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tler's Rebellion

국가 사회주의의 세계상

by godfeeling 2020. 8. 15.

  히틀러가 츠베르크 요새에 있는  자기 감방 벽에 걸어두었던 월계관은 
걔지지 않은 의도에  대한 도전적인 암시 이상의 것이었다. 체포  당해서 
정ㅊ거 사건에서 강제로 격리된 일이 그에세는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너무나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1월 9일의 재앙이  당에 가져온 
결과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분노하도 ㅉ어진 추종자들이  불만을 멀리서 
관팔하고, 게다가 민족주의를  위한 순교자라는 고난의 영광까지  둘러쓰게 
되었다. 몇 년을 거의 아무 정신 없이 불안하게 보낸  다음 자기 자신을 돌
아볼 기회도 생겼다. 자신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을  돌아보게 된 것이
다. 
  격앙된 감정이 잦아드는  동안, 처음에는 머뭇거리면서 요구했지만, 재판
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강해진  민족 우익의 지도자 역할이 메시아적 과업
을 지닌 유일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점차 확고한 윤곽을 잡아나갔다.  일관
성과 아주 높은 역할의식을  가지고 히틀러는 자신이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의식을 동료 수감자들 사이에 퍼뜨렸다. 
  이 순간부터 이 선별의식은 그의 외양에 가면을 쓴,  얼음장 같은 ㅁ모를 
부여하였다. 그것은 미소도, 독특하지 않은 몸짓도, 자신을  잊은 태도로 일
체 없애버렸다. 알  수 없는, 거의 추상적인  비개성의 모습으로 그는 장차 
자기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통과하게 된다. 11우러 쿠데타 전에 이미  디트
리히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위대함의 망상, 그의 '메시아  콤플렉스'에 대해 
불평했다. 이제 그는  점점 더 의도적으로 조각상의 자세로 얼어붙어  버린
다. 그것은 위대함과  지도자 능력에 대해 그가 가진 이미지의  기념비적인 
영역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감방생활은 계획적인 자기 양식화 과정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이어진 
판결에서 40명의  쿠데타 참가자들이 선고를  받고 란츠베르크로 이송되었
다. '히틀러 돌격대' 대원들인 베르히톨트, 하우크, 모리스, 아만, 헤스, 하이
네스, 슈레크와 대학생인 발터 헤벨이었다. 교도소측은 히틀러에게 별 갱제 
없이, 오히려 친근한  방식으로 이런 추종세력 한가운데 머무는 것을  허용
해주었다. 그의 특별한 요수들은 거의 모두 받아들여지다시피 했다. 거대한 
회의실에서 식사시간에 그는 갈고리 십자가 아래서 의장 노릇을 하였고 다
른 죄수들이 그의 방을 정돈하였으며 그는 유회와 잡일에  끼지 않았다. 그
의 뒤를 이어  감옥으로 온 동료들은 '즉시 지도자께 신고하러'  가야 했다. 
그리고 어떤 체험자의  보고에 의하면 바 10시에 규칙적으로 '대장이  참석
한 가운데 강연'이 있었다. 
  낮 동안 히틀러는  광범위한 서신교횐에 몰두하였다. 언어적으로  특기할 
만한 숭배문서는 요제프 괴벨스라는 어떤 젊은 문헌학 박하과정 학생의 글
이었다. 거기에는  히트럴의 법정 최후진술에 대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이 거기서 말한 것은  붕괴되고 신을 잃어버힌 세계의 절망 한다운데
서 나온 새로운  정ㅊ거 신념의 신앙 고백입니다... 어떤 신이  당신에게 우
리가 고통받는 것을  말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말로 우리  민족
의 고통을 파악하엿습니다... " 그리고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도 그에게 
편지를 썼다. 로젠베르크는  '수백만 개로 갈라진 우리  지도자의 상징'이라
는 '히틀러의 엽서'를  전파하였다. 외부 세계가 수감된  사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자주  감옥의 뜰을 산책하엿다.  그는 아직도 옛날의  불아정한 
스타일을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심복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카이사르의 얼
굴을 하였고, 짧은  가죽바지, 민속적인 제킷을 입고 모자를 자주  썼다. 그
가 이른바 동지들의 밤에 연설을 하면 "바깥 계단실에서 소리 없이 교도관
들이 모여서 연설을 들었다."
  패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이 그는 자기 생애의 전성들과 비전들
을 전개하였다. 아누 특이한  연관성 속에서 들려주곤 하였다. 뒷날의 언금
에 따르면 고속도로 건설과 국민차 이념으 바로 이  시기에 나온 것이었다. 
면회 시간은 일주일에 여섯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히틀러는 매일 여
섯시간까지 추종자들,  청원자들, 친한  정치가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으 
란츠 베르크로 찾아왔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여성들도 아주 많았다. 그러
므로 이 감옥을  '최초의 갈색집'(갈색집이란 뒷날 국가사회당의 당사 건물
을 칭한다)이라고 말한 것도 틀리지만은 않는다.  재판이 끝난 직후 있었던 
히틀러의 서른다섯 살 생일에는 이 유명한 죄수에게 배달되어 온 꽃다발과 
소포들의 여거 개의 방을 가득 채웠다. 

    변칙적인 독서
  억지로 숨돌릴 시간을 얻은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고조사를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감정들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전에 읽다만 것, 절반  쯤 생각해 둔 것 등을 최근의  독서결과와 합쳐서 
세계관 체계의 윤곽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  시기는 나에제 그때까지 오직 
본능적으로만 느끼고 있던 수많은 개념들을 분명히 할 기회를 주었다. "
  그가 실제로 무엇을 읽었는가는 저체적으로 간접증거에 따르거나 아니면 
제 3자의 발언에서 얻어온 것들이다. 그 자신은  정신적 종속이라는 의심을 
받을지 모른다는 독학자의 근심에  사로잡혀서 책이나 어떤 작가를 언급하
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만 여러 번이나  서로 다른 맥락 
속에 등장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히틀러는 이미 전쟁중에도 지니고  잇었
다고 하며, 상당히 긴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었다. 니체, 쉴러, 레시으이 경
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인용을 피하였고, 이러한 방
법으로 독자적으로 깨달았다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1921년의 자전적인 묘사엣 그는 천년기에 "민족경제 이론들을 철저히 연
구하였다. 당시 이용할 수 잇는 반유대주의 문현도 전부 연구하엿다."고 말
햇다. "스물두 살부터 나는 특별한 열의를  가지고 군사정치 문헌들을 잡았
으며, 아주 집중적으로  일반적인 세계사 문제를 탐구하는 일을 결코  중단
한 젓이 없다.  "그러나 한 번도 어떤 작가나  제목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어느 정도 동떨어진 방식으로 분량을 말하고 자기가 공부하는 전체
적인 영역만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상당히  멀리 내다보는 몸짓으로 예술사,  문화사, 건축사, 
'정치적인 문제들'을 읽는다고 거론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때까지 원전들이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손을 거친 요약으로만  지식을 섭취했다는 의심이 
든다. 한스 프랑크는 란츠베르크 시절에 그가 읽은  책들로 니체, 체임벌린, 
랑케, 트라이치케, 마르크스, 비스마르크 등을 거론하였고, 도이치측과 연합
국축의 전쟁  회고록들을 거론하엿따. 그러나 그런  책들과 나란히, 그리고 
그보다 먼서 그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의 찾아내기도 힘든  원전들에서 
추려낸, 학문적이지 않은  소책자들이 제시하는 침전물에서 자신의  세계상
을 걸러냈다.  즉 종족주의적이고 반유대적인 책자들,  게르만 정서에 대한 
이론서, 혈통의 신비와 우생학, 역사철학적인 논문들과 다원주의 이론 같은 
것들이었다. 
