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1923년 1월의 마지막 며칠 간 뮌헨에서 전당대회를 열겠다고 광고하
였다. 이 전당대회에서 그는 자기의 권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려는 속셈이었다. 바
이에른 지역 5천 명의 돌격대 대원들에게는 지휘자를 앞세우고 시 외곽의 어떤
광장, 이른바 연병장으로 모여들어서 최초의 화려한 돌격대 연대기의 축성식을
하라는 소환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대형행사를 위해서 시내의 홀 12개에서 행사
준비가 이루어졌다. 민속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이해서 악단들, 바이에른 민속
춤 단체, 코미디언 바이스 페르들을 참석시켰다. 이대규모 준비와 이미 몇 주전
부터 떠돌던 국가사회당의 쿠테타가 임박했다는 소문은 정계에서 히틀러의 의미
가 커졌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이에른 당국이 히틀러의 도전적인 예고에 대해서 보인 반응은 국가사회당에
대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당국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당의 빠른 상승은 아직
본래의 역할이 정해지지 않는 권력판도를 만들어 냈다. 당은 민족주의적이고 좌
파에 대항하는 쓸모있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국가사회
당은 게임 규칙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고, 스스로 질서를 주장하면서 쉴새없이
질서를 파괴하였다.
국가에서 허용하는 권력의 한계를 히틀러에게 보여주려는 당국의 의도에 따라
그는 3개월의 금고형을 받고 1922년 7월에 4주 동안 감옥에 들어가야만 했다.
부하들과 더불어 '바이에른 연합'의 집회를 방해하고 연합의 대표인 기술자 오토
발러슈테트(O.Ballerstedt)를 두들겨팬 탓이었다. 구류를 살고 나서 처음으로 다
시 태어났을 때 그는'끝없이 이어지는 환호성 속에서 손으로 쳐들여서 연단으로
운반되어' 갔다. <민족 관찰자>는 그를 '뮌헨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미움받는
남자'라고 불렀다. ((VB) 1922년 8월 2일자) 그것은 그 자신으로서도 계산할 수
없는 위기를 품은 상황이었다. 1923년에 전략적으로 선전과 위협을 번갈아 해가
며 규정하기 힘든 구가권력에 대한 관계를 명백하게 하려는 히틀러의 노력이 계
속되었다.
약간 수상쩍지만 분명히 민족주의적인 남자를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 불확실
한 상황에서 당국은 타협안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노천에서의 연대기 축성식을
금지하고 히틀러가 예고한 시위도 역시 금지하였다. 경찰청장으로 국가사회주의
에 동정적이었던 에른스트 푀너의 자리를 물려받은 에두아르트 노르츠는 히틀러
가 금지를 풀어달라고 애원하여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되면 민족주위 애국
운동에 무서운 타격이 될뿐더러 조국에 대해서도 재앙이 될 것이라는 말에도 끄
떡하지 않았다.
이 냉정하고 머리 희끗한 사람은 몇 마디 짤막한 말로 국가의 권위를 알려주
었다. 국가권위 앞에서는 애국자들도 반드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밖으로 나와서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격대 대원들을 행진시키겠다. 경찰
따위는 무섭지 않다. 자기 자신이 맨 앞에서 행진하겠다. 경찰이 쏠테면 쏴봐라
고 소리치기 시작했는데도 이 사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임시로 소집된 각의
는 오히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그럼으로써 전당대회의 모든 행사를 금지시켜
버렸다. 국가사회당의당수에게 게임 규칙을 알려줄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절망하였다. 한 순간 동안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정치적 장래가
걸린 문제였다. 그가 이해하는 게임 규칙에 따르면 국가권력은 도전을 받아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했다. 자신의 요구들이 국가의 노력보다 더욱 일
관된 것이고 더욱 과격한 표현이다.
드렉슬러 시대 이로 당을 후원해온 방위군이 개입해서야 비로소 해결책이 열
리는 듯이 보였다. 에른스트룀과 리터 폰 에프는 바이에른 군사령관인 로소브
장군이 히틀러와 협상을 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상
태에서 빠신 국가사회당 당수는 어떤 일에 대해서든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
다. 그는 1월 28일 정당대회 직후에 '다시 각하께 출두'할 것을 약속하였다. 히틀
러의 극단적인 행동방식을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어쨌든 로소브는 정부측에
"국가방위의 관점에서 민족주의 단체들 간에 충돌이 있다면 유감스러울 것"이라
고 알렸다. 곧 이어서 금지령이 풀렸다. 그러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노르츠는
국가사회당 당수를 다시 만나서 집회의 숫자를 여섯으로 제한하고 연대기 축성
식은 연병장에서 하지 말고 바로 이웃한 왕관 서커스 장에서 하라고 청했다.
자기가 승리했음을 알아챈 히틀러는 불확실하게 동의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
는 "독일이여 깨어나라!'는 기치 아래 12번의 집회를 모두 열었다. 그리고 짙은
눈발 사이로 5천 명의 돌격대 대원들은 그가 기획한 대로 연병장에게 성대한 축
성식을 가졌다.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은 독일 미래의 운동입니다. 그렇
다면 어떤 악마라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운동은 파
괴되어도 마땅합니다."라고 그는 추종자들에게 외쳤다. 돌격대는 환호하면서 수
많은 자체 군악대를 거느리고 비상사태를 알리는 벽보와 플랭카드을 지나쳐서
거리를 행진하고, 유대 공화국에 반대하는 노래들을 불렀다. 백조골 거리에서 히
틀러는 제복을 입은 연대의 분열식 사열하였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인상적인 승리였다. 동시에 다음 몇 달간의 갈등의
종결점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경과를 보고 히틀
러가 상대방보다 더 효과적으로 연설하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더 능숙하고 배짱도 더 두둑한 증거라고 여겼다. 등장할 때의 광포한 열정으로
해서 그가 언제나 오래전부터 당의 심리적 이미지를 결정해 온 분노한 단순한
사람들 이외에 미래에 대해 섬세한 후각을 가진 사람들도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2월부터 11우러 사이에 국가사회당의 신규 가입은 대략 3만 5천 건에 이
르렀고, 돌격대는 거의 1만 5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당의 재산도 황금 17만 3천
마르크에 이르게 되었다. 선동과 행사를 위한 그물망도 바이에른 전역에 빽빽하
게 만들어졌다. <민족 관찰자>는 2월 8일자 이후로 일간지가 되었다. 성격이 까
다롭고 명으로 골골하면서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몇 달 더 발행인으로 일하였지
만, 그러나 이 신문의 책임자는 3월초에 이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게 넘어가
상태였다.
루르 투쟁에서 이탈하다
히틀러가 군사상의 문제나 민간의 문제에서 드러내 보였던, 상당히 성과가 있
는 양순한 태도는 이 나라를 뿌리까지 흔들어 놓은 위기 탓이라고 돌일 수 있을
것이다. 이웃 나라 독일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지 못한 프랑스는 1923년 1월
초반에 문자 그대로의 베르사유 조약에 근거하여 루르 지방을 점유하였다. 그로
써 위기를 억제하고 있던 인자들에서 마지막으로 안전장치를 풀어내는 신호를
울린 셈이 되었다.
전후의 불안들, 엄청난 손해배상 액수, 일반적인 자금도피와 온갖 종류의 생필
품 부족은 전재의 상처에 경제를 되살리는 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
가 독일 안정에 대한 어차피 빈약한 외국의 신용은 좌익과 우익 과격파의 지속
적인 활동을 통해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1922년 6월
도이치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가 암살되었을 때 마르크화는 처음으로 엄청나게
곤두박질 쳤다. 프랑스 측이 공격한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 이 시점에서 인플레
이션은 파국적인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속도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기묘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 마음에서 현존
질서를 긍정할 동기를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한참 동안이나 감정을 파괴하였다.
사람들은 '불가능성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그 개념, 규범, 도덕을 붕괴시키는 일이었다. 그 파급효과는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순간 여론의 관심은 국가적인 자기 주장에 매우 강렬하게 집중되었다. 마
지막에는 무게로 달아서 지불될 지경에 이르는 지폐는 사건의 환상적인 배경일
뿐이었다. 1누어 11일에 정부는 소극적 저항을 호소하였다. 곡 이어서 공무원들
에게 프랑스 점령당국의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루르 지방에
진입한 프랑스 군대는 거리에 모여들어 차갑고 분노한 태도를 '라인 강 수비'라
는 옛 노래를 부르는 거대한 인파의 환영을 받았다.
