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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Rebellion

도이치의 미래

by godfeeling 2020. 8. 15.

  1919년 이른 여름 히틀러의  등장은 바이에른의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꾸 바뀌면서 등장하는  수많은 배우들을 순식간에  어둠에서 
날카로운 무대조명을 받는 자리로  밀어내면서 빠르게 밀려가는 혼잡한 흐
름 사이에서 차츰  창백하고 뚜렷하지 않은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혁명과 
반혁명의 혼란 속에서, 아이스너, 나키쉬, 루덴도르프, 로소브, 로스바흐, 카
르 같은  사람들 중에서 히틀러보다 덜  중요한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재력, 그보다  더 이름 없는 출발점을 가진 사람은 없었으며, 
그보다 더 아무 방책 없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영원히 병영에 사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뒷날 자신이 '1차  대전의 이름없는 상병'이었다고 말하기를 좋아했
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 했던, 오직 신화적인 맥락
에서만 이해되는 자신의  출세를 설명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3년이  지나자 
벌써 그는 1919년 전반기에 저항하면서, 혹은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들어
섰던 정치무대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어떤 도시도 뮌헨처럼  심하게 혁명적인 사건들과 전쟁 직후의 
저항에 사로잡히고 뒤흔들린 곳도 없었다. 베를린보다 이틀이나  앞서 1918
년 11월 7일에 이곳 뮌헨에서 좌파 성향을 가진 몇몇 아웃사이더들이 세계
를 개선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서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치해 온 바이에
른 천년 왕조 (1180~1918년)를  무너뜨리고 기습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수염을 기른 보헤미안이며 (뮌헨 포스트)의 연극비평가였던  쿠어트 아이스
너의 지휘를 받은 그들은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항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
해서, 독일의 상황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서  '국제연맹을 위해 무장시키고' 
이 나라를 '가장 나쁜 상황에서 보호해 줄 평화를 일깨우려고' 하였다.
  미국 대통령의 허약함과 자기부정, 우파의 증오심이 아이스너의  모든 전
망을 망가뜨렸다. 우파의 증오심은 오늘날까지도 '나라도 종족도 다른 떠돌
이들'과 슈바빙의  볼셰비스트들을 헐뜯는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이스너 
혹은 새로  등장한 사람 중 그  누구도 바이에른 출신이 없었고,  반시민적 
지식인, 드물지 않게 유대인 지식인 유형이 각광받았다는  사실에서 지역감
정이 분명한 이 지역에서 혁명정부의 실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이스너의 구경거리  정권이 만들어낸 쉬지 않는  시위며, 공개 음악회, 
깃발 대행진, 그리고  '빛과 아름다움과 이성의 왕국'에 대한 열화  같은 연
설도 그의 위치를  확정해주기에 전혀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
러한 통치방식은 비웃음과 분노만 불러일으켰을 뿐, 아이스너가 '선의를 통
한 통치'에서 기대했던 애착은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너무나 먼 철학적 
지평을 배경으로 서류상으로만 권력을 입증하였던 유토피아 상황은 현실의 
입김을 받지 무너져버렸다. 아이스너 '쿠어트 1세'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붕
괴된 왕가의 전통과 결합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비웃음을 표현한 후렴구를 
가진 유행가 하나만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스너가 레비엔, 레비네, 악셀로트 같은 기이한 극좌
파 세계혁명의 지도자들과  별로 좋지 못한 관계에 있었고, 문필가  에리히 
뮈잠의 무정부주의적 몽상에 대해서 비판하고, 널리 퍼진  바이에른의 분리
주의 분위기에 대해서 말로만이라도 동조한 것 등도 그의 처지를 개선시키
지 못했다.  그는 베른의 사회주의자  회합에서 전쟁발발에 대해서  독일이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직후 잘 조직된 항의 캠페인에  포위되었다. 이 캠페
인은 잠시도 쉬지 않고 그를  공략해서 마침내 그의 시계를 멈추게 만들었
다. 뒤이어 치른 선거에 참패하면서 그는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21
일 두 명의 동지와 더불어  정계은퇴를 선언하러 주의회로 가는 길에 그는 
스물두 살 난 우파 안톤 포아르코  발라이 백작이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죽
었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사실상 불필요하고, 파국을 부르는 살인행위였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살해된  사람을 위한 추모식이 벌어지는 동안 극좌
파 성향의 정육업자 겸 술집 종업원인 알로이스 린트너가 주의회로 뛰어들
어오더니 아우어 장관을 쏘아 쓰러드리고 주변으로 총을 마구 쏘아대는 바
람에 두 명이 더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의회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사
로잡혀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아르코 발라이가 희망했던  것과는 달리 
여론은 좌파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의 
살해 직후처럼 이 암살행위는 힘을 모아서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으려는 반
동측의 행위로 여겨졌다.      바이에른 전체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총파
업이 실시되었다.  학생들 중 일부가  아르코 발라이를 영웅으로  추대하지 
대학이 문을 닫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체포되고 엄격한  검열이 실시되었
으며 은행과  공공건물들은 붉은 군대에  점령되었다. 그러는 동안  병사를 
가득 실은  전차들이 거리를 달리면서 확성기를  통해서 "아이스너를 위해 
복수합시다!"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한 달 동안 사법권은 에른스트 니키쉬
가 이끄는 중앙위원회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고 난 뒤에야 의회정부가  구
성되었다.
  그러나 4월  초에 헝가리에서 벨라 쿤이  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포하였으며, 그로써  소비에트 시스템이 러시아 밖에서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막 안정되기  시작
하던 상황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독일이여,  뒤를 따르자!" 라는 구
호 아래 소수의 좌파 몽상가들은, 분명하게 보이는 대중 의지에 반하고, 전
통과 여론의 감정에 반해서 대중의 지지도 없이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
였다.
  에른 스트 톨러와  에리히 뮈잠 등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낭만주의,  세계
에 대한 몰이해,  허약한 지도력 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포고문에서  세상
은 이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몫을    꺾을' 수 있는 '꽃들로 가득 찬 들판'
으로 변했다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노동,  억압상황, 법적 사고 등은  이미 
없어졌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신문 표제면에는 최근의 혁명  포고문과 나
란히 휠덜린이나 쉴러의  시들을 싣도록 명령하였다. 밤베르크로  피신했던 
정부의 장관들과 에른스트 니키쉬는 그 사이 사임해버리고,  지도자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주정부를 시인들의 정신나간 복음, 카오스, 시민들의 공
포 속에  그대로 맡겨두었다. 이어서  일단의 냉혹한 좌파  직업혁명가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압류 위원회, 인질 체포,  시민계급 사
람들에 대한 압류, 혁명의 자의,  점점 커지는 굶주림 등이 러시아 10월 혁
명의 끔찍한 이미지들을 일깨워서 현실로 만들었다. 그때의  공포심은 아주 
끈질기게 작용해서 5월 초에 우파인 방위군(정규군)과 의용군  동맹이 뮌헨
으로 들어와서 자행한  잔혹한 살상행위를 별 것  아닌 것처럼 만들어주었
다.
