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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Rebellion

출생과 시작

by godfeeling 2020. 8. 15.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또한 미화시키는 것은 그의 생애의 근본적인 노력
들 중의 하나였다.  역사상의 어떤 현상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토록  억
지로 양식화되고, 개성을 드러내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한 인가의 것이라기보다는 기념동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생 동안 그는 그 이미지 뒤에 숨으려고 애썼다. 일찍이 소명에 
대한 의식으로 딱딱하게 굳어져서 서른  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위대한 지
도자의 모습, 집중하고 얼어붙은 접근 불가능의 모습 뒤로 숨어 버렸다. 전
설을 만들어내는 어둠과 특별한 선민의식의 광채가 그의 삶의 전사를 뒤덮
고 있다. 또한  불안, 비밀스러움, 특이한 역할 특성이 그의  존재에 각인되
었다.
  상승을 위해 애쓰던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NSDAP)의 당수 시
절에 그는 이미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관심을 모욕이라고 느꼈다.  수상이 
되었을 때는 자기  사생활에 대한 모든 출판을 금지시켰다. 학교  친구부터 
가장 친근한 저녁의 술자리 모임을  통해 그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그가 세심하게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감추려고 노력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일생 동안  이상스럽게 거리
를 만드는 요소를  가졌다." 그는 젊은 시절 여러 해를  남자들만의 하숙집
에서 살았다.  그러나 거기서 그를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뒷날 그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는 낯설고도  눈에 띄지 않게 그들  곁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뒷날 수소문을 해보아도 그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정치 경력을 쌓던  초기에 그는 자신의 사진이  출판되지 
않도록 열렬히 애를 썼다. 이런 점을 보고 자신의  효과를 확신하는 선동가
의 신중한 면모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는 처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
아서 신비에 둘러싸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은폐 노력은 단순히 '오래된 예언자  방식'이나, 혹은 카리스
마의 마법적인 요소를 자기 생으로 도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
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느낌으로 
압도된 은폐된 인간의  염려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언제나  흔적
을 지우고 동일성을  확인하지 못하게 만들고, 꿰뚫어보기 어려운 출생  기
원과 가족적  배경을 더욱  흐르게 만들기 위해서  세심한 노력을  하였다. 
1942년에 슈피탈 마을에서 그를  위한 기념패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그는 전혀 거침이 없는 그 유명한 분노의 폭발을  일으켰다. 자기 조상들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고  주장하고 아버지의 직업은 세관원이었건만  '우체
국 직원'이라고 거짓말하고,  자신에게 접근하려고 애쓰는 친척들을 가차없
이 밀쳐 내버렸다. 그리고 윗소금산에서 임시로 집안일을  보아주던 누이동
생 파울라에게는 다른 이름을 쓰라고 강요하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개인적인 서신교환이 전혀 없었다. 인종주의  철학의 창
시자인 요르크 란치 리벤펠스에게서 그는 초기의 몇 가지 막연한 생각들을 
얻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로 진군한 이후 그가 편지쓰는  것을 금지시켜버
렸다. 그리고 남자  하숙집의 친구였던 라인홀트하니쉬를 죽이라고  명령했
다. 그는 그 누구의 학생도  되고 싶지 않았고, 모든 깨달음은 오직 자신의 
영감, 특권, 수호정령과의  대화 등에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마찬
가지로 그 누구의 아들도 아니고  싶었다.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 부모의 
모습은 생애의 전설을 떠받쳐주는  한도 내에서 도식적으로만 등장하고 있
다,.

    가려져 있는 가족사
  국경 저편 출신이라는 사실은  주변을 은폐하는 의도에는 이로는 것이었
다. 알렉산더 대왕에서 나폴레옹을 거쳐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많은 혁명가
나 역사상의 정복자들처럼 그도 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이었다. 이런 
아웃사이더의 느낌과, 거칠고  광대한 계획을 위해 한 국민을 몰락에  이르
기까지 몰고 가는  마음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연관성은 그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2차대전의 국면이 바뀌고 있던 시점, 피의 지구전이 계속되고 있
을 때 그는  새로 투입된 장교들에게서 막대한  인명손실이 난다는 보고를 
받자 짤막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젊은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타지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히  은폐될 수는 없었
다. 질서와 규칙, 시민성에 대한 그의 감각은 어둡게 가려져 있는 가족사와 
언제나 갈등을 빚었다. 출생과 요구 사이의 거리감, 자신의 과거에 대한 두
려움은 한 번도 그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1930년에 그의  집인 배경
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밝혀지자 히틀러는 지나치게 불안한 태도로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내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가문 출신이지 알아서는 안 된다."
