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
피사 전쟁의 불꽃이 조용히 사그라들고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더 큰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캉브레에서 프랑스 왕과 막시밀리안 사이에 반베네치아 동맹이 맺어졌고, 여기에 주리오 2세와 아라곤 왕이 마지못해 가세하였다. 그리하여 바로 이해 1509년 봄이 되면서 레오네 디 산 마르코(마르코 성인의 사자, 즉 베네치아를 가리킴 - 옮긴이)가 이들 모두의 공격의 받는 상태가 되었다. 롬바르디아 지역의 경우, 베네치아 5월 14일 아다의 자갈밭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곧 베르가모와 브레쉬아르 잃었다. 로마냐에서는 24일 파엔차가 함락되고 연이어 라벤나도 넘어갔으며, 교황의 2개국 연합군에 밀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리미니와 체르비아를 포기해 버렸다.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듭하는 프랑스 군의 기세에 암도되어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까지도 적의수중에 떨어졌으며, 황제는 캉브레 조약 덕분에 스스로의 힘과는 관계 없이 그 지역들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일이 이쯤 진척되자, 황제는 프랑스 왕과 교황의 부담으로 결집된 대 군세를 거느리고 산맥을 넘어 내려왔다. 하지만 그의 진군은, 느려터지고 우왕자왕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 모습도 모습이지만, 다른 군대가 빼앗아놓는 족족 잃기만 하는 것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했다. 왜냐하면, 파도바는 곧 베네치아로 넘어갔으며, 막시밀리안이 대군세에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포대로 그곳을 포위했지만, 으레 그렇듯이 치욕만 안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베로나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프랑스 원군을 허망하게 기다리다가, 마치 패자가 승자를 인정하지 않는 격인 휴전을 베네치아에 제의하고는 더 안전한 것으로 물러서 버렸다.
그러나, 그는 베로나를 떠나기에 앞서 피렌체와 그 유명한 조공 액수에 합의했는데, 40,000두카토를 네 번에 갈라서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이 정도는 전 같으면 베토리에게서 얻어낼 수도 있었던 금액보다 적은 돈이었으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프랑스의 전례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그에게 이만한 액수를 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이거라도 그가 이탈리아로 와서 얻어낸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였음에랴! 첫 회 할부금이 10월에 즉시 전해지자, 그는 (이 세상에서 돈 없이 살수 있는 사람은 없지)라는 말로 사절들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11월 중순 만토바에서 전달키로 약속된 두 번째 할부금을 처리하기 위해 그들은 마키아벨리를 파견하였다.
11월 10일, 그는 두 명의 마부와 함께 10,000피오니노 금화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가 15일 만토바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같은 시각에 비첸차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수비대를 축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에게는 금화라는 짐 외에도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피는 책무가 떨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돈 문제를 해결한 뒤, 21일에 베로나로 향했는데, 그곳의 공기 속에는 이미 폭풍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만일 그가 하루만 더 지체했더라면 길이 끊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그곳이 전쟁이 진행되는 길목이라 짐작하고, 거기서 황제를 기다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첫 번째 편지에서, 귀족들과는 달리 평시민들은 모두가 산 마르코 공화국 편인 도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베로나 사람들은 비첸차인들을 닮고 싶어하지만, 가까이 있는 성채들과 프랑스 군의 존재가 그들의 욕구를 저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들의 생각대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또 5밀리오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제국 군과 베네치아 군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그 도시의 위치와 성벽에 관해서도 기술하였다.
