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tler's Rebellion

쿠테타

by godfeeling 2020. 8. 15.

  11월 8일가지 이틀동안  신경질적인 활동들이 이어졌다. 모두들 서로  협
상하고 뮌헨 전체가 전쟁 준비롸 소문들로 와글와글하였다.  전투동맹의 원
래 계획은 11월 10일 저녁 어둠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뮌헨 북부에 있는 
프뢰트마닝 들판에서 대규모 야간연습을  실시하고 다음날 새벽에 보통 행
진 듯이 뮌헨으로 들어와서 민족주의 독재체제를 선포하고 3거두에게 행동
을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준비회의를 하는 동안에  카르가 11월 8일 저녁에 시민 양조장에
서 강연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곳에는 주정부 내각과 로소브, 자이
서 곤청과 경제계의 책임자들, 조국연합 대표들도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카
르가 자기보다 선수를 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히틀러는 다음 
순간 모든 계획을 뒤집어엎고 바로 이튿날로 거사 날을  잡았다. 급히 서둘
러서 돌격대와 전투동맹 부대들이 소집되었다.

    서막을 알리는 총소리
  집회는(1923년 11월 8일0  20시 15분에 시작되었다. 길다란  검은 외투를 
입고 철십자 훈장을  매단 히틀러는 시민 양조장으로 차를 달렸다.  최근에 
구입한 빨간 벤츠 자동차의  옆좌석에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울리히 그라
프와 아무것도 모르는  안톤 드렉슬러가 앉아 있었다. 안톤 드렉슬러는  이
날 저녁 마지막으로 중요한 모임에 등장하였다. 비밀을  지키려는 이유에서 
그에게는 시골의 집회에  가는 중이라고만 말했다. 이 자동차 속에서  비로
소 히틀러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 8시 반에 거사가 시작된다고 알리자 드렉
슬러는 침울하게 이 모든 계획을  위해 행운을 빈다고 말하고 소극적인 태
도로 물러서 버렸다.
  홀 입구 앞에는 대규모 대중이 모여 있었다. 계획대로  방금 시작된 집회
를 덮치지 못할까 두려운 나머지  히틀러는 그곳에서 경비를 맡은 경찰 간
부에게  재빨리 입구를 비워놓으라고 명령하였다. 카르가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독재의 도덕적 권한'의  근거를 말하고 있을 때 히틀러가 홀문
에 나타났다.
  증인들의 보고에 다르면 밖에서  대원들의 차가 도착하고 히틀러 돌격대
가 몰려들어 건물을  전시처럼 봉쇄하자 그는 몹시 흥분하였다. 그의  특징
이지만 과장된 장면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면서 맥주잔을 높이 쳐들었다가 
무거운 기관총이 자기 옆에  세워지자 마지막으로 연극처럼 맥주를 쭉들이
키고 잔을 바닥으로  내리쳐서 깨뜨렸다. 그러고는 권총을 빼서 높이  쳐들
고 무장한 돌격대의  선봉에 서서 홀 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갔다.  주위에서 
맥주잔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의자가  뒤집어지는 동안에 그는 탁자위로 뛰
어올라가 유명한  일화가 되어버렸지만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천장에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리고는  어찌할 바 모르는 청중을 뚫고 단상으로  나
아갔다.
  "민족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고 그는 외쳤다. "이 홀에 6백 명의  중무장 
병사들이 장악하였습니다. 아무도  홀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얼른 조용해하
지 않으면 기관총을 회랑에 배치하겠어요. 바이에른 정부와  중앙정부는 제
기되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세워질 것입니다. 방위군과  지방경찰 청사들은 
점령되었습니다. 방위군과 지방경찰은  이미 갈고리 십자가 아래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카르, 로소브, 자이서에게 '거친 명령조로' 자기를 따라 
옆방으로 오라고 요구하였다.  그 사이 정신을 되찾고서  큰소리로 "연극이
다!" "남아메리카냐!"하고 외치고 사람들 사이에서 돌격대가 지난번 맥줄홀 
전투때와 같은 방식으로 질서를  잡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이상한 방식으로 
유령 같은 국가권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승리냐, 죽음이냐!
  전체 맥락이 온통 모슨 투성이고 불확실한 것이지만 그래도 사건의 기본
적인 윤곽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권총을 거칠게 흔들어대면서  히틀러는 그
들 중  아무도 살아서 이 홀을  떠나지 못하리라고 세 사람을  협박하였다. 
그러면서도 형식적인 태도를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일이 진행된 것을 사
과하였다. 자신은   세분께서 새로운 직책을 떠맡은 것을 쉽게  해드리려는 
것 뿐 이라고 했다. 어차피 그들은 동참하는 길밖에 없다고.
  푀너는 독재적  전권을 가진 바이에른  지사로 임명되고 카르는  통치자, 
그리고 자신은 새로운  중앙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베를린을 
행한 행진에서 국민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고 자이서는 경찰 장관직을 
맡으라고 하였다. 그는 점점 더 흥분하면서 계속하였다.
  "이런 발걸음이  여러분들에게 힘들게  여겨지리란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도약을 쉽게 해드려야지요. 여
러분은 각자  맡은 바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존재근거가 없는  거죠. 여러분은 나와함께  싸우고 나와 함께  승리하든지 
아니면 나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나는  총알 네발을 장전하
겠습니다. 세 발은 나를  떠나는 동료들을 위한 것이고 마지막 한  발은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보고에 다르면 근 연극적인 몸짓으로 권총을 자기 관자놀이
에 갖다대고 확인하였다고 한다.
  "내일 오전에 승리자가 안되어 있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히틀러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세 남자들은  그다지 감동을 받지 
않았고 특히 카르는 이 상황을 이겨내고 있었다. 이런  미친 도둑질과 자신
에게 해당된 역할에 기분이 상해서 그는 말했다.
  "히틀러 씨 , 당신은  나를 쏘라고 명령할 수도 있고 당신 자신이   나를 
쏠 수도 있소 하지만 죽거나 안 죽거나 내게는 별 의미가 없어요."
  자이서는 히틀러가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고 로소브는 침묵하였다.  문
과 창문에는  이따금 무장한  히틀러 추종자들이 나타나서  무기로 위협을   
하곤 하였다.