  이들 우파 동맹군은 풀려난 러시아 전쟁포로 50명 가량을 수용소에서 살
해하였다. 슈타른베르크에서 멀지  않은 철도 둑에서는 소비에트군의  의료
반이 살해되었다. 카톨릭  장인조합에 소속된 회원 21명은 아무 죄도  없이 
뮌헨의 집단거주지에서 체포되어 카롤리네 광장의 감옥으로 끌려갔다가 총
살당했다.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던 페를라하 출신 노동자  12명도 살해되었
다.
  이들은 모두 뒷날 조사 보고서가 말한 대로 '스스로  경박함이나 심술 궂
은 우연 때문에' 살해당한 184명에 끼게 된 사람들이다. 맞아죽거나 총맞아 
죽은 소비에트 체제실험의 지도자들, 쿠어트  에글호퍼, 구스타프 란다우어, 
오이겐 레비네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재빨리  잊혀서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졌다.  그에 비해서 모반을 일으켰던 극우파 툴레  결
사 소속 인질 8명은  좌파정권에 의해 루이트폴트 고등학교 지하실에 갇혔
다가, 어떤 하급  공무원의 비행에 대한 보복을 살해되었는데 그들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공포의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당시 
어떤 일기에 기록되어 잇듯이 우파 진입부대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손수건
을 흔들고, 모두들 창문을 통해 내다보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보다 더 큰 
열광은 있을 수 없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혁명의 땅이었던 바이
에른은 이제 반혁명의 땅이 되었다.

    반혁명의 조직화
  전후 처음 몇 달 간의 체험은 좀더 냉정하고 덜 낙담한 시민계층에서 새
로운 자의식을 일깨웠다. 이 혁명의 의지력은 혼란스럽고  전체적으로 지나
치게 허약한 것이어서 도이치 좌파의 무기력과 개념의 혼란을 드러내 보였
다. 그것은 혁명적인  용기보다는 오히려 혁명의 과도한 열정에 의해  움직
였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을 강력한 질서의 인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바이에
른에서 소비에트 방식의 지배를 시도해본 결과 그러한 시도는 권력에 대해
서나 민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몇 달 동안의 혁명기간에 처음으로 시민계급, 혹은 이 소란에 무관한 
도이치 노동자 계급에게 자기들이  절대로 군복하지 않았다는 인식에 도돌
하였다.
  시민계층에 이  새로운 자의식을 불어넣어주려고  애쓴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중간급 장교들, 즉 행동을  열망하는 대위와 소령들이었다. 
에른스트 융거의 말을 빌자면 그들은 포도주를 즐기듯 전쟁을 즐기는 사람
들이었고 아직도 여전히  전쟁에 도취되어 있었다. 여러 모로 압도적인  반
대세력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패배했다고 느끼지 않았다.  중앙정보
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자  그들은 저항하는 반군과 소비에트 군사위원회들
을 평정하고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기도를 제거하였다. 불안정한  도이치 동
부국경, 특히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접하는 국경에서 그들은  방위기
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베르사유 조약과, 군대를 10만 명으로 제한한다는  규정이 장래
의 전망을 없애자 자신들은 사회적으로 추락하였고 민족적으로는 망신이라
고 느꼈다.  자의식과 상실감이 합쳐진 상태로  그들은 정치계로 몰려갔다. 
많은 사람들은 무질서한 군대생활과 무기 다루는 기술,  남자들간의 동지애 
따위를 버릴 수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전쟁에서  얻은 체험과 폭력
을 사용하는 기술  등을 이용해서 그들은 혁명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군을 
조직하였다. 국민의 두려움과  질서의식 속에서 혁명은 이미  제압되어버린 
상태였지만 말이다.
  곳곳에서 생겨난  사조직 민병대는 각  지역을 군대병영으로 바꾸어버렸
다. 겉으로는 민족적 장식과 정치투쟁이라는 영광스런 외관을 내세웠다. 그
들은 전쟁중에 가지고 있다가 비밀장소에 감추어두었던 기관총, 수류탄, 대
포 등으로 무장하고서 정치기관들이  무능한 것을 이용하여 지역마다 다르
지만 상당한 정도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바이에른에서는 특히  소비에트 시
절의 악몽 같은 체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들은 거의 활동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모든  수단을 다 써서  반혁명군을 조직하라."는 것이 사회민주당 
정부가 소비에트 지배 시절에 내린 명령이었다. 정규군은 방위군과 나란히, 
또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방위군과 힘을 합쳐서, 에프 의용군, 고지 결사
대, 무쇠주먹 장교단,  에셔리히 부대, 도이치 민족  수비공격대, 옛 제국기 
부대, 바이로이트  의용군, 뵈르츠부르크 의용군,  볼프 의용군, 보겐도르프 
멸동대, 프롭스트마이르 별동대와 그 밖에도 수많은, 명예를 갈구하면서 정
상적인 생활을 기피하는 정치군사 조직체들이 활동하였다.
  이 모든 부대들은 정부와  국가관료뿐 아니라 광범위한 민족계층의 소리
가 자기들을 지지하는 것을 보았다. 군사전통에 익숙한  사회의 오해이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행동하는 의용군이 제복을  입고 발걸
음을 맞추어 행진하는 것을  보자, 곧바로 민족적, 도덕적 타당성을 인정해 
준 것이다. 혁명과  소비에트 정부라는 혼란스런 배경을 놓고 보면  군대조
직은 그 자체가 이미 모범적인 반대세력, 가장 타당한  형태의 생활과 질서 
이념으로 여겨졌다. 엄격한 태도로 보무도 당당하게 에프  의용군 단위부대
들은 루트비히 거리를  행진하였고, 발트 해 연안 전투에서 앙블렘을  가지
고 돌아온 에르하르트  연대의 단위부대도 마찬가지 였다. 그 앙블렘은  부
대의 통합 행진곡에서 뽑아낸  것으로 '철모에 달린 갈고리 십자가... '였다. 
그들은 지나치게 도발적인 방식으로, 이제는 오직 그리움으로 추억하는, 영
광과 안전이 지배하던  지나간 시대의 어떤 것을  구현하는 존재로 일반의 
의식에 비쳤다. 제국방위군이  1919년 6월의 바이에른 제4지역사령부의  기
본노선을 가리켜 '토대'라고 부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당시의 지배적
인 생각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 토대에 맞추어서 '모든 국내 사정을 의
미심장하게 새로 건설'해야  하고, 활발하고 광범위한 선전활동의 정당화도 
바로 이 토대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 정당들이, 두려움과 희생
을 무릅쓰고 전쟁을 수행한  병사들에게 전쟁과 민족학살에 대한 거부감을 
순진하게 떠넘긴 반면, 우파는 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병사들의 상
처받은 자존심과 그 많은 기대들이 좌절된 데 대한 충분한 설명의 요구 등
을 받아들인 것이다.

