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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avelli's peace

독일 사절의 시기

by godfeeling 2020. 8. 20.

피사 전쟁과 탈환
  소데리니 곤팔로니에레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고 좀더 나아진 경기 덕분으로, 피렌체는 다시 번영하였으며, 지도자가 훌륭하고 현명하며 정치를 잘 해나갈 때 그 나라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행복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는 도시가 파탄 지경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는, 자신의 사적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사에서도 극도의 절검 정책을 실시하는 등, 무엇보다도 재정을 일으켜 세우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유능한 행정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4년 뒤, 재정 상태가 개선되면서 국가의 신용은 되살아났고 세금은 경감되었다.  그는 시민을 신뢰하였고 시민들 역시 그를 믿었다.  반면에 그에 대한 일부 유력 시민들의 의심과 증오는 더욱 켜졌다.  알라만노 살비아티와 조잡바티스타 리돌피 등을 앞장세우고 있던 이 소수의 유력자들에 대해 그는 그리 적절하게 대처하기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랬다.  곤팔로니에레는 소위원회들에서 그들의 분별력과 명성이 자신을 앞서는 것을 보고는, 정무위원회나 80인회를 통해 국정을 처리해 나가는 쪽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곳은 좀더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의 관직이 주는 권위와 공무상의 경험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결국 유력 시민들의 의심과 원한은 더욱 증폭되어 이제는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사사건건 반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소데리니는 자신의 계획이 그들의 반대에 부딪힐 때면, 거의 언제나 더 쉽게 찬성을 얻을 수 있는 쪽에 기대어 고집스러울 정도로 그것을 참아내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곤 하였다.
  이미 얘기했듯이, 곤팔로니에레를 향한 이러한 증오는 동시에 마키아벨리에게도 쏠리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곤팔로니에레의 도구이자 거간꾼이라는 의미에서 만네리노 mannerino(아참꾼, 정탐꾼 등의 뜻을 가짐 - 옮긴이)라고 불렸다.  조금 앞서 알라만노 살비아티가 그를 (건달)이라고 우아하게 부른 것도 이 근사한 별명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마상 시합에서 주인뿐 아니라 종자 역시 어느 정도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앞의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목격한 바 있으나, 또 다른 타격이 곧 뗠어질 것이었다.  
  줄리오 2세는 잠시 조용한 상태였으나 이탈리아의 평화는 1507년초 제노바의 반란으로 깨어져 버렸다.  물론 반란을 프랑스 왕이 개입하여 신속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있은 프랑스 왕과 개입하여 신속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있은 프랑스 왕과 아라곤 왕 간의 회담은 아무런 결실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두 왕이 이탈리아를 떠나자, 막시밀리안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그는 콘스탄츠 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망령과 독일의 명에를 부추김으로써,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프랑스 왕을 롬바르디아에서 쫓아내고 로마에서 황제의 보관을 수여 받는 데 충분할 정도의 군대와 돈을 약속받고 있었다.
  피렌체인들에게 막시밀리안의 명성이란 거의 비웃음 거리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땅에 떨어져있었다.  그는 선군이자 용맹스럽고 당당한 군주로서의 품성을 과시하기엔 영토상의 거리에서나 기세에서나 피렌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들이 본 것이라고는 단지 황제가 원대환 계획과 그에 따라주지 않는 수단 사이에서 헛되이 방황하는 좋지 못한 모습뿐이었다.  그러나 의회는 최근 그에게 했다는 약속의 소식이 들려오자, 지금까지 분열되어 있던 세력들이 독일의 자존심이라는 이름 아래 갑자기 결집될지도 모르며, 그러한 세력을 손에 넣은 막시밀리안이 더욱 대담하고 결단력 잇게 나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사 피렌체인들은 그의 준비 상황과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그가 이탈리아로 들어오려 할 대 그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면 과연 돈이 얼마나 들 것인지를 파악할 만한 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와의 선린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자신이 믿을 수 잇는 사람을 원했던 곤팔로니에레는 이 일에 마키아벨리를 선임하였다.  하지만(그가 떠날 차비를 하고 있을 때) 늘 있던 반대파로부터 (피렌체에는 그 일을 할 만한 능력 있는 청년들이 많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결국 매번 언제나 그들과 싸울 수만은 없었던 소데리니는 양보 할 수밖에 없었다.  임명 내용이 변경되었고, 6월 27일 프란체스코 베토리는 (협상을 하거나 어떤 결정을 하지 말고, 단지 지켜보고 보고하라는 ) 일반적인 임무를 가지고 황제에게 파견되었다.
