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오 2세에 대한 두 번째 사절 시기
문필가에서 갑자기 군사를 다루는 위치에 서게 된 마키아벨리를 두고, 역사가든 전기 작다든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의 애국심을 노래하고 있다. 나라고 남보다 앞서 그의 이러한 덕성을 부정하는 인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당대인들조차도 인정했던 대로, 자신의 조그만 도시국가와 자신의 자유를 향한 애정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로서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았던 더 넓고 큰 조국 (이탈리아를 말함 - 옮긴이)에 대한 애국심을 당시의 다른 이탈리아인 누구보다도 더 확실히 보여준 인물로서 그를 지목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좀더 공평하게 평가하자면, 피렌체의 서기장이 민병대에 기울인 열성과 관심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재능을 믿고, 더불어 반대자들에 의해 그토록 심하게 공격당한 계획을 성사시키기코자 한 한 인간으로서의 열성과 관심이었다고 보는 쪽이 더 나을 거이다. 우선 스스로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손상될 순간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운명과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는 그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불꽃 같은 열정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어떤 이론, 어떤 생각은 곧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을 타고 그토록 열성적으로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모습에서 알수 있듯이, 새로운 것을 향한 쉴 줄 모르는 욕망은 그로 하여금 서기국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보다 군인을 모병하는 일이 더 즐겁다고 느끼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만사에서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던 당시, 그에게 조그만 행복감을 가져다준 것은 (십년기)의 출간이었다. 그가 무젤로에서의 모병을 끝내고 만 카센티노로 가고 있을 때였다. 그 작품은 서기보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자신으 돈으로 출판한 것인데, 그는 여기에다가 지금까지도 훨씬 더 비중 있게 대우 받을 만한 몇몇 피렌체인들에 바치는 헌사를 붙여놓았다. 여기서 그는 그 작품을 칭찬한 뒤에, 그것이 피렌체인들에 대해 저자가 지고 있는 빚을 이제 갚기 시작하는 데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즉 (그는 빚을 다 갚기 위해 지금 일터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더 큰 놈을 두들겨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문맥으로 보아, 그는 여기서 마키아벨리가 지금 좀더 큰 규모의 역사 저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냥 막연하고 가정적이 아니라 생생하고 실제적인 어투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의 일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작업은 지금까지 피렌체 서기장들이 써왔던 전통적인 연대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 작품은 원사료 수집과 함께 벌써 착착 진행중인 상태에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왜 그렇게 많은 공문서 필사본과 발췌본들이 굳이 바로 그 (십년기)의 시기에 맞추어 나타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자료들 중에는 마키아벨리의 자필도 있고 그의 서기보들이 쓴 것도 있다. 이러한 필사본과 발췌본들은 분명히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지, 그가 메디치 추기경의 의뢰오 자신의 피렌체사를 쓰게 될 (오랜 시간 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십년기)가 당대인들에게 바쳐진 것이라면 장래의 피렌체사는 후대인들에게 바쳐질 운명이라고 친구인 아고스티노가 말했을 때, 그는 예언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후대들은 이 (십년기)에 대해서도 감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마키아벨 리가 스스로 그 작품 속에 남겨놓은 것 때문에, 그가 쏟았던 애정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첫 출판물이 그에게 가져다준 조그마한 행복감 때문에 그러하다. 그는 책이 나오자 곧 친구들과, 자신이 공무로 만나는 높은 신분의 인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그들로부터 인사 치레가 아닌 진짜 찬사의 말을 들었다. 그 작품의 우아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를 누구보다도 칭찬한 사람은 피렌체군의 지휘관이었던 데르콜레 벤티보리오였다. 그는 1506년 2월 25일 찬사의 말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 소책자가 큰 인기 속에 널리 퍼져나간 것은 어떤 찬사보다도 해적판 덕분이었다. 그것은 첫 판이 간행 된지 대략 20일도 채 되지 않아 시중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베리가 이 해적판의 간행 소식을 들은 것은 카센티노에서의 모병 작업중 2워 28일 포피에 도착해서였다. 그는 즉시 자신의 서기보와 편집자인 베스푸치에게 연락을 취했다. 베스푸치는 전략을 기울인 끝에 경우 안드레아 기를란디 피스토이아란 출판업자르 찾아낼수 있었다. 그는 세르 안토니오 투비니의 동업자였다. 이 두 사람은 베스푸치에게보다는 근 현대의 서지학자들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다. 베스푸치는 이들이 찍은 책 한 부를 확보하고는 마키아벨리에게 (인쇄가 형편없다)고 편지를 썼다. (이건 완전히 사기야, 행간도 없고 종이크기도 너무 작은 데다, 책 앞뒤에 여백 페이지도 없어 활자는 또 어떻고, 온통 잘못투성이네.)