    히틀러, 연설 실습과정을 갖다
  지역사령부 계몽과, 혹은  선전과가 맡고 있는 수많은 활동 중에는  부지
런한 마이르 대위가 담당한 '국가시민적 사유'를 위한  강좌도 있었다. 히틀
러는 소비에트 공화국 추종자들에  대한 색출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다음 
이 강좌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학 강의실에서 열린 이 강좌들은, 
수강자들이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유명한  대학교수들을 통해서 특히 
역사, 민족경제, 정치문제에 접촉해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자기가 어떤 확실한 영향도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려는 
열망에서, 이 강좌들이 지식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그를 통해서  얻게 된 여
러 관계들이라는 측명에서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생
각을 가진 몇 명의  동료를 알게 되었고, 그들과 더불어 시국에  대해서 깊
이 있게 토론할"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경제이론  분야에서만 고트프리트 
페더를 통해서 생전  처음으로 '국제증권 및 차관자본에 대한 원칙적인  설
명'을 들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 강좌의  중요성은, 히틀러가 가진  격렬함과 
지적인 기질로 이와 같이 정선된  청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
다. 참가자들의 토론에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우연히 만난 상대가 아닌 사
람들을 청중으로  가지게 되었다. 선생 중  한 사람이었던 칼 알렉산더  폰 
뮐러는 어떤 강의가  끝나고 난 뒤 점점 비어가는  강의실에 남아 있던 몇 
사람이 자신의 시선을 붙잡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한가운데 어
떤 남자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는데, 그는 이상한 후두음을 내는  목소리로 
쉬지 않고 점점 더 정열적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가 사람들
을 흥분상태로 몰아가고,  동시에 사람들의 흥분이 그를 더욱 열렬히  말하
도록 만들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군인답지 않게 머리카락을  앞
으로 떨어뜨리고, 짧게  자른 콧수염을 기른 창백하고 깡마른 얼굴이  보였
다. 그는 이상하게 키가 크고, 밝은 금발에 광적으로 냉혹하게 번쩍이는 눈
을 하고 있었다." 다음번 강의가 끝난 뒤  연단으로 부르자 그는 '공손하게, 
일종의 뻣뻣한 당혹감으로, 옆으로  움직여서'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대화
는 별 소득이 없었다'.
  이러한 관찰에서 초기의 히틀러에게  들어맞는 특이한 현상을 만나게 된
다. 중요하지 않은 개인적인 대화에서 자신의 연설능력에  대한 도발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인다.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유대인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을" 때 도전적으로 격렬한 
답변을 해서 최초의 잊을  수 없는 설득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폰 뮐
러는 마이르 대위에게 자기 과목  수강생들 중에 천부적인 언변을 가진 사
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두었다. 히틀러는  지역사령부가 '신뢰하는 인물'이 
되어 뮌헨 연대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 이어서 이른바  레히펠트 
귀향자 수용소를 위한 사령부 계몽팀 명단 17변에 히틀러의 이름이 나타난
다. '보병 히틀러, 아돌프, 제2보병연대, 청산부' 이 팀의 목적은 포로수용소
에서 귀향하는 병사들 중에서 의심스럽다고 여겨지는 병사들에게 민족적으
로 반공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연설가  및 선동가 코스의 실
습'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레히펠트  수용소의 막사와 숙소에서 히틀러는  연설가
로서 수사적,  심리적 체험들을 쌓았다. 여기서  그는 고정된 세계관이라는 
미리 준비된 재료에  시사적인 내용을 채워넣는 법을 배웠다. 원칙들을  저
항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정치적 일상사들이 운명적인 크기의  전망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고집스러운 국가사회주의(나치즘) 
이데올로기에 원칙이 없다는 인상을  주는 기회주의적인 속성들도 상당 부
분 이 초보 연설가 시절의 불확실성이 원인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열광
상태가 공적으로 효과를 얻는지 시험해보고, 자신의 과도한  고정관념을 위
해 공감을 얻는 형식들을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이 주제는 참석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고 수용소의 어떤 체험수기가 연설자 히틀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자신의 청춘에 위대함과 무게를  주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느끼는 귀향자들의 깊고도  공격적인 실망감을 향해
서, 그토록 헛되이 바친 영웅주의, 그 수많은 허망한 승리와 부조리한 신뢰 
등을 설명하고 나서 그는 원수의 모습을 분명하게 그려  보이곤 했다. 그의 
연설연습을 들은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뚜렷한  특징들은 연사의 '인기있는 
무대등장' '파악하기 쉬운' 묘사방법, 정열적인  '광신주의' 등이었다. 이러한 
연설의 중심점은  그가 뒷날 '11월 범죄자들'이라고  불러서 유명하게 되는 
집단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자들)을  향한 공격이었다. '베르사유 수치', '망
할 놈의 국제주의'에  대한 분노의 표현들이 타나난다. 이 모든  것은 '유대
인 공산주의의 세계음모'라는  배경설명에서 한데 합쳐지고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유대인이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끼치는 위험'
  슬쩍 읽은 것,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지적인  부끄러움도 없이 한
데 엮어서 내놓는  그의 능력이 여기서 입증되고 있다. 레히펠트에서  행한 
그의 강연들 중  하나는 극히 최근에 고트프리트 페더에게서 전수받은,  자
본주의와 유대인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매우  근사하고 분명하고 열광적으
로'전달한 것이다. 생각을 움켜쥐는 그의 능력은 난폭하고도 지속적인 것이
었다. 이 시기에  개별적인 확신들이 지하 벙커의 수난까지 계속될  최종적
인 형태를 어느 정도나 얻었는가 하는 것은, 구체적인  정치문제에 대한 히
틀러의 최초의  문서상의 발언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이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끼치는 위험'에 대한 편지였다.
  뮌헨 지역사령부에서 예전에  '신뢰받는 인물'이었던 울름 출신의 아돌프 
겜리히가 마이르 대위에게 입장표명을 청하였다. 마이르는 이  편지를 군대
의 서열체계에서 보면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매우 존경하는 히틀러 씨'라
는 칭호로 시작되는  의견서를 붙여서 히틀러에게 답장하라고  넘겨주었다. 