  히틀러의 독서에 대한  상당수의 동시대 증언들에서 믿을  만한 것은 그 
집중도와 열의이다. 쿠비체크는 히틀러가 린츠에서 이미 세  개의 도서관에 
동시에 등록하고 있었고,  '책들에 둘러싸인 모습밖에는' 기억에  없다고 증
언하고 있따.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는 책을 '그냥  열어보았거나' 
아니며 '얼추 읽곤'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원탁대화에 이르기까지 히틀러
의 연설과 글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기억은 이상할  정도로 정신적인 무
관심과 문자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준다. 거의 2백  번의 원탁독백에서는 간
혹 두세 명의 고전작가가 등장할 뿐이다. <나의 투쟁>은  단 한 번 몰취미
한 유대주의 맥락에서 괴테와 쇼펜하우어를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지식은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지식의  높은 감정도 수
고도 알지 못했고,  오직 그 쓸모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올바른 
독서의 기술'이라고 말한 연습은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
해서 사용형식을 찾고 존경받는 선서보증인을 찾는 행위에 불과하였다. '어
떻게든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 적합하게 꾸려넣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나의 투쟁
  그는 7월초에 쌓여 잇던 책더미를  향한 것과 같은 똑같은 을 가지고 격
렬하게 <나의 투쟁>집필에 달라붙었다.   석 달 반 뒤에는 책의  제 1부를 
완성하였다. 그는  "자신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영혼으로부터  써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밤늦게까지 타자기 소리가 울려나왔고, 그가 좁
은 방에서 친구인 헤스에게 원고를 불러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임 완성된 부분을  대개는 토요일 밤에 소년들처럼  자기를 둘러싸고 앉은 
동지들에게 낭독해 들려주었다."
  이 책은 처음에 '4년 반의 투쟁'을 청산하고 정리하는 의미로 시작되었지
만 점차 자서전, 이데올로기적인  논문, 전략적 행동방침 등의 혼합물로 발
전하게 되었고 동시에  지도자 신화를 완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정치로 
들어서기 이전의 비참하고 어두운 시절은 이 책의 변용시키는 묘사룰 통해
서 축적과 내적인 준비과정이라는 성격을 얻었다. 곤궁과  결핍으로 대담하
게 짜여진 모습과 고립을 통해서였다. 그것이 신의 뜻이기도  한  30년간의 
사막 생활로 바뀐 것이다. 센세이셔널한 배후를 밝힌  체험고백을 기대하였
던 출판업자 막스 아만의 원고가  딱딱하고 지루한 것을 보고 대단히 실망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예욕은  처음부터 아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는 폭로하려고 했던 게  아니
라 최근에 생겨난  지휘 요구를 위하여 지적인  바탕을 튼튼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그토록 찬양한 대로 정치가와  강령입안자가 천재적으
로 결합한 예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이 대단히 높은  의도에 대하여 열쇠
가 되는 구정이 책 제 1권 한가운데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들어 있다.
  정치가의 기술은 가능성의 기술이라는 말이 진정 맞는다면 강령입안자야
말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원하면 신들의 마음에 들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인류의 기 긴 세월동안 정치가와  강령입안자와 결합되는 
일은 단  한번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이 내면적일수록  정치가의 
활동에 반대하는 저항도 더 커지고 마련이다.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평범
한 시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요구들을 위해서 일을 해 야 할 뿐 아니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목적들을 위해서도  일을  해야한다. 그래서 
그의 삶은 사람과 미움으로 찢기게 된다. 
  그럴수록 성공은 드물다. 그렇지만 수백 년만에 한 번  어떤 사람에게 성
공이 닥쳐오면 아마도  그의 노년에는 다가오는 명성의  나직한 빛이 그를 
둘러싸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위대한 사람들은 역사에서는 마라톤  주
자들이다. 당대의 월계관은  죽어가는 영웅을 머리에 겨우 씌워지게 될  것
이다.

    콤플렉스와 왜곡된 사상의 집합체
  이렇게 나직한 빛에 들러싸인 현상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 이 책의 끊임없는 암시내용이다.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은 
자신이 겪은 실패를 비극적으로 변용 시키려는 노력이다.  히틀러는 비상한 
진지함으로 갈채를 배려하면서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 책으로  그는 학교교
육이 부족하였지만 그리고 미술  아카데미에서 실패하고 남자 하숙집의 치
명적인 과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시민적인 교양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입증
하려고 하였다. 자기가 생각이 깊고  현재의미 말고도  미래에 대한 구상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넘은 의도였다.
  큰소리치는  앞모습 뒤에 자신의  지적인 능력에 대한 독자의 의심을 두
려워하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염려가 분명하게 웅크리고  있다. 
자신의 언어에 기념비적인 특성을 주기  위해서 그는 자주 명사를 여러 개
나 길게 나열하였다.  많은 명사들은 형용사나 동사에서 만들어 낸  것이어
서 그런 단어들의 무게는 공허하고도 인공적인  효과를 냈다. "민주적인 결
정을 통해   성취된 동의과정에서, 라는 의견을  대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호흡이 없는 언어이고  자유가 없으며 마치 경련상태에 있는 것  같다. "최
근에 나는 이 새로운 세계의  이론적 문헌에 탐닉하고 그 가능한 효과들을 
분명히 하면서  이 효과들을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생활에서의 실질적인 
현상과 그 효율성의  사건들과 비교해보았다. 점아 나는 내 자신의  확신에 
대한 확고한 기반을 얻었다.  그래서 이 시기 이후로 이 문제에서  나의 내
면의 관점의 변화를 일으킬 입장에 서지 않게 되었다.
 열 추종자들의  교열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수많은 문체사의  탈선은 박학다식한 척하는  저자의 태도에 원인이  있다. 