베스푸치는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친구의 명예를 손상시킨 데 대해 분노와 열성이 뒤섞인 상태에서 그 (형편없이 인쇄된 책자)를 흔들어대며, 8인감찰위원회로 달려가 기르란디에 대하여 항의했을 뿐 아니라, 이어서 대주교 대리에게 투비니 사제의 일을 고하였다. 양쪽 다에서 그가 이겼다. 문체의 판본은 원래 판매가 금지되었다. 대주교 교리는 투비니르 심하게 질책하면서, (이 사제에게 벌을 내리고) 그가 행한 (여타의 사행(사행)까지도 후회하도록)만들겠다고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이러저러한 사실들을 베스푸치의 유쾌한 편지에서 읽는 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또한 서지학자들은 이 편지로부터 몇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잘 알려진 바가 없는 이 두 개의 (십년기) 판본에 관해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명의 출판업자에 대한 약간의 정보도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안토니오 투비니 사제가 범한 (여타의 사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여전히 가라않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복수를 한 마키아벨리는 눈으로 뒤덮인 산중의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포피에다 본부를 차려놓은 뒤 카센티노에서 모병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신병에게 지급할 무기가 늦어 도착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무기와 갑옷을 만든는 피렌체의 대장장이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3월 5일 그는 10인위원회에 다 (만약 무기가 제때 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아물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함므로) 빨리 서둘러달라느 편지를 보냈다. 하여튼 이러한 상황이 곤혹스러웠던 그는 큐시 지역에서의 모병 작업을 당분간 포기하였다. 그곳은 넓은 구역이라 (눈이 어지간히 오고 난 후에 가는 것으로 남겨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눈밭을 뒤고 하고 돌아와 다시 서기국 일에 매달렸다. 이제 3월도 끝나가고 있었고, 지난 10월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화약으로 더 굳건해진 니탈리아의 평화는 그렇게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펠리페 대공(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1506년 카스티야의 왕이 된 미남왕 펠리페 1세를 가리킨다.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이자 페르난도 2세의 사위 - 옮긴이)은 카스티야를 통치하고 페르난도 다라곤과 왕국을 분담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가버렸다. 페르난도 다라곤(가톨릭 와 페르난도 2세를 가리킨다. 그는 1504년 16년에 페르난도 3세로서 나폴리를 통치했다. - 옮긴이)은 나중에 이탈리아로 와서 나폴리 왕국을 다스리게 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사태 변화에 대한 논의와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더 당면한 전쟁의 위험은 마키아벨리가 (십년기)에서 예견했듯이, 그 경박하고도 변덕스러운 막시밀리안의 존재와,
상처받은 교회를 되살려놓기를
원하는 줄리오 2세의 계획에 있었다. 그는 교황이 도기 전까지는 (언제나 원모(원모)로 가득 차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즉위 후에는 그 꿈이 다소 사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바뀌지 않았다. 단지 힘을 비축하고 자금을 모으면서 (권력을 다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1506년 봄, 서기국에서 작성된 공한들이 주로 다루고 있던 문제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얼마나 예리하게 이 문제들을 논하고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는 6월 중순 당시 피사 공략을 전담하고 있던 조반니 리돌피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속에서 이를 피력하고 있다. 항상 그렇듯이, 군대로써 펜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하는 법이며, 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렇게 될 때까지는 펜이 군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법이다. 모두의 기대대로 먼저 군대를 움직인 쪽은 교황이었고, 마키아벨리는 이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졌다.