  아버지 쪽으로나  어머니 쪽으로 보아서  이 집안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왕국의 멀리 떨어진  가난한 지역 출신이었다. 그곳은 도나우 강과  보
헤미아 국경 사이의 숲이 우거진 지역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친 근친 결혼
으로 복잡한 친척관계로 얽혀 있는 농사꾼들이 모여사는  곳, 은둔지역으로 
알려진 될러스하임, 슈트로네스, 바이트라, 슈비탈, 발터슐라크 등의 이름으
로 고대사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무성한 숲 사이로  협소하게 자리잡은 지
역 여기저기에 작은 마을들이 흩어져 있는 곳이었다.  히틀러, 히들러, 혹은 
휘틀러라는 이름은 체코  이름으로 보인다. 여러 지역을 전전한 끝에  1430
년대에 처음으로 이 삼림지역에 그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세
대에 걸쳐서 소작인들만  나왔을 뿐 아무도 이곳의  사회적인 한계를 뚫고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1837년 6월 7일에 슈트로네스  13번지에 소작농 요한 트룸멜슐라거의 집
에서 결혼하지 않은  하녀 마리아 안나 쉬클로루버가 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같은  날 알로이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될러스하임  군
이 출생기록부에 아이  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는 난은 비어  있었다. 
어머니가 5년 뒤에 일정한 일자리도 갖지 못한 방앗간 견습공 요한 게오르
크 히들러와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같은 해에 자기 아들을 남편의  형제인 슈피탈 출신의 요한 네포묵 휘틀러
에게 주었던 것 같다.  아이가 아무 연고도 없이 자랄까 봐  두려웠던 모양
이다. 어쨌든 히틀러 일가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너무나 가난해서 '잠자
리도 없이 가축의 여물통에서 잠을 잤을' 정도였다.

    베일에 싸인 할아버지의 존재
  방앗간 견습공인 요한 게오르크 히틀러와 그의 동생인 농부 요한 네포묵 
히틀러는 추측컨대 두 사람  다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 같다. 히틀러의 가까운 주변에서 나온, 상당히 무모한 확인에 따르면 세 
번째 아버지 후보는  그라츠의 유대인 프랑켄베르거이다. 마리아안나  쉬클
그루버는 임신했을 때  그 집에서 집안일을 해주고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오랜 기간 히틀러의  변호사였고, 나중에 폴란드 총독을 지낸 한스  프랑크
는 뉘른베르크 해명서에서 다음가 같이 증언했다. 
  히틀러는 1930년에 이복형의 아들에게서  아마 협박 목적으로 쓰여진 편
지를 한 통 받았다고 한다. 그 편지는 히틀러 집안 역사의 '매우 특별한 상
황'에 대한  암시를 하였다. 프랑크는 사태를  극비리에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조사해본 결과,  프랑켄베르거가 히틀러의 할아버지라는 추측에  대한 
몇 가지 자료를 얻었다.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은 물론 
극단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프랑크도  뉘른베르크에
서 히틀러가 유대인 조상을 두었다고 주장할 동기가 없었다. 
  최근의 조사 결과 그가 말한 내용의 신빙성이 더욱더 의심스럽게 되어서 
이 주장은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거의 없다. 이러한  주장의 본래 의미는 
객관적인 신빙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히틀러가 프랑크의 조사  결
과를 통해서 자신의 기원을 의심하게 되었으리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
고 심리적인 의미가  있는 일이다. 1942년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을  받고 
비밀경찰인 게슈타포가 다시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리
고 요한 네포묵 히틀러가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아버지라는 생각도 '절대
적 확실성에 가까운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기는 하였지만 그밖의 
다른 할아버지 이론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마저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입증하는 것 같은  말투로 자신의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히틀러가 아내가  죽기까지 (1873년) 기다렸다가 
합법화 절차를 밟은 사실을 놓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강력한 뒷받침이 된
다고 여기고 있다. 실은  생각한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휘틀러가 자신이 아버지고 알로이스가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어야 할 것
이기 때문이다. 모든 논거들도 이와 비슷하게 의심스럽다. 전체적으로 보아
서 마저도 휘틀러의 행동에 대해서 오직 자기 견해만을 뒷받침하고 그밖의 
해석들은 의심스럽게 만드는 어떤 행위동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휘틀
러가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를 상속인으로 지정하는  조건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는 가정도 등장하고 있다. 그밖에도 이러한  맥락에서 할아버
지에 대한 의문이 부차적인 것이었다는 암시도 적지 않다.  다만 한스 프랑
크의 견해만은 이  문제에 새로운 심리적 차원을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심
리적 차원을 넘어서면  그것은 하잘것없는 흥미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같이. 곤궁과 우중충함과 시골의 경건한 척하는  태도로 특징
지어지는 혼란스런 상황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다. 