상세한 서술에서 히틀러는 우연하고도 개인적인 인상들에 근거하는  , 널리 
퍼진 감정적인 반유대주의에  반대하였다. 정치운동으로 만들어야 할  반유
대주의란 '사실의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와 같습니다.  우선 유대인은 종족집단이지 종교집단이  아니라
는 점입니다. 보통 가장 협소한 집단  내에서 1천 년간의 동족교배(철자 틀
림!)를 통해서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섞여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
들보다 자기 종족과  자신의 독자성을 훨씬 더 예민하게 보존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는  도이치 아닌 낯선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자기들
의 종족상의 특성을 희생하거나, 자기들만의 독특한 감정,  생각, 욕망을 부
정할 마음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종족이 정치적으로 우리와 똑같은 권리
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감정이 순수하게  물질적으로만 움직인
다면 그 생각과  욕망은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을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모든 것은  종교,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이라고  말하지만, 유대인에게 
있어 모든 것은 돈과 권력욕을 만족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
다. 유대인의 활동은 다른 민족들에게 종족 폐결핵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결론이  나오는 것이지요.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유에서 
나온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박해 (철자 틀림!) 라는  형태로 최종표현을 얻
게 됩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특권에  대해서 계획적
이고 법적인 투쟁을 벌여서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최종적인 목적은 
유대인 자체를 확실히  제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민족의 힘을 지닌  정권
만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능력이 있으며 민족적 무능의 정권은 절대
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기 4일 전 1919년 9월 12일에 마이르 대위는 신뢰하는 인물 
히틀러에게 과격협회와 도당들이 마구 뒤섞여 만들어진 작은 정당들 중 하
나를 방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도당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만  하
나를 방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도당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만  격
렬한 활동을 위한  활기를 얻고, 서로 결합했다가는 새로운 단체로  탄생하
기도 전에 다시  흩어져버리곤 했다. 그것은 공명과 추종세력으로 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잠재력이었다.  종파적이고 두서없는 특성은 오랫동안  정
치적 관심이 없던 시민계급이, 자신들이 느끼는 민족적인  저항감과 사회적 
위기감을 진정시키주기를 거의 맹목적으로 갈ㄱ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툴레 결사와 도이치 노동자당
  툴레 결사는 음모적인  기획과 특별한 선전활동의 출발점으로서,  그리고 
극우 세력들의 접촉장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결사는 특급  호텔 
'사계절'에 본부를  두고 바이에른 사회의 광범위한  계층과 연결되어 있었
다. 한때는 회원이 대략 1천 5백 명까지 이르렀던, 영향력이 있는 회원들도 
일부 가진 모임이었다. 그들은 갈고리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고, (뮌헨 관찰
자)라는 독자적인 신문을  발행하였다. 수상쩍은 과거를 가지고  있는 정치
적 풍운아가 결사의 대표자였다. 그는 근동지역으로 밀려간  오스트리아 귀
족에게 입양되었던 덕분에 제보텐도르프의 루돌프 후작이라는 상당히 그럴
싸한 이름을 가진 사내였다. 어떤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테오도르 프
리치나 란츠 폰 리벤펠스 같은 과격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생
각 없고, 심령술적인 특성까지 지닌 종족이론은 젊은  히틀러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었다.
  제보텐도르트에 의해서 1917년 1918년 해가 바뀔 무렵 창설된 상당히 열
에 들뜬  활력을 가진 툴레 결사는  전쟁 전 민족적, 반유대적인  모임들의 
전통에 선 것으로, 이름만 보면 1912년 라이프치히에서  만들어졌던 게르만 
툴레 종파를 연상시킨다. 그  회원들은 '아리안 혈동'이어햐 했다. 프리메이
슨 비슷한 이 모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체 어느 부위에 털이 있는지 없
는지 말해야 하고 동시에 종족상의 인식표로서 발의 모형을 제출해야만 했
다.
  제보텐도르프의 결사는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18년 1월에 특히 
반유대주의 색채를  띤 통제되지 않은  선전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선전은 
유대인을 '도이치 민족의  철천지 원수'라고 보았고, 나중에는  소비에트 혁
명 시대의  혼란스런 유혈체험들을 그에  대한 증거라고 내놓았다.  이것은 
증오의 거칠고도 과격한 구호들을  만들어서 본질적으로 의식 없고 지저분
한 종족  증오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민족적 과격주의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1918년 10월 이미 이들 모임에서는 우파에 의한 정부전복 계획들을 만들
어냈다. 쿠어트 아이스너 암살을  위한 여러 가지 계획들을 꾸몄고, 1919년 
4월 13일에는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쿠데타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중에 뮌헨에 본부를  둔 러시아 이민자 그룹과의 수많은 관계
들이 생겨났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라는 이름의 발트 출신  어떤 젊은 건
축학 대학생은 소비에트 혁명의 악몽이  너무 깊은 방에서 모임이 있는 날
이면 다음 몇  년 간 바이에른의 풍경을 극적으로  지배하게 될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여기 모여들었다. 미래 히틀러 당의 대표자 몇  명도 여기서 처
음으로 서로 만났다. 디트리히 에카르트, 고트프리트 페더, 폰 한스 프랑스, 
루돌프 헤스, 칼 하러 등의 이름이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있다. 
  툴레 결사의 위임을 받고 스포츠  기자인 칼 하러는 공구 제조공인 안톤 
드렉슬러와 함께 1918년 10월에 '정치적인 노동자 서클'을  만들었다. 이 서
클은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연구할  목적으로 선택된 사람들
의 모임'으로 되어  있었으나 발기인들의 의도는 대중과 민족주의 우파  사
이의 이질감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회원은  드렉스러의 직
장동료 몇 사람에 한정되었다. 드렉슬러는 조용하고 무뚝뚝하고  약간 기묘
한 인물이었다. 그는 뮌헨의 철도공작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정치
적 활동의 욕구가 현존하는 정당들에 의해서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다고 여
겼다. 1918년 3월에 그는 스스로  발기인이 되어서 '평화를 위한 자유 노동
자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 목적은 고리대금업자와 싸우고 노동자 계급의 
승리의지를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민족문제를 극복하
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론적으로 충분히  답변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 공
구 제조공의 정치적 체험이었다.
  이 안경 쓴 진지한 사람이  1918년 1월에 발표한 기사의 제목에 이런 인
식이 반영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의 실패와 형제애  이념의 
좌절".  그것은 1914년 8월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에  찬성했을 때 확인된 것
과 동일한 체험이었다. 그리고 1904년에 도이치 보헤미아  노동자들이 트라
우테나우에서 도이치 노동자당을 창설하게 만든 체험이기도 했다. 같은 '도
이치 노동자당'이라는 이름으로 안톤 드렉슬러는 자기  직장의 노동자 25명
과 함께 1919년 1월  5일에 영주 저택에서 자신의 당을 만들었다.  며칠 뒤
에 이 당은 툴레 결사의 자극을 받아서 '사계절 호텔'에서 민족적인 조직체
가 되었고, 칼 하러가 스스로 '전국의장'직을 맡았다. 그것은 과장된 직함이
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골짜기 54변지 '별모서리 양조장'의  방에서 모임을 
갖는 새로운 정당의 면면은 사실상  이루 말할 수 없이 보잘것없은 것이었
기 때문이다.
  드렉슬러가 때때로 시인 디트리히  에카르트나 고트프리트 페더 같은 유
명인사를 연사로 모셔오기도 했지만  그들의 상황, 동기, 목적 등은 시시한 
정치 이야긴 주고 받는 수준에 불가했다. 이상하게도 이  정당은 공적인 활
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정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절 뮌헨의 특징이 되었던  비밀결사와 초저녁 맥주 마시는 모임을 뒤
섞여놓은 꼴이었다. 서로 의견을 나누어보고 싶다는 막연한  필요성이 그들
을 한데 끌어모으는  힘이었다. 참석자 명단은 대체로 10명에서 40명  사이
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일의 수치, 패배한 전쟁의  악몽, 
반유대주의 분위기, '질서,  권리, 도덕의 유대'가 깨진 것을  탄식하는 일이 
이 모임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것들이었다.
