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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avelli's peace

12시 정오

by godfeeling 2020. 8. 20.

  마키아벨리가 프랑스로부터 보고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이었다.  즉 교황과 왕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있으리라는 것과 피렌체는 어쩔 수 없이 그 전쟁에 휘말리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먼저 군사적 측면을 고려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못 된다.  그의 기본 신념을 결국 보병이 전투를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기병과 맞싸울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반면 자신이 만든 민병대에는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곤팔로니에레와 10인위원회를 설득하여 민병대 편제 안에 새 기병이 아니라 석궁과 총을 휴대한 경기병으로 토스카나의 농촌 사람들로 채워질 수 있었다.
  그들을 설득하는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510년 11월 7일 10인위원회는 서기장에게 (경기병 분견대를 만드는) 임무를 맡겼다  분명히 이는 법으로 그 제도를 확정하기 전에 저번 보병의 경우처럼 일단 시험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발디키아나에서 첫 모병이 있었고 마키아벨리는 이를 위해 11월 13일에서 29일 사이, 12월 3일에서 19일 사이에 두 번에 걸쳐 그곳에 갔다.  두 번째 방문 초입에 그는 시에나로 가서 얼마 전 시효가 끝난 시에나 공화국과 피렌체간의 휴전 협정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화성궁의 영향 아래(화성은 그리스 신화에서 군신(군신) 마르스의 별을 가리킴 - 옮긴이) 한 해를 마감한 마키아벨리는 1511년 새해를 들어 군사에 관한 일에 더욱 많이 관여하게 되었다.  1월 5일, 그는 줄리아노 다 산 갈로와 함께 피사의 성채를 둘러보고 그 상태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가서 6일 간 머물렀다.  14일에는 같은 이로 아레초로 갔으며, 2월 15일에는 시에나의 공격을 막은 피렌체의 요충지인 포초 임페리알레로 향했다.  이제 그는 서기장에서 공화국의 군사 전문가로 바뀌어 있었다! 3월 14일 그는 경기병 100명을 모집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발디키아나로 가서 그 달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모병된 사람들에게는 (4월 한달 동안 기병으로 복무하는 대가로 일인당 10인두카의 금화가 지급되었다. )21일에는 그곳으로 되돌아와 100명의 졍기병을 피렌체로 인솔해 왔으며, 그 첫 사열식으 백야의 주일 la dominica in Alvis(부활철 이후 첫 일요이를 일컬음 - 옮긴이)에 실시 되었다.  민병대는 이런 식으로 점점 발전되어 나갔다.  그것은 훌륭하고 좋은 제도였으나 너무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뿌리룰 내리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평화가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 피렌체 공화국의 시간은12시 정오를 향하고 있었다.  그 동안 소데리니 정부라는 솜씨 있는 키잡이 밑에서 평온한 바다 위를 순항해 왔으나, 교황 줄리오 2세의 격한 성품으로 인해 파도가 거칠게 일어나면서 항해는 어려워졌다.  외부로부터 오는 이 같은 압력은 곤팔로니에레의 적과 메디치 간의 지지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더해 주었다.  그들은  근 들어 수적으로나 자신감으로 부쩍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피에로가 죽은 후 메디치 가는 그 생전의 통치 방식과 귀양으로 잃었던 만큼의 지지자들을 다시 규합할 수 있었다.  조반니 추기경과 점잖은 줄리아노처럼 잔존한 동생들이 보여준 인간다움과 관대함도 지지자를 늘리는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추기경은 로마에 사럭나 그곳에 들르는 피렌체 사람들엑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무엇이든 아낌없이 도와주었는데, 그이 이러한 모습은 (지독히 인색하고 오직 자신만 아는) 소데리니 추기경과 큰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피렌체에선 그와 그의 가문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곤팔로니에레는 이런 일들로 마음이 크게 상했으나,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다만, 