  한순간 이 세상의 말 없는  무관심 탓으로 기습작전은 실패한 듯이 보였
다. 히틀러가 맥주잔을   바닥에 던져서 기습신호를 주자 쇼이브너  리히너
는 자동차를 타고  출발해서 거기 참석하지 않은  루덴도르프를 데리러 갔
다. 히틀러는  루덴도르프와 그의 권위를  통해서 사태가 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사이에 그는 한 번 더 불안한 호로 돌아갔다. 자신의 실패에 실
망해서 신경질적으로 그는 자기가 좀더 확실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대중
에게 돌아간 것이다.
  역사가인 칼 알렉산더  폰 뮐러는 중인의 한  사람으로 이곳에 붙잡혀서 
조롱당하고 거친 돌격대 지휘자 히틀러는 흥분해서 연단으로  달려갔다. 배
경이 없고 불손한 이 젊은 남자는 정신이상의 발작증세가  있었고 보통 사
람들에 대해서  특이한 작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스꽝스럽고  술집 
웨이터 같기도 했으며 검은 코트로  위장한 듯한 모습으로 이 지방의 자신
만만하고 냉정한 유력자들 앞에 섰다.
  그리고 대단히 능숙한 연설을 해서 그는 "집회의 분위기를 단 하나의 문
장으로 뒤집었다. 마치  장갑처럼. 나는 그런 일은  겪어본 적이 거의 없었
다. 그는 연단으로 갔지만  소동이 너무 커서 주목을 받기 위해서  총을 한 
방 쏘았다. 나는 그  움직임을 보았다. 그는 브라우닝 권총을 뒤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그는 10분  만에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는 자신의 예언이  맞지 
않은 것을 보러온  셈이었다." 그러나 거기 모인 사람들 앞에  서서 얼굴들
이 자기를 향하고 있고. 그 얼굴들이 기대에 차  있으며 불안한 목소리들이 
잦아들어 속삭임으로 변하는 것을 보자 그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이 사람들에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사실들을 
나열하듯이 짤막하고 명령적인 말투로  그때까지 희망과 예감과 소원의 극
단적인 집합체에 불과한 것을 되풀이하였을 뿐이다. 새로운 이름들, 새로운 
직위들, 그리고 새로운 제안들을 말했다. 그러고 나서 소리쳤다.
  "임시 도이치 민족정부의  과제는 이 나라의 온 힘을 다해서,  그리고 도
이치 관구들의 모든힘을 끌어모아서 죄악의 바벨탑인 베를린으로 행진하고 
도이치 민족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저밖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카르와 로
소브와 자이서 말입니다. 이 결심이 그들에게는 정말 어렵답니다. 여러분은 
도이치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
은  자만과  이기심이 아니고 우리는 우린 도이치   조국을 위해서 마지막 
순간에 싸움을 떠맡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방국가를 건설하고자  합니
다. 연방국가 내에서 바이에른은 바이에른에 어울리는 것들을  유지하게 되
지요. 내일 이 나라에는 도이치 민족정부가 서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죽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청중에게 펼쳐 보인 설득력과, 카르, 로소브,  자이서도 이미 자기와 
한편인 것 같은  기만술책은 '완벽하게 뒤집기 효과'를  일으켰다. 히틀러는 
홀을 나설 때 "카르가 합류한다면  홀 전체가 자기의 편에 서게 될 것이라
고 말 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지게 되었다."

    루덴도르프 등장
  그러느 s사이 루덴도르프가 나타났다. 그느 히틀러의  비밀주의와 제멋대
로 관직을 분배하고 자신에게는 군대만 떠맡긴 것 때문에 초조하고도 화가 
나 있었다. 물어보지도  않고 사방을 둘러보지도 않고 근 말하기  시작하였
다. 세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고 자기도 놀라기는 했지만, 그러는 위대한 역
사적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전설적인 민족영웅의  모습을 직
접 보고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한 삶씩 굴복하기  시작하였다. 로소브는 루
덴도르프의 말을 장교식으로  일종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자이서도  그를  
따랐다. 오직 카르만이 고집스럽게 반항하였다. 히틀러가 흥분해서 그가 자
기들과 함께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말
하자 카르는 냉정한 태도로 자신은  그런 일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대꾸
하였다. 효과만 노리는 히틀러의  연극적 기질과, 정치적 관료의 냉정한 권
력이해 사이의 차이가 이 두 문장 안에 분명하게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는 사방에서 압력을 받고 카르도 마침내 굴복하였다.  이삶들은 함게 
동지와 같은 장면을 연출하면서 홀로 돌아왓다. 겉보기에  합의가 이루어진 
듯한 모습을  보고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열화와 
같은 환성을 들으며 주연배우들은 악수를 하였다. 특히  루덴도르프와 카르
가 창백하고 굳은 표현으로 과열된 태도를 보이는 대중  앞에 나섰던 반면,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기쁨으로 빛나고 카르를 움직여서 동참케 한  것
을 행복해' 하였다.
  짧고 소중한 한 순간  그는 그 동안 꿈꾸어온 것을 성취한  듯이 보였다. 
유명인사들 사이에 섞여  환호성을 듣고 있었다. 그들의 박수갈채는 빈  시
절 이후 수많은  개인적인 쓰라림을 보상해주는 것이었다. 카르와 국가  공
권력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국민 사령관 루덴도를프와 나란히 서서 잠정적
인 국가 독재관의 역할을  이미 거머쥐게  되었으니, 그토록 오랜  세월 동
안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수없이 실패를 거듭해 온 실업자인 그가 
그토록 출세한  것이다. '이 일은  후세에 동화처럼 여겨질 것'이라고  그는 
자기 생애의 대담한 전진을 바라보며 놀라워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사
실상 이 쿠테타가 어떻게 끝나든지  상관없이 그는 이순간부터 지난 몇 해 
동안의 지방무대에서 놀지  않고 전국적인 무대로 진출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충심으로 그러면서도 모르는 사이 우스꽝스러운 어조로  그는 인사말
을 끝맺었다.
  "나는 5년 전 육군병원에서 눈먼 병신의 몸으로 자신에게 맹세하였던 일
을 이제  실현할 것입니다. 11월의  배신자들이 땅에 쓰러지기까지  현재의 
비참한 독일의   폐허에서 권력과 위대함, 자유와 장엄함의 독일이  부활해 
일어나기까지 쉬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아멘!"
  대중이 소리  지르고 환호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짤막한 인사말을   
하였다. 카르는 군주제, 바이마르 고향, 도이치 조국 등에  대한 몇 마디 알
아들을 수  없는 고백을 했다.  루덴도르프는 전환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여전히 히틀러의 태도에 대해서 화가 난  채로 단언하였다. "순간의 위대성
에 사로잡히고 깜짝  놀라서 나는 자신의 권리에  따라 도이치 민족정부에 
자신을 맡겼다."
