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5월 24일에 히틀러는 빈을 떠나서 뭔헨으로 이주하였다. 이 때
그는 스물네 살이었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동경과 원한이 뒤섞
인 감정으로 바라보는 우울한 젊은이였다. 은둔시설의 실망들이 그의 본질
에 들어 있는 외곬적인 폐쇄적 특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빈에 친구도
없었다. 비현실을 지향하는 그의 성격에 어울리는 일이지만 그는 오히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인물들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했다. 리하르트 바그
너, 리터 폰 쇠너러, 뤼거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운명의 억압' 아래서
얻은 '개인적 세계관의 줄기' 는 몇 개의 절대적인 원한으로 이루어져 있
다. 그러한 원한들은 어두운 부화기를 지난 뒤 때때로 정열적으로 폭발하
곤 하였다. 그는 나중에 언급한 대로 '절대적 반유대주의자, 마르크스주의
세계관 전체의 적대자, 도이치 사람이 되어서' 빈을 떠났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자기 묘사가 언제나 그렇듯이, 자기가 일찍이 정치
적 판단력을 가졌다는 양식화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양식화 의도
는 (나의 투쟁)을 쓰는 동안 줄곧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
이치 제국 수도인 베를린이 아니라 뮌헨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은, 그가 아
직도 비정치적인 동기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혹은 예술적, 낭만적
동기에 더 많이 이끌렸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세계전쟁 이전의 뭔헨은 예술의 도시, 사랑스럽고 감각적, 인간적인 예술
과 학문의 중심지였다. "예술화가의 삶은 여기서 극히 합법적인 것이었다."
뮌헨은 잊을 수 없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강조되고 눈에
띄기도 하는 특성은, 위협적이고 현대적이고 바빌론 같은 베를린에 대립하
는 요소들이었다. 베를린에서는 사회적인 것이 미적인 것을, 이데올로기가
문화적인 것을, 즉 정치가 예술을 누르고 승리하고 있었다.
뮌헨은 빈의 영향권 속에 들어 있었으며 그래서 히틀러는 자신이 저항하
는 것을 도로 선택하였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그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베를린이 아닌 뮌헨을 선택한 것은 아주 일상적인 감정에
따른 것이지 실용적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막연한 문화영역
의 동기를 따른 것이다. 1931년판 (도이치 사회를 위한 안내서)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활동을 위해 더 큰 영역'을 찾아내려고 뮌헨으로 옮겨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제국 수도 베를린으로 가야 했
을 것이다.
절박한 우월감의 욕구
이미 빈 시절부터 그러했지만, 내면적인 게으름과 접촉 빈곤은 뮌헨 시
절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래서 때로는 그가 아주 거대하고 공허한 공간
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처럼 보인다. 분명히 그는 정당이나 어떤 정치 그룹
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고독하였다. 인간들을 연결시켜
주는 분위기를 가진, 지적으로 아주 불안한 이 도시에서는 고정관념도 독
창성의 증거라고 평가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
민족 사상은 가장 극단적인 변이형태까지도 추종자를 가졌다. 특히 경제
적으로 불안한 소시민 계층에 추종자들이 있었다. 반유대주의와 극히 상이
한 좌익 과격파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ㅁ헨의 풍토를 통
해서 온건해지고 즐겁고 수사적이며 친근한 형식을 지니게 된 것들이었다.
뮌헨 교외 슈바빙에는 무정부주의자. 보헤미안, 세계개혁가, 예술가, 턱없이
새로운 가치의 전파자들이 모여 들었다. 창백하고 젊은 천재들은 세계가
엘리트주의로 개편되기를 꿈꾸었고, 타락한 인류의 구원, 피의 등불, 정화
의 파국, 야만적 회춘요법 등을 꿈꾸었다.
커피집 등에서 인물이나 이념을 중심으로 뭉치던 중요한 모임들 중에서
중심을 이룬 인물은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였다. 그는 한패의 재능있는 추
종자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앞을 다투면서 시민도덕을 경멸하고, 청
춘, 본능, 초인을 찬양하고, 엄격한 예술적 이상이란 면에서 그를 모방하였
다. 또한 태도와 양식화된 인상에 이르기까지 그를 닮았다. 그의 제자들 중
하나인 알프레트 슐러는 도이치 영역을 위하여 잃어버린 갈고리 십자가를
재발견하였고, 루트비히 클라게스는 때때로 그와 가까워져서 '정신이 영혼
의 적'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비밀스런 몰락의 분위기를 분석하고 카이사르와 같은 인물들을 역사 속으
로 불러냈다. 그들은 피할 길 없는 서구문명의 몰락을 한 번 더 연기시켜
줄 것이라고 했다. 슈바빙의 지크프리트 거리에는 전에 레닌이 살았다. 지
금은 히틀러가 불과 몇 집 건너 있는 슐라이스하임 거리 34번지에서 재봉
사인 포프 크바르티어가 세든 집에 다시 셋방을 얻었다.
