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구에 따르면 그의 숙소에서 멀지 않은 펠버 거리에 잇는 담배공
장에서 종족주의를 다룬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발행부수 10만
부 정도였고 특히 대학생들과 중간지식층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당신은 금발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문화 창조자고 문화 보존자다! 당신은
금발인가? 그렇다면 여러 가지 위험이 당신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금
발과 남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책들을 읽어라!" 제1면에 큰 표제어로 이렇
게 광고하고 있었다. 수사노릇을 하다가 그만둔, 요르크 란츠 폰 리벤펠스
라는 그럴싸한 귀족 이름을 가진 사람이 발행하는 잡지였다. 그것은 게르
만의 봄의 여신인 '오스타라'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이 잡지는 아싱족
(혹은 영웅족) 대 원숭이족 (혹은 숲의 종족)의 싸움에 대해서 상당히 변덕
스럽고 살기를 띤 이론을 전개하였다.
저지 오스트리아에 있는 기사단의 성인 베르펜슈타인을 중심으로-그곳의
수입이 그에게 산업의 촉진자 노릇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란츠 폰 리벤펠스
는 아리안 영웅의 남자기사단을 창설하고 조직했다. 그 기사단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주인 종족이 열등한 혼합종족과 벌이는 피의 투쟁에서 주
인종족의 선발대 노릇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는 1907년에 벌써 갈고리 십
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내걸고, 사회주의 계급투쟁에 맞서서 '거세하는 칼'
에 이르기까지 종족투쟁을 계속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짐승인간의
멸종을 위해서, 더 높은 새로운 인간의 발전을 위해서' 사육방법과 멸종방
법을 체계화하겠다고 했다. '원숭이 숲'의 불임 조치와 추방 프로그램, 그리
고 강제 노동이나 상인을 통한 청산 프로그램은 육종을 선별하고 종족을
개량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움이 섞인 환호성을 울렸다. "여신께 공물을 바쳐라. 신의
아들들아. 일어나라. 그분께 숲의 종족을 바쳐라!" 아리안 족의 이상형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도록 그는 종족간의 미의 대결을 제안하였다. 히틀러는
간혹 란츠를 방문하였다. 란츠의 설명에 따르면 히틀러가 이 잡지의 옛 판
몇 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고, 창백했으며, 겸손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초기의 이데올로기적 환경
현존하는 자료로는 란츠가 히틀러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지, 혹은 '이
념의 전수' 했는지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우스꽝스러운 기사단 창설자의
의미는 구체적인 충격이나 이념의 중개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현상
이 드러내는 징후에 있었다. 그는 노이로제 증상이 보이는 시대 분위기를
두드러지게 대변하는 사람의 하나였고, 당시 빈에서 싹트고 있던 상당히
공상적인 이데올로기 분위기에 특징적인 색깔을 덧붙인 인물이었다. 이러
한 사실은 그가 히틀러에게 미친 영향을 보여주기도 하고 한정짓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이데올로기 자체보다는 그 바탕을 이루는 병리적 징후에 흔
적을 남기고 있다.
히틀러 자신이 젊은 시절 지식의 원천이었다고 부른 적이 있는 신문 논
설과 싸구려 잡지에서 얻은 여러 가지 지식들과 이런저런 영향들을 놓고
결론을 내려보면, 그의 세계관은 시민문화에 대항하는 도착적인 하위 이질
문화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시민적 교양과 휴머니즘에 맞선
이 천박한 대항의식은 그의 이데올로기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시
민문화는 얼마간 자신의 하위문화에 물들어서 스스로 자신의 모든 기반을
부정하고 모독하기에 이르렀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세기가 바뀌던 무렵에
민에서 히틀러가 란츠 폰 리벤펠스와 다른 현상들을 통해서 만나게 된 하
위 이질 문화란, 엄격한 의미에서 지배적 가치체계의 부정이 아니라 그 가
치체계의 타락한 모방형태에 불과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시민적 결속의 필
요성을 느끼고 어디를 향하든지 싸구려 잡지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생
각들, 열등감, 공포심을 만났다. 다만 약간 더 고상하고 더 까다로운 형식
을 가진 것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방향을 잡도록 도와준 저속
한 생각들을 하나도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존경심으로 가득 찬 놀라움을
품고 이 대도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들의
어떤 생각도 그에게 특별하게 들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인기
가 있고 가장 자주 공연되던 작곡가의 작품들과 최고급의 궁정오페라를 보
아도 평소의 친숙한 생각들이 다만 더욱 기교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란츠,오스타라 잡지,쓰레기 같은 논문들은 그가 소속하고자
하는 사회로 들어가는 뒷문을 열어주었다. 뒷문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문은
문이었다.
이러한 소속감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꽉 붙잡을 필요를 느낀 그는 자신의
원한에 이데올로기적인 겉모양을 보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사회적 추락의
취협을 받고 있는 인간의 병적으로 격앙된 자기가치 의식을 가지고 그는
선량한 빈 사회의 편견들, 구호들, 두려움과 요구들을 점점 더 많이 받아들
였다. 반유대주의와 억압된 도이치 민족의 근심이 반영된 주인이론들이 여
기 속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에 대한 적대감과 이른바 사회적 다원주의
(적자생존)도 받아들였다. 이 모든 것은 지나치게 자극된 민족주의에 기초
를 두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지배자들의 생각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기
간에 가졌던 전반적인 생각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개인적인 사색의 결과로 이 같은 세계관을 얻은 것
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즉 꿰뚫어보는 관찰력과 부지런한 인식의 결과 스
스로 그런 세계관을 얻었다고 표현하곤 하였다. 모든 결정적인 영향을 부
정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원래 가졌던 선입견 없는 입장도 검토하고, 예
를 들면 린츠 시절에 유대인들에 대한 '불리한 발언들'이 자기에게 혐오감
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세계관의 싹과 방향은
고지 오스트리아 지방의 주요도시인 린츠의 이데올로기 환경에서 만들어졌
을 가능성이 크다.
린츠는 세기가 바뀔 무렵 민족주의 그룹과 그 성향의 중심지 중 한 곳이
었다. 특히 히틀러가 다녔던 실업학교는 확고한 민족주의 분위기가 지배하
였다.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도이치 민족을 상징하는 푸른 색 달구지국화꽃
을 단추구멍에 끼우고 다녔다. 그들은 도이치 통일운동의 상징 색인 검정,
빨강, 노랑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만세(하일)!'라는 말로 인사하였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황제친미가 대신 같은 멜로디에 붙인 독일 노래를 불렀다. 그
들의 저항적인 민족주의는 특히 합스부르크 왕조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학
교예배와 성체축일 행렬에 반대하는 청소년 저항운동은 '개신교' 제국과의
일체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전쟁 중 원탁모임에서 털어놓은 것
에 따르면 그는 동급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여러 가지 자유주의적인
발언들을 했고 종교선생인 살레스 슈바르츠를 "절망에 빠뜨려서 어찌할 바
를 모르게 만들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의 대표자는 도이치 교구위원이며 실업학교 역사선생인 레
오폴트 푀치 박사였다. 그는 젊은 히틀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 분
명하며, 수업시간에 능변과 두 세대 이전의 다채로운 그림을 통해서 소년
들의 상상력에 방향을 제시하였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그에게 바친
페이지들이 과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히틀러가 역사과
목에서 겨우 '양'을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국경지대 주민들의 두려움, 혼합
된 민족과 종족을 가진 제국에 대한 감정과 히틀러의 기본적인 반유대주의
성향은 의심할 것 없이 그곳에서 나온다.