그는 앞서 보오나코르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지금 자신이 뛰어들고 있는 함정에 대해 다소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긴 했으나, 그래도 곧 다가올 충돌의 위험 속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데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네치아 군을 베로나를 떠났고, 황제는 궁지에 몰려 하릴없이 프랑스 왕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왕은 그에게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말이다. 산 마르코의 사자는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다시 힘을 얻은 셈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이 왕들이 서로를 경계하면서 짧지만 격렬한 이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지금까지 빼앗은 영토를 더 빠른 속도로 다시 되돌려주어야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12월 1일자 편지에서는 또 이렇게 썼다. (이 두왕들 중에서, 하나는 싸울 능력은 있지만 싸우고 싶어하지 않고, 다른 하나는 싸우고는 싶지만 능력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후자는 물론 막시밀리안이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베로나에서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일을 한다는 것으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10인위원회에도 설교 조의 말들을 써갈겨) 보냈다. 그는 또 (칸타파볼라 cantafavola) (시 형식을 빌린 이야기를 가리킴 - 옮기이)라 부를 만한 작품을 써서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냈는데, 당시 만토바에 있었던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글을 한번 써보라고 재촉한 바 있었다. 이 작품이 바로 두 번째 (십년기)란 설이 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십년기)의내용 역시 묘하게도 1509년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는 쪽은 종료 시점이 일치하는 사실 외에도 두 번째 (십년기)의 몇몇 구절이 이 시기에 씌어진 편지 속의 표현들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예컨데, 그는 칭송받던 시민이었던 자코미니에게 바친 송덕문에서 그를 가리켜 (시력으 앗긴 노인)이라는 말을 썼는데, 1509년 당시 자코미니의 나이는 경우 53세였을 뿐 아니라 아직 눈이 먼 것도 아니었다. 또 다른 증거들은 놔두더라도,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두 번째 (십년기)가 1514년 이후에 씌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가 1505-1514년 사이 십 년의 역사를 쓰겠다고 작정한 때가 바로 이 해이거나 그 다음 해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마키아벨리가 송덕문에서 자코미니를 노인아라 부르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은 뒤) 그의 죽음으로 (어찌할 바 모를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한 말을 정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가 당혹해했건 슬픔에 잠겼던 간에 그는 여가를 얻었고, 이는 다시 그에게 글쓸 마음을 불어넣어주었다. 그의 글 중에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제기발랄한 편지 한 통이 있다. 뤼지는 언제나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넘치는 사람으로, 마키아벨리에게 자신의 즐거운 경험을 이야기하거나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편지를 써보내곤 하였다. 마키아벨리 역시 이에 응답할 마음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뒤에 또 하나의 별난 피렌체인이 벰보의 유명한 소네트를 패러디한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부부 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한 포주 할머니와 어둠에 속은 사건이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여기서 세세히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단지 어떻게 (그녀로부터 도망쳤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순식간에 그 절절하던 욕구를 채운 뒤, 그는 불빛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워준 여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 이런 일이라니! 글쎄 그 여자라는 게 추악한 모습의 늙어빠진 할망구였던 것이다. 이런 유의 묘사에서는 이전의 그 어떤 문인도 마키아벨리를 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 소름끼치는 모습을 그리면서도(...입은 로렌초 데 메디치같이 생겼는데, 한쪽으로 비뚤어진 그 입에서는 허연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지 뭔가...) 하는 식으로 특유의 재치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한 괴물을 보고 속이 뒤집히기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도 마찬가지일 정도이다. 이 이야기의 골격 자체는 아마도 진짜였을 법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모두가 진짜라기엔 그 세부 묘사가 너무 아귀가 딱딱 맞고 너무 리얼하다(나에게는 단순한 농담 이상으로 보일 만큼).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3주 동안 장난기 어린 글들을 끄적이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실컷 즐긴 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12월 1일 그는 10인위원회에다 (만약 황제가 트렌토에 머물게 되면, 저도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라고 썼다. 그 후, 황제가 인스브루크로 갔으며, 제국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서 다시 아우크스브루크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그는 11일 만토바로 되돌아와서 이제 귀향하게 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의회의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로 간다는 것이 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그곳의 다른 군주들이 외국의 사절들과 접촉하는 것을 황제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17일에 귀국 명령이 떨어졌고, 이 소식은 21일이나 22일이 되어서야 그에게 전해졌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길을 떠났고, 피렌체에 도착한 대가 1월 2일이었던 사실로 보아 여행은 급할 것이 없었던 듯하다.
