전적인 조카인 줄리오 2세는 여전히 (확고한 권력을 얻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제는 긴 공성전이 되어버린 지루한 피사 전쟁만 없었더라면, 당시는 아마 옥타비아누스의 평화 시대를 다시 구시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이 시기에 우리의 관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공한들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머릿속에만 담아오다가 당시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 군사에 대한 몇몇 생각들이다. 청년기 이후, 전쟁은 그에게 용병대의 저열함과 모반의 경향 그리고 배신 행위들과 함께,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그들로 인해 파괴되는 모습을 숱하게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시기국에서 궁정에서, 전장의 소요 속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왔던 그에게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이후 그는 그러한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고대의 용맹성이여
이탈리아인의 가슴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고 있구나
라고 읊은 페트라프카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는 로마냐에 사절로 가 있는 동안, (한 집당 한 명씩 정발된) 그곳의 농민들이 돈 미켈레의 고된 훈련 끝에 어엿한 병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mfl고 피사인들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용병대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스스로를 방어하는 모습도 목격하였다.
물론 영예로운 코무네의 민병대((milizie) 혹은 (la Ordinanza). 이를 민병대로 옮긴 것은 당시의 용병대에 반하는 개념에서이며, 현재와 같이 졍규군이 아닌 사병(사병)이란 뜻에서가 아니다. 물론 시민군 miliaia cittadina 또는 자국군 armi proprie 등의 옮긴말도 가능하며, 이 역시 마키아벨리나 리돌피가 실제로 쓰고 있는 말들이다. 앞의 경우는 중세 봉건 영주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실제로 모병 대상자는 대개 콘타도의 농민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좀 도시 반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한 역어라고 생각된다. 뒤의 경우는 조금 거리가 있는 말이다. - 옮긴이)에 대한 기억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거의 이백년이 지난 당시의 상황에서 시민과 농민을 모병한다는 생각은 피렌체인들에게는 아무래도 무모하고 허황되게 보일 만큼 낯선 것이었다. 읍도파 문인 도메니코 체키가 (피렌체를 지키기 위한 성스럽고 고귀한 개혁 방안 Riforma santa e preziosa)에서 주워섬기고 있는 그렇게 많은 기발한 방법들 중에서도 체격이 좋은 시민들을 군으로 훈련시킨다는 괴상한 생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 당시 피사 전쟁과 그 외의 이러저러한 용도로 콘타도 지역에서 징집된 (코만다티 comandati)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공병대로 보는 것이 나으며, 단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활용되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은 국민병에 대한 정치 이론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여 정규적인 소집과 확고한 법령에 의하여 정부 관리의 통제 하에서 운용되는 민병대를 창설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그처럼 기상천외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굳은 신념에다가 곤팔로니에레와 그의 동생인 추기경이 그에게 보여준 큰 호의 덕분에 그는 용기를 얻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그가 추기경에게 이 계획에 관해 처음으로 이야기 한 것은 로마에 사절로 가 있을 때인 듯하다. 분명한 것은, 당시 그들 사이에 이 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고, 추기경이 아주 즉각적이고도 열성적으로, 그리고 아주 강력하게 그 계획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피렌체로 돌아와 곤팔로니에레를 비롯하 몇몇 유력 시민들과 그 문제를 의논한 결과 그는 조심성 많은 피렌체인들의 회의적인 분위기를 극복하기란 아무래도 매우 힘들겠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7년 전 정무위원회가 무장 호위대를 갖추게 하자는 말이 나왔을 때 기를 쓰고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이 그렇지 않아도 종신 임기인 지금의 곤팔로니에레를 아예 종신제 참조로 만들려는 음모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케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같이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마키아벨리는 반 쯤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1504년 5월 24일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고 5일 뒤 다음과 같은 답장을 받았다. (민병대에 대한 반대는 그 방안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건전한 것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네. 그리고 그것은 사적인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그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될 것이네. 거기서 주저앉지 말기 바라네. 언젠가는 그 일을 자랑스러워 할 때가 올 테니까. 다른 보답은 없더라도 말이네.) 사실 그는 다른 어떤 보답도 받지 못했지만, 그 때문에 훗날 영예는 얻게 되었다. 그의 앞길을 예언하는 듯한 이러한 격려가 피렌체 서기장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추기경의 애정 어린 배려는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가장 친애하는 동료)라고 불렸으며, 대부가 되어 준 것 외에도 그에 대한 자신의 우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사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마침 군사 문제를 주 업무로 하던 서기국 일과 병행해 나갔다. 그때 피렌체는 피사를 둘러싸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작전은 상례대로 주변 농작물을 갈아엎고, 리르바파타를 재탈환하고, 도시를 먹여살리는 외부의 도움을 차단하는 조치들을 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피사에 대한 원조는 오직 아르노 강 위쪽의 바다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머저 강 어귀에다 좁다란 랠리선을 가진 일단의 수비대를 배치한 뒤, 강의 물줄기를 돌려 피사인들을 말려버릴 계획을 추진하였다. 곤팔로니에fp는 물을 잘 아는 피렌체와 외국 전문가들을 부추김으로 이 계획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공화국 돈 7,000두카토를 웅덩이 속에 밀어넣고,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우리 서기장의 펜만 수없이 닳아없어지게 하는 데서 그치고 말았다. 마키아벨 리가 이 안을 지지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톰마시니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릇 위대한 인물이라면 실수가 있을 리 없고 특히 그의 전기 작가를 위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증거를 더 확인하지 않고도 이에 대해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개의치 않겠다. 우리는 서기장과 그 계획의 주도자인 곤팔로니에레간의 관계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으며,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주 기발하고 대담했던 그 계획의 성격 자체가 나에게는 바로 마키아벨리적인 천재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인다.