그가 당시 린츠에서 발간되던 쇠너러 운동의 풍자적인 신문 (외괴의사,
예술과 생활에 나타나는 정치와 기분을 위한 월간 티롤 화보)를 읽은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 화보는 기고문과 만화에서 '교황숭배자' (카톨릭교도)
,유대인, 의회, 여성해방, 풍기문란, 알코올 등에 반대하였다. 이 화보잡지는
1899년 5월에 나온 제1호에 이미 도이치 민족 감정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된 갈고리 십자가상을 내걸었다. 이것은 게르만 신화에 따르면 세계창조의
원래 재료를 뒤섞었던 '불 방망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아가 젊은 히틀
러가 학생시절과 그 뒤 몇 년 동안 목적 없이 지내던 시절에 (모든 도이치
신문)과 도이치 민족주의 시민들 사이에 널리 읽히던 (남부 국경연감), 그
리고 공격적인 반유대주의를 선언한 (린츠 팸플릿)지를 읽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나의 투쟁)의 저자가 주장하듯이 반유대주의는 정치사회적 변화
의 동반현상 중 하나로서 빈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고 지방에서도 이에
못지 않게 격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2년 간의 영혼의 투쟁
히틀러는 2년 간 계속된 '영혼의 투쟁'이 자신의 '가장 힘든 변화'였다고
말한다. '허약한 세계시민에서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로 변화되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이 감정은 가차없는 이성에 맞서 '수없이' 저항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사실상 파악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의식적인 적대감으로, 단순한 기
분이 이데올로기로 발전되는 시기였다. 그때까지는 아직 타협이 가능했던
목가적인 린츠의 반유대주의가 원칙의 날카로움을 얻고, 광범위한 폭과 구
체적인 적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부모의 주치의였던 유대인 에두이르트 블로흐에게 히틀러는 처음에 빈에
서 '겸손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변호사 요제프 파인골트, 특짜는
목수 모르겐슈테른 등은 그의 소품 수채화들을 여러 번이나 사주어서 예술
적으로 그를 격려해준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남자 하숙집의 유대인 친구
노이만에게 그는 터무니 없는 의무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 모든 유대인들
은 그의 인생 초기에 길 가장자리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가 이 몇 년이 지
나는 동안 뒤쪽으로 숨어버렸다. 그들의 모습 대신 점점 더 많아져서 신화
의 유령처럼 커지는 '검은 고수머리에 긴 카프탄을 입은 모습'(유대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모습은 그가 '언젠가 도시 중심부를 지나쳐' 갈 때 그
의 눈에 띈 것이다. 그 일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 우연한 인상이 그의 뇌리
에서 어떻게 '빙빙 돌고' 점차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으로 변해 갔는
가를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유대인을 처음으로 유심히 지켜보자 빈이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어디를 가든지 오직 유대인만 보였으
며, 그들을 많이 보게 될 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게 보였
다. 특히 도시 내부, 도나우 운하의 북쪽 지역에는 얼핏 보아도 도이치 사
람과 닮지 않은 종족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매력적
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선택된 민족의 육체적인 불결함을 넘어서 도덕
적인 얼룩들을 보게 되면 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문화생활의
영역이든지 유대인이 한 명이라도 끼지 않은 재앙과 파렴치 행위가 있었던
가? 조심스럽게 그런 종양을 갈라놓고 보면 썩어가는 몸에 들어 있는 구더
기처럼 갑자기 비춘 빛에 눈부셔하는 유대인을 볼 수가 있었으니... 나는
차츰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광신적 반유대주의자'로 변함
란츠 시절의 평범한 반유대주의가 광적으로 변해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
혀 문자 그대로 생애 최후의 순간까지 계속되는 유대인 증오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 시절의 히틀러의 믿음직하지 못한 친구
중 한 명은 그 이유를 추락한 시민계급 아들의 성적인 질투심으로 돌렸다.
그리고 어떤 금발 소녀, 유대 혼혈인 라이벌, 그 소녀에 대한 히틀러의 강
간 시도 등에 대해 기묘하고도 별 설득력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일찍부터 나타나는 초긴장과 어두운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성에
대한 히틀러의 생각은 그가 성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에 어느 정
도 무게를 더해준다. 어디서든 유대인이 등장하기만 하면 나타나는 그의
표현법과 논리적 근거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의 투쟁) 곳곳에 들어
잇는 노골적인 음란성의 냄새는 우연히 겉으로 나타난 특징이 아니고, 젊
은날 깨달음을 얻은 오스타라 잡지나 저속한 팸플릿의 음조와 문제에 대한
기억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원한의 특별한 특성을 드러내주는 것이
다.
전쟁이 끝난 뒤에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그의 애인들
목록이 출간되어 나왔다. 당연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부유한 집안 태생의
아름다운 유대인 여자도 들어 있었다. 그가 린츠나 빈 어디서도 '어떤 아가
씨와 실제로 만난'적이 없다는 확인도 상당히 믿을 만하다. 어쨌든 연극적
인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들 정도의 정열적 사건이 없었던 것만큼
은 확실하다.
이러한 결핍에 맞서 특이한 꿈들이 나타난다. 그 자신이 확인해준 것에
따르면 그것은 '역겹고 다리가 구부러진 유대인 놈들이 수백수천 명의 아
가씨들을 유혹하는 악몽'이었다. 란츠도 아름다운 금발의 귀족여인들이 검
은 털투성이 유혹자들의 팔에 안겨 있는 끔찍한 모습에 고통을 받았다. 그
의 종족이론은 성적인 질투심과 마음속 ㄱ이 자리잡은 반여성주의 감정으
로 물들어 있다. 그에 따르면 여자는 이 세상에 죄악을 가져오는 존재이고,
짐승같은 하급인간들의 쾌락적인 기술에 쉽게 넘어가는 그들의 특성이 북
방 혈통을 오염시키는 주요원인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도 비슷한 형태로 뒤늦고 억압된 남성의 고민을 표현하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의 유대 청년이 얼굴에 악마적인 기쁨을 드러낸 채 몇 시간
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아가씨를 자기 피
로 더럽히고, 그럼으로써 아가씨의 종족에서 그녀를 훔쳐내려는 것이다."
란츠나 히틀러나 다같이 불만스러운 몽상가들의 반반하고 몰취미한 그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 세계관의 전망에서 광범위하게 피어 올라
오는 역겨운 냄새는 시민세계 내부에 나타난 억압된 성이라는 현상에서 나
오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젊은날의 친구 쿠비체크와 빈의 어두컴컴한 지하세계 친구들은 히틀러가
일찍부터 온세상과 사이가 나빴고 어느 쪽을 바라보든 증오를 느꼈다는 사
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반유대주의는 그때까지 목적 없이 헤
매고 있던 그의 증오가 고정된 형태로 자리를 잡고, 마침내 확고한 증오의
대상을 유대인을 찾아낸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투쟁)에서 히
틀러는 적이 여럿이면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절대로 여
러 적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원칙
은 그 자신에게도 타당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분열되지 않는 강도로 단 하나의 현상에만 집중시키곤 했다. 그 하
나의 현상에 세계의 모든 재앙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구체적
인 하나의 형태를 향해서 모든 비난을 집중시켰고,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원인들의 조직망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위압적인 히틀러의 유대인 콤플렉스를 설명할 만한 것이
간단하게 파악되지 않더라도, 명예욕 강하고 절망한 아웃사이더가 개인 문
제를 정치 문제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출발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한 걸음씩 추락의 길을 걸었고 따라서 자신의 계급추락의 두려움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었다. 유대인 현상으로부터 그는 자기 같은 '가련한 인
간'이 역사와 자연의 법칙을 자기편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히틀러
자신의 묘사한 내용은 그가 부모의 유산이 다 떨어졌을 때 반유대주의 이
데올로기로 전환했으리라는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는 정말 힘든 처
지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힘들었고, 특히 예술가, 천재, 공적인 경탄
등을 꿈꾸면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훨씬 깊이 추락하였다.
원칙에 사로잡힌 분노한 인간, 쇠너리
세기가 바뀔 무렵 도이치 시민의 도시이자, 히트럴가 사회적인 결속의
욕구를 가지고 들어섰던 도시 빈은 세 가지 지배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었
다. 정치적으로는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와 칼 뤼거의 영향 아래 있었다.
히틀러의 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정치와 예술의 밝게 채색된 중
간영역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히틀러는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의 '추종자이며 숭배자'로 빈에 등장하
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히틀러의 침대 위쪽에는 이 남자의 격언들
이 액자에 담긴 채 걸려 있었다고 한다. '유대왕국 없는, 로마 없는/게르만
왕국을 건설하자. 만세!' 하나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도이
치계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국경 저편의 조국에 결합되기를 바란다는 내용
을 표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격언은 인기 있는 방식으
로 쇠너러의 '모든 도이치 운동'의 본질적인 프로그램을 이루고 있었다. 그
것은 독일에 있는 같은 이름의 단체와는 달이 '도이치 세계정책'이라는 표
어 아래 확장하는 제국주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쇠너러의 운
동은 모든 도이치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 안에 합쳐지는 것을 목표로 하였
다. 그것은 독일의 '모든 도이치 연합' 과는 반대로, 오히려 오스트리아 제
국의 도이치 아닌 지역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고, 다민족 국가의 존립 자
체를 반대하고 있었다.