조반니 추기경이 자신의 우호적인 이미지를 드높일 생각에서 거액의 지참금을 미끼로 피에로의 딸 클라리체와 명망 있던 청년 필리포 스트로치를 피렌체 시내에서 결혼시키려고 하자, 곤팔로니에레가 크게 화를 니며 필리포를 어떻게든 벌주려고 애쓴 일 정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그의 분노는 극도로 치달아, 마키아벨리에게 법에 따라 8인감찰위원회에 비밀리에 제출될 고소장을 (솜씨와 논리를 초대로 발휘하여) 작성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스트로치 가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벌은 미미한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양가문 사이의 이러한 경쟁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이미 1508년초였다.  그러다가 1510년말, 필리포가 자신의 열성과 술책에 제 스스로 말려드는 바람에 곤팔로니에레를 살해하려 한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 주모자인 프린치발레 델라 스투파는 자신이 메디치 추기경으로부터 그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뒤에는 아마 교황이 있을 것이라고 뽐내듯이 말을 뱉어내었다.  이를 통해 소데리니는 어떤 조치를 취할 기회를 잡았다.  1511년 1월 3일, 8인감찰위윈회는 누구든지 메디치 추기경 또는 그의 동생 집에 머루거나, 혹은 그들과 어떤 거래를 하는 것만으로도 반역자로 간주 될 것이라고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로마냐에서는 프랑스 군이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1511년초 줄리오 2세는 미란돌라를 빼앗는 놀랄 만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이 일이 놀랍다는 것은 그곳의 위치가 전략상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나이든 교황이 전쟁터에서 보여준 개인적 용기 때문이었으므로, 이로 인한 영예는 교황청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직후 그는 페라라에서 패배했으며, 급기야는 5월 21일 에 가서는 로마 다음으로 교회의 주도(주도)인 볼로냐까지 잃고 말았다.  게다가 교황 자신이 당연히 의지해 왔고 또 불패로 생각해 왔던 교권이라는 무기조차 오히려 그에게 창 끝을 들이대고 있었다.  교회령 국가내의 도시들에는 9월1일 피사에서 공의회가 소집되니 교황은 그곳에 직접 출두하라는 내용의 파발이 돌았던 것이다.  그는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채, 라벤나로, 이어서 리미니로 물러 났으며, 난생 처음으로 그 불굴의 정신이 평화에 대한 마음으로 꺽이는 듯이 보였다.
  만일 왕이 승기의 이점을 잘 살리기만 했어도 전쟁은 교황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존중의 뜻에서건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건 군대를 뒤로 물려버렸다.  그로서는 스스로가 공격받은 쪽이 아니라 마치 공격한 쪽인 양, 승리자가 아니라 마치 패배자인 양, 교황 앞에서 겸손함을 보여주려 한 셈이었다.  하지만 왕의 바로 이러한 유약성이 교황의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프랑스의 승리를 질시한 아라곤 왕이 슬쩍 그를 자극하여 희망의 여지를 불어넣자, 곧 이전의 호전성을 되찾았다.  그가 취한 첫 조치는 자신의 군대가 패배한 이후에도 여전히 스스로의 수중에 남아 있던 교권의 무기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이로써 앞서 적이 열겠다던 공의뢰를 무산시키고, 적어도 이 측면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되자 분리파 추기경들의 대리인이 자신들의 공의회에 관한 문서들을 피사에서 간행하였다.  교황은 이에 격노하여 피렌체 상인들을 벌주고 도시를 금령에 처하겠다고 위협하였다(당시 피사는 피렌체령이었음-옮긴이).  피렌체인들에게는 첫 번째 위협이 더 무서운 것이었다.  그들이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왕의 압력을 받아들인 것은 줄리오가 나락에 떨어져 있있던 반면  황제는 피사 공의회 개최에 열성적이었던 시점이었고, 프랑스와 독일의 사제들이 그 곳에서 대규모로 만나리라 예상되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귿들도 보고 있듯이, 이제 줄리오는 그토록 맘ㅎ은 패배를 겪고 병이 들어 죽는다고까지 소문이 났으면서도 몸과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반면 황제는 으레 그렇듯이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머뭇거리고 있었고, 공의회는 겨우 세 사람이라는 소수의 대리인들에 의해 아무런 위용도 갖추지 못한 채 열릴 예정으로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이 