'우리 민족의 정치적 오염의  쥐새끼들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학교 교육
을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광범위한 대중의  기억으로부터 갉아 먹어버렸고, 
'제국의 깃발을, 전쟁의 품에서'꺼냈다고 혹은 사람들을 '단순히 육체로부터 
타락하도록' 만들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루돌프 올덴은 히틀러 문제의 과도한 가난으로 때때로 놀이가 어떠한 피
해를 입는가를 지적하였다.  예컨대 히틀러는 곤궁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
다.  "조라  죽이는 독뱀의 집게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가람은 그  독니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이  몇 마디  말에는 너무나도 많은  오류들이 있어서 
논문 한 편을 써도 제대로 고 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독뱀은 집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간을 조여 죽일 수 있는 뱀은  독니를 갖고 있지 않
다. 그러나  인간이 그런 뱀에게 목  졸라 죽임을 당하더라도 독니를  알게 
되지는 않는다."
  이 책에는 사고의 과장된 무질서와 동시에 그런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날
카로운 확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확신들은 깊이  비합리성에서 직접 
튀어나온 것이며 드물지 않게  적절한 형식이나 인상적인 그림들을 보여주
고 잇다. 이 작품을 특징짓는 모순되고 차단된 모습이다. 그의 완고함과 완
강함은 폭풍우 같은 구절들에 대한  억누를 길 없는 취향과 모순된다 언제
나 느낄 수 있는 양식화  의지는 자기통제의 결핍과 모순되고 논리는 둔감
과 모순된다. 단조롭고 광적으로 억누른 자기중심주위만이 모순  없이 드러
난다. 이러한 작  중심주의는 책이 두꺼우면서도 이 책에 사람인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잘 어울린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읽기가  매우 힘들고 까
다롭지만 그런데로   상당히 정확하게 저자의 초상화를 보여준다. 그는  남
이 자기를 꿰뚫어볼까 하는 근심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를 보여주는 사람이
다.
  자기  책의 이러한 폭로적인  특성을 알아채고 히틀러는 뒷날 이 책과도 
거리를 두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간혹  <나의 투쟁>은 <민족  관찰자>의 
사설들을  형편없는  문체로 엮어놓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창살  속의 
공상'이라고 밀쳐버리기도  하였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제국수상이 
되리라는 사실을 1924년에 미리 알았더라면   이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
라는 점이다."  그는 전략적인 혹은  문체사의 확신들만을 유보하고 싶다고  
암시하였다. "내용상으로는 아무것도 고치고 싶지 않다"
교양 시민적인 과시욕과  오스트리아 관리 스타일의 과장  섞인 질질 끄는 
벌레 같은 복합문 등 책의  외람된 문체는 책에 접근하기를 어렵게 만들었
다. 그 결과  나중에 1천만 부나 찍어서 보급된    이 작품은 다른  수많은 
의무 문헌들의  운명을 이어받아서 읽히지  않고 서가에 꽂히기만  하였다. 
언제나 독같이 암울한 강박관념을  드러내는, 환기되지 않은  그의 모든 콤
플렉스와 감정이 기반하고  있는 의식 바탕도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히틀
러는 자신의 의식을 바탕을 잘 준비된 연설가로 등장할 경우에만 감출  수 
있었다.
  이상하게 파괴적인  소문이 독자로 하여금  어떤 페이지들, 특히  매독에 
관한 장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전체적으로   수없이 지저
분한 표현들,  뒤틀린 그림들,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문체의 가난뱅이  냄새 등이 독자들에게 역겹게 느껴졌다. 전쟁과  전
후 활동에 몰두해서 란츠베르크에 갇힐 때까지 고작해야 어머니 같은 여자
친구들만 알았던 망가진 젊은 남자의 금지 관념들은 그가 세계상에 부여한 
답답한 흐름에 반영되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어떤 여자와 연관된 소문
에 빠질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역사, 정치, 자연 혹은 
삶에 대한 모든 관념들은 한때 남자 하숙집에 살았던 사람의  공포와 욕망
을 담고  있다. 언제가지나 계속되는  사촌기의 자극적인 발푸르기의  밤의 
꿈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세계를 짝짓기, 음란 성 도착증, 능욕, 
혈통 오염 등의 그림들로만 본다.
  유대인의 최종  목표는 다른 민족들은  탈민족화하고 뒤죽박죽 사생아로 
만들고, 최고종족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민족의지식인들을  제거해서 민족 
뒤섞기를 지배적인 추세로  만들고 그 자리에 자기  만족을 투입하는 것이
다. 그는 계획적으로 여인들과 소녀들을 망칠 분 아니라  대규모로 다른 사
람들의 혈통이 제한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유대인들이야말
로 라인  강에 검둥이들을 데려오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똑같은  속마음과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사생아 만들기를 강제로 도입해서 증오스런 백인 종
족을 파괴하려는 것이다.  백인의 문화적, 정치적, 수준을  덜어드리고 스스
로 주인의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멋쟁이  패션 제품을 통
해서 육체의 아름다움이 덜 중요해지지 않았더라면 수십만의  소녀들이 다
리가   휘고 역겨운  유대놈 사생아들에게 유혹된다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들 검둥이 기생충 민족은 계획적으로 우리의  경험 없고 젊
은 금발 소녀들을 욕보이고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서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민족주의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이 개와 말과  고양
이의 품종 개량만을 근심하지 말고  인간을 높이는 일을 걱정하는 더 고상
한 시대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국가사회주의의 특성
  분명히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는 이  책의 발산물 부자연스러움,  조각난 
무질서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의미를 낮추어 보
는 이유의 일부가 되어왔다.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도 그럴 
수도 없었으며, 이런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헤르만 라우슈닝은 
썼다. 그리고 더욱 정밀한  배경체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확언하였다. "원래 
히틀러가 바라고 있던 것은 , <나의 투쟁>에 들어 있지 않다"
  상당한 문체상의  광채와 사료적 효과를  가지고서 그는 국가사회주의를 
'허무주의 혁명'이라고 해석하였다. 그의 말로는  히틀러와 히틀러가 주도한 
얻을 만한 어떤 이념이나 대략적인  세계관 없이 효과를 보아가면서  지지
를 얻을 만한  분이기와 경향들을 그때그대 이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민족
주의, 반자본주의, 관습숭배, 외교상의  개념들, 그리고 종족 신념이나 반유
대주의 마저 언제나 흔들리는 완전히 원칙 없는 기회주의에 노출되어 있었
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회주의는 아무것도 존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믿지 
않았고, 가장 화려한 맹세조차도 전혀 가차없이 깨뜨리는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전략적인 배신 특성은  그야말로 끝이 업으며 모든 이데올
로기는 권력 의지를 감추기 위한 시끄러운 앞면일 뿐이라고  한다. 이 권력
의지는 언제나 오직 자신만을 원하면  모든 성과를 오직 거칠고 야심 만만
한 새로운 모험을 위한  기회와 단계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의미도, 구체적
인 목적도, 만족도 모른 채 말이다.  " 이  운동을 이끌어 가는  힘들은 완
전히 조건도 강령도  없으며 행동만 준비되어 있고, 그 최고의  핵심멤버들
은 본능적이며, 지도부의  정예요원들은 극히 사려 깊고 냉혹하고 매운  교
묘한 자들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자신의 운동에  대해서 항상 제시할  수 
있는 어떤  목적도 가진적이 없으며 지금도  없다." 30us대에 어떤  사람이 
국가사회주의 이면을 보고 조롱조로  '표상 없는 의지의 세계'라고 말한 것
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국가사회주의가 언제나 높은 정도의  적응력을 보였고 히틀러 자신이 강
령과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는 것은 사실이
다. 예를 들면 25개 조항이  낡은 다음에도 근 거기 매달렸다. 전략적 고려
에서 그는 모든 변화는 혼란을  부를 뿐이고 어차피 강령이란 상관없는 것
이라고 고백하였다. 국가사회주의  기본서로 여겨지는 ,중요 전락가 알프레
트 로젠베르크의 대표저서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자신은 '너무 어려워서, 극히 조금밖에 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가  정통이론을 발전시키지  않았고, 무릎만  꿇으면 
정통 사상을  입증한 것을 여겼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직  전략적으로만 
생각하는 성공의지와 지배의지였던  것은 아니다. 권력만을 절대적인  것으
로 이데올로기는 그때그대의 요구에  따라 멋대로 이용하는 종류의 권력의
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국가사회주의는 실질적인 지배와  독트린 두 가지 다였다. 그 두  가지는 
서로 얽히고  뒤섞여 있다. 개별적으로  전해지는 목적의식 없는  권력욕에 
대한 극단저긴 고백들을 살펴보아도 히틀러와 그의 가까운 주변 사람은 언
제나 자기들이 가진  선입견과 억눌린 유토피아의 포로들이었다.  국가사회
주의는  권력을 높여줄 가능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서는 이념상의 동기
를 받아들이기 않았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권력의 고백들은  대단히 희미
하고 알아보기 힘든 것이라도 이념적 동기를 빼고는 이해되지 않는다.   