  이 일로 인한 굴욕감이 서기장보다는 곤팔로니에레에게 더 컸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건 직후, 당시 사절로 나가 있던 필리포 다카사베키아와 알레싼드로 나시는 마키아벨리에게 이 일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그를 위로한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피비차노에 나가 있었던 필리포는(독일의 승리(마키아벨리의 virus에 반대한 알라만노의 이름 뜻이 원래 독일 혹은 독일인 alamanno=alemanno임을 빗댄 말 - 옮긴이)에 대해 참을성 있게) 대처하면서 그를 저지했다고 뽐내는 사람들에게 너무 괘념치 마라고 말했다.  카쉬나에 있었던 알레싼드로는 (친애하는, 그리고 결코 불행하지 않은 마키아벨리)가 (제국 사절이라는 것을 배설함)으로써 무언가 알 수 없는 병으로부터 회복한 것을 축하하며, 자신을 마키아벨리가 독일로 가지 않고 피렌체에 머무르는 쪽이 그들 위해서나 도시를 위해서난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8월 9일 마키아벨리가 다시 길을 떠나게 된 것은 역시 독일건 때문이었다.  교황은 카르바할 추기경을 막시밀리안에게 사절로 보냈는데, 그가 가는 길에 피렌체를 거쳐 가야 했으므로 10인위원회는 서기장을 보내 그의 수행원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시에나는 그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먼저 시에나로 갔다가가,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 다음에는 산 킈리코 드르차로 갔다.  그는 10인위원회에 세 통의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이 거느린 마소와 사람 수를 알린 뒤, 세련된 피렌체인의 입장에서 (그들 대부분이 마치 감방에서 막 나온 듯이 궁상스런 모습)이라며 교황청 조신들의 저질스러움을 거듭 입에 올렸다.  더불어 자신이 입수한 정보도 첨부하였다.  즉 교황 사절단은막시밀리안에게게 만일 비무장 상태가 아니라면 이탈리아로 들어오지 말라고 전하라는 훈령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머리가 빠른 판돌포는 그가 오리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서기장은 (가장 가까운 길을 따라 천천히)집으로 되돌아왔다.
  황제의 남하 소식이 더욱 잦아짐에 따라, 시민들의 정신 상태와 의견 다툼도 가열되어 갔다.  피렌체의 오랜 전통에 따라 친프랑스적 경향이 강한 곤팔로니에레는 상례적인 반대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중에서도 알라만노는 그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독일인 alamammo이 독일 Alemagn을 지지한다는 뜻 - 옮긴이)) 결코 독일에 정식 사절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그리고 점점 더 사태의 촉박함을 알리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편지들이 전해져 오는 가운데, 결국 공물조로 막시밀리안에게 보낼 돈에 대한 새로운 훈령을 내리기로 결정되었다.  황제는 원래 오십만 두카토를 원했으나 지금은 그 액수가 많이 내려가 있었다.