  드렉슬러가 창설모임에서 낭독하였던  '당 노선'은 이 정당이  부자들, 프
롤레타리아, 유대인, 바가지 요금, 민족들의 선동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물거리는 정직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연간 이자액
을 1만 마르크까지로 한정시킬 것을 요구하고, 도이치  외무부와 동등한 내
국인 부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직업훈련을 받은  정착한 노동자들을... 중
간층으로 간주할 것'을 요구하였다. 행복이란 '관용구나  공허한 말투, 모임, 
시위, 선거에 '  있는 것이 아니고 선량한 것이  아니고 '선량한 노동, 가득 
찬 요리 냄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당의 상태가 전체적으로 매우 편협하고 지적으로 별볼일 없는 것처
럼 여겨지지만 그래도 이 '노선'의 첫 문장은 어떤  사상을 담고 있다. 그것
은 역사적 체험과 광범위한 필요성을 정책으로 바꾼 것으로,  어찌할 바 모
르고 뒤틀린 안톤 드렉슬러를 '별모서리 양조장'의 방에서 시대정신의 높이
까지 끌어올리는 사상이었다. 도이치 노동자당은  계급과 무관한 "사회주의 
조직으로, 도이치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영도받는다."고 되어  있다. 드렉슬
러의 '위대한 사상'은 민족과 사회주의를 화해시키는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런 생각은 드렉슬러 혼자만 가졌던  것도 아니고 또 최초의 것도 아니
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요리냄비에 대한 염려가 그에게서 모든 정열을  빼
앗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소박한 생각이었고 민족적  안전에 
대한 평범한 갈망에서 나온 것이지만, 마르크스주의 세계해석  및 역사해석 
체계로는 측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상을  발전시킨 드렉슬러가 
처해 있던 상황이  이 사상에 강력한 메아리를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패배
하고, 모역당하고, 혁명의 도전을 받은 나라의 병적으로  열에 들든 상황과, 
이 정당이 아돌프 히틀러와 결합된다는 사정이었다.

    '내 생애 가장 결정적인 결심'
  1919년 9월 12일 도이치 노동자당 모임에서  고트프리트 페더는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수단으로 자본주의를 제거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약 40명 가량의 참석자들 주에는 마이르의 명을  받은 아돌프 히틀
러도 끼여 있었다. 페더가  잘 알려진 주장을 펼치고 있는 동안  이 손님은 
이 새로운 당에 대해서 "다른 수많은  정당들과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속물근성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페더가 마침내 
말을 끝내가 나는 기뻤다.  그것은 이미 실컷 보았다." 이어서 벌어진 토론
이 끝나기를 히틀러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바이에른을 제국에서 분리시켜서 오스트리아와 통
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자 그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다. "그
때 나는 안 그럴 수가 없었다." 는 그 연설자를 정열적으로 공격하였고, 드
렛슬러는 자기 옆에 앉은  기관사 로터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저봐, 저 사
람 연설할 줄 아네.  쓸모가 있겠는걸." 히틀러가 '지겨운 모임'에서 연설을 
마친 다음 곧바로 돌아가려고 나가는데  드렉슬러가 그를 쫓아 와서 또 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문간에서  그는 손수 쓴 조그마한 팸플릿 책자를  히틀
러의 손에  쥐어주면서 "나의 정치적  각성이요"하고 말했다.  힘깨나 들인 
이 장면의 묘사에서 히틀러는 다음날 아침 병영에서 쥐새끼들이 흘린 빵부
스러기를 놓고  서로 먹으려고 다투고 있을  때 이 글을 읽기  시작하였고, 
드렉슬러의 인생역정에서 자기 자신의 발전과 같은 요소들을 발견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테러를 통한  일자리 폐쇄, 절반쯤 예술적인 활동을 해서  밥
벌이를 한 일  9드렉슬러의 경우에는 야간 카페에서  바이올린 연주), 그리
고 어느 정도 공포의  느낌을 가지고 알게 된 일인데, 어떤  안트워프 유대
인이 독살 기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깨닫게 된,  유대종족이 세계를 파멸
시킨다는 인식 등, 그의  관심을 일깨운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이러한 유사
점들이었다. 히틀러가 지치지도 않고 거듭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체험
들은 노동자의 삶에서 얻은 것이었다.
  며칠 뒤에 청하지도 않았는데 555번 번호가 붙은 당원카드가 배달되었을 
때 그는 약간  불쾌하고 약간 재미있다는 기분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뚜
렷하지 않은 당혹감에서  위원회 모임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나중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헤렌 거리에 있는 '옛 장미관'이라는 '아
주 허름한 음식점'의 탁자에서 '절반쯤 부서진 가스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앉아 있는 몇 명의  젊은 사람들을 보았다. 방 바깥에는 음식점  주인 내외
와 한두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작은 카드놀이 패거리의 간부처
럼' 회의록을 낭독하고, 남은  회비를 계산해보고 (잔고 7마르크 50페니히), 
장부를 기입하고, 북부  독일의 뜻이 통하는 단체들에게 보낼 편지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것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종류의 협회 관리모임'이었다.
  이틀 동안이나 히틀러는 혼자 심사숙고하였다. 그리고 뒷날  자기 인생의 
결정적인 상황을 서술할 때마다, 결심이 어려웠다고 회고할  때마다 그렇듯
이 '힘들고' '무겁고' '쓰라린' 기분을 느꼈다.  어쨌든 선전과 홍보를 담당하
는 7분과  위원회 소속으로 그는  도이치 노동자당에 가입하였다.  "이틀간 
고통스러운 천착과 숙고 끝에 나는  마침내 이 일을 하겠다는 확신에 도달
하였다. 그것은  내 생애의 가장 결정적인  결심이었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어법에는 뒷날 자신의 삶의 궤적에 극적인 조명을 하려는 히틀러
의 성향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외적인 상황의  효과를 전부 빼고라도 
이러한 결심 자체를 고독하고 고난에  찬 투쟁  결과라고 표현한 것은 모
든 자료들과 잘  일치되는 부분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을 상당히 주저하고 깊이 두려워하였다.  뒷날의 상황에서
도 보고되는 것이지만, 그는 어떤 문제를 어지럽고 모순에  이를 정도로 생
각해본 다음 지쳐빠져서, 우연에 내맡기고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는 성향을 
가졌다. 그러한 성향은  운명과 섭리를 신봉하는 경지로 치닫게 되는데  쉽
게 결심을 못하는 성향을 그는 그렇게 변명하곤 하였다.
  그의 모든 개인적인 결정들과 심지어는 일부 정치적인  결정들도, 절박하
게 느껴지는 다른 대안을 위해서 일종의 대피수단으로 나온 것이라는 생각
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학교를  그만둔 것, 빈과 뮌헨으로 
옮긴 것, 전쟁에 지원한 것,  그리고 정치에 입문한 것에 이르기까지 이 모
든 일에서 일종의 도피  동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도피 
동기는 또한 어찌할 바 모른 채 맞아하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나오
는 수많은 행동방식의 원인이 된다.
  제대해서 시민의 생활 속으로  쫓겨들어가기 전에 시민세계의 의무와 질
서의 요구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의 귀향자  숙소에 사는 이 남자의 모든 행
동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것은 점차  그를 바이에른 정
치무대로 이끌어갔다.  현재도 직업이 없지만  앞으로도 직업을 갖고  싶지 
않은 이 삶은 정치를 이해하고 정치를 직업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굉장한 
몸짓을 하면서 이루어진 1919년 가을 도이치 노동자당 입당 결심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전의 생의 결심들이나 마찬가지로 시민질서에  대한 거부
였고, 시민적 사회규범의 엄격함과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
온 것이었다.