  흩어지면서 그들은 주지사인  폰 크닐링과 현재의 주장관들.  경찰청장을 
체포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체포된 사람들이 돌격대  대학생부대 지휘장인 
루돌프 헤스에 민족 출판사 율리우스 레닌의 저택으로 호소오디는 동안 히
틀러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공병부대 막사 앞에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22시 30분경 홀을 떠나자마자  로소브, 카르, 자이
서는 동지와 같은 태도를 루덴도르프에게 인사를 하고서 그 밤중으로 사라
져버렸다.

    약속위반 대 약속위반
  쇼이브너 리히터와  되돌아온 히틀러가 그들이  의십스럽다는 말을 하자 
루덴도르프는 잔득 성이 나서 도이치 장교의 약속을 의심하는 행위는 사절
이라고 소리쳤다.  두시간쯤 전에 자이서는  히틀러에게 이 쿠테타  시도로 
약속을 깨드렸다고 비난했다. 이 두 개의 장면은 두  세계의 대립을 보여주
는 것이다.  한편에는 기본원칙, 명예심 예비소위의  특징적인 명예심 등을 
지닌 시민세계가 다른한편에는 권력목적만을 지향하는 새로운 남자의 아무
런 배경도 없는  세계가 있었다. 시민적인 규범과 명예개념은 히틀러가  무
시하는 게임 규칙을  언제나 다시 불러들이곤 하였다. 시민세계는 그런  규
범과 명예개념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히틀러에게  여러해 동안이나 상당한 
정도로 감상적이지 않은 실질적인 우월성을 확보해 주었다.  기본적 원칙들
을 믿지 못하며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변세계 한가운데서 히틀러
에게 성공의 원칙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이날 밤에 히틀러는  "약속 위반에 
대해서 약속위반으로 응답하고 게임에서 이기는 상대자들을"을 보았다.( 집
회가 해산되었을 때 거기  참석한 내무장관 슈바이어는 히틀러에게 다가가
서 그날 저녁의  승리자가 느끼고 있던 히틀러의 가슴을 '화난  학교선생처
럼' 툭 치고 " 이 승리는 약속위반"일뿐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그것은 히틀러에게는 위대한 밤이었다. 그가 소원하는  모든 것을 
다 담은 밤이었다. 극적 요소, 환호성, 반발,  행동할때의 병적인 쾌감, 현실
이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반쯤 실현된 상태에서의 느끼는 비할 바 없는 
흥분 등이  있었다. '승리의 행진'을  점점 더 과장된 화려함으로  준비하는 
뒷날의 기념식에서 그는 바로  이순간의 체험가 위대함을 보존하려고 하였
다.  그는  룀의 포옹하면서 열렬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더 좋은 시절이 
옳거야 독일을 곤궁과 수치에서 구한다는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 모두 
밤낮없이 일하게 될  거야." 도이치 민족에게 보내는 성명서 하나와  두 개
의 포고문이 만들어졌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범죄를 판결하기 위한  정치
법정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8년 11월  9일 국가반역 주모자들에게 
오늘 날짜를 추방을  선언하고" 그들을 "죽여서는 산채로든 민족국가 정부
에 양도하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써 요구하는 내용이다.

    위기와 결말
  그 사이에 반대행동이 시작되었다. 로소브는  시민  양조장에서 돌아오자
마자 지도급 장교들에게서 위협적으로 들리는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히틀
러와의 단결장면은 협박에  의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소
브 장군은 꿰뚫어 볼 수 없는 마음속에서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였던 간에 
격분한 장교들  앞에서 쿠테타 의도를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곧  이어서 
카르도 하나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는 자심의 쿠테타  동의를 철회한다
고 밝혔다. 해면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밝히고 있듯이 쿠테타   동의는 위
협을 받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는 국가사회당과  전투동
맹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계엄사령관 카르가 히틀러 추종세력이 뮌헨으로 진입하는 길을 차단하라
는 명령을 내렸을 때도 히틀러는 아무것도 모른채 계획된 베를린 대행진을 
위해서 아주 바쁘게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다. 혁명적인 시작의 분위기  속
에서 돌격대는 사회민주당의  <뮌헨 포스트>건물을 파괴하였고 다른 소대
들은 집에서 인질을 끌어내고 이리저릴 돌아다니며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기
도 하였다. 한편 룀은 쇤펠트 거리에 있는 방위군 지휘본부를 점거하였다.
  아무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가볍고 축축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
다. 자정이 지나서도  카르와 로소브에 대한 소식이 없자 히틀러는  불안해
졌다. 심부름꾼을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프리크는 체포된 듯했다.  시
간이 좀더 흐르자  푀너의 소식도 끊겼다. 이때쯤 히틀러는 자신이  속았다
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생애에서 후퇴나 실망이 있을 때만다  그랬지
만 모든 것도 함께 무너졌다. 밤이 지나는 동안  슈트라이허가 대중에게 정
열적으로 하소연해서 밀어 붙여보자는  시민 양조장의 제안을 가지고 나타
났을 때 슈트라이허의 보고에 다르면 히틀러는 멍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
더니 체념하고 어찌할 바 모른 체 종이쪽지에 적어서 '조직 전체'를 그에게 
엄4겨주었다. 히틀러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무감각의 단계를 지나자  절망의 발작이 뒤따랐다. 그 통제되지 않은  히
스테리 발작은 뒷날의 경련과 미친  듯한 분노의 발작을 미리 보여주는 모
습이었다. 미칠  듯한 저항을 결심했다가  모든 것을 과격하게  내던지듯이 
다음날 시위행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잘되면 좋다. 잘되지 않으면 우리
는 목매달아 죽자"고  그는 말했다. 이 말도 두 번째로  승리를 기대하거나 
아니면 몰락을 기대하는 말로   승리와 자기 파괴 사이에서 흔들리는 뒷날
의 모습을 예견케 한다.
  그가 파견한 정찰조가 유리하게 들리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자 그는 순
간적으로 선동의 힘에 대한 희망과 열광과  신뢰를 되찾았다. "선전이야 선
전, 이젠 오직 선전에만  달렸어." 하고 그는 외쳤다. 즉시 그날  밤을 위해
서 자신이  주요 연사로 등장하는  14개의 대규모 군중집회를  기획하였다. 
두 번째 행사는  그 다음날 1만 명의 사람들이 국민의 궐기를 기념하여 쾨
니히 광장에서 축하를 하는 것으로 정했다. 새벽 무렵에는  벌써 그 행사를 
위해서 플래카드를 주문하였다.