뮌헨에서도 빈처럼 지적인 불안이 당시 예술적 출발을 부추기고 있었지
만, 그런 것은 히틀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
르크, 파울 클레 등은 수바빙의 바로 이웃한 곳에 살면서 회와 예술에 새
로운 차원을 열고 있었지만 이 화가 지망생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
했다. 뮌헨에 머무는 몇 달 동안 그는 겸손한 그림엽서 화가로 남아 있었
다. 그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악몽과 두려움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
러한 것들을 예술영역으로 옮겨놓을 줄을 몰랐다. 진부하고 충실한 붓으로
그는 자신의 콤플레스와 공격성으로 이루어진 유령세계를 순수한 목가로
변화시켰다. 그 목가 세계는 성벽의 모든 돌, 풀포기 하나, 지붕의 기왓장
하나까지도 정밀하게 잡아냈다. 이런 충실한 붓놀림은 보상받지 않은 것,
이상화시키는 아름다움을 향한 비밀스런 요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적 능력이 불충분하다는 느낌, 자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이 내면
에 뚜렷하게 자리잡을수록 그는 더욱더 절박하게 자신의 우월성의 이유들
을 찾아낼 필요를 느꼈다. 냉소주의로써 그는 인간의 '무한히 원시적인 생
각'들을 알아보려고 했다. 어디서나 가장 천박한 충동의 작용을 찾아내는
성향은 냉소주의와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즉 부패, 배신적인 권력욕,
가차없음, 질투, 미움 등이 어디서나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세상
에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포착하려는 성향이었다. 종족적인 소속감도 개인
적인 우월감의 욕구에 도움을 주었다. 자기 길을 가로막는 다른 모든 프롤
레타리아, 떠돌이, 유대인, 체코인 등과 자신은 다르고 그들보다 더 낫다는
확신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반사회분자, 가난뱅이, 프롤레타리아 등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까
지 추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그를 짓눌렀다. 과거 남자 하숙집
에서 거의 곁을 스쳐갔던 수많은 모습들, 그 많은 망가진 희망과 개인적
몰락을 반영하고 있는, 독서실과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그
를 억눌렀다. 세기가 바뀔 무렵 빈은 세기말적 분위기를 가진 도시로서 아
주 지쳐빠진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의 학교는 정말로 그에게 무엇보
다도 몰락을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다름아닌 공포가 그의 성장기의 주도적인 체험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보
겠지만 마지막에도 그랬다. 공포는 그의 삶의 숨막히는 역동성의 추진력이
었다. 야무지게 작용하게 될 거의 세계상과 인간상, 냉혹함과 비인간성 등
은 몇 명 안 되는 증인들이 젊은시절 그에게서 관찰하였던 '깜짝 놀라는
본성'의 방어하는 몸짓이며 합리화 과정이었던 것이다. 어디를 바라보든 그
는 오직 탈진, 해체, 이별의 징후만을 보았다. 그리고 혈통의 오염, 종족적
인 우월감의 표지를 보았다. 또한 폐허와 파국을 보았다. 그는 이런 기본
분위기를 지나오면서 19세기의 특성에 속하는 염세적 생활감정을 받아들였
다. 이러한 생활감정은 19세기 진보의 신념과 즐거운 학문에 분명히 어두
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두려움을 특별히 과격
하고 무분별한 방식으로 느낌으로써 그것을 자기만의 독특한 것으로 만들
었다.
이러한 의식의 복합체는 그가 여러 해 동안이나 아무런 활동도 없이 극
단적인 백일몽에 사로잡힌 채 끊임없이 상상세계로 도망치곤 하던 세월을
보낸 다음 마침내 빈을 떠난 이유의 배경에도 나타난다. 빈에 대한 증오를
설명하는 그의 말은 에로틱하고 감상적인, 모든 도이치 운동의 이유들을
혼합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에 나타난 있던 인종 혼합이 역겨웠다. 체코, 폴
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의 온갖 민족의 혼합이 역
겨웠다. 그 중에도 인류의 영원한 분열분자인 유대, 유대인들이 역겨웠다.