  하지만 베토리를 그다지 믿지 않았던 곤팔로니에레는, 이 일은 매우 중요한 데다 혹시 편지가 잘못되더라도 말로 그 내용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당시 그 악명 높은 돈 미켈레의 후임으로 민병대 지휘관을 맞을 인물을 물색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일찍이 발로리를 보강하기 위해 그를 프랑스로 보냈을 때 내세웠던 것과 똑같은 핑계가 소데리니로 하여금 정적들에게 이 조그만 앙갚음을 하도록 해주었던 셈이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았다.  즉 일정한 지급 조건 아래 최고 오만 두카토까지 지급 가능하지만, 우선은 삼만 두카토로 협상을 시작하며, 그 대라고 피렌체의 주권으 제한하는 일체의 유보 조건 없이 모든 영토를 복구하여 보전케 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좋지 않은 시기의 좋지 않은 여행이었다.  12워 17일 길을 떠난 그가 열악한 도로 사정에도 불구하고 초대의 속도로 롬바르디아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이미 전쟁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프랑스 군은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사절을 (세밀하게 조사하고는) 더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 겁났던지 그가 지닌 훈령과 편지를 빼앗아 찢어버렸다.  크리스마스 동안 제네바에 머물고 있었던 그는 그곳에서 10인위원회로 가는 간단한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황제의 궁정과 베토리가 있는 볼차노롤 방향을 잡은 끝에 1508년 1월 11일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처럼 시간이 많이 걸린 데 대해, 여행 거리가 길었고 날씨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말은 지쳤고 돈도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하였다.  사실 그는 떠날 때 받았던 110두카토를 가는 중에 남김없이 써버린 상태였다.  그는 크게 우회할 수밖에 없었던 기 여정 속에서도 3일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며칠도 그냥 허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위스 땅에서 네 번의 밤을 보내는 동안, 각별히 군사적 관점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며 또 어뗜 유의 사람들인가)를 관찰하여, 볼차노에게 10인위원회에 보낸 첫 편지에서 그것을 극히 통찰력 있는 필치로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오는 도중에 만난 모든 사람들과 쉼없이 자신의 끝없는 탐구심을 시험한 결과 얻어낸, 황제의 계획에 대한 정보들도 알려주었다.  콘스탄츠에서 그는 (두오모(이탈리아에서'Duomo'란 주교좌가 있거나 또는 가장 주요한 위치에 잇는 성당을 가리킴 - 옮긴이)의 두 밀라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피렌체에 아내를 둔 유명한 음악가 아자하를 찾아본 다음, 사보야 공의 대사 한 명과 저녁을 하며 담소하였는데,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당신은 내가 몇 달 걸려서도 알아내지 못한 일을 단 두 시간안에 알고 싶어하는군요)라고 말하였다.
  그는 볼차노에 도착하여 압수됭 찢겨버린 서류의 내용을 베토리에게 말로 전한 뒤, 곧 황제를 알현하고자 나섰다.  이탈리아인들은 언제나 칭호에 관대한 편이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그를 로마인들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는 황제를 만나 삼만 두카토를 세 번에 나누어 지불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이 제의가 말도 안 된다고 즉석에서 거부당하자, 그는 돈을 사만으로 올렸다.  그제서야 막시릴리안은 만족의 빛을 보이며 다음날 대답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측근을 한쪽으로 불러, (방금 왔던 그 서기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오고, 또 10일이 더 지나가도 왕은 답을 주지 않았다  마친내 1월 24일 베토리를 부른 막시밀리안은 제의된 돈이 너무 적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조공 액수는 자신이 포 강변에 도착했을 때 피렌체 사절들과 논의하기로 하고, 지금 즉시 25,000두카토를 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이는 돈은 확실히 나가지만 언제 돌려받을지는 확실치 않은 제의였다.  베토리는 이를 거절하고 피렌체에 새로운 훈령을 청했다.  피렌체 정부와 돈 문제로 합의를 보기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고, 더욱이 이번처럼 먼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절들로서는 더 힘든 문제였다.  물론 그러한 사정이 10인위원회로서는 종종 사태를 관망하여 궁지를 벗어나는 기회로 활용되기는 했지만, 하여튼 이번 경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귀머거리끼리의 대화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 사절 임무에 관한 편지들은 거의 다 마키아벨리가 직접 자필로 작성한 것이었다.  베토리는 단지 서명만 했을 분이며, 기껏 해보았자 자필로 몇 줄 덧붙인 데 지나지 않았다.  그 자신 문필가로서의 자질이 결코 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므로, 그을 동료에게 맡긴 것이 그냥 스스로의 게으름 때문인지, 또는 서기의 봉사를 받는 것이 좋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키아벨리가 자신보다는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두 피렌체인이 스스로가 취할 태도와 보고 내용에 관해 서로 의논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보고서 속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한 대목에서 베토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니콜로와 저는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다른 한 대목에 가서는, 자신의 동료 없이는 (어떤 동료인데!)