이런 도전적인 태도에 대해서 프랑스군은 굴종목록을 공표해서 답변했다. 가
혹한 점령군의 법 진행은 멋대로 중벌을 내렸고, 수많은 충돌들은 양측의 분노
를 점점 높였다. 3월말에 프랑스군은 에센에 있는 크루프 제철 공장 난간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에게 기관총을 쏘아서 13명의 사망자와 3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거의 50만 명의 사람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한편 해당지
역 프랑스 군법회의는 회사의 사장과 간부 8명에게 15년에서 20년형을 선고하였
다.
이런 사건들은 1914년 8월 전쟁이 터지던 무렵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단결심
을 일깨웠다. 그러나 이러한 단결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힘이 각기 자기
들의 이익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금지된 의용군들 은 이 시간을 이용
하여서 불법성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 중앙정부의 호
소한 소극적 저항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좌익 과격파는 작센과 중부 독일에서
잃어버린 지위를 회복하였고 하였다. 한편 우익은 바이에른의 아성을 확고히 하
였다. 주 경계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백인 부대와 에어하르트 의용군 부대들이
한때 무장대립하기도 하였다.(놀테 (Krise) 92 쪽) 수많은 대도시에서 굶주림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 사이에 서부에서 프랑스와 벨기에 사람들은 이 기회를 이
용하여 분리 운동을 호소하였다. 그것은 어차피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서 금세
실패하고 말았다. 적대적인 상황에서 건설되어 4년간 힘들게 버텨온 바이마르
공화국은 붕괴에 직면한 듯이 보였다.
히틀러는 도전적이고 대담한 태도로 새로 얻은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는 민
족적인 통합전선에서 이탈하였다. 그리고 갈팡질팡 하는 추종자들에게 프랑스에
대한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는 모두 국가사회당에서 제명시키겠다고 위
협하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런 위협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흐리멍덩한 화해
는 우리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다."면
서 그는 모든 이의를 엄격하게 물리쳤다.(1923년 1월 6일자 노이마이어 카페에서
행한 히틀러의 연설에 대한보고 )
그는 이러한 결정의 문제점을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이 특별 의식과
전략적 고려가 그런 결정을 하도록 만들었다. 수많은 다른 단체들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민족저항 운동에 끼어서 무명의 존재로 격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었다. 그는 루르 투쟁을 통해 국민이 정부를 따르게 되고, 현정권이 강화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자신의 방해공작을 통해 야기된 혼란 상태가 정권 전복 의도
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를 희망하였다. <민족 관찰자>에 그는 이렇게 썼다. "한
국민이 국경선 안의 살인자들을 몰아내지 않는 한 밖을 향한 성공은 불가능한
법이다. 프랑스에 대항하여 구호나 글로 항거가 이루어지는 동안 도이치 민족
의 진짜 원수가 이 성벽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특이할 정도로 일관되게, 모든 적대감에도 맞서고 심지어는 루덴도르프의 권
위에 대항하면서까지 그는 우선 내부의 적을 없애야 한다는 요구를 고집하였다.
육군 총수인 제크트 장군이 3월초에 어떤 담판에서, 적극적인 저항으로 넘어가
는 경우에 히틀러가 방위군에 합류할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우선 정권을 무너
뜨려야 한다는 답변이 나왔다.. 2주 뒤에 수상 쿠노(Cuno)의 대리인을 향해서도
그는 우선 내부의 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가 아니라 조국의 배신
자들, 11월 범죄자들을 타도해야 합니다."(하이덴 113쪽, 히틀러가 제크트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는 마이벨커에 나옴)
국내정치 우선정책
이런 히틀러의 태도는 완전히 원칙이 없는 단호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해석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가 인기 없는 모호한 결정을 위해 보인 단호함은 오히려 그
의 원칙들이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런 선택으로 자기 경력의 핵심적인 결단 하나를 내린 것이다. 그의 상승
을 함께하고 촉진시켜준 사람들, 명사들과 보수 진영 사람들은 그를 언제나 자
기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와 친근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엇보다도 이
국수주의적인 남자를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지역의 특성을 넘어선 히틀러의 최
초의 정치적 결단은 카르부터 뒷날 파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동지애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해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그 자신은 선
택을 앞두고 진짜 혁명가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노골적으로 그는 민족적인 태도보다 혁명적인 태도를 우선으로 여겼다. 실제
로 그는 뒷날에도 다르게 반응한 일이 없었다. 1930년에도 그는 폴란드가 침입
할 경우 현정권을 위해서 방어전에 나서기보다는 동 프로이센과 슐레지엔 지방
을 임시로 포기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그는 '갈등의 순간에 우선 도이치 사람'
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경멸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패거리들보다 냉정하고 효과적으로 그의 전략은 애국적인 장광
설에 이끌리지 않았다. 게을름을 부려서 적을 물리치겠다는 소극적 저항에 대해
서, 그리고 태업을 통해서 프랑스의 무릎을 끓게 만들겠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웃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독일에 국제주의자는 한 명
도 없고 오직 국가사회주의자들만 있다면 오늘날 프랑스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
가! 6천만의 사람들이 단 하나의 의지만을 가진다면, 광신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생각에 몰입해 있다면, 주먹은 무기가 될 것이다." 히틀러의 모든 생각이 여기
들어 있다. 괴물 같은 의지력을 통해서 높여진 합리적인 사색이 나타난다. 그 뒤
에는 자극적인 비전이 숨어 있다.
물론 히틀러의 방어의지가 모든 다른 세력이나 정당보다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저항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저항이 소극적이며 절반의 저항일 뿐이라는 사실
이 위에 언급한 이유 말고도 그의 거부감을 만들어냈다. 일관되고 성공적인 외
교정책은 오직 하나로 뭉친, 혁명적으로 통합된 민족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가능
하다는 생각이 그 뒤에 숨어 있다. 독일의 정치적 전통과는 반대로 그것은 일종
의 과격한 국내정치 우선 정책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1915년에 전선에서 보
낸 편지에서 말했던 것이고 마지막 권력의 순간까지 전략적인 원칙이 되었던 생
각이다. 소극적 저항이 중단되고, 히틀러가 멜로드라마 같은 생각으로 독일의 새
로운 붕괴와 루르 지방의 분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정열적인
연설에서 정부를 향하여 진정한 저항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1945년 3
월 '불타는 지구' 명령을 미리 보여주는 비전을 여기서 전개하고 있다.
현재의 난국 속에서 산업지역이 붕괴된다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용광로들
은 터지고, 탄갱은 막히고 집들은 잿더미가 될지도 모릅니다. 한 민족이 그 뒤
에서 일어나기만 한다면, 강하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확고한 민족 말입니다!
도이치 민족이 일어서기만 한다면 나머지 모든 것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서 있다 해도 민족이 내면의 게으름으로 몰락해간다면, 벽난로며
산업체이며 집의 담벼락들은 이 민족의 묘비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루르 지역
은 도이치의 모스크바가 되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1923년의 도이치 민족이
더는 1918년 그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어야 합니다. 명예를 빼앗
기고 수치를 얻은 민족은 이제 다시 영웅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 민족이라
면 불타는 루르 지방을 보고 생사를 걸고 저항을 조직하였겠지요. 그렇게 행동
했더라면 프랑스는 오직 망설이는 걸음을 옮겼을 것입니다. 난로에 이어 난로를,
다리에 이어 다리를 파괴하였겠지요! 독일이여 깨어나라! 프랑스 군대는 그러한
세계 붕괴의 두려움 속으로 감히 들어서지 못했겠지요! 맹세코 우리는 다른 모
습으로 여기 서 있을 것입니다!
===================================== 05
당의 재정적 원천
히틀러가 루르 투쟁 참여를 반대하기로 한 사실을 당시 겨우 몇 사람밖
에 몰랐다는 사실은, 국가사회당이 프랑스 자금으로 조직을 확장하고 선전
활동을 하고 제복과 장비를 갖추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
러한 소문은 한 번도 믿을 만한 입증자료를 제시한 적이 없다. 그리고 도
대체 어떠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해단체가 확장 일로에 있던 이 정당에
영향을 미치려 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도 오늘날 이르기까지 오직 짐작
으로만 설명되고 있다.