이 거대한 도시는 혈통 오염의 화신처럼 보였다...
이 모든 이유들로 해서 점점 더 강하게 그리움이 생겨났다. 젊은 시절부
터 내 은밀한 소망과 은밀한 사랑이 나를 이끌었던 그곳, 마침내 그곳으로
가고자 하는 그리움이었다. 그곳에서 언젠가는 건축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운명이 내게 점지해주는 크거나 작은 테두리 안에서 민족을 위해 나의 정
직한 의무를 다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조국인 도
이치 제국에 내 고향을 합치려는, 타는 듯한 내 마음의 소망이 성취되어야
할 그곳에서 활동하는 행운을 누리고 싶었다.
실제로 그러한 동기도 빈을 떠나는 데 한몫을 했다. 그밖에 다른 생각들
도 이런 결심에 작용하였다. 그는 뒷날 '빈의 속어를 배우기'가 불가능했다
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도시에서 '순수하게 문화적인, 혹은 예술적
인 사건들의 영역에서 무기력의 온갖 징후들'을 보았으며 더 이상 머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건축가에게 있어서 '링 거리가 완성된 다
음에는 적어도 빈에서의 과제란 중요하지 않은 것들 뿐이기' 때문이었다.
병역 기피로 체포당함
그러나 이 모든 이유들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정상적인 것
과 의무에 대한 그의 거부감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다시 등장한다. 50
년대에 그의 병역관련 서류가 다시 발견되었다.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
로 진군한 직후 그는 매우 열성적으로 그 서류를 찾았다. 그 서류들은 그
가 군대기피, 즉 병역 의무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이 사실을
지우기 위해서 그는 뮌헨의 입국 신고소에 무국적자라고 신고했을 뿐 아니
라 이력서에도 빈을 떠난 날짜를 속였다. 신고서에는 1912년 초에 빈을 떠
났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듬해 5월에 빈을 떠났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병무청이 조사를 했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1913년 8월 22일에 조사를 담당한 린츠의 위병 차우너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곳이나 우어파로 출두하지 않았으며 다른 어떤
방향으로도 그의 거처를 알아낼 수 없음." 이전에 히틀러의 후견인이었던
레온딩 군수 요제프 마이프 호퍼도 히틀러의 소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
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두 명의 누이인 앙겔라와 파울라도 그에 대해서
는 "1908년 이후로 이무것도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빈의 조사 결과 그가
뮌헨으로 이주했으며 슐라이스하이머 거리 34번지에 산다는 사실의 밝혀졌
다. 1914년 1월 18일 오후에 놀랍게도 형사가 그곳에 나타나서 용의자 체
포했고, 다음날 그를 오스트리아 영사관으로 인도하였다.
그가 당면한 죄목은 무거운 것이었다. 히틀러는 오랫동안 안전한 줄 알
았는데 결국 판결받을 위험에 처하였다. 그것은 나중에도 여러 번이나 생
기는 일이지만 그의 인생행로에 전혀 다른 방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평범
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그가 특히 사회적으로 체면이 안 서는 병역기피
전과를 달고서 수백만 명을 징집하고 절반쯤 군대식 동원령을 내릴 수 있
었으리라고 가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셀 수 없이 여러 번 일어났지만 우연이 그를 도왔다.
린츠 병무당국이 출두날짜를 너무 짧게 잡아서 그는 소환에 응할 수가 없
었다. 소환날짜가 연기되면서 그는 세심하게 계산된 서면상의 서유서를 제
출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여러 장으로 된 '린츠 시청 제2과'에 보낸 사유
서에서 그는 자기 변명을 하였다. 그 사유서는 그의 젊은 날의 가장 포괄
적이고 중요한 문서이다. 이 편지는 그의 도이치 말 지식과 철자법이 상당
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개인적인 상황의 서술을 보면 그
의 빈 시절의 사생활이 전체적으로 불규칙하고 목적 없는 궤도로 흘러갔음
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소환장에서 예술화가라고 지칭되었습니다. 나 또한 그 이름을 정당
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일부만 옳은 것입니다. 나는 재산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버지는 국가공무원이었습니다) 계속 공부를 하려고 독립적 예술
화가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내 시간의 일부만 밥벌이에 쓰고
있습니다. 나는 우선 건축화가가 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의 수입은 별 것이 나리고 겨우 지출을 감당할 정도입니다.