(일을 잘 알지 못했으리라)는 점을 실토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추정해 보건대, 일의 처리 과정에서 더 비중이 컸던 인물은 직위는 낮지만 눈의 예리함과 연륜에서 앞선 쪽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다른 경우에 니콜로는 비록 대사 직함은 가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역할만은 그러하였던 적이 종종 있었으나, 이번 경우에는 그러한 역할조차도 부여받지 못한 처지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앞장서 남을 이끄는 성품을 타고 났고, 이 편지들에서 베토리 필적이지만  사실은 그가 쓴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그의 역할을 단지 글을 받아쓰는 것 이상이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협력 관계에서 둘 중 누구의 몫이 얼마만큼인가를 판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 사절 임무 그 자체는 마키아벨리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리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이 일은 다니지 그가 독일 세계와 접촉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뿐이다.  비록 그러한 접촉의 시간이 매우 짧았던 에다, 관습과 사고 방식이 크게 달랐을 뿐 아니라 말까지도 다른데서 오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의 마음을 열어주는 또 하나의 창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그가 카이사르의 안내로 프랑스에 갔다면 독일여행에서 그를 안내해 준 인물은 타키투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와 같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5세기에 태어난 한 피렌체인에게는 그 광대한 영토까지도 틀림없이 매우 야만적으로 보였을 한 나라 중에서도, 그가 본 것은 타키투스의 기술에 따르자면 알프스의 험지에서 가장 인접한 스위스와 티롤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북쪽의 대도시들이 누리고 있던 부와 문화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항상 일을 정치와 군사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그로서는 그러한 지식이 별 쓰임새도 없긴 하였다.  하지만 피렌체로 돌아온 뒤 하루만에 쓴 그의 (독일 보고서 Rapporto delle cose dell'Alemagna)는 글이 착상된 환경으로 미루어 오히려 자연스러운 오류와 생략과 편견들이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직관력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마키아벨리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은 어떤 특정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번뜩임인 것이다.  이 (독일 보고서)는 뒤에 (독일 관찰기 Ritratto delle cose della Manam)로 발전하는데, 그는 여기서 문체와 체제만을 개선했을 뿐 그 이사상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독일 서적상들이 무언가를 문의한 사실로 보아 그가 독일에 관한 어떤 자료들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보통은 베네치아의 보고서가 이 피렌체인의 것보다 낫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베네치아 사절들은 사건의 외양을 세밀히 기술하는데 힘쓰는 반면, 마키아벨리는 일의 핵심을 직관적으로 포착한다고 말하는 쪽이 더 사실에 가깝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티롤에 마련한 자신의 조그만 관측소에서 탐색하고 숙고하면서, 사보야 공의 대사가 두 달이 결려서도 알아내지 못한 내용을 정말로 단 이틀만에 파악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독일 민족의 힘과 그 정치적 취약성 사이에 놓인 영원한 간격을 꿰뚫어봄으로써 이 두 요소가 균형을 잡고 길을 찾아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비극적 현실을 거의 예감하기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좋지 않은 정치 환경 아래서 막시밀리안은 불행히도 당분간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회가 약속했던 돈과 군대의 일부조차도 모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두 피렌체인들 역시 자국의 인색함과 (비스킷도 제대로 없이 갤리선을 탄) 황제 사이에, 그리고 10인위원회의 불분명한 훈령과 그보다 더 불확실한 황제의 태도 사이에 끼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만약 막시밀리안이 정말 침입을 결행하리라고 판단된다면 액수를 오만이나 육만까지 올릴 수도 있다는 훈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가 이럴지 저릴지는 베토리도 마키아벨리도 모르는 일이었고, 어욱이 막시밀리안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새로운 군대의 도착으로 그의 계획이 힘을 얻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미 그를 떠나가는 다른 군대로 인해 분위기는 냉각되고 있었다.  그의 각료 한 사람이 황제를 한 번은 속일 수 있어도 두 번은 속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 마키아벨리는 이에 빈정거리는 어저로 되받기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일을 통해 매번 알면서도 속는 수가 허다한데, 궁정의 기류가 수시로 바뀌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탈리아 원정을 향한 바람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프랑스 사람들의 수다에 익숙해 잇던 피렌체인으로서 더 어리둥절한 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조차 쉬쉬 하며 감추는 이곳의 거의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비밀스런 분위기였다.