    이름 바꾸기
  마리아 안나 쉬클그루버가  '늑막염에 의한 기력소모'로 슈트로네스 근처
의 작은 모텐에서 죽은  지 29년이 지나서,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죽은 지 
19년이 지나서야 그의 동생 요한  네포묵은 세 명의 증인을 동반하고 될러
스 하임의 목사 찬쉬름에게 왔다. 그리고 자신이 '키운 아들', 그새 거의 마
흔 살이 다 된 세관원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신원확인을 하겠노라고 신청
하였다. 물론 그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죽은 형 요한 게오르크가  아이 아
버지라는 것이다. 요한 게오르크가 살았을 때 그 사실을 고백했고, 함께 온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증인이라고 했다.
  목사는 정말로 속았든지  아니면 설득당했다. 오래된 출생기록부에서  그
는 1837년 6월 7일자  기록의 짤막한 비고란에 적혀 있는 '미혼'을 '혼인'으
로 고치고 아버지의  신상을 요한 네포묵이 원하는 대로 적어넣었다.  그리
고 가장자리에 거짓으로 이렇게 토를 달아  놓았다. "아버지로 기록된 게오
르크 히틀러는 서명한 증인들이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아이 어머니 안나 
쉬클그루버에 의해서 알로이스의  아버지로 인정받았다. 그는 자기  이름을 
이 기록부에 적어넣기를 요청하였다.  그 사실을 증인 요제프 로메더, 증인 
요한 브라이테네더, 증인 엥겔베르트  파우크가 확임함." 세명의 증인이 자
기 이름을 쓸 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세 개의 십자가로  서명을 하였고, 
목사가 그들의 이름을  옆에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날짜를  적어넣
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서명과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
이 부모의 서명도 물론 빠져 있다. 법적으로 어긋난  일일지 몰라도 어쨌든 
이 서류는 법적인  효력을 가졌다. 1877년 1월부터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는 
알로이스 히틀러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런 시골식 음모는 의심할 바  없이 요한 네포묵 히틀러가 꾸며낸 것이
다. 그는 알로이스를 길렀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를 자랑스럽게 여
겼다. 알로이스는 승진했고, 결혼도 했고, 히들러 일가  중 누구보다 성공하
였기 때문이다. 요한  네포묵이 자기가 키운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얻어
줄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은 매우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알로이스도 
이름을 바꾸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력적이고  의무
에 충실한 남자였고 그새 상당한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결혼에 의한' 이름
을 가짐으로써 경력에  더욱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
다.
  열세 살에 그는  빈으로 나가서 어떤 구두장이의 견습생을 들어갔다.  그
러나 곧 이 수공업 일을 포기하고 확고한 결심을 한 후 오스트리아 세부관
리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승진을 했고, 결국 자신이 받은 교육수준으로
는 최고직인 세무장이 되었다. 관청의 대표자로서 그는  공식석상에 나타나
기를 좋아했고, 정확한 직함으로  불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와 같은 
세관에서 근무한 한 동료는 그를 가리켜서 '엄격하고 정확하고 꼼꼼하다'고 
평했다. 그는 아들의 직업선택에 대해서 도움말을 구하는  친척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재무관리 일은 절대  복종과 의무감을 요구하며, '술마시는 사람, 
빚지는 사람, 카드놀이  하는 사람과 그밖에 부도덕한 생활태도를 가진  사
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대개 승진의 기회에 
찍곤 하였던 사진들은  변함없이 당당한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의심 
많은 공무원의 얼굴 속에 거칠고 시민적인 실속과 체면욕구를 드러내 보이
고 있다. 제복단추를 빛내면서 어느 정도 품위와 자만심을  지닌 모습을 보
여준다.