  일생 동안 도피  동기의 흔적들은 아주 격렬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격렬
함으로 히틀러는 여러 해 동안이나  막혀 있던 활동욕구를 위한 공간을 드
디어 찾아낸 것이다.  마침내 형식상의 요구들로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그
가 가지고 있는  전제들만을 요구하는 영역을 만나게  된 것이다. 즉 정열, 
상상력, 조직의 능력, 선동가의 재능 등이었다. 막사에서  그는 지치지도 않
고 집회 초청장을 쓰고  타이핑하고, 그것을 손수 배달하였다. 그는 주소들
을 추천받아서 추천받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관계와 후원, 새
로운 회원들을 찾아다녔다. 처음에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행사에서 모르
는 얼굴을 만나면 열심히 기록해두었다. 여기서 히틀러가  다른 경쟁자들보
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날 거의  신성하게 추앙되는 카페 가
스타이크 구석구석 탁자에서 매주  한 번씩 모이던 7인 당위원회에서 그는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갔다. 생각이 많고 능숙하고 정열적이었기 때문이다.

    침묵의 껍질을 깨다
  당의 조용하고 협소한 상황을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여기는 당원들이 당
황한 눈길을 보내는 가운데 그는 이 '지루한 모임'이 공식적으로 활동할 길
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16일에 노동자당은 이 새로운  남자의 
선택을 따르게 되었다.  111명이 참석한 최초의 공식적인 집회에서  히틀러
는 그날  저녁의 두 번째 연사로  연설하였다. 30분에 걸쳐 계속된  연설은 
점점 상승하는 능변으로 화려한 효과를 냈다. 남자 하숙집  시절 이후로 우
울한 독백 속에 담아두었던 증오의 감정들, 말없고 사람  접촉 없던 은둔시
절 쌓아두었던 것들에서 문장들, 망상적인  이미지들, 고발들이 터져나왔다. 
마지막에는 '작은  방안에 모인 사람들이  저기가 오른 듯' 했다.  히틀러는 
전에 '알아채지는 못하고  다만 막연히 느끼기만 했던 일이 현실을  통해서 
입증되었다."고 이 놀라운 체험을 적고 있다. "나는 연설할 수 있다!"
  알을 깨고 나와 자신으로 되는 순간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일상의 껍질'을 깨뜨리는 '운명의 망치질'이었다. 
그것이 가진 구원의  의미가 이날 저녁의 회상에  황홀한 어조를 불어넣고 
있다. 그는  이미 지난 몇 주  동안 연설의 힘을 되푸이해서  시험해보면서 
설득력과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힘을 깨닫고 있었다. 그가  말하 ㅎ고가 사
실이라면 이날 저녁의  연설에서 처음으로 연설의 주관적인 힘, 땀을  흘리
고, 어지럼증을 일으키고, 힘이  쭉 빠지는 망아의 경지를 경험하였다고 한
다.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폭발하였다. 두려움, 자의식, 혹은 1백 번도 넘게 
들었던 (트리스탄)의 황홀경  등을 그는 광포한 연설  안에 쏟아부었다. 이 
시절은 회상하면서 자신을 가리켜 말한 대로 이 '가련한 놈'의 욕망이 여기
서 단 한  번 일깨워진 다음에는 모든 정치적인  정열보다 앞에 놓이게 된
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이 그를 단상으로 몰아가서, 그 옛날 느꼈던 망아의 
충만감을 찾아서 자기 확인을 하도록 만들었다.
  정치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파제발크 야전병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저 
'11월의 배신'을 보고 깊이 절망한, 그러나 흔들이지  않는 애국자의 반응이
었다고 그는 전설적인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1919년  가을의 데뷔 체
험이 더 가까이 있다.  당시의 회원 및 참석자 명단에 그는  자산을 화가라
고 혹은  가끔 작가라고 적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위대함과 예술에  대한 
젊은날의 사라져 가는 꿈을  붙잡아두려는 생각에서 나온 당혹스런 진술이
었던 것 같다.
  1919년 11월 중순에 기록된  뮌헨 경찰 정보라 보고서에는 "그는 상인이
며 직업적인 선전 연설가"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도, 정치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지 일년이나  지났건만 그런 흔적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연설
을 하려 하고,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이미 쿠비첵이 관찰
한 바가 있었다.  그는 연설의 재능이 가진  압도적인 힘을 깨달았다. 서른 
살 된 이 남자는 이런  연설재능으로 실패한 경력에서 빠져나올 출구를 보
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했다. 그는 직
업적인 선전 연설가가 될 생각이었다. 그것은 한 번 더 도피행동이었다. 이
러한 도피행동과,  일찍이 자기 머리에  수많은 소명의 광채가  쏟아졌다는 
뒷날 그의 주장 사이의 차이는, 정치 입문에 대한  개인적인 동기와 사회적
인 동기 사이의 차이다. 많은 증거들은 도피 의도가  더욱 강력한 동기였다
는 것을 보여준다. 어쨌든  히틀러는 정치적인 각성체험을 갖지 못했다. 그
리고 '세계의 불의가 산의 홍수처럼 가슴으로 쏟아져내려서' 마침내 착취자 
겸 사기꾼을 절멸시키기로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을 알지 못했다.

    공개적 활동을 시작한 노동자당
  히틀러는 노동자당 입당 직후에 활동이 없고 두려워하는  위원회 모임을, 
공개를 염두에 둔 시끄러운 전투적 정당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착수하였다. 
툴레 결사에서 이어받은 구식의  비밀결사적인 특성을 버리지 못하고 노동
자당을 계속 정치적인  남자들의 서클 정도로 이끌어 가면서, 친밀한  양조
장 방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특별의식을 지키려 하는 칼 하러의 반대를 무
릅쓰고 히틀러는 처음부터  대규모 대중정당을 지향하였다. 대규모  대중정
당이 협소한 서클에는잘 들어가지 못하는 그의 사고방식에 맞을 뿐 아니라 
오래된 보수정당들의 실패의 원인에 대한 그이 통찰에도  들어맞았다. 하러
의 견해에는 우스꽝스럽게도 황제시대 시민적인 유명인사 정당들의 약점이
었던 배타적인 성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소시민 대중과 보수적인  생각
을 지닌 노동자 계층과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1919년 말이 되기도 전에 노동자당은 히틀러가 몰아붙은 끝에 아치형 천
장을 가진, 빛도 들지 않는 별모서리 양조장의 지하실에  상설 사무소를 차
리게 되었다. 임대료는 원 50마르크였다. 히틀러는 계약서에다가 자기 직업
을 '화가'라고 적었다. 탁자  한 개와 빌린 의자 몇 개가 놓였고  전화기 한 
대, 당원 카드와 당비를  보관하기 위한 금고가 마련되었다. 이어서 옛날의 
독수리표 타이프라이터 한 대와 인장이 마련되었다. 기분이  나빠진 하러는 
보통의 관공서 같은 이런 설비를 보고 히틀러가 '과대망상' 이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 히틀러는  위원회의 수를 처음에는 열, 다음에는 때로  열둘이
나 그 이상까지 확대하였다.  그는 주로 자기의 개인적인 추종자들이나, 드
물지 않게 막사에서 알게 된 동료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사무실을 
갖추고 보니 손으로 적은 종이 쪽지에다가 원시적이고 효과도 없는 행사광
고를 하는 대신,  기계를 이용하여 다채롭고 만들어진 초청장으로 바꿀  필
요가 생겼다. 동시에 (뮌헨 관찰자)지에다 광고를 냈다.  행사장의 탁자들에
는 선전문구와 팸플릿들이 펼쳐 놓였다. 히틀러는 처음으로  상당히 근거가 
없고 현실적으로 뒷받침되지도  않은, 따라서 대단히 도전적으로  여겨지는 
선전기술상의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한 자신감은 그렇게 작고도  알려지지 
않은 정당의 공개행사로는 어울리지도 않는 일들을 감행하고,  입장료를 올
려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나타나고 있다.
