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로 넘어오던 시기에 빈은 여러 세기의 명성과 유산을 간직한 유럽
의 대도시였다. 그곳은 영광에 넘치는 모습으로 오늘날의 러시아와 발칸
반도 깊숙한 곳까지 지배하였다. 이곳으로부터 열 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
과 종족들로 이루어진 5천만 명의 인구가 통치되고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
다. 그들은 바로 도이치, 마자르, 폴란드, 유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
르비아, 이탈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루테니아 사람들이었다. '이
도시의 천재성'은 모든 대랍들을 부드럽게 만들고 다민족 국가의 갈등을
조정해서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능력에 있었다.
모든 것은 확고한 기반 위에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는 1908년 60년 간의 통치를 축하받으며 마치 국가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
는 품위와 지속성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나라를
지배하는 높은 귀족의 지위 또한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서 시민계층은 부를 이루기는 하였으나 이렇다 할 영향력을 얻지 못하
고 있었다. 이즈음, 정당과 선동가들은 아직 보통, 평등 선거권이 없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산업과 상업계의 소시민과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현대적 요소와 번화함을 보여주고 있어도 이미 어제
의 세계였고, 의혹, 부서짐,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의혹에 가득 찬 세계였
다. 20세기로 넘어오던 시기에 빈이 보여주고 있던 영광은 몰락의 분위기
가 짙게 물든 것이었다. 문학 속에까지 스며들어간 그 모든 소모적인 축제
에도 불구하고 밑바탕에는 한 시대가 생명력을 다 썼고 이제 오직 아름다
운 현상으로만 남게 되리라는 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피로, 패배감, 불안감,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지는 민족들간의 갈등, 지배계층의 근시안적인 행태
등이 풍부한 추억들로 가득 찬 건물을 서서히 붕괴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이별과 탈진의 분위기가 이보다 더
잘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시민시대의 붕괴를 빈보다 더 화려하고 우수에
넘쳐서 체험한 곳은 없었다.
다민족 국가의 위기
이미 19세기 말에 다민족국가의 내적인 모순이 점점 더 날카롭게 불거져
나왔다. 특히 1867년 헝가리가 저 유명한 '협상'에서 중요한 특별권을 얻게
된 이후로 더욱 심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은 수없이 틈이 나
서 갈라진 항아리를 낡은 철사줄로 겨우 한데 묶어 놓은 것이라고 이야기
되곤 했다. 그 사이 체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도이치 말과 대등하게
취급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불거져나왔다. 히틀러가 태어나던 해에는 제국 황태자인 루돌프가
마이얼링에서 자살을 하여 겨우 복잡한 정치적, 개인적 사정에서 벗어났다.
20세기 초에는 렘베르크의 대로에서 갈리치아의 총독이 암살당했다.
군대 기피자 수는 해마다 늘어만 가고, 빈 대학에서는 소수민족 학생의
시위가 일어났다. 시내 중심가인 링 거리에서는 더러운 빨간 색 깃발을 내
걸고 노동자 집단이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제국의 모든 분야에서 불안과
탈진의 조짐들이 보였고 그 모든 것은 오스트리아가 해체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1905년 독일과 러시아 신문에는 베를린과 페테스부르그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보도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국에 종
말이 올 경우에 이웃 국가들이 예상되는 영토확장을 위해서 미리 합의를
하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이 너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서 베를린
외무부는 11월 29일에 특별히 이 문제를 위해 이루어진 담화에서 오스트리
아 대사를 안심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이 시기의 여러 가지 경향들, 즉, 민
족주의, 사회주의, 종족의식, 사회주의, 의회주의들은 이 불안정한 국가에서
자연스럽게 특별한 폭발력을 보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정부가 사실상 용
납될 수 없는 승인을 통해서 개별 그룹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의
회에서 어떠한 법도 통과되지 못했다. 인구의 1/4을 차지하는 도이치 사람
들은 교육, 부, 개화상태, 등에서 다른 민족을 능가하였다.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언제나 배후에 머물러 있었다. 정부는 무심한
임시변통 정책을 펼치면서 도이치 사람들의 충성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
다보니 그들을 소홀히 대했다. 불안한 소수민족들을 만족시킬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방어 이데올로기
여기에 덧붙여서 각 민족의 민족주의는 전통적으로 침착한 도이치 지도
층하고만 부딪친 것이 아니었다. 전염병처럼 퍼져나간 민족주의는 1866년
오스트리아가 독일 정책에서 배제된 이후로 특수한 국가동일성 감정을 지
니게 되었다. 쾨니히그래츠(사도바, 비스마르크가 '작은 독일'이라는 구호
아래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벌이는 프로이센 대 오스
트리아 전쟁의 주요 전투지, 보헤미아 지역에 위치한다. 프로이센은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게 된다.) 전투는 오스트
리아의 얼굴을 독일에서 발칸으로 향하도록 만들었고, 오스트리아의 도이
치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소수민족의 지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분노하여 이중 왕국을 비난하였고, 특히 왕국이 친 슬라브 정책을 통해 외
국세력을 키우는 위험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의 분노
는 자기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이치'란 말은 이제 윤리적
인 내용을 가진 개념이 되었고, 지배자의 요구로 모든 낯선 것에 대항하는
무기가 되었다.