줄리오 2세는 피렌체인들에게 자신의 목적이 (폭군의 제거)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용병 대장인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의 부대를 벤티볼리오를 치기 위한 그의 작전에 참여시키라고 요구하였다. 공화국으로서는 이 요구가 별로 마땅치 않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당장 피사로부터 전력을 빼와야 한다는 것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곤팔로니에레는 교황으 거스르지는 말되 초대한 시간을 끌어보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는 조밤바티스타 리돌피의 지지를 받아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이 임무는 마키아벨리에게 맡겨졌다. 그는 이제 이러한 임시변통성 임무에 익숙해 있었다. 그락 줄리오 2세에게 그 대가로 준 것은 (그의 선하고도 경건한 의도를 칭찬하는) 듣기 좋은 말 한 보따리였다.
마키아벨리는 8월 25일과 26일 사이의 밤에 출발하여, 27일 테리에서 교황 일행과 만났다. 그는 전날 대규모의 추기경, 조신,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에서 그곳으로 오던 길이었따. 마키아벨리는 치비타 z,스텔라나에서 그를 접견하여 멋진 논변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선 찬사와 감축의 말으 놀어놓은 뒤 콜론나의 참전이 어려운 이유를 그 어느때보다도 힘 있게 설명하였다. 그의 열성은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교황은 그의 말을 (주의깊게 그러면서도 유쾌한 기분으로)들었다. 그리고는 대답하였다. 자신이 듣기로 피렌체인들은 세 가지 점을 걱정하는 듯이 보이는데, 그것은 첫째 프랑스가 이 작전에 동참하고 있지 않으며, 둘째, 그 스스로가 이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있지 않으며, 셋째, 결국은 벤티볼리오를 쫓아내지 않고 그와 협정을 맺든지 혹 쫓아낸다 해도 그를 다사 복귀시키리라는 것이었다.
피렌치인들이 이 세가지 점을 우려하고 있으며, 군대의 손실보다는 그것을 참전의 더 큰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선 첫째번의 경우, 그들로서는 벤티볼리오를 자신의 후견 하에 둔 프랑스 왕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나머지 두 가지 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지금까지 우호 관계로 잘 지내오던 이웃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사실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을뿐더러, 만일 교황의 무관심이나 관용으로 인하여 벤티볼리오가 뒤에라도 자신의 영토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면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사절에게 이 일에 찬성하고 도와주겠다는 프랑스 왕의 편지를 보여주며, 첫 번째 문제를 안심시켰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그 스스로가 앞장서서 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상태가 아니냐면서 그의 열성을 의심치 말라고 하였다. 또 세 번째 문제의 경우에도, 벤티보리오는 일개 (사인)으로서 볼로냐에 머물도록 할 것이며, 다른 조치는 생각지 않고 있다면서 염려를 불식시키려 하였다.
저녁 무렵, 마키아벨리가 (이 요새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교황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을 때, 교황은 그를 불러 아침에 했던 자신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마키아벨리가 이에 대해 공화국의 원군이 조만간 올 것이라고 안심시키자, 그는 자신이 지금 가진 군대와 앞으로 더 늘어날 군대의 규모를 설명한 뒤, (자신의 주머니에는 병사들이 가득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또, 베네치아가 좋은 조건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들이 자신과 피렌체에 손실을 입히고 이미 교회로부터 빼앗아간 영토를 양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교황의 말은 프랑스 원병이 오기 전에 콜론나를 소환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게 만들었고, 이는 피렌체에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조용히 지나갔고, 마키아벨리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교황궁을 따라 아주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교황은 비테르보, 오르비에토, 카스텔 델라 피에베,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를 거쳐 편안한 발걸음으로 페루자를 닿았고, 그곳에서 잠파올로 발리오니로부터 첫 번째 셈을 청산받았다. 