  연설가로서 점점 명성이 커지면서 히틀러의 당내 지위도  확고해졌다. 해
가 바뀔 무렵에는 별써 완고한 하러는 당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최초
의 길이 그의 앞에  방해 없이 열렸다. 곧 이어서 당수  드렉슬러는 회의적
인 태도로, 그리고 공개석상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몹시 염려하면서
도 야심만만한 선전담당 위원  히틀러의 고집스런 요청에 굴복하여 대중에
게 호소하기로 하였다.  히틀러가 입당한 지 채  반 연도 지나지 않은  2월 
24일에 당은 호프 양조장의 연회실에서 최초의 대규모 행사를 계획하였다.
  이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이 집회를 알리는 새빨간 벽보에 히틀러의 이름
은 나와 있지 않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이름난  민족주의 연설가인 의사 
요하네스 딩펠더 박사였다.  그는 게르마누스 아그리콜라기를 기묘한  방식
으로 설명한, 지적으로 형편없는 경제이론을 내놓은 인물이었다. 그의 염세
적인 생각에 따르면 자연의 생산성이 파업을 일으켜서 농산물이 줄어들 것
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해충들이  먹어치우게 되니 인류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것인데 국민적으로  새
로운 다짐을  한다는 희망을 통해서만 겨우  빛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날 
저녁에도 연설에서  이런 내용을  말하였다. 경찰보고서에 따르면  "철저히 
냉정한 태도였고, 자주 깊은 종교적 정신을 드러내 보였다."고 한다.

    25개 조항 공표
  그러고 나서 히틀러가 나섰다. 그는 이러 대규모의  청중에게 노동자당의 
의도를 알릴 단 한 번의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서 하나의 강령을 만들어내
자고 주장했다. 당시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연설에서 정부의 비겁함과  베
르사유 조약을 비난하고, 안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향을  비난하고 유대인
과 암매상과 고리대금업자 등 '거머리 도당'을 비난하였다.  그러고 나서 여
러 번이나  박수와 소동으로 중단되는  가운데 새로운 강령을  읽어나갔다. 
마지막에 "어떤 외침이 끼어들었다.  이어서 거대한 소란이 일어났다. 모두
들 의자와 책상  위로 올라갔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나가
자'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이 집회는 전체적인 소동 속에서  막을 내렸다. 
과격좌파 당원 몇 명은  인터내셔널과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구호를 큰소
리로 외치면서  호프 양조장에서  시청문까지 행진해갔다. "그밖의  소동은 
없었다."고 경찰보고서가 밝히고 있다.
  대중적인 노선을 취한 언론들조차, 온갖 소란 속에서도  일상적인 면모를 
드러낸 이 집회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이
루어진 자료연구를 통해서  아닐 집회의 사건을 재구성해볼 수 있다.  물론 
히틀러는 집회가 상당히 강력하였고, 싸움으로 시작되어서 끝도  없는 확신
의 환호 속에서 계속된 대중의 고백으로 이어졌다고 신화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여기 모여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점점 더 한 목소리로" 25개 조
항들에 공감하였고, "마지막  조항이 대중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자, 
내 앞에는 하나의 새로운 확신, 하나의 새로운 믿음, 하나의 새로운 의지로 
뭉친 사람들이 가득 찬 홀이 놓여 있었다."
  히틀러는 이제 이토록 불붙은  대중을 바라보면서 바그너 오페라식의 상
상에 빠져들어간다. "이  불꽃에서 게르만의 지크프리트에게 자유를... 찾아
줄 그 옛날의  칼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는 "용서를  모르는 복수의 여
신이... 1918년 11월  9일의 그 수치스런 행동에  복수하려고"내려오는 소리
를 들었다. 그에 반해서 민족주의적인 (뮌헨 관찰자)는 단순히 히틀러가 딩
펠더 박사의 연설에 이이서 "몇 가지 적절한 정치적 이미지들을 전개하고" 
노동자당의 정치강령을 읽었다고만 적고 있다.
  더 큰 의미에서 보면 (나의 투쟁)의 저자가 옳았다. 이 행사와 더불어 드
렉슬러가 창설한 보잘 것  없는 맥주모임이 아돌프 히틀러의 대중정당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은 뒤쪽에 숨은 조종자의  역할
만 했다. 그런데도 그날 모여든 대략 2천 명의 사람들은  호프 양조장 대형
홀을 가득 채우고 히틀러의 정치적 생각을 인상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이
제부터 계속적으로, 점점 더 오직 자신만을 상승시키면서,  그의 의지, 그의 
스타일, 그의  연대가 당을 앞으로  밀어붙이고 성공이나 실패를  결정하게 
된다.
  나중에 정당은 1920년 2월  24일의 행사를 마르틴 류터가 비텐베르크 성
문에 95개 조항 반박문을 붙인 일에 비교하였다. 그러나  루터나 이날 행사
나 전해내려 오면서 원래의 역사적  의미에 별로 맞지 않는 이미지를 얻은 
것이다. 역사는 극적인  장면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무시하는 경향을  가
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날의 정당 창설이 미리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주요 
연사는 당원도 아니었으며, 히틀러는 이 행사를 정당운동의  창설이라고 뒷
날 거듭 축하한 것은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이날 저녁 낭독한 강령은  안톤 드렉슬러가 아마도 어느 정도 고트
프리트 페더의 영향을 받아서 작성한 다음 꼼꼼히 검토하라고 위원회에 넘
겨준 것이었다. 히틀러의 참여는 항목별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몇 개의 항
목에 나타난 표어식의  표현에서 교열과정의 참여를 짐작할 수 있다.  전부 
25개 조항으로  나뉘어 있지만, 옛날  민족적인 이데올로기 현재  국민적인 
항의욕구 및  현실거부 성향과 제멋대로  결합되어서 전체적으로 감정적인 
매력을 통한 통일성을  지닌다. 부정의 조항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  두드
러진다. 그것은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반의회주의, 반유대주의 등이고 전
쟁의 종결과 결과를 극히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중산층이 보호를 위한 다양한 요구 같은 긍정적인 조항들은 
대단히 모호하고 드물지 않게 안톤 같은 소시민의 두려움과 욕망을 자극하
는 요구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노동을 통하지 않고  번 수입은 모두 몰
수할 것(11조), 전쟁 동안 거둔 모든 이익은 압류할 것 (12조), 대기업은 노
동자에게 이익분배를 해 줄 것(14조) 등이다. 그밖의  강령조항들은, 대규모 
백화점들을 지방 자치단체가 인수해서 '싼 가격으로' 소규모 기업체에 임대
해 줄 것(16조),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토지투기를 금지할 것(17조) 등을 포
함한다.