그가 이렇게 늦었던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혹시 베르나에서 미처 채우지 못한 욕구를 만토바나 볼로냐에서 벌충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향에서느 유감스럽게도 예기치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는 도중에 부오나코르시로부터 그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에게 전하라는 12월 28일자 편지 한 통을 받았다.(원문에는 27일로 되어 있으나, 이는 28일을 잘못 쓴 것이다 - 옮긴이). 그는 매우 흥분하고 성난 어조로 전하기를, (투라토 un turato), 즉 얼굴을 가린 작자 하나가 증인이랍시고 다른 두 녀석을 대동하고 와서는, 법령 등기소의 공증인에게 마키아벨리란 사람은(어쩌고저쩌고 한 위인을 애비로 두었기 때문에) 지금의 직분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접수시켰다는 것이다. 보오나코르시는 계속해서, 비록 법률상으로는 친구가 유리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입방아를 찧고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만일 무슨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두고 보자는 식으로 위협까지 하고 있는 터라, 일이 좋지 않은 상황에 있으므로 무언가 강력한 도움을 받아서 일을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편지는 시종일관 이런 식으로 사태는 위험하게 되어가고 적대적인 사람의 숫자 및 정도는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한껏 부풀려 전하고 있다.
아버지와 관련하여 그 무엇이 니콜로로 하여금 이처럼 관직츨 수행 할 수 없다는 말까지 듣게 했는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톰마시니는 (어쩌고저쩌고)란 말에 자극을 받아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틀림없이 사생아였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톰마시니에게는 부오나코르시의 표현이 (분별 있게 제대로 한)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지만, 원래 그 친구의 편지라는 것이 분별 있게 제대로 된 것과는 거리가 먼 (어쩌고저쩌고)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베르나르도가 (엔체 채무자 명부(중세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코무네에서 상환 불능 연제 채무자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명부. 스페키오specchio'로 불림-옮긴이)에 등재되어) 있었다는 것, 즉 코무네의 상환 불능 연체 채무자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이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아들까지 관직에서 밀려나게 말든 뻔했던 것은 아버지가 사생아른 엉뚱한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제적 상황이었다. 톰마시는 다른 동료들 몇몇도 마키아벨리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이 같은 편지에 나온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연체 채무자 명부에 이름이 등재된 시민드은 수천 명에 달했던 반면, 서기국이 온통 사생아 아버지를 가진 자식들로 가득 차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는 점도 당연히 생각했어야만 했다.
부오나코르시는 대책이 강구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으나, 그래도 도착을 며칠 늦추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간곡히 얘기하였다. 볼로냐의 이쪽 어딘가에서 그 편지가 마키아벨리에게 전해진 때는 틀림없이 12월 28일 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간청에 따라 발걸음을 늦추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하루 이틀 이상은 아니었다. 단지 더 새로운 소식이 없을까 기다렸을 만한 시간 정도였다. 그 서기본의 우려는 조금 지나쳤던 것으로 부인다. 그는 원래 소심한 데다 흥분을 잘하며, 평소 그런 유의 이야기로 마키아벨리를 성가시게 하곤 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적도 많지만 동시에 곤팔로니에레처럼 힘 있는 친구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적이라 해서 곤팔로니에레가 자신의 (심복)이 잘못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리라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그리 높은 직급에 있지도 않은 서기장을 겨냥했다기보다는 단지 곤팔로니에레를 괴롭히려는 계획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마키아벨리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 또 하나 있었는데, 자신에게는 이쪽이 더 심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사적인 편지를 통해 당시 로마에서 그와 관련된 한 거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지 추측만 한다는 것은 불확실하고 소용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 그와 동생 토토 간의 계약 관계와 관련된 교회 성직록 문제에 일어난 재판이 아닐까 추측해서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설사 이 추측이 잘못되었다 해도 그리 큰문제는 아니다). 토토는 바로 그때인 1510년 1월 5일 수련의 과정을 벗어나 사제에 서품된 상태였다. 프란체스코 넬리와 피에로 델 네로의 중재로 마련된 이 계약에 의해, 토토는 형인 니콜로에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몫을 양도 한 바 있었다. 그 주요 내역은 피렌체의 집과 페르쿠씨나의 산탄드레아에 있던 땅 약간이었다.