  히틀러는 그의 놀라운 인생행로에서 전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든지 기민한 전략으로 쟁취하였다. 그의 성공에 나타나는  상당히 인상적인 
상황이었다. 성공  자체는 이념화된 공포, 희망  비전들이 복합체와 관계가 
있다. 히틀러 자신이 그의  성공은 강제적인 사유능력과 관계가 있다. 그는 
역사와 정치, 권력의 인간존재에 대한 몇 가지 기본  문제들에 대한 사색에
서 그러한 사유능력을 이용할 줄 알았다

    히틀러 세계상의 일관성
  그러므로 <나의  투쟁>으로 세계관을 표현하고자  한시도가 불충분하고 
문학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비록 단편적이고  무질서한 것
이긴 해도 이 책은 분명히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
하고 있다. 히틀러가 원했던 것이 실제로  그 책 안에  쓰여 있다. 비록 그 
시대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흩어진 부분들
을 정리하고 그 논리적 구조들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마침내 '숨막
힐 정도로 철저하고 일관된  이면의 건물'을 찾아내게 된다. 히틀러는 그것
을 란츠베르크 감옥 이후 몇 년 동안 계속 다듬고 체계화해 나갔지만 전체
적으로 더 이상의 발전을 겪지 않았다.
  초기의 고정관념들은 세부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상승의 세월과 
통치의 세월 동안 계속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을 앞에  두고도 그 마비
시키는 힘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허무적인  태도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다윈주의 적인 생존투쟁 이념으로 둘러싸인 공간의지, 반공산주의 , 반유대
주의  등은 그의 세계상의 일관성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최초와 최후의 진
술내용을 결정짓고 있다.
  그것은 물론 새로운 이념이나  새로운 사회적인 행복을 제시하는 세계관
은 아니었다. 그것은 19세기 중엽 이후로 넓게 퍼진, 기묘한 민족주의의 천
박한 학문에  속했던 수많은 이론들을  멋대로 짜맞춘 것이었다.  히틀러의 
'스폰지 기억력'이  지나간 세월의 탐욕스런 독성  빨아들인 것들은 놀라운 
변화를 거쳐서 상당히  새로운 맥락으로 다시 나타났다. 시대의 이념의  페
허에서 일으켜 세운,  어두운 구석들이 없지도 않은 대답하고 두려운  건축
물이었다.
  히틀러의 독창성은 ,  극히 이질적이고 거의 조합이 불가능한 것들을  하
나로   엮어내는 능력이었으며 이데올로기라는  조각이불에 밀도와 구조를  
부여하는 능력이었다. 그의  지성은 사상들을 생산하지는 못했으나  거대한 
힘을 생산해냈다는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은  이념 혼합체를 조여서 
단단하게 마들고 거기에 얼음장같은 맹혹성을 부여하였다.
  휴 트레버 로퍼는 이러한 정신의 차가운 착란세계를  인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정말  위풍당당하게 화강암처럼 단단한 모습으로  그러면서도 
불쌍한 정도로 뒤죽박죽 잔뜩 긁어모아서 썩어가는 쓰레기더미에 둘러싸인 
채 그  어떤 야만인이 입상처럼 거대한  힘과 거친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낡은 당통과 죽은 해충들, 재와 껍질들과 오물, 여러 세기의 지적인 쓰레기
들에 둘러싸인 채"
  어떤 사상도 권력문제를 질문해보는  히틀러의 능력이 특별한 무게를 지
니고 나타난다.  재치 있는 이념으로  인해 오히려 실패해버린  민족운동의 
대표자들과는 반대로 그는 사상 자체를 '단순한 이론 '이라고 해서 중히 여
기지 않았다. 실천적이고 조직능력이 있는 핵심이 그 안에  들어 있을 경우
에나 사상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가 당 목적에 맞는 관점들에  다른 생
각이라고 부른 것은 모든  이념, 경향들, 심지어는 맹목적 신앙에도 권력에 
걸맞는 ,그러니까 원래 의미에서 정치적 형식을 부여하는 그의 능력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두려움에  사인 시민 계급의 방어이념을 요약하였
다. 그 원래의 관념들을  더 조잡하게 만들고, 공격적이고 목적의식 뚜렷한 
행동이론을 마련한 것이다.  그의 세계관에는 시민시대의 악몽들과  지적인 
유행들이 모드 다 드러나  있다. 1789년 이후로 잠복해서 작용하는 ,러시아
와 독일에서 활성화된 좌익혁명에 대한 거대한 공포가 사회적 공포로 나타
나다.
  종족적, 생물학적, 공포로는  도이치계 오스트리아 사람으로써 외세에 대
한 공포가  있다. 서툴고 몽상적인  도이치사람들이 민족들 간의  경쟁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는 민족적인 염려가 민족주위 적 공
포로 드러나며 자기계급의 위대성의  시대는 끝나고 안전의 느낌이 부서지
는 것을  바라보는 시민계급의  시대공포도 나타난다.  히틀러는 소리였다.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 내부에 어느 것도 뿌리를  내리지 못
하고 있다. 모든 것은 외면적이며 우리를 스쳐지나간다. 우리민족의 생각은 
불안하고 성급해졌다.  삶 전체가 완전히 찢기고 있다"

    종말론적인 다윈주의
  무한한 공간을 탐하고 빙하기에서  움직이고 싶어하는 그의 극단적인 성
향은 이러한 근원적인 공포감을 세계위기의 징후로 확대시켰다.  이러한 위
기 속에서 시대들이  태어나고 몰락해 가고, 인류의 운명은 유희의  대상이 
된다. " 이  세상은 끝에 왔다." 그는  거대한 세계질병의 관념에 사로잡혔
다. 바이러스, 흰개미의  폭식, 인류의 궤양 등에  의한 질병이었다. 나중에 
그가 희르비거의 빙하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지구의 역사
와 인유발전이 강력한 우주적인  파국에 이른다는 주장이 그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몰락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열광하였던
가.
