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10주간의 훈련기간을 거친 뒤 10월 후반에 리스트 연대는 서부 전
선에 배치되었다. 자신이 참전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초조
한 근심에 가득차서 히틀러는 수송을 기다렸다. 그러나 10월 29일 이프레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른바 총알세례를 받으면서 그는 방금 시작된 전쟁
의 가장 치열한 전투 하나를 경험하였다. 해협 쪽으로 뚫고 나가려는 도이
치 군의 결정적인 대규모 시도에 맞서 이 지역에 투입된 영국 부대는 격렬
하게 대응하여 마침내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4일 동안이나 전투는 이리 밀
리고 저리 밀려왔다. 히틀러는 재봉사 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대는 이
전투에서 3천 5백 명 중 6백 명 정도를 잃었다고 보고했다. 연대기록을 보
면 이 최초의 전투에서 349명이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연대는 바로 뒤
이어 베셀레르 마을 근처에서 지휘관을 잃었다. 그리고 대개는 경박한 명
령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민중적 특성'을 얻었다.
(나의 투쟁)에서 최초의 참전에 대한 묘사는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일
일이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 부분에 바친 특별히 세심한 문체
와 시적인 노력은 이 체험이 그에게 얼마나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주었던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자 우리가 말없이 행진하고 있던 플란더스 지방에 축축하고 차
가운 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안개 속에 낮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갑자기
우리 머리 위로 강철로 된 아침인사가 쉭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폭음과 함께 작은 총알들이 우리 대열 사이로 쏟아져서 축축한 땅에 박혔
다. 그러나 그 작은 구름이 걷히기도 전에 2백 개의 목구멍으로부터 죽음
의 사자를 향해 최초의 만세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총소리, 대포소
리, 노랫소리, 외침소리가 시작되었다. 열에 들뜬 눈으로 모두가 앞을 향해
점점 더 빨리 나갔다.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순무밭과 울타
리 있는 곳에서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멀리서부터 노랫소리가 우리 귀로
울려오다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중대가 서로 맞붙었다. 그리고 죽
음이 재빨리 우리 대열 속으로 들어왔을 때, 적의 노랫소리가 바로 우리
코앞에서 들리게 되었을 때, 우리도 다시 소리 높이 노래하였다. 독일, 모
든 것 위에 독일, 세상의 모든 것 위에!
1급 철십자 훈장을 받다
히틀러는 전쟁 내내 연대 사령부와 전초부대 사이에서 연락병 노릇을 했
다. 이 역할은 그의 고독한 천성에 알맞는 것이었다.. 그의 상관들 중 한
명은 그가 "조용하고 군인처럼 보이지 않는 남자였으며, 처음에는 다른 병
사들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하였다. 히틀러는 믿음직하고 의
무를 잘 알고 있었고, 진지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히틀러는 별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료들이 거의 한 목소리로
확인해주고 있지만 '몽상가'였다. 자주 그는 "헬멧을 머리에 쓰고 귀퉁이에
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를 그런 무심한 상태에서 이
끌어낼 수 없었다." 4년여에 걸쳐 비교적 많은 수의 사람들의 증언은 거의
그런 식이고 아무것도 그를 생생하게 묘사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묘사
의 특성 없음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의 특성 없음에서 나온 것이다.
남의 주목을 받는 극단적인 그의 특성들조차도 특별히 비개성적인 특성
을 가지고 있어서 개성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그가 추구하는 원칙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터져나오는 폭발도
군대생활의 무사한 불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염려, 배신이나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의심 등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윤곽을 보여주는 일화도 그 어떤 특성을 보여주지 않는
다. 전해내려 오다가 나중에는 교과서의 일화로 실리게 된 어떤 이야기도
그저 교과서 일화일 뿐이다. 그것은 히틀러가 몽디디에 근처에서 명령을
전달하려 가는 길에 스물 다섯명의 프랑스 군대와 마주쳤는데 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용감하게 기습해서 그들 모두를 사로잡아 상관애게 끌고왔
다는 이야기다.
그의 모범적인 열성은 애국적 연감에서 흔히 그렇듯이 실제인물을 하나
의 이미지 뒤에 감추어버린다. 이것은 주변세계에서 도망쳐서 상투적 이미
지 속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전달사항을 물으러 갔다가 그는
갑자기 날아온 적군의 대포알을 보고 지휘관을 끌어당겨 '보호하는'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연대가 짧은 시간에 두 번째로 지휘관을 잃어버리지 않도
록" 해달라고 그에게 간청하였다.
뒷날 정치적인 동기에서 많은 의심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전쟁터에서 용
감했던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1914년 12월에 그는 2급 철십자 훈장을 받
았다. 그는 재봉사 포프에게 이렇게 써보냈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동료들은 거의 모두 줄었습니다만."1918년 5월에
는 적을 앞에 두고 용감했다는 이유로 연대훈장을 받았고 같은 해 8월 4일
에 사병에게는 극히 드문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수여의 구체적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알려져 있
지 않다. 히틀러 자신은 그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연대의
유대인 부관 후고 구트만의 제안에 따라서 훈장을 받았다는 고백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연대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고 그밖의 다른 보고들
은 서로 심하게 말이 틀리다. 어떤 보고에 따르면, 위에 언급한 일화와 비
슷하게 히틀러가 열다섯 명의 영국 정찰조를 사로잡았다고 주장하기도 하
고, 또 어떤 것은 열, 열둘, 심지어는 스무 명의 프랑스 군을 극적으로 체
포했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에 따르면 히틀러가 프랑스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사실상 아주 쉬운 말 몇 가지밖에 할 줄
몰랐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대포알이 무섭게 날아오는 한가운데를 뚫
고 포병부대로 들어가서 아군이 심각한 포격을 당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
다. 그러나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거가 행한 어떤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증명해 보인 끊임없는 노력의 덕으로 훈장을 받았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런 전쟁 장식품들은 히틀러의 미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것들은 오스트리아 사람인 그에
게 독일에서 더 높은 권리를 갖도록 해주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경력의 탄
탄한 시작을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주었다. 이 훈장들은 정치적인 발언권과
복종권을 확보하고 정당화해주었다.
새로운 질서를 향한 욕망
전쟁터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그의 과도한 책임의식과 군대 전체를 위한
여러 가지 걱정이 자주 비판이 대상이 되었다. 어떤 동료 하나가 '우리 모
두 그를 욕했다."고 뒷날 그를 기억했다. 다른 병사들은 "저 미친 놈이 지
휘까지 하려 드네."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르고 누르스름한 얼굴에는
언제나 우울한 기색이 보였다. 물론 히틀러는 아주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
니다. 오히려 그쪽에서 동료들과 자신을 갈라 놓는 거리감을 보여주었다.
그들과 달리 그는 가족도 없었고 거의 편지를 받거나 쓰지도 않았고, 그들
의 성향, 근심, 여자 이야기, 웃음 등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쓸데없는 일들보다 더 싫은 것이 없었다."고 이 시기를 돌아
보며 말하고 있다. 그런 일 대신 오히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
하고, 호머, 복음서, 쇼펜하우어의 책 등을 읽었으며 전쟁은 자기에게 30년
간의 대학생활을 대신할 만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주 고집스럽게 자
기 혼자만 문제의 핵심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고독과 접촉기피증을 가
지고 독특한 선민의식을 맞들어낸 것이다. 그 시절에 찍은 사진들에서 동
료들에 대한 뚜렷한 이질감과, 동기나 체험이 같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히
틀러는 창백하고 말없이, 다가갈 수 없는 태도와 뚫어질 듯한 표정으로 그
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이런 인간 관계의 무능력이 아마도 히틀러가 4년 동안 상병까지만 진급
한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리스트 연대에서
여러 해나 부관을 지낸 사람이 히틀러를 하사관으로 진급시켜야 할까 하는
이야기가 한두번 나왔다가 마지막에 취소되었다고 회고하였다. "그에게서
하사관으로서 필요한 지도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 자신도
진급에 끼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전쟁과 막사, 그리고 병사들의 숙소에서 찾아낸 것은 그의 본직에
잘 어울리는 종류의 인간관계였다. 그것은 비개성적인 기회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만난 것은 다시 남자 하숙집의 생활방식이었다.
물론 여기서는 그의 사회적인 특권의식, 내면의 불안, 숭고한 취향 등에 만
족을 준다는 점에서 달라진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테두리는
그의 수줍음과 인간혐오증, 접촉기피증에 알맞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없는 고향을 전쟁터에서 찾아냈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이 세계야말로
그의 집이었다.
예전에 그의 상관이었던 사람의 말은 이러한 점을 뒷받침해준다. "히틀
러 상병에 있어 리스트 연대는 고향이었다." 이러한 암시는 전쟁 동안 거
이 잊어버린 사회편입 의지와 지난 몇 년간 보인 아웃사이더로서의 반사회
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해준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부터 그는 어느 곳에서
도 고향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후로 모험과 질서를 향한 욕구, 자유와 기
율을 향한 욕구가 이곳 전방 본부와 참호, 그리고 방공호 속에서처럼 이토
록 지속적으로 만족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은 지나간 여러 해의 상
처 많은 체험과는 달리 아돌프 히틀러의 긍정적인 교양체험이었다. 그 자
신이 표현한 대로 '굉장한 인상'이었고, '압도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행복
한' 것이었다. 은유의 영역에서지만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체험이었다.
히틀러 자신도 전쟁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도 그것은 감상적인 젊은 남자에게 힘과 자기 가치 의식을 마련해주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다시금 친척들 앞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1917년 10
월과 1918년 9월의 휴가를 그는 슈피탈에 있는 친척들 곁에서 보냈다. 그
는 전쟁터에서 연합의 쓸모, 부분적인 자기억제와 운명에 대한 신뢰를 배
웠다. 운명에 대한 신뢰는 그가 속한 세대의 열정적인 비합리주의의 전반
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그가 격전지 한가운데를 뛰어다니면서 보여준 용기
와 냉혹함은 동료들 사이에서 그에게 일종의 후광을 마련해주었다. 그들은
히틀러와 함께 있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이러
한 체험은 그 자신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실패의 세월 동안 고집스럽게 간직했던 특별한 소명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
켜주었다.
전쟁은 비판적 사고에 대한 히틀러의 성향도 키워주었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는 전쟁터에서 기존의 지도층이 실패하고 있다는 인식을 얻
었고, 자신이 옹호하고자 하는 질서가 내적으로 탈진상태에 있다는 인식도
얻었다. "나는 이 전사자들에 대해서 지휘관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고 그
는 멍청해진 동료를 향해서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동기가 거의 없는 시
민계급 청년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다고 여겼던 새로운 질서를 향한 욕
망이 막연히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말한 대로 처음에 그는 '정치화되지 않
았다',혹은 정치에 무관심했던 빈 시절에 '당시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랬다. 그러나 여기서
계속된 그의 사색은 모든 생각들을 뒤죽박죽 뒤섞었다. 그는 머지 않아
"소시민의 원시적인 방식으로 정치 문제들과 세계관 문제들을 사색한다."
는 것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전쟁 초기에 그가 뮌헨의 아는 사람에게 쓴
열두 쪽 길이의 편지는 이러한 관찰을 뒷받침해준다. 그가 참여했던 기습
공격을 상세히 묘사한 다음에 ("거의 기적처럼 나는 여전히 멀쩡했어요.")
편지는 다음가 같이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자주 뮌헨을 생각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돈이야 얼마가 들든 빨리
이 관계를 영원히 청산해버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서 행운을 얻은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다시 보기를, 고향이 더욱 순수해지
고 외국세력에서 깨끗이 벗어났음을 보게 되기를, 그리고 지금 매일같이
우리들 수십만 명에게 닥치는 희생과 고통을 통해서, 여기서 매일매일 국
제적인 적군에 대항하여 흘리는 피의 강물을 통해서 외부에 있는 독일이
적이 섬멸될 뿐 아니라 우리 내부이 국제주의도 섬멸되기를 바라는 단 하
나의 소원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토를 얻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와의 간계는 언제나 내가 이야기한 대
로 될 것입니다.
이 문장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빈 시절의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것이다. 외국세력에 의해 압도될까 하는 두려움, 적들의 세계에 대
항한 방어감정 등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모든 도이치 운동'의
생각에서 발전되어 나온 생각아 여기 처음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뒷
날 국내정치의 가장 중요한 방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 국가의 내적인 결
속이 국가의 외적인 권력확장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도이치 땅은
우선 도이치가 실현되고 나서 위대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꿈꾸다
1916년 10월 초에 히틀러는 르 바르케 근처에서 왼쪽 허벅지에 가벼운
부상을 입고 베를린 근교의 벨리츠 육군병원으로 수송되었다. 1917년 3월
초까지 거의 다섯 달 동안이나 그는 고향에 머물렀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볼 때 이 기간에 그는 정치에 더욱 접근하였다.
1914년 8월과 전선에서의 체험들은 그에게 특히 민족의 내적 톡일이 경
험으로 의미가 있었다. 2년 간 이것은 하나의 행복하고도 손상받지 않은
확실성이었다. 고향의 주소도 없었고 그 어떤 지향하는 곳도 없었기에 그
는 거의 모든 휴가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이 가상세계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후에 그는 그리운 어조로 "그것은 옛날의 훌륭한 영운군대의 전선이었다."
고 회상하고 있다. 벨리츠에서, 그리고 처음으로 베를린을 방문해서 정치
적, 사회적인 풍경들과 다시 만났을 때 충격은 한층 더 컸다. 절망스럽게도
시대는 전쟁 초기의 그 모든 열광을 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
다. 고양된 운명의 결속 대신에 다시 당파들, 당파들 간의 싸움, 의견차, 대
항 등이 나타나 있었다.
베를린 시에 대한 그의 일생 동안의 원망은 어쩌면 이 초기 체험에 원인
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불만, 배고픔, 체념 등을 경험하였다. 화가 잔
뜩 나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기들이 '더 똑똑하다'고 떠벌리는 징병기피자들
을 만났으며, 위선, 이기주의, 전시의 여러 이득들을 보았다. 그리고 빈 시
절의 고정관념에 충실하게 이 모든 현상들 뒤에 유대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여겼다.