이 운동의 창설자이며 지도자인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는 히틀러 일가
도 잘 알고 있는 저 국경 지역의 숲지대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과
격한 민주주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과도한 외국세력 콤플렉스에 사로잡
힌 듯 그는 어디서나 도이치 민족과 정신이 치명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만 보았다. 유대인, 로마 카톨릭, 슬라브 사람, 사회주의자, 합스부르크 왕
조, 그리고 어떠한 형태의 국제화도 도이치 민족과 정신을 위협하는 것으
로만 여겼다. 편지에는 '도이치의 인사를 드리며' 서명을 했고, 게르만 관습
의 부활을 위해서 다양한 행사들을 마련했다. 침버 사람들과 튜튼(도이치)
사람들이 로마군대를 절멸시키고 승리한 노레이아 전투가 있었던 기원전
113년부터 도이치의 기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쇠너러는
절망에 빠진 인간이었다. 원칙에 사로잡힌 분노한 인간이었다. 그는 저지
슬라브 성직자의 민족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답변으로 '로마에서 벗어나기
운동'을 조직했다. 그로써 그는 카톨릭 교회의 적대자가 되었으며, 그때까
지는 주로 종교적, 경제적인 이유로 전개되던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처음으
로 정치사회적으로 특히 생물학적인 반유대주의로 변화시켰다.
유치한 것들의 효과가 얼마나 강한지를 직감한 선동가인 그는 '종교는
상관없다. 난잡성은 유전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든 동화의 경향들에
반대하였다. 유대인을 세계의 모든 재앙과 두려움의 원인으로 보는 편집증
뿐 아니라 선전포고의 과격적으로 보아도 그는 히틀러의 선구자 중 하나였
다. 옛날 오스트리아의 우유부단하고 관용적인 삶의 분위기에서 그는 처음
으로 종족적, 민족적 두려움을 조직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들을 보여준 인
물이었다. 그는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도이치 소수민족이 압도되고 '학살되
는' 날이 다가온다고 느꼈다. 그는 반유대 특별법을 요구하였고, 그의 추종
자들은 목매단 유대인을 나타내는 반유대 표지를 시계줄에 매달고 다녔다.
그들의 빈 의회에서 유대인을 살해하면 돈이나 아니면 살해된 사람의 재산
으로 현상금을 주자는 주장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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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위대한 도이치 사람, 뤼거
그렇지만 히틀러는 또 다른 소시민 반유대주의의 대표자인 칼 뤼거 박사
에게서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빈 시장이며 기독교사회당의 말 잘하는 당
수인 그는 (나의 투쟁)이 가장 경탄하는 인물이다. 그는 '진짜 천재적'이고
'모든 시대의 가장 강력한 도이치 시장'이라 불리고 있으며 또한 '동부국경
의 마지막 위대한 도이치 사람'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프로그램, 특히
느슨하고 기회주의적으로 짜여진 반유대주의 프로그램과 썩어서 무너져내
고 있는 다민족 국가가 아직도 생존능력이 있다는 그의 믿음에 대해서 히
틀러는 솔직하게 비판하였다. 그럴수록 뤼거의 선동가적인 위대성은 더욱
더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가 주도적인 사회적, 기독교적, 반유대적
감정이나 확신들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전략적인 유연성도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강력한 상대방에 대해서 건방지게 원칙을 고수하려 함으로써 영향력을
잃어버린 쇠너러와는 달리 뤼거는 온화하고 능숙하며 인기가 있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했을 뿐이고 속으로는 경멸하였다. 그는 전술적, 실용적
인 사고를 하면서 이념보다는 현실을 더욱 중히 여겼다. 그가 대략 15년간
시장직에 있는 동안 교통망이 현대화되고, 교육체계가 완성되었으며 사회
보장이 개선되고, 녹지대가 만들어지고 빈에 거의 1백만이 일자리가 확보
되었다.
뤼거는 카톨릭 노동자 계층과 소시민 계층을 기반으로 해서 상승하였다.
시대의 흐름과 산업화를 통해서 사회적 추락이나 빈곤의 위협을 받고 잇는
사무직과 하급공무원, 영세상인, 임대업자, 성직자 등이 그의 지지기반이었
다. 그도 또한 쇠너러와 마차가지로 널리 펴진 공포감을 이용하였는데 다
만 선별되고 극복될 수 있는 적에 대항해서만 이용하였다. 그는 어둡게 칠
해진 공포감을 불러들이지 않고, "소시민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와 같
은 말투에 나타나는 분명하고 인간적인 상투어들을 공포심에 대항하여 내
세웠다.
히틀러의 지속적인 경탄은 능숙한 마키아벨리 신봉자였던 뤼거 시장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남자의 교훈적이고도 친근한 모습에서 자
기와 개인적인 일치점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 자신이 소박한 계층에서
나왔듯이 뤼거도 온갖 반대와 사회적인 멸시를 딛고 일어섰으며, 그를 시
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세 번이나 거절한 황제의 반대를 딛고 마침내 그토
록 열망하던 사회의 인정을 받아냈다. 용감하지만 무의미하게 사라질 적대
감을 가진 쇠너러와는 달리 뤼거는 지배계층과 조직화된 결속을 맺고서 확
고하게 위로 향한 길을 만들어나갔다. 히틀러는 그를 숭배하면서 결코 잊
을 수 없게 된 이 교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오래된 힘의 원천에서
자신의 운동을 위해 가능한 한 최고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미 존
재하는 모든 권력수단을 이용하고, 현존하는 강력한 힘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뤼거가 감정적인 총체적 표어들의 도움을 받아서 결성한 대중정당은, 1
백 년 전에도 이미 성과가 있었듯이 두려움이란 계급이해를 넘어설 정도로
강력한 유럽의 새로운 표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헤미아 국가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
국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의 점점 커지던 산업지대의 도이치 노동자
들은 1904년에 트라우테나우에서 도이치 노동자당(DAP)을 결성했다. 시골
에서 공장지대로 흘러 들어와서 파업 대체노동자로 일을 하는 싸구려 체코
인 노동력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곧 여
러 가지 형태로 유럽 전지역에 작동될,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딜레마를 해
결하려는 시도의 전조였다. 공산주의는 민족간의 대립을 절대로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인류 전체의 구호에 합당한 형태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보헤
미아와 모라비아에서 도이치 노동자의 민족적인 특별의식은 계급투쟁 이론
안에 설 자리가 없었다. 새로운 정당의 참가자들은 이전의 사회민주당원들
에서 상당수를 충원하였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연대정책이 이 지역의 체
코 다수인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근심에서 자신들의 이전의 이념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도이치 노동자당 강령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프롤레
타리아 연대정책은 '실패했으며 중부유럽의 도이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손해'였다고.
민족적 이해와 사회적 이해의 일치는 이들 도이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
로 중요한 보편적인 진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그러한 진실
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제주의와 대립시켰다. 민족공동체의 이념에서 그
들은 사회주의와 민족감정의 화해를 구했다. 정당의 강령은 방어와 자기주
장 요구를 하나로 합쳤다. 그것은 확고한 반자본주의, 혁명적, 자유주의적,
민주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 처음부터, 주로 체코, 유대 등
이른바 이방민족들에 대한 공격과 결합된 권위적이고 비합리적인 형식을
지닌 것이었다. 초기의 당원들은 소규모 광산 노동자와 방직공장 노동자,
철도 노동자, 수공업자, 노동조합원들이었다. 그들은 못 배운 체코 노동자
들보다는 도이치 시민들, 약사, 기업가, 고위 공무원이나 상인들에게 더 가
까운 감정을 느꼈다. 얼마 안 되어서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선구자 집단을 기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1차
세계 전쟁이 끝난 직후 일시적으로 원래의 국가사회주의 집단과의 관계가
상당히 밀집했는데도 그랬다. 보헤미아의 동지들은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NSDAP)의 지도자 히틀러가 20세기를 결정하는 자신의 원래 이
념보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너무나 분명하게 문제시하였
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쇠너러와 뤼거 사이를 확실하게 비교함으로써 자
기자신의 이념을 전개하려고 시도하였다. 자신의 생각이란 두 사람의 요소
를 어느 정도 결합시킨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기독교 사회당이 광범위한 계층을 잘 이해학 위해서 '모든 도이치 운동'
처럼 종족문제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이해했더라면, 그리고 민족주의적 노
선을 취했더라면, 혹은 '모든 도이치 운동'이 유대인 문제의 목적과 민족감
정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기독교 사회당이 가졌던 실용적인
지혜, 특히 그 사회주의적 생각을 받아들였더라면 내가 확신하기로 이 운
동은 당시에 이미 성공적으로 도이치의 운명 속으로 끼여들 수 있었을 것
이다.