  그것은 특이한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히틀러에게 남겨져 있는 유
일하게 성공적인 해결책이기도  하였다. 역사서술에 일관해서 등장하는  비
난 즉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가로서의  능력이 마비되었다는 비난은 
그다지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비난은 히틀러의   전제와 목적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신경은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신국도 내각부서도 점거하지 못했고, 정거장도 군대막사도  아직 그
의 통제 아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뮌헨에서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할 길
이 없었고, 오직  뮌헨의 힘을 등에 업고서 베를린으로 행진해가려는  의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 그의 체념은 비판자들의 판단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현실적으로 동지들이 떨어져나간 것과 동시에 쿠테타 기도 전
체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간파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시위행진과 계획된 선동의 물결을 통해서 그는 분명히 어떤 구면의 전환
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근본적으로 두터운  여론의 벽을 형성
하여, 내란 기도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치적, 형사상의 결과에서 보호할 장
치를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그날  밤 여론이 미친 듯이  급변하는 
과정에서 대중을 함께 끌여 들여서  뮌헨을 너무 오래 기다려온 베를린 행
진을 시작할까 하는  생각이 간혹 떠오르기도 하였다. 자기의 상상력에  이
끌려서 히틀러는 아침 무렵 선동대를 거리로  내보냈다. 그들은 "깃발을 답
시다!"하고 외치며 거리로  달려나갔다. "우리가 호응을 받는지 보고 싶다"
는 것이다.(빌헬름 회그너)
  실제로 이러한   기획이 전망이 그다지 불리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분명해졌지만 여론의 소리는 완전히 히틀러와 전투동맹 편에  있었다. 시청
에 , 그리고 도시의 수많은 건물과 주택에도 갈고리  십자가 깃발이 내걸렸
다. 일부는 손수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아침신문들은 간밤 시민 양조장 사
건을 호의적으로  보도하였다. 전날부터  당은 287명의 신규등록을  받았고 
전투동맹이 도시 여러 곳에 만들어둔 하급장교와 일반병사들이 노골적으로 
히틀러의 행동과 행진계획에  동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슈트라이허가  거리
로 내보낸 연설자들은  쌀쌀한 11월 아침에 열에  들뜬 분위기에서 생생한 
박수갈채를 얻었다.

    목적 없는  행진
  그러나 공식 여건과  차단된 채, 사방에서 사람들의 추진력과 격려에  둘
러싸여 있었지만  오전이 경과하는 도안  히틀러는 다시 주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대중은 완전히 헌법상의 의미에서  , 그와 그의 안전, 
에너지, 그의 용기를 북돋우거나 아니면 꺾어버리는 요소처럼  보이게 되었

  그는 이른 아침 전투동맹의 정보책임자 노인체르트 소위를 베르히테스가
덴의 왕세자 루프레히트에게 보내서 중재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소위가 돌
아오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시위대가  무장병력
과 충돌할 수도 있으며 잊을 수 없는 5월 1일의 패배가 훨씬 더 비참한 방
식으로 되풀이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였다.
  히틀러가 망설이고 절망하면서  노인체르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오랜 토론을 거친  다음 루덴도른프는 정열적으로 "행진합시다!"하는  한마
디로 모든 말을 끝냈다.  이어서 정오 무렵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수 뒤
에 대열을 만들었다. 지휘자들과 장교들은 앞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덴도르프는 시민 복장이었고 히틀러는 지난밤의 프록코트 위에 트렌치코
트를 입었다. 그이 옆에는  울리히 그라프와 쇼이브너 리히터, 다음에 베버
박사, 크리벨, 괴링 등이 섰다, 히틀러는 뒷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것
이 마지막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걸었다. 우리가  출발할 때 저 바깥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이제 마지막이군!'하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다. 각자가 이
런 확신을 마음에 지니고 있었다. "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출발하였다. 
  이자르 강의 다리 위에서 행렬을 막아선 강력한 주경찰 초소 한 곳은 암
발만 쏘면 체포된  인질 전부를 죽이겠다는 괴링의  위협을 받고 당황하였
다. 불안해진 경찰관들은 시위대에게 순간적으로 밀려서 군중  한 가운데서 
무장해제 당아혹 군둥들이 뱉은 침과 따귀를 맞았다. 뮌헨  시청 앞 마리아 
광장에서 슈트라이허는 몰려든 군중을 앞에 놓고 높은 단상에서 연설을 하
였다. 히틀러가 군중이 '구세주'인 양 자기에게 몰려드는  것을 보고도 묵묵
히 행진만했다느 사실에서  그가 처해 있던 위기의 정도를 읽어낼  만하다. 
그는 쇼이브너 리히티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하게 기댈  곳을 
찾는 종속적인 태도로 그가 말하는 지도자의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태
도였다. 행인들의 환호를  받음녀 행렬은 목적도 없이 나가다가 도시  중심
부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왕궁 거리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  지휘부는 
<오 명예로운 독일이여>를  불렀다. 오네온 광장에서 다시금  경찰의 바리
케이트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어떻게  깆행되었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일부는 
상상력이 넘치고 일부는 변명조로  말한 혼란스런 증언들에서 오히려 성급
한 교전이  60초 정도 계속되었다. 맨  먼저 쇼이브너 리허터가 총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그과 함께 히틀러도 휩쓸려 쓰러지면서 팔을 삐었다. 두 번
째로 당수 노릇을 했던 오스카 콰르니도 쓰러졌다. 고지  재판소 판사인 푀
너도 쓰러졌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 14명과 경찰관 3명이 거리에서 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고 그 중에는 헤르만 괴링도 끼여 있었다. 
  비오듯 하는 총알 속에서  쓰러지거나 모두들 뿔뿔이 도망치는데 루덴도
르프만 분노에 몸을 떨면서 꼿꼿한 자세로 경찰 바리케이트 한가운데로 걸
어갔다. 단지 몇 명의 용감한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더라도 그날의 결과
는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대부분
의 사람들을 바닥에 누워있게  만든것음 비겁함이 아니고 국가공권력의 총
구에 대한 우익의 본능적인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총사령관 루덴도르프는  동지들의 비굴한 관점을  훨씬 넘어서는 장대한 
자부심을 진고 광장에서 담당 장교를 기다렸다가 체포되었다.  그와 더불어 
브뤼크너, 프리크, 드렉슬러, 베버  박사 등도 체포되었다. 로스바흐는 잘츠
부르크로 도망쳤고, 헤르만  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저편으로  도망쳤
다. 오후가 지나는  동안 방위군 지휘본부를 점령하였던 에른스트 룀도  짧
은 교전 끝네 전투동맹소속 대원 2명이 목숨을 잃었다ㅡ 사실을 알게 되었
다. 이날 그의 기수는 안경을 쓴 여자 같은 얼굴에, 뭔헨의 명망있는 한 고
등학교 교장의 아들이었는데 이름은 하인리히 히믈러 였다.  죽은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무기도 없이 말도 없이 이별의 행진을 하면서 연맹은 도시 중
심부를 지나서 해체되었다. 룀은 체포되었다. 