  공대한 크기의 영토와 원거리로 인한 자국과의 통신상의 난점에다 이러한 비밀주의까지 겹치자, 마키아벨리와 베토리는 (마치 자신들이 무슨 잃어버린 고도(고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 피렌체인은 다른 사람들과 함계 황제를 따라 모든 사절들이 모여있던 트렌토에서 볼차노와 메라노로 차례차례 옮겨갔는데, 알려지기로는 군대의 이동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황제의 첫 움직임은(왕의 군대라기보다는 차라리 소제후의 군대)에 더 가까울 정도였다.  특히 베네치아가 카도레에서 그의 수염을 멋있게 뽑아버린 이후로는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러자 막시밀리안은 도움을 청하려고 울름에서 의회를 소집했는데, 당시 베토리가 병중에 있였기 때문에 마키아벨리 혼자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가지 않았다.  그는 볼차노에서 궁정이 있던 트렌토까지의 짧은 여행을 빼고는 죽 베토리 옆에 남아 있었다.  이는 우리 후세인들에게는 손실이겠지만, 둘 사이로 보아서는 좋은 일이었다.  바로 이 사절 시기를 시작으로 피렌체 서기장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우정이 싹튼 것이다.  그가 비록 이러한 관계로부터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어떤 것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둘 사이의 우정은 그에게 자신의 훌륭한 편지글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억될 만한  것을 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베토리에게는 바로 그 당시의 마키아벨리라는 존재가 너무 소중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도착 당일 바로 10인위원회에다 동료를 데리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베토리는 자필로 오히려 반대의 뜻을 전하였다.  (원컨데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를 머물게 해주십시오.  그는 여기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윽고 3월 13일 그들 둘은 함께 인스브루크로 이동했다가, 볼차노를 거쳐 트렌토로 되돌아왔고, 바로 그곳에서 황제의 최종 대답을 들었다.  그의 요구는 육만 두카토를 세 번으로 분할해서 지불하되, 각각의 시간 간격은 짧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0인위원회로부터 특히 돈 문제를 포함하여 확고하고도 분명한 훈령을 받아내기 위해, 마키아벨리는 다시 편지 쓰는 작업에 노력을 쏟아부었다.  5월 30일자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애하는 여러 정무위원님들게 말씀 올립니다.  정부가 자아놓은 실이 이처럼 너무 가늘어 정작 베를 짤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저는 이미 아무도 그의 침입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점을 써 올린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그럴 수 잇고 또 의지에 따라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누구도 그가 침입하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한번도 그런 결정을 내린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그러리라는 징후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결론은 이러하였다. (필요한 것은 두 길 중 하나를 택하되, (...) 어느 쪽이 덜 위험한가를 살피고, 일단 그 길에 들어서면 신의 이름으로 마음을 단단하게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릇 이처럼 큰 일을 콤파스로 어설프게 재려고 덤비다가는 단지 실소만 범하게 될 뿐인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은 다시 한번 이른바 (사간의 이점)을 택한 피렌체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또다시 베네치아 군에 패배햐였고, 수중에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프리울리 전 지역과 끝으로 피우메만이 남았을 때, 베네치아와 휴전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말해서 쌍방은 빼앗은 만큼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모든 영토는 베네치아에 돌아갔고,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손실과 치욕뿐이었다.  이탈리아 원정도 로마에서의 대관식도, 프랑스에 대한 응징도 제국 권위의 회복도, 모두가 허망한 꿈으로 남게 되었다.  피렌체인들은 결코 허깨비를 현실로 잘못판단하지 않았고, 그래서 주어야 마땅한 액수 이상의 돈을 주는 일도 없게 된 셈이었다.
  6월 10일, 베토리가 궁정에 다시 합류할 채비를 하고 있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이제 독일 문제에는 식상한 데다 결석(결석)까지 있어서 치료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고는 트렌토를 떠났다.  그는 귀향길을 재촉한 끝에, 14일에는 이미 볼로냐에 도착하였고 16일에는 피렌체에 닿을 수 있었다.