이러한 비난을 해서 그는 자기가 이 두 정당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은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 시절에 오랫동안이 사색을 통해 얻은
정치적 계획을 갖지 못하고 쇠너러와 비슷하게 극히 일반적으로 민족주의
적인 증오심을 방어심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유대인
과 다른 '열등종족'에 대한 몇 가지 우중충한 선입견들, 그리고 실패한 희
망에서 솟아 나온 충동적인 말참견 욕구가 여기 덧붙여진다. 그는 자기 주
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성적이기보다는 기분에 따라서 파악하고, 공개된
사건들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적 세계라기보다는 정치
화의 도중에 있는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는 처음에 예술가의 꿈에 부풀어 정치에 대해서는 '곁다리' 관심을 가
졌을 뿐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운명이 주먹'이 그의 눈을 뜨게 했다. 쓰라
린 적대감을 품은 젊은 건축노동자의 이야기는 뒷날 모든 교과서에 실려서
히틀러 전설의 확고한 일부가 되지만, 그 이야기에서도 그는 노동조합에
들어오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사태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라는 재미
있는 이유가 붙어 있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보아 정치는 오랫동안 괴로움
을 덜어내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세계가 잘못했다고 비난하고 자신이 운명
을 세계질서의 부족 탓으로 돌리면서 거기서 희생제물을 찾아내는 방법이
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반유대주의자 단체에 가입하였다.
극단적인 비참 상태
히틀러를 쿠비체크와 헤어진 다음에 들어간 펠버 거리의 집을 금방 다시
나와서 1909년 11월까지 여러 번 이사했다. 그때마다 자기 직업을 '순수화
가', 한 번은 '문필가'라고 소개하였다. 몇 가지 사실은 그가 법적 의무인
국방의무를 위한 '기록'을 피했으며, 이렇게 자주 이사를 해서 관청의 체포
를 피하려 했다는 짐작이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렇게
자주 이사를 한 것은 아버지의 유산과 그이 목적 없는 불안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일지 모른다. 이 시기의 묘사들을 보면 그는 창백하고 움푹 팬 모
습에 머리카락을 이마에 깊숙이 드리우고 성급하게 움직이곤 했다. 그 자
신이 나중에 확인해준 것에 따르면 그는 당시 매우 두려움이 많았고, 유명
한 사람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다섯 사람 앞에서 연설을 하지도 못할 정도
였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처럼 고아연금으로 생계를 꾸렸다. 어떻게 해서인지 미술 아
카데미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해서 고아연금을 받았다. 그러나 그 동안 근
심 없고 속박 없는 삶을 살도록 해주었던 아버지의 유산도, 부모의 집을
팔아서 남은 돈도, 1909년에는 다 떨어졌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9월에 시
몬 기념 거리에 세든 사람 집에 다시 방 한 칸을 세들었다가 11월에 그 집
에서 나왔다. 처음으로 중요한 히틀러 전기를 쓴 콘라트 하이덴은 히틀러
가 그 당시 '극단적인 비참'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며칠 밤은 지붕도 없이
공원 벤치와 커피숍에서 잠을 잤지만 겨울이 닥쳐오자 그럴 수도 없게 되
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909년 11월은 특별히 추웠다. 비가 많이 내리고 드물지 않게 비에 섞여
눈까지도 내렸다. 같은 달에 벌써 히틀러는 집 없는 사람을 위한 마이틀링
수용소 앞에 저녁마다 늘어선 사람들 대열에 끼여들었다. 여기서 그는 라
인홀트 하니쉬라는 이름의 떠돌이를 알게 되었다. 하니쉬는 나중에 손으로
쓴 보고서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이곳저곳
떠돌아다닌 끝에 마이틀링의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수용소를 찾아냈다. 왼
쪽 간이침대에는 완전히 상처투성이의 발을 가진 야윈 젊은이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강한 베를린 사투리를 쓰고 있었는데 그는 독일을 꿈꾸고 있
었다. 나는 그의 고향인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를 지나왔기에 그의 이야기
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떠돌이 하니쉬와 함께한 생활
1910년 여름까지 대략 일곱 달 동안 히틀러와 하니쉬는 가까운 친구이자
사업상의 동지로 지냈다. 물론 하니쉬 역시 당시의 다른 증인들보다 더 믿
을 만하지는 못하다. 그렇지만 하니쉬가 히틀러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지
내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강조하고, 그에게 함께 일자리를 찾아보자
고 설득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심리적으로 상당히 그럴싸한
부분이다. 사실상 히틀러의 시민계급에 대한 동경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
라인홀트 하니쉬 같은 문제투성이 실패자들과 함께 보낸 이 수용소 시절보
다 더 분명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다.
1938년에 하니쉬를 잡게 되자 히틀러는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인생
의 절정에서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독특한 독선의 태도로 이 시절의 억누
르는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환상 속의 궁전에 살았
다."
살아가는 수완이 있고 자기 계층의 온갖 곤궁, 술책, 기회 등을 잘 알고
있던 하니쉬는 어느 날 히틀러에게 어떤 직업을 가졌었냐고 물어서 화가라
는 대답을 들었다. 페인트공인 모양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 직업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대꾸했다. 하니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심들이 있지만 그
래도 다음의 보고에서 히틀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모욕감을 느끼
고 자신은 그런 종류의 화가가 아니라 공부한 사람이고 예술가라고 대답
했다."
하니쉬의 제안에 따라서 그들은 함께 사업을 벌였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그들은 20구연 멜데만 거리에 있는 싸구려 대중숙박시설인 남자 하숙집으
로 거처를 옮겼다. 침실 정리가 이루어지는 낮 동안에 히틀러는 독서실에
신문을 펼쳐놓고 앉아 있곤 했다. 그는 대중적인 과학잡지를 읽거나 아니
면 빈 풍경을 담은 우편엽서들을 그렸다. 정밀한 수채화들이었다. 하니쉬는
그것을 그림 판매상들, 목수들, 때로는 양탄자 짜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그
들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서 "안락의자나 소파의 높다란 등받이 속에 그 그
림을 넣었다." 수익금은 나누어 가졌다. 히틀러는 이런 초라한 옷차림을 하
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처지에 있
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서 하니쉬는 자신이 '때로는 아주 좋은 주
문을 따낼' 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여러 주가 지나갔다."
남자 하숙집의 거주자들은 온갖 계층 출신이었다. 주변의 공장과 기업체
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와 사무직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와 함께 부
지런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니쉬는 악보 베끼는 사람, 가격표 그리는 사람,
이름 머리글자 파는 사람 등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인 실
패자들이 그 구역의 상태를 더 잘 보여준다. 여러 가지 모험가들, 파산한
상인들, 악사, 거지, 채무자, 혹은 쫓겨난 관리 등이 주요 거주자들이었다.
다민족 국가의 모든 지방에서 모여든 떠돌이들이었다. 그리고 행상이나 가
두 판매를 해서 사회적 상승을 시도하려는, 제국동부에서 온 유대인들이었
다. 그들 모두를 결합시키는 것은 그런 가난에서 벗어나서 위를 향한 도약
을 엿보고 있는 의지였다. "연대감의 결핍이라는 것이 사회적인 추락자 계
급이 중요한 특징이다."