거의 다 나온 상태에서 뮌헨의 예비대대로 돌아와보니 그곳도 사정이 마
찬가지였다. 그는 고향을 '더는 알아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허한 노여
움을 품고서 그는 마법에서 깨어나는 이런 체험을 만들어낸 자들, 내적인
통일의 아름다운 꿈, 어린 시절 이후 최초의 긍정적인 사회 체험을 망가뜨
린 자들을 증오하였다. 한편으로는 저 '헤브라이의 민족 파괴자'들에 대한
증오였다. 그들 중 1만 2천이나 1만 5천 명을 '독가스 아래' 세워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가와 언론인에 대한 증오가 생겼다.
뒷날에도 그가 이용하는 언어표현들은 그의 격분의 정도를 보여준다. '수다
쟁이들', '해충', '혁명에 대한 거짓증언자들'은 없애버려야 마땅하다고 했다.
'모든 군사수단을 다 동원해서라고 이 나쁜 질병들을 쓸어버려야 할 것이
다." 아직도 그는 정열적으로, 거의 신경질적으로 승리를 열망하였다. 이름
없는 상태에서 일어서기 위해서는 오히려 패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감
도 못하고 계산도 못했다.
1917년 초에 전선으로 돌아가지 그는 다시금 해방된 듯이 느꼈으며, 한
번도 제대로 적응할 수가 없었던 문명세계로부터 다시 멀어졌다. 군대서류
는 그가 프랑스 플란더스 지방 진지 확보전투, 아라스의 봄 전투, 가을에는
격렬했던 슈망 데 다메 전투에 참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 동안
'생각 없는 여자들의 무의미한 편지'들이 세심하게 전쟁에 지친 고향의 분
위기를 전선에 전파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시기에 자주 화가 출신인 동료 에른스트 슈미트와 자기의 미래
의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슈미트는 히틀러가 당시에 정치
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하였다. 물론 그는 아직
결심이 완전히 서지는 못했다. 한편 그가 여전히 화가로서의 경력을 믿고
있다는 증거들도 있다. 1917년 10월, 제국의회의 논란 많은 평화결의가 있
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리고 제국이 동부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하기 바로
직전에 그는 휴가를 얻어서 독일의 정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갔다. 거기
서 그는 슈미트에게 보내는 엽서에 이렇게 적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박물
관들을 더 잘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중에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당시 얼마 안 되는 친구들에게 자주 전쟁터에서 귀환하게 되면 건축
가로서의 직업과 나란히 정치활동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연설가가 되려고 했다.
선전은 대중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의도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조종이 가능하다는 빈 시절의 확신
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를 두렵게도 만들고 동시에 매혹하기도 하는, 숨어
서 일하는 인형조종자들에 대한 생각은 언젠가는 스스로 인형조종자가 되
리라는 생각으로 대단히 마음이 끌렸다. 인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떠한
임의성도 부정하는 것이다. 약간 어리둥절한 태도로 그 자신이 말한 것에
따르면 올바른 인형조종자가 제때에 올바른 지체를 움직이게만 하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으며 '무섭고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결말들'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민족들, 계급들, 혹은 정당들이 흥하고 망하는
역사의 진행을 아주 얼토당토 않게 선전의 능력이 크냐 작으냐의 결과로서
평가하였다. 그는 (나의 투쟁)의 유명한 제6장에서 도이치군과 연합군이 예
를 들어 선전술을 해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독일은 '형식상 불충분하고 본질적, 심리적으로 잘못된' 선
전을 했기 때문에 패전했다고 한다. 선전이라는 무기의 실로 무시무시한
작용을 계산할 줄 몰랐던 지도부의 무능이 선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
려운 선전이나마 방해하면서, '막연한 평화주의의 멀건 국물'만을 허용하였
다. 그것은 '사람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홀리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것
이었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극히 천재적인, 영혼의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자격이 있지만' 도이치군 측은 아는 체나 하는 허풍선이 실패자에게 그 일
을 맡겨서 이익은커녕 손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의견에 따르면 상대방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연합군측이 혐오
감을 불러일으키는 선전의 '가차없도고 천재적인 방식'에서 그는 깊은 인상
을 받았고, 이 거짓말의 절대적이고 뻔뻔스럽고 일방적인 완고함에 대해
전문가적인 탐닉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는 이러한 방식에서 "끝없이 배웠
다."고 한다. 그는 대체로 상대방의 예를 들어서 자신의 확신과 원칙들을
보여주는 성향이 있었다. 그래서 세계전쟁에서 적대자의 선전을 모범으로
들어서 심리학적 영향에 대한 자신의 원칙들을 전개해 보이고 있다.
상대방이 심리적 전쟁에서 우세했다는 주장은 도이치 여론 안에 널리 퍼
져 있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군대를 자랑삼던 국가가 너무도
이해가 되지 않는 패배에 대해서, 군대 아닌 이유들로 설명하려고 하는 여
러 가지 전설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독일이 모든 전쟁터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고 그토록 애쓰고 수많은 희생을 지불한 다음에 전쟁에서 진 것에 대
해서 말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류를 범하면서도 영리한 측면을 보이곤 했는데 이렇
게 특징적인, 명료함과 어리석음의 혼합 속에서 선전의 본질과 효과에 대
한 자기 생각의 결말부분을 예리하게 설명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선전이란
민중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교육받은 계층을 지향해서는 안 되고 '영원한
대중을' 지향해야 하며 그런 대중들 중에서도 정신적 수용력이 가장 제한
된 사람에 맞추어 수준을 잡아야 한다. 표어처럼 주입하기 쉬운 형태로 극
소수의 설득력 있는 목표에 집중하여야 한다. 언제나 감정을 지향하고 절
대로 이성을 향해서는 안 되고 모든 객관성은 명백하게 포기해야 한다. 자
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의심의 그림자도 보여서는 안 된다. 오직 "사랑이냐
미움이냐, 옳으냐 그르냐,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이 있을 뿐 절대로 반
은 옳고 반은 그르다는 것은 없다."는 등등이다.
이 모든 것은 전혀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것
을 생각한 에너지와 자유로운 태도는 대중의 사랑을 얻는데 있어서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상당한 우위를 확보해주는 요인이 된다. 그는 이러한 자
유로운 태도로 대중, 고루함, 협소함, 확고함 등을 전혀 경멸감 없이 완전
히 도구적으로 자신의 목적의식에 종속시켰다.
벌써 그는 이러한 우월성을 처음으로 느꼈다. 전쟁 마지막 국면의 이러
한 체험을 보면서 그는 대중 없이, 대중의 약점과 장점과 민감성에 대한
지식 없이 정치가 불가능하다는 빈 시절의 체험을 확인하였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선동가들인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 등이 그가 한때 경탄했던 칼 뤼
거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며 약간 창백하고 생각이 약하기는 하
지만 미국 대통령 윌슨도 여기 속한다.
히틀러의 생각에 따르면 언제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도이치의 열등성의
주요 이유 하나는 연합군측의 이러한 민중지도자들에 대응할 만한 독일 쪽
상대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민중과 괴리되고, 민중이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도이치 지도부는 보수적인 완고
함에 잠겨 오만하게 아무것도 모른 채 전통적인 입장에 붙박여 있었다. 이
러한 실패의 인식은 이 시절의 히틀러에게 거대한 인상들을 남겼다 .주춤
거리는 지도층의 특징적인 약점에서 벗어나, 선입견 없이, 그리고 냉정하
게, 이기심과 감상에서 벗어나 히틀러는 오직 효과만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상대방 선전의 몰취미한 우화적 작품들에 대해서
도 감탄하였다. 예를 들면 도이치 병정들이 어린이 손을 토막내거나 임신
부의 배를 가르는 학살자들로 묘사된 것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러한 그림
들이야말로 두려움의 마력과, 천박한 환상 속에서 두려움의 상상으로 끊임
없이 자신을 확대하는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승리의 팡파르에서 패배의 묘지송으로
이념이 가진 동원력도 끈질긴 힘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연합군은
야만과 심연의 힘에 맞서 세계와 그 거룩한 재보를 구한다는 수많은 아름
다운 가상을 십자군 형식에서 가져왔다. 상대방의 이러한 종교적 자기과시
에 대해서 도이치측은 맞설 것이 없었다. 초기에 군사적으로 성공한 듯한
인상이 남아 있는 동안 순수한 방어전쟁이라는 주장을 포기하였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독일은 합병을 좋아하는 지크프리트라고 내세우면서 그러한
노력이 세계의 눈앞에 변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
다는 것은 더욱 치명적인 일이었다. 스스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국민
이 공간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고 발전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는 어쨌든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사이 사회적인 구원이념의 약속에 사로잡혀 1917년 말에 패배한 러시
아에서, "모든 나라의 지치고 고생한 노동자 계급과 일하는 계층이 열렬히
그리워하던, 국가 병합이 없으며 민족 자결권에 따른 올바르고 민주적인
평화"의 제안이 나왔다.
다른 한편 1918년 초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
에서 포괄적인 평화개념을 밝혔다. 그것은 '세계를 사람들의 삶을 위해 쓸
모 있고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념이었다. 폭력도 공격도 없는,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자결권과 정의의 질서라는 자극적인 그림이었다. 이
념이 없어져버린 제국의 힘에 맞서 이러한 이념이 지쳐버린 나라 안에서
끈질긴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대를 특징짓
는 일화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도이치의 참모장교 한 사람이 1918년
가을에 갑자기 깨닫고서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이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리
고 우리가 이 이념들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하게 되리
하는 사실도 말이야!"
도이치의 패배는 군대 외적 요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수많은 변종
으로 만들어져서 뒷날 우익의 세력확보 전략에 포함된다. 그것은 정식 전
투에서보다는 오히려 음모와 배신으로 인해서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도이치
민족의 지크프리트 콤플렉스 탓만은 아니었다. 이런 주장은 훨씬 더 올바
른 핵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의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
으로였지만 독일은 실제로 전쟁터 바깥에서도 패배하였다. 시대착오적이고
낙후한 정치 체제가 시대에 더 잘 맞는 민주질서에 굴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는 처음으로, 이념에 대항해서는 단순한 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 이념에 맞설 만한 다른 이념의 도움을 받아야 성공적으로 대응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권력수단으로 세계관에 맞서 싸우려
는 모든 시도는, 싸움이 새로운 정신적인 태도에 대한 공격의 형태를 취하
지 못할 경우 마지막에 실패하고 만다. 두 세계관의 싸움이 될 경우에만
지속적이고 가혹하게 투입된 과격한 힘이라는 무기를 가진 쪽에 유리한 결
판이 나는 것이다." 전쟁 시절의 이런 사색은 뒷날 만들어낸 것으로 당시
에는 아직 막연하고 어슴푸레한 것이었으며 문제를 의식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예감한 것에 불과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불명확함
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들은 전쟁 때 얻은 사색들을 표현해주고 있다.
1918년 여름에 한 번 더 도이치의 승리가 다가오는 듯이 보였다. 몇 달
전에 제국은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제국을 더욱더 쇠약하게 만드는 이
런 순간적인 전투의 승리뿐만이 아니었다. 3월 초에는 러시아에 브레스트
리토브스크 조약을 강요하였다. 약 한 달 뒤에는 부카레스트 조약에서 루
마니아를 향해 한 번 더 인상적으로 힘을 과시하였다. 그로써 동부전선의
전투가 일단락되고 도이치 서부전선은 2백 개 사단 거이 350만 병력으로
연합군 세력에 맞서게 되었다. 장비와 무기는 여전히 열세였다. 예를 들면
적군의 총기 1만 8천 정에 대해서 도이치측은 1만 4천 정 밖에 없었다. 그
러나 깨지지 않은 공식적인 자신감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병력을 지원받아
서 총사령부는 3월 말 이후로 다섯 개의 대공세 중 최초의 공격을 개시하
였다. 미군 병력이 개입하기 전에 병력을 최고로 투입하여 전쟁의 판도를
결정지으려는 시도였다. 도이치 민족은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루덴도르프 장군은 어떤 담화문에서 밝혔다. 그것은 뒷날 히틀
러를 사로 잡은 것과 같은 거대한 도박을 향한 정열이었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수많은 승리들을 거두고 난 끝에 굳은 결심으로, 남
은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넓은 전선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도이치 중대들은 공격에 나섰다. 히틀러는 리스트 연대와 더불어 이 전투
에 참여하였다. 특히 몽디디에 느와용 근처의 추격전과 뒤에는 스와송과
렝스 전투에 참전했다. 초여름에 도이치 군대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를 파
리 근처 60킬로미터가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격이 얼어붙었다. 도이치 군대는 한 번 더 겨우 껍질뿐인
승리를 얻기 위해서 치명적으로 제한된 병력을 다 썼던 것이다. 그런 성과
를 얻기 위해 지불한 지나치게 많은 인명 손상 등이 도이치군이 전선을 꿰
뚫은 이후에 전선을 다시 고착시켜버린 것이다. 국내여론에 대해서 이 모
든 일을 부분적으로는 감추기도 했지만 부분적으로 국내여론이 지나칠 정
도로 현실을 거부하였다. 도이치군의 작전이 정지되고 한참이나 지났다. 연
합군측이 공세로 전환하였고 도이치 전선, 특히 아미엥 전선이 붕괴된 8월
8일에도 최고 사령부는 여전히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령부는
과격한 양자택일 결과 승리가 멈춘 직후 패배를 고백해야 할 처지에 있었
다. 사령부는 죽은 색깔의 물감을 써서 패하지 않는 독일이라는 전체 그림
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전망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모든 이유에서 독일의 여론은 패배가 바로 눈앞에 닥쳐와 있던
1918년 여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이번 전쟁이 승리로 끝나리라고 믿고 있
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망상은 도이치의 선전이 무력하고 효과가 없다는
히틀러의 생각을 아주 잘 입증해주었다. 물론 히틀러 자신도 부정확한 상
상으로 인해서 올바른 결론에서 벗어났다. 책임있는 정치가들과 고위 장교
들조차도 잘못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1918년 9월 29일 총사령관 루덴도르프가 성급하게 정치지도부
를 소환해서 조속한 정전 요청을 해달라고 청했을 때, 이런 갑작스런 현실
의 붕괴는 더욱 날카로운 일격으로 모든 사람을 한방 먹였다. 신경의 힘이
완전히 소모된 상황에서 그는 모든 전술적인 안전장치를 비난하였다. 이상
한 일이었지만 그는 대공세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군사적 기도를 정치적으로 떠받쳐 주려는
모든 의견을 아주 못마땅히 여기면서 물리쳤다. 그는 분명하게 표현할 만
한 전략적 목표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그 점을 캐
묻는 황태자의 질문에 대해서 그답기는 하지만 몹시 흥분된 대답을 내놓았
다. "우리는 한 구멍을 팝니다. 다음 구멍도 나타나겠지요." 바덴의 막스
왕자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물었을 때도 루덴도르프는 이렇게 대답했
다. "그러면 독일은 망하는 거지요."