물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바탕에 깔린 두려움은 일반적인 적응
위기라는 광범위한 배경에서 보아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소리 없는 혁명
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중왕국 영토에서 특히 시대착오적으로 오래 지속
되어 온 낡고 세계시민적이고 봉건적으로 농민적인 유럽이 붕괴되고 있었
다. 그리고 그러한 붕괴와 결합된 실망과 갈등은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
니었다. 특히 시민 계층과 소시민 계층은 사방에서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
꼈다. 진보에 의해서 무서울 정도로 커지는 도시들에 의해서, 기술, 대량
생산, 경제력 집중 등을 통해서 위협당한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신뢰할 만
한 개인적 혹은 사회적 유토피아를 뜻했던 미래라는 개념은 이 시기부터
점점 더 광범위한 계층에게 불안이라는 범주로 바뀌었다. 빈에서만 1859년
이후 30년 만에 거의 4만 개의 수공업체가 파산였다. 이러한 불안은 점점
커지는 현실도피 욕구를 담은 수많은 저항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위
협받고 있는 세계의 구원론이라고 자칭하는 민족, 종족적인 방어 이데올로
기들이었다.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불안감을 누구에게나 친숙한 그림으로
바꾸어 보여주었다.
반유대주의
방어 콤플렉스는 특별히 유대인 배척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게오
르크 리터 폰 쇠너러의 '모든 도이치 당'부터 칼뤼거의 기독교사회당에 이
르기까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수많은 당의 강령에 공통을 나타났다. 19
세기의 70년대 초의 발생한 경제위기 동안에 반유대인 감정이 폭발하였다.
그런 감정은 나중에 갈리치아, 헝가리, 부코비나 등에서 이민 행렬이 늘어
나자 다시 생겨났다. 합스부르크 대도시(빈)의 온건하고 균형잡힌 영향력에
힘입어 탄생한 유대인 해방은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문에 더욱더 많은 유대인들이 동유럽에서 나와 자유로운 지역으로 들어왔
다. 1857년부터 1910년까지 대략 50년의 기간에 빈의 유대인 인구비율은 2
퍼센트에서 거의 네 배가 넘는 8.5 퍼센트로 늘어났다. 그것은 중부유럽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개별 구역, 특히 레오폴트 구역 같은
데서 유대인은 주민의 1/3을 차지하였다.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
활습관대로 전통의상을 입었다. 길다란 검은 카프탄을 입고 머리에 높은
모자를 쓴 그들의 낯선 모습은 신비스러운 세계의 두려움을 일으키면서 거
리의 모양을 이상하게 지배하였다.
유대인의 역사적 상황은 그들에게 특별한 역할과 경제적 활력을 부여하
였다. 그것은 선입견 없는 태도와 활동성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위기감과
상대를 능가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숫자가
고학력 직업으로 나가고 언론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빈의 거의 모든
대은행들과 상당수의 토착산업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었다.