  기회주의적이고, 서둘러서 즉석에서  만들어진 요소들이 들어 있지만  이 
강령의 의미는 일부에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하찮은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그것은 장차 당 지도자인 선동가적인 능력의 전개를 위해서 유혹적으로 빛
나는 배경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것은 적어도  소질
면에서 뒷날  국가사회주의 지도이념이 모든  본질적인 경향들을 포함하고 
있다. 공격적인 생존공간 조항(3조), 반유대주의 원칙(4,5,6,7,8,24조), 그리고 
해롭지 않게 지방자치단체 뒤에 숨은 형태로 나타나서 분명 굉장한 박수갈
채를 받았을 전체주의적인  요구, 즉 언제라도-공동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
에 앞선다는 형식으로- 전체주의 국가의  원칙으로 바뀔 수 있는 원칙들로 
뒤덮이고 하지만 그래도  국가사회주의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남용되
고 있는 자본주의를 제거하겠다는 것, 공산주의의 계급투쟁  노선을 극복하
겠다는 것, 마지막에는  강력하게 통합된 국가 공동체 안에서 모든  계층의 
화해를 이룩하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민족적,  사회적으로 깊이 분노한 나라에서  특별한 
매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지배적인 두가지 사상을  하나로 
합친 '(민족)국가  사회주의'라는 이념 혹은  공식은 시대의 수많은  정치적 
강령들과 질서계획들의  토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능공 
안톤 드렉슬러가 자신의 '정치적  각성'에 대해서 쓴 소박한 체험적 보고서
에도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1918년에 이미 산업체의 후원을 얻어서 '반볼
셰비키 연합'을 결성한  에두아르트 슈타틀러의 베를린 강연들에도  나타나
는 생각이었다.그것은 뮌헨의  방위군 지역사령부에 의해서 도입되었던  계
몽강좌의 주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제목을 
가진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에 대해 도발적인 공명을 불러 일으킨 사싱
이기도 했다.
  이 생각은 사회민주당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어서, 제2차  인터내셔널
의 실패에 대한 실망에서 전쟁 발발 무렵에 몇 명의 독립적인 인물이 국가 
사회주의 혁명 계획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도이치 사회주의 노
동자당'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철도  기술자 루돌프 융이 1919년에  펴낸 
광범위한 이론서의 제목은 (민족국가적 사회주의의 형성과 목적)이었다. 국
가사회주의는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서 자기들이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를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시대적 정치사상이라고 자신하였다.  모든 
인터내셔널의 노력들과 아주 다르게 융은 1918년 5월에 벌써 오스트리아의 
동지들과 힘을 합쳐서  '도이치 국가사회주의 노도자당'이라고 이름을 바꾸
고 있다.
  호프 양조장의 모임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노동자당도 이름을 바꾸었
다. 수데텐 지역과 오스트리아 그룹을 본받아서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
자당'이라고 바꾸었다. 동시에  국경 저편 동지들의 전투상징을 받아들여서 
갈고리 십자가를 상징으로  채택하였다. 오스트리아 국가사회당 당수인  발
터 릴 박사는 바로 직전에 모든 국가사회주의 정당을 결속시키는 서비스를 
맡을 '국가간  사무처'를 만들었다. 이제  여러 가지 댜앙한 결속을  위해서 
국가사회주의 강령들 간의  활발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특히  뒤셀도르프의 
기술자 알프레트 브루너의  '도이치 사회주의당'과 활발한 접촉을  했다. 이 
정당은 "극좌이며 우리의 요구는 볼셰비키들의 요구보다 더 극단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중간급 도시에 지구당을 두고 있었고, 뉘
른베르크 지구당은 교사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이끌고 있었다.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1920년 4월 1일에  히틀러는 마침내 군에서 제대하였다. 이제 그는  대안
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적으로 정치에  헌신하여서 국가사회
당의 지휘를 맡고 당을 자기 생각대로 개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 자
르 강 가까운 곳에 있는 티어슈 거리 41번지에 방  하나를 세웠다. 하루 대
부분 시간을 그는  지하실에 있는 당사무소에서 보냈다. 그러나 당의  직원
이 되는  것만은 절대로 피했다. 당이  최초의 위기를 맞이하자 그가  어떤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갔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의 셋방  주인집 
여자는 언제나 똑같은 일을 하는 더러운 젊은 남자를 '진짜 보헤미안' 이라
고 생각했다.
  그는 더 잃을 것도 없었다. 그의 자신감은 주로  연설가로서의 재능과 냉
정함과 위험에 대한 각오에서 나온  것이지 이념의 확신에서 나온 것은 아
니었다. 이념 자체가 아니라 이념이 제공하는 도구적 가능성, 그 자신의 말
로는 그것이 '강력한 구호'를 내놓는가 하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고루
한 민족 이론가들'과 '말만  하는 인간들'과 '사상 도둑들'에 대한 '불쾌함과 
깊은 역겨움'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그가  정치적으로 형성 가능한  실체가 
없는 단순한 사상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리고 자기가 논쟁에서 남을 물리칠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폭발적
인 연설을 시작했다는 사실에도 드러나고 있다.
  그는 사상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사상의 입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능숙
한 사용을  통해서라고 여겼다. 진실이  아니라 무기로서의 속성의  사상에 
설득력을 부여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반박하기 힘든 불확실한  표현으로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모든  이념은 최고의 이념이라고 하더라고  이념 자
신이 목적이 될 경우에 위험하게 된다. 사실상 이념이란  목적을 위한 수단
일 뿐이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정치투쟁에서  폭력은 언제나 이념의 뒷받
침을 위해서 필로 하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제 자기
가 들어선 '국가사회주의'도 그는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야심만만한 목적
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 그가 무대에 가지고 들어선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표어가 되
었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이 포함하고 있는 화해의  이념은, 특히 전선에서 
남자들 사이의 유대라는  전쟁을 경험하고 난 다음  그들의 미래의 일부를 
빼앗아가기 시작한 계급투쟁의 구호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고 시대에 가까
운 것으로  여겨졌다. 세기가 바뀐  직후에 벌써 국가사회주의적인  생각을 
보여주었던 작가 아르투어  묄러 반 덴 브룩크는 국가사회주의는 이제  '도
이치 미래의 일부'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것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간교하
고, 건강한 인간이성을 경멸하는,  발상이 풍부한 정치가의 손 안에 들어가
자 그것은 정말 그렇게 되었다. 이 이념은 수많은 지원자를 얻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히틀러가  대중의 환호성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자기  자신이
야말로 바로 도이치의 미래라는 확신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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