  이런 세계상에 들어 있는 대재앙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소명의
식을 이끌어냈다. 역사 앞에서 사명감을 가진 치유하는 특성이었다. 전쟁중 
마지막 시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군사적 필요성에 거역하면서가지도 그
가 유대인 근절 작업을 계속해 나간,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일관성 병적
인 고집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일상의 이해관계를   훨씬 
넘어선 거인들을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 우주를 구하기 위해  선택되어
서 악을 '다시 악마에게 돌려보내는' '다른 힘'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뿌리
를 박은 것이었다.
  강력한 우주적 싸움이라는 생각은 이  책의 모든 주장과 앞모습을  배하
고 있다. 그러한 주장들일 아무리 부조리하고 공상적인  것일지라도 그것들
은  이 생각의 해석에 형이상적인 진지함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어둡고 장
엄한 연극적 관점으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몰락할지도 몰라, 아마도 그러
나 우리는 세계를  함께 끌고 갈 거야 무스피리, 세계방화  말이야" 언젠가 
그는 종말론적 기분에 휩싸였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투쟁>에는 그가 자신의 맹세에 세계를 함께 끌어들이는 우주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구절들이 수없이  만하다. 그는 이렇게 확인하였다. "공산
주의라는 유대식  이론은 우주의 토대로서,  사상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질서를 종말로 이끌어 갈 것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세계의 
질서원칙을 끌어올리는 이런 무의미한 가설을 우주적인 영역에서 생각하려
는 항거할 길 없는 히틀러의 성향을 보여주고 이사. 그는 '별들' ' 혹성들' '
세계의 기' '수백만 년들'을 극적인 사건 속으로 함께 끌어들이고 '창조' '지
구' '천공'등을 배경으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분명한 방식으로   모두에 대한 모드의  싸움이라는 원칙 약자에 
대한 강자의  승리라는 원칙을 감추어주고  일종의 종말론적인 다윈주의로 
발전해 나가는 배경이었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지구는 떠도
는 술잔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언제나 가장 강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수만 년 전부터" 그는 영원히 계속되는  치명적인 상
호 갈등에서 일종의 세계 법칙을 찾아냈다고 믿었다.
  자연은 생명체들을  이 지구에  자리잡게 하고서 힘에 의한 자유로운 게
임을 구경한다.  용기와 근면성에서 가장강한  존재가 자연의 총아가  괴어 
존재의 지배권을 얻게 된다.  오직 약하게 태어난  자만이 이런  법칙을 잔
혹하다고 느낀다. 그럼으로써 그는  오직 약하고 제한된 인간이 될 뿐이다. 
이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다면 모든  유기적 생명체의 최고발전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보존의 욕구만이 언제나  마지막에 승리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욕구에서  보면 이른바 휴매니티란 멍청함,  게으름, 망상
적인 아는 체하기 등의 혼합을 표현한 것으로서 3월 햇빛에 눈처럼 녹아버
리고 마는 것이다. 영원한  싸움을 하면서 인류는 위대해졌다. 영원한 편한 
속에서 인류는 몰락하고 말 것이다.

    단단한 자연법칙
  이러한 '단단한  자연법칙'은 모든 사색의 출발점이며  연관점이 되고 있
다. 그것은  역사란 다름아닌 생존공간을  둔 민족들 간의  생존싸움이라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생존  싸움에 '모든 가능한 수단'이 다 허
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설득, 간계, 영리함. 인내 .선의,  교활함, 그리고 
잔인성까지도 말이다.
  전쟁과 정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며, '전쟁
이야말로 정치의 최종목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사건의 규범들로 일
치하는 것만을  존중하는 정의 혹은  도덕의 개념들을 특징짓는  생각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공격성을 강조하는  귀족주의적인  지도자 이념과 종족
적인 특질 도태의 이념들에 양분을 주었다. 그는 유럽 전체에서 '형통에 다
른 고기잡이'를  해서 금발에 흰  인종이 '자신의 혈통 근거를  확장'시키는 
것을 돕게 만들고 ,패하지 않는 종족으로 만들려 한다고 했다.
 이렇데 전체적인 전투 철학의  표지에서 보면 복종이 미덕보다 더 중요하
고 헌신의지가 통찰력보다 광신적인  맹목성이 최고의 미덕보다 더 중요하
였다. 결혼은 자기  주장의 결합이고, 집은'생존 싸움을 위한  성'이 되었다. 
동물 세계와 인간사회를 거칠게 유추해서 히틀러는 가차 없는 사람들이 감
성적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찬양하였다. 그의 말로는 원숭이들은  모든 
것은 '아웃사이더  적으로 간주하고  덤벼들어  죽인다. 원숭이에게 타당한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인간에게도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언급에 아이러니가 얼마나  적은가 하는 것은 자신의 채식주의를 
보존하기 위해 원숭이의 식사습관을 예로 들면서 원숭이가 올바른 길을 보
여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한 일이다. 도한 자연을  보면 예컨대 자
전거는 올바른 것이고 비행선은 '완전히  미친 짓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탐구하고 그것을 다루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
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자연상태의   잔인한 도태원칙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해 
낼 수가 없다. 자연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고양이가 쥐를 먹는다는 것이 
누구 잘못일까?"라고 그는 비웃었다. 이른바 인간의 휴매니티란 '인간의 허
약함에 봉사할 뿐이며  사실은 자기 존재를 가장 잔혹하게 절멸시키는  짓'
이다. 싸움, 굴복, 파괴 등은 변경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한존재는  다른 존
재의 피를 마신다. 하나가  죽어야 다른것의 양분을 얻는다. 휴매니티 같은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
  타인의 권리 타인의  행복의 요구에 대한 히틀러의 완전한 무관심,  그의 
극단적인 부도덕성은  "신적인 존재법칙에 조건  없이 굴복한다"는 생각에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시대의  데카당스와 약자의식
을 보충해보려는 후기 시민사회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드러나  있다. 주저하
지 않는 갊은 찬양하고 가차없고   원시적인 것을 본래의 것으로 여기려는 
경향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히틀러가 자연법칙에 기대어 자신의  개인적인 냉정함
과 감정 없음을 변명하려 했다고 추측된다. 초개인적인  원칙을 들이댐으로
써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싸움,  살인, '피의 희생 '등을 신의 계율을 겸손하
게 실현하는 행동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서 나  자신을 지
키는 것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라고 그는 <나의 투쟁>에 
썼다 . 그리고 거의 20년이 지난 다음전쟁과 유대인  근절의 한가운데서 도
덕적인 만족감을 지닌 채 이렇게 확인하였다. "나는 양심이 깨끗하였다."