로마에서의 소송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피렌체에서의 투서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후 그에게 일어난 일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와 9인관제위원회 서기장에다가 정무위원회 서기장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10인 위원회의 명으로 3월 12일에서 23일 사이 몬테 산 사비노로 가서 피렌체령 가르곤차의 주민들과 시에나령 아르마이올로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5월25일에서 6월 3일 사이에는 9인관제위원회의 일로 산 미니아토와 발디니에볼레의관구들에 파견되어 모병 작업을 돌보았다. 그리고는 피렌체로 돌아와 며칠 쉰 뒤, 세 번째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줄리오 2세는 이제 누구와도 부딪힐 일이 없었다. 베네치아와는 묵은 것이든 새것이든 모든 문제를 청산한 상태였고, 따라서 더 이상이 영광스런 공화국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처리해야할 문제는 많은데 해결은 난망인 막시밀리안에게 이러한 상황은 썩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프랑스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교황이 베네치아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그 나라를 쳐야 하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의 위치를 확고히하기 위해서 산 마르코의 사자를 길들이 필요가 있었고, 반면 교황은 프랑스인들을 내쪼츠는 데에 베네치아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줄리오 2세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다른 세력들을 끌어모으는 한편, 페라라가 프랑스 보호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여 그 도시를 공격할 채비르 갖추었다. 서로 경멸하고 불신하는 가운데 교황의 증오와 왕의 분노는 나날이 커져 갔으며, 이제 최악의 상황만이 남지 않았는가 생각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교속의 두 군주 사이에서 언제나 조정 역할을 담당했던 루앙 추기경이 지난 5월 세상을 뜸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피렌첸는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줄리오를 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데리니의 말처럼, (교황은 우방으론 시원찮지만 적으로 돌아서면 골치 아픈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프랑스 궁정에 상주할 대사를 파견하면서 자신들이 그 불 같은 교황과의 협상을 최대한 신중하게 처리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동행시켰다. 그는 공적인 임무 외에 곤팔로니에레가 사적으로 부탁한 일까지 맡고 있었다. 곤판로니에레는 10인위원회의 훈령이라는 천 위에 자신의 이름 첫 그르자를 아로새기는 것(공문서에 자신이 서명한 것을 비유한 말 - 옮긴이)말고도, 그러한 중대 국면속에서도 자신과 그의 동생인 추기경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프랑스 왕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확신시키고 싶어하였던 것이다. 추기경은 마키아벨리의 출발 소식을 듣자, 곤팔로니에레가 그랬던 것처럼 곧 로마로부터 교황과 왕이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편지를 뒤딸려 보냈다.
가는 길에 귀환중인 대사 (그는 절친한 관계였던 알레싼드로 나시였다)를 만났던 마키아벨리는 7월7일 리룡에 도착했고, 이틀 뒤에 다시 길을 떠나 17일 궁정이 있던 블로아에 닿았다. 로베르테는 그렇지 않아도 피렌체에 전령을 보낼까 하고 생각중이었는데, 마침 때 맞춰 잘 왔다고 일러주었다. 왕은 자신이 로마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와중에 대사까지 소환된 데다, 공화국이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휘하를 떠나 교황의 명으로 제노바를 급습하려는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피렌체의 의도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피렌체로서도 이 일들에 관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왕은 도착 직후 그를 접견한 자리에서 거두절미하고 대뜸 앞의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만일 교황이 자신을 괴롭힌다면 공화국이 (지체없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사절은 이에 피렌체인들과 왕 사이에는 우호 조약이 맺어져 있으며, 이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으나, 이 정도로는 왕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왕이 대답하기를, 물론 자신은 이를 확신하고 있으나, 그 이상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부에다 이 문제에 관해 즉시 편지를 쓰라고 명하였다. 이를 로베르테에게 주어서 왕의 전령 편으로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시키는 대로하였다. 그는 피렌체인들이 어떤 답을 줄 것인지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회답을 기다리며 궁내의 귀족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어보았다. 모두가 교황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복종의 관계를 거두어들이고 즉시 공의회를 개최하라. 그리고 그로부터 교속 양권을 빼앗아버려라. 그래도 이 정도면 후하게 대접하는 셈이다.) 그러나 궁내에는 교황 사절 역시 주재하고 있었는데, (그는 매우 분별이 있고 정치에도 정통한, 정말로 괜찮은 인물이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사태가 갑자기 이토록 험하게 돌아가게 되었는지 경악하면서) 침울해하였다. 궁에는 또 조반니 지롤라미라는 소데리니 추기경의 첩자도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매일같이 자기 상전의 말을 전해 주었다. 마키아벨리는 곧 그와 힘을 합쳐 협상에 착수하였다. 