히틀러는 하니쉬를 빼면 남자 하숙집에서 친구가 없었다.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의 참을성 없은 성질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영혼
에 거슬리는' 빈 사람 타입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
니쉬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빠져나온 이후로 그가 더 이상 우정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친밀한 관계를 그를 화나고 지치게만
했다. 그 대신에 그가 배운 것은 천박한 사람들 사이의 동료관계였다. 그것
은 접촉과 익명성을 보장하고, 아무 때라도 철회할 수 있는 충성을 제공하
였다. 그것은 사회의 여러 차원에서 거의 언제나 동일한 개성을 가지고 겪
는 늘 새로운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전쟁의 참호에서 자신의 당번병과 운전수들 한가운데서-그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을 그는 당수 시절이나 나중에 제국수상 시절에도 언제나 좋
아했다. -그리고 총통 사령부의 방공호 속에서 언제나 히틀러는 남자 하숙
집의 생활방식을 되풀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황홀한
공동생활 방식이었고, 일반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과 상당히 일치
하는 것이었다. 집의 관리자 입장에서 보면 그는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다.
툭하면 정치 이야기를 해서 자극하는 사람이었고, 하니쉬의 보고에 따르면
"주변이 뜨겁게 달구어지는 수도 많았고, 서로간에 불쾌하게 사나운 눈길
을 주고받았다."
히틀러는 자신의 생각을 상당히 날카롭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과격한 대
안들, 모든 사건에 대한 지나친 관심 등은 그의 사색의 기본이었다. 그이
기피적인 의식은 모든 것을 지나치게 몰고가고, 별 것 아닌 사건을 형이상
학적인 파국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일찍부터 그는 위대한 모티프들의 유
혹을 받았다. 영웅적인 것, 숭고하게 장식적인 것, 이상적인 것을 향한 그
의 단순하고도 예술가 같은 회고적인 경향은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 신들,
영웅들, 거대한 것으로 확장된 의도, 혹은 무시무시한 최상급 등이 그를 자
극하고, 현재의 지겨운 생활상태를 덮어주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그를 밝은 불꽃으로 데려갔다."고 하니쉬는 서투르지만 분명하게 적었다.
히틀러는 나중에 자신이 이미 당시에 베를린 개축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상 끊임없는 계획입안의 충동도 이런 맥락에 들어 있다.
건축청부업자에게 고용된 일도 옛날이 건축가의 꿈을 도로 일깨웠다고 한
다. 몇 가지의 모델 팸플릿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거대한 비행기 제조 회
사의 소유자가 되어서 '매우 부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꿈꾸었다.
그 사이에 그라이너의 소개로 머릿기름 광고판과 이불깃털 사업을 위한
광고판, 그리고 '테디'라는 이름의 땀날 때 쓰는 파우더를 위한 광고판을
그렸다. 분명하게 히틀러의 서명이 들어있는 작품이 발견되었다. 그 작품은
경직된 학생 같은 서투른 솜씨로 두 명의 우편배달부를 그린 것이다. 한
명은 지쳐 주저앉아서 굵고 푸른 색 땀방울이 양말에서 배어 나오고 있는
데 다른 사람은 자신의 '친애하는 형제'에게 매일 1천 개의 계단을 오르내
려도 '테디 파우더만 있으면 즐거움'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또 다른 광고판
에는 성 슈테판 교회의 탑이 비누더미 위로 장엄하게 솟아 있다. 히틀러
자신은 이 시기의 생활상태에 대해서 자신이 마침내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었다는 점이 기억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는 교외의 자그마한 싸구려 찻
집에 신문을 펼쳐들고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곤 했으며 반유대주의 신
문인 (도이치 민족지)를 즐겨 읽었다.
위대한 바그너와의 내적인 동류의식
그 모든 것을 합쳐보면 이 스무 살 청년이 삶과 담을 쌓고 엄격한 의미
에서 비정치적인 괴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기에도 자신이 별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시
기에 '음악'에서만 우상이었던 것이 아니다. 초기엔 삶에 실망하고 좌절도
겪었지만 완강한 소명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가 마지막엔 '세계적 명성을
얻어낸 그의 삶'을 히틀러는 자신의 삶이 모범으로 여겼다. 바이로이트 대
가의 모습에서 자신의 성취와 실책을 찾아내려는, 낭만적인 천재개념의 유
혹이 분명하게 보인다. 한 세대가 바그너는 통해서 혼란을 겪고 제압당하
고 시민세계에서 멀어졌다.
젊은 히틀러가 학업을 포기하고, 약속들로 채워진 유혹적인 대도시로 탈
출해서 최초이 이미지를 완성하는 것도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경탄에서
연유한다. 수많은 동시대 사람들이 비슷한 기대를 가지고 밟았던 길이기도
했다. 재주 잇고 위태로운 아웃사이더들의 왕도였던 것이다. 린츠의 세관원
아들의 억눌린 잿빛 모습은 낭만에 젖은 도망친 학생들이 무리에 끼여든
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토마스 만, 하인리히 만,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헤르만 헤세 등이 있고, 학교에서 도망친 청소년 유형은 세기가 바뀔 무렵
수많은 작품들에 등장한다.
에밀 슈트라우스의 1901년이 단편소설 (친구 하인), 릴케의 (체육시
간)(1902년), 로버트 무질의 (젊은 퇴를레스)(1906년), 헤르만 헤세의 (바퀴
아래서)(1906년), 프랑크 베데킨트의 (봄의 깨어남)(1906년), 그리고 일년
뒤에 나온 프리드리히 후흐의 (마오) 등에 이런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도망치거나 혹은 몰락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
그들은 시민사회에서 겪는 고통을 미화하고, 일상의 의무목록에 짓눌려
있는 아버지들의 평범한 세계에 맞서 사회적 생산성이 없는 '예술가'라는
이상형을 내세웠다. 그 뒤에서 끊임없이 예술가와 시민성, 천재와 시민성이
라는 낭만적인 대립이 전개되었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시민의식을 칼모
어(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 (도둑떼)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한 명)와 수많은
다른 도둑 두목들, 그리고 우수에 젖은 반항자들 이후로 바로 이런 낭만적
인 대립에서 경탄할 만한 반주인공들을 얻었던 것이다. 시민성이란 질서,
헌신, 지속성 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쓸모있는 것을 만들어
냈다. 그에 반해서 정신이 유례 없는 자기상승, 그 명성의 행위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극단적인 거리를 두고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나 천재 등 복잡한 인간은 내면 깊숙이 시민세계에 속하지 않으
며, 그들의 사회적인 위치는 저 멀리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이런
유형을 처음으로 분석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언급하고 있듯이 거기서부터
자살자들의 관을 두는 곳, 불멸의 전당 등은 사회와 비슷한 거리만큼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고 보면 젊은 히틀러가 고차원적인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했던 준비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엉성한 것이었
던가. 그의 재능이란 얼마나 의문 투성이었던가, 남자 하숙집에서의 생활은
그 비천한 고등사기술, 기생습관, 반사회성 등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 것인
가. 그는 후기 시민사회적인 천재관념에서 이 모든 자기변명을 찾아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에서 부정할 수 없는 모범을 찾아내고 있다.
히틀러는 뒷날 스스로 밝히기를 리하르트 바그너를 빼면 "모범의 될 만
한 것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음악가와 드라마 작가로서
의 바그너뿐 아니라 '도이치 민족을 사로잡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 모습'을
가졌던 그의 강력한 개성 전체를 들고 있다. 그는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서
'도이치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 바그너가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지녔는지
지적하곤 하였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이고 하는 의지 없이' 정치적으로 작
용한 바그너의 용기와 에너지를 경타하고 있으며, 이 위대한 남자와의 내
적인 동류의식이 자신에게는 '히스테리적인 흥분'을 일으켰다고 했다.
히틀러와 바그너의 유사성
실제로 두 사람 사이의 일치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젊은 히틀
러의 모방으로 인해 더욱 비슷해진 기질상의 접근은 이상하게도 가족 같은
유사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토마스 만이 처음으로 '히틀러 형제'의 초상화
를 그렸는데, 그는 1938년에 히틀러가 승리의 절정에 있을 때 이렇게 썼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 현상에서 예술가의 한 출현양식을 보아야 하지 않
겠는가? 특별히 부끄러운 방법이지만 모든 것이 여기에도 나타나 있다. '힘
든 특성', 게으름, 어린시절을 정의하기 어려움, 어느 한 곳에 밀어 넣기 어
려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성격, 가장 깊은 사회적, 영
적 보헤미안 상태 안에 반쯤 멍청하게 식물처럼 들어 있기, 근본적으로 오
만한 거부, 자신은 너무 훌륭해서 이성적이고 명예로운 활동을 할 수 없다
고 거부하는 것 등의 요소들이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인가? 무엇인가 규
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을 아껴두려는 어두운 예감에서다. 그
규정할 수 없는 것을 이름 붙여 말한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게다가 양심의 가책, 죄의식, 세상을 향한 분노, 혁명 본능, 폭발적
인 보상욕구의 무의식적인 퇴적,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입증해야 한다는 끈
질긴 의식... 이 모든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유사성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 앞에서 눈을 감지는 않겠다."