    체포당하다
  루덴로드프의 단단한  용맹성은 특히  히틀러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ㄷ. 
그는 같은 날  두 번이나 마비되었다. 오직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에서만 
그의 추종자들의 증언이 서로 모순된다. 그는 모든 것이  겨정되기 전에 엄
호하는 추종자들이 물에서 몸을 일으켜 무모하게 멀리  내다보았다고 한다. 
죽은 사람과 부상자들을 뒤에 버려두었다. 그는 혼란중에  루덴도르프가 이
미 죽은 줄  여겼다고 나중에 사과하듯이 말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거기 
머룰렀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전체적인 혼란중에 구급차의  도움을 받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몇  년 뒤에 그 자신이 만들어서 전파한  전설에 따르면 
그가 어찔할 바  모르는 아이를 포화중에 구해냈다고  하면서 자기 주장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 아이를  보여주기까지 하였지만 루덴도르프 일파에 의
해서 반박받았다. 
  히틀러는 뭔헨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슈타벨 호숫가 우핑에 있는 에른
스트 한푸슈텡글 부부는  그를 만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틀 뒤에 그는  체
포되엇다. '창백하고 지친  얼굴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모습이
었다. 그는 레히 강변에  있는 란츠베르크 요새로 이감되었다. 생애의 이런 
파국상황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그는 끌려가기 전에 체포
조의 장교에서 일급 철십자 훈장을 달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감옥에서도 그는  어두운 절망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에 그는 '총살 
될 것'을 믿었다. 다음 며칠 동안 아만,  슈트라이허, 디트리히 에카르트, 드
렉슬러 등이 이감되어  왔다. 뮌헨의 감옥에는 베버 박사, 푀너,  프리크 박
사, 룀과 같은  사람들이 갇혀있었다. 루덴도르프만은 체포되지 않았다.  히
틀러 자신은 그가 자기에서 부당하게 행동햇다고 느꼈다.  그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자기 일을 망쳐놓았다. 며칠 동안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
다 앞장서야 하며, 단식투쟁으로  생명을 끝내야 겠다는 생각을 지녔다. 안
톤 드렉슬러는 나중에  그의 이런 생각을 말렸다고 주장하녔다. 죽은  친구
인 쇼이브너 리히터의 미망인도 그가 이 어두운 시절의 절망을 이겨내도록 
도왔다. 장군홀 앞에서  벌어진 예기치 않았던 총격은 쉬지 않고  계속되던 
3년간의 상승과 전략적 전제조건들에 갑작스런 종말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
라 현실과의 무서운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초의 관란적인 연설 체험 이후로 그는 위대한 영웅 역할의 박수갈채와 
소음에 휩싸여서 점점 더 환상적인 가상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꿈결과 같은 
높이에서 대중최면과 자기 최면의 기만술을 발전시켰고, 깃발과  군대와 승
리의 행진을 보고 있던 참인데, 백일몽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갑자기 사납
게 찢겨나간 것이다. 
  정상적인 재판절차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그는 이상하게도 잃
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한순간 그는 위대한 장면의  낌새를 알아채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연극적인 등장, 청중, 박수갈채 등이었다. 그는 
나중에 1923년 11월  9일의 실패한 시도는 자기 생애에서 '어쩌면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표현하였다. 물론  재판의 기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 기회는 
그를 절망과 자포자기의 분위기에서  빼내서 바라던 연지자로서의 ㅊ로 되
돌려놓았다. 새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되찾고, 계획도 없이 부끄럽게 끝나
버린 쿠데타의 파국을  민족 선동가의 승리로 바꾸어놓을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1924년 2월 24일에 블루텐부르크 거리에 있는 예전의 사관학교 건물에서 
열린 쿠데타 관련자 재판은 모든 사람들이 "사건의 '본질적인 부분'은 절대
로 건들지  않겠다. "는 침묵의 합의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히틀러, 루덴도르프, 룀, 프리크, 푀너, 크리벨, 그리고 네 사람이 더 고발되
었다. 반면에 카르, 로소보, 자이서 등은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런 
재판 절차상의  대립에서 히틀러는 모든  이점을 이끌어냈다. 피고와  증인 
사이의 이런 대립은  복잡한 과거의 사정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
다. 
  그는 카프 쿠데타의 주동자들처럼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맹세하지는 않
았다. "각자 모두  오른손 손가락 세 개를 세우고 맹세하는  자세를 취하며 
자기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햇다. 자기ㅡ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으며 바
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고백하고 의장 앞에 나서서 '그렇
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전복시키려 했습니다'라
고 말할 용기를  갖지 목했다는 사실이 시민세계를 파괴시켰다. "  그에 반
해서 히틀러는 분명하게 자신이 의도했던 것을 고백하였다.  그러면서도 내
란죄라는 비난만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죄가 있다고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런 행동을 했다고는 고백하지만 내란죄를 범했다고는 고백하지 않겠습니
다. 1918년 국가반역죄에 대항하는 행동에 내란죄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밖에도 11월 8일과  9일의 행동만으로 내란죄가 구성될 수는 없습니다.  적
어도 그보다 몇  주, 몇 달 전부터  행동과 관계들이 다 포함되어야합니다. 
우리가 내란을 꾸미고  있었다면, 당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  이상합니다. 우리와 더불
어 같은 행동을 했던 저  신사분들이 자기들도 함께 이야기 하고 세부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준비하였다고 시인하지  않는 한 나도 내란죄를 지었다
는 부분을 거부합니다. 나는 스스로 내란죄인이라고는 느끼지  않으며 그저 
민족을 위하여 최상의 것을 바란 도이치 사람이라고만 느끼고 있습니다. "
  공격받은 사람 중  누구도 이런 주장에 맞서지 못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이런 방법으로 어떤 증인이 서술했듯이 재판을 '정치적 카니발'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피고의 역할을 고발자의  역할로 바꾸어버렸다. 검사는  어쩔줄 
모르고 한때는  3거두의 변호사 노릇을 맡게  되었다. 의장은 거의  아무런 
이의도 달지 못했다. 우레퍼럼 쏟아지는 관중의 박수갈채가  온화한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푀너가  '에버트 프리체'에 대해 말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을 가리켜서  "그 조직도 법도 나에게는  무관한 것"이라고 표현했을 때도 
전혀 제지를 받지 않았다. 재판정은 당국이  "피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목하였다."고  3월 4일 내각회의에서  바이에른의 
주 장관 한 사람이 말했다. 