이탈리아와 피렌체는 물론이고 추기경 자신의 사익에도 하등 좋은 징조가 못되는 이 일련 움직임에 피렌체가 조정자이자 중재자로서 개입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8월 8일, 왕이 사냥을 나간 곳 가까이까지 말을 타고 나간 피렌체의 서기장과 로베르테는 약 3레가(1lega는 약 3migli에 해당함-옮긴이)의 거리를 가는 동안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모든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에다 그 내용의 핵심을 추려 보고하였다. (당신네 정부는 만일 교황과 왕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양단간에 한쪽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것이오.) 이는 물론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무언가 보상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면서, 로베르테는 우르비노 공국 정도라면 피렌체인들이 좋아하겠느냐고 물었다. 마키아벨리는 슬쩍 답을 피했으나, 정무위원회에다는 이제 루카에 관해 한번 생각해 볼 시점이 아니냐고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내 교황과의 전쟁에 (내재된 모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프랑스에 초래할 위험들을 주시시키려고 애썼다. (만약 혼자서 전쟁을 치른다면, 그것이 쉽게 끝나지 않고 질질 끌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친다면, 이탈리아의 일부는 그 동맹국에 떼 주어야 할 것이고, 결국은 그 나라와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될 터인데, 이는 교황과의 싸움보다 훨씬 위험할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로베르테를 설득하였고, 이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줄 만 알았던 프랑스인들의 마음도 바꿀 수가 있구나 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을 뻔하였다. (지체 있는 이탈리아 사람 몇 명만이라도 여기서 프랑스인들의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들을 심어주고자 노력한다면 그들을 설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탈리아인은 프랑스에 없었고, 이탈리아에서도 아마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동안 사태는 나름의 필연적인 행로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왕은 자신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밝히라고 압박을 가했지만, 피렌체인들은 조약의 명문 규정은 언제나 지키겠지만 그를 돕겠다는 어떤 명확한 언질도 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 마키아벨리가 이 대답을 왕에게 전하자,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마키아벨리를 국무회의의 장소로 부르더니, 만일 교황이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악령의 사주를 받아) 제노바에 어떤 식으로든 해를 가한다면 피렌체 공화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쇼몽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피렌체는 곧 줄리오의 분노를 사 그의 군대를 바로 끌어들이는 상황에 처하고 말 것이라고 대답하자, 국무회의의 제후들은 (거의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치기를, 왕이 이탈리아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준비중이므로 그것은 단지 며칠 정도만 공격을 막아내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역시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무슨 대답을 내놓을 것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왕의 요구를 10인위원회에 알리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했고, 다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들이 어떻게든 우리를 이 전쟁에 끌어들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숙고할 점은(...) 질 것 같은 속에서 어떻게 승리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며칠이 지나가고 사절의 부지런한 보고는 계속되었지만, 사태는 변하지 않았다. 왕은 교황과의 전쟁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쪽으로 갔다. 그의 말이다. (당신은 짐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짐은 교황에 피배하고 싶지 않다.) 그는 다가오는 겨울 내내 사태를 관망하면서, 그 동안 줄리오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반면 교황은 군대를 끌어모으면서, 페라라를 공격하고 조약을 통해 모데나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교황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는 롬바르디아로 가는 길목마다에서 저지당해 패주하게 되고, 프랑스 궁정에서는 춘계 대공세를 두고 (사실 그건 아예 전쟁이 아니라 로마로 소풍 나가는 격이 될 것)이라며 유쾌해했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이 사제들은 이 세상에서 쓴맛을 좀 봐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 발전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사제들의 희망은 저 세상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즈음 프랑스에서는 사람들이 (코클리쉬 Coquluche)(백일해의 일종-옮긴이)라고 부르던 유행성 독감이 온통 유행가고 있었고, 마키아벨리도 이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다. 24일, 그는 변명 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기침 때문에 5일 동안 아무하고도 만나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침이 멈추고 난 뒤에도 (그놈이 제 뱃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 처집니다.) 더욱이 그는 언제나처럼 돈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불만스러워하였다. 그는(제가 말을 팔아버리고 걸어서 집에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이라고 썼던 며칠 전의 펼지를 상기시키며, 10인위원회에 재차 송금을 요청하였다.