사실 이 셈은 이미 끝난 것과 마친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잠파올로가 오르비에토에서 그의 빚쟁이를 만나, 그에게 무릎을 꿇고는 요새와 인질을 비롯한 다른 모든 것들을 그가 원하는 대로 양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9월 13일 막상 페루자에 입성하자, 마키아벨리는 잠파올로와 같은 악한의 손아귀에 잡힌 쪽은 오히려 교황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이 일로 그는 10인위원회에 거의 매일같이 편지를 오렸는데, 그 중에서 발리오니가 교황과 추기경단을 자신의 수중에 넣고 잇다는 관측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자신의 나라를 빼앗으러 온 사람에게 맛서 해 되는 아무런 행동도 않는다면, 그는 분명 훌륭한 인품과 인간성을 갖춘 인물일 터이겠습니다만, 이 일이 결국 어떻게 맺어질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끝은 좋앗다.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의 이 유명한 말에 놀랐겠지만, 그의 판단이 빗나간 것은 쉽게 말해서 그가 이 사태를 두 군주 간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 냉정하게 따져보는 정치가의 입장에서 보았다는 데 연유한다. 두 군주간이라 한 것은, 교황이 교황이 아니라 햔 명의 군주로서, 그것도 다른 군주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 온 군대의 선두에서 잇는 군주로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귀차르디니 역시, 훨씬 더 깊은 숙고 끝에 쓴 저술에서, 당시 (그보다 더 사소한 일에서도 배신의 악명을 휘날렸던) 잠파올로가 (어떻게 그처럼 큰 사건 속에서 세상을 다시 떠들썩하게 만들지) 못했는지 놀라워하였다. 배신은 떡 먹듯 하는 그와 같은 인물이 그처럼 행동한 것은 자신의 비겁함 때문이지, 결코 양심에 찔려서 또는 존경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의 말은 이 축소판 발렌티노가 그 호전적인 교황을 감금하리라는 뜻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할 만한 힘이 그의 수중에 있었으며, 교황은 분별없이 그를 믿고 있었다는 뜻이었을 뿐이다. 당시 잠파오로가 줄리오에게 감히 하지 못했던 행동을, 사정은 좀 다르지만 뒤에 콜론나 가가 클레멘테 7세에게 하게 될 것이었고, 그때도 마키아벨리는 교황이 (천명의 병사보다 펜에 묻은 잉크 한 방울을 더 믿는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조롱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교황의 승리는 거의 마키아벨리의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합리성에 대한 불합리성의 승리였을 뿐 아니라, (비르투 virtu) (비르투란 덕성을 뜻하는 현대 영어의 (Virtue)에 대응되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말이다. 하지만, 현대어 용법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이 말을 윤리적 의미에서보다는 용기, 과감성, 결단력 등 남성적 (활력)을 뜩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비르투와 포르투나(운명)의 대결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그 기초로 삼고 있는 세계관이다 - 옮김이)에 대한 운명 fortuna의 승리이기도 하였다.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소데리니에게 보낸 그 유명한 글 (기리비치 Ghiribizzi)는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1506년 9월 13일에서 21일 사이 가벼운 집답 조로 페루장게서 써 보낸 것으로 생각되는 초고 형태의 편지를 가리킨다. 이를 각별히 (리리비치)라고 부르는 것은 이 편지의 서두에 적힌 (Ghiribizi scripti in Perugia al Soderino)란 말 때문이다. 교황의 페루자 무혈 입성을 지켜보며 인간과 운명의 관계를 숙고하게 된 마키아벨리는 이미 여기서 나중에 (군주론)25장에서 피력할 유명한 체세론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잇다 - 옮긴이). 지금까지 이 소데리니는 당연히 곤팔로니에레인 피에로 소데리니하고 생각되어 왔고 또 그렇게 생각할 수 박R에 없었으나, 사실을 조반 바티스타 소데리니(그는 패에로의 조카이자 마키아벨리으 친구이다-옮긴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비록 답장을 썼지만 내심으로는 숙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젊은 소데리니가 마키아벨리에게 가벼운 잡담 조의 편지 한 통을 쓰자 (1506년 9월 12일자 편지, 이장 주 19를 볼 것 - 옮긴이), 마키아벨리 역시 농담으로 가득 찬 글로 이에 답했던 것이다.