이 수공 작전에 건 마지막 희망도 가을에 닥친 첫 홍수 속에 떠내려가 버렸다. 바로 같은 때, 마치 강물처럼 마키아벨리의 시심이 가느다랗게 분출되었다. 10월도 마지막으로 치닫던 그때, 그는 샤를 8세의 침입으로 서두를 잡아 ( 10년 동안 이탈리아가 기울인 노력과 2주동안 '자신이' 기울인 노력)을 보여주는 550행짜리 시 한수를 완성했던 것이다. (첫 (십년기 Decenale) 를 가리킨다. 이 작품은 시의 형식을 빌려 1494 -1504년의 10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피렌체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위의 (2주동안)이라는 표현은 이 시가 14-5일 만에 씌어 졌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온 날이다. 미완성으로 남은 두 번째 (십년기)가 있으면, 이는 1504-1509년의 일을 다루고 있다 - 옮긴이). 이 시에서 모든 일의 출발점인 서두의 경우, 우연은 별다르게 기능하지 않지만, 끝맺음 부분에 가서 발렌티노(연전히 그의 운명적이 군주인)의 마지막 행적을 다룰 때에는 상당한 작용을 하고 있다. 줄리오 2세의 마지막 발톱을 피해 가까스로 몸을 피한 그는 처음으로 콘살보의 환대를 받으나 뒤에 그로부터 배신당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읊고 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네
그리스도에 거역했던 자가 받을 만한 만큼.
산문에서든 시에서든,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후 (바쁜)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자신의 영웅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발렌티노는 에스파냐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전투중에 그곳에서 죽었다. 한때 이탈리아의 역사 무대 위에 발을 내디뎠던 그는 이제 마키아벨리에게는 정말 (무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십년의 이야기는 한 악한의 쓸쓸한 최후로 마감됨으로써 민요 풍의 노래 un cattare di dandamento popolaresco((십년기)를 (민요풍)이란 부른데 대한 디오니소티의 반론과 리돌피의 재반론에 관해서는 이장의 주 33을 볼 것 - 옮긴이)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기 작가로서는 할 수 없는 간략하게 다룰 도리밖에 없지만, 이 첫 (십년기)는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잇다. 첫째 (신곡)에 대한 그의 오랜 연구와 강한 애정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데, 그것은 단순히 테르차 리마 Terza Rima(11음절구 3행 시절 - 옮긴이)를 취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단테로부터 여러 가지 표현법이나, 형식, 반구(반구)들을 빌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마키아벨리는 시를 쓸 때보다 산문을 쓸 때가 더 시인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시라는 것 자체가 이 경우과 같이 역사와 정치를 논할 때는 적절치 못한 형식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마키아벨리의 신랄하고도 현실주의적인 문체가 시의 운율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시행들이 없지 않고, 당시 인기가 높아서 아예 속담처럼 사용되기에 이른 날카로운 격언 조의 말들도 다수 보인다. 바로 이러한 격언들, 다부진 생각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애정과 같은 것 때문에, 이 조그만 시 작품은 마키아벨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여기서 내면의 불꽃과 영원한 냉소를 지닌 생생한 자화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십년기)에서 정치는 시라는 베일에 감싸여 있지만, 알라만노 살비아티에 대한 그 작품의 헌정사 역시 정치적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살비아티는 아레초 반란의 시기 공화국을 구했던 인물이다. 사실 원대한 군사적 개혁을 꿈꾸고 계획하던 마키아벨리로서는, 조밤바티스타 리돌피를 비롯한 여러 유력 시민들과 함께 반소데리니파의 수장격이었던 그를 고려에 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계획에는 너무 많은 난관이 따랐기 때문에 10월 말경에는 곤팔로니에레 자신도 가을 바람만큼이나 열성이 식어버렸다. 심지어는 마키아벨리가 로마에서 돌아온지 정확히 아홉 달 만에 태어난 새 아들에게 또다시 대부가 되어준 추기경조차도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자신이 개입된 데 대해 형에게 사과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용기를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냉담함을 스스로의 열정으로 메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기운은 물방울이 떨어지듯 조금씩 빠져나갔네.