  카르와 자이서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곧바로 체념하였다.  예전의 계엄사
령관인 카르는 어두운 표정으로  앞만 쏘아보다가 수많은 모순점에도 불구
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려고만 들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시도
가 얼마나 히틀러를 돕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로소브만은 정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였다. 거듭해서 그는 상대방의  수
많은 약속위반을 비난아혔다. "히틀러씨가 아직도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 그는 자기 계급의  경멸감을 모두 내몽며 국가사회당의 
당수가 "전략도 업고 고루하고 지루하고 때로는 난폭하고 때로는 감상적이
며 어쨌든 열등하다."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심리적 전문가의 
견해를 펼쳤다. "그는 도이치의 무솔리니,  도이치의 감베타로 자처하며, 군
주제의 비잔틴 양식(아첨)을  계승한 그의 추종세력은 그를 가르켜  도이치
의 메시아라고 한다. "
  히틀러가 격분하여 장군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의장의  의견에 따르면 '실
질적인 가치도 거의 없는' '무례죄'를 얻지는 않았다. 다만 자제하라는 경고
만 들었을 뿐이다.  수석검사조차도 구형의 근거를 히틀러의 눈에 띄는  태
도하고만 연결시켰다.  그의 '독특한 연설능력'을 칭찬하고  "그렇다고 그를 
민족선동가라고 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선의의 존경심에 넘쳐서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는 사생활을  언제나 순수하게 유지하였습니다. 
정당의 당수로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유혹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인정할 만
한 특성입니다... 히틀러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인물로서 단순한  환경에서 
나와서 공적인 분야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쟁취하였습니다. 물론  진지하고 
열심히 일해서 쟁취한 것입니다. 그는 풍부한 발상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에 
이르기까지 헌신하였으며  병사로서 최고로  자기 의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지위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하였다는 비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실패를 역이용하다
  이 모든 상황의 이점이 함께 작용해서 히틀러가 재판을 역이용하기 쉽게 
해주었다. 그러나 수없이  비웃음을 산 실패한 쿠데타를 가지고 하나의  승
리를 만들어내고, 11월 9일 새벽의 고통과 우유부단함을  대담한 민족적 거
사처럼 만들어버린 것은  결국 그 자신의 능력이었다. 히틀러는 무거운  패
배를 겪은 직후에 심문을 받으면서  실패한 거사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
맡았다. 그러고 나서 자기 행동은 조국을 위한 것이고  역사적 의무를 이행
한 것이었다고 더 높은 차원에서 정당화하였다. 
  그러한 주장에 나타나는 직관적이면서도 도전적인 확신은 의심의 여지없
이 그의 가장 인사억인 정치적 성공에 속하는 것이다.  그의 재판태도의 자
신감 넘치는 특성을 반영하는 최후 진술에서 그는 로소브가 자기를 가리켜 
'선전꾼이면 기상신호'라고 부른 말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인배란 생각이  얼마나 작은지요! 내가  장관자리를 얻는 것을 그다지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십시오.  장관이 되었다
는 사실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고  하는 것이 위대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일
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추구하였던 것은  첫날부터 장관보다는 1
천 배나 더 큰 것이엇습니다. 나는 마르크시즘을 파과한  사람이 되고자 하
였습니다. 나는 이  과제를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과제를 이루면 
장관이란 직합은 내게는 웃기는 것에 불과하지요, 내가  처음으로 바그너의 
무덤 앞에 섰을 때, '여기 추밀고문관 음악감독 리하르트 폰 바그너 각하가 
잠들다'라고 쓰지 못하게 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자랑
으로 넘쳐 흘렸습니다. 나는 이 남자와 도이치 역사의  수많은 남자들이 후
세에 자신의 직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했다는 사실
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시 나는 겸손해서 '북치는  사람'이 되고자 했
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최고이고 다른 것이 작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전환점
  그가 스스로 위대한 남자라고  자처하고 로소브에 맞서서 자신을 방어한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굴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칭찬하는 어
조로 말을 한  것이 처음부커 기습적인 작용을 하였으며, 재판과정에서  자
신을 중심인물로 부상시켰다.  공식적인 기록은 엄격한 서열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졌기에 끝까지 루덴도르프 - 히틀러 서열을 지켰다. 그러나  1차대전
의 총사령관을 보호하고자 하는 다방면의 노력은 히틀러에게 또 하나의 기
회를 마련해주었는데, 그는 그 사실도 알아채고 이용하였다. 오직 혼자서만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그는 루덴도르프라는 인물을  넘어서 공석으로 남아 
있는 민족운동 전체의 지도자 역할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심리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가지들의 시도에 들어 있던  도둑의 속성, 비
현실성, 완전한 절망 등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대단히 
수동적이고 어찌할 바 몰랐던 거사일 아침 자신의 행동도 슬며시 없어지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어리둥절하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건의 경과는 점점  더 똑똑하게 계획되고,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멋진  걸
작품이었다는 인상을 얻게 되었다. "11월 8일의 행동은 실패하지 않았다. "
고 그는 이미  법정에서 선언을 했을 정도였다. 그럼으로써 아주  공공연히 
뒷날 신화를 만들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감동적으로 
정치와 역사에서 자신의 승리의 비전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가 양성한 군대는  나날이 시간 시간 더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바
로 이날 나는 이 거친  떼거리가 대다가 돠고, 대대는 연대가, 연대는 사단
이 될 순간이 다가온다는 자랑스런 희망을 가졌습니다. 낡은  포를 먼지 속
에서 꺼내고  낡은 깃발을 다시 펄럭일  시간, 우리가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는 영원한 신의 최후의 심판에서 용서를 얻을 시간이 다가온다는 희망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뼈, 우리의 무덤에서 법정의 소리가 들리게 될 것
입니다. 오직 우리를 재판할  권능을 가진 법정 말입니다. 우리에세 판결을 
내릴 사람들은  여러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고발에  판결을 
내리는 것은 바로  영원한 역사라는 법정입니다. 여러분이 내릴 판결을  나
는 압니다.  그러나 저 법정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내란을 꾀했는가,  아닌
가?' 하고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법정은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낡은 
군대의 병참감을, 그 장교와 병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도이치 사람으로서 
자기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싸우다가 죽으려  한 이 사람
들을 역사라는 법정이  심파할 것입니다. 여러ㅈ분이 우리가 유죄라고  1천 
번이나 판결하여도 영원한 역사  법정의 여신은 미소지으며 검사의 구형과 
이 법정의 판결을 찢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여신은  우리에게 무죄를 선
고하기 때문입니다. 