이 (기리비치)는 (리비우스 논고)나 (군주론)을 예켠케 하는 주제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미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되어나갔는가를 연구 하는데 매우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자료로 간주되고 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주제들은 그의 이러한 대작들이 개념화되고 저술되기 직전에야 발상 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이러한 발상의 시점을 무려 6년이나 앞당길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보이니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앞서의 잘못된 판단(줄리오 2세와 잠파올로 발리오니에 대한 자신의 빗나간 평가를 가리킴 - 옮긴이)에 충격과 당혹감을 느낀 마키아벨리는 이 글을 통해 이간의 행동을 선도하고 역사의 형성에 작용하는 힘을 이론적이고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하고 있다. 세상사란 것이 (수단보다는 결과에 의해 판단되는 )경향이 있다고 할 때, (왜 그렇게 다양한 체세 방식들이 때로는 똑같이 성공하고 때로는 똑같이 실패하게 되는지)를 숙고한 끝에 그는 (비르투)와 (포르투나), 즉 운명 사이의 본질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성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성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포르투나는 인간을 지배하여 스스로의 멍에 아래 가두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생각들은 그 힘과 표현에서 거의 다를 바 없는 정도로 수 년 후 마키아벨리의 주장들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한 곳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포르투나와 한번 부딪혀보라. 그녀는 젊은이를 좋아한다) (교황은 늙었지만, 젊은이들 못지않게 일에 급하고 대담했다.) 다른 곳에서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칼 쓰는 법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앞 뒤 가리지 않는 행동에 오히펴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일을 신중히 계산한 끝에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교황은 상황의 경중을 재어볼 생각도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군세도 갖추지 않은 채, 적절한 준비과정과 충분한 군사력으로도 해내기l 어려운 일을 절묘한 기회 포착을 통해 성취하였던 것이다.) 그만! 아직은 그가 이러한 일을 딱히 성취한 것은 아니니까.
교황은 자신이 처음으로 거둔 승리를 즐기면서 9월 22일까지 페루자에 머물렀다. 그로부터 거의 한달이 지났으나 일은 별 진척이 없었다. 그는 망설이며 프랑스의 원병을 기다렸다. 그들은 피렌체 원병까지도 끌어 올 것이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이탈리아로 다시 들어오려고 준비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왕은 병사를 보내는 대신 조언이랍시고 몇 마디 말만 전해 왔을 뿐이었고, 이는 일에 대한 열성으로 몸이 달아 있었던 교황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것이엇다. 평소 마키아벨리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교황은 이미 9월 12일, 만일 프랑스가 자신을 응호하고 더불어 황제의 진군이 사실이 아니든가 또는 금방 실현될 것이라면, (그는 교회든 다른 누구든 어떤 손실과 위험에 처하 든간에, 그 자신의 수치만은 결코 참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줄리오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궁정과 군대를 이끌고 구삐오와 우르비노르 거쳐 체세나로 이동하였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마침내 프랑스 왕이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이에 힘을 얻은 교황은 이미 자시니 볼로냐를 얻은 양 생각하고는 다른 큰 일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10월 3일, 그는 벤티볼리오의 사절단에 d\대해 매우 의기양양한 어조로 이제 자신은 (보로냐 따위가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를 떨게 만들 수 있는 군세를 가지고 있다고 떠벌렸다.
프랑스 군이 오고 있는 사이, 10월 5일 그는 체세나에서 자신이 보유한 군대의 사열을 실시하였다. 군사 문제에 깊이 몰입해 있던 마키아벨리가 그 행사에 빠질 수가 있겠는가! 그는 전문가의 눈으로 그것을 지켜본 뒤 10인 위원회에 올린 보고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만일 위원님들께서 우르비노 공과 난니의 이 병사들을 본다면, 결코 위원님들의 민병대를 부끄러워하거나 그것이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친구인 보아나코 시는 바로 그 당시 보낸 편지에서, (당신들의 위하여)라는 식의 어조로 씌어진 이 말들을 장난스럽게 빗대어 (민병대 문제에 관해 이 제 배에다 동물 기름을 슬쩍 한 겹 바른 격이로군 그래)라고 썼다.