어쨌든 국가사회당이 사용한 경비는 특히 히틀러가 당수직을 맡은 뒤로
당원의 수와 맞지 않는다. 재력이 있는 기부자를 찾으려 한 일은 좌익측의
악마 콤플렉스만으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다. 좌익은 자기들이 '역사에 역
행하는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잊을 수 없는 패배를 맛본 것에 개해
서 국가사회당이 독점자본가와 배후에서 결탁했기 때문이라고만 해석하였
다. 국가사회주의자 본인들도 재정문제를 알리지 않고 히스테리컬하게 감
추려 애썼기에 가장 대담한 추측에도 여지를 남겨준 셈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계속 새로 고발되었다가 조정 받기에 이른 수많
은 명예훼손 재판의 서류들은 1933년 이후에 없애거나 소각하였다. 아주
처음부터 기부금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는다는 원칙이
통용되었다. 당사무소 일지는 아주 드물게만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을 남기
고 있다. 대개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다. '드렉슬러가 개인적으로 처리
함'. 때때로 히틀러는 뮌헨 지하술집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보고한 거래의 세부사항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저 (Hitler)
405쪽 수많은 다른 세부사항들도 여기서 인용)
당의 재정적 근거는 의심할 바 없이 회원의 당비, 자발적인 헌금, 히틀러
연설이나 그밖에 당의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서 걷은 입장료 등이었
다. 이것은 자주 수천 마르크에 이르곤 하였다. 초기에 추종자들 중 일부는
예를 들면 11월 9일 장군 홀 앞에서 죽은 오스카 쾨르너 같은 사람은 조그
마한 장난감 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강을 위하다가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
렀다. 가게 소유자들은 할인권으로 도움을 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장신구나
예술품을 기부하기도 하였으며 혼자 사는 여성들은 밤 집회에서 히틀러의
모습에 도취해서 꿈도 못 꾸던 감동이 격앙 상태에 이른 다음에 국가사회
당에 유산을 기증하겠다고 유언장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베히슈타인, 부르
크만, 에른스트 '푸치' 한프슈텡글 같은 재산이 있는 히틀러의 친구들은 상
당한 기부금을 내서 당을 도와주었다. 당은 또한 당원들에게 당비 말고도
채권을 발행해서 비용을 장만하였다. 대개 당원이나 추종자들이 이 채권을
샀는데, 경찰 통계에 따르면 1921년 전반부에만 10 마르크 짜리 채권이 4
만 장 이상 발행되었다.(프란츠 빌링, 뤼데케는 50세 여인이 히틀러 연설을
듣고 난 다음에 당 사무소를 찾아와서 당에 유산을 기증하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은 초기 몇 년간 지속적인 자금부족으로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1921
년 중기에도 입출금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초기 당원이었던 사람의 보고
에 따르면 때로는 벽보 붙이는 데 필요한 접착제 비용조차 없을 때도 있었
다. 1921년 가을 히틀러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열기로 계획되었던 대규모
행사를 재정적인 이유로 포기한 적도 있었다.
물질적인 형편은 열렬한 활동 덕분에 당이 점점 더 사람들 눈에 뜨기 시
작한 1922년 여름부터 좋아졌다. 그때부터 당은 헌금자들과 밀접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들 헌금자들은 원래 당원은 아니지만, 재산은 가지고 있고
공산주의 혁명의 위협을 두려워하는 시민사회의 대표자들이었다. 그들은
우익의 군사적인 전투조직부터 종파적인 주간지 혹은 저항적인 생각을 가
진 수많은 잡문작가들 패거리까지 모든 우익 방어조직을 지원해주었다. 그
들은 히틀러를 출세시키려 했다기보다는 공산주위 혁명에 반대하는 가장
정력적인 힘을 이용하였다.
히틀러가 바이에른 사회의 영향력 있고 재력이 막강한 그룹과 관계를 가
지게 된 것은 디트리히 에카르트 덕분이었다. 에카르트 다음으로는 특히
막스 에르빈 폰 쇼이브너 리히터 루덴도르프의 덕을 입었다. 루덴도르프는
스스로 실업가와 대지주의 대표자들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지ㅝ을 받아서
임으로 여러 민족주의 전투조직에 나누어주었다. 에른스트 룀이 돈, 무기,
장비 등을 동원할 때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친구인 에밀 간서 박사는 '국민
클럽'에서 결성된 바깥 지역의 경제계 인사들과 접촉을 만들어 냈다. 히틀
러는 1922년에 처음으로 그 런 사람들 앞에서 의견을 밝혀 보였다. 기부자
들 중에는 기관차 제조업자 보르지히 제철소 연합의 프리츠 티센, 추밀 고
문관 키르도르프, 다이믈러 공장, 바이에른 산업연합, 그밖에 체코슬로바키
아,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경제계도 성공적으로 등장한 당에 재정적 후원을
해주었다.
1923년 가을에 히틀러는 취리히로 여행을 하여T다. 그리고 소문에 다르
면 '스위스 프랑과 달러 지폐가 가득 든 대형 트렁크'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속을 알 수가 없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쿠어트 뤼데케도 지금까지 확
인되지 않은 외국의 어떤 단체에서 상당한 금액을 지원 받아왔고, 그 돈으
로 마침내 단원이 50명이 넘은 '자신의' 돌격대에 재정지원을 했다. 헝가리
에서도 기부금이 왔고, 러시아, 발트 지역 도이치 이민자 그룹에서도 기부
금이 들어왔다. 당 임원들 몇 명은 인플레이션 기간에 외국돈으로 봉급을
받았다. 예를 들면 돌격개 지휘부 상사이며 뒷날 히틀러의 기사가 된 율리
우스 슈레크(J. Schreck)나 돌격대의 임시 사령관 호프만 대위가 그런 사
람들이었다. 쇼이브너 리히터의 제안을 받고 예전의 장교였던 사람이 베를
린 타우엔트치엔 거리에 만든 유곽도 민족의 일에 봉사하기 위해서 수익금
을 뮌헨 중앙당으로 보내왔다.
당에 주어진 이러한 재정적 후원은 그 원천이 다양한 만큼이나 후원의
동기도 다양하였다. 1922년 이후 히틀러의 대규모 사업들은 이러한 후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광포하게 상승하던 선동가 히
틀러가 오랜 고독의 세월을 보낸 다음 처음으로, 그리고 취한 듯이 항거할
수 없는 자신의 힘을 체험한 지금 물질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어떤 구속
력이 있는 의무를 지지 않았다는 주장 역시 옳다. 국가사회주의의 반자본
주의 감정은 그들을 질투하던 좌익측에 의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들
여진 적이 없었다. 이러한 감정은 막연히 합리적 근거가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은 고리대금업자, 밀매상, 백화점 등에 대한
항거에서 온 것이기에 집사와 가게 소유자의 관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아무런 빛나는 체계도 제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분노에 신뢰를 얻어주었다. 이러한 감정은 유산계급의 도덕성
을 문제삼았을 뿐, 그 물질적 기반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초기의 당 연설
가들 중 한 사람이 절망하고 불안한 대중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쳤을 때
그는 이 운동의 선전효과가 큰 비합리성을 잘 표현해낸 것이다. "여러분,
잠깐만 참으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여러분을 부르면 저축은행을 보호하십
시오. 우리 프롤레타리아들은 그곳에 얼마 안 되는 돈을 맡겨놓으니까요.
그러나 큰 은행으로 몰려가서 거기 있는 돈을 모두 꺼내다가 거리에 뿌리
고 무더기로 태우십시오! 그리고 거리전차를 교수대 삼아 유대인의 목을
매답시다!"
히틀러도 인플레이션과 비참한 대중을 배경으로 그와 비슷한 요구들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자본주의의 기만성을 되풀이 공격함으로써 엄청난
추종세력을 얻었다. 자본가들로부터 상당한 기부금을 얻었으면서도 그랬다.
당의 사무장 막스 아만은 1923년 11월 쿠테타 시도가 끝난 직후 뮌헨 경찰
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히틀러는 헌금자들에게 "영수증 조로 당 강령만
을 주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고
백 이상을 그에게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밖에 부
정부패는 히틀러의 이미지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
의 확고함, 그 사이 커진 자신감과 그의 망상의 힘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전투동맹
1월말에 공권력에 맞선 힘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일은 국가사회주의를
바이에른 극우파 그룹들의 선두에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파도처럼 연속된
집회, 시위, 행진 등에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전보다 더 소란을 피웠고 미
래를 확신하였다. 쿠테타 소문, 정부전복 계획 등이 자꾸 나타났다. 국가사
회당의 지도자가 정열적인 구호로 선전한 여러 가지 분위기들은 상황이 전
체적으로 바뀔 시기가 임박했다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히틀러가 표현하였
듯이 '경박한 쿠테타가 아니라 전례 없는 전체적 청산작업'이 눈앞에 왔다
는 분위기였다.