심리저긍로나 정치적으로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채 '마치 복음서를 믿듯
이' 자기 나라 병력이 우세하다고만 믿었던 국민은 바닥도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였다.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해하기도 힘든 힌덴부르크 장
군의 말은 국민의 망상이 얼마나 사라지기 힘든 것이었던가를 증언해주고
있다. 패전했다는 루덴도르프의 고백을 듣고도 여전히 늙은 야전 사령관
힌덴부르크는 외무장관에게 곧 벌어질 협상에서 로트링겐 지방의 금속 광
산을 합병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하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
로 저 현실거부의 독특한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현실거부의 태도로 전후 여러 해 동안 국민적인 곤궁과 의기소침을
견뎌냈고 마침내 1933년 봄의 소란스런 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승리의
팡파르에서 패배의 묘지송'으로 이렇듯 충격적으로 전환된 결과는 극히 중
요한 것이다. 뒤통수를 맞고 망상에서 깨어나는 이런 경험은 다음 15년 역
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이 사실에 대한 이해 없
이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1차대전에서의 패배
이 소식은 지휘관의 폭넓은 관점에서 전쟁을 관찰하고 있던 리스트 연대
의 사색적이고 과민한 상병에게 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중대는 1918년
10월에 플란더스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영국군은 10
월 13일에서 14일 밤에 이프레 남쪽에서 가스 공격을 해왔다. 워빅 근처의
한 언덕에서 히틀러는 여러 시간 동안이나 빗발치는 가스 수류탄의 불꽃
속에 있었다. 아침 무렵 그는 심한 통증을 느꼈고 7시쯤 그는 눈이 멀었다.
그가 자기 상태를 기술한 것을 보면 눈이 불타는 석탄 덩어리로 변한 것
같다고 한다. 곧 이어서 그는 포메른에 있는 파제발크 육군병원으로 수송
되었다.
육군병원 숙소에서는 많은 소문들이 떠돌았다. 왕조가 붕괴되었다느니,
전쟁이 곧 끝날 거라는 등의 어지러운 소문들이었다. 히틀러는 특유의 책
임감으로 그 지역의 불안, 파업, 불복종 등을 걱정하였다. 물론 그는 자기
가 보게 된 여러 징후들을 '각 개인들의 상상력이 폭발'한 것으로만 여겼
다. 그는 이상스럽게도 전국민 사이에 퍼져 있는, 벨리츠 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한 불만과 피로의 분위기를 보지 못했다. 11월 초에 눈이 상
태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신문을 읽을 수가 없었고, 동
료들에게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말도 했다. 어
쨌든 독일 혁명은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붉은 넝마조각'을 휘날리기 위해서 전선이 아니라 이른바 '임질병원'에서
나온 '유대인 몇 놈'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주동한 것이라고 그는 믿었
다.
1918년 11월 10일에야 그는 '내 인생의 가장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병
원 목사의 부름을 받고 모여든 입원환자들은 혁명이 일어나서 호엔촐레른
왕가는 붕괴되고 독일에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히틀러는 이 과정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늙은 성직자는 안으
로 조용히 눈물을 삼키면서 왕가의 공적을 생각했고, 거기 참석한 사람 중
누구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가 전쟁은 패배하
였으며, 제국은 적의 수중에 넘겨졌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더 이
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견디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 주변이 다시 캄
캄해져서 나는 더듬고 비틀거리며 침대로 돌아와서 내 자리에 몸을 던졌
다. 타는 듯한 머리를 이불 속에 틀어박았다. 어머니의 무덤에 섰던 날 이
후로 나는 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히틀러에게 그것은 새로운 환멸이었다. 인생이 초기에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던 기억만큼이나 과격하고 이해되지 않는
환멸이었다. 그는 이 환멸을 신화화시키는 과장법으로 자기 인생의 지속적
주제의 하나로 만들었다.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도 바로 거기서 나온 것이
다. 그로써 그의 초개인적인 주장의 의지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격분한 것
이었는지 드러난다.
거이 모든 중요한 연설에서 그는 거의 제의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거
론하였으며, 혁명을 가리켜서 자기 인생을 각성시켠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언제나 역사서술이 뒤를 이었다. 전쟁의 그런 급격한 변화가 자
기에게 불러일으켰던 내동댕이치는 인상은, 심지어 1918년 10월 눈이 먼
것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히스테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추측까지도 만들어
냈다. 히틀러 자신도 때로는 그러한 추측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기도 했
다.
1942년 2월 장교와 사관 후보생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이 완전
히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자기 민족이 노예가 된 세상만을 보
아야 한다면 눈의 빛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볼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라고 그는 말했다. 1944년 패전이 다가오고
있을 때 그는 알버트 슈페어에게 의기소침해서 자신은 1차 대전 말에 그랬
던 것처럼 다시 눈이 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의 투쟁)의 한 구절도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히틀러는 거절
할 수 없이 귓속으로 울려오는 외침소리에 깨어났다고 한다. 그 외침은 자
신이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로부터 깨어난 것이었다. 천재란 "깨달음으로
인도되기 위해서... 형식적인 자극"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런 뜻이다. "평범
한 일상사에서 보면 중요한 사람들도 자주 중요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고 자기 주변의 평균수준을 거의 넘어서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사
람들이 실패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상황이 닥치면 눈에 보이지도 않던 평
범한 인간의 내부에서 갑자기 천재적인 천성이 솟구쳐 나오는 것이다. 그
때까지 시민적인 사소한 일상에서만 그를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러한 시련의 시간이 오지 않는다면, 보통 사람은
이 수염도 안 난 어린 소년이 몸에 젊은 영웅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짐
작도 못할 것이다. 운명의 망치질은, 어떤 사람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
지만 어떤 사람은 연마하여 강철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한 언급은 물론 특수한 소명의식을 중개하기 위해서만 생각해낸 것
이다. 옛날 보헤미안, 무감각, 어두운 몽상의 시절을 선별된 인간의 천재성
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11월의 체험은 그를 마비시키고 어쩔 줄 모르
게 만들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음을 알았다." 4년 간의 전쟁은 증오스
런 시민세계의 의무와 질서의 요구에서 그를 보호해 주었다. 직업과 생존
의 문제들을 미루어주었다. 그 모든 일이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 밀려왔다.
전보다 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직업도, 목적도, 거
처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패배와혁명이 소식을 듣고 그는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국민적인 상실감이 아니라 개인적인 상실감을 느꼈던 것이다.
종전은 상병 히틀러에게서 전쟁터에서 얻은 역할을 빼앗아갔다. 그는 군
에서 제대했을 때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찌할 바 모른 채 자기 군대
의 명예였던 군기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동지들, 그리고 가까웠던
사람들이 4년 간 견뎌온 짐을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던져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병사생활의 두려움과 굴종을 애국심
뒤에 감추는 일을 중단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헛일이었다.
희생도 결핍도 헛일이고, 때로는 여러 달이나 계속된 굶주림도 갈증도 헛
일이고,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의무를 행하던 그 모든
시간들이 헛일이고 이 전쟁에서 죽은 2백만의 죽음이 헛일었다."
혁명의 진행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히틀러를 그토록 가슴아프게 한 것이
었다. 왕가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제국 지도층에 대한 존경심만큼이나 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우익' 만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패
전, 그리고 주어진 역할이 상실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혁명을 가능케 한
우울한 상황은 그에게 아무런 보충 역할도 제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위대함, 정열, 죽음의 예찬 등을 부정하였을 뿐이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동기에서 나온 군사 파업이었다. 그
동기는 그에게는 극히 진부한 것으로서 살아남으려는 의지였다.
이념이 결핍된 혁명
실제로는 혁명이 아니었던 이 혁명은 무엇보다도 어찌할 바 모르는 천박
한 몸짓으로 나타났다. 독일 전역에서 11월에 탈영병들이 길거리로 몰려다
니면서 장교사냥을 벌였다. 그들은 떼를 지어서 장교들을 노리고 있다가
붙잡기만 하면 조롱섞인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그들의 훈장, 견장, 계급장
등을 떼어냈다. 그것은 몰락한 정권에 대한 때늦은 폭동이었으며 이해가
되면서도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상당한 정도의 상처입
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장교들과 법과 질서를 옹호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혁명에 대한 원한을, 그리고 아울러 이러한 부작용을
수반하고 시작된 정권에 대한 원한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게다가 역사는 이 혁명에 적정의 순간을 주지 않았다. 혁명은 그런 절정
을 통과해야만 비로서 국민의 의식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1918
년 10월에 벌써 새로운 수상인 바덴의 막스 왕자는 미국 대통령과 국내 여
론에 따라 국내정치의 개혁을 행하였다. 독일의 의회주의 정부형태를 도입
하는 것이었다. 11월 9일 오전에 어느 정도 독단이 개입된 형태로 황제의
왕권포기 결정이 선포되었다. 혁명은 채 시작도 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
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의지
를 보존할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프랑스 혁명에 나타나는 정구장 맹세의
바스티유 함락과 같은 기회는 오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은, 가능하다면 단 하나의 전망만을 가지게 되었다.
즉 모든 새로운 현상의 매력적인 힘을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
나 새로운 권력자인 프리드리히 에버트와 사회민주당은 부지런하고 걱정
많으며 회의에 가득 차고 선량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처음
부터 왕실 고문관과 상공업 고문관을 없애고 훈장과 명예훈장 등을 없애버
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겼다. 그들의 전체적인 행동방식은 매우 꼼꼼하
고 심리적인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현재 이 순간이 요청을 헤아리는 감각과 사회적인 구상도
가지지 못했다. 당시의 체험자가 말하듯이 '그것은 이념이 결핍된 혁명'이
었던 것이다. 어쨌든 패배하고 실망한 국민의 감정적인 고통에 대한 답변
은 아니었다. 1919년 전반기에 초안이 짜여서 8월 11일에 바이마르에서 가
결된 헌법 (바이마르 헌법)은 스스로의 의미를 설득력있게 정의내리지도
못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헌법은 민주적 권력질서의 기술적인 도구로
서만 이해되었을 뿐, 권력이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혁명세력은 우유부단과 용기의 결핍으로 인해 아주 일찌감치 두 번째 기
회를 잃었다. 새로운 권력자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탈진상태와 러시아 혁명
의 끔찍한 모습에 대한 국민의 공포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무
력감과 패전국의 수많은 문제들에 짓눌려서 노동위원회와 사병위원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정치적 개혁의지를 제한시켰다. 여러 가지 사건
들은 이제 쓸모없게 되어버린 전통적인 과제를 수행할 준비만을 위한 것이
었다. 혁명은 심지어 우익측에서도 환영받았고 '사회주의'와 '사회화'는 보
수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상황을 해결해주는 요술공식으로 여겨졌다.
그에 반해서 새로운 지도부는 안정과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정치 계획밖
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권력들과 결탁하여 안전과 질
서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단 한 번 소심한 사회화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토지 소유라는 봉건적 상황은 전혀 개혁되지 않았고
관료계급은 서둘러서 자기 지위만을 확보하였다. 왕조만 빼면 그때까지 결
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회 계층은 새로운 국가체제로 넘어가는 과정
에서 거의 권력 손실을 입지 않았다. 히틀러가 나중에, 11월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누가 방해했더란 말인가, 그들은 그럴 권력
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웃은 것도 근거가 없는 일은 아니다.
좌익 과격파는 혁명의 미래상을 구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중의 추종도 없었고, 그들이 오랫동안이나 갈망하던 '반역자의 에너지'도
없었다. 저 유명한 1919년 1월 6일에 1만여 명을 헤아리는 혁명지지 대중
이 베를린의 승리가도에 모여들어서, 저녁때까지 쉬지도 않고 토론을 벌이
던 혁명위원회의 신호를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떨면서 지치고
실망하여 흩어졌다. 이 사건은 사상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극복하
기 힘든 것인가 하는 사실만을 보여주었다. 좌익 혁명파가 특히 반혁명 군
부와 대립하면서 1월 중순에 나라 안은 큰 소요와 불안과 내전 비슷한 대
립상황까지 치닫게 되었고 공산당의 탁월한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가 살해당하였다. 혁명은 역사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결과도 초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방향을 상실한 여론은 그 국면의 싸움과 논쟁에서 공격이 아니라 오직
방어만 새온 바이마르 공화국에 오히려 불리하게 돌아갔다. 국민의 의식
속에서 이 모든 것은 '혁명' 탓이었다. 이렇게 불행한 시기에 태어난 국가
가 암암리에 모반, 패배, 민족적 치욕 등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여겼다. 그
리고 이러한 생각이 전부터 국민이 무질서의 이미지들과 뒤섞였다. 공화국
이 '더러운 혁명', 그러니까 절반의 혁명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만큼 국민
의 의식 속에서 공화국과 그 성공을 해친 것은 없었다. 정치적으로 온건한
편이었던 국민 다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수치심, 슬픔, 혐오감을 느꼈다.