그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피렌체인들과, 특히 반대자인 살비아티에게 자신의 군사 계획을 지지해 주도록 애타게 호소하였다.
하지만 길은 쉽고 가까울 수도 있으리니
만일 당신이 마르스의 신전을 다시 열기만 한다면.
이 두 시행은 거의 민간의 별점처럼 그 정치적 예언을 끝내는 (십년기)의 마지막에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은 마키아베리가 한것이므로, 그로 하여금 그 감미롭던 이탈리아 땅이 조만간 전쟁의 풍파에 휩싸이리라고 예언케 했던 이유들을 하나한 뒤따라가보는 수고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교황이 바라는 바,
상처받은 교회를 되살려놓는 것.
자식 하나를 가진 황제는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보이고 싶어하네.
갈리아는 고통으로 가득한데.
피렌체와 베네치아 또한 각자의 몫을 주장하였다.
두려워하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마르코여,
전쟁이냐 평화냐 망설이고 있구나.
그리고 (피렌체여) 피사를 향한 당신의 탐욕 또한 너무 크나니
(상처 받는 교회를 살리려는) 교황의 압박아래 (전쟁이냐 평화냐)의 기로에 선 산 마르코 San Marco(성 마가는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 - 옮긴이)는 그와 잠깐 동안 우호 조약을 맺었다. 화친과 전생 사이에서 베네치아는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에게 뒷돈을 대어주었는데, 그는 자신의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사실은 피렌체를 공격할 목적으로 콘살보의 깃발을 떠나 페트루치, 비텔리 가 미치 잠파올로 발리오니와 동맹한 인물이었다. 피렌체인들은 결국 피사를 향한 바로 그 (너무 큰 탐욕을 )을 앞세우다가, 1505년 3월 27일 폰테 아 카펠레세 근처에서 피사에 대패까지는 아니지만 힘빠지는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그 당시 마키아벨리는 서기국이 늘 그렇듯이 연일 편지쓰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의 이러한 공신 서한들이 아니라 이 시기에 쓴 극소수의 사신(사신)들이다. 그중에는 여전히 교회 성직록을 얻고자 애쓰고 있던 동생 토토의 편지 한 통이 끼어 있다. 또한 니콜로 발로리가 보낸 매우 정감 어린 편지도 남아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주고받은 편지들에게서 언제나 그랬듯이 편지를 보내도 도대체 답이 없다고 불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은 좀 지나친 면이 있어서, 마키아벨리의 막내아들에게 대부가 되어주었던 것이 그에게는 우정을 돈독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섭섭한 감정을 가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프랑스 사절의 일에 싫증이 난 발로리는 피에로 소데리니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귀국을 주선할 말한 사람에게 기대였다. 그는 프랑스 궁정에서는 (머리가 총명하면서도 과묵한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는, 친구인 마키아벨리를 바로 자신의 후임자로 삼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프랑스로 가지 않았다. 그는 페루자의 군주 잠파올로 발리오니가 있는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로 파견되었다. 발리오니는 피렌체와 용병 계약을 체결해 놓고도 뒤늦게 자국을 넘어서서 다른 나라의 방어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다는 변명과 함께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 공화국의 입장에서 그와의 용병 계약을 대단히 중요한 일인 데다가 이미 카펠레세의 패배로 힘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갑작스런 변절로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일이 적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다. 어떤 난관에 봉착하여 무언가 확실한 사정을 알고 싶을 때면 늘상 그래왔듯이, 피렌체인들은 마키아벨리로 보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어뗳게든 잠파올로를 구슬러서 계약을 되살리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마음을 바꾼 것이 좀더 좋은 조건을 얻어내려는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은밀한 이유가 있는 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길을 떠난 마키아벨리느 4월 11일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만찬을 전후하여 세 시간 이상 발리오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흡사 고양이를 만남 쥐 같았다.) 마키아벨리가 이 긴 논쟁에서 하도 (그를 이지저리 몰아세우는) 바람에, (그의 안색이 여러 번 바뀔) 정도였다. 한 대목에서 그가 많은 페루자의 법률가들과 의논했다고 말하자, 마키아벨리는 (이 문제는 법률가들이 아니라 군주가 결정할 일이며, 갑옷을 입고 명예를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의를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없을 분 아니라, 그가 볼 때 지금 발리오니가 도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모두가 그를 (비틀거리는 망아지)정도로 보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는 말을 바꿀 힘이 없다는 힘이 없다는 듯이 결심에 변함이 없었지만, 마키아벨리는 그를 넘겨짚기도 하고 찔러보기도 하면서 두 번이나 그의 내심이 드러나는 말들을 하도록 유도했다. 마키아벨리와 10인위원회는 이를 그곳에서 알아낸 정보들과 맞추어본 끝에 발리오니, 오르시니 가, 판돌포, 루카인 들 사이에 모종의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잠파올로는 상황이 어떤지를 감지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이미 (두달 동안 노심초사하면서 한번도 스스로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정보원들이 그에게 한 이야기였다. 