그밖에도 둘은 아주 특이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조상의 신원을 확인하
기 어렵다는 점, 학교에서의 실패, 군대 도피, 병적인 유대인 증오, 채식주
의 등이다. 바그너의 경우 채식주의는 거의 광적인 상태여서 인간은 채식
을 통해서 구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감정상태가 좌절과 열광, 승
리와 파국이라는 양극단까지 직접 교차한다는 점도 두 사람이 비슷하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수많은 오페라에서는 자신의 법칙만 따르는 아웃사이더
와 전통에 결부된 완강한 질서와의 고전적 갈등이 나타나곤 한다. (리엔
치), (로엔그림), (슈톨칭), (탄호이저) 등을 보면서 미술아카데미에서 거절
당한 히틀러는, 남자 하숙집의 독서실에 그림물감을 펼쳐놓고 앉아 있을
때의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의 대립을 본다고 느꼈다.
때로 그는 그토록 추종하는 사람의 모범인 바그너를 따라서 살거나 바로
그 모습을 따라 스스로를 양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양쪽 다 지나치게
흥분된 권력의지와 폭군적인 성향을 가진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예술은 억
제할 수 없는 광범위한 정복의지의 도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대규모이면서 위엄 있는 것에 대해서 항거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예술적으로 이중적인 취향, 마취시키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애착 등은 바
로 이러한 성향에 근거한다.
(리엔치) 이후 바그너의 최초의 대규모 작품은 2백 명의 남성 코러스와
1백 명의 관현악단을 위한 것이었다. 날카로운 콜로포늄의 섬광 아래서, 전
사한 혼령들의 저당인 발할라, 열병식, 예배의식이 뒤섞이면서 펼쳐지면 바
그너 음악의 특징인 거리낌없고 노골적인 효과, 공허하게 위대한 잠파노
효과를 통한 자기유혹 등이 나타난다. 제3제국의 행사양식은 바그너 오페
라의 전통, 이 선동적인 예술형식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 다 고도의 섬세한 심리적 감각을 보인다. 이것은 놀랍게도 진부
함에 대한 불감증과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천민적인 참칭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이야기되는 평가에
나타나 있다. 고트프리티 켈러는 이 시인 작곡가를 '미용사 악당' 이라고
불렀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동시대 사람 하나는 히틀러를 가리켜 '낙인
찍힌 급사장'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수사적인 강간살인자'라고 불
렀다. 그러한 표현들이 보여주는 통속적이고 저급한 평판의 특성은 두 사
람에게 공통적이다. 그것은 천재적인 사기술과 고취된 사기도바꾼의 모습
인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혁명가 역할을 하면서 왕의 친구 노릇도 했듯이-칼
마르크스는 '국가 음악가' 라고 빈정거렸다-젊은 아돌프 히틀러 또한 정확
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회에 대한 자신의 미움을 기회주의적인 본능과 화
해시킬 어떤 상승을 꿈꾸었다. 바그너는 예술을 존재의 목적이며 규정으로
삼고 예술가를 존재의 최고 심판자라고 칭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난 삶의
모순들을 없앴다.
"정치가가 절망하고 손을 내려놓을 때, 사회주의자가 쓸모없는 체계들로
자신을 괴롭힐 때, 철학자도 겨우 해석만 할 뿐 미리 예고할 수는 없는"
시간에 언제나 예술이 구원하며 개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표현한 예
술의 이끌림에 따라 삶을 전체적으로 미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예술작품의 수준으로 올라가고, 정치는 예술의 정신에서 새롭게 완
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3제국에서 공식적인 생활이 연극화되고, 정부는
연출의 정열을 보이고, 연극학은 정치적인 실제가 되고, 드물지 않게 정치
의 목적이 된 듯이 보이는데 이러한 바그너 강령의 요소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그러나 그 이상의 공통점들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당시 경탄하던
친구(바그너)에 대해서 그 유명한 '시대에 안 맞는 관찰 4번'에서 말했던
'딜레탕트가 되려는' 타고난 성향은 젊은 히틀러에게서도 나타난다. 두 사
람은 모든 영역에 독단적으로 간섭하려는 두드러진 욕구를 보였다. 사람들
에게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하여 칭송받으려고 하는 고통스러운 명예욕, 금
세 활기를 잃어 버리는 어제의 명성을 오늘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보이려
는 욕구를 가졌다. 두 사람 다 소시민들과 가까웠다. 그것은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생각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러한 성향은 타고난
성품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바그너와 히틀러의 차이점은, 히틀러에겐 자제력과 노력이 완전히 결핍
되어 있다는 것, 거의 최면적인 게으름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 태도임
을 알 수 있다. 어느 날인가는 들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절의 이 모든 고통스런 굴욕과 고통에 대해서 무시무시한 복수를 할
것이라는 번쩍이는 예감으로 강화된 존경스러운 의지력의 작업이었다.
비정치적인고 연극적인 세계관
리하르트 바그너의 표지를 지닌 히틀러가 세계에 대해서 비정치적이고
연극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징후들에 나타난다. 그 자신
이 표현한 대로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 파고드는' 여러 날을 보내고 난 다
음 어느 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어슬렁거리다가 빈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
위를 구경하게 되었다. 약15년이 지난 다음에 이 체험을 기억해서 서술한
내용 속에 이 '끝없는 4열 행렬'이 그에게 얼마나 엄청난 인상을 불러 일으
켰는지 담겨 있다.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그는 링 거리의 가장자리에 서
서 '숨을 죽이고 천천히 지나쳐가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의 움직
임'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두려운 압박감을 느끼면서' 돌아서서
집으로 달려왔다. 그 행렬이 남긴 장엄한 효과에 압도된 상태였다.
어쨌든 그는 이 사건의 정치적인 동기나 배경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으며 이 대규모 인간집회가 어떤 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문
제에만 몰두하였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연극의 문제였으며 그가 본 것은
정치가에게 무대연출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히틀러가 간혹
연극작품을 시도하면서 '가능한 한 장엄한 연출'에 얼마만한 의미를 부여하
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친구인 쿠비체크의 눈에도 띄었던 일이다. 이
최초의 히틀러 숭배자는 뒷날 연극의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지만 친구
가 '엄청난 경비'를 생각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그것은 바그너가 무대
에 요구했던 규모도 '완전히 뒤로 물러서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5년 간의 빈 시절에 지적인 교양체험을
했다고 선전하고 '무한히 많이, 그리고 철저한' 독서를 하였다고 지적하였
다. 건축물과 오페라 극장을 방문한 것을 빼면 그는 '책들을 유일한 벗으
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절의 중요한 인상들은 지적인 것이기보다
는 오히려 선동가적이고 정치책략적인 차원에서 구했다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이다. 다른 건축 노동자들이, 자만심 때문에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서
접촉을 기피하는 시민계급의 인물을 '현장'에서 쫓아버리려 한 사건을 통해
서 그는 이런 논쟁들을 간단히 끝내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은근
히 경탄하는 말투로 말한 바로는 '감히 반항하려 드는 자의 골통을 부숴
놓는' 것이다.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 정치적 각성을 다루고 있는 부분은
이론적 배경이 약하기 때문에 그가 인정한 당시의 이념들을 비판적으로 다
룬 흔적이 없다. 그는 여기서 분명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도이치 시민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좇고 있을 뿐이다. 그 대신 이념들의 조직화 문제, 대
중동원에 적합한 특성 등이 그에게 탐욕적인 관심을 일깨우고 최초의 번쩍
이는 깨우침들을 보이고 있다.