평화를 경시한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평화협정은 분한 마음만 더하게 만들었다. 국민감정에 따르면
전쟁은 방어전이었다. 전쟁 후반부에는 과장된 전쟁을 위한 토론 같은 것
은 국민의식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발언은 독일 국민에
게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왕조가 몰락하고 서유럽의 헌법을 받아들이면 전
승국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미리 만들어진 정권을 위하여 사후업무를 수
행하는 사람들에게 화해의 마을 가질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베르사유 조약
의 기본 원칙이 되는 '세계평화의 질서'라는 선언서는 모든 보복행위, 명백
한 부당함, 강제적인 조약형식 등을 금지하고 있었다. 합리적이면서도 비현
실적인 이 희망의 시대를 '평화협정 기간의 꿈나라'라고 부르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다가 1919년 5월 초에 평화를 위한 조건들이 공표되었을 때
온 나라는 더욱더 제정신을 잃고 분노로 들끓었다. 공적인 흥분상태는 정
치적으로 필립 샤이데만 수상과 브로크도르크 란차우 외무장관의 퇴진으로
표현되었다.
외적인 상황은 악의와 모욕적인 생각을 가진 전승국들에 의해 결정되었
다. 1919년 1월 18일로부터 정확하게 50년 전에 도이치 제국이 선포되었다.
1월 18일에 회의가 열리고 서명장소도 50년 전과 동일한 선택된 것은 이해
된다고 치자,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에서 암살당한 5주기가 되는 6월 28일을 조약서명 날짜로 정한 것은 윌슨
선언의 야단스런 순진성에 대한 냉소적인 반대행위였다.
이 조약에서, 우익이나 좌익 가리지 않고 모든 진영과 당파들에 이르기
까지 잊을 수 없는 치욕감을 느끼도록 만든 악몽은 물질적인 부담보다 오
히려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회의에서 논쟁의 대부분을 이루는 영토반환 요
구, 전비 보상, 수리비 요구 등은 '카르타고식의 냉혹성'만을 가진 것이 아
니라, 의심할 것이 없이 제국이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에서 러시아를
향해서, 그리고 부카레스트 조약에서 루마니아 향해서 얻어냈던 부당한 조
건들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수치감'은 머지않아 우익의 선동에서 가장 공격
적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이것은 국가적인 체면문제였다. 무엇보다도 일
일이 지명된 도이치 장교들이 연합군 군사재판의 판결을 받도록 인수하라
는 제228조항과 독일이 전쟁발발에 대해서 유일하게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
는 그 유명한 제231조항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440개 항목이 조약
문안에는 너무나 명백한 모순과 부당성이 드러나고 있다. 전승국은 세계
심판자 같은 몸짓으로 자신들의 합법적인 요구에 대해서 죄를 고백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사실은 모두가 이해득실이 달린 문제들이었다.
이 조약문안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도덕성의 무의미한 행진으로 아주 많
은 증오와 정당한 비웃을 샀다. 연합국 내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예를 들면 미국 대통령의 선언문에서 세계를 화해시키는 원칙의
품위를 지녔던 민족자결권 조항도 그것이 도이치 제국에 유리하게 작용하
게 될 성싶으면 언제나 제외되곤 하였다. 남부 티롤, 수데텐 지방, 단치히
같은 순수한 도이치 영토들도 분리시키거나 독립시켰다. 그에 반해서 분열
된 합스부르크 왕조의 도이치 부분이 독일에 통합되는 것도 금지하였다.
여러 민족이 섞인 지역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주왕국의 경우에는 파괴
되고, 유고슬라비아나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에는 새로 건국되었다. 민족주
의는 전체적으로 승인되었으나 국제 연맹의 이념이라는 측면에서는 거부되
었다. 이 조약은 1차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 등장하였던 원래의 갈등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평화조약의 최고 목표는 평화'라
는 생각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경시하였다.
그 대신에 조약은 전쟁과 고통을 넘어 세대를 지나면서도 보존되어 온
유럽의 연대감과 공동의 유산이라는 의식을 광범위하게 파괴하였다. 새로
운 평화질서는 이러한 의식을 부활시키려는 의도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엄밀하게 살펴보면 독일은 언제나 배제되어 있었고, 민족단합조차
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도이치 사람들이 유럽의 결속에
감정적으로 더욱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전승국들의 말꼬리를 잡아서 그들의 위선을 강제로 보여줄 남자가 나타
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실제로 히틀러는 처음에 충실하게 윌슨과
베르사유 조약문의 가장 중요한 신봉자인 척함으로써 외교적인 성공을 거
두었다. 이 조약은 사라져버린 낡은 질서의 반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
을 옹호하였다. 당시의 눈 밝은 어떤 관찰자가 파리에서 펴오하조약이 승
인되던 날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 무시무시한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 그것
은 아마도 세계대전 보다 더욱 무서운 폭발로 끝나게 될 폭풍 전야의 무더
위"라고 적었다.
국내정치적으로 보면 평화조약의 결정에 대한 분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원한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공화국은 이러한 '치욕적 강제명령'의 강
도와 수차를 모면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공화국이
적어도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무능한지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당황, 우연,
평화의 기대, 피로의 결과였다. 공화국의 무능에서 생겨난 수많은 의심 말
고도 이제는 대외적인 약점에서 생겨난 악평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이라는 개념을 수치, 불명예, 무기력과 동의어로
여기게 되었다. 기만과 강요를 통해서 완전히 낯선 공화국이라는 형태가
도이치 민족에게 억지로 주어졌다는 감정은 이제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부담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기회가 없지도 않았다는 것
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그 행운의 기간 동안 공화국은 "사
람들의 충성심도 정치적인 상상력도 진짜 자기편으로 삼을 줄을 몰랐다."
=================================== 03
히틀러는 어디 있었나
이러한 과정들은 공공의식의 정치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그때까지는 정치 이전 공간에 움츠리고 있던 광범위한 계
층이 갑작스럽게 정치적인 정열, 희망, 절망 등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또한 육군병원에 있는, 서른 살 가량된 히틀러를 사로잡은 것이
기도 했다. 막연하지만 과격한 불행과 배신감이었다. 그것은 그를 정치에
한걸음 더 가까이 데려오기는 했다. (나의 투쟁)에 보면 정치가가 되려는
결심을 1918년 11월 사태와 연결시키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 그렇게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일년쯤 지나서 그는 어떤 작은 집회에서 열기에 취한
듯 일어서서 말하는 중에 연설가로서의 자기 재능을 발견하고, 희망 없이
막혀 있던 존재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출구와 미래를 갑자기 보게 된
다.
어쨌든 이런 해석은 다음 몇 달 동안의 그의 태도를 설명해 준다. 히틀
러는 그 사이에 눈이 다 나아서 11월 말에 파제발크 육군병원에서 나오자
뮌헨으로 가서 자기 연대의 보충대대에 신고하였다. 뮌헨은, 11월 사태 과
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도이치 영주가문의 붕괴가 시작된 곳으로,
정치적인 흥분과 활기에 넘치는 도시였지만 그는 거기 끼여들지 않았다.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고 거기 휩쓸려들거나 자극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빨갱이의 지배가 싫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뒷날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공화국 관심이 적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는 못한
다. 어떤 활동이든지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는 2월 초에 오스트리아 국
경에서 멀지 않은 트라운슈타인 근처 전쟁포로 수용소에서 위병근무를 자
청하였다. 그러나 몇백 명의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포로들이 한 달쯤 뒤에
석방되고 나자 그는 다시금 당혹스런 처지에 빠졌다. 아무런 결심도 못한
채 그는 뮌헨으로 돌아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다시 위풀밭 있는 막사에 숙소를
얻었다. 아마도 그 결심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시 지배
하고 있던 공산군대에 속해서 붉은 완장을 차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붉
은' 군대 바깥에 있는 의용군이나 단위부대에 합류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
쨌든 붉은 군대 안에서 지배적인 혁명사정을 계속 들여다볼 기회를 덤으로
얻었다. 이 시기에 그의 정치 의식이 얼마나 미약했고 감수성이 얼마나 약
했던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일은 없다. 뒷날 그는 '볼셰비즘'이란 말
만 들어도 흥분하고 화를 냈다. 뒷날의 온갖 양식화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에 그는 세계혁명의 본부에서 병졸 노릇을 하고 있다는 모욕감보다는 정치
적 무관심이 더 강했던 것이 분명하다.(1918년부터 19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계속되었다. 1919년 4월에는
뮌헨 시 일대에 소련식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의
지배 아래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이 공산주의 폭동을 과거의 군인
들과 의용군의 힘을 빌어 진압하였다. 히틀러는 반공주의자였으면서 뮌헨
의 공산군대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군대 바깥에서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군대 세계는
그가 자신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사회체제였다. 제대 결심은 난파한 인간
들의 이름 없는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개인적 상황이 전망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다. "이 시기에 내 머리
에서는 끝도 없는 계획들이 줄을 이었다. 하루종일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색의 종말은 언제나, 이름 없는 인간인
나는 그 어떤 행동을 하기에 가장 형편없는 전제조건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확인이었다."
이 말은 노동이나, 생업, 시민적인 지위에 대한 생각이 그에게 얼마나 멀
리 있었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름 없다는 의식이 그를 괴롭혔다. 그의
삶에 관한 서술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정치계에 진출해서 소비에트 정
부 '중앙 위원회의 불쾌감'을 사게 되었고, 그래서 4월 말에는 체포될 지경
에 이르렀지만 자기가 지니고 있던 기총을 들고 체포명령을 피해서 도망쳤
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때 중앙위원회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오히려 당시 그가 당혹감, 수동성, 기회주의적인 적응력 등이
뒤섞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용군 에프의 군대가 다
른 부대와 힘을 합쳐 뮌헨을 떨게 만들고, 소비에트 지배를 붕괴시켰던 5
월 며칠 시끄럽던 시기에도 그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한 동안
그의 추종자였던 오토 슈트라서는 뒷날 명백하게 질문했다. "이날 히틀러
는 어디 있었나? 우리 대열에 끼어서 싸웠어야 마땅한 이 병사는 뮌헨의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진압군에 섞여 있지 않았
다. 뮌헨에 진입하던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가 그를 아는 몇몇 장교들이
개입해준 덕분에 석방되었다. 중앙위원회가 체포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아
마 이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에프의 뮌헨 진군에 뒤이어서 소비에트 지배 시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졌다. 이 조사작업에서 히틀러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
지 추측들이 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제2보병연대에서 투입한 조사위원회
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덜 끝난 전투의 영향을
받아서, 심문은 시작되자마자 너무나 냉혹한 판결로 끝나곤 하였다. 이러한
심문을 위해서 히틀러는 정보를 물어오고, 소비에트 정권에 합류하였던 동
료들을 찾아내는 등 자신의 의무를 아주 충실하게 실천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 되어서 '국민적 사고'를 위한 교육과정에 파견 되었
다.
혁명에 대항하는 혁명가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러온 익명성에서, 그
리고 얼굴 없는 대중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조사위원회를 위
해서 '최초로 어느 정도 순수하게 정치적인 활동'이라 부를 만한 임무를 맡
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는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방향은 그에게, 반사회성과 소명의식의 이상한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만 빛나는 성장기를 갑자기 종결지어 주었다.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정치적으로 세기의 현상이 될 아돌프 히틀러가
서른 살이 되도록 정치에 아무런 활동적인 참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극
히 이상하다. 비슷한 나이에 나폴레옹은 이미 제1통령이 되어 있었고 레닌
은 추방기를 거쳐 망명중이었으며,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적인 (아반티(전
진))지의 주간이 되었다. 그에 반해서 히틀러는 곧 그를 세계정복 의지로
몰아갈 이념들 중 어느 것도 이렇다할 정도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빈의 반유대인 단체말고는 어떤 정당이
나 그 시대의 그 많던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활동 욕구를
암시라도 해주는 증언은 없으며, 시대의 상투어들에 더듬거리며 참가한 사
실 이상을 암시해주는 것도 없다.
정치에서 이토록 거리를 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성장과정
의 특별한 외적 상황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빈의 고독, 일찍이 뮌
헨으로 이주한 것, 그곳에서 외국인으로 취급당하다가 전쟁이 터지자 전선
으로 갔다는 것 등이다. 그런 인상은 이 시절에 그와 함께한 사람들의 특
성에 의해서도 생겨나는 것이다. '젊은시절의 친구'와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어쩌면 그가 정말 그랬던 것보다 더 결함투성이일 수
도 있다. 그러나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가 그에게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자신 1939년 11월 23일 권력의식의 절정기에 자신의 군 최고사령관들
을 앞에 놓고 혼란스러운 발언을 하였다. 자신은 아주 오랫동안 내적인 싸
움을 한 끝에 1919년에야 비로소 정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
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결심'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발언은 시작의 어려움
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적인 경력을 앞에 놓고 내면적으로
망설였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발언에는 아마도 위대한 창조적
활동에 비해 '시사 정치'를 개념적으로 하위에 두는 도이치의 전통적인 정
치 경시 풍조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젊은 날의 꿈, '독일 최고의 건축가는 아니라도
최고 건축가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꿈과 관련시켜 보면 더욱 그렇다.
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차라리 '이름 없는 화가'가 되어 이탈리아를 떠돌아
다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다만 자기 종족이 맞이한 죽음의
위협이 낯선 정치의 길로 자신을 몰아 넣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혁
명이 그에게 정치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는지 이해가 된다. 11월
사태, 모든 권위의 붕괴, 왕조의 몰락, 세상을 뒤덮은 혼란 등이 그의 보수
적인 본능에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를 적극적인 저
항으로 몰아가지는 못하였다. 소동과 혁명적 책동에 대한 반감은 정치에
대한 불신보다 훨씬 더 강하였다. 25년이 지난 다음에도 그는 원탁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서 11월 혁명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혁명가들을 범죄
자들과 동일시하였다. 그들은 '반사회적인 도당'에 불과하고 일찌감치 때려
죽여야 할 존재였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동기, 그리고 자신의 연설의 재능을 체험하고 난 뒤에야 그는
모든 망설임을 물리쳤다. 정치 경력에 대한 망설임과 질서파괴자라는 무서
운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그는 정치로
다가갔다. 4년 뒤 뮌헨 국민재판 앞에서 변명한 것에 따르면 혁명에 대항
하는 혁명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세계치유의 열망과 괴물 같
은 특별한 재능에 의해 정치로 이끌려 들어간, 생에 지치고 억눌린 예술인
은 아니었을까? 그의 생이 진행되면서 이 질문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게 된
다. 정치는 그에게 오히려 수단으로서 더 중요했던 것이 아닐까 질문해보
게 된다. 즉 정치의 도움을 받아서 연설의 위압, 행진, 퍼레이드, 전당대회
의 연극적 요소, 전쟁에서 군사력을 사용한 멋진 장관 등을 연출해보려 했
던 것이 아닐까?