커다란 위험에 노출되어 었으며 교황의 분노에 손쉬운 목표물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리인들에게 추기경들이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공의회를 진행시키지 말라고 명한 뒤, 사람을 보내 추기경들을 오지 못하게 하고 프랑스 궁정에는 제발 이 문제의 공의회를 자신들의 영토 바깥 멀리로 내보내 주도록 간청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마키아벨리가 선임되었는데, 이번 일에는 솜씨 있고 믿을 만한 데다 무엇보다도 기민하고 민첩한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미 앞서의 내용으로 독자들은 눈치 챘을지 모르지만, 서기장이라고 그때까지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5월 5일에는 그는 모나코의 군주인 루차노 그리말디를 만났다.  그의 행위를 응징하고 다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마키아벨 리가 그곳으로 가는 중에 받았던 조약에 관한 훈령 때문에, 그 임무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해적 행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조약 상대국의 일연의 행동들에 대해 도저히 점잖게 묵과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화국으로서 모나코에서 서명된 문서가 거의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고, 마키아벨리의 경력에서 볼때는 (자신이 (대사)라고 불리는 것을 듣는 작은 만족감을 제외하고!), 그것에 쏟은 적지않은 시간과 고생스러웠던 여정의 기억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6월 5일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곧 시에나와의 새 조약 체결에 뛰어들었다.  이 거래는 페트루치가 자신의 이익을 노리고 교황을 사이에 넣어 진행시킨 것인데, 시에나로서는 조약의 대가로 몬테풀차노를 반환해야 했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셈이었다.  이 후 그는 8월 24일부터 9월 7일까지 새 민병대에 배치할 백 명의 기병을 더 뽑기 위해 발다르노 위쪽 지역과 발디키아나, 카센티노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는 이 일에서 돌아오자마자 곧 프랑스로 가는 네 번째 사절 임무를 준비하였다.
  그는 9월 10일 길을 떠나 12일에는 파르마와 피아첸차 사이에 위치한 보르고 산 돈니노에 도착했다.  카르바할, 산 말로, 코센차, 산세 베리노 등 교황에 대항한 6명의 추기경들 중 4명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먼저 가장 중요한 인물인 카르바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서 코센차와 산세베리노가 합류하였고, 결국에는 그들 모두가 산말로를 만나러 갔다.  서기장은 이 세 번의 회합에서 시종일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즉 교황이 화를 내는 바람에 피렌체인들은 곤경에 처해 있으니 피렌체 가까이로 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아직 공의회에 필요한 준비들이 갖추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교속 양쪽으로 힘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 있으므로, 공의회를 동요시키지 않도록 행동해 달라)는 요청도 있엇다.  추기경들은 마키아벨리를 문 밖에 세워놓고 두 번에 걸쳐 장시간 토론한 끝에, 그들이 피렌체로 가지는 않겠지만 대신 열흘에서 열이틀 안에 폴트레몰리를 경유하여 피사로 갈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서기장은 그들의 말에서 이미 공의회에 대한 열기가 많이 사그라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밀나로까지 가서 그곳 프랑스 총독에게 자신의 임무를 설명하였는데, 공의회에 대해 자신이 왕에게 말할 내용을 빼고 단 지 피렌체인들에게 닥친 위험에 관해서만 언급하였다.  그리고 난 뒤, 15일 느지막한 시간에 다시 프랑스를 향애 길을 떠났다.  그는 말을 재촉해서 22일 왕이 머물고 있는 블로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작년 마키아벨리와 교체해서 부임해 왔던 로베프토 아차이우올리가 여전히 대사로서 피렌체를 대표하고 있었다  서기장은 다음날 그와 함께 왕을 알현하였다.  그날은 교황이 피렌체에 금령을 선포한 날이기도 했다. (마키아벨리의 정중한 인사가 있은 후), 두 피렌체인은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왕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모든 논점들을 압축한) 문서를 왕 앞에서 낭독하였다.