  전쟁과 파괴는 위협받는  세계의 정치의 도덕이며 형이상학이었다.  자기
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거대하고 불확실한 거리를 두고 시대들을 눈앞에 떠
올려보면, 그리고 민족들과 문명들의 몰락 이유들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본
능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곤 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지배체계
들이 피로, 허약 상태, 파국에 도달하는 것은 자연을  무시한 것, 특히 종족
을  뒤섞은 일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생명체가  종족의 순수성
에 대한  뿌리 깊은 총동을 존중하고  "박새는 박새에게, 참새는 참새에게, 
황새는 황새에게, 들쥐는 들쥐에게 " 가는데  반해서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고 생물학적인 배신을 하려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리하르트 가그너가 죽은 날인1883년 2월 1일에 베네치아에서  쓰
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은 못했던<인간의 암컷에 대해서>라는 논문에서  다
루었던 주장이었다. 민족들이  성 불능에 빠져 늙어죽는 것은 원래의  질서
를 거부한 데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피의 혼합과 그를  통해서 생겨나는 
종족 수준 저하야말로  모든 문명들의 죽음의 원인이다. 인간은 전쟁에  패
해서 몰락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순수한 피에만 깃들여 있는 저항력 의 상
실로 몰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좋은 종족이  아닌 것은 폐품
이 되고 만다.

    창조적인 종족핵 이론
  그 뒤에는 창조적인  종족핵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에 따르면  태초
부터 소수의  아리안족 엘리트가, 우둔하고  역사도 없이 스러져간  열등한 
민족들의 대중을  지배해 왔다. 종속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들의 
천재적인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국가들을 건설하고 문명들을  만
들어낼 수 있는 이 빛나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은 "언제나 새로이 불을 만
들어내었고 그 불은  인식이었다. 그것은 말없는 비밀의 밤을 밝혀서  사람
들에게 지상의 다른 생물들의 지배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었다." 이 아리안 
종족핵이 종속된 종족과 섞이기 시작하면 문명의 하강과  몰락이 나타났다. 
"지구의 이 지역에서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란 아리안족의 존재와 뗄 수 없
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종족의 죽음이나 몰락은 이  지역에서 문
명 없는 시대라는  어두운 베일을 다시 내려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
이야말로 인류가 새로 직면한 위험이라는 것이다. 고대의  위대한 왕국들의 
몰락과는 달리 이제는 문명의 몰락이  아니라 더 높은 인종 자체의 종말이 
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리안 핵의 파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전되어 있
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서 게르만 혈통은 점차 쇠진을 향해 다가가고 있
다."고 히틀러는  절망해서 말했다. 다가오는  승리를 의식하면서 사방에서 
어둠의 세력들이  몰려들고 있다. "유럽을  생각하면 나는 몸이 떨립니다." 
하고 그는 연설에서 외쳤다.  구대륙은 이제 '피와 슬픔의 바다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비겁한  허풍쟁이들과 자연을 비판하는 자들'이 자연
의 기본적인 법칙을 공격하려 하고있으며, 수많은 위장 아래  몸을 감춘 채 
'종합적인 총공격'의 요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공산주의, 평화주의,  국제연맹, 모든 국제적  운동과 국제기구들, 그리고 
유대-기독교의 사랑도덕 이 도덕의  전세계적인 변형태들이 인간을 설득하
려고 한다. 즉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감히 자기 충동의  주인이 되어서 
영원한 평화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 
하늘에 대하여 반항'할 수 없는  법이다. 의심할 수 없는 자연의 의지는 종
족들의 존재와 싸움을 통한 발전을 인정하고 있으며 주인과 노예로 갈라지
는 것과 잔인한 종족유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체계에서  어렵지 않게 고비노의  흔적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종족불평등에 대한 고비노의 이론은 최근의 종족 뒤섞
임에 대해 공포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명의  몰락을 혈통의 혼란
과 연결시켰다. 점차 밀려나는 지배층의 계급적 원한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거의 감추지 못한,  프랑스 귀족의 종족 콤플렉스 '망가진 천민  혈통'에 대
한 거부감 등은 이념상의  자의와 천재적인 모호함으로 동시대 잡문문필가 
패거리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과장적인 유사문헌
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다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웅주의'와 '파
르시팔'에 대한 에세이까지 이르렀다.
  히틀러는 이러한 주장을 한 번 더 종합해서 선전에  쓸모 있도록 만들고, 
시대의 모든 불쾌감, 공포감,  위기현상 등에 설득력 있는 설명체계로 만들
어낸 것이다. 베르사유,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두려움,  자본주의 질서의 압
력, 현대 예술, 밤의 생활과  매독 등이 아주 오래된 싸움의 형식으로 여겨
지게 되었다.  그 싸움에서 저급한  종족이 인간귀족 아리안에게  대항하여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 뒤에 숨어서  싸움을 조종하는 전술가이
며 권력을 탐하는 최고 원수는  가면을 벗기고 보면 신비로운 영역으로 올
라선 '영원한 유대인'의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유대인, 모든 죄악과 공포의 원흉
  그것은 지옥의 일그러진  도깨비 모습이었다. '지구를 뒤덮은  것'이고 철
천지 원수고 '반대세계의 주인'이며 광란과 심리적 계산으로 이루어진 처치 
곤란한 존재였다. 적을 여럿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원칙에  다라서 히틀러는 
유대인을 가능한 모든 죄악과 거포의 원흉으로 만들어버렸다.  유대인은 문
제 거리고 그  모순이며  명제이고 반명제이고, 말 그대로 '모든 일에 죄가 
있는'존재였다.  증권의 독점지배, 벌세비즘, 휴매니티 이데올로기 소련에서 
3천만 명이 희생된 일 등 모든 것이 다 유대인 책임이었다.
 그 사이에 죽은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히틀러의대화가 란츠베르크에 갇혀 
있는 동안  출간 되었는데 거기서 히틀러는  이사야 19장 2~3절,  출애굽기 
12장 38절  등을 인용하면서 유대교, 기독교,  볼세비즘이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된 것은 휴매니티 사상으로  천민
들을 사주하여 혁명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어렵지 않게 모세가  최초의 볼세비즘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세계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기
독교를 어느 정도 창안해내었듯이 레닌도 현대의 질서를 끝내기 위해서 공
산주의 이론을 이용하였다. 구약성서의 구절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되풀이
되는 더 가치 있고 창조적인  종족에 대한 유대인의 공격 모델을 보여주었
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유일한  죄인 유대인을 지구상의  원수로 만들어버리는 자신의 
반유대주의에 들어 있는  선전 기술적인 측면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유
대인이 없다면 "우리가 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동
시에 유대인은 그의 감정의 고정점이었다. 그것은 주관적인  모습으로 보면 
악마적인 선전관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병리적인  망상증이었다. 그가 
미워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투사한 것이었다.