  뭔헨 국민법정의 판결은 정확하에 말하자면 히틀러가  예견한 '영원한 역
사법정'의 판결에 가까운것이었다. 의장은 아주 애써서 3명의 민중판사들이 
유죄 선언을 내리도록 만들 수 있었다. 히틀러를 바른  시일 내에 사면한다
는 확답을 주고서야  겨우 그들의 동의를 얻어ㅓ냇던 것이다. 선고  자체가 
자시들이 말썽꾼을 축하하는  뭔헨 사회의 한 사건이었다. 판결 근거는  한 
번 더 피고의 '순수한 애국정신과 가장 고귀한 의지'를 높이 평가한 것이었
다. 
  히틀러에게 5년 간 금고형이라는 최저형량이 선고되었고 6개월의 형기를 
마치면 집행유예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루덴도르프는  무죄선고를 받
았다 부담스런 외국인 강제추방 규정은 '히틀러처럼  도이치 방식으로 생각
하고 느끼는'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법원의  결정이 내려지자 법정에 
있던 청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판사들이 법정을  떠날 
때 부휘크너는 두  번이나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옳아!"하고.  이어서 히
틀러는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법원건물의 창문에 모습을 보였다. 그의  뒤
에는 꽃다발이 쌓였다. 국가는 한 번 더 대립에서 패배하였다. 
  그러고 나자  히틀러에게 상승의 시기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11월  9일 
직후에 뭔헨의 대중은 때를 지어  모여들어서 그를 위해 억지 시위를 하였
다. 이어서 실시된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와 전국의회  선거에서 민족주의자
들은 상당한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당, 혹은 당활동이 금지된 이후 만
들어진 위장 단체는 히틀러의  마력과 마키아벨리적인 능력에 근거한 결집
력이 없어지자 짧은 기간에 서로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의미도 없이 싸
우는 집단들로 찢어지고 말았다. 드렉슬러는 이미  히틀러가 "당을 그 빌어
먹을 쿠데타로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고 불평했다. 
  1923년 말에 나라 안의 사정이  점차 안정되자 거의 오로지 공공연한 불
평에서 양분을 얻었던  선동의 기회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무렵  인플레
이션이 극복되엇고 운도 없이 시작된 바이마르  공화국에 그런대로 '행복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온갖 지역적인  충돌들에도 불구하고 11월 9일 사건은 
바이마르 역사라는 대규모 드라마의 급전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사건
은 전후 시대를  종결지었다. 장군홀 앞의 총격전은 특이한 각성을  가져왔
다. 비현실성에 빠져들어  방황하던 국민의 눈길을 부분적으로라도  현실로 
돌리는 데 기여하였다. 
  히틀러 자신과 그의 당 역사에도 실패한 11우러 거사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거기서 이끌어낸 전략적  교훈들과 개인적인 교훈들은  그의 
앞길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의 뒷날 해마다 연기오르는 물들 사이로  기념
행진을 하고 쾨니히 관장에서 저  희미한 11월 아침에 죽은 자들에게 청동
의 관에서 나오라고 외치곤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이러한 어두운 제례의
식은 역사적 재로를 가지고 정치적 쇼를 보여줄 기회로 삼곤 하던 그의 연
국적 성격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성곡한 정치가가, 자
신의 중요한  정치적 성장체험에 바치는  숭배 의식이었다. 사실상  그것은 
그의 생애 '가장 큰 행운'이었고, 당의 '진짜 탄생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선 바이에른을 훨씬 넘어서는, 독일까지도 넘어서는  여론을 그
에게 마련해 주었다.  당에는 순교자들, 전설, 박해받은  열성이라는 낭만적 
후광, 그리고 확고함의 영광까지 마련해준 사건이었다. 히틀러는 뒷날 기념
식사에서 이 모든 이점들을 찬양하고 그것을 '섭리의  지혜' 덕으로 돌렸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 당시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절대로 혁
명적인 운동을 창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당신도 다른 사람
들처럼 말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전혀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 
말이 옳았을 것입니다. "
  장군홀 앞에서 국가 공권력의 총구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국가의 힘에 
대한 히틀러의 관계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었고, 계속적인  권력장악 과정
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과정을 그는 다음 여러 해 동안  서서히 전개시키
고 모든 저항과,  자시편의 초조함에서 나온 반항에 맞서서 지켜나가게  된
다. 그는 전에도 이미  권력과 그 총애를 구했다. 그리고 "1919년부터 1923
년까지는 오직 쿠데타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을 말 그대로 받
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느 이제 권력의 비호 속으로 들어가려는  본
능적인 충동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고, 국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략체계로 
발전시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다. 

    선동가에서 정치가로
  11월의 체험은 현대 국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전망없
는 일이며 권력장악은 헌법의 토대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물론 히틀러가 권력욕을  향한 행진에서 헌법을  구속력이 
있는 제한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순히  합법
성의 보호 안에서  불법적인 일을 해나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다음  여러 
해 동안 행한 수많은 헌법에 대한 선서가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의 적법성
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헌법을  청산할 
시간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하였다. 쇼이브너 리히터는 1923년 9월  24일
자 기념 글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민족주의 혁명은 정치 권
력의 인수를 전제로  해서는 안되며, 국가의 경찰력 확보가 민족주의  혁명
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동시대의 어떤  아이러니컬한 표현처럼 '합법적인  아돌프'로서 히틀러는 
엄격한 ㅈ거의 사나이가 되었다. 유력인사들과 권력을 가진  기고나의 호감
을 얻으려 애썼으며 언제나 좋은 행동을 하겠다고 맹세하고 자신은 통편에 
서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혁명적인 의도를 감추었다. 폭력적인  공격성을 지
닌 초기의 어조들은 누그러지고 아주 가끔씩만 두려운 모습을 드러내곤 하
였다. 그는 국가를 패배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다듬어 나가려고 했다. 그것
이야말로 히틀러의  혁명적인 야심에 대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찰자와 해설자들을 기만하고,  보수적인 아니면 평범하게 반동적인  소시
민 정당이라는 단순하게 왜곡된 모습을 만들어낸 전략적인  자세였다. 히틀
러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방위군에 대한 관계를 변화시키도록  만들었다. 11
월 9일의 실패를 그는  무엇보다 군가 지도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목
한 탓으로 돌렸다.  뮌헨 재판의 최후진술이 이미 방위군을 자기편으로  끌
어들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 자세는 뒤집을 수 없는, 거의 절대적
으로 옹호된  새로운 전략원칙이 되엇다. 재판정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언젠가 방위군이 우리편이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ㅇ면 
1934년 6월 30일 유혈사태 때까지 정당 내부의 장체 군대의 역할을 엄격하
게 이 목적에  종속시켰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돌격대가 군대에  종속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돌격대는 방위군의 일부도 라이벌이 되어서는  아되는 것
이다. 