  그는 먼저 공의회 시도를 끝내고 합리적인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피하라고 권유하면서, 피렌체가 중재 역할을 맡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왕은 평화에 애착을 보이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께 바라건대, 당신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공의회가 교황을 조약에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계획된 것이라는 반론을 폈다.  따라서 그것을 지금에 와서 취소한다면 그에게 물린 재갈을 도로 풀어주슨 셈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기한 두 번째 논점은 공의회를 피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즉시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하기를, 공의회를 그곳에서 연다고 이미 선포한 상황에서 장소를 옮긴다면 명분에 손상이 갈것이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앞의 두 논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작성된 마지막 세 번째 논점은, 공의회 개최를 두세 달 연기하여 공화국이 스스로를 강화할 시간적 여유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한 그렇게 했으나, 이는 사실 (시간을 벌겠다)는 피렌체의 통상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  혹시 교황이 죽는다든가 또는 다른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그들이 처한 위험이 해소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왕은 이 마지막 논점은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왕의 명으로 공의회를 만성절까지 연기하라는 편지가 추기경들에게 보내졌다.
  그러므로 피렌체인들이 얻은 유일한 이점은 시간인 셈이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은 못 됐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피렌체인들은 그 힘든 여정을 무릅쓴 그들의 서기장에게 고마움을 표했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처리할 일이 남아 있진 않았지만, 되돌아가는 어려움을 겪기 전에 여독을 풀기 위하여 궁에서 약 3주를 더 머룰렀다.  이동안 그는 1-인위원회에다 직접 간략한 내용의 편지 한 통을 썼다.  우리에게는 왕과의 토론 내용을 길게 설명한 원본 편지 두통이 남아있은데, 둘 다 서명은 아차이우올리가 했지만, 한 통은 마키아벨 리가 쓴 것이고 또 한 통은 다른 한 서기가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설사 우리가 그 중 한 통만 가지고 있다 해도, 문체로 보아 누가 쓴 것인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10월 중순경, 그는 10인위원회로부터 귀환 허락을 받고, 다시 길을 되짚어와 11월 2일 피렌체에 닿았다.  그는 이번에도 미처 말에세 내릴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하는 바론 그날 새로운 임무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이미 피사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곳에는 11월 5일 시작되는 공의회 첫 회기에 참석하기 위해 분리파 추기경들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교황에 의해 추기경의 직위를 몰수당하고, 사람들로부터는 미움을 받는 데다, 사제들의 복종도 얻어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신명은 적고 위험은 큰 처지에 놓여있었다.  왜냐하면, 로트넥의 군주와 50명의 프랑스 궁사들로 이루어진 호위대가 고작일 뿐, 더 이상의 호위가 갑작스럽게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피렌체인들은 그 소수의 인원조차 싫어했으며, 호위받는 사람들 못지않게 호위대에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그리하여 피렌체 정부는 급히 마키아벨리르 파견하여, 자신의 민병대로부터 뽑아온 삼백 명의 병사로 50명의 프랑스 군을 다시 에워싸고는 추기경들을 설득하여 그들 자신과 그들의 논쟁과 그들의 야심을 모두 함께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임무르 맡겼던 것이다.