  모든 마키아벨리적인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지배에 대한 유대인
의 갈망이라는 주장에서 심리적인  이 거대한 시대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다는 그의  커가는 확신은 바로 이 '구원의 형식'에 자
리잡은 것이다.
  1924년 7월 말에 란츠베르크에 그를 찾아온 어떤 보헤미아의 국가사회주
의자가 유대인에 대한 그의 입장이 변했는가 불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
다. "그럼요,  물론이죠. 유대인에 대한  투쟁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나는 지급까지 너무나 온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책을 써
나가면서 앞으로는 성공적으로 우리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서 가장 날카로
운 투쟁수당으로  써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있어 생존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은 세계
의 페스트거든요.'
  사실 이러한 증오의 유례없는  강화와 잔인성은 란츠베르크 시절이 사색
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이미 1923년 5월에  히틀러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이렇게 외친 적이 있었다.  "유대인은 종족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아닙니다. 
유대인은 영원하신 신과 똑같은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이 될 수 없습
니다. 유대인은 악마와 같은  똑같은 형상입니다. 유대인은 모든 민족에 대
한 결핵종족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이념조각들과 감정들을 처음으로  눈에 
확 들어오게 정리하면서 그는  세계관이라는 건물을 확실하게 만들어낸 이
론가의 지적인 확신과 자신감을 얻었다.
  그가 유대인의인간으로써의 특성을 의심하고 그 근거로 기생충학 용어를 
끌어다 쓰는  것은 이미 단순한  선동가의 외침이 아니었다.  치명적이고도 
치료를 확신하는  진지함이었다. 자연법칙 자체가  '기생동물' '영원한 거머
리' '민족들의 흡혈귀'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조치는 확고
한 독자적인 도덕을  가진다. 그의 사상체계의 일관성 속에서 말살과  대량
학살은 이러한 도덕의  최고 승리가 되는 것이다. 히틀러는 마지막까지  이
러한 맥락을 인식하고 거기서 결론을 이끌어낸 과격성을 인류에 대한 동적
처럼 주장하였다. 근 나폴레옹처럼 정복자로서의 명성만을 가졌던  것은 아
니었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다만 인간일 뿐 세계적  사건은 아니었던'것이
다.
  1942년 2월말에 이른바 최후의  해결을 결의하였던 반 호수 회의가 있은 
직후에 그는 원탁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유대인이라는  바이러스 발견
은 이 세상에서 일찍이 감행하였던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이다 내가 이
끄는  이  싸움은 지난 세기의 파스퇴르와 코흐가  했던 것과 같은 싸움이
다. 얼마나 많은 병들이 유대 바이러스의 탓으로 생겨난 것인가! 우리는 유
대인을 말살해야만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그는 다른 보든 사람보다 더 깊
이 생각하고 더 많이 꿰뚫어보는 사람의 확신을 가지고 자연질서의 창조자
인 자신에게 주어진  세속적인 사명을 깨달았다. 자신의  '거인적인 의무'말
이다.
  그것은 고비노를 본질적으로  교정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종족과  문화가  
죽는 과정을 몰락에 모든 원인이 되는 유대인현상으로 의인화했을 뿐 아니
라 역사에 유토피아를  되돌려주었다. '고비노의 우울하고 숙명적인 염세론
을 공격적인 낙관론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 프랑스 귀족과 달리 히틀러는 종족의 몰락이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
라 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대인의 세계음모 전략은 아리안족의 유산인  독
일에서 결정적인 적수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생물
학적인 감염이나 자본주의와  볼세비즘의 협동음모가 여기서처럼 체계적이
고 파괴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실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를 불러낼 에너지를 이끌어냈다. 독일은 지구의  상속권을 결정
하는 세계의 전쟁터다. 이러한 생각을 보면 그가 도이치  몇 유럽의 전통적
인 반유대주의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유대인 망상증은 국가적인 크기를 가진 다른 비전들보다 그를 더욱더 
광증으로 이끌어갔다는 사실도  볼 수 잇다. "우리 민족과 우리  국가가 피
와 돈에 굶주린 유대인 민족폭군의  희생제물이 된다면 지구 전체가 이 히
드라에 먹히고 말  것이다. 독일이 이 포위에서 벗어난다면 모든  민족들에
게 가장 위험한 위협이 전세계에서 부서진 것으로 간주해도 될 것이다" 그
러면 저 천년왕국이 독일에  나타날 것이다.- 그는 겨우 하나의 도정을  뒤
로하자 벌써 몹시 서두르면서 이  천년 왕국의 시작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나면 깊은 몰락에서  질서가 다시 생겨나고 통일성이 실현될 것이다.  주인
과 노예는 서로 마주서고 현명하게 이끌어 가는 '세계의 핵심민족들' 은 서
로 존중하고 보호하게 될 것이다. 세계질병의 뿌리 이  모든 본능적 불안과 
자연을 거역하는 혼합의 원천이 마침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본능적'이라고 부른  확실성을 그의 길에 마련해준 것은 결코 
완성된 적은 없지만  이토록 굳게 입을 다문 이데올로기였다. 그가  시대의 
은총을 얼마나 인정했든지 세계상태의  해석과 목숨을 건 투쟁의식은 그것
과 완전히  무관하였다. 그러한 투쟁의식은  그의 정책에 확실한  일관성과 
무감동의 특성을 부여하였다. 확정을  꺼리는 태도, 거의 모든 동료들이 한 
목소리로 보고하는 결단에 대한  히틀러의 두려움은 언제나 전략적인 대안
들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는 망설이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뒤로 
미루어놓고 기다리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극히l 초조하고 
확고한 태도로 위대한 최종대립을 서둘러 추진했다. 히틀러  정권의 수많은 
비인간성을 극히 단순하게 무지의 탓으로  돌리는 것보다 더 그를 잘못 본 
것은 없었다. 실제로 그는 일어난  일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어느 
누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가까운 추종자  한 사람
이 확인해주었듯이 그는'과격한 국가사회주의자'였다.
  
    이데올로기와 외교정책
  그의 이념적 관념들의  긴장된 복합체는 특별히 외교정책에  반영되었다. 
공상적으로 보이는 목표설정 탓으로 구체적인 정책강령으로 이해되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달랐던 본질적이 노선은  이미<나의 
투쟁>안에 드러나  있다. 독일의 패배를  출발점으로 삼고, 혼탁한  종족적 
자질이 회복되는 정도에 영토회복의 정도를  연계시켰다. '혈통의 찢김'이라
고 부르는 것이  도이치 제국에서 '세계지배권을 빼앗아' 갔다고  했다. "도
이치 민족이 역사발전에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양떼 같은 통
일성을 얻게 되면 그날로 도이치 제국은 지구의 주인이 될 것이다.'