그와 동시에 지난 몇 주 경험을 이용하여 지도자 선전이 강화되었다. 이
경험자들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지도자라는 후광이 충분히 퍼지기만 한다
면 예기치 못한 도전적인 결정들도 추종자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그 에게
가르쳐주었다. 이 선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히틀러는 '운동
전체의 이념을 분명하게 눈앞에' 가지고 있다. 그는 '새로운 민족주의 독일
을 위해 부름받은 지도자'다 . '우리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널리 퍼져서 종교적 형식이 된 지도자 숭배는 히틀러의
생일이 들어 dT는 4월 하반기에 절정에 도달하였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는 <민족관찰자>에다 히틀러라는 이름의 '신화적 울림'을 찬양하는 찬사를
썼다. 왕관 서커스에서는 당 지도부, 국민연합 대표자들, 9천 명의 추종자
들이 모여서 이 투쟁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서 히틀러 헌금이 모금되
었다. 사뢰자 헤르만 에서는 히틀러를 보고 그 잎에서 길을 비키기 시작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맞아들였다.(VB,1923년 4월 18일부터 23일까지.1923
년 1월 31일과 3월 22일자)
그토록 분명하게 다가오는 결단의 순간에 대비하기 위해서 2월초에 벌써
룀의 재촉에 따라 국가사회당은 몇 개의 국수주의 민족적인 군사조직체와
동맹을 맺었다. 하이스 대위가 이끄는 '제국기'와 그밖에도 '고지연합' '뮌
헨 조국연합' '저지 바이에른 전투연합'등이었다. '조국전투연합들의 노동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공동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모임의 군사적 지휘권
은 헤르만 크리벨 대위에게 맡겨졌다.
그럼으로써 이미 존재하고 있던 국수주의 단체들을 상부조직인 '바이에
른 통일 조국연합'에 맞서는 대응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조국연합은 예전의
주지사였던 폰 카르와 김나지움 교사였던 바우어의 지휘 아래 극히 다양한
단체들, 즉 하양, 파랑운동, 모든 도이치 운동, 왕당파, 그밖에도 제각각의
종족적인 단체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크리벨의 검
정, 하양, 빨강 전투동맹은 군국주의적이고 과격하고 '파시즘적인' 성향이었
으며, 무솔리니 혹은 터키의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의 예를 복 국가전복에
대한 생각을 얻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지금까지 무제한이었던 자신의 명령
권을 일부 빼앗아간 당의 이런 확장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것인가 하는 것
을 5월 1일에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적 도박에서 의 행운에 익숙해져
서 국가 공권력에 한번 더 대립을 시도하였다.
'전투동맹'에 강령을 마련해주겠다는 시도가 벌써 파트너들의 병사적인
이성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봄이 지나는 동안 그는 크리벨, 룀, 방위군
등이 자기가 개인적으로 혁명군대로 쓰기 위해서 만들었던 돌격대를 빼앗
아 가는 꼴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10만 병사를 비밀리에 양성하겠다
는 목적으로 그들을 돌격대 연대들을 훈련시키고 밤 훈련과 분열식을 계획
하곤 하였다.
그 자리에 히틀러는 언제나 보통 시민의 차림으로 등장하곤 하였으며 때
로는 인사말을 하기도 하였으나 지휘권을 주장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는 화가 잔뜩 나서 돌격대 부대가 자기 목적에서 멀어지고, 전위적인 세
계관에 의해서 방위군의 보충 부대로 전락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독자적인
명령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몇 달 뒤에 자신의 옛 전우인 요제프 베르
히톨트 소위에게 일종의 사령부 수비대를 만들라고 위임하였다. 수비대는
'히틀러 돌격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것은 뒷날 친위대의 토대가 되었
다.
5월 1일의 실패
4월 말 히틀러와 전투동맹이 모여서 회의를 한 끝에 좌파 정당들의 연례
적인 5월 1일 집회를 도전으로 간주하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 동시에 그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종말을 고한 4주년을 기념하
기 위하여 자기들의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였다.
우유부단한 폰 크닐링 (바이에른 주정부) 정부는 지난 2월의 패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전투동맹의 최후통첩을 절반만 승인하였다 좌익
측에는 테러지아 풀밭의 집회를 허가하였으나 시가행진은 거부하였다. 그
러자 히틀러는 잔뜩 흥분한 모습을 드러냈다. 1월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민간의 판결에 대해서 군사적 힘을 개입시키려고 시동하였다. 4월 30일
극단적으로 긴박한 상황에서 크리벨, 바우어, 신임 돌격대장 헤르만 괴링
등이 정부청사에 출두하여 죄익측에 대하여 비상사태 선포를 요구하였다.
그 동안 히틀러는 룀과함께 다시 폰 로소브 장군을 찾아가서 방위군이
개입해줄 것, 합의에 따라 병참기지에 있는 조곡연합의 무기들을 내줄 것
을 요청하였다. 히틀러로서는 끝도 없이 놀라운 일이었지만 장군은 두 가
지 요청을 다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국의 안전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야 하는지 안다고 했다. 그리고 소동을 일으키는 자는 누구는 쏘겠다고 말
하였다. 바이에른 주경찰국장 자이서(Seisser)도 그 비슷한 말을 하였다.
히틀러는 다시 전망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을 시끄럽게 예고된
5월제 방해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특징
적인 행동으로 패배를 부인하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준비를 강화하였다. 로
소브 앞에서 '빨갱이 시위'는 시위대가 오직 자신의 '시체를 넘어서 행진'할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면서 허풍스러운 운명론과 흥
행주의 싸구려 정열도 함께 내보였다. 이때나 뒷날이나 지나치게 긴장된
진지함을 통하여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자신의 존재를 전부나 무냐하는 양
자택일에 내놓은 극단적인 과격함이었다.
어쨌든 히틀러는 준비를 재촉하였다. 무기, 대포, 자동차 등이 준비되었
고 마지막에 방위군을 기습적으로 속이기까지 하였다. 로소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룀과 몇 명의 돌격대 대원들을 병참부로 보내서 5월 1일 좌
익 세력이 폭력행위를 할까 봐 주 정부가 염려하고 있다는 핑계를 대고 특
히 기총과 기관층을 구했다. 쿠테타 비슷한 그런 행동을 보고 동맹 파트너
몇 명이 주저하면서 토론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러는사이 사건 자체가 사건
주동자들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다.
경계명령을 들은 히틀러의 부하들이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프라이
징 등에서 뮌헨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상당수는 무장상태였다. 툇츠
온천에서 온 패거리는 화물차량에 낡은 야포를 매달고 왔다. 그레고어 슈
트라서와 하인리히 히믈러가 이끄는 란츠후트 부대는 몇 대의 경기기관총
을 가지고 오T다 모든 사람은 히틀러가 수백 번도 더 약속하였다고 여러
해 동안이나 기다려온 혁명봉기를, '11월 수치의 제거'를 기대하고 있었다.
경찰총장인 노르츠가 크리벨에게 경고하였지만 겨우 이런 대답을 들었다.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유혈사태가 벌어지든 말
든 마찬가집니다."(에두아르트 노르츠가 대화를 계속하면서 , 드레세 검사
에게 보낸 1923년 5월 23일자 편지, 국가사회당의 예전의 중앙문서고)
동이 트기도 전에 벌써 위풀밭, 막시밀리안 광장과 그밖의 몇 군데 도
시 중심지에 '조국연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른바 위협적인 사회주의
쿠테타를 막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약간 늦게 위풀밭에 등장하였다. 그는
군대의 야영지 비슷한 가장자리로 들어서서 매운 극적인 태도로 철모를 머
리에 쓰고 1급 철십자 훈자을 달았다. 그이 수행원 중에는 괴링, 슈트라이
허, 루돌프 헤스, 그레고어 슈트라서, 그리고 뮌헨 돌격대를 지휘하는 의용
군 대장 게르하르트 로스바흐 등이 섞여 있었다. 돌격대가 아직도 오지 않
는 진군명령을 기다리면서 훈련을 시작하였다. 룀이 약속한 신호를 보내오
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지휘자들은 어찌할 바 모르고 의견도 일치하지 않
은 채 점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사이 테레지아 풀밭에서는 노동조합들과 좌익 정당들이 전통적인 혁
명적 구호들도 간간이 외치긴 하였지만 평화롭게 공동의식으로 뭉쳐서 5월
제를 지냈다. 경찰이 위풀밭에서 도시로 통하는 방향을 상당히 넓게 차단
하였기 때문에 예상되었던 죄우익간의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다.
룀은 이 순간에 자신이 상관인 전해듣고 화가 잔뜩 나서 훔쳐간 무기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정오가 조금 지나서 룀 대위는 무장병사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위풀밭에 나타나서 장군의 명령을 전했다. 슈트라서와 크리
벨이 좌익과 충돌을 일으키면 방위군이 마지막에는 자기들 편을 들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진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서 포기하였다. 즉석에서 무기를 돌려주는 치욕은
피하여"T지만 족구연합은 어쨌든 무기를 자진 반납하였다. 분명한 참패였
다.. 그날 저녁 왕관 서커스 무대를 가득 채운 추종자들 앞에서 행한 연설
의 강렬한 빛도 그러한 패배를 지우지는 못하였다.