  그러나 정직함과 엄격함 뒤에는  분명히 불안정한 성질이 감추어져 있었
다. 그것은 충동적인 결심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없이 이사를 한 
일은 세관원 일의 필요성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불안을 암시하
는 부분이다.  25년 동안 적어도 열한  번 이사를 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중 몇 번은 물론 직업적인 필요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벌써 두 번째 부인이 임신을 하였고, 두 번째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세 
번째 부인이 임신을 했다.  첫째 부인 안나 글라슬은 그보다 열네  살이 위
였고, 마지막 부인 클라라 ㅍ츨은 그보다 스물세 살이 젊었다. 클라라는 처
음에 그의 집의  가정부였다. 히들러 혹은 휘털러 일가와 마찬가지로  슈피
탈 출신이었고, 이름을 바꾼 뒤에 적어도 법적으로는 그의  조카로 되어 있
었기 때문에 결혼을 위해서는 교회의 특례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녀가 정
말로 그와 혈족이냐 하는 질문은 알로이스 히틀러의 아버지에 대해서와 마
찬가지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가정의 의무를  눈에 띄지 않
게 양심적으로 해냈고, 남편의 소원에 따라서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갔으며, 
결혼계약이 성립된 뒤로도 그 집에  처음 들어올 때처럼 하녀와 정부의 티
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 자신이 세관장의 아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
서는 여러 해 동안이나  노력을 해야 했으며 남편을 '알로이스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다. 그녀의  사진들은 진지하고, 움직임이 없고,  약간 의기소침한 
태도를 가진 겸손한 시골처녀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 교외 219번지에
서 이  세 번째 결혼의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세 명의  형제자매들이 
1885,1886,1887년에 태어났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다. 두  명의 동생 중
에서는 누이인 파울라만 살아남았다. 이 작은 국경도시는  아돌프의 성장에 
거의 의미가 없다.  다음해에 벌써 아버지는 저지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로
스 쇠나우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다시 파사우로  이사했을 때 아
돌프는 세 살이었고, 다섯 살  때 아버지는 다시 린츠로 자리를 옮겼다. 람
바하 군 근처에  있는 유명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여섯 살짜리 아돌프는 
소년합창단원과 미사의 복사  노릇을 했다. 그 자신의 서술에 따르면  거기
서 '극단적으로 빛나는 교회  축제의 화려한 행사에서 거듭 감격할' 기회를 
가졌다. 1895년에  아버지는 근처에 4헥타르의 토지를  샀다가 곧 다시  되 
팔았다. 2년 뒤에 린츠 교외에 있는 작은 레온딩 군에  집을 사고 은퇴하였
다.

    천재적인 조숙함
  신경질적인 요소들이 상당히  드러나지만, 그래도 일관성과 신중함, 시민
적인 착실함과 확신감을 보여주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과는 반대로 히틀러 
자신은 비참한 상황,  가난, 협소한 집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그 모든 나쁜 상황과 게다가  이해심 없는 아버지의 폭군적인 복종의 요구
를 이  특별한 소년이 확고한  의지력으로 이겨냈다는 내용이지만,  아들은 
심지어 몇 가지 효과적인 결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뒷날 아버지를 주정
뱅이로 만들고  말았다. 자신이 빌고  욕을 하면서 '끔찍한 수치'의  장면에 
'냄새나고 연기자욱한 술집에서' 아버지를 집으로 끌고 와야만 했다는 것이
다. 
  천재적인 조식에 어울리게  그는 마을의 공동 목장과  오래된 요새의 탑 
근처에서 또래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 모험과 대담하게 앞을 내다보는 사려 
깊은 탐색계획들을 만들어내서 언제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을 
뿐 아니라 타고난 지도자로서의 천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순진한 
놀이에서 영감을 얻은  전술과 용병술에 대한 관심은  그의 미래를 예측케 
해주는 대목이다.