그의 뒷날의 연설들과 공고문에 나타나는 수많은 특징적인 어법들은 빈
시절에 이미 만들어졌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대중에게 강요하는 '배후의
인물들' '어두운 조종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하니쉬의 보고에 따르면 어느 날 히틀러는 베른하르트 켈러만의 소설 (터
널)을 대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완전히 도취된 상태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영화에서는 민중연설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제 남자 하숙
집에서 열렬한 연설들이 이루어졌다."고 하니쉬는 확인해주고 있다. 요제프
그라이너는 거짓 감사편지와 위조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비밀제조법에
따라 만든 머리털 나는 약을 선전하는 안나 칠락이라는 여자를 히틀러에게
소개시켜주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히틀러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그 여자의 기술을 보며 감탄하고 나서 심리적인 영향력의 무서운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선전이야, 선전, 아주 오랫동안 선전
해서 마침내 믿음이 생겨나고 어떤 게 상상이고 어떤 게 현실인지 모를 정
도가 되기까지 선전하는 거지." 선전이란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정수거
든... 하늘나라가 됐든, 머릿기름이 됐든 말이야."
물론 히틀러가 사회민주당의 선전을 보고-사회민주당의 신문, 데모, 연설
등-이끌어낸 결론을 읽어보면 더욱 확실한 근거를 보게 된다. 이 결론들은
독특한 실천법을 규정하고 있다.
광범위한 대중심리는 어중간하거나 약하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한다. 여
자의 영적인 감수성은 추상적인 이성의 근거를 통해서 규정되기 보다는,
보충적인 힘을 향한 정의 내리기 어렵고 감정적인 그리움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여자는 약자를 지배하기보다는 강자에게 굽히기를 좋아한다. 마찬
가지로 대중은 간청하는 사람보다는 지배자를 사랑하고, 자유주의적인 태
도로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독불장군처럼 자기주장만 펴는 이론에
대해 내심 더욱 만족한다. 대중은 자유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모르며 심지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뻔뻔스러운 정신적 테러
나, 인간적인 자유를 함부로 없애버리는 일 따위는 그들의 의식 속으로 들
어오지 않으며 그들은 그런 이론이 숨기고 있는 내적인 망상을 전혀 짐작
도 못한다. 대중은 오직 목적 의식이 확고한 표현들의 가차없는 힘과 잔인
성만을 보며, 그러한 잔인성 앞에 마침내 스스로 몸을 굽힌다... 개인을 향
한 육체적인 테러가 대중에게 미치는 의미도 역시 이해가 되는 일이다. 여
기서도 심리작용의 정확한 계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터, 공장, 집회장의
테러, 그리고 이따금 열리는 대규모 시위 등은 같은 정도의 테러가 그에
맞서지 않는 한 언제나 효과가 있는 법이다.
1910년 8월 초에 히틀러와 하니쉬 사이에 결별이 찾아왔다. 히틀러는 여
러 날 걸려서 빈 의회의 풍경을 그렸다. 그는 고전적인 사원양식에 매혹되
어서 그것을 '도이치 땅에 세워진 헬레니즘의 경이로운 걸작'이가고 불렀고
극히 양심적으로 열성을 다해서 그렸다. 어쨌든 그는 이 그림이 50크로네
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으나 하니쉬가 그것을 10크로네를 받고 팔았다. 둘
사이에 다툼이 있은 후 하니쉬가 나간 사이 히틀러는 하숙집 동료의 도움
을 받아서 그를 체포해서 고소했다. 하니쉬는 8월 11일 심문에서 7일간의
구류를 받았다. 그는 남자 하숙집에서 프리츠 발터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
기 때문에, 양보를 해서라도 소송을 유리하게 만들어보려고 애썼다. 그림을
산 사람의 아내는 나중에 자기 남편이 정말로 그림값으로 10크로네를 지불
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하니쉬는 그 사람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어서 한동안은 역시 남자 하숙집에 사는 노이만이라는 유대인이 그림 판
매를 맡았다. 그리고 때로는 히틀러 자신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손수 고
객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3년 반 동안 히틀러의 이러한 교양 체험은 계속되었다. 거기서 인간에
대한 그의 견해들과 사회에 대한 관점이 확고하게 형성되었다. 그가 드높
은 야망을 가진 채 이러한 환경에서 증오와 반역의 콤플렉스를 발전시켰다
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에도 그는 특히 자신이 살던 구역을 통과하는 길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쓰
레기, 역겨운 더러움과 어두운 가난의 모습들'을 기억만 해도 소스라쳐 놀
라곤 했다. 공감이라는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시기의 체험들과 생활환경들은 히틀러에게 무엇보다도 전쟁철학의 토
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그의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생각,
즉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그가 뒷날 수많은 연설들과 발언문, 책의 페이
지들 혹은 총통 사령부의 원탁 대화에서 '가장 잔인한 싸움'의 이념, '가차
없는 자기주장'의 이념, 근절, 냉혹함, 잔인성 혹은 강자의 권리 등에 대한
이념을 고백할 때마다, 그 속에는 언제나 이 남자 하숙집 시절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비속한 학교에서 얻은 잊을 수 없는 숙제였다.
사회적 다윈주의
히틀러의 생각에 들어 있는 사회적 다윈주의는 흔히 말해지듯 남자 하숙
집의 개인적인 체험에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과학에서 권위
를 얻은 한 시대의 성향이 그런 생각 속에 들어 있다. 스펜서와 다윈이 전
개한 생명체의 발전과 도태의 법칙들은 수많은 사이비 과학 출판물의 상위
심급기준처럼 되었다. 그것은 '생존을 둔 싸움'을 기본법칙으로 삼고, 인간
과 민족들이 함께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강자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을 널리 유행시켰다. 이른바 사회적 다윈주의 이론은 19세기 후
반에 어쨌든 잠시 동안은 모든 진영과 노선들, 정당들에 의해서 받아들여
졌다. 그것은 초창기에 통속적인 좌익 계몽주의의 요소를 지녔다. 그러다가
점차 우익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해서 민주적 혹은 인간적 이념의 반자연성
을 입증하는 역할을 떠맡기에 이르렀다.
자유 사냥터처럼 민족들의 운명과 사회적인 대립들도 생물학적인 전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도태와 육종양성을 포함하는 엄격
한 선별과정을 통해서 결함이 발전되는 것을 막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들
보다 우위를 차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상의 잡문들을 써서 널리
인기를 얻고 있던 조르주 바셰 드 라푸지, 메디슨 그랜트, 루트비히 굼플로
비츠, 오토 아몬 등의 수많은 글에서 이러한 사상을 위한 풍부한 어휘와
상상력이 제공되었다.
무가치한 생명 없애기, 민족정책의 목표 만들기, 쓸모없는 인간들을 강제
수용해서 불임으로 만들기, 머리 크기, 귀의 모양 또는 코의 길이 따위로
생존경쟁을 위한 유전적 특성을 가려내기 등이 거론되었다. 약자를 두둔하
고 선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들은 드물지 않게 기독교 도덕, 관용, 문명
진보 등을 단호하게 거부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다윈주의는 포괄적인 체계
로 만들어지지 못했고 그 대표자들에 의해서 주장이 철회되기도 했기 때문
에 광범위하게 파괴적인 효과를 내지는 못 했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시민
시대 고전적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였고, 제국주의적인 책략과 억센 자본주
의적 관철의지를, 피할 길 없는 자연법칙의 형식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그 시대의 반민주적 경향들과 결합했다는 사실이 더
욱 중요하다. 자유주의, 의회주의, 평등이념, 국제주의 등은 자연법칙에 반
하는 것이고 종족혼합을 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최초의 중요한 종족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킨 고비노 백작은 (인간종족의 불평등에 대하여, 1853
년) 냉혹하고 귀족주의적인 보수주의로 민주주의, 민중혁명, 그리고 그가
경멸적으로 '시골감각'이라고 불렀던 그 모든 것의 반대자로 나섰다.
그러나 광범위한 도치이 시민계급에 더 큰 작용을 한 것은 원래 영국인
이었다가 나중에 도이치로 귀화한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작품이었
다. 이름있는 장교집안 출신이고 교육을 받은데다 신경질적이고 허약한 성
격의 그는 대학공부, 문필업,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히틀
러가 태어나던 해에 몇 주간 예정으로 빈으로 들어왔다가 20년 간 이 도시
에 머물렀다. 그는 합스부르크 다민족국가와 만난 결과로 종족적 역사이론
을 발전시켜서 경탄도 받고 배척도 받았다.