낡은 질서의 붕괴가 그에게 그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물론 옳은 말이
다. 시민세계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정치가 시민의 경력인 시절에 그는 이
름과 성공을 얻을 전망이 극히 적었다. 그의 불안정한 기질로 보면 이 세
계가 형식적인 엄격성과 진지한 요구를 가지고 있는 한 출세 가능성이 별
로 없었다. 1918년이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쓰라린 근심만 만들어주었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에 큰소리로 웃지 않
을 수 없었다."고 그는 썼다.
그렇게 그는 정치 장면으로 들어섰다.
중간관찰 : 거대한 공포
1차대전이 끝났을 때 민주주의 사상의 승리보다 더 확실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전후의 혼란과 계속되는 민족간의 다툼과 새로운 국경선들 위로
민주주의 사상은 시대의 통일원칙으로서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높이 솟
아 있었다. 전쟁은 권력요구뿐 아니라 지배체제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려주
었다. 거의 모든 중부와 동부 유럽국가들이 붕괴되고 혁명과 소요를 겪으
면서 수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생겨났다. 그 국가들은 철저히 민주적 질서
의 개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1914년에 유럽에는 세 개의 공화국과 열 일곱
개의 왕조들이 있었는데 4년이 지난 지금 왕국과 공화국의 수가 같아졌다.
의심의 여지 없이 시대정신은 다양한 형식으로 국민주권을 지원하는 듯이
보였다.
독일은 잠깐 이 사상에 휩쓸려 보고 난 다음 이런 시대의 경향에 저항하
였다. 민족정당과 클럽들, 전투적인 질서의 의용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의 혼란 속에서,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 현실 거부감이 조직화되어 갔다. 이
런 집단들의 눈으로 보면 혁명은 배신행위였으며, 의회민주주의는 낯설고
강제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란 '연합국(1차대전 승전국) 자본에 의한 착취
기관'이 아니면 고작해야 '도이치 국민의지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
는 말이라고 여겨졌다.
독일의 적국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국가적 저항의 징후들을 보
고, 반항적이고 영원히 권위주의적인 도이치 민족이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
결권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이라고 여겼다. 물론 여기서 전례 없는 정치적,
심리적인 부담을 부인할 수 없다. 충격적인 패전체험, 저주받을 형식들을
포함함 베르사유 조약, 영토 상실, 전쟁배상금 요구, 광범위한 계층의 빈곤
과 영적인 혼란 등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언제나 도이치 사람들과 이웃
나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문화적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웃나라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나라가 원한을 품고서 교화시킬 수 없는
태도로 옛날의 낡은 상태에 머무르려 한다고 여겼다. 이렇게 시대에 뒤떨
어진 상태를 민족의 특별의식으로 삼고 서유럽의 이성과 휴매니티를 거부
할 뿐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에도 항거하려 한다고 여겼다. 수십 년이 지나
도록 이러한 생각은 국가사회주의의 발생원인에 대한 탐구에서 지배적인
입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희망들을 약속하고 있는 승리에 찬 민주주의의 이미
지는 사실은 망상에 불과했다.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보인
순간이 바로 민주주의 위기의 시작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민주주의
이념의 원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의문시되었으며, 방금 승리한 것은 또 다
른 운동의 훨씬 더 거친 승리에 추격당하거나 아예 치명적인 위협을 당하
였다. 그러한 반민주적 방향은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거의 비슷한 징
조를 보이면서 나타났다.
전쟁이 뚜렷한 불만상태를 만들어냈거나 의식화시킨 나라들, 전쟁에 뒤
이어서 좌파 혁명운동이 일어났던 나라들에서 이러한 반민주적 운동은 가
장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운동들 중의 일부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것이었고, 그 추종자들은 인간이 아직 존중받고, 골짜기는 평화롭고,
돈이 더 가치가 있던 저 좋던 옛날을 그리워하였다. 다른 일부는 혁명지향
적이고 기존질서를 더욱 무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일부는 소시민 대
중을 이끌었고 다른 일부는 농민이나 노동자층을 이끌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운동에서 사회계층, 이익, 표지들이 서로 뒤섞였지만 그들
모두는 사회의 더욱 어둡고 더욱 생동적인 심층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였
다. 국가사회주의는 세계상태를 뒤집어엎을 준비를 하는 유럽 스타일 저항
운동의 게임규칙을 따른 것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히틀러가 비웃은 것처럼 지루하고
고루한 모임들이었다. 그들은 뮌헨의 선술집에서 보잘 것 없는 모임을 가
지면서 국가와 가족의 곤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이러한 작은 집회
들이, 강력하고 고도로 조직화된 대중을 이끌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에
도전하고 능가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믿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 몇
년 동안 이 촌스런 연설가들의 모임이 제대 제군들과 프롤레타리아 시민들
이 합세하면서 엄청난 역동성이 생겨났다. 그리고는 적절하게 일깨워지고
집결되고 제자리에 투입되기만 기다리게 되었다.
처음에 이런 모임들이 다양했던 만큼이나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추진요소
들이 있었다. 1919년에 뮌헨에만 일시적으로 50개 정도의 정치적인 모임들
이 있었다. 그 추종자들은 주로 전쟁 이전 정당의 남은 찌꺼기들로서, 전쟁
과 혁명을 통해서 깨지고 해체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조국' '정신
노동 위원회' '지크프리트의 반지' '우주당' '노바 바코니아' '사회주의 여성
회' '자유 사회주의 학생회' '오스타라 당' 따위의 이름을 내걸었다. '도이치
노동자당'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고, 개념상으로나 현실적으
로 한데 모든 힘은 다름 아니라 압도적인 공포감이었다.
우선 아주 직접적인 것으로 혁명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
후로 19세기 내내 유럽 시민 계급을 꿈속에서 괴롭힌 저 '거대한 공포'가
그것이었다. 혁명이란 자연의 폭력과 같다는 인상, 참가자들의 의지를 고려
하지 않고 원초적인 자연의 힘으로 독특한 결과를 초래하고, 강제로 공포
정치, 파괴, 살인, 혼란 속으로 이끌어들인다는 인상이 사라지지 않고 사람
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얻게 된 체험은 칸
트가 말하는 인간의 개선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공포심이었다. 이
공포심은 특히 독일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서 모든 실질적인 혁명의지를 변
조시키고 저 '평화의 광신주의'를 만들어냈다. 1918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에
서는 평화와 질서의지를 호소하는 것만으로 거의 모든 혁명봉기가 막혀버
렸다.
혁명의 위협
독일 안에서 혁명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지 이 오래된 공포가 되살아났
다. 특히 러시아 10월 혁명과 그 결과 드러난 위협들을 보면서 이 공포는
더욱 커졌다. 러시아 혁명을 피해 뮌헨으로 모여든 도망자들과 망명자들을
통해서 야만적인 피의 축제인 붉은 테러에 대한 공포가 민족의 상상력을
정열적으로 사로잡았다. 뮌헨의 민중지 하나는 1919년 10월에 그 시대의
공포심과 망상을 잘 보여주는 이런 기고문을 싣고 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할례받은 아시아 사람들은 어디서나 피를 뚝뚝 흘리
는 손을 쳐들고 우리를 집단으로 목조르려고 하는 슬픈 시대다! 이사샤르
체더블룸, 본명 레닌이라는 유대인이 행한 기독교도 학살은 칭기즈 칸을
무색케 할 정도이다. 헝가리에서는 그의 제자인 콘, 본명 벨라 쿤이 살인과
약탈의 훈련을 받은 유대인 테러집단을 거느리고 불행한 나라를 휩쓸면서
끔찍한 교수대 사이로 다시 이동 교수대 기계까지 끌고다니며 시민과 농부
들을 학살하고 있다. 훔쳐서 만든 궁중행렬, 화려하게 치장된 하렘이 명예
로운 기독교도 처녀들을 열 명 이상씩 유린하고 치욕을 주는 데 이용되고
있다. 그의 장교인 사무엘리는 지하감옥 한 군데서만 60명의 기독교 사제
를 잔인하게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의 몸을 찢고 살이 피범벅이
되도록 팬 다음에 그 시체를 토막냈다. 여덟 명의 살해된 성직자는 자기가
봉직하던 교회문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뮌헨도 이제...
이와 똑같은 잔혹장면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쪽에서 건너온 잔인한 소식을 들으며 얻게 된 공포는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으며 믿음직한 증언들도 있었다. 소련 비밀경찰
우두머리의 한 사람인 레테 라치스는 1918년 말에, 죄냐 무죄냐가 아니라
사회적인 소속계층이 바로 형벌과 숙청을 뜻하게 된 이유를 이와 같이 제
시하였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을 근절시켜야 한다. 여러분은 어떤
개인이 소비에트 권력에 해로운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필요가 없
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질문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이렇다. 즉
그는 어떤 계급에 속하고 있는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교육을 받았고, 직
업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피고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것이 붉은 테
러의 정수다."
이것은 국가사회당 지도부의 초기 호소문에 대한 답변처럼 들린다. "여
러분은 도시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로등 기둥에 내달리는 것을 보려고
하는가? 여러분은 러시아와 비슷하게 볼셰비키 살인 위원회가 각 도시에서
활동하기를 기다리려는 것인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처자식의 시체를 넘
어가려는 것인가?" 혁명의 위협이 흘러나오는 원천은 유럽 전체에 퍼져 있
는 몇 명의 배신자들이 아니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러시아, 히틀러가 표
현한 대로 '잔인한 권력 덩어리' 자체였다.
러시아의 새로운 혁명정부는 승리를 확신하고서 국제프롤레타리아의 단
결된 힘으로 독일을 정복하는 것이 세계혁명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한 걸음
이며, 승리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이것은 필립포
투라티가 '볼셰비키의 도취'라고 명명한 증세의 일부였다. 소비에트 밀정들
의 보이지 않는 활동, 계속되는 불안,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혁명, 1920년
루르 지방의 소요, 그 이듬해 중부 독일의 궐기 함부르크의 반란, 뒤에는
다시 작센과 튀링겐 지방의 반란 등, 소비에트 정권의 항구적인 혁명위협
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이되고 국민적인 거부감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위협은 특히 초기 히틀러의 연설에서 지배적인 것이었다. 그는
'붉은 학살사령부'의 활동, '살인집단' '볼셰비즘의 피의 늪' 등을 날카로운
색채로 묘사하였다. 그의 말로는 3천만 명 이상이 러시아에서 "고문을 받
아 천천히 죽어가고, 일부는 단두대에서, 일부는 기관총이나 그 비슷한 방
법으로 일부는 진짜 도살장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수백만 명의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굶주림의 파도가 계속 밀려오고 있
음을 안다... 그리고 이 재앙이 가까이 다가와 독일 위로 넘쳐들어오는 것
을 본다."고 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지식인층은 집단학살로 근절되어버렸고, 경제는 아예
망가졌으며, 네바에 있는 수천 명의 도이치 전쟁포로는 물에 빠뜨려 죽였
거나 아니면 노예로 팔았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에 '끝없이 계속되는, 영원
한 두더지 방식으로' 독일에서도 혁명적인 파괴를 위한 전제조건들이 무르
익어 간다고 했다. 언제나 되풀이되는 주장은 '러시아가 우리 앞에 있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이미 권력을 장악한 다음에도 히틀러는 경
력의 초기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국제적인 공산주의의 증오독재에 대한 두
려움'을 다시 이용하였다. "볼셰비키 혁명의 혼란이 성공하게 될 경우, 사
람으로 가득 찬 이 오래된 대륙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립니
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혁명 위협에 대한 거부감에 힘입어서 국가사회주의
는 정열, 공격성, 내적인 결속 등을 얻었다. 히틀러는 언제나 국가사회당의
목표는 "극히 간단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이 절멸과 근절"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도 "비할 바 없는, 천재적으로 만들어진 선전기관과 계몽
기관"의 힘으로, 그리고 "모든 마르크스주의 테러에 대해서 그보다 10배나
큰 테러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가차 없는 힘과 가장 잔혹한 결단력"의
운동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비
슷한 시기에 무솔리니가 '전사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새로운 운동은 그로
부터 '파시스트'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혁명공포만으로 저 격렬하고 집요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추세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도록 하고, 게다
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뜻하고 있던 혁명에 의문을 가지도록 만드는
에너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하고 원소적인 추진력이 덧붙여
져야 한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전통적인 표상을 향하여 훨씬 더
광범위한 공격을 펼치는 혁명의 전위로서 두려운 것이었다. 은유적인 전복
이념의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현상, 즉 근본적으로 '유럽의... 문화에 대한
선전포고'가 두려운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자체는 이러한 시대의 공포심
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극적인 이미지에 불과하였다.
유럽의 문명비관주의
공포심은 단순한 정치적 전복이념을 넘어서서 시대의 지배적인 기본감정
이었다.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위대성, 친근감, 왕조들, 극히 확실한 서류
등을 지닌 전쟁 이전의 유럽뿐 아니라 한 시대의 작별을 고했다는 막연한
느낌이 공포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낡은 지배형식과 아울러 삶의 친근한
형태들도 망가졌다. 불안, 정치화된 대중이 과격주의, 혁명의 혼란 등은 전
쟁의 후유증이었을 뿐 아니라, 낯설고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시대의 전조로
이해되었다. 새로운 낯선 시대에는 전에 유럽을 위대하고 친근하게 만들었
던 것들이 더는 소용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발밑에서 딸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제로 한 시대가 스스로의 과도기를 이토록 뚜렷하게 느낀 경우는 역사
상 매우 드물었다. 전쟁은 분명하게 이 과정을 촉진시켰고 변화과정에 대
한 표상을 아주 일반화시켰다. 이제 처음으로 유럽은 미래의 삶의 형식이
어떤 모양이 될까 하는 개념을 가졌다. 그 동안은 극소수의 기본감정이었
던 염세주의가 이제 시대 전체의 기본 분위기가 되었다. 시대는 유명한 책
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내일의 그림자 속에' 들어 있었다.