  (나의 투쟁)의 저자는 옛날을 돌아보면서 '열한 살도 채  되기 전'에 나타
난 '특별한 중요한  두 가지 탁월한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자신이 민족주
의자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역사를 '그 본래의 의미대로 이해하고 파악
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 궁핍, 사랑하는 
어머니의 질병과 죽음, 그리고  '열일곱의 나이에 객지로 나가서 자신의 밥
벌이를 해야 하는' 가련한 고아소년의 출발 등이 이  전설의 아주 효과적이
고도 감동적인 결말부분을 이루고 있다.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는 영리하고 
활동적이고 분명히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나는, 규칙적인 노동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 탓으로  약화되어버리고 말
았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특성에다가 다루기 힘든 폭발적인  성질까지 있었
으며, 언제나 변덕스러운 기분과 학교의 증명서들은 그가  완벽하게 우수한 
학생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1899년의 학급사진에서 그는 맨  뒷줄에서 보
란 듯이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초등학교 이어서 부모가 보내준  실업학교에서 그는 놀랍게도 완전히 실
패하고 있다.  두 번이나 진급을 못하고  한 번은 재시험을 보고서야  겨우 
진급을 했다. 성적표들은 거의  4등급(양)으로 채워져 있다. 행동발달, 그림 
그리기, 체육에서만 미 혹은 그보다 나은 평가를 받고  있을 뿐이고 나머지 
과목에서 그는 가  혹은 양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1905년  9월의 성적은 
국어, 수학, 속기에서  '불가'를 맞고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이어서 '학급에
서 남보다 앞서나갔다'고 말한 적이 있는 지리와 역사도 겨우 양을 맞았고, 
전체 평균점수 가를 맞아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기질
  이토록 이상한 실패는 물론 복합적인 원인과 동기를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농사꾼들이 모여사는 레온딩에서는 친구들의  대장이라는 특별의식
을 아무런 문제 없이 확인할 수 있었지만 린츠라는 도시에서는 학가, 상인, 
고위직 공무원의 아들들 사이에서  시골 출신의 가련한 아웃사이더에 불과 
하다는 체험이 적지아니 작용했을 것이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인구 5만
명의 도시  린츠는 단 하나의 오페라  하우스, 단 하나의 시가전철을  당시 
도시의 상징으로 갖추고 있었지만 시골의 한적함과 나른함이 아직 남아 있
었다. 그래도 이  도시는 젊은 히틀러에게 사회적 계급질서에 눈뜨도록  해
주었다.
  어쨌든 그는 실업학교에서 '친구도 동료도 없이' 지냈고.  같은 나이 또래
의 친구들과 함께 임시로 하숙하고  있던 늙고 못생긴 재키라 부인 집에서
도 그는  무뚝뚝하고 조용하게 홀로 지냈다.  당시 그와 함께 지냈던  사람 
중 한 명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하숙생 다섯  명 중에서 누구도 그에게 가
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우리들 사범학생들끼리는 당연히 서로  '너'라고 불
렀지만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그 점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특이하게도  히틀러 자신에 의해서 이  시기에 처음으
로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확신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장차 그의 
스타일과 모습을 뚜렷하게 특징짓게 된다. 린츠의 어리숙한 멋쟁이나, 빈의 
프롤레타리아 시절 그에게 '계급의식'과 그것을 지탱하려는 의지를부여해준 
것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뒷날  실업학교에서의 실패에 대해서  아버지가 자신을 관리로 
만들려고 해서  그에 대해 저항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버지와의 
대립을 두 명의 굽히지 않는  의지의 인간 사이의 싸움으로 극화시켜서 오
랫동안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상당부분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
다. 아버지가 그를  린츠의 세관본부로 데리고 갔던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
지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 직업의 좋은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데려 
갔지만 그 자신은  오직 '역겨움과 혐오'에 가득 차서 '늙은  남자들이 원숭
이들처럼 서로 바싹  붙어서 웅크리고 있는 국가의 원숭이 우리'를  보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버지가 아들의 직업적인  성장과정에 대해서 그토록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기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는 아버지가 열성을 가졌다고  꾸며내서 자신의 실패를 변명하려 했
던 것이고, 또한  어린 나이부터 확고한 결단력을 가졌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였다. 물론  아버지는 부족한 학교교육으로  자신에게 닫혀 있던  고위직 
공무원의 길을 아들에게 열어주고 싶어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묘사한 대로 
지속적인 긴장의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서
로 기질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아버지 자신이  오랫동
안 품어온 소망, 그리고 이상스럽게도 아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꿈을 실현시
키려는 아버지의 결심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1895년 여름에 쉰여덟의  나이로 은퇴를 해서 마침내 직업적인 
의무에서 벗어난 한가함을 누리며 자신을 취향대로 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에게 그것은  심한 행동의 제약을  뜻하였다. 갑자기 어디서나  존경과 
규율을 요구하는 아버지의 강력한 모습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룩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가차없이 복종을  요구하였다. 
아들의 직업선택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차이보다는 오히려 이런 점이 분명
한 갈드의 이유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실업학교 시작부분만을 보았다. 1903년  초에 그는 
레온딩에 있는 비스빙거 술집에서 한  잔의 포도주를 시켜서 첫 모금을 마
시다가 그만 옆올  쓰러져 의사와 사제가 달려오기도  전에 옆방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공평한  (린츠 일보)는 그를 위해서  상당히 긴 추모기사를 
실었다. 그의 진보적인 생각, 소박한 명랑함과 정력적인 시민의식을 지적하
고, 그가 '노래의 멋'이었고, 양봉 분야에 권위가  있었으며, 절제 있고 가정
적인 남자였다고 찬양하였다. 아들의 변덕스러운 투정으로 흥미가  없는 학
교를 그만두었을 때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죽은지 이미 2년 반이 넘
어 있었다.