  가가 떠나고 몇 시간후, 10인 위원회는 피사 감독관 로쏘 라돌피와 안토니오 포르티나리로부터 모든 것이 평온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가능한 한 군대를 개입시키지 말고 일을 처리하라는 편지를 뒤따라 보냈다.  그래서 그는 곧장 피사로 가서 공의회의 첫 회기에 참석한 다음, 카르바할 추기경을 만났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마치 정부를 대표하는 사라므로서 죄송하다는 식의 어조로 피사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렵다는 말을 꺼냈다.  추기경은 이에 대해, 물론 그곳이 풍족하지도 안락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장소를 옮기는 것이 피렌체인들의 원하는 바라면 서로 의논해 보자고 말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자신의 말뜻을 알아챘음을 느끼고, 그들이 (토스카나에서보다 훨씬 더 복종적인 사람들이 있는) 프랑스나 독일로 옮ㄱ니는 편이 그들에게도 백번 낫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추기경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겠으며 프랑스 왕과 독일의 황제에게 편지를 써야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마키아벨리는 한술 더 떠 앞서 산 논니노에서 추기경과 동료들이 두세 회기 후에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고 한 말을 다시 상기시켰다.  카르바할은 지겹다는 듯이 그것도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하였다.  서기장은 그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행여나 피렌체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말 것이며, 복종하려 들지 않는 피사의 사제들에게 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도(그들 자신이 이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할 것임)을 주지시켰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말에다 사제들의 적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동요로 마음이 움직인 추기경들은 7일의 두 번째 회기를 끝으로 공의회란 유령을 밀라노로 옮겨가기로 작정하였다.  마키아벨리는 11일 피렌체오 돌아왔고, 추기경은 일행은 12일에 떠났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그 도시에 대한 교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는 피렌체가 소데리니 정부 아래에 있는 한 결코 조용하게 놔두지 않으리라 결심한 터였다.  그는 12월 1일에 금령을 일시 철회했다가 15일에는 그것을 원상복구시켰다.  물론 사람들은 그 소식을 무관심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아무 효용성도 없는 무기였으나, 그는 그 동안 다른 무기를 준비해 오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편에서는 회심의 일착이었지만, 장차로는 확전으로의 길을 열어놓고 스스로를 다시 한번 (이탈리아의 우환을 매개하는 숙명적 존재)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금령보다 더 효과적일 분 아니라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대해 그랬던 것만큼이나 프랑스에 대해서 재앙과 같은 존재인 에스파냐의 그 무시무시한 보병을 등에 업고, 그는 앞으로 볼로냐를 탈환하게 될 것이었다.  이어서 피렌체를 굴복시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알고 있었으나, 모두가 고통 속에 있었떤 것은 아니었고ㅓ, 더군다나 도시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곤팔로니에레의 정적이었던 유력 시민들은 비록 그들 모두가 메디치 가의 추종자들의 예외 없이 곤팔로니에레의 적이었으므로 물론 확호작약하였다.  심지어는 메디치 가의 친구도 곤팔로니에레의 정적도 아닌 사람들까지도 재정을 축내는 것을 극히 못마땅해했고, 귀차르디니의 관측과 같이 중립은 오직 강한 자를 위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중립으로 남고 싶어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에 사절로 가 있는 동안 이러한 사태와 이러한 분위기가 점점 더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그 병이 어떤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피사에서 돌아와, 자신이 출발한 후 이틀째 밤에 정무궁 첨탑에 떨어진 벼락이 서기국 사무실을 통과하여 문 위에 새겨진 세 송이의 황금 백합을 찢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곧장 프랑스 왕과 피렌체 정부 양쪽 모두에게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당시의 여느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전조를 믿었으며 그리하여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11월 22일, 그는 서기국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첫 번째 유언을 남겼다.  얼마 후 곤팔로니에레도 그 뒤를 따랐다.