하지만 민병대 호의 항해는 키잡이가 이처럼 오래 빠져 있는 동안에도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친구인 비아조는 수시로 그에게 향해 일지의 주요 사항들을 적어 보내주었다. 더욱이 그가 종종 공식 전달 사항들과 함께 넣어 보내는 사신(사신)들 속에는 온갖 종류의 정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카스티야의 왕이 왕국의 쓴맛 단맛 채 보기도 전에 세상을 뜬 이야기라든지, 매일 같이 이럴까 저럴까 하며 주사위만 굴리고 잇는 막시밀리안의 그 영원한 방황 같은 정치 소식도 있었고, 교황의 궁정에서 (일에 눌려 줄을 지경에 있을) 마키아벨리를 이제 소환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있은 후, 벌써 사무실 부하 직원들은 일이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에 (구석에 처박혀 꿈을 꾸고) 있다는 등, 시(시)와 서기국에 대한 소식들도 있었다. 그는 또 알라만노 살비아티가 몇몇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키아벨리를 건달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그와 곤팔로니에레가 이제 서로를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이것이 (십년기)의 헌정에 대한 그의 보답이었던 셈이다.
(배에 바른 동물 기름)에 대한 편지는 10월 11일자로 되어 있고 윗 머리의 착신지도 (포를리 또는 악당이 있는 곳)이라고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10월 9일 이후 포를리에 있었다. 여기서 교황은 이미 7일 체세느에서 선포한 금령에 덧붙여 벤티볼리오를 겨냥한 초강경 교서를 발효하였다. 이 교서만으로는 볼로냐를 공략하기가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차에 프랑스 군이 지척에 접근하자, 교황은 마키아벨리를 불러 지금이야말로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의 군대가 필요한 대임을 알렸다. 그의 말인즉,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원병이 마지막 줄에 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었고, 이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다 이 사실을 알이기 위해 즉시 전령을 보냈다. 그는 필요한 시일을 꼽아보았다. 그것은 급한 성격의 교황에게는 (너무 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월 16일 마키아벨리는 클론나가 이미 군령(군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참전시 필요한 비용까지도 수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황을 알현하였다. 줄리오의 입이 찢어졌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10인위원회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리고는 그가 베네치아의 영토를 피해서 피렌체 영토를 경유한다고 결정을 내리자, 마키아벨리는 그에게 요청하여 자신이 한 걸음 앞서 가 이 볼품없는 나라를 지나는 교황 및 그의 궁정과 병사들을 위해 준비해놓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하였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서기장은 스스로 병참 장교가 되어, 카스트로카로, 모딜리아나, 마라디, 팔라추올로 등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교황을 보위하였다. 그가10인위원회에 보낸 몇 통 안 되는 편지들은 그 길이도 짧은 뿐 아니라 내용도 정치보다는 시락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팔라추오롤에서 그는 다시 줄리오 2세의 행적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만일 볼로냐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더 큰 일을 모색함에 있어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판단컨대, 지금이 아니면 이탈리아가 스스로를 삼키려 해왔던 자들을 응징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20일 이몰라에 도착한 볼로냐의 사절들은 교황과의 면담을 기다리던 중에, 피렌체가 그들의 군주와 싸울 군대를 보낸 데 대해 마키아벨리에게 (정중히)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피렌체인들에게 (시류에 따라 움직이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다름아닌 볼로냐의 군주였으므로, 그가 못마땅하게 생각해야 할 대상은 피렌체인들의 정책이 아니라 피렌체가 스스로의 희생을 감하며 그로부터 배웠던 바로 그 행동 방식이라고 말하였다. 벤티볼리오가 발렌티노의 시대에 했던 일을 빗댄 이러한 응답은 정말 일품이었다. 바로 폐부를 찌르는 그의 농담 방식은 과연 마키아벨리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파르티아의 화살인 셈이었다.(마지막으로 남긴 독설이라는 뜻으로, 마키아벨 리가 사절을 그만두고 곧 돌아가게 된 것을 가리킴 - 옮긴이). 며칠 전 교황청 사절로 선임된 프란체스코 페피가 10월 26일 이몰라에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벤티보리오가 떠난 도시가 함락되고 11월 11일 교황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곳에 입성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대가 도착한 후에도 이틀 더 이몰라에 머물러 있다가 만성절(만성절, Ognissanti : 11월 1일을 말한 - 옮긴이)에 맞추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이제 연례 행사가 된 새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애정 어린 민병대 일에 전념하였다. 보오나코르시의 비유를 계속 빌리자면 민병대 호(호)는 이제 암초 지대를 벗어나 돛을 한껏 펼치고 갑자기 대해로 나선 형국이었다. 12둴 6일에는 9인 피렌체군령 및 민병대 관제위원회 Nove ufficiali dell'lrdinanza e miliaia fiorentina가 창설되었는데, 당시 이는 국가의 업무를 안정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직제였다. 크든 작든 이 모든 것이 마키아벨리에 의해 구상되고 추진되었다. 위의 9인관제위원회에 대한 법령 역시 그가 초안한 것이었다. 그의 명석학도 훌륭한 저술 (피렌체 군사조직론 Discorso dell]ordinare lo stato di Firenze alle armi)은 이 법령이 막 통과되던 무렵에 씌어졌다. 그는 글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일반적인 것에서 시작한 뒤, 이에 신제도의 세부 사항들을 논의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잇다. (지휘관이라 함은, (...) 사법적 권위를 가지고 군대를 통할하는 사람을 뜻한다. 피렌체에 사법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소수이며, 군대는 전무하다.)