  병치레 잦은 어머니가  관리가 되라고 위협했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어
머니는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끊임없이 조르는 것을 얼마 동안 막았
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기적으로 독선적인 기질에 맞설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자식들을 잃고 난 뒤에 남은 두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염려는 
특별한 것이어서 무엇이든 양보하는 지경이 되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방법을 재빨리 터득하였다. 1904년 9월에  그가 다니던 학
교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진급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는 마지막 시도로 그를 
슈타이르에 있는  실업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첫 번째 성적은 '가'로 판정이 났고. 히틀러 자신이 말한 바에 따르
면 술에 취해서 성적표를 화장지로 써버렸기 때문에 성적표 사본을 받으려
고 애써야만 했다.
  1905년 가을의 성적도 나아지지 않자 어머니는 마침내 포기하고 그가 학
교를 그만두는 것을 승낙하였다. 물론 이번에도 그녀는  완전한 자유의사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나의 투쟁)에서 슬쩍 고백한 바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병이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 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가 또다시 진급을 못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로 보인다.

    예술을 통한 신분상승 욕구
  그것은 히틀러가 가끔 축하하곤 했던 파국적인 승리의  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도 그는 불량한 학교 성적을 통해서 강력한 아버지에게 증명을 
해보였다. 아버지가 원하던 대로 관리직으로 나가는 길을  자신에게 영원히 
막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었다. 동시에 그는 '원초적인 증오심을 품
고서' 학교를 떠났다. 그의 생애에서 학교는 증오의  주제였다. 천직에 대한 
암시로 자신의 실패에 대한 불안을 억지로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했지만, 실
패한 자의 원한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실용적인  교육기관의 요구에서 
벗어나자 이제 그는  자신이 생애를 '완전히 예술에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화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이 선택은 그가 지니고  있던 실질적인 스
케치 재능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화가들은 자유롭고 속박  없는 생활을 한
다는, 시골 출신 관리 아들의 상당히 촌스러운 상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는 이미 일찍부터  독특한 스타일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어머니의  집
에 있던 하숙인 한 사람은 나중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그는 밥을 먹는  도중에 갑자기 종이에다가 미친 듯이 건물들,  아치문이
나 기둥을 스케치하곤  했다는 것이다. 몰론 거기에는 예술의 도움을  받아
서 자기가 속한 좁은 시민세계의 강요와 제한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합당
한 필요성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의 그림 연습, 
음악, 꿈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광적인 열성이 이러한 정역에  한 줄기 혼란
스런 빛을 주고 있다. 그는 특정한 직업, 그  자신이 경멸한다고 말한 '밥벌
이 직업'을 거부하였다.
  분명하게 그는  사회적 의미에서 예술을  통한 신분상승을 하려고  했다. 
성장기에 보이는 그의 모든 집착과 결심 뒤에서 어떤 '높은 존재'가 되려는 
매우 강한  욕구를 볼 수 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지나친 정열과, 예술이 
'더 나는 사회'의 특권이라는 생각과 적잖이 결부되어  있다. 어머니는 아버
지가 죽은 뒤에 레온딩에 있는 집을 팔고 린츠의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여
기서 열여섯 살 난 히틀러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상당한 액수에 이
르는 어머니의 연금으로 미래의 계획들은  모두 뒤로 미뤄둔 채 자기가 중
요하게 여기던 특권적인  게으름을 누릴 수 있었다. 매일같이 그는  산책을 
하였고, 규칙적으로 '지방극장'에 가고,  음악협회에 가입하고, 국민교육연합
의 도서관 회원이 되었다.