  그가 그처럼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데는 결석증 말고도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작용했을 것임이 틀림없을 테지만, 그는 귀향 직후 또다시 전장의 고달픔을 참아야만 하였다.  공화국은 피사 문제를 이번에는 확실히 끝낸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팔망미인인 서기장은 먼저 산 미니아토와 페쉬아로 가서 민병대를 모집하고는 그들을 대동하고 폰테데라에서 다시 모병한 뒤, 그곳으로부터 피사로 갔으며, 8월 21일에는 포위 상태에 있는 도시 주변을 초토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 왕아. 그리고 이어서 아라곤의 왕이 불쌍한 피사인들을 어여삐 여겨 이리저리해서 결국 150,000두카토를 받고 그들의 손을 들어준 후에, 피렌체는 피사 공략에 훨씬 더 열성을 보이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그들의 새로운 민병대를 시험하여 소득을 올릴 기회였다.  마키아벨리에게는 희열의 순간임과 동시에 우려의 순간이기도 했다! 10월에 시작하여 11월과 12월에 연이어, 그는 모병과 사열을 위해 산 미니아토와 발디니에볼레, 키안티 교구와 발디체치나 등지를 돌아다녔다.
  1509년 1월말, 이미 그는 민병대와 함께 물리나 디 쿠오사에서 경계 근무에 들어가 있었다.  2월 중순에는 포위된 도시에 대한 외부 원조를 끊기 위해서 피우메모르토 강 하구에 배치된 천 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아르노 강과 모든 운하는 다리와 말뚝과 성채로 차단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군대의 훈련과 경계 근무와 노역과 그 외 모든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이 편지들이 80인회에서 읽혀지자, 부오나코프시는 그에게 평상시에 쓰던 그런 편지를 보내다라고 부탁했으나 소용 없었다.  10인위원회는 (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니던)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당신의 어깨 위에 이 모든 일을 맡겼다)고 썼다.
  그러나, (준둔지에서 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은 오직 니콜로 마키아벨리 외에는 없을 정도로), 그가 어깨에 진 짐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알라만노 살비아티와 안토니오 다 필리카이아가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인 3월 4일, 마키아벨리는 포위된 도시를 돕지 않는다는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자청하여 루카 공화국으로 갔다.  감독관들이 도착하자, 10인위원회는 그를 피옴비노의 군주에게로 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피사인들이 그에게 피렌체와의 협상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그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 아니면 (시간을 벌기)위한 술책인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대 전쟁의 조짐이 일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무언가 실낱같은 것이라도 기대할 여지가 있었다.  반면 피렌체인들로서는 이미 밥을 한 술 뜬 상태에서 지금은 결코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갔다.  그리고 3월 14일 야코ㄹ포 다피아노(피옴비노의 군주 - 옮긴이)와 피사의 사절단을 만났다.  사절은 일반적인 말로 말머리를 뗐으나, 자신들의 정무위원이 동석하지 않는 한 어떤 결론적이 말도 할 수 없다고 나오자 논쟁은 격화되었다.  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들어 보자. (저는 앞부분의 말에 대해서는 제 생각에 따라 대답했습니다.  뒷부분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셈이기 때문에 저 역시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으며, 저의 대답이 듣고 싶다면 그들부터 무언가 알맹이 있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생명과 명예와 재산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고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답을 원한다면 먼저 어떤 정도의 보장을 바라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고, 만약 그 요청이 합리적이고 존중해 줄 만하다면, 우리 정부는 단지 복종을 바라는 것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협상은 깨어졌으나, 마키아벨리는 피사의 사절들간에 의견 차이가 나도록 유도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이 과정을 피옴비노에서 10인위원회에 편지로 보고했으며, 그 뒤 피렌체에 돌아와서 직접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전장의 생활을 병사들과 나누기 위해 되돌아왔다.