첫 번째 위기
수많은 징후들은 히틀러가 상승하던 시절에 여기서 처음으로 개인적인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5월 1일의 실패를 동맹 파트
너들, 특히 까다롭고 고집 센 민족주위 연합에 의존한 탓으로 돌릴 수 있
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트너들의 태도 뒤에는
분명히 자신의 약점과 실책도 들어 있다고 혼자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
다도 그는 잘못된 생각을 좇았다. 급한 성질이 멋대로 튀어나와서 완전히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힘이 되어 주었
던 공화국 방위군을 자신의 배후세력으로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맞선 위협적인 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일년 간 폭풍같은 상승을 경험한
다음 겪어보는 최초의 퇴각이었다. 여러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디트리히 에카르트를 찾아가서 베르히테스가덴에 은둔했다. 가
끔 가다가 연설하러 나타나거나 아니면 기분전환을 하러 뮌헨으로 갔다.
그의 전략적인 행동방식은 그때까지 주로 의존본능에 이끌리고 있었다. 이
제 그는 이 5월제의 인상아래서 논리적인 전략 시스템의 특성들을 발전시
켜 나갔다. 그것은 국가 공원력과 대립하지 않고 공권력을 자기편으로 만
들어서 성공하는 것 '주지사의허가를 받은 혁명'이라고 적절하게 표현된
'파시스트' 혁명개념에 대한 최초의 윤곽 들었다. 그는 자기 생각들 중 일
부를 기록하였고 그것은 나중에 <나의 투쟁>안에 삽입된다.
그러나 여론의 비판적인 반응은 더욱 의심쩍은 것이었다. 수많은 채찍질
하는 연설에서 히틀러는 지도자의 행동, 의지, 이념 등을 화려하게 묘사했
다. 5월 1일 행사가 있기 일주일 전만 해도 영웅이 필요한데 수다쟁이자만
쳐다보는 민족을 언변 좋게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몽상적인 행동의 믿음을
찬양하였다. 위풀밭에서 보여준 망설임과 어쩔 줄 모르는 태도의 코미디는
그런 자화자찬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히틀러와 그 패거리들이 허풍
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당시 어떤 보고에 나타나고 있다. 헤르만 에서
가 6월초에 <민족관찰자>에 억지 비명을 지르면서 밝힌 '위대한 아돌프'에
,뮌헨 포스트>지가 아이러니컬하게 이런 수식어를 붙였다. 대한 암살 음모
설도 그의 인기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이미 4월에 비슷한 폭로가 출간괴기
도 하였지만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자들 쪽의 창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히틀러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하게 되었다."고 <뉴욕 신문>
의 어떤 특파원은 적어보냈다. 사태를 잘 아는 당시의 관찰자가 5월초에
지적하였듯이 그의 볕은 '대단히 빛바래' 보였다.(뷔르템베르크 공사 모저
의 상세한 보고서, 도이얼라인 61쪽에서 인용)
베르히테가덴의 풀죽은 고독 속에서 매우 감정적인 그의 눈에 아마 이별
의 빛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처럼 매우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대단히 위축되었다. 완전히 기가 죽어서 로소브와 깨진 유대를 회복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고트프리트 페더, 오스카 쾨르너와 그밖에 몇 명
의 추종자들이 그를 정상으로 회복시키고, 특히 '푸치' 한프슈텡글을 제외
시키고 시도해보았지만 그는 거의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프슈텡글은
그에게 '아름다운 여인들'을 소개해주었고 그녀들은 도전적으로 '비단바지
를 입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술판'을 벌였다. 옛날의 무기력과 무관심
상태에 다시 떨어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분명히 뮌헨 지방법원 감찰측이 5월 1일 사건에 대해서 이끌어
낼 처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유죄판결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
는 상황이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발러슈테트는 사건으로 두 달간의 금고형
을 살아야 할 처지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바이에른 내무장관 슈바이어는
히틀러가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로 옛날의 의도를 실행에 옮겨서 그를 추
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힘있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국수주의적인 성향
을 이용하여 교묘한 역습으로 선수를 쳤다. 담당검사에게 보낸 진정서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조국에 바치는 경의에 알맞은 공개적인 변호의
기회를 주지도 않으면서 몇 주전부터 언론과 지방의회가 아주 끔찍하게 나
를 욕하고 있기 때문에,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그럼으로써 이러한 경
의에서 일체 자유로워지는 일이 내게 허락된다면 나는 운명에 감사할 따름
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 진정서를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러한 암시는 물론 제대로 이해되었다. 담당 검사의 걱정스런 소견서와
함께 이 편지를 받게 된 국수주의적인 법무장관 귀르트너는 이 편지를 보
고 아직도 유효한 옛날의 합의들을 기억해냈다. 그 자신이 국가사회주의자
들을 가리켜 "우리 살 주의 살'이라고 불렀던 것이다.(하이덴 130쪽 참조)
인플레이션, 대규모 파업, 루르 투쟁, 배고픈 폭동자들 여러 가지 소요 등
은 좌익에 의해서 폭발점으로 이끌려가는 상황이었고, 매일 심해지는 이러
한 곤경은 국수주의적 지도자를 보호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비록 그 자
신이 이러한 국가적 곤경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사건조사의 경
과를 궁금하게 여기는 내무장관에게 알리지도 않고서 귀르트너는 검찰청
에, 이 사건을 '좀더 조용한 시기'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는 소망을 알렸다.
1923년 8월 1일 조사는 일시 중단되었다가 이듬해 5월 22일에 계속되었다.
극적인 반전
9월초의 사건을 보면 히틀러가 그 동안 얼마나 엄청난 체면손상을 입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조국연합이 세당 승리 기념일에 뉘른베르크에서 '도
이치 알' 행사를 위해 모였다. 이것은 해만다 바이에른의 여러 지역에서 번
갈아 가면서 화려하게 벌이는 행사였다. 깃발, 꽃들, 퇴역장정들이 화려하
게 둘러선 가운데 수십만 인파를 앞에 두고 연설과 행진을 벌이면서 모독
받은 국민감정과 더 아름답고 나은 미래 전망의 필요성을 찬양하였다.
이날 1922년 9월 2일 행사에 대해서 뉘름베르크 퓌르트 소속의 어떤 장
관은 직무를 잊고 열광하여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천둥과도 같은
만세소리가 내빈과 행렬을 둘러쌌다. 손수건을 든 수 없는 팔들이 행렬을
향해 뻗어 나왔다. 꽃과 화원의 불경이 사방에서 행렬을 향해 쏟아졌다. 수
십만의 낙담하고 짓밟히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노예상태와 곤궁에서 해방되
리라는 희망의 빛줄기가 뻗쳐 나와서 즐거워 외치는 것 같았다. 남자고 여
자고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 서서 눈물을 흘렸다.(도이얼라인
170쪽에서 인용)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수십만 행진 참가자들 중에 국가사회주위 자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러나 하늘로 솟아오르는 환호성 한가운데에 루젠도
르프가 이었다. 그 사이 자신이 잃어버린 영역을 잊지 않고 있던 히틀러는
이런 대규모 행사의 영향 아래서 다시 대열에 끼려고 하였다. 그는 하위스
대위의 '제국기' 연합과 프리드리히 베버가 이끄는 '고자 동맹'과 연합하여
'도이치 전투동맹'을 만들었지만 지도자 자리를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5월 1일 패배뿐 아니라 뮌헨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빠른 몰락
을 예비했다. 그가 등장하여 센세이션을 만들어내지 않게 된 순간 벌써 이
름 권위 선동가의 영광 등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끈질긴 룀이
3주 동안이나 쉬지 않고 졸라서야 전투 동맹 지도자들 사이에서 친구인 히
틀러는 명성을 겨우 어느 정도 되찾았다. 이제서야 히틀러는 동맹의 정
치적 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모든 힘을 소진하며 계속되는 루르 투쟁을 중단하기
로 한 중앙정부의 결정이 그가 지휘권을 장악하게 된 외적인 요인을 만들
어주었다. 정부를 떠맡은 지 6주 만인 9월 24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소
극적 저항을 중단하고 프랑스에 대한 전쟁비용 보상금 지불을 다시 시작하
였다. 히틀러는 지난 몇 달 동안 소극적인 저항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인 목적의식은 이렇게 인기 없는 정부의 새로운 조치를 수치스
런 반역의 증거라고 낙인찍고 그럼으로써 정부전복을 위한 명분을 얻어내
려고 하였다.