나는 그 증인으로서 나의 세금증명서를 동봉하며 그것을 이곳으로 다시
보내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 서류에서 나의 수입은 1천 2백 마르크로
되어 있습니다. 너무 적다기보다는 너무 많은 편이죠. 그러나 정확하게 한
달에 1백 마르크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달마다 수입은 매우 유동적
인 것이고 지금은 매우 나쁜 상태입니다. 이 시기 뮌헨에서 미술품거래는
겨울잠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그가 내세운 설명은 뻔한 것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최초의 징집기한을 놓쳤다. 그래서 몇 번이나 자진
신고를 하였지만 아마 서류가 가는 도중에 분실된 것 같다는 내용을 적었
다. 완전히 자기 연민에 가득 찬, 비굴한 약삭빠름을 보이는 애처로운 이유
를 달아서, 그는 징집에 출두하지 못한 것을 빈 시절의 절망적인 생활사정
탓으로 변명하려고 하였다.
1909년 가을 나의 태만죄로 말하자면 이것은 내게는 정말 힘든 시기였습
니다. 나는 어리고 경험없는 인간이었고, 아무런 보조금도 없이 그렇다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누구에게서 돈을 받는 일도 없었고 하물며 구걸하
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없이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고 작품을 팔
아서 얻는 몇 크로네, 때로는 동전 몇 닢은 잠자리를 마련하기에도 모자랐
습니다. 2년 동안이나 나는 근심과 곤궁 이외에는 친구도 없었고,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허기 외에는 동반자도 없었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단어인
청춘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추억은 손
가락과 손과 발에 동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절을 기억하면 어
느 정도의 기쁨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장 나쁜 것을 넘어선 상태
니까요. 극히 힘든 곤궁 속에서, 절망보다 더한 환경 속에서 나는 내 이름
을 항상 깨끗하게 지켰으며 법과 내 양심 앞에 아무런 흠도 없이 나설 수
있습니다...
약 14일 후 1914년 2월 5일에 히틀러는 잘츠부르크의 심사위원 앞에 출
두하였다. 히틀러에 관한 소견이 이렇다. "병역의무와 보조의무에 적합하지
않음. 너무 약함. 무기를 다룰 능력 없음." 곧 이어서 그는 뮌헨으로 돌아
갔다.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뮌헨에서는 행운이 없지도 않았다. 나중에
그는 이 도시를 향한 '내면의 사랑'이 첫 순간에 자신을 가득 채웠다고 말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애착은 무엇보다도 "자연 그대로의 힘과 섬세한
예술적 분위기가 놀랍게 결합되었다는 점, 호프 양조장으로부터 오데온, 10
월 축제, 피나코텍에 이르는 이 단 하나의 선" 덕분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호감의 바탕에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전히 고독하게 슐라이스하임 거리에 웅크리
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결핍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재봉사인 포프와 그의 이웃과 친구들하고만 느슨한 교류가 있었다. 그들
모두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밖에는 출생지도 신분도 묻지 않고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슈바
빙의 맥주집에서 그는 유일하게 견딜 수 있는 교제형태를 찾아냈다. 그러
한 교제는 그에게 친근감과 낯선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그것은 쉽게 생겼
다가 쉽게 사라지는 맥주집에서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야기
하는 '작은 모임'들이었다. 거기서 그는 '대학나온 사람'으로 여겨졌고, 오스
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의 무너져가는 상태, 도이치와 오스트리아 결합의
필연성, 합스부르크 왕조의 반도이치, 친슬라브적인 정책에 대해서, 유대인
에 대해서, 혹은 민족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처음으로 반대 의견
보다는 더 많은 찬성을 얻었다.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이고 극단적인 의견과
등장방식을 대하고 그 뒤에 천재성이 숨겨져 있으려니 추측하는 환경에서
그는 전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 어떤 질문이 그를 흥분시키면 그는 드
물지 않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아무리 정열적
으로 떠들어댄 것이라고 해도 그 논리성으로 해서 눈에 띄게 되었다. 그도
또한 예언하고 정치적 발전을 예측하기를 좋아했다.