9인관제위원회라는 새로운 직제에는 서기관이 한사람 필요했고 이를 맡을 인물을 마키아벨리 외에는 없었다. 물론 제2서기장직과 10인위원회 서기관직은 그대로 겸임한 상태였다. 하지만 겸직에도 불구하고 봉급은 관직 하나에 대해서만 지급되었는데, 이는 지금과 비교하면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당시로서는 아직 다른 방도가 모색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피렌체의 서기장은 봉급을 많이 받는 쪽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물론 받는 만큼 쓰기 위해서이긴 하지만,(그에 못지않게 명성과 찬사 역시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또 바로 이러한 자신의 업적 때문에 관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누구보다 더 열성인 사람은 소데리니 추기경이었다. 새로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이 도시가 이처럼 가치 있고 짜임새 있는 일을 한 적은 우리가 알기로도 꽤 오랫동안 없었던 듯하네.(...) 이른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신의 선물일세.)
최근 불로냐로 파견된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도 그곳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축하의 말을 하고 나서, 이미 10인위원외에서 그렇게 하고 잇듯이 자신을 9인관제위원회의 서기보로 써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또한 페피가 소환 요청을 올렸고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다시 교황청 사절로 복귀하리라는 소문을 전해 주었다. 나는 이 소문이 실제 소문 이상으로 진행되었는지 어떤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마키아벨리는 아직 초창기 상태였던 새로운 제도를 확고히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을 이제 막 시작된 그 일로부터 떼어내려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특유한 열성으로 1507년 3월 14일부터 4월 17일까지 34일 동안 피에베 산토 스테타로, 앙기아리, 발 디 키아날, 키안티, 포치본시, 콜레, 산 지미냐노, 포마란체 등지를 돌면서 병사들을 모았다. 5월이 되자, 그는 군대 사열을 위해 사나 지미냐노로 돌아왔으며, 아마 방금 말한 다른 지역에서도 사열이 있었을 것이다.
곤팔로니에레는 그 어느 때보다 마키아벨리에게 믿음을 보여주었고, 이 덕분에 서기장은 이 일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언이든 그를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j. 하지만 일안 더 쉽게 해나가도록 하는데는 그의 동생인 소데리니 추기경의 도움이 컸다. 그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자신의 (우정) 보여주는 데 인색함이 없었으며, 나아가 1506년 3월 4일자 편지에서 마키아벨리에게 더 큰 일을 약속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추기경은 슬쩍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국의 안녕과 위엄을 위하여 (자신의 손으로 그처럼 가치 있는 일을 성사시켰으니, 자네의 기쁨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 믿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군사조직론)을 보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자네가 쓴 이 작품은 분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만한 것이네. 그리고 자네의 말이나 우리의 믿음이나 모두 그러하듯이, 이번 일 때문에 자네의 힘이 깡그리 소진된 것이 아니라면 자네의 지력을 모두 쏟을 만큼 가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나)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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