  나중에 그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성에 대한 관심이 깨어나기 시작해서 
밀랍 박물관의 성인을 위한 전시장에 가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쯤 
그는 남부역 근처에  있는 작은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전해
지는 서술을 보면 그는 키가  크고 창백하고 수줍었으며 언제나 지나칠 정
도로 꼼꼼하게 옷치장을 하고 대개의 경우에는 화려한 상아장식이 붙은 검
은 색 산책용  지팡이를 휘두르며 대학생인 듯 행동하였다. 아버지는  사회
적인 명예옥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이룩한 것을 하찮은 경
력이라고 여겼다. 그가  '아버지'의 경력을 추억하면서 상당히  관대하게 내
비친 말을 보면 자기 자신의 목적은  훨씬 더 높은 데 있다는 사실이 드러
난다. 그는 현실과 별개로, 혹은 현실 위쪽에다가 세운 꿈의 세계에서 천재
로서의 기대와 자의식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기증명의 요구에서 실패한  뒤로 그는 점점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아버지와 선생들  앞
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극복했다고 여기고,  적들로 둘러싸인 세계에  대한 
고독한 승리를 축하하였다.  이곳으로부터 그는 악의에 가득 찬 세상에  대
해서 최초의 저주 판결을 내던졌다. 나중에 그를 기억한  모든 사람들은 그
의 진지하고, 폐쇄적인고 '소스라쳐  놀라곤 하는' 특성을 기억하였다. 아무
런 하는 일도 없이  모든 일에 열중하면서 세계는 "근본적으로 구석구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깊은  밤까지 린츠 시의 도시계획 변경에 
대한 서투른 계획에 열을 올렸고, 극장건물, 호화주택,  박물관이나 혹은 도
나우 강에 세울 다리의 설계도들을 그리곤 하였다. 그  모든 설계도들을 그
는 35년 뒤에 독단적인 만족감에 휩싸여 애송이 시절의 계획대로 새우라고 
지시하였다.

    비현실적인 사랑
  그는 체계적인 작업을 할  능력이 없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거리, 새로
운 매혹, 새로운 목표를 필요로 하였다. 그가 졸라서 어머니는 피아노를 샀
다. 잠시 동안 그는 레슨을  받았다. 그러나 넉 달이 자나자 벌써 지겨워져
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젊은날의 유일한 친구인 린츠의 실내장식가  아
들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와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결합되었는데,  그에게 
생일선물로 자신이 꿈의  세계의 일부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집 한 
채를 선물하였다. "그는 완성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나 계획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차이가 없었다."
  복권당첨에 대한 생각이  한동안 그를 비현실 세계로 이끌어갔다. 그  비
현실 세계에서 그는 도나우 저편을 내다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진 훌륭한 집
(린츠 우어파, 교회거리 2번지)의 2층에서 살았다. 당첨이 있기  여러 주 전
에 이미  그는 시설들을 고르고, 가구며  재료들을 검사하고, 장식문양들을 
계획하고 친구에게 고귀한  자유의 생활, 예술에 대한 관대한 사랑으로  넘
친 생활 계획을 들려주었다. '벌써 머리가 희끗해진,  그러나 대단히 고귀한 
부인'이 그러한 생활을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화려
하게 불을 밝힌 계단에서 잘 선별된 고결한 마음을  가진 친구들'을 손님으
로 맞아들이는 모습을 밀 맛보았다. 그것은 당첨날이 와서  그가 거의 확신
하고 있던 꿈을 망치기  전에, 그리고 그가 끝도 없는 분노의  광란 속에서 
자신의 불운을 저주하고, 점점 더 흥분해서 믿기 잘하는 인간의 기질, 국가
의 복권체계, 그리고  마침내 사기꾼 같은 국가 자체에 대해서까지  근본적
으로 저주를 퍼붓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가 이 시기에 자신을 가리켜서 '별난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은 옳은 것
이었다. 실제로 그는  집중적이고 억누른 방식으로 오직 자기만의 삶을  살
았다. 어머니와, 최초의  청중 노릇을 했던 순진하게 믿기 잘하는  친구 '구
스틀(아우구스트의 애칭)'을 빼면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절의 풍경에는 사
람 모습이 없다. 학교를 그만두는 것과 아울러 근본적으로  사회를 떠난 것
이다.
  매일같이 중심가의 산책길에서, 어머니와 함께 언제나 일정한  시각에 대
장간 앞을 지나쳐가곤 하는 소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친구의 보고에 따르
면 그는 곧바로 정열적인 애정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집요하고 낭만적
인 애정으로 여러 해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소녀에게 말
을 걸고 자신을  알리는 일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그러한 거부는  자연스러
운 수줍음 탓만은  아니고, 현실에 대항해서 공상을 지키고 항상  몰취미한 
현실이 상상의 왕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소원과도 관계된 것이
었다. 친구가 확인해준 것을 믿을 수 있다면 히틀러는 소녀에게 바치는 '헤
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랑의 시들'을 썼다고 한다.  그중 하나에서 그녀는 '꽃
이 핀 들판 위에서 백마를 타고 짙은 청색으로 나부끼는 빌로드 옷을 입은 
성주의 딸'로 등장하고 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황금빛 파도처럼 어깨
에서 흘러내렸다. 밝은 봄하늘이 그 위로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은 순수하
고 빛나는 행복이었다"고 한다.