  히틀러가 장군홀 앞의 패배에서  이끄러낸 것은 강화된 전략뿐은 아니었
다. 그것은 나아가서 정치에  대한 그의 관계 자체를 변회시켰다. 그때까지
만 해도 그는  무엇보다도 범주적인 절대성을 통해서, 과격하 ㄴ대안을  통
해서 두드러지게 되엇고  마치 '자연의 힘처럼' 작용하였다.  정치란 전쟁터
에서 배웠떤 존재방식대로  적을 향한 돌진이며, 전선을 뚫고 나가는  것이
고, 격돌한 다음에는 승리냐 패배냐가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이제야 비로호 히틀러는 정치적 게임, 전략적 술책들,  겉보기 타협, 지루
한 훈련  등을 완전히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그저 
감정적인, 단순하게  선동가적이고 '예술가적인'관계를 마침내 극복한  것으
로 보인다. 사건들과 자신의 충동적인 반응에 이끌려가던  선동가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11월 9일의 실패한 쿠데타는 히틀러의  생애
에서 위대하고 결정적인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그는  수업시절을 끝낸 것
이다. 정확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히틀러의  정치입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자 체질
  히틀러의 변호사이며 뒷날 폴란드  총독을 지낸 한스 프랑크는 위른베르
크 조사 보소서에서 이렇게 말햇다. 히틀러의 '역사상의 삶의 전체', 그리고 
'그의 성격 전체의 본질'이 11월 쿠데타 과정에 핵심으로 나타나 있다고 했
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히  모순되는 상태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자기상승과 감정의 팽창, 이것은 애송이 도시 계획가,  작곡가, 발명가 시절
의 히스테리컬한 백일몽과  공상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바로  이
어서 폭삭  주저 앉는 태도, 절망한  도박꾼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몸짓이 
나타난다. 무감각 상대로 침몰해 버리는 것이다. 
  9월에만 해도 그는 추종자들 중 한 사람에게 자신감에 넘쳐서 이렇게 말
했다. "로마 역사를 아시오?  나는 마리우스고 카르고 술라요. 나는 민족의 
지도자지만 그는 지배계층을  대표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번에는  마리수스
가 이길거요."  그러나 최초의 저항의  표지가 나오자 그는 행위의  인물이 
아니라 행위를 알리는 사람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
았다.
  분명히 그는 위대한  과업에 자신을 맡길 능력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
의 신경이 그의 행위욕구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는  '거인족의 싸움'을 예
언하였고 시민 양조장에서 흥분의 순간에, 후퇴란 없다고  확언하고 사태는 
'이미 세계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계가를 마주
보며 수치스럽게  멀리 도망치고, "이  허위의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고 법정에서 진술하였다. 그는 한 번 더 위대한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였다가 판을 잃었떤 것이다. 
  연설의 능력으로 그는 모든 것을 구하였다. 패배를 뒤집은  일은 그가 얼
마나 현실에  정통하지 목한지, 또한  현실을 표현하고 채색하고  선전으로 
마무리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얼마나 비상하게 통달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가 법정에 등장하는 태도의 냉정함과 침착함은  그의 행동의 
성급함, 무모하고 흔들리고  졸렬한 불안상태에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모습
이었다. 
  노름꾼 기질, 행운을  찾는 모험가적 요소는 출구 없는 상황으로  뛰어드
는 성향 속에 나타난다. 1923년 결정적인 상황마다 그는  전략적인 후퇴 가
능성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성향을 입증하였다.  처음에는 등을 기댈  벽을 
찾는 듯하다가는 어차피 캄캄한 사태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
인다. 정말 자살자 체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느 무
자비한 대안을 피하려고 하는 정치적 노력을 '정치적인 난쟁이'의 이데올로
기라고 비웃었다. 그리고 '결코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
멸감을 표현하였다. 비스마르크가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말한  것은 
'싸구려 변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1905년 이후로 일련의  자살 위헙들이 그
의 존재를 늘 따라다녔던 것은 분명이 멜로드라마적인 기질의 표현 이상이
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극단적인 도전으로 나타나고, 다음에는 세계권력이
냐 몰락이냐 하는  대안 없는 돌진에 나타났다가, 제 3제국  수상관저의 지
하 벙커에 있는 소파에서 끝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위대하 ㄴ
정치로 들어서는  순간에는 그러한 자살의  위협이 함께 등장하였다.  그의 
수많은 등장들은 분명히  훨씬 더 긴장된 것이고, 그가 벗어버리지  못했던 
장중한 익살의 경향을  띤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에 흥분된 쿠데타  주동자
의 주변에 이미 거대한 파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고 말
한다면, 그것은 뒷날의 체험을 그의 이전 생애에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일
까?
  1923년 11월 9일을 돌파구였다. 그날 낮에 시위행렬이  오데온 광장에 접
근해 가고 있을 때,  어떤 행인이 저기 행렬 맨 앞에 있는  히틀러가 "정말 
저 거리 모퉁이에 있던 그 자식"인가고 물었다.  이제 그는 역사 속에 있게 
되었다. 11월  9일이 그의 생애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가  패배를 
이용하여 역사로 통하는 출구를 억지로 열었다는 사실도  포함한다. 뒷날에
도 그렇지만, 파괴적으로  커진 틀 안에서 파국의 도움을 받아서  지속적인 
역사의 장소에 억지로 도달했던 것이다. 

'Hitler's Rebell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기와 저항  (0) 2020.08.15
국가 사회주의의 세계상  (0) 2020.08.15
권력의 도전  (0) 2020.08.15
위대한 연설가  (0) 2020.08.15
도이치의 미래  (0) 2020.08.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