적중된 예감
벌써 거의 10년 전에 학교에서 도망치면서 그 이유로 들먹였던 결심은
그 사이 벌써 잊혀졌다. 이때쯤 이미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고
나중에 그는 확인해주었다. 물론 그 대신에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생계를 유지하고 대학공부 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러나 공부하겠다는 의도를 실현시
키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자기 방 창가에 앉아서 그는 그 지방
의 풍경을 담은 소품 수채화들을 그렸다. '호프 양조장' '젠들링 성문' '국립
극장' '식료품 시장' '사령관 저택' 그리고 다시 '호프 양조장', 여러 해 뒤에
그것들은 장관령으로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신고 대상품이 되었다.
때때로 그는 여러 시간 동안이나 시내의 카페에 앉아서 말없이 엄청난
분량의 케이크를 먹으면서 신문을 읽었다. 아니면 창백한 얼굴로 호프 양
조장 바에 앉아서 약간 흥분상태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때때로 그는 맥주
집의 어둠 속에서 이웃 테이블 풍경이나 시골풍의 인테리어를, 끼고 다니
는 스케치 북에 끄적거리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그는 옷차림에 세심한 주
의를 기울였다. 집주인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특힌 긴 프록코트를 좋
아했다. 그밖에도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그는 속을 알 수가 없
는 사람이었다. 부모의 집에 대해서, 친구들이나 여자에 대해서도 절대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는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기 보다는 사회적
으로 추락하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다. 요제프 그라이너는 당시 뮌헨에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 그에게 어떤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가 물었더니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곧 전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직업을 갖느냐 안
갖느냐 하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군대에서는 총지배
인이 강아지 이발사보다 더 나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예감은 적중했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전쟁 이전 몇 년 동안을 기
억하면서 아주 인상적으로 지진이 일어날 것 같은 당시의 분위기를 서술하
고 있다. 파악하기 힘들고 감당하기도 힘든 긴장감. 그것은 끊임없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장들이 이 책에서 문필적으로 성공
적인 부분들에 속한다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빈 시절에 이미 발칸 반
도에서는 태풍을 예고하는 저 후덥지근한 잿빛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리고 때로 밝은 섬광 줄기가 번쩍였다가 재빨리 끔찍한 어둠 속으로 사라
지곤 하였다. 그러더니 발칸 전쟁이 일어났다. 그와 더불어 최초의 바람이
신경이 날카로워진 유럽으로 불어왔다. 다가오는 시간이 무거운 악몽처럼
사람들을 짓눌렀고 열대의 더위처럼 푹푹 쪘다. 그래서 파국이 다가온다는
느낌은 계속된 근심의 결과 마침내 동력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늘이여, 이
제는 막을 길 없는 운명을 차라리 내려주소서, 최초의 강력한 번갯불이 땅
위로 떨어졌다. 뇌우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천둥 속으로 세계전쟁의
배터리가 진동하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아름다운 환상의 시간
1914년 8월 1일에 선전포고가 이루어졌을 때 뮌헨의 오데온 광장에서 환
호하는 군중들을 찍은 사진 속에 아돌프 히틀러가 보인다. 그의 얼굴과 반
쯤 벌린 입, 반짝이는 눈길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다. 이날은 그를 자기 존
재의 그 모든 당혹스러움, 어찌할 바 모름, 고독에서 해방시켰다. 그래서
그는 자기 감정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내게는 당시의 시간들이 화나는 청
춘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여겨졌다. 나는 오늘날에도 부끄러움 없이, 그날 폭
풍 같은 열광에 넘쳐 무릎을 꿇고서 하늘에 감사드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 전체가 느꼈던 감사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1914년 8월에
자신이 전쟁시넹 사로잡혀 있었다고 묘사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고 평
화가 사라지던 날을...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도덕적인 동
경'이 이루어졌다고 느끼기 위해서 빈둥거리는 예술가 생활의 출구없는 상
태가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깊은 권태에 빠져 있던 독일과 유럽 전체
의 지배적인 의식은 전쟁이 이런 규범성의 지옥에서 해방시켜줄 거라고 느
꼈다.
다시금 이 사실을 감안해보면 히틀러와 그의 시대 사이에는 매우 강력한
일치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철저히 시대의 필요성과 그
동경을 함께 나누었다. 다만 좀더 날카롭고 과격한 형태였을 뿐이다. 시대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에게는 절망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환호성
을 올리며 무기를 잡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근본적으로 한 시대가
종말에 이르렀고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려 한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시대의 탐미적인 경향에 맞게 전쟁은 정화 과정으로 여겨졌고, 평범함과
자기 혐오에서 벗어나려는 거대한 희망이기도 했다. '성스러운 노래들'에서
전쟁은 '보편적인 생명의 오르가슴'으로 찬양되었다. 그것은 혼돈을 만들어
내고 수태시킨다. 그 혼돈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유럽에서 빛들이 꺼
졌다는 사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경이
말했듯이 이별의 형식이었을 뿐 아니라 희망의 형식이기도 하였다.