그는 아마도 마키아벨리로부터 (어느쪽으로 택할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만 하며, 그 결과 페루자 전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이후 더 웃음을 잃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피렌체는 군사력의 부족에다 누가 적인지를 소상히 인지한 때문에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더욱 고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다 말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니콜로 덕분이었다. 피렌체인들은 알비아노를 고용한다는 계획을 포기하였다.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인물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지킨다는 계획은 매우 교활하긴 하지만 그만큼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 대신 그들은 만토바 후작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와의 협상이 난항에 부딪혔으므로, 5워 4일자 훈령에 의해 마키아벨리가 만코바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든 누구든 그 협상을 성공시킬 가능성은 없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곤팔로니에레는 그를 나폴리로 보내 콘살보와 협상케 하는 일을 거론하였다. 그른 해로를 통해 피사로 보병을 실어 나르고 있었으므로 이를 적절히 활용하면 알비아노를 저지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다른 인물이 그를 대신해서 파견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시에나로 가는 것까지 반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여정은 400밀리오((miglio)란 영어의 마일과 같다. 그러나 그 길이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 보기를 들자면, 고대 로마에서는 약 1,480m였으나, 그뒤로 로마에서는 1,460m, 피에몬테에서는 2,466m 등으로 바뀌었다. 현재 영미 1마일은 1,069m 정도이다 - 옮긴이)가 아니라 40밀리오였고, 그가 이러한 맞바꿈을 흔쾌하게 생각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태는 이러했다. 판돌포 프트루치로부터 알미아노가 피렡체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경고의 말이 전해졌다. 폭풍우가 그쪽에서, 그것도 곧 닫치리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음모들을 처음부터 꾸미고 또 그 속에 가담한 당사자인 판돌포가 왜 갑자기 피렌체의 안위에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우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절의 임무는 그의 전갈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명목에도 불고하고 이 놀라운 회심의 이유를 캐는 데 그 본위가 있었다.
7월 17일 성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시에나에 도착한 마키아벨리는 (이제 막 잠에서 깬) 판돌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잠파올로 발리오니보다는 더 똑똑한 적수였다. 그의 목적이 당시 위험에 처한 피렌체가 몬테풀차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데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원조의 약속과 조언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지금 협상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그에게 주시시키려고 애쎴다. 그는 10인 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연스럽게든 우연히든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있음은, 제 생각으로는 이 협상이 매우 혼란스러워서 제가 앞으로 가야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도 모를 지경임을 그에게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대는 대로 그에게 부딪혀 갔다. 그는 8 동안 이 문제에 관해 무려 7통의 편지를 서기국에 보냈다. 마침내 7월 24일, 인내심도 돈도 한계에 다다른 그는 귀국 허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이미 그의 친구 보오나코르시는 곤팔로니에레로부터 귀국과 돈을 모두 허락받아 놓고 있었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알비아노와의 협상과 함께 그에 뒤이은 알비아노의 움직임 때문에 서기국은 끊임없는 일거리와 이야기 거리로 바쁘게 돌아갔다. 비는 왔지만 천둥까지 치지는 않았다. 8워 17일 산 빈첸조 부근에 이른 알비아노는 에르콜레 벤티볼리오가 이끄는 피렌체군을 만났고, 긴 각축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그의 군대가 거의 모두 포로로 잡히거나 무기를 빼앗겼고, 수송기구와 군기들을 잃었다. 피렌체인들은 이 승리로 자못 의기양양해졌다. 이로 인해 곤판로니에레는 대담해졌고 벤티볼리오와 계약 중재자인 자코미니는 사기가 올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피사 공략이 결정되었다. 콘살보의 원병과 우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작전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전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작전의 행로는 그들이 품었던 희망과는 같지 않았다. 9월 6일 성벽 밑에 진용을 갖춘 군대는 다음날 대포로 성벽에다 큰 구멍을 둘씩이나 뜷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보병들은 돌격을 감행할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피렌체에 아무런 성과도 안지 못하고 그곳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남긴 것이라고는 이탈리아 군대의 치욕스런 무능의 오명밖에 없었다.