그 그림자가 모든 것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전쟁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 질서를 시대의 현상으로 만드는, 새롭고 거대한 조직화 형식들을
도입하였다. 합리화와 컨베이너 벨트, 기업합동, 재벌 등의 현상들은 모든
작은 존재들의 구조적인 무기력을 전례 없이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세
계전쟁 이전의 마지막 30년 동안에 대도시의 자영업자 수는 이미 절반 가
량이나 줄었다. 이제 그 숫자는 다시 급격하게 줄었다. 전쟁과 인플레이션
이 물질적 기반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개인을 빨아들여서 소비하고 내버
리는 익명의 경쟁사회에 대한 공포가 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게 되었
다. 수많은 당시의 상황분석에 보면, 이러한 공포가 확대되어 개인의 존재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는 공포가 되었다. 개인은 해체되어 기능이 되고,
인간은 '의식 없는 기계'가 되어서 조망할 수 없는 과정 속의 일부로 편입
된다. 그것은 광범위한 거부문학이 내용이었다. "존재는 다름아닌 공포로만
보인다."
규격화된 흰개미 같은 존재방식에 대한 공포는 점점 커가는 도시화, 엄
청나게 많은 집들, '잿빛 도시의 벽' 등에 대한 표현들에도 나타난다. 그리
고 고요한 골짜기에 부패처럼 번져나가는 공장 굴뚝을 가진 산업체에 대한
탄식 등에도 나타난다. 가차없이 계속되고 있는, '지구가 지상의 재료와 에
너지를 다 써버리는 단 하나의 공장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으면서 진보에
대한 믿음이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뒤집혔다. 문명이 세계를 파괴할 것이며
지구는 "농업지역이 섞여 있는 시카고"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항의의 말이
나왔다. (민족관찰자)지의 초기 발행본들은 이렇게 친숙한 것이 몰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의 기록이다. "우리 도시들은 얼마나 더 커질 것인가. 반대
의 움직임이 나타날 때까지, 막사들을 부수로 돌더미를 깨뜨리고 구멍들을
만들어 바람을 통하게 하고... 성벽들 사이에 정원을 만들고 사람들이 숨을
쉬게 될 때까지인가?"
미리 생산된 부분들을 조립해서 만드는 조립식 건축물, 르 코르뷔지에의
거주용 기계, 바우하우스 양식, 강철관으로 만든 가구 등은 '기술 신즉물주
의'로서 전통적인 의식에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의식은 이 새로
운 양식을 오직 '감옥 양식'이라고만 여겼다. 현대 세계에 반대하는 정서는
20년대의 광범위한 전원주택 운동, 특히 아르타만동맹에서 나타난다. 이 운
동은 땅과 결합된 단순한 생활의 행복을 '아스팔트 문명'에 대비시키고, 대
도시 대중세계의 인간성 상실에 맞서 자연과의 결합을 내세웠다. 갑작스럽
고도 도전적으로 ,타당한 규범과 결별하는 것은 도덕의 영역에서 가장 두
드러지게 나타났다. (공산주의의 성윤리)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다름아닌 '자본주의의 나쁜 소산'일 뿐이다. 혁명은 결혼제도를 없애고 낙
태, 동성애, 이중결혼, 근친 상간 등에 대한 형벌규정도 없앨 것이라고 했
다.
그러나 '규범적 도덕의 대표자이고 옹호자'라고 자처하면서 도덕에 대한
도전을 개인적인 위협이라고 느끼는, 광범위한 중간계층 시민들이 감정에
있어서, 초기 소련에서 생각하듯이 결혼이 단순한 등록업무라는 생각은 참
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적인 욕구는 갈증처럼 하나의 기본적인 욕
구이므로 다른 사정 없이 간단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여긴 '컵의 물 이론'
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폭스트롯 춤과 짧은 치마, '제
국 하수구 베를린'에서의 오락욕구, 성 병리학자 마그누스 히르쉬펠트의
'지저분한 그림들'이나 시대의 남성상 ('찰스턴 바지에 크레이프 신발창을
댄 고무신사, 올백으로 빗어넘긴 번쩍이는 헤어스타일') 등은 대다수 사람
들의 의식에 상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 돌아보면 역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다. 20년대의 도전적인 연극 무대에서는 부친살해, 근친상간, 범죄, 시대
의 저급한 취향 등이 시대를 비웃고 있었다. 브리히트와 바일의 오페라
(마하고니)에서 배우들은 무대 앞쪽 가장자리로 나와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적인 플랜카드를 보여주었다. '우리 도시들의 혼란 상황을 위해서!' '사랑을
사고팔기 위해서!' '살인자의 명예를 위해서!' '비열함이 영원히 계속되도
록!'
미술에서의 혁명적인 시작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완성되었다. 히
틀러 자신이 처음에 빈에서, 그리고 뒷날 뮌헨에서 참여하지 않은 증인이
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줌 몽상가들의 아웃사이더 행위로 여겨
지나쳐버렸지만, 전복, 혁명, 해체에 관한 그림들이 홍수를 이루게 된 지금
전통적인 유럽의 인간상에 대한 선전포고로 여겨지게 되었다. 야수파, 푸른
기사파, 다리파 혹은 다다 등은 혁명만큼이나 과격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인기있는 용어였던 '문화 볼셰비즘'이란 말은 이러한 내면적인 맥락의 의식
을 보여준다. 무정부주의, 멋대로 구는 것, 형식 없음 등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현대예술이란 '혼돈의 졸작' 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으
며, 이 모든 징후들이 뭉쳐서 복합적인 공포심이 되었다. 시대의 유행이던
염세주의는 이러한 공포심을 위해서 '서양 몰락'의 형식을 찾아냈다. 이 모
든 원한들이 뭉쳐져서 단 하나의 절망적인 방어의 행동이 되는 날을 두려
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계몽주의에 반대하는 거대한 경향
시대에 뒤진, 혹은 체면을 잃은 사회적, 문화적 형식들에 대한 파괴욕구
는 도이치 사람들의 보수적 기질에 특별히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저항감은 바로 독일에서 19세기 말의 분위기와 논점들과 결합될 수 있었
다.
기술적, 경제적 현대화 과정은 독일에 뒤늦게 나타났지만, 다른 어느 곳
보다 빠르고 과격하게 진행되었다. 도어스타인 베블렌이 요약한 것처럼 이
나라는 과격하게 산업혁명을 수행하였다. 그 정도로 빠른 발전의 "전례는
서유럽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따라서 이 과정은 더욱더 거친 극복의지를
일깨웠고 더욱 격렬한 반작용을 불러일으켰다. 널리 퍼진 생각과는 달리
독일은 성취와 뒤늦음, 봉건적 요소와 진보적 요소, 권위적 요소와 사회국
가적 요소가 거의 해체할 수 없도록 결합된 가운데 다채로운 모범이 되어
서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유럽의 가장 현대화된 국가로 간주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국민총생산은 두 배 이상이 늘어났고, 납세의무를 질 정
도의 수입이 있는 인구가 30퍼센트에서 60퍼센트로 늘었고, 강철 생산량은
1887년에 영국의 절반 수준이던 것이 대전 직전에는 영국의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식민지들이 정복되고 주식회사의 수는 2,413개에서 5,340개로 늘
었고, 함부르크 항의 화물 선적량은 뉴욕, 암스테르담에는 뒤지지만 런던을
앞질러서 세계 3위에 올랐다. 동시에 이 나라는 정확하고 절도있게 통치되
었으며, 온갖 부자유스런 잔재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정도로 내면적인 자유,
행정상의 정의, 사회적인 안정 등을 누렸다.
독일 제국의 전체 이미지에 나타나는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인 표현은 경
제외적인 현상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측량하기 힘든 봉건적 구
조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바쁜
나라, 성장하는 대도시와 산업지구 위에는 상당히 낭만적인 하늘이 덮여있
었다. 이 하늘의 어둠 속에 신화적인 인물들, 고대의 거인과 신들이 살고
있었다. 독일의 뒤처짐은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반계몽주
의, 게르만 민속학, 시민계급의 장식욕구 등이 여기에 작용하였다. 시민계
급은 스스로 그토록 쉬지 않고 열심히 추구하던 물질적 목적들을 넘어서
장식에 더욱더 높은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취향의 바
탕에는 여전히 현대세계에 대한 문화시민적인 저항감이 드러나 있었다. 그
러한 저항감은 정열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자극을 받게 된다. 새로운
산문적인 현실에 대한 저항의 몸짓은 회의적인 정신이 아니라 염세적, 낭
만적인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며, 반혁명적 저항을 위한 준비상태가 되어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저항은 특히 확장된 문명비판적인 분위기에서 알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파울 드 라가르드, 율리우스 랑벤, 오이겐 뒤링 등이 대표하는 문인
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불쾌감은 일반적인 문
명위기의 분위기 징후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대의 재치없고, 실용적인
낙관론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에 그러한 문명위기의 분위
기는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보였다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 행동파, 혹은 모
라와 바레스의 선언에서 공감과 추종자를 볼 수 있다. 가브리엘 다눈치오,
엔리코 코라디나, 미구엘 우나무노, 디미트리 메레슈코브스키, 블라디미르
솔로브요브, 크누트 함순 , 야콥부르크하르트,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등
도 각각 아주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슷한 두려움과 저항을 표
현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독일을 그 우직한 은둔주의에서 갑작스럽게 현대성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계속 고통스러운 단절과 이별을 요구하였던 저 급격하고 자른 듯
한 변화는 이곳의 저항이 유럽 다른 어떤 곳보다도 과격한 음조를 갖도록
만들었다. 현실에 대한 과격한 두려움과 혐오감은, 이미 사라져버린 낙원의
질서를 향한 낭만적인 그리움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전통도 아주 멀리서 온 것이다. 문명화 과정의 '황폐화'에서 고통
받는 것은 루소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불쾌감을 표현한 사람들은 진보를 경멸하였고, 어느 정도
긍지를 가지고 시대에 뒤처진 것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철저히 시대에 맞
지 않는 관찰자들이었다. 라가르드가 쓰고 있듯이 이런 사람들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독일을 보고 싶어하였다. 자
기들에게 마주서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 그들은 오만한 경멸을 드러냈으며
'외눈박이 이성'을 비웃었다. 부분적으로는 예리하기도 한 비합리주의로써
그들은 주식거래, 도시화, 강제접종, 세계경제, 실증과학 등에 반대하였고,
'빨갱이'와 최초의 비행 시도에 반대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대세계 전
체의 해방과정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현상들을 파국에 이른
'영혼의 몰락'이라는 총체적 이미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분노한 전통의 예
언자'로서 파괴과정에 정지를 명령하고 "옛날의 신들이 다시금 파도에서
떠오르는" 날이 오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들이 현대세계에 마주 세운 가치관은 자연성, 예술, 과거, 귀족주의, 죽
음에 대한 사랑, 강한 개성의 권리 등이었다. 특이하게도 도이치 문화의 붕
괴를 고발하는 항의는 자주 제국주의적인 사명의식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공포는 공격으로 바뀌고, 절망은 위대한 것에서 위로를 구하
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대추세를 반영한 가장 유명한 책은 율리우스 랑벤
의 (교육자 렘브란트)였다. 그것은 1890년에 출간되었는데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서 2년 만에 40판을 거듭하였다. 거대한 공포, 반현대, 민족주의적인
소명에 대한 망상 등을 다룬 극단적인 문서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는 이 책
자체가 정열적이고 분노한 위기의 표현이라는 사실 뒷받침해준다.
이 반문명적인 감상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된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낸
것은, 사회적 다원주의와 종족이론들의 경우에도 비슷했지만, 반민주적인
이념들과 결합되면서였다. 반문명적인 감상주의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의 원칙에서 정치질서를 얻은 자유주의적인 서구사회의 몰락을 진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표현도 전유럽적인 성격을 가졌다. 줄리앙 방다는 뒷날 이
렇게 썼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1890년경의 문필가들은 "절대적
권위, 기율, 전통, 자유정신의 멸시, 전쟁과 노예제도의 도덕적 정당성 등의
신조가 자부심 강하고 굽히지 않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놀
라울 정도로 날카롭게 의식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신조가 감상적인 자유주
의와 휴머니즘보다 단순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였다."
현대성의 문제는 온갖 문학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지적인 소수
계층의 문제였지만-다시 독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반문명적 감
상주의의 정서는, 특히 그 정서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정서
를 몽상적이고 순수하게 표현하였던 젊은층의 운동을 거치면서 점차 지속
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도이치
사람들의 성향은 계몽주의에 반대하고, 계몽주의의 결과라고 오해되고 있
는 사회의 혁명에 반대하고 있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존경심은 과거
에 존재한 적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뀌려는 경향을 가졌다.