8월 처음 며칠 간의 그림은 과격한 축제, 출발의 분위기, 기대의 기분을
포함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럽 대륙은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꽃들 속의 동원령, 거리 가장자리의 만세, 발코니 위에는 색색깔의 여름옷
을 입은 부인들, 국민적 축제 분위기이면서 동시에 즐거운 생동감이었다.
유럽의 민족들은 결코 얻지 못할 승리를 축하하였다.
독일에서는 이 처음 며칠 동안 견줄 데 없는 공동체 의식을 체험하였다.
요술 방망이를 내리친 것처럼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오던 대립이 사라지고
널리 알려진 도이치의 반목이 끝났다.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특성을 지닌
경험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옛날에 그것을 체험
한 어떤 사람이 말하듯이 그 처음 며칠 동안의 경험은 "그것을 함께 체험
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되었다.
거리나 사람들이 모여든 광장에서 목소리를 합쳐서 생겨난 표현은 1848
년 자유주의 혁명가의 독일 노래였다. 그것은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이 지
은 것으로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국가가 된 것이다. 8월 1일 저녁 베를린
성광장에 모여든 1만여 명의 군중을 향해 빌헬름 2세가 말한 문장이 환호
를 받았다. 그는 "어떠한 당파도 종파도 모르며, 오직 도이치 형제들만을
알 뿐"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의 가장 인기 있는 발언이 되었다. 서로 대립
하면서 고통받는, 내면 깊숙이 전통적으로 분열된 국민에게 그것은 잊을
수 없는 한순간에 수많은 장벽들을 걷어 냈다. 정확하게 50년 전에 이루어
진 도이치의 통일은 이제야 실현된 듯이 보였다.
그것은 아름다운 환상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통일의 느낌은 그러한 장벽
을 정말 없앤 것이 아니라 감추기만 했기 때문이다. 화해한 국민의 모습
뒤에는 여전히 낡은 대립들이 살아 있었고 터져나오는 환호성에는 제각기
다른 동기들이 숨어 있었다. 개인적이고 애국적인 소망들, 혁명적인 충동과
넌더리, 반사회적인 반항심, 헤게모니를 쥐려는 의도, 그리고 시민적 질서
의 일상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험심 많은 마음의 동경 등, 이 모든 것
이 보여들어서 단 한순간 조국을 구원하려는 헌신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히틀러의 느낌도 그렇게 끼여들어온 여러 가지 생각들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자랑스런 행복감으로 마
음이 부풀어올랐다."고 그는 썼으며, 그러한 기쁨은 마침내 국민으로서의
마음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8월 3일 그는 바이에른
왕에게 직소를 올려서 자신은 오스트리아 태생이지만 바이에른 연대에 지
원병으로 받아달라고 청했다. 그의 병역기피와 자원입대 사이의 모순은 실
은 모순이 아니다. 군대생활은 그를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강제상태에 밀어
넣겠지만 전쟁은 불쾌감, 이해되지 못한다는 감정의 고민, 방향 없는 삶으
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870~1871년의 전쟁에 대한 두 권의 애국주의적
인 민간서들은 애송이 시절 처음으로 읽은 몽상적인 책이었다고 했다. 이
제 그는 어린시절 책 속에 있던 모험의 광채로 빛나는 강력한 군대로 들어
가려는 것이었다. 지금 생애 처음으로 그는 거대하고 두려운 단체의 세력
에 동참할 의무와 기회를 보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인간의 곤궁과 동경과
두려움을 가르쳐주는 몇 가지 체험들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
적인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운명의 동일성에 대한 감정 없이 아웃사
이더로 남아 있었다. 이제 그에게 이 내면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가 직소를 올린 다음날 벌써 답장이 왔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편지를
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거기에는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리스트 연대라고
도 불리는 바이에른 제16 예비보병 연대에 출두하라고 되어 있었다. 히틀
러에게는 이제 "내 생애의 가장 잊지 못할, 가장 위대한 순간"이 시작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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