  피렌체인들은 내분과 탐욕과 시간 벌기의 정책에 막혀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1512년초 아라곤의 왕에게 도시의 비범한 청년 한 명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였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이 피렌체인들은 (그에게 동맹국들의 불쾌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만한 훈령을 내리지 않았다.) 훈령을 써서 그에게 넘겨준 인물은 바로 서기장이었고, 따라서 이 위대한 정치가 두 사라믐은 당시 서로 대면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냉요을 구술한 것은 소데리니와 그의 정파였다.  그로 인해, 이 임무는 (프랑스 왕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을) 뿐, 동맹국을 달래는 데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피렌체는 점점 더 신에게서나 적에게서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을 위해서난 그 자신의 재능에 비추어서나 그에게 주어진 권한은 너무나 미미했다.  피사에서 돌아온 뒤인 1511년 12월 2일, 그는 모병을 위한 피렌체령 로마냐로 떠났다.  이듬해 2월 19일, 그는 정무궁 광장에서 300명의 기별대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3월 30일, 그동안 애쓴 결과로 드디어 그가 계획해 온 기병 민병대 안이 통과되었다.  5월말경엔 그는 내성의 수배대를 다시 짜기 위해 피사로 떠났다.  하지만 시에나로 가 판돌포 페트루치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당시까지도, 그는 여전히 하류 족 발다르노에서 모병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시에나를 거쳐 6월 6일 피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기병대 일을 보며 이럭저럭 보내다가 같은 달 15일 이후에야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 사이 사태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공화국이 전쟁을 아직 먼 후의 일로 보고  그에 맞추어 대비 태세를 해나가고 있는 동안, 줄리오 2세는 그들의 코앞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용맹무쌍한 전사였던 가스통 드 푸와를 저 세사으로 떠나보낸 라벤나 대전투의 다음날, 프랑스는 전날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황제 군으로부터 이탈한 스위스 군대의 압박에 밀려 삽시간에 전쟁에서 패배하고 롬바르디아마저 잃고 말았다.  이러허게 전세가 역전된 가운데, 피아렌차, 파르마, 로마냐의 모든 지역, 그리고 볼로냐까지 교회의 손에 넘어갔다.  줄리오 2세는 승리했고, 피렌체는 그 무시무시한 노인 앞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교황은 로렌초 푸치를 보내 피렌체가 반프랑스 동맹에 들 것과 전쟁 비용을 부담할 것을 요구해 왔다.  피렌체인들은 얼마간 돈을 내겠지만 동맹에 합류하는 것은 좀더 두고 보자고 응답하였다.  이는 어떤 제의를 거절하는 상투적인 방식이었다.  그 직후, 만토바에서 희동한 교황 동맹은 피렌체를 공격하여 정부를 교체해 버리기로 생각을 모았다.  그리하여 나폴리 총독인 라이몬드 다 카르도나가 지휘하는 에스파냐 군의 토스카나로 집입해 들어왔다.  메디치 추기경이 교황 사절로서 그들과 동행하였다.  그는 최근까지 프랑스에 의해 라벤나에 투옥되어 있다가 풀려났는데, 지금은 교황의 총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운세도 그의 쪽으로 풀려나가고 있었다.
  피렌체인들은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나라 구석 구석에서 병사들을 급조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아직 미비한 민병대를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피렌체는 군대라곤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고 능력 있는 장군도 없었다.  적에 대처하기 위해 마키아벨 리가 파견되었다.  그는 이미 6월 내내 교황군의 동향을 살피느라 바빳다.  그들내에 반정부 세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정부는 통로를 열어달라는 교황을 요구를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7월이 되자 그는 이미 전쟁의 냄새과 풍기는 무젤로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는 보병 천 명을 모아 피렌추올라에서 적군과 맞 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급히 돌아오라는 내용으로 10인위원회가 8월 24일에 보낸 편지 한 통이 도착하였다.  로 스탈레를 경유하여 진군하고 있던 에스파냐 군이 지금 바르베르노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렌체 군 지휘곤들은 군대의 주력을 도시 성벽 가까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12시 정오에 다다른 지금, 마키아벨 리가 있어야 할 장소는 바로 그곳이 아니겠는가!