심정과 정신은 기존의 것으로 가득 차서 미래와 새로운 목적을 위한 자리
가 남지 않을 정도다. 감정 숭배가 이성 숭배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마지막으로 시대의 반문명적인 정서는 반유대주의와 결합되었다. 헤르만
바르는 전 유럽에 걸친 조사의 결과 "도이치 반유대주의는 반동적이다."라
고 적고 있다. "산업발전에 대항하는 소시민의 폭동이다." 유대인과 모더니
즘의 동일시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자본주의의 경쟁체제에서
유대인이 특별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온갖 공포의 가장 강력한 근거였다. 베르너
조바르트 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시키는 것이 유대인의 사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아직도 보수적인 초기 자본주의 조직의 찌꺼
기를 없애고, 최후의 수공업 및 수공업적인 소매방식을 없애는 것"도 역시
유대인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발전을 배경에 놓고 보면 전통적으로 종교적 동기를 가진 유대인
에 대한 증오가 19세기 후반기에 생물학적인 혹은 사회적인 근거를 가진
반유대주의로 발전하였다. 독일에서 특히 철학자 오이겐 뒤링과 실패한 언
론인 빌헬름 마르는 ((비종파적인 관점에서 관찰한, 게르만에 대한 유대의
승리, 패배자여 슬퍼하라!)는 특별한 제목을 가진 책에서) 이러한 경향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서 애ㅆ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유럽 전체에 대해서도
타당한 반성이었다.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분명히 프랑스보다 더 강하지 않
았다. 그리고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이중왕국의 반유대주의보다 훨씬 약했
다. 그래서 당시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 출판물들이 그토록 널리 퍼져도
이념 자체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다고 탄식하곤 했다. 그러나 비합리
적인 동경이 주인 잃은 개들처럼 이리저리 떠돌던 시절에 반유대주의는 바
로 절반의 진실만을 가진다는 이유로 광범위한 불만을 담는 그릇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적인 크기로 확대된 불안의 표현형식에 불과하였다.
다른 누구보다도 리하르트 바그너가 모든 현상들에 나타나는 현대세계의
탈마법화 과정에 반대하면서 예술의 마법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분
위기를 신화적으로 번역하여 작품 속에서 압도적인 효과를 내도록 만든 것
이 바로 그의 작품의 효과와 반항의 원천이었다.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 황
금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의식, 종족적인 두려움, 반물질적인 의도, 천박한
자유와 평등의 시대에 대한 경악, 다가오는 몰락의 예감 등이 바로 그의
작품에 나타난 시대분위기였다.
전쟁은 시민 시대가 자기 자신의 반항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마구 풀어놓
고 과격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황폐한 문명의 일상에서 사라져버린, 들어보
지도 못한 자기상승의 가능성을 존재에 되돌려주었으며, 폭력을 신성한 것
으로 만들고 구조해체에 승리를 마련해주었다. 에른스트 융거가 끈 것처럼
화염방사기로 이룩된 '허무에 의한 거대한 청소'였다. 전쟁은 자유주의적이
고 인문주의적인 문명이념의 거부였다. 다시금 유럽 스타일의 폭넓은 변용
문학에서 불려나온, 다양한 개혁이념의 출발점이 된 전쟁 체험의 마적인
힘은 바로 이러한 체험에 그 원천을 두고 있었다. 동시에 전쟁은 그 후계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성급하고 고독한 결정의 감각, 절대적인 복종
과 일치단결한 마음의 감각을 가르쳐주었다. 의외주의 질서의 타협적 성격,
허약한 결정력, 빈번한 마비상태 등은, 전쟁에서 완벽한 군사적 업적집단의
신화를 불러온 세계에게는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하였다.
베르사유의 배신
이러한 맥락들은 어째서 민주공화국과, 비록 패배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었다고 해도 베르사유 조약 체계 속으로 독일을 편입시키는 것이 쉽지 않
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반문명적인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민
주공화국이나 베르사유 조약이란 정치상황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자기 민
족에 대한 하나의 죄악, 형이상학적인 배신행위, 깊은 불충행위로 여겨졌
다. 그것은 낭만적이고 생각이 깊고 비정치적인 독일을, 순간의 입장을 위
해서 서유럽적인 문명이념에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민족관찰
자)는 베르사유 조약을 '매독평화'라고 불렀다. 그것은 매독처럼 "짧은 한
순간의 금지된 쾌락에서 생겨나와 조그만 종기로 시작되어서 점차 사지와
관절로 퍼져나가서 마침내 죄인의 심장과 뇌속까지 덮치는" 질병이라는 것
이다.
'체제'에 대한 정열적이고 근본적인 저항은, 친권, 진보측의 선동, 계몽의
불길, 통속성, 부패, 복지를 찬양하는 '문명의 제국주의' 등에 대한 참여거
부로 나타났다. 당시 수많은 고발장에서 충성, 신의 은총, 조국애 등과 같
은 도이치 이상들은 '혁명과 혁명 이후 시대의 태풍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대신 '민주주의, 폭로운동, 거침없는 자연주의, 동지애적
결혼' 등이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공화국이 계속되는 동안 언제나 빌헬름 시대의 반문명적인 출발점을 이
어받은 우파 지식인 쪽에서 소비에트 연방, 혹은 정확하게 말해서 러시아
와의 결속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게 된다. 러시아는 어머니의 땅, 심정의
땅, '제 4차원', 기대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내부의 영
국'에 대한 전쟁을 촉구하였다면, 민족의 영적인 동일성을 찾으려는 저항의
기수, 에른스트 니키쉬는 이렇게 썼다. "눈길을 동쪽으로 돌리는 것만으로
이미 도이치의 각성이다... 서쪽으로 가는 것은 도이치의 몰락이었다. 동쪽
으로 돌아서는 것은 도이치이 위대함을 향해 다시 상승하는 일이 될 것이
다." 서유럽의 '천박한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프로이센-슬라브 원칙'을 내
세웠다. 유물적이고 탈신화된 서유럽 세계를 통해서 도이치 본질이 압도될
까 하는 두려움이 여기서는 공산주의 세계지배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강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전후 처음의 상황은 혁명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반문명적인 원한을 활
성화시켰다,. 그 두가지는 합쳐져서 독자적으로, 그러나 번갈아가며 상대방
을 밀쳐올려 주면서 비상한 역동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밑바탕까지
흔들린 사회에서 생겨난 증오와 방어 콤플렉스와 결합되었다. 이 사회는
황제의 영광, 시민질서, 민족적 자의식, 복지, 권위, 사회적인 상하 체계까
지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분노에 사로잡혀 부당하게 잃어버린 것으로 보이
는 것을 되찾으려고 하는 사회였다.
이런 전반적인 불만은 충족될 길 없는 다양한 집단 이기주의를 통해서
커지고 점점 과격하게 되었다. 특히 점점 늘어가던 샐러리맨 계층은 전체
적인 비판의 거대한 몸짓이 특별히 민감하였다. 산업혁명은 이제 처음으로
사무실을 기습하여 '자본주의의 하사관'들을 '현대적 노예제도'의 마지막 희
생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노동자와는 달기 자기들만의 계급
의식이나, 아니면 현존질서가 붕괴될 경우 자기들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일종의 유토피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대기업, 백화점, 합리화된
경쟁자 등에 대해서 공포심을 느낀 중간층 상인들 역시 적잖이 민감하였
다. 전통적으로 행동이 느리고, 방책도 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시대에 뒤떨
어진 구조에 붙박여 있던 광범위한 농업계층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지식
인층과 예전의 견고한 시민계층도 사회가 프롤레타리아화하는 이 거대한
궤도에 자신들이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마찬가지 기분을 느꼈다.
생계대책이 없으면 "금방 쫓겨나고 신분이 추락하고 실업자가 된다. 그것
은 공산주의자와 같이 되는 것이다." 라고 당시 설문지에 어떤 사람이 썼
다.
인플레율, 자살자 통계, 파산 등에 대한 어떤 통계도 실업, 빈곤, 실직 등
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혹은 아직은 무엇인가
를 가지고 있지만 수없이 쌓인 불만의 폭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근심을
표현해주지 못한다. 공공기관들은 언제나 허약한 태도로, 흔들리는 기반 위
에서 마구 뒤섞인 집단 감정에 대항하여 어떠한 안심도 제공하지 못하였
다. 두려움은 이제 라가르데와 랑레벤의 시대처럼 무기력한 말만으로 국한
되지 않았다. 전쟁이 공포심에 무장을 시켜준 것이다.
일부는 개인 주도로, 일부는 위장된 국가기관 주도로, 특히 공산주의 혁
명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민방위대와 의용군은, 상황 전체에 대한
막연하지만 확고한 저항심리 속에서 자기들을 새로운 질서로 안내해줄 어
떤 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밖에도 처음에는 군대 에너지를 저장한 저수
탱크 같은 대규모의 귀향군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전후에
도 군대막사에서 목적 없는 군인생활을 계속하였다. 어쩔 줄 모르는 태도
로 청춘의 야망이었던 전쟁의 꿈과 작별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전선의 참
호 속에서는 불확실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윤관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단하게 시작되고 있는 이 평화시대에는 의미 같은 것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옛날 적들의 찌꺼기에 밀려가는 이토록 허
약한 정부를 위해서 4년 동안이나 드높은 이상을 가지고 전선에서 싸우고
고통받았던 것이 아니었다. 귀향군인들은 전쟁을 체험한 다음 이제 시민적
일상에서 자기들을 추락시키는 힘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파시스트 유형 히틀러
히틀러는 처음으로 이러한 불만들, 시민들의 불만과 군인들의 불만을 한
데 합치고 거기서 영도력과 추진력을 찾아냈다. 실제로 그의 출현은 이 모
든 불안, 염세주의, 이별과 자기방어의 느낌들을 종합한 것처럼 보인다. 그
도 전쟁 중 강력한 구원 및 성장체험을 쌓았다. '파시스트적인' 유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그런 유형이었다. 그가 얼마간 망설이면서 활동을 시작
한 뒤로 급격하게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한 추종자들 중 누구도 히틀러 자
신만큼 심리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인 추진력을 드러낸 인물은 없었다.
그는 그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들의 대표자였다.
이미 초년의 체험들이 그에게 강력한 공포의 체험을 마련해 주었다. 그
것은 그의 사고와 감정의 전 체계에 각인되었다. 그의 모든 말과 반응의
배경에서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모든 것 뒤에 공포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고, 공포는 일상적이면서도 우주적인 차원을 보였다. 린츠의 대부, 대모
와 아우구스트 쿠비체크, 그라이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초기의 관찰자들
은 그가 창백하고 '깜짝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것은
일찍부터 환상적인 생각들의 토대가 되었다.
낯선 사람이 건드리는 것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일이나, 사람을 극단
적으로 불신하는 것이나, 뒷날 점점 강해지는 결벽증 등은 바로 여기에 근
거하고 있다. 성적인 오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어떤 형태든 전염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같은 콤플렉스에서 나온 것이다. "미생물들이 나를 공격한
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도이치 운동이 표방했던
외세에 대한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유대인이 메
뚜기 떼처럼 덮여'오는 것, '도이치 사람들이 깜둥이로 변화되는 것', 도이
치 사람들이 '독일에서 쫓겨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근절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민족관찰자)에 그는 이른바 프랑스 병사의 시를 게재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후렴구를 가진 것이었다. "도이치 사람들아. 우리가 너희 딸들을 소
유하리라!" 미국의 기술, 슬라브인의 출생률 증가, 대도시, 제한도 없고 해
로운 산업화, 국민의 경제적 낭비, 익명의 주식회사, 진흙창 같은 대도시
향락문화, 그리고 푸른색 초지와 녹색 하늘을 그려서 '민족의 영혼을 죽이
려고'하는 현대 예술 등에 대해서도 불안감이 있었다.
이러한 부패과정을 막아보려는 확고한 의지에서 히틀러는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지도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광적인 배타성이 그를 다른 사람
과 구별시켜준다. 그는 이제껏 느낀 공포의 모든 요소들을 단 하나의 원인
으로 돌렸다. 거대하게 쌓아올린 공포체계 한복판에 검은 ㅌ복숭이 유대인
의 영원히 오염시키는 모습이 서 있다. 나쁜 냄새가 나고, 입맛다시며 금발
처럼, 아리안족보다 '종족적으로 더욱 강한' 유대인이었다. 이렇게 제압당한
다는 고정관념에 깊이 사로잡힌 채 그는 독일이 음모의 대상이라고 여겼
다. 볼셰비키 당원들, 프리 메이슨, 자본주의자, 예수회 등이 사방에서 포위
하고,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전략적으로 '피와 돈에 굶주린 유대인 폭군
들'의 명령을 받으며 독일 멸망작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세계자본의 75퍼센트를 이용하고, 주식과 공산주의를 지배하고
있으며, 황금 인터내셔널과 붉은 인터내셔널을 장악하고, 산아제한과 이민
사상을 전파하고 있으며, 국가들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고, 종족을 오염시
키고, 형제살해를 조장하며, 내전을 조직하고, 천박한 것을 정당화하고, 고
상한 것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 운명의 조종자'였다. 전세계가
이 '히드라의 마수의 걸려'들어서 위험에 빠졌다고 히틀러는 외쳤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보여주었다.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독'을 보았고, 유대인들이 '구더기' '회충' '민족의
몸을 파먹는 독사'라고 여겼다. 공포를 표현할 때 가장 재치 있고 우스꽝스
러운 표현들을 이용하고, 그러한 표현들은 인상적인 혹은 매우 지속적인
이미지들이 되었다. 그는'우리 영혼의 유대인화' '우리의 짝짓기 욕구의 배
금주의', 그리고 '거기서 유래하는 민족의 매독 감염'이라는 표현들을 찾아
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유대인이 공산주의 신앙고백으로 이 세계 민
족들을 정복하면, 그의 왕관은 인류의 죽음의 화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
면 이 혹성은 수백만 년 전처럼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대기를 가르며 흘
러갈 것이다."
지도자 이념
위태로운 조건 아래서 정치적으로 거대한 힘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에너지는 히틀러가 가세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파시스트 운동은 사회
적인 배경으로 보아 세 가지 요소에 기반하였다. 첫째 도덕적, 경제적, 반
혁명적 불만을 가진 소시민의 요소, 둘째 군사적, 합리적 요소, 셋째 독특
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라는 요소였다. 지도자란 혼란시에 명령을 내리는 질
서의 확고한 목소리이고,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할 줄 알며, 절망도 알지
만 구원의 방책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지도자 유형은 도이치 민중설화에 거슬러오르기까지 수많은 문학적 약속
들 안에 드러나 있었다. 역사상 불행한 수많은 다른 민족들의 신화도 그렇
듯이 도이치 민중설화도 수백 년 동안 잠에 빠진 채 산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돌아와서 민족을 구
하고 죄 많은 세계를 벌줄 것이다. 그리고 20년대에도 염세적인 문인들은
바로 이러한 동경과 연결된 수많은 주문들을 읊어대고 있었다. 슈테판 게
오르게의 유명한 시에서 그런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는 쇠사슬을 끊고 일어나 폐허에 질서를
일으키고, 길잃은 자를 채찍질하여 올바른 곳으로
돌려보내다. 그곳에선 위대한 것이 다시 위대해지고
주인이 다시 주인이 되고, 기율이 다시 기율이 되다. 그는
민족의 깃발에 참된 상징을 덧붙이도다.