광범위하게 전통과 감상과 절만에 사로잡힌 채 미래를 내다보는 구식의 시
민적인 유럽 사람들과 견주어볼 때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은 새 시대 대도시
의 합리적 스타일에 훨씬 더 들어맞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해서 위협받는다는 의식은 특별히 다음과 같은 비난의 형태
로 나타났다. 즉 유대인은 뿌리가 없고 파괴적이고 혁명적이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이란 없다. 그들의 '차가운' 지성은 도이치 사람의 내면성과 심성
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등이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수많은 유대 지식인들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 그들은 여러 세대 동안이나 배척받아 온 소수민족의
반항심과 유토피아의 성향을 가지고서 노동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그들이 원래 가졌던 역할에 거대한 모반이라는 치명적인 이미지가 합쳐졌
다. 두려움에 사로잡힘 영세 영업계층은 자본주의와 당시 다가오고 있던
혁명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사업도, 시민적인 지위도 유대인들에
의해서 일종의 이중공격을 받는다는 두려움이었다. 거기다가 종족의 특성
까지 가세하였다. (유대주의에 대항한 아리안 종족의 절망적 싸움)이란 제
목을 달고 있는 헤르만 알바르트의 책은 '사실기록'을 과거의 독일 상황에
서 인용하였다. 90년대 베를린에서 반유대주의가 유행했을 때도 그 책은
어떤 아웃사이더가 화가 나서 쓴 망상 정도로 여겨졌다. 반면 이곳 빈에서
는 광범위한 계층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내용이였다.
어머니의 죽음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던 이 도시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다음 몇 년 간
을 보내게 된다. 그는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빈으로 왔다. 자신을 압도할
만한 인상들을 갈망하면서, 어머니의 돈으로 지속했던 과거 몇 년 간의 사
치스런 생활을 더욱 화려하면서도 도회적인 환경 속에서 계속할 속셈이었
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
이 썼듯이 '자부심 강한 확신'에 넘쳐 있었다.
1907년 10월 그는 쉴러 광장에 위치한 미술 아카데미에 스케치 시험을
보겠다고 신청하였다. 그러면서 이 학교의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까다로운
요구조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는 첫날의 필기시험에 합격하
였다. 여기서는 120명의 지원자 중에서 33명이 낙방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종합평가를 담고 있는 등급기준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인다. '시험스케치
불가 판정, 다음 사람들은 다음 단계 시험에 응시할 수 없음. ...아돌프 히
틀러,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 1889년 4월 20일생, 도이치, 카톨릭, 부친 파
리, 실업학교 4년, 실력이 없고 시험스케치 점수 불가.'
그것은 직접적이고 냉혹한 추락이었다. 히틀러는 깊이 실망하여 아카데
미 교장을 찾아갔다. 그는 히틀러에게 건축공부를 해보라고 설득하였다. 동
시에 그의 그림이 '비난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 화가로서는 부적합'하
다고 했다. 히틀러는 이 결과를 나중에 '날카로운 일격, 번쩍이는 번개'였다
고 표현했다. 그리고 실제로 꿈과 삶의 현실이 이토록 급격히 벌이진 적은
없었다. 그가 실업학교를 너무 일찍 포기한 것도 이제와서 불리하게 작용
하였다. 건축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 합격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도 그는 이러한 교육과정의 전제조건이 '너무 어렵다'고 말하고
고등학교 졸업시험이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였다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척도로 보면 나의 예술가로서의 꿈은 실현가능하지 않은 것이었
다."
그토록 비참한 실패를 한 후 겸손하게 린츠로 돌아가서, 특히 최초의 실
패였던 이전의 학교로 돌아가기 싫어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
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빈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시험에 떨어진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풍당당하게 산책하고 오페라 구경을 가고
그밖의 거창한 몸짓으로 '연구'라고 부르던 수많은 어설픈 계획들을 그만두
고 진지한 활동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
져서 임종이 임박하였는데도 그는 돌아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 몇 주 동
안 근심스러운 태도로 아돌프는 '마치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자기
길을 가느라고 바쁘다고 말했다. 1907년 12월 21일 어머니가 죽은 직후에
아들은 린츠에 나타났다. 임종 전까지 어머니를 보살핀 의사는 "그토록 고
통스러워하고 슬픔에 찬 젊은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자신
의 말에 따르면 그는 울었다.