  그곳에서 그는 보오나코르시의 편지를 받았다.  여기서 그는 에스파냐 군이 캄피에까지 들어왔음을 전하면서, 곤팔로니에레를 위해 (뭔가 좀 조치를 취해 보라고) 얘기하였다.  그는 적이 그렇게 코앞에까지 다가온 데 대해 (놀라서 마음이 영 편치 않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도대체 그들이 연습 삼아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왔다고 생각했던가? 이 가엾은 위인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단지 그의 서기장이 그 다재다능함으로 무슨 기적이라도 일으켜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총독이 그가 관직에서 물러날 것과 메디치 가 사람들이 사인(사인)으로서 피렌체로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자, 그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에게 맡긴 시민들뿐이라고 용기 있게 응대하였다.  또한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의 용기로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총독은 프라토로 진군해 들어왔다.  그곳에서 3,000명의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첫 공격이 격퇴되고 적이 보급 부족과 허기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곤팔로니에레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천 소마(1soma는 70-71kg임 - 옮긴이) 정도의 빵으로 좀도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할 여지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말로는, (현자들 i Savi) (평소 그의 문투로 보건데 바로 자기 자신)이 이러한 방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곤팔로니에레는 소십한 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갑자기 지나치게 대담해져서 이를 묵살해 버렸다.  두 번째 공격 앞에는 프라토의 성벽도 민병대의 기세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이전에 한번도 적군이라는 존재와 대면한 적이 없는데다가, 그 적이란 것이 라벤나에서의 패배 이후 거의 승승장구해 오다시피한 공포의 에스파냐 군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결국 프라토는 무자비하게 약탈당했다.  바로 교황 사절이 보는 앞에서 살인과 성물 파괴와 강간이 수도 없이 자행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피렌체인들은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곤팔로니에레와 같이 있었던 마키아벨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스스로의 허망한 판단에) 집착하고 있었다.  31일, 네명의 귀족 청년이 그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왔다.  그 중에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동생인 파올로도 끼어있었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보내 프란체스코를 데레오게 했다고 말했다.  이제 (홀로 두려움에 떨게 된) 곤팔로니에레는 만일 안전을 약속해 준다면 즉시 정무궁을 떠나리라 작정하였다.  프란체스코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레갔고, 밤을 도와 시에나로 향하는 그와 동행하였다.  이는 실각이라기보다는 도망에 가까웠다.  도시와 곤팔로니에레의 운명이 아직 완전히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이때 이미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냉소적 행로에 첫발을 내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소데리니의 실각으로 협상을 쉽게 마무리되었다.  메디치 가는 사인(사인)으로서 피렌체로 돌아왔고 정부가 개편되었다.  새 곤팔로니에레는 종신제에서 14개월의 임기제로 바뀌고 대평의회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이에 조밤바티스타 리돌피가 뽑혔는데, 그에게는 (유력 시민들의 수장이자,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고귀한 태생에다 위엄 있는 풍모를 갖추었으며, 그 격랑 속의 바다에서 기우뚱거리는 배를 바로 이끌어줄 훌륭한 키잡이)라는 수사가 뒤따랐다.
  그러나, 바다가 거칠건 배가 기우뚱거리건, 또는 알려진 대로 메디치 간와의 친족 관계가 그를 현혹시키고 부패하게 만들었건 간에, 리돌피는 자신의 통치 초기에 보여준 단호함과 엄격함을 지속하지 못했다.  메디치 가의 문 안에서는 추기경에 의한 모의가 계획되고 있었다.  9월 16일 줄리아노를 비롯한 음모 가담자들은 무기를 숨기고 정무궁 안으로 들어갔고, 신호에 따라 광장이 병사와 사람들로 가득 차자 그들은 곧 정무궁을 장악하였다.  팔레 palle! 팔레(단수형 (palla)는 공 모양의 메디치 가 문장(문장)을 가리킴.  즉 메디치 가를 지지한다는 뜻 - 옮긴이) 간단히 말해서, 폭력과 공포 속에서 전체시민회의 parlamento((arengo)라고도 불리며, 사제를 제외한 성년 남성 시민으로 구성되는 전체 회의를 가리킴-옮긴이)를 세우는 상투적인 방시긍로 자유는 끝장나고 말았던 것이다.  일찍이 한 사제(사보나롤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됨-옮긴이)가 피렌체 사람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경고는 대평의회장의 대리석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단지 모래 위에 씌어졌을 뿐이었던가?