몸이 아프자 그는 귀국하여 아내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지금은 잔느라는 여인이 빈 곳을 어느 정도 메워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도 얼마 후에는 심드렁하게 대하게 될 터였다. 그가 귀국할 날은 그리 멀리 않은 듯했고, 로베르토 아차이우올 리가 신임 대사로 선임되어 발걸음은 느리지만 이미 이쪽으로 길을 잡은 상태였다. 파란체스코 베토리는 그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로베르토에게 자네를 곧 돌려보내라고 부탁했네, 그래야 그는 떠나더라도 대신 자세를 보게 될 테니까 말일세(...) 필리포(카사베키아)와 나는 매일같이 자네를 학수고대하고 있네) 프란체스코는 독일 사절 이후 마키아벨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세레명만으로 서명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가 어는 아이의 대부였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마 1510년초에 태여났다가 1511년 2월에 죽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마키아벨리의 아이들이 누구누구인지, 그들의 대부는 또 누구인지를 어떻게 일일이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동안 아이들과 아내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었던 편이었다. 그가 서기국에다가 왜 가족의 근황을 그렇게 전해주지 않느냐고 불평 조로 말하자, 아드리아니가 나서서 짤막하면서도 익살맞게 말을 받았다. (자네 아내는 여기서 살고 있고, 아이들은 제 발로 서 있으며, 집에 연기가 나는 일도 없지만, 페르쿠씨노의 포도 작황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정무위원회에다 10인위원회와 9인관제위원회의 서기장이자 가장 가톨릭에 충실한 왕에게 파견된 사절이었던 그이지만, 이제는 정치.군사 문제에 대한 생각 외에 산탄드레아의 얼마된지 않는 농토까지도 신경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니! 수확과 나쁜 날씨와 자신 소유 농토 내의 농부들이나 나무꾼들이 겪는 끝날 줄 모르는 불운들이 때로는 그를 성가시게 만들었고, 때로는 기쁘게도 했으며, 또 때로는 사무실 동료들에 대한 그의 불평 속에서 은연중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나무꾼과 농부들이라니! 지금 그는 프랑스 궁정에 있으며, 마치 커다란 청동제 화병 두 개 사이게 끼인 도자기 병 같은 형국에 있던 자신의 공화국을 어려움에서 건져내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사절 임무를 토해서였다. 왕과 같이 백일해에 걸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로베르테를 방문한 그는 분별과 논지를 갖춘 말로 그와 아야기를 나누었다. 마키아벨리의 말인즉, 만일 전쟁이 계속 제 가리 길로 간다면, 왕은 피렌체를 (크게 존중해 주어야(하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렌체에다 떠맡기는 요구들과 계획들을 충분히 숙고하고 논의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는 듯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문제는 쇼몽이었다. 그에게는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이 곁에 없었던 데다가 이탈리아 전쟁의 짐을 온통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반드시 원군이 있어야만 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러자 마키아벨리는 다시 국무회의로 돌아와 그 (제안들)을 장시간 논하였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앗다. 피렌체인들은 조약을 지킬 태세가 되어 있다. 하지만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함으로써 주위의 적에 스스로를 무방비 상태로 내맡기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교황을 막는데는 피렌체가 군대를 도시 내에 유지하고 있는 편이 (다른 곳으로 내보내는 편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국무회의는 서기장의 말을 신중히 경청한 뒤, 그의 논지가 옳다고 찬사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는 결국 그들 모두를 설복시킨 것이다.