  4월 16일 그는 니콜로 카포니가 감독관으로 전군을 위한 후방 업무와 보급을 관장하고 있던 카쉬나로 자신을 보내려는 것이 10인위원회의 뜻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곳에 있는 것이 덜 위험하고 힘도 덜 든다는 사실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애초에 제가 위험이나 힘든 일을 마다했다면, 피렌체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정무위원님들게 바라건데, 저로 하여금 이 주둔지에 남아 감독관들과 함께 관련 문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여기서는 제가 무언가 소용에 닿지만, 그곳에 가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좌절감으로 죽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애국심을 볼 수도 잇을 것이다.  하지만 신랄하고 조소적인 그의 또 다른 면모 아래에서 불쑥 솟아나곤 하는 그 열정적인 성격은 또 얼마나 우리를 매혹하게 하는가!
  그래서 그는 민병대를 나누어 배치해 놓은 세 군데의 주둔지를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병사들은 총감독관보다 그의 권위를 더 인정하였으며, 이에 화가 난 살비아티가 어느 날 한 지휘관에게 평상시와는 다른 과격한 언사를 쓰는 일까지 벌어졌다.  마키아벨리가 편지로 이에 항의하자, 그 역시 편지로 답하여, 자신은 그 지휘관을 모욕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화를 낸 것은 그가 감독관의 권위에 적절한 존경심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들이 자네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어한다해도, 자네가 언제 어디서나 그들을 통솔 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그들이 항상 자신들과 매일같이 생활하는 자제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복종심을 더 키워야 하고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더 잘 알아야 할 것이네.)
  5월 중순께, 마키아벨리는 보급선을 더 효율적으로 짜기 위해 이삼일 간 주둔지를 떠나 피스토이아로 갔다.  하지만 전쟁은 그쯤에서 끝나 있었다.  5월 20일, 그는 감독관들과 함께 피사 사절들을 만나 항복의 첫 단계에 관해 협상을 벌였다.  그가 자필로 10인위원회에 쓴 몇 통의 편지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진행 과정을 말해 주고 있다.)  피사의 항복 사절이 피렌체로 갔고, 어디에나 모습을 빼놓지 않는 그도 행동을 같이하였다.  하지만, 막상 합의에 도달해서 조약이 체결되고 항복 조인식을 하는 자리에 이르자, 그의 이름은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래에 씌어 있었다.  15년의 긴 전쟁 끝에, 드디어 8일 피렌체 감독관들은 피사에 입성했으며 마키아벨리와 그의 민병대 역시 그들과 동행하였다.
  나는 당시 피렌체인들이 승리의 희열을 만끽하면서도 과연 얼마나 이 범상한 지위의 서기장에게 그러한 승리의 몫을 인정해 주고 그에게 마땅히 돌아갈 만큼의 찬사를 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는 바로 당일 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이처럼 영광된 장소에 당신이 함께 했음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결코 적지 않은 역할을 한 데 대해서도 치하드립니다.) 글은 계속된다.  (감히 말하건데, 당신이 민병대와 같은 훌륭한 조직을 만들어내었기에 그처럼 늦지 않고 신속하게 피렌체의 영토가 회복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신께 맹세컨데, 너무 기뻐서 우리는 당신에게 키케로식 연설이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필리포 다카사베키아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고귀한 도시를 정복한 위업을 천번 만번 축하하네..  사실 이 일은 실질적으로 자네 작품이고, 어쨌든 자네의 기여가 컸던 것 아닌가.) 이어 글의 어조는 더 강해진다.  (자네의 철학이 우둔한 사람들에게까지 이해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지.  내 말을 이해하리라 믿네. (...) 날이 더할수록 나는 자제야말로 유대인이나 다른 민족들이 가졌던 대예언자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네.  오, 니콜로여,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라네)
  마키아벨리는  그 승리를 입성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대리석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살비아티(그는 입성 직후 말라리아로 피사에서 사망하였다), 피리카이아, 카포니의 이름만이 그곳에 박혀 있었다.  그는 단지 종이에 쓰인 이러한 찬사에 만족했을 따름이다.  언제나 결과를 바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시로는 혹시라도 과장과아첨이었을지도 모를 이러한 찬사는 이제 단순명료한 진실로 바뀌어지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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