  난 아네.  전체시민회의를 열자는 것은
  정권을 빼앗아가겠다는 말이란 것을
  월권적이긴 하지만 예부터 내려오던 관습에 따라 광장의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메디치 가를 지지하는 폭도들에 의해 선출된 비상개혁위원회는 행정 조직과 시민의 자유를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  9월 18일, 우선 민병대를 총괄하던 9인관제위원회가 해산되었고, 마키아벨리가 만든 민병대 조식이 와해되었다.  소데리니는 추방되고 대평의회는 폐지되었다.  곤팔로니에레로 뽑힌 리돌피는 그 자리를 (두 달이 못 가 그만두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임은 사실상 등을 떠밀리다시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도시는 로펜초와 피에로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았고, 모든 일이 메디치 추기경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소란 속에서도 마키아벨리에게 관심을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의 글에서조차 그는 잊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그가 리돌피 정권 아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공사를 막론하고 어떤 기록들에서도 이 문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전기 작가들도 기록상의 공백을 메꿀 만한 어떤 그럴 듯한 추정을 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옛 읍도파의 일원이자 소데리니의 첨예한 경쟁자이며 유력 시민 계급의 수장으로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던 인물이 평시민 출신에다가 실각한 곤팔로니에레의 행신 나쁜 (아첨꾼)정도롤 생각했든 그를 결코 좋게 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당시 서기장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고, 어디 서기국 한 구석에서 의기소침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그곳에서 (끝없이 따라오는 스스로의 불운)을 곱씹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일거리를 후딱후딱 해치우고 있었을 법하다.  그들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고, 그가 보는 얼굴들도 함께 바뀌었다.  한때 그는 정무궁에서 자신의 직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의 그는 단지 미관말직에 있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을 좋아하는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때로는 스스로의 삶 그자체이자 소명이기도 했던 그 관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까지도 품고 있었을 것 같다.  비록 정권은 바뀌었으나, 그는 자신의 펜과 자신의 재능으로 권력에 봉사하는 문필가인 것이다.  이는 예술가, 군인, 시인과 같은 경우였다.  그는 파당이 아니라  국가의 충복이었다.  그는 평시민 정부 아래서 공화국에 충실히 봉사해 왔으며, 이는 메디치 정부 아래서라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새로운 권력에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들 속에도 끼지 않고 얼마 후 자신의 글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스스로를 사람들과 메디치 가에 팔아넘기는)그런 유에도 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지배자를 단지 경멸의 눈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친 메디치적이라는 것만 확인되는 한 이름 모를 (귀부인)에게 당시의 사건드을 설명하는 글에서 그들에게 복종의 염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느느 자신이 (메디치 가에 올리는 글 Ricordo ai palleschi)에서, 권력작에게 알랑거리기 우햬 미주알고주알 소데리니의 잘못을 파헤쳐 비난하려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짓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9월 29일, 1494년 메디치 가가 쫓겨날 때 몰수된 재산을 점검하여 되돌려 주기 위해 5명의 관리가 선임되었을 때, 그는 좀더 솔직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추기경에게 현명하고도 관대한 정치력을 발휘해 주십사 진언하였다.  아마 대(대) 로렌초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러한 진언에 대해 적어도 말로나마 고마움을 표했을 법하다.
  그러나 추기경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아무런 고마움도 표시하지 않았다.  서기장이 아직도 환상에 빠져 재치와 우아함이 넘치는 자신의 글재주로 찬사와 호의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머지않아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었다.  메디치 가는 중립노선을 취했던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에게 제1서기장을 직을 그대로 수행하도록 했지만, 소데리니의 (아첨꾼)으로 행동에서나 글에서나 그토록 반 메디치적이었던 인물을 용서할 리가 없었다.  또한 물론 마키아벨리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로마나 프랑스 궁정에서 메디치 망명객들에게 그가 보인 쌀쌀맞은 태도도 그냥 잊혀질 리 만무하였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뭔가 상을 주어야할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11월 7일, 정무위원회의 결저응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제2서기국의 서기장 직과 10인 위원회의 서기장 직에서 (해임되어 그 일에서 완전히 격리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서기보였던 비아조 부오나코르시도 같은 운명이었다.  서기장 한 사람이 물러나는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적지 않았던 연대기 작가나 일기 작가들 중 어느누구도 이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마키아벨리의 불행이 자유 피렌체의 몰락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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