벌써 다음날로 그는 전투동맹 지도자들인 크리벨, 하이스, 베버, 괴링 룀
과 모임을 가졌다. 두 시간 반 동안 계속된 열렬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들과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도이치 전투동맹'의 지휘권
을 넘겨잘라는 부탁으로 연설을 끝맺었다. 룀의 보고서에 따르면 하이스는
마지막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베버도 감동되었고, 룀
자신은 울리면서 마음속으로는 흥분해서 몸이 떨렸다. 사건 발전이 결정적
인 순간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그는 다음날로 군에서 제대하고 완전히
히틀러에 합세하였다.
전투동맹의 지도자들로서 히틀러는 자신의 결심의 힘을 보여주어서 모든
회의론자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일 속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각적으로 그는 1만 5천 명의 돌격대 부대에 경계태세를 취하라고 명령하
고, 자신의 폭발력을 높이기 위해서 국가사회당원들에게 다른 민족주의 연
합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과격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이 모든 계획들, 전략, 명령 등의 원래 목적은 거칠
고 화려한 선진활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란스런 선전활동 장면은 그에
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우세하다는 느낌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미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는 9월 27일 저녁에 한꺼번에 14개의
대규모 집회를 열어서 14번이나 똑같이 무한히 상승하는 느낌을 만들어 내
기로 계획하였다. 전투동맹의 의도는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노예상태와 수치에서' 해방을 , 그리고 수도 베를린으로 진군하여 국수주
의적 독재정부를 만들어내고, '내부에 있는 저주스런 적들'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벌써 3주인 전인 9월 5일에 그러한 의도를 발설하였다.
'베를린이 행군하여 뮌헨에서 끝을 맺느냐 아니면 뮌헨이 행군하여 베를린
에서 끝을 맺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볼세비스트의 북부 독일과 민족주위
바이에른이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그가 어떤 계획을 추구하고 있었는지, 특히 그가 쿠테타
를 계획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말만 하는 것이었는지 분명치가 않다. 상당
수의 증거들은 그가 자신의 작용력과 대중의 분위기에 따라서 앞으로의 일
을 결전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선전술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대중의 열광을 통해서 국가권력까지 조종해보려고 하였다. 위에 언
급한 행사에서 그는 '끝없는 말싸움에서' 새로운 독일이 자라 나온다고 말
했다. 어쨌든 전투동맹 회원들에게는 엄격한 명령이 전달되었다. 뮌헨을 떠
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심각한 경우에 대비하여 암호가 전달되었다.
뮌헨 정부는 떠도는 쿠테타 소문에 밀리고 '공산주의'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과 여러 가지로 특수한 바이에른의 원한을 가지고, 또한 구석에 처박
히고 싶어하는 소망들을 가지고 히틀러를 앞질러 버렸다. 사전예고도 없이
주지사인 폰 크닐링은 9월 26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이미 1920년에
도 한 번 그랬지만 이번에도 구스타프 폰 카르를 독재적 전권을 가지 계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카르는 전투동맹과 협조하는 것은 환영이라고 말
했지만 히틀러에게는 일체 '과격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계획되어 있던 14개의 집회를 금지하였다.
히틀러는 화가 나서 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은 뒷날 여러 자기로 묘사된
발작 형태로서 자신의 열변과 분노의 외침에 스스로 열이 올라서 일종의
의식불명 상태로까지 치솟아 오르는 것이다. 그러한 광란상태에서 히틀러
는 혁명과 유혈사태로 협박을 하였지만 카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가장
막강하고 폐쇄적인 방위력인 전투동맹의 대표로서 히틀러는 자신이 국가권
력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카르는 그를 공권력의 한 대
상으로 격하시켰다. 한 순간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듯했다. 밤이
지나면서 룀, 푀너, 쇼이브너 리히터 등이 그를 설득하여 이 의도를 거두어
들이게 만들었다.
어차피 사태는 이미 히틀러의 의도를 훨씬 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베
를린에서는 공화국 대통령 에버트가 의장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각의를 소집하였다. 폰 카르는 너무나 자주 '조국을 구하기 위한 바이에른
의 사명'을 부르짖어 왔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공화국의 붕괴와 보스적인
귀족정권의 수립, 바이에른의 계속적인 독립상태와 바이에른의 왕정복고를
의미한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자신이 새로운 직위에 오른 다음 너무나
분명한 걱정거리를 만들어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라의 화폐가 붕괴되고
경제가 무너진 절망적인 상황에서 작센과 함부르크에서 공산당이 영향력을
확보하였고 서부의 분리주의 운동을 놓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마구 흔들리
고 있어서 뮌헨 사태는 실제로 정세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신호가 될 수 있
는 상황이었다.
이토록 극적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나라의 장래는 방
위군에 달려 있었다. 반위군 사령관 제크트 장군은 그 자신이 광범위한
사람들에 의해서 우일 독재권력의 대상자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비상한 상황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약간 늦게 회의장에 나타났다. 실질적
인 권력자로서 냉정한 특별의식을 지닌채 그는 흥분한 각료회의 탁자로 걸
어갔다. 에버트가 이 순간 방위군은 어디 있는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
였다. "방위군은 지금 제 뒤에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 그럼으로써 한 순
간 실질적인 권력 상황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같은 날 국가
비상사태 선포와 더불어 공화국 전국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자 적어도 형식
상의 충성심을 가지고 정치 지도층 복종하였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소란스럽고 예측이 되지 않는 가운데 다
음 몇 주간의 사건이 진행되었다. 제크트는 두 가지 주요문제를 서둘러서
해결하였다. 9월 29일에 퀴스트린에서 불법적인 검은 방위군이 부흐루커
소령의 지휘를 받아 궐기하였다. 이 부대는 루르 투쟁이 중단된 이후 자기
들이 해체될까 두려워서 수많은 혼란스런 표지들을 만들어 내서 우익, 특
히 방위군에게 진군 신호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성급하게 이루
어져서 충분한 협조도 얻지 못한 이런 시도는 짧은 시간 포위를 당하고 난
다음에 곧장 무너지고 말았다. 곧 이어서 제크트는 혁명시대의 잊지 못할
감정들을 증명하는 단호한 행동으로 작센, 튀링겐, 함부르크 등에서 좌익의
위협을 물리쳤다. 그런 다음 그는 바이에른과의 힘겨루기에 나섰다.
그 사이 바이에른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전략적 구성에 맞게 카르를 자기
편으로 삼았다. 카르와 로소브는 어떤 분노하고 모욕적인 기사 때문에 <민
족 관찰자>를 발간 금지하라는 제크트의 요구를 전혀 따르지 않았다 이어
서 로스바흐, 하이스 소령, 에르하르트 대위를 체포하라는 명령도 역시 무
시되었다. 로소브가 파면되자 바이에른 계엄사령관은 헌정 중단상태에서
그를 바이엘는 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서 베를
린과의 갈등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서 가능한 일을 다하였다. 마지막에 그
는 중앙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고, 에버트 대통령의 편지에 대해서 공개
적인 선전포고를 답하였다. 대법원에서 지명수배한 이전의 의용군 지휘자
에르하르트 대위를 잘츠부르크 은신처에서 데려다가 베를린 진군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진군계획서는 최초의 공격날짜를 11월 15일로 잡았다.
이런 간한 행동에 이어 강경한 말들이 나왔다. 카르 자신은 바이마르 헌
법의 비 도이치 정신을 공격하였다. 정부를 가리켜서 '점토덩이' 라고 불렀
다. 자신은 국제 공산당 유대주의에 맞선 세계관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사
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시끄러운 반응을 보여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된 데 따르는 다양한 기대들을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히
틀러의 의도를 도와준 꼴이었다. 5월 1일의 운명적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
는 카르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민족 관찰자>의 기사 하나로 충분하였다.
베를린과의 갈등은 히틀러에게 바이에른 권력자들과의 동맹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히틀러는 중앙정부에 맞서 혁명적인 출발을 하기 위해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제크트가 로소브의 퇴진을 요구하자 베를린과 대림하
기 위해서 민족주의 연합이 모두 모여들었다.
히틀러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거대한 기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면 결정이 날 것이라고 그는 <이탈리아 소식>지와의 인터뷰에서 말
했다. 짧은 간격으로 여러번이나 로소브를 찾아가서 화해를 하려고 하였
다, 자기들은 이제 공동의 이해와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고 행복하게 말
할 수 있었다. 한편 로소브도 자기는 "히틀러의 생각과 열에 아홉까지 완
전하게 일치한다."고 확언하였다. 진다 그런 일을 바라지도 않았건만 바이
에른 방위군 사령관 로소브는 중심 역살 하나를 떠맡고 무대중심부로 나오
게 되었다. 그러나 반역자 역할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비정치적
인 군인이었다. 그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꺼리고 자신이 빠져든 갈등상황
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히틀러는 그를 계속 앞으로 밀어 붙여야 했다. 로
소브의 딜레마를 그는 적절하게 이렇게 요약하였다. 그토록 광범위한 우익
을 거느린 지도자가 "자신의 상관에 반항하려면 마지막 순간도 넘어갈 정
도로 확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폭도나 모반자일 뿐이다."