실제로 그는 실패를 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부터는 도피처도 없어졌다.
이 경험은, 그렇지 않아도 극단적인 성향을 더욱더 심하게 하여 고독에 휩
싸이게 하였으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였다.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이
상하게도 가족의 구성원 한 명을 향한 감정을 빼면 그가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애착마저도 끝나고 말았다.
후견인 아저씨, 전 빈으로 갑니다!
히틀러는 아마도 이러한 두 가지의 충격 때문에 빈으로 돌아가려는 생각
을 더욱 강하게 한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린츠에 있는 친척들의 물어보
는 듯한 눈초리, 질책들으로부터 대도시의 익명성 석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소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밖에도 고아연금을 타기 위해서는 공부를 끝
마칠 것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서 형식적 행사와 유산문제가
타결되자마자 그는 후견인인 레온딩 군수 마이르호퍼에게 가-그가 나중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오래 이야기하지도 않고- '거의 건방진 태도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후견인 아저씨, 전 빈으로 갑니다!" 며칠 뒤인 1908년 2월
에는 그는 린츠를 아주 떠났다.
하나의 추천서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의 주인인 막달레나 하니쉬는 당시 가장 유명한 무대장치가였던
알프레트 롤러와 아는 사이였다. 그는 궁정오페라의 장치감독 겸 미술실업
학교 교사이기도 했다. 1908년 2월 4일자 편지에서 막달레나 하니쉬는 빈
에서 살고 있는 자기 어머니에게 젊은 히틀러를 위해서 롤러와 만나도록
주선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는 진지하고 열성적인 젊
은이예요. 열아홉 살이지만 나이보다 성숙하고 신중하고, 친절하고 확고하
며 좋은 집안 출신이에요... 그는 훌륭한 것을 배우려고 굳게 결심하고 있
답니다! 지금까지 그를 쭉 보아왔지만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절대로 '빈둥거리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가 무가치한 사람을 위해서 애쓰
시도록 하고 싶지 않거든요! 좋은 일을 해 주세요." 며칠 지나지 않아서 룰
러가 히틀러를 만나볼 생각이 있다는 답이 왔다. 린츠의 집주인 여자는 다
시 편지로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어머니가 이 젊은이의 행복한 표정을 보
셨더라면 정말 수고한 보람을 느끼셨을 텐데요. ...그에게 어머니의 편지를
주고 롤러 감독의 편지를 읽게 했어요. 마치 편지를 외우려고 하는 것처럼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조용히 편지를 읽으면서 거의 경건하고 행복한 표정
을 보였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그는 편지를 내 앞에 도로 내려놓더
군요. 그리고 감사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어머니께 편지를 써도 되는지 내
게 물었어요."
이틀 뒤 날짜 적힌 히틀러의 편지는 아주 애써서 관청서기 필체를 흉내
내고 있는데 이것은 보존되어 있다. "지극히 존경하는 부인, 제가 무대장치
의 위대한 대가 롤러 교수님을 만나뵐 수 있도록 주선해주신 노고에 대해
서 이 편지로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로서는 외람되게도 부인
에게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해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런
데 부인께서 이토록 성과가 있는 행동을 취해주신 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
사드리며, 아울러 저에게 쓰라고 내주신 명함에 대해서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 번 더 깊이 감사하며 존경심으로 부인의 손에 키스를
올립니다-아돌프 히틀러."
사실상 이 추천서는 그를 위해서 꿈의 세계를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과 그림을 오페라의 장엄한 가상세계와 결합시켜주는 자유로운 예술가
생활로 안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롤러와의 만남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겨진 게 없다. 히틀러 자신은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경탄할 만한 사람이 그에게 일하면서 배우다가 가을에 다시 아카데미에 지
원하라고 충고했던 것이 분명하다.