용병대의 이러한 무능함은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주장을 펼칠 수 있게 해주었다. 곤팔로니에레와 그의 친구들은 그의 말에 솔깃하였다. 그들이 의심을 버리고 그 실행 방법을 논하게 되자. (그와 같은 이일 이름값을 하면서 지속되려면)이 문제가 대평의회에서 다루어져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특히 소데리니는 쵠그느이 반대와 의혹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데다 몇 몇 유력 시민드이 과연 찬성해 주겠느냐는 의심이 겹쳐, 관례대로 평시민들의 동의를 받아내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일이리 새롭고도 이례적인 것이라, 평시민들에게 먼저 시범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에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는 다른 상의 없이 오직 정무위원회의 권한만으로 무젤로와 카센티노같이 그래도 제일 군대 기질이 두드러진 지역에서 사람들을 징집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는데, 이제 그 일을 총괄하게 된 마키아벨리는 이에 적당한 인물을찾아내었다. 그는 바로 발렌티노의 악명 놓은 부하였던 돈 미켈레였다.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사로잡혀 교황에게 넘겨졌으나 그에게 고분고분하게 군 덕분에 결국 방면된 전력으 가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잔인하고도 무시무시하며 공포를 주는 인물) 아래에서 로마냐의 농민들이 군인을 변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무젤로와 카센티노의 농민들을 병사로 키우는데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인물있다.
수단보다는 목적에 더 관심이 있는 곤팔로니에레를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자의 악명과 발랜티노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을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더욱이 선량한 소데리니에게 보르자의 악행을 답습할 인물이라는 의혹이 일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현실이 아닌가! 마키아벨 리가 조밤바티스타 리돌피, 피에로 귀차르디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의향을 슬쩍 떠보았지만 모두가 반대쪽이었으므로, 곤팦ㅍ로니에레는 더 이상의 조언이 없이 그 안건을 80인회의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반대자들으 분개했지만 결과를 기다리른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구성된 민병대가 관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으 것인가는 여전히 두고 봐야 될 사항이었지만, 마키아벨 리가 자신의 대전투에서 이미 승리했다는 점은 혹실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방핼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모병을 위해 무젤로로 갔다. 1506년 새해 초하루, 그는 이 새로운 제도를 빨리 실행에 옮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는 혹독한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1월 2일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자신이 전날 뽑은 사람들에 대해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익살스러운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저를 이리저리 걸어 돌아다니게 만드는 걸 보니 제가 위원님들과 이 삭풍에게 잘 보였나봅니다.)
10인위원회는 찬사와 격려의 편지로 이에 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따로 격려가 필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농민들의 저항을 잘 무마해서 기꺼이 무기를 들게 만들었음을 본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 아래에는 과세와 관련된 어떤 계산된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마을과 마을, 파벌과 파벌 간의 적대심을 잘 다스리고 있음도 본다. 며칠 만에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곧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다시 물젤로로 간다. 1월 27일이 되면 그는 폰타씨에베에서 그곳 사람들의 모병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디코마노와 산 고덴초로 갔다가, 새로이 구성된 보병대를 시찰하기 위해 다시 폰타씨에베로 되돌아온다.
이 병사들은 (흰 방한 조끼에다 흰색과 붉은색이 섞인 바지를 입고, 흰 군모를 쓰고 군화를 신고 쇠로 만든 가슴가리개르 착용한 채, 일부는 창을 들고, 일부는 총을 가지고)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들을 (스위스식으로 훈련받도록)하였다. 즉 독일식이라 뜻이다. 피렌체에서 의 첫 사열식는 1506년 2월 15일 사육제에 맞추어 정무궁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른바 현인으로 불리는 유력 시민들은 기분이 상한 나머지 (이 행사를 크게 비난하였다). 하지만 평시민들은 환호하였다. 훌륭한 시민이었던 란두치가 그 광경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일기 Diario)에다 써놓은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이른바 현인들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피렌체 시에서 열렸던 어떤 행사보다 더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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