카르와 합의를 보기는 이보다 더 어려웠다. 히틀러는 9월 26일에 이 계
엄 사령관이 배신한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반면 카르는 자신이 이 과격하
고 어떤 공격적인 미친 짓도 할 각오가 된 선동가를 하얗고 푸른이성으로
데려올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히틀러에 대한 그의 관계
는 이 허풍선이 재주있는 소동꾼에게 언제든 '정치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리고야 말겠다는 속셈을 가진 것이었다.
이 모든 속셈과 상호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와의 대치상황은 그
들을 한데 뭉치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의견차이는 지휘권에 관한 것이었으
며 특히 진군시기에 관한 것이었다. 로소브, 자이서와 더불어 재빨리 합법
적인 힘의 '3거두'가 된 카르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약간의 신중을 기하고 히
틀러의 대담한 말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히틀러는 초
조하게 행동을 촉구하였다. "단 하나의 질문만이 민족을 움직일 것입니다.
'언제 시작합니까?'라고 그는 소리치고 거의 몽상적으로 종말론적인 표현을
하면서 임박한 붕괴를 축하하였다.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 자 이제 운동이 이 순간을 위하여 준비해온
그 날이 왔습니다! 우리가 이 순간을 위해서 싸워온 그 순간이 된 것입니
다.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독일의 승리를 위하여 행진을 할 순간입니다1 우
리는 한번의 선거를 위해서 결성된 겋이 아닙니다. 이 민족이 두려움과 절
망에 가득차서 붉은 괴물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최고 위기에서 최후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 운동이 결성된 것입니다. 우리 운동에서 이제 구원
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미 수백만 그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새로운 종교적 신앙처럼 확고한 것이 되었습니다!"
쿠테타를 준비하다
10월이 지나는 동안 모든면에서 준비를 강화하였다. 음모, 비밀, 배신의
분위기에서 쉬지 않고 토론들이 이루어지고 어사 계획이 세워졌다. 진격의
순간을 위해서 암호들이 교환되었다. 무기도 집결되고 전투연습도 이루어
졌다. 10월초에 이미 히틀러 일파의 쿠테타가 임박하였다는 소문이 아주
확실한 것이 되어서 전투동맹의 군사 지휘자 크리벨 중령은 폰 크닐링 지
사에게 편지를 보내 모든 혁명의도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여T다.
덤불처럼 뒤엉킨 이해타산, 조약, 견제작전, 잠복 속에서 서로 감시하고
수천명이 그 어떤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의 담벼락에는 구호와 반대
구호들이 쓰여지곤 했다. '베를린 진군'은 한꺼번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약속하는 마법공식이 되었다. 여러 주전부터 히틀러는 출발 징후를 퍼뜨렸
다. "이 11월 공화국은 이제 끝입니다. 점차 뇌우는 올 것입니다. 폭풍 속
에서 공화국은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성숙하였으니까요"
카르에 비해서 히틀러는 어느 정도 확고한 입장인 듯이 보였다. 3거두가
히틀러를 빼놓고 진군하거나 아니면'베를린으로 진군!"이라는 혁명적 표어
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덜어지자!"는 분리주의자들의 구호를 가지고 대중을
동원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때때로 히틀러는 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면 10월 초에 벌써 그는 어떻게 동맹자들을 속여서 시작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시기만 놓치지 않는다면 갈등이 벌어질 경우 주민
들이 카르가 아니라 자신의 편에 서리라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들 둔감한 부르주아지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의 잘못된 오만,
대중 앞에서의 무능 등을 경멸하였다. 부르주아지 계급은 그에게서 대중을
빼앗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카르를 '전쟁 이전의 허약한
관료'라고 불렀다. 그리고 "모든 혁명의 역사는 낡은 체제의 인물이 정대로
혁명을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직 혁명가만이 혁명을 장악
할 수 있다."고 했다.
권력은 물론 3거두가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그러나 '국가 사령관' 루덴
도르프와 '두 다리로 굳건하게 서 잇는 군단'을 자기편으로 하고 있다. 그
는 군대의 정치적 한계성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온갖 멋진 말로 그들을 이
용하는 법을 알아냈다. 그는 당시 이미 무한 자신감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
다. 그의 동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비웃었지만 그는 자신을 감베타 아니면
무솔리니에 견주었다. 크리벨을 어떤 방문객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히틀
러는 지도적 위치에 대해서는 물론 생각지도 않는다. 그는 선전에 대한 생
각만 머릿속에 잔뜩 넣고 다닌다고 했다. 히틀러 자신은 로소브 측근의 어
떤 고위 장교에게 자신은 독일을 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위군을 얻기 위해서 루덴도르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는 정치에서는 내게 전혀 간섭하지 않아요. 나는 베트만 홀베크가 아닙니
다. 아시다시피 나폴레옹도 통령이 되는 도중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
람들만을 주변에 두지 않았습니까?"
10월 하반기에 베를린에 진격하려는 뮌헨 쪽의 계획은 더욱 확고한 윤곽
을 잡았다. 10월 16일 크리벨은 북부에 국경수비를 세우라는 명령에 서명
하였다. 그것은 물론 불안한 튀링겐 지역에 맞서기 위해 경찰의 필요에 따
라 세우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전쟁에 대비한 것이었다. '진군거점' '적대
감의 표출'이라는 말이 나왔고, '공격정신' '전투 열의 ' 적대 세력의 '섬멸'
이라는 표현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시민전쟁을 위한 공개적인 동원령의 가
능성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 사이 임시지원병들은 베를린 시의 지도를
손에 들고서 전투훈련을 받았다. 특히 포병학교의 기수들 앞에서 히틀러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혁명의 속성을 찬양하였다. "제군들의 국기 맹
세의 최고 의무는 국기를 꺾어버린다는 것이다." 동맹자들의 전투력을 혼
란시키기 위해서 국가사회주의 자들은 지방 경찰 소속 경찰관들에게 돌격
대에 가입하라고 호소하였다.
나중에 히틀러의 진술에 따르면 60에서 80대에 이르는 야전 유탄포 , 유
탄포, 중포 등을 조심스럽게 은닉처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10월 23일 전투
블랙 리스트를 준비할 것을 권고하였다. "가장 잔혹한 테러가 행해져야 합
니다. 별 어려움 없을 만한 사람들을 쏘아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제거가 필
요한 지도자들은 한 사람 한사람 찾아내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사람은 본보
기로 포고가 떨어지자마자 즉시 사살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앙카라'가
출발을 위하여 무장하였다.
경쟁자들의 질투
잘못된 경쟁의 분위기에서 이런 저런 기도들이 이루어졌다. 10월 24일에
로소브는 방위군 사령부에 방위군, 지방경찰, 조국연합의 대표들을 집결시
켰다. 그들에게 베를린 진군시 방위군의 동원계힉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구
호는 '해돋이'라고 했다 이 모임에 그는 전투동맹의 군사지휘자 헤르만 클
히벨을 초대했지만 히틀러와 돌격대 지휘자들은 빼놓았다. 그에 대한 대답
으로 히틀러는 즉시 당시 어떤 목격자가 표현한 것처럼 '거대한 군사쇼'를
벌였다. "이른 아침에 벌서 북소리와 음악소리가 도시에서 울려나오는 것
을 들었다. 하루종일 온갖 장소에서 히틀러의 갈고리 십자가를 칼라에 붙
이거나 아니면 고지 에델바이스를 모자에 붙인,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소문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카르는
자발적으로 자신은 현재의 중앙정부와 모든 협상을 거절한다고 선언하였
다.