히틀러는 다음 5년을 뒷날 자기 생애에 '가장 슬픈 시절'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많은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가 빠졌던 위기는
그의 성격의 특성을 만들어내고, 다시는 포기하지 않는, 돌처럼 확고한 성
취형식들을 찾아내도록 해주었다. 이 덕분에 행동을 갈망하는 그의 삶은
완고하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곤궁과 힘든 현실'이 이 시기의 가장 잊지 못할 체험이었다는 표현은 히
틀러 자신이 조심스럽게 삶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 위에 덧입힌 전설의
일부다. "나에게 있어서 이 사치스런 도시의 이름에는 5년 간의 비참과 곤
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5년 동안 처음에는 조수로, 다음에는
싸구려 화가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평소의 허기를 달래기에도 충분하지
못한 보잘것없는 빵을 위해서 일했다. 배고픔은 당시 나의 충실한 파수꾼
이었으며 유일하게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당
시 그의 수입을 계산해보면 처음 빈 체류기간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산과
고아연금 덕분에 그 자신의 수입을 빼더라도 매달 80내지 100크로네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배석판사의 한 달 월급과 같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이다.
잦은 공격성과 그 격렬함
2월 중순에 히틀러에게 설득당한 아우구스트 쿠비체크도 빈으로 왔다.
음악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함께 슈툼퍼 거리 29번지에 있는
마리아 차크라이스라는 이름의 늙은 폴란드 여자의 집 뒤채의 '위안 없고
가난한'방에서 살았다. 쿠미체크는 공부를 하였지만 히틀러는 이미 버릇이
되어버린 계획 없이 빈둥거리를 생활을 계속하였다. 언제나 자신이 자기
시간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점심 때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거리나 혹은
쇤브룬 공원을 산책하고, 박물관들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오페라 극장에 갔
다. 나중에 고백한 바로는 거기서 완전히 열광하여 그 몇 년 동안 (트리스
탄과 이졸데)만 30~40번이나 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책 속에 파묻혀서
독학자로서 마음내키는 대로 영감이나 변덕에 따라서 이것저것을 읽었다.
아니면 링 거리의 화려한 건축물들 앞에 넋을 잃고 서서 스스로 세우게 될
위풍당당한 건축물을 꿈꾸곤 하였다.
그는 거의 병적으로 공상에 빠져들었다. 깊은 밤까지 계획을 세우느라
열을 오리곤 했는데, 이 계획에는 실질적인 능력의 결핍, 아는 체하기, 참
을성 없음 등이 서로 다투어 나타났다. "그는 자기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벽돌이 '기념건축물
을 위해서는 견고하지 못한 것'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왕국을 부수
고 새로 지을 계획을 세웠다. 극장 건물, 성들, 전시회장 등을 구상했고, 알
코올 없는 국민음료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 담배 대용물을 찾으려 애쓰
고, 학교 운영 개혁계획도 세워보고 집주인, 관리 등에 대한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관심, 원한, 잘난 척하는 비전 등을 담은 '도이치 사람
의 이상국가'를 구상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도 이룩하지도 못했으면서 어떤 충고도 거부하고
가르침을 미워했다. 작곡 기법의 지식도 없이 리하르트 바그너가 중도에서
그만둔 피비린내 나는 근친상간을 다룬 오페라 (대장장이 빌란트)의 구상
을 게속 할 궁리를 하였다. 그는 게르만 종족의 전설적인 소재들을 다루는
극작가로 자처하고 (극장)혹은 (이념) 등을 썼다. 때때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으나 세부묘사에 치중한 작은 수채화들은 그가 느끼고 있던 압력을 보
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이 천재임을 입증해 보
이겠다는 초조감에 사로잡혀서 쉬지 않고 말하고 계획하고 몽상하였다. 그
러면서도 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떨어졌다는 말만큼은 방친구에게 하
지 않았다. 낮 동안에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 하고 물으면 그는 이
렇게 대답했다. "나는 빈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특별한 연구를 하고 있다."
모든 특이한 과장과 순수한 공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태도에서 이미 뒷
날의 히틀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자신의 말은 세계개혁 의지와 신분
상승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를 암시해주고 있다. 무기력가 지나친 긴장,
무관심과 발작적인 활동성의 독특한 결합이 장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쿠비
첵은 불안이 섞인 태도로 히틀러의 갑작스런 분노와 절망적인 발작을 적어
놓고 있다. 잦은 공격성과 그 격렬함, 분명하게 드러나는 무한한 증오감,
쿠비체크는 자기 친구가 빈에서 '완전히 규형을 잃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극히 격양된 흥분상태가 급작스럽게 좌절의 기분과 교차하곤 하였다.