특히 그의 잘 알려진 작품 (19세기의 기반)(1899년)은 개별적으로 파고든
해석을 통해서 고비노의 광범위한 생각들을 뒷받침하고 대담한 사색을 펴
서 유럽 역사를 종족싸움의 역사로 해석하였다. 로마 제국의 붕괴를 보면
서 그는 이 몰락과정의 고전적인 모델을 혈통 혼합과정으로 파악하였다.
종족의 우세가 혼란스럽게 진행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 옛날의 로마 제국
이나 현재의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어떤 특정한 국민, 어떤 민족, 어떤 종
족이' 파괴과정을 수행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집중'이 혼합현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가벼운 재능, 때로는 독특한 아름다움, 프랑스 사
람들이 '육감적인 매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혼혈아들의 특색이다. 이러
한 것을 오늘날 빈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모이는 도시에서는 매일같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독특한 불안정, 약한 저항력,
성격의 결함 등 도덕적인 퇴화를 볼 수 있다."
체임벌린은 로마의 성문 앞으로 몰려드는 게르만족 고귀한 종족 프로이
센과 비교하였다. 프로이센은, 종족이 뒤죽박죽인 다민족국가와 비교해 볼
때 당연히 우세하다고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엘리트 개인주의자에겐
두려움과 방어의 느낌이 압도적이다. 계속 되풀이되는 염세적인 비전을 가
지고서 그는 게르만 사람들이 '생사를 건 말없는 싸움에서 종족의 심연 가
장자리에' 몰려 있다고 보았으며 혼혈아가 되는 망상에 시달렸다.
"아직 아침이지만 어둠의 세력은 그 촉수를 뻗쳐 우리 몸 수백 군대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어둠으로... 끌어당기려고 한다." 그러므로 히틀러의 사
회적 다윈주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단순히 '집없는 자들의 철학' 만
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접에서 히틀러와 시민 시대의 깊은 결속이 뚜
렷해지는 것이며, 그는 다만 시대의 불법적인 아들이고 그 파괴자였을 뿐
이다. 근본적으로 그는 교외의 카페에서 제공되는 신문이나 그 밖의 책, 저
질 잡지, 오페라, 그리고 정치가들의 연설에서 얻은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
다. 그외 세계관에서 특별히 망가진 부분만이 하숙집의 경험을 반영한다.
다름 아닌 저 저급한 표현방식이다. 그는 정치가로서 대륙의 지배자가 된
뒤에도 여전히 '동쪽에서 온 더러운 것들' '신부 새끼들' '병신 같은 예술
쓰레기', 처칠을 가리키는 '네모 주둥이' 따위의 표현들을 썼다. 그리고 유
대인을 '한꺼번에 때려죽여야 할 돼지새끼들'이라고 불렀다.
히틀러는 이 시절의 분위기와 색채를 결정하고 있는 복잡한 생각들을 예
술에서 배운 감수성을 가지고 받아들였다. 어떤 개인이 아니라 시대가 그
에게 이념들을 주었다. 반유대주의와 사회적 다윈주의말고도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가진 사명의식 역시 그렇다. 그것은 염세적인 두려운 꿈의 다른 측
면이었다. 처음에는 극히 혼란스럽다가 우연히 정리된 세계관에는, 세기가
바뀔 무렵의 훨씬 더 일반적이고 지적인 유행의 영향을 받은 이념 조각들
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의 철학, 이성과 휴매니티에 대한 회의, 그리
고 본능, 피, 충동에 대한 낭만적 찬양이었다. 초인의 힘과 빛나는 반도덕
성에 대한 니체의 주장은 저속화된 현실 감각, 명랑성과 이성을 향한 의지
등은 받아들이지 않고 '야만적으로 열광하고 유혹되려고만' 한다고 말한 적
이 있다. 증명할 길 없는 의지 이론, 개인의 부정, 천재의 대한 몽상, 동정
론, 유대인에 대한 증오, 학문에 대한 증오 등만을 받아들이려 한다는 것이
다.
현실에 맞선 꿈들
한 번 더 리하르트 바그너가 등장한다. 그의 예를 들면서 니체는 위의
오해를 언급했다. 바그너는 젊은 히틀러의 위대한 생의 모범일 뿐 아니라
스승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그의 이데올로기적인 영향을 광범위하게 받아
들였다. 그를 통해서 시대의 부패한 정신이 중개되었다. 히틀러는 세기가
바뀔 무렵 널리 읽히던 바그너의 정치적 글들을 좋아했다. 바그너 문체의
과장된 광대함은 히틀러의 문법감각에 영향을 남겼다. 오페라와 함께 바그
너의 이런 글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요소들에서 히틀러가 얻게 된 세계
관의 종합적인 이데올로기 배경을 이루게 된다.
즉 다위주의, 반유대주의("나는 유대종족을 순수한 인류와, 인류가 지닌
그 모든 고귀함의 천적으로 여긴다.") 게름나적인 힘의 표상, 해방의 야만
성, (파르시팔)의 혈통정화에 대한 신비주의, 작곡하는 연극인의 연극예술
세계 전부 등이었다. 그의 연극예술에서는 선과 악, 순수한 것과 타락한
것,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들이 날카롭게 이중적인 위치에서 적대적으로 대
립하고 있다. 황금의 저주, 지하에서 우글대는 열등종족, 지크프리트와 하
겐의 갈등, 보탄의 비극적 정신 등이었다. 피의 증기, 용 죽이기, 지배욕,
배신, 성욕, 이교도, 그리고 마침내 구원과 연극 수난의 종소리 등으로 이
루어진 비상하게 해석능력이 있는 세계, 바로 이것이 히틀러의 두려움과
승리의 욕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데올로기적 환경이었다. 보편적으로 타
당한 세계관을 향한 독학자의 열망을 품고서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세
계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미 확신이었고 '단단한 기분'이었다.
히틀러는 빈 시절을 자기 생애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긴 하지만 가장 힘
든 학교'라고 불렀으며 거기서 '진지하고 조용해졌다'고 말했다. 일생 동안
그는 이 거절과 모욕의 도시를 미워하였다. 이 점에서도 모범인 리하르트
바그너와 비슷하다. 바그너는 젊은 시절에 경험한 파리에서의 실망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지 못 하고 파리가 화염 속에 몰락하는 환상을 사랑했다. 한
츠를 도나우 강변의 문화적 대도시로 만들려는, 이 모든 자연적인 조건들
을 넘어서는 히틀러의 거대한 계획이 빈에 대한 줄지 않는 원한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은 억지가 아니다. 빈을 잿더미로 만들려는 환상으로 때늦은
만족을 얻으려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1944년 12월에 빈에
대공포를 추가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면서, 이 도시는 포탄전을 배워
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그를 점점 억압하였다. 모든 증언이 똑같지는
않았지만 1910년에서 1911년으로 바뀔 무렵에 그는 아주머니인 요한나 ㅍ
츨에게서 상당한 돈을 송금받았다. 그러나 이 돈은 새로운 시작, 어떤 진지
한 출발을 가능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목적 없이 방황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학생, 예술화가 혹
은 작가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여전히 건축가로서의 불
확실한 희망을 품었다. 그러면서 그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꿈들만이 원대하고 위대한 운명을 지향하였다. 그가 현실에
대항하여 이꿈을 지속적으로 가졌다는 사실은, 그 모든 게으름과 수동적인
목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전체에 분명한 내적인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확정되지 않고 임시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노동조
합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시민적인 욕구를 유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 남자 하숙집에서도 천재성과 미래의 명성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근심은 시대적 상황이 위대한 운명을 향한 자신의 요구를
망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건 없는 시대를 두려워했다. 그가 말한
것에 따르면 소년시절에 그는 이미 자신이 "너무 늦게 지상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 화가 났다."고 하며 자기 "앞에 높은 평화와 질서의 시대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운명의 비열함이라고 보았다." 혼란스러운 미래, 소란가 무너
지는 질서만이 현실과의 단절을 치료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극단적인
꿈들에 유혹되어서 실망스런 삶보다는 차라리 파국을 맞는 삶을 바라는 사
람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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