    바그너 음악과의 첫 만남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 그 정열적인 효과와 매혹적이면서도  폐부를 찌
르는 듯한 음색, 유괴하는 힘을 지닌 그 음악은 그가 한번 빠져든 뒤, 그리
고 매일 밤 오페라를 방문하게  된 뒤로 적잖이 최면술적인 자기암시의 수
단으로 이용되었다. 이  음악만큼 그의 현실도피적인 성향에 잘 맞는  것도 
없었고, 현실에 대해서 자신을 그토록 절대적 우위에 서게  만들 것도 없었
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같은 시기에  이 음악에 잘 어울리는 그림을 사랑
하였다. 루벤스의 화려함과  루벤스를 퇴폐적으로 모방한 한스  마카르트였
다. 친구인 쿠비체크는 바그너 오페라 (리엔치)를 함께 관람하고 난 다음에 
히틀러가 보인 열광적인  반응을 서술하고 있다. 그 작품의 장엄하고  극적
인 음악성에 압도되고, 주변의 몰이해로 인해서 낯설고  비극적으로 부서져 
간 중세 후기의 반란자 호민관  리엔초의 콜라의 운명에 완전히 감동을 받
은 히틀러는 친구를 프라인 산으로  끌고 가더니 밤의 어둠에 잠긴 린츠를 
내다보면서 연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막혀  있던 강물이 터진 둑을  통해 
흘러내리듯이 말들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위대하고도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으로 그는 내게 자신의 미래와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30
년도 더 지난  다음이 청년기의 친구들이 바이로이트에서  다시 만났을 때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순간에 시작되었어!"
  1906년 5월에 히틀러는  2주 예정으로 빈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는  수
도의 광채에 눈이 먼 듯했다. 마치 '(천하루 밤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처럼' 
보이는 링 거리, 박물관들, 우편엽서에 써보낸 대로  오페라의 '강력한 존엄
성'. 그는 궁정 극장을  방문하고 (트리스탄)과 (방랑하는 네덜란드 사람)을 
관람하였다. "그 강렬한 음의 파도가 홀 안으로 넘치고, 살랑거리는 바람소
리가 무서운 음의 파도에 압도되면(문법적인  오류!)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네." 하고 그는 쿠비체크에게 써보냈다.
  그가 빈에서 돌아온 다음 그곳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서 출발하
기까지 어째서 일년  반이나 더 기다렸는지 이유가 분명치 않다.  1907년부
터 점점 더  병약해진 어머니가 염려에 가득 차서  반대한 것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결정적인 이유는 그  자신이 이상적이라 
여긴 빈둥거리는 생활을 끝내고 새로이 학교에 종속되는 발걸음 내딛기 가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여전히 매일매일을  기분내키는 대로 
지내면서 꿈꾸고 스케치하고 산책하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곤  하였다. 아니
면 끊임없이 방  안에서 오락가락하였다고 한다. 그는 여러 번이나  린츠에
서의 삶을 자기 생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불렀다. '아름다운 꿈'이라
고 물론 그  그림은 학교에서의 실패의식에 의해서  쉽게 흐려지는 것이긴 
했기만 말이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가 그 옛날 도시를 누가
서 "무엇인가 이루지 않고는 고향마을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자기 칭찬을 
하는 모습을 서술해 놓고 있다.
  그는 1907년 9월에 같은 의도를 품고서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예전의 
계획과 희망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동안에도 그 소망만은  남았다. 성공해
서 당당하게 린츠로 돌아서 그 도시가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경탄으로 자기 
발밑에 놓여 있는  것을 복 싶고, 한때의 '아름다운 꿈'을  실현시켜보고 싶
다는 소망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었다. 전쟁 동안에 그는  자주 지치고 초조
해져서, 린츠에다가 노후를  위한 집을 짓고 박물관을 건립하고 음악을  듣
고 책읽고 글쓰고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고 싶다는 의도를 이야기 하곤 하
였다. 그것은 다음이 아니라 아주 고귀한 노부인과 고결한  심성의 친구 내
부에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1945년 3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 코
앞에 당도했을 때 그는 제국수상관저 지하에 있는 벙커에서 새로운 린츠의 
건설계획을 가져오게 하더니 선  채로 오랫동안 그것을 꿈꾸었다고 전해지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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