그럴 때 는 부당함, 미움, 적대감만을 보디고, "자신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전인류에 고독하게 맞섰다. 그는 인류 전체에 의해 쫓기
고 기만당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디에나 "오직 그의 상승을 방해할 목
적으로 덫"이 쳐져 있다고 느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
1908년 9월에는 히틀러는 한 번 더 아카데미 회화반에 들어가려고 노력
하였다. 지원번호 24번에는, 그가 미리 제출한 작품이 시험의 기준에 합당
하지 않아서 '응시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더욱더 결정적인 이 거절은 한 해 전의 모욕적인 경험을 상기시키고 다
시 한 번 확인해 준 것이었다. 학교와 아카데미에 대해서 그는 일생 동안
줄지 않는 미움을 가졌다. 학교는 '비스마르크와 바그너'도 잘못 평가하고,
안셀름 포이어바흐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바보 같은 자식들'이나 학교를
다니고 '천재를 죽이기 위한'곳이라고 했다. 35년이나 지난 뒤에 사령부에
서 총통이며 사령관인 그가 전에 마을 학교 선생을 지낸 가난한 사람들을
놓고, 그들의 '더러운' 외양, '지저분한 칼라와 깎지 않은 수염 등'을 향해서
이런 장광성을 늘어놓을 정도였으니 그가 어느 정도의 모욕감을 느꼈는지
는 짐작할 만하다. 그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자기 정당화
의 욕구로 진정시키기 위해서 거듭 애쓰곤 했다.
예를 들면 그는 30년대 초에 당의 위기를 맞이하여 쓰게 된 공개편지에
서 자신에게 부당한 운명을 원망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돈 많은 부모의 자식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인생이
라는 가장 혹독한 학교에서 곤궁과 비참을 통해 교육받았다. 표피적인 것
을 중히 여기는 세상은 무엇을 배웠는가를 묻지 않고 언제나 어떤 증명서
를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는다. 수많은 우리 지식인들보다 내가 더 많은 것
을 배웠다는 사실은 한번도 관심을 끌지 못했고 언제나 내가 학위증이 없
다는 것만을 관심을 끌었다."
히틀러는 이 두 번째 실패 이후에 겸손하고 극단적으로 조용한 태도로
모든 사람의 눈에서 사라졌다. 결혼해서 빈에 살고 있던 이복누이 앙겔라
와 소식이 끊어졌고 후견인도 짤막한 우편엽서 한 통을 받았을 뿐이었다.
쿠비체크와의 우정도 동시에 끝나버렸다. 그가 잠시 빈을 떠나 있는 사이
히틀러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함께 살던 집에서 나가서 도시의 집 없
는 사람들의 숙소와 남자들만을 위한 하숙집에 숨어버렸다. 쿠비체크는 30
년이 지나서야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처음에 히틀러는 슈툽퍼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를 세냈다. 15
번 구역 펠버 거리 22번지 16호였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어느 정도의
열의를 가지고 그의 본질의 어두운 층을 특징짓고, 그의 삶에 전체적인 방
향을 제시해주는 이념들과 생각들의 공간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오랫동안
성격의 강인함과, 조숙한 천재성과 세상의 몰이해의 증거라고 해석했던 이
번 실패는 구체적인 의미와 구체적인 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즉흥적인 감정은 시민세계를 향했다. 시민사회의 성과규범, 그
엄격성과 요구에서 실패를 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성향과 의식을 보면 그
자신의 시민계층에 속하고 있었다. 그가 이제부터 시민사회에 대해서 가지
는, 수없이 거듭 표현된 분노는 그의 존재의 파라독스의 일부였다. 시민세
계는 사회적인 추락에 대한 공포,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에 대한 너무나
도 분명한 두려움에서 양분을 얻고, 또한 그것과 경계를 이루는 세계였다.
그는 9나의 투쟁)에서 예상 밖의 공개적인 태도로 '노동자 계층에 대한 소
시민의 적대감'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적대감은 그 자신에게도 나타났다.
