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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Rebellion16

뮌헨으로의 도주 1913년 5월 24일에 히틀러는 빈을 떠나서 뭔헨으로 이주하였다. 이 때 그는 스물네 살이었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동경과 원한이 뒤섞 인 감정으로 바라보는 우울한 젊은이였다. 은둔시설의 실망들이 그의 본질 에 들어 있는 외곬적인 폐쇄적 특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빈에 친구도 없었다. 비현실을 지향하는 그의 성격에 어울리는 일이지만 그는 오히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인물들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했다. 리하르트 바그 너, 리터 폰 쇠너러, 뤼거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운명의 억압' 아래서 얻은 '개인적 세계관의 줄기' 는 몇 개의 절대적인 원한으로 이루어져 있 다. 그러한 원한들은 어두운 부화기를 지난 뒤 때때로 정열적으로 폭발하 곤 하였다. 그는 나중에 언급한 대로 '절대적 반유대주의.. 2020. 8. 15.
사상적 토대 어떤 연구에 따르면 그의 숙소에서 멀지 않은 펠버 거리에 잇는 담배공 장에서 종족주의를 다룬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발행부수 10만 부 정도였고 특히 대학생들과 중간지식층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당신은 금발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문화 창조자고 문화 보존자다! 당신은 금발인가? 그렇다면 여러 가지 위험이 당신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금 발과 남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책들을 읽어라!" 제1면에 큰 표제어로 이렇 게 광고하고 있었다. 수사노릇을 하다가 그만둔, 요르크 란츠 폰 리벤펠스 라는 그럴싸한 귀족 이름을 가진 사람이 발행하는 잡지였다. 그것은 게르 만의 봄의 여신인 '오스타라'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이 잡지는 아싱족 (혹은 영웅족) 대 원숭이족 (혹은 숲의 종족)의 싸움에 대해서.. 2020. 8. 15.
무너진 예술가의 꿈 20세기로 넘어오던 시기에 빈은 여러 세기의 명성과 유산을 간직한 유럽 의 대도시였다. 그곳은 영광에 넘치는 모습으로 오늘날의 러시아와 발칸 반도 깊숙한 곳까지 지배하였다. 이곳으로부터 열 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 과 종족들로 이루어진 5천만 명의 인구가 통치되고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 다. 그들은 바로 도이치, 마자르, 폴란드, 유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 르비아, 이탈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루테니아 사람들이었다. '이 도시의 천재성'은 모든 대랍들을 부드럽게 만들고 다민족 국가의 갈등을 조정해서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능력에 있었다. 모든 것은 확고한 기반 위에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는 1908년 60년 간의 통치를 축하받으며 마치 국가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 는.. 2020. 8. 15.
출생과 시작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또한 미화시키는 것은 그의 생애의 근본적인 노력 들 중의 하나였다. 역사상의 어떤 현상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토록 억 지로 양식화되고, 개성을 드러내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한 인가의 것이라기보다는 기념동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생 동안 그는 그 이미지 뒤에 숨으려고 애썼다. 일찍이 소명에 대한 의식으로 딱딱하게 굳어져서 서른 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위대한 지 도자의 모습, 집중하고 얼어붙은 접근 불가능의 모습 뒤로 숨어 버렸다. 전 설을 만들어내는 어둠과 특별한 선민의식의 광채가 그의 삶의 전사를 뒤덮 고 있다. 또한 불안, 비밀스러움, 특이한 역할 특성이 그의 존재에 각인되 었다. 상승을 위해 애쓰던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NS.. 2020.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