폭풍과 거친 신호를 뚫고 안내하시고
새벽 여명에 충실한 부하들을 일터로 보내
밝은 대낮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나니.
같은 시기에 막스 베버는 탁월한 지도자의 품성에 대한 이미지를 전재하
였다. 그는 국민적인 정당성, '맹목적인' 복종에 대한 요구 등을 들었다. 그
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미래의 비인간적인 관료주의 이 시대는 매우 다른
원천과 매우 다양한 동기에서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막연하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시에서, 그리고 과학적인 이성에서도 이러한 이념에 대
한 지지가 있었다.
파시스트 운동에서 발전해 나가는 지도자 이념은 다시금 전쟁의 체험에
서 활성화를 얻었다. 이러한 운동은 전통적인 의미의 정동활동이 아니라
군사적 세계관을 가진 단체, '정당들 위에 있는 정당' 이었다. 전쟁의 어두
운 상징과 확고한 얼굴로 단행한 싸움은 전쟁의 수단을 거의 고스란히 이
용해서 정치영역에서 전쟁을 계속하였다. "현재 우리는 계속적인 전쟁상태
에 있다."고 히틀러는 거듭 외쳤다. 이탈리아의 외무장관 치아노 백작은 파
시스트가 '전쟁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도자 숭배는 '항구적인 전쟁이라는 허구' 안에서 군사적 서열 원칙을
이 운동의 내부조직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지도자의 출현은, 초인간적인
높이까지 오도된 믿음의 요구이며 헌신의 열망으로서, 마법의 영역으로 올
라선 장교상이었다. 유럽의 모든 포도 위에 울려퍼진 행진의 발검음 소리
는, 사회문제들도 군대식 모델을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는 신념을 보여주었다. 비로 이러한 엄숙주의가 장래를 생각하는 젊은층에
게 강력한 매력 포인트였다. 그들은 전쟁, 혁명, 혼돈에서 '기하학적' 질서
계획을 찾아냈다.
동일한 동기에서 파시즘 운동은 준군대적인 방식으로 출현하게 된다. 즉
제복입기, 인사, 신고, 직립부동 자세 등 의ㄹ적 부분, 몇 가지의 기본요소
로 축약되는 요란한 상징성, 특히 여러 가지 형태의 십자가들, 노르웨의
'의외'의 올라프 십자가부터, 포르투갈 급진노동자들의 붉은 색 안드레아스
십자가에 이르까지 여러 가지 십자가들, 화살, 고대 로마의 속간(권위를 상
징하는 막대기), 큰 낫 등 모든 것이 끊임없이 깃발, 휘장, 군기, 완장 등에
그려졌다. 이러한 요소들은 코트와 깃을 치켜세우는 오래된 시민적 관습만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엄격하고 기술적이며 익명성의
윤리로 무장한 현대정신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동시에 제복과 군인
장식 아래서 사회의 대립들이 감추어지고, 시민사회 이상이 광채 없고 감
정 없는 상태를 뛰어넘는 것이기도 했다.
문화혁명으로서의 파시즘
무엇보다도 국가사회주의의 특징이 되는 소시민적 요소와 군사적 요소의
결합은 처음부터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에 독특한 이중성격을 부여
하였다. 국가사회주의 돌격대와 정치기구를 조직적으로 분리하였다는 점에
도 나타나며, 추종세력이 매우 다양했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확산
을 가진 이상주의자들이 사회적 실패자들, 절반 범죄자들이나 기회주의자
들과 어울려서 업적을 세우려고 열올리고, 보수윤리와 노동 혐오, 이익 찾
기, 비합리적인 행동주의 등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집단이었다. 대부분의 파
시스트 조직에 특징적인 엉터리 보수주의는 이 사실에서 유래한다. 망가지
고 모욕당한 세계질서를 지키려 한다는 주장하면서도, 힘을 얻게 되면 전
통과 무관한 변화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중세와 현대성의 혼합은 그들
의 특성이 되고 있다. 미래에 등을 돌린 전위의식과, 전체주의적 강제국가
의 아스팔트 위에서 민속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아득하게 빛
바랜 선조들의 꿈을 한 번 더 꾸고, 과거를 찬양하였다. 그것이 로마 제국
이었든, 에스파냐 카톨릭의 지배였든, 대 벨기에, 대 헝가리, 대 핀란드 되
었든 간에 과거의 몽롱한 윤곽 속에서 영토확장을 지향하는 미래의 약속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현대 기술수단의 모든 도움을 받은 가운데, 가장 계획적이고 냉혹하고
현실주의적인 기도로 이루어진 히틀러의 권력장악 출발은 복잡하고 소도구
와 상징들을 동반하였다. 그것은 초가지붕, 세습농지 농지계급, 민속춤, 태
양 축제, 어머니 십자가들이었다. 토마스 만은 그것을 '폭발하는 고대풍'이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반성을 모르는 반도의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히틀
러의 요구는 세계의 치유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는 절대로 그 좋던 옛
시절을 단순히 불러오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며, 그의 길을 눈 감고 따
라갔던 감상적인 반동주의자들이 생각했듯이 과거의 봉건제도를 불러오겠
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아니라 문명
화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의 자기소외 현상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경멸했던 경제적 혹은 사회적 방법으로 그러헥 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파시즘 지도자의 한 사람처럼 그는 사회주의를 '오른쪽
배 위편의 역겨운 자극'이라고 여겼다. 그의 의지는 피와 영혼의 어둠에서
내적인 갱신을 지향하였다. 정치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본능의 복권을 지
향한 것이다. 의도나 구호로 보면 파시즘은 계급혁명이 아니라 문화혁명이
다. 그것은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봉사한다고 주장하였다. 파
시즘이 공감을 얻은 것은, 인간정신의 자연적인 움직임에 따라 모든 잃어
버린 낙원이 있는 곳, 즉 그 옛날 신화적인 원초상태에서 유토피아를 찾았
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당시 지배적이던 미래에 대한 불안은 모든 신성한 것을 과거에 두려는
성향을 강화시켰다. 파시스트 '보수주의'에는 역사 발전을 혁명적으로 바꾸
어서 한 번 더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작용하였다. 이 모든
오류가 시작되기 이전의, 자연적이고 조화로우며 더 나은 시대로 돌아가려
는 소망이었다. 1941년의 한 편지에서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지난 1,500
년은 하나의 단절에 불과하며, 역사는 '그 옛날의 길로 되돌아' 가려고 한
다고 썼다. 예전의 상황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측면
에서 터져나오는 해체의 힘들을 보며서 그 옛날의 가치체계, 그 스타일, 그
도덕성 등을 회복하는 것이 히틀러에게 중요했다. "다가오는 혼돈을 막을
댐을 건설하자!"고 히틀러는 부르짖었다.
감정의 동일화
혁명적인 요소를 아무리 강조해도 국가사회주의는 한 번도 방어적 기본
자세를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의 본질이며, 툭하면 내보이곤
했던 대담한 검투사 자세에 모순되는 것이다. 콘라트 하이덴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도망중의 허풍'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상승에 대한 공포, 새
로운 경향과 모르는 별들에 대한 공포이며, 쉬지 않는 정신에 대항하며 새
로운 경향과 모르는 별들에 대한 공포이며, 쉬지 않는 정신에 대항하며 쉬
고 싶은 육체의 항의"라고 했다. 이러한 방어자세에서 히틀러는 대소련 전
쟁 발발 직후 자기는 이제서야 중국인들이 어째서 만리장성을 쌓였는지 이
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도 "중앙 아시아의 대중으로부터 새로운
동유럽을 지켜줄 거대한 성벽을 소망하였다. 방벽 안에서는 힘이 약해진다
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쳐주는데도 그렇다."
수많은 경쟁세력들에 비해서 파시즘이 우세했던 것은 그것이 시대위기의
본질을 더 날카롭게 파악했다는 것과 상관이 있다. 파시즘 자체가 바로 위
기의 징후였다. 다른 모든 정당들은 산업화와 해방과정을 긍정하였다. 오직
파시즘만이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를 함께 느꼈다. 그래서 파시즘은 사람들
을 소란스런 행동과 드라마 속에 몰아넣고 두려움을 잊게 만들려고 했다.
낭만적인 의식을 통해서 산문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잊게 만들려고 했던 것
이다. 횃불행진, 해골들, '하일'하는 외침과 전투의 외침, '삶을 위험과 짝짓
게 만들기' 등이었다.
파시즘은 과거를 암시하는 가장행렬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현대적인 과제
를 내주었다. 파시즘의 성공은 물질에 대한 관심을 맨 끝으로 돌리고 '정치
를, 개인들이 이념을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하는 영역'으로 취급한
데서 온 것이다. 대중에게 더 높은 기준임금을 제시한 다른 정당들보다 파
시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깊은 욕구를 제대로 맞춘 것이다. 파시
즘은, 공산주의나 자유주의 진영처럼 오직 이성과 물질에 관심만 따르는
인간은 괴물 같은 추상이라는 사실을 모든 경쟁자들보다 앞서서 제대로 인
식하였던 듯하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반동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전면적인 변화
에 대한 시대의 동경에 경쟁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오직 파
시즘만이, 모든 것이 완전히 잘못되었다. 세계는 엄청나게 잘못된 길로 빠
져버렸다는 시대의 감정을 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는 계급 정
당이며 낯선 세력의 보조부대라는 명성 때문에만 매력이 적었던 것은 아니
다. 공산주의는 바로 이 잘못된 길을 자기편으로 삼고 처방을 내놓고 있지
만, 실은 공산주의야말로 저 질병의 원인균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공산주의
에 치명타를 입혔다. 공산주의는 시민적 물질주의의 과격한 부정이 아니라
물질주의를 뒤집은 것이라는 것, 부당하고 무능한 질서의 극복이 아니라
오직 그 질서의 원숭이며 위아래가 바뀐 거울상이라는 생각이었다.
권위를 위한 궐기
히틀러의 분명한, 그리고 과도한 성공에 대한 확신은 자신이 기존 질서
에 대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혁명가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인
간의 본능을 다시금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본능과 결탁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이 꺾이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다. 본능은 '경제적인 이익에 맞서서,
여론의 압력에 맞서서, 심지어 이성에 맞서서' 언제나 스스로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본능을 끌어들인 일은 수많은 열등감과 인간적인 약점들을
드러냈다. 파시즘이 명예 회복시키려고 하는 전통도 실은 일그러진 전통상
이며, 파시즘이 축하하는 질서도 단순한 질서의 연극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파시스트 추종세력을 '인간 쓰레기'라고 얕잡아보았다면, 그것
은 인간과 인간의 욕구와 그 충동에 대한 좌익세력의 무지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좌익은 스스로 인간의 정신과 그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주장
하면서도 시대를 판단하는 데 수많은 심각한 오류들을 범하였다.
파시즘은 단순히 낭만적인 욕구에만 답변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의 불안
에서 생겨난 파시즘은 권위를 위한 원초적인 궐기, 질서를 위한 폭동이기
도 했다. 이러한 표현이 보여주는 모순이야말고 파시즘의 본질이다. 파시즘
은 궐기이며 복종이고, 모든 전통과의 단절이며 그 복구이고, 민족공동체이
며 가장 엄격한 위계질서이고, 사유재산과 사회적 정의이고 했다. 그러나
파시즘이 자기 것으로 삼은 그 모든 요청들은 강제로 만들어진, 강력한 국
가의 권위를 포함하였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민중은 권위, 인도,
질서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무솔리니는 확인하였다.
시대경향의 급전환
그는 '자유여신의 약간 부패한 시체'에 대해 말하면서 자유주의는 '사람들
이 떠나버린 사원의 문을 닫으려고' 한다. '현대의 모든 정치 체험은 반자
유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유럽 전역에서, 특히 1차 세
계대전 말에 자유주의적인 의회 체제로 바꾼 국가들에서 의회주의의 능력
에 대해 점차 더 많은 의구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국가들의 현대화가
단호하게 이루어졌을수록 이러한 의심은 더욱더 강했다. 과도기의 폭발적
이고 힘든 위기 조선에서는 자유 민주주의의 수단들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는 느낌, 자의식을 가진 대중에게 민주주의의 지도력은 너무 미약하다는
느낌이 사방으로 퍼졌다. 정당간의 쓸데없는 다툼, 정당 정권의 온갖 유희
와 힘없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정사실을 앞에 놓고
아무런 선택권도 없던 옛시절에 대한 동경이 되살아났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중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한 모든 중부와 동부
유럽 국가들, 그리고 상당수의 남부 유럽 국가에서 의회제도가 몰락하였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에스파냐, 포르투갈, 그리고 독일 등이었다. 1939년
에는 아홉 개 나라만 의회국가로 남았다. 그들 중 일부는 프랑스 제3공화
국처럼 '이상한 국가'였으며 일부는 군주제에 의해서 안정을 얻고 있었다.
'파시스트 유럽이 가능한 상황' 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국민의 공격적인 원한만이 세계상황을 전복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염증과 경멸과 체념의 분위기가 국경선에 관계 없이 자
유주의 시대에 작별을 고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반동적인 형태로도 진보
적인 형태로도 나타났으며, 탐욕스런 형태로도 사욕없는 형태로도 나타났
다. 1921년 이후로 독일에는 신념을 가지고 의회주의를 표방하는 의회의
다수파가 없었다. 자유주의 사상은 거의 옹호자가 없었고 수많은 잠정적인
적대자들만 있었다. 이러한 의회주의의 적대자들에게 하나의 동기, 불붙이
는 구호, 지도자만 나타나면 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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