그것은 조용하고 분노한 경쟁과도 같았다. 누가 먼저 맨 먼저 출발해서
마침내 구원된 국민의 손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받아
쓰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지역적으로 채색된 열광이 모
든 계획을 철저히 환상적인 요소로 채웠다. 그리고 수많은 활동계획에는
병졸들의 인디언 놀이 요소가 덧붙여졌다. 실질적인 역학관계를 오랴 생각
해보지도 않고서 이 주인공들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제는 '행군에서 어떤
무제들은 마침내 비스마르크 식으로 해결해야할 할' 시간이라고 도 어떤
사람들은 '질서 세포 바이에른', 혹은 '베를린의 돼지우리를 깨끗이 치울 바
이에른 주먹' 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수도 베를린을 거대한 바빌론으로 묘사하는 익숙한 이미지에는 마음 편
한 어둠이 깃들여 있었다. 수많은 연설자들은 "차돌 같은 바이에른이 베를
린으로 형벌의 출정을 떠나서. 이거대한 묵시록적인 매춘부에게 승리를 거
두고 어쩌면 그녀와 약간 재미도 본다."는 그림을la을 그려 보여서 인기를
끌었다. 함부르크에서 온 어떤 증인은 히틀러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북
부 독일의 수백만 명이 앙갚음의 날 그의 편에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출신, 모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가 출정하기만 하면 뮌헨
의 폭동에 가담하게 돌 것이고 "도이치 민족이 1813년에 그랬듯이 이른 봄
처럼 일어나는 일"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했다. 10월 30일에 히틀
러는 카르에게 돌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철회하였다.
카르 자신도 물론 거사를 결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카르나 로소브는
스스로 앞장서서 쿠테타의 길로 나설 생각은 거의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오
히려 3거드는 그 모든 도전들, 위협 출정계획들을 가지고 단순히 제크트와
보수적인 '북쪽의 신사분들'을 자극하여 꾸며낸 독재개념을 실현하도록 만
들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이 계획의 전망에 따라서 그리고
바이에른의 이익을 가져다줄 순간에 끼여들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11월
초 그들은 사정을 살펴보라고 자이서 국장을 베를린으로 파견하였다. 그의
보고는 물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광범위한 지지를 기대할 수는 없고, 특
히 제크트는 소극적인 자세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들은 11월 6일 조국연합 지도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열정적인
톤으로 알렸다, 자기들만이 앞으로 닥쳐올 행동에 대한 권한과 명령권을
가지며 모든 독단적 힘을 꺾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수
많은 심정의 말들과 현재의 망설임 사이에서 잃어버렸던 행동의 법칙을 되
찾으려는 최후의 시도였다. 히틀러는 이번 모임에서도 배제되었다. 같은 날
저녁 전투동맹은 가장 가까운 기회를 잡아 출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거
두와 아직 결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행동으로 자극하여 가능하면 많은 사람
이 베를린 진군에 동참케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흔히 이 결정은 히틀러의 연극적이고 과민하고 망상적인 성격의 증거라
고 이야기되어 왔다. 그리고 '비오 홀 쿠테타'니 '정치적 사육제'니 '뒷계단
쿠테타' 아니면 '서부극 놀이' 등의 말로 공개적인 조롱을 받아 오T다. 이
행동에는 이 모든 요소들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도한 히틀
러의 상황 판단 능력, 용기, 그의 전략적 일관성 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토록 뒤얽힌 상황에는 익살극, 도둑놀이의 요소와 아울러 냉정한
합리성도 들어 있는 것이다.
히틀러의 딜레마와 정당화
실제로 1923년 11월 6일 저녁에 히틀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월 1일의 심각한 패배가 있은 다음에 이러한 행동을 할 절박성은 분명하
였다. 그는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수많은 정당들과 정치가들 중에
서 단연 돋보였고 신뢰를 얻는 중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면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과격하고 거의 실존적으로 진지한 분노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 어느 경우에도 굽히지 않아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
이므로 이제 와서 은밀히 타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
투 동맹 지도자로서 그는 병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병력의 행동의지는
집단지도체제의 알력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고 게다가 돌격대도 초조하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불안은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여러 주간이나
준비를 해온 다음 마침내 출정하여 목표를 이루고 싶다는 직업군인의 모험
욕구를 반영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미래의 민족주의 독재가 베르사유 조약
의 제한을 무시하고 방위군을 확대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몇 주 동안이
나 행군준비 상태에 있으면서 일부 동맹은 방위군의 '가을철 연습'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는사이 모든 물자가 동났고 히틀러의 비축물자도 바닥났
다. 대원들은 굶주리게 되었다. 오직 카르만이 동맹을 후원할 수 잇는 상황
이었다. 에르하르트 대위는 뉘른베르크의 실업가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2
만 달러를 가져왔다.
히틀러가 빠져든 딜레마는 뮌헨 돌격대 연대 지휘자인 벨헬름 부뤼크너
가 나중에 진행된 재판의 비밀회의 진술한 말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방
위군 장교들도 베를린 행군이 시작되지 않아서 불만스러워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히틀러도 다른 사람들처럼 거짓말쟁이라고들 말했지요.
당신들은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시작하든 우리한테는 마찬가지였죠.
우린 무조건 따라갈 참이었으니까요. 히틀러에게도 직접 말했어요. 그날이
오면 나는 람들은 배신할 거라고 말이죠. 이들 중에는 실업자들이 상당수
였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옷, 마지막 남은 신발, 마지막 남은 10페니
히까지 교육받는데 다 썼어요. 그리고 이렇게들 말했죠. 이제 곧 시작될 거
야. 그럼 우린 방위군으로 들어가는 거고 그럼 이 모든 곤란에서 벗어나는
거지, 하고 말입니다." 히틀러 자신이 11월초에 자이서와 나는 대화에서 이
제 무슨 일이든 일어나야 한다. 안 그러면 전투동맹 대원들은 경제적 곤궁
에서 공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전투동맹 부대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다는 히틀러의 고민에다가 시
간이 흐르면서 너무 오래 끌다가 혁명적인 불만이 스러질지도 모른다는 두
려움까지 덧붙여졌다. 루르 투쟁이 끝나고 좌익이 패배한 것은 사회가 정
상화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인플레이션도 전보가 분명하게 통제되는
듯이 보였다. 이모든 위기가 사라지면서 유령들도 함께 물러갔다. 그 동안
국가의 위기상태가 히틀러에게 엄청난 선동의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
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는 이제 망설일 수가 없었다. 이런 결심이 자기가
산 이런 저런 약속에 어긋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더 걱정되는 것은
자기의 전략적 개념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주지사 각하의
동의 없이 혁명을 감행하기로 했다.
어쨌든 자신의 행동결심을 통해서 각하의 동의와 심지어는 참여를 얻어
내기를 희망하였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위하여 하나의 의지가 나타나면
거사가 이루어지리라 확신했습니다." 라고 뒷날 히틀러는 법정에서 말했다.
거사를 해야 할 그 모든 이유에 맞서서 계획된 쿠테타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거두를 끌어들이지 못할지 모른다는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
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 위험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이 어차피 계획해 왔던 일을 강요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판은 마지막에 전체 계획을 망치고 히틀러의 현실 감각
부족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물론 이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현
실을 무시한 자신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성공적인 결말에 대해 51퍼
센트의 확신만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은 쿠테타에 동참하였을 것이라는 로소
브의 유명해진 말을 일종의 희망 없는 현실감각의 예라고 해서 어느 정도
경멸하였다. 그러나 계산 가능한 이유에서만 이러한 행동 결심이 옳았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붕괴로 끝나버린 이 쿠테타 기도는 히틀
러에게 권력을 향하여 나아가는 결정적인 통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
문이다.
바이로이트와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벨린
이 모든 과격한 준비며 작전이 펼쳐지고 있던 9월말에 히틀러는 바이로
이트에서 '도이치의 날' 행사를 개최하면서 반프리트 저택에서 리셉션을 요
청하였다. 깊이 감동한 마음으로 그는 방들을 둘러보고 커다란 도서관이
딸린 바그너의 작업실을 살펴보고 정원에 있는 무덤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사위인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을 소개받
았다. 그는 젊은 날 히틀러가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 중 한 권을 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거의 마비상태에 이른 노인은 아주 힘들게 그를 맞아들였으나 히틀러에
게서 뿜어나오는 에너지와 목적의식을 알아보았다. 일주일 뒤인 10월 7일
자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히틀러는 더 위대한 사람을 위한 선구
자이며 동반자일 뿐 아니라 히틀러야말로 기사 자신이고 도이치 반혁명의
주동적 인물이라는 찬사를 서보냈다. 그는 보통 수준의 광신적 인물을 만
나게 되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자신의 감각은 히틀러는 다른 사람과 다르며
훨씬 더 창조적이다. 그리고 qs명하게 느껴지는 의지력에도 불구하고 폭력
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했다. 자기는 마침내 안심하게 되었으며
영혼의 상태는 갑자기 변했다고 말했다. "독일이 가장 큰 곤궁의 순간에
히틀러 같은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독일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준
다."고 했다.
불안으로 동요하면서 오직 거친 환상 속에서만 확신을 가졌던 선동가는
거대한 생애의 결심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서 바이
로이트의 선생님이 자신을 격려하는 소리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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