그것은 '오래되고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이 계층으로 다시 추락할까 봐서,
아니면 그렇게 여기질까' 두려워서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양친의 유산의 일정액을 받을 수 있었고, 다달이 받는 보
조금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의 불확실성이 그를 억압하였다. 그는 옷차림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계속 도시의 오페라 극장, 카페 등을 드나들면서 그
자신이 언급한 대로 세련된 언어와 신중한 태도로 더 가난한 계층을 향해
서 시민적인 계급의식을 보여주었다. 뒷날의 수많은 관찰자들처럼 어떤 이
웃집 여자도 그가 친절하고 특별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눈
여겨 보았다고 했다. 이 빈 시절에 대한 또 다른 약간 불확실한 증언을 보
면 그는 이 시기에 제복을 입은 아버지 사진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
서 자신의 "작고한 아버지께서는 황제폐하의 세관장으로 은퇴를 하셨다."
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여주곤 했다고 한다
거부보다는 참여를
때때로 나타나는 적대적인 몸짓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방식은, 그가
본질적으로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있고 소속감의 필요를 느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시민계층의 기본적인 요구다. 자기가 일찍이 예술
과 정치 영역에서 '혁명가'였다는 그의 주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금 음
미해보아야 한다. 사실상 이 스무 살 청년은 시민세계와 그 세계관에 한번
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는 솔직히 존경심을 가지고서 그 영광과
부유함에 압도된 채 시민세계로 접근하였다. 린츠 출신의 몽상적인 관리
아들은 시민세계에 경탄을 하였지 그것을 뒤집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거부
보다는 참여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물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시민세계로부터 거부
당하고 깊은 모욕감을 느끼기는 하였으니 그렇다고 시민사회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특이한 이 초기 시절에서도 가장 특이한 사건
에 속하는 일이다. 이미 20년 전부터 유럽에 퍼지고 있던 체면을 중시하는
시민사회에 대한 수많은 고발이 그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스스로
굴욕받은 것을 사회적으로 정당화시키고 비판을 통해 시민사회에 앙갚음하
라고 도와주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고 나서도 이상스럽게 이런
시대적 현상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 사이 거의 유행이 되다시피 한 전
체적인 가면 벗기기 분위기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다. 그 시대의 모든 예술
적 흥분과 이념논쟁들, 그리고 지적인 모험심은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을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는 세기가 바뀌기 직전에 이러한 시작의 중심지의 하
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음악을 통해서 청춘의 위대
한 해방을 경험한 젊은이, 감수성 있고 항의하고 싶어하는 젊은이가 쇤베
르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가 자기 문하생들인 안톤 베베
른, 알반 베르크와 함께 바로 히틀러가 빈에 머물고 있던 시절에 '빈의 콘
서트 홀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게 된 이후로 가장 큰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구스타프 말러나 리
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서도 못 들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1907년 당시의 비평가 한 사람이 '음악세계의 폭풍 중심부'라고 불렀던 현
상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 대신에 그는 바그너나 브루크너 등 아버지
세대의 도취체험을 뒤쫓아가고 있었다.
쿠비체크는 1905년 (시도시집)을 냈던 릴케나 호프만스탈같은 이름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히틀러가 미술 아카데미
에 지원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분리파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구스타프 클림트, 에콘 쉴레 혹은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분리파 화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상도 받지 못했다. 그는 전전 세대에게서 예술감각을
자극받았고 안셀름 포이어바흐, 페르디난트 발트 뮐러, 칼 로트만이나 루둘
프 알트를 존경하였다.
원대한 계획들을 지닌 장래의 건축가는 자기 말대로 라면 몇 시간씩이나
매료되어서 링 거리의 고전적인 혹은 신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앞에 서 있
곤 했으면서도 바로 이웃하고 있는 새로운 건축의 혁명적인 주도자들에 대
해서는 전혀 몰랐다. 오토 바그너, 요제프 호프만, 아돌프 로스 등에 대해
서 아무것도 몰랐다. 아돌프 로스는 1911년에 미하엘 광장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왕궁 정문 바로 맞은 편에 매끈하고 장식 없는 얼굴을 가진 상사
건물을 완성해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뻔뻔스럽게 여겨지는 태도로
'장식과 범죄' 사이에 내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글을 썼다. 히틀러
는 그러나 빈의 살롱들과 귀족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양식에 대해서만 소
박하면서도 단호하게 열광하였다. 그는 예술에 나타나는 불안과 붕괴의 조
짐들을 못 보고 지나갔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 '예술적인 혁명의 결과를 겪
었던' 시대의 소란스러움이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숭고함이 격하되는 경향만을 감지했던 것 같다. 그가 쓴 글에 따르면 그의
시민적 본능으로는 놀라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는 어떤 낯설고 이상한 것
의 시작을 눈치챘던 것으로 보인다.