마키아벨리도 프랑스인들을 설복시키는 데에는 줄리오의 호언장담도 한몫을 하였다. 당시 그는 지나치게 친프랑스적인 피렌체 정부를 무너뜨려 버리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성미 고약한 교황은, 볼로냐로 가는 길에 몬테피아스코네에서 그를 만나 공화국이 교회와 왕 사이의 협상을 중재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고 전쟁으로 기우는 쪽에 평화를 권고하려던 피렌체의 사절들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으며, 피렌체 영토를 유린하고 나아가 더 이상의 일도 불사하겠다고 으르렁거렸다. 운수 사납게도 교화의 눈밖에 난 사절들은 도매금으로 넘겨졌다. 피렌체와 똑같은 이유로 파견되었던 사보야 공국의 사절 하나나 투옥과 고문의 괴로움을 겪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 오스티아에서는 페라라의 사절이 바다에 던져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았는데, 그는 다름이 아니라 신이 내린 오를란도 시인(아리오스토를 말함 - 옮긴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성미 괄괄한 교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가운데, (이탈리아를 프랑스인들의 굴레로부터,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언명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이 말을 아무런 비평없이 기록하였다. 사실 그는 뒤에 (야만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유명한 글을 쓰게 될 것이었다.((군주론) 26장 참조 - 옮긴이). 빌라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발렌티노는 그렇게 칭찬했으면서도 왜 위엄 있는 줄리오에게는 끌리지 않았는지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황은 피렌체의 자유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마키아벨리에게 오래도록 불행을 겪게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앞서 말한 촉구의 글을 포함하여 자신의 가장 빛나는 저술들을 쓴 것도 바로 그러한 불행의 시기 동안이었다. 그 이전에도 마키아벨리는 줄리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많다. 첫째, 분노와 충동이 자신의 군주상에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물론, 자신이 믿는 또 하나의 신앙인 국가마저도 타락시켜 온 사제들의 지배를 못마땅했기 때문이며, 끝으로 그는 한 사람의 피렌체인이자 이탈리아인로서 교회의 세속 권력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만족을 쫓아내려는 그 유명한 함성도 줄리오의 입을 거치면 무언가 이상하게 들릴 법했다. 사실 그 스스로가 이탈리아에 그들이 얼마나 많이 불러들였던가, 마키아벨리에게 그는 정말 (이탈리아의 우환을 매개하는 숙명적 존재) 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쇼몽에게로 간 왕의 편지에 그 자신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제시했던 (제안들)과 부합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알고 로베르테에게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적극적 행동으로 교황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은, 결코 스스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프랑스인들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뒤에 10인위원회에다 이렇게 썼다. (그는 자신들도 교황에게 한번 호된 맛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웃음과 함께 이 말을 하면서 제 어깨를 두드렸는데, 마치 곧 그렇게 할 거라는 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신임대사에게 보내는 본국의 편지가 9월초 궁정과 옮겨간 투르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10인위원회는 평소 서기장이 보여준 민첩성과 열성에 물들어서 신임대사 역시 그곳에 도착했거나 곧 도착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8월 31일이 되어서도 여전히 리용에서 어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사절은 하는 수 없이 계속 그 앞으로 오는 편지들을 개봉하여 회답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9월 중순에야 겨우 그곳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에게 일을 인계하기 위해 며칠 더 지체하였다. 우리는 그가 정확히 언제 투르를 떠났는지, 또 이탈리아로 오는길에 언제 리용을 떠났는지 잘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가 피렌체에 닿은 것이 10월 19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임무야말로 단순히 끝없는 마상 여행 정도가 아니라 마키아벨리 자신이 무언가 자신있게 말할 거리가 잇는 그러한 성격의 일이었다. 마치 아리오스토가 당시 스스로 겪은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던 것처럼
그리고는 그것을 나를 시인 마부로 만들어버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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