저항자로는 안 어울리는 사람
정치적 현실과의 첫 만남도 이상스럽게 그와 비슷한 조짐을 보이는 가운
데 이루어졌다. 그 모든 저항감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인 이념들은 그에게
조금도 매력이 없었다. 정치 분야에서도 그는 자기가 배척하는 질서를 옹
호하는 기득권자의 지지자로 나타난다. 이 거절당한 인간은 거절하는 쪽의
일을 자기 일로 여김으로써 자신의 굴욕감을 없앴다. 이러한 심리적 과정
은 히틀러의 성격에 하나의 단층선을 만들어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건축노동자 시절 어느 날 그는 점심휴식 시간에
'어딘가 한구석에서' 우유와 빵을 먹고 있었다. 그 때 노동자들 사이에서
들리는 격렬한 사회적 거부의 감정에 '극단적으로 '놀랐다. "그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민족이란 '자본주의' 계층의 창안이라고 거부하고,
조국은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부르주아 계급의 수단이라고 거부하
였다. 법의 권위는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다. 학교는 노예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리고 노예감독자도 만들어내기 위한 기관이다. 종교란
착취하도록 만들어진 민중을 우둔하게 만들려는 수단이다. 도덕은 멍청한
양 같은 참을성의 표지다, 하는 식이었다. 무시무시한 깊이의 진창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건축노동자들에 대항하여 그가 옹호하는 개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민족, 조국, 법의 권위, 학교, 종교, 도덕 등 거의 완
벽한 시민사회의 규범목록을 포함하고 있다. 그 자신 이 시기에 이런 규범
목록들에 대해서 최초의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일생 동안 여
러 차원에서 언제나 새로 나타나는 분열된 관계였다. 시민적 요소를 경멸
하면서도 그것과 연합한다는 정치적인 책략에도 나타나고, 예를 들면 여비
서들에게 핸드키스로 인사를 한다거나 오후 휴식시간에 총통사령부에서 그
들에게 달콤한 생크림 빵을 대접한다는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의식절차에도
나타나는 분열이었다.
온갖 반시민적인 원한을 가진 가운데 그는 시골의 왕처럼 '옛날식' 남자
의 면모들을 길렀다. 그러한 특성들은 열렬히 소망하던 사회적 소속감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젊은 히틀러의 이미지에서 오스트리아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특별한 권위의식이었다. 그러한 권
위의식을 가지고서 그는 시민이라는 특권을 옹호하였다. 모든 존재, 모든
활동에 사회적인 등급을 부여하려 하고, 지나칠 정도로 호칭을 중히 여기
는 사회에서 그는 극히 제한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신사'가 되
려고 했다. 그리고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시대의 저항적인 힘들에 합류
하지 못하자 오직 신사가 되고자 하는 생각 이외에는 달리 하지 않았다.
말투나 옷처럼 외적 행동방식의 선택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나 미적인 선
택들도, 별 거부감 없이 시민세계를 따르고자 하는 그의 욕구로 설명될 수
있다. 사회적인 비참보다는 사회적인 무시를 더욱더 힘들게 받아들였으며,
그가 낙담했다면 세계 질서의 잘못으로 고통스러워한 것이 아니라 세계질
서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이 불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항의를 피했고, 오직 의존과 동의만을 구했다. 대도시의 위대함과 매
력에 마비된 것처럼, 닫혀진 문들 앞에서 동경에 가득 차서 혁명적인 생각
을 키운 것이 아니라 오직 외로웠을 뿐이다. 저항자로 그보다 더 안 어울
리는 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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