  국가사회당에서도 널리 퍼져 있던  공간 없는 민족이란 민족주의 전통적 
표어에 대해서 그는 민족 없는 공간이란 표어를  내세웠다. 국가사회주의의 
국내정치 사명은 마스 강과 메멜 강  사이의 텅 빈 공간으로  민족을 보내
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공산주의  인간대중일 분 도이치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눈앞에 떠도는 혁명의  모습은 엘리트 주의적이고 생물학적인 관념
들로 채워진 모습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지배형식과 기관들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새로운  인간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었다. 새로는 인간의  도래는 
수많은 연설과 고시문에서 '진짜황금시대'의 시작이라고 찬양되었다.. "국가
사회주의의 오직 정치운동이라고만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국가사회주의는 종교 이상이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 
창조의 의지다"라고 히틀러는 말했다.
  다라서 새로운 국가의 가장 절박한 과제들 중에는 '더  이상의 사생아 만
들기'를 중단시키고 '결혼을  지속적인 종족 오염의 수준에서  구해내고 '다
시금 '주님과 똑같은  사람들을 생산하고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튀기를  만
들어내지 않도록'한다는 것도 들어 있다. '억압이 이종 교배'를 통해서 줄어
들게 된 순수한  아리안이 다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이상적인 
상태를 히틀러는 생물학적이고 교육적인 지루한 과정의 결과라고 보았다.
  1939년 1월 25일  고위장관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  연설에서 그는 1백년 
이나 걸리는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 마지막에는 다수가  선별의 
의지를 표지를 이용하게  되고, 그 표지들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생존공간의 확보를 거듭 요구하곤 하였다. 생존공간이란 '흘러 넘치
는' 주민을 위해서  위협받는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
었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정복 전략에  출발기지로서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탐욕스런 상상력을 가진 민족은 오늘의 동맹과 정세에  더 이상 얽
매이지 않도록 해 줄 만한 공간, 일정한 크기의 영토를 필요로 한다. 
  역사상의 위대성을  지리적이 넓이와 결합시키는  이런 생각을 히틀러는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었다. 종말이 다가오기 직전 벙커  속에서 명상하면서 
그는 자신에게  무모한 정복을 강요한  운명을 탄식하였다. 거대한  공간이 
없는 위협에 대처하는   네 가지 가능성 중에서 산아제한, 내부의   식민지
화, 해외의 식민지화 등을 한편으로는 소심한 꿈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품
위 없는 과제'라고 비난하였다.  분명하게 미국을 염두해 두고서 오직 정복
전쟁의 가능성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했다.
  "선의의 대해서 거부된  것은 주먹이 빼앗아야 한다"고 그는 란츠베르크
에서 썼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확장 욕망의 방향을 말하였다.  "유럽에
서 기반과 토양을 가지려고 했을 때 이것은전체적으로 오직 러시아를 희생
시켜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제국은 다시금 그 
옛날 기사단들의 길로 행진해 나가야 했다."
  이러한 생각 뒤에는  다시 위대한 세계전환의 관념이 나타났다. 그가  알
아낸 바로는 역사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점에 있다는 것이다. 한 번  더 역
사는 강력한 바퀴를  굴렀고 운명과 기회들을 새로 나누어주고 있다.  함대
들로써 먼 나라들을  정복하고 부를 쌓고 전진  기지들을 건설하고 세계를  
지배하던 해군력의 시대는  이제 종말의 국면에 서 있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기 전 시대의 고전적인 연결통로였던 바다는 이제 현대성의 조건 아
래서 넓은 제국의 지배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
  거대한 식민지는  시대 착오적인 것이고  몰락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현대의 기술적인 수단들, 가능성, 도로, 활주로, 철도,  등은 끝없는  영역으
로 퍼져나가고 밀집된 거점 체계들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옛 질서는 뒤
집혔다. 미래의 세계왕국은 지상병력이 될 것이라고는 그는 주장하였다. 단
단하고 이음새 없이  조직된 방어력을 갖춘 거대병력 말이다. 시대는  이미 
그리로 향한 길 위에 있으며 과거의 유산은 이미 공표되였다.
  뒷날  히틀러의 외교상의 연속적인  기습은 분명히 그의 본질에 있는 극
단적인 불안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시대에 대항한 ,역사
의 경과에  대항한 절망적인 돌진하였다.  세계를 분할하는 과정의  독일도 
다시 너무 늦게 나타나는 거시 아닐까 하는  근심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
다.  독일의l 새로운 세계시간이 시작될  때 미래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할 
만한 세력들을 검토해  보면 그는 언제나 거듭 러시아에 부딪치곤  하였다.  
종족적, 정치적, 지리적, 역사적 요인들이 한 목소리로  지적하는 것은 동족
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지평을 앞에  두고 히틀러는 외교정책상의 구상들을 발전
시켰다. 그는 수정론자로서  인생항로를 시작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
와 동시에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1914년 국경선을 회복하고 모든 도이치 사
람들을 강력한 대국  안에 하나로 모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 평화조약의 악의적인 실천자였던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
러내고 프랑스가 이탈리아 및 영국과 뚜렷한 견해차를 보이는 점을 이용하
여 보복의 출발점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규모로  생각하는 히틀러의 
성향은 시선을 곧장 대륙 전체로 향하고, 국경정책에서  공간정책으로 넘어
가고 있다.

    동쪽으로 방향을 돌림
  모든 사색의 출발점은 독일이 '가차없는 권력정책을  앞에 내세울 경우에
만' 군사적, 정치적,  지리적으로 위협받는 중간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는 것이었다. 빌헬름  시대의 외교정책을 살펴보면  히틀러는 일찍이  독일
이 해상 무역과 식민지를 포기하고 영국과 힘을 합쳐 러시아에 적대하든가 
아니면 해상무역과 식민지를 계속  추구하면서 러시아와 힘을 합쳐 영국에 
적대하든가 하는 두 가지 대안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은 20년대  초에 분명히 두 번째 가능성을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은 제국을 '원칙상의'  적대장 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 그는 분명히  친 러시아 정책을 발전시켰다. 쇼이브너 리히터와  로젠베
르크 같은 이민자 그룹의 영향을 받은 가운데  '민족주의적이고' '다시 건강
해진' '유대, 볼세비즘 질곡'에서 벗어난 러시아와 힘을 합쳐서 서방에 맞선
다는 정책이었다.
  나중에 그의 확장주의적 동방정책의  중심점이 되는 슬라브 종족을 열등
감에 대한 확신이나 생존공간 개념이  이때만 해도 아직 아무런 역할도 못
하고 있었다. 1923년  초에야 비로소, 무엇보다도  소비에트 정권이 안정되
는 것을 보면,  동맹관계를 뒤집어서 영국과 힘을 합쳐 러시아에  대적하자
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료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히틀러는  일년 이상 새로
운 구상을 거듭 검토해보고, 발전시키고,  그 결과와 실현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나의 투쟁>의 유명한  4장에서 러시아에 대적하는 
생존공간 투쟁의 생각을 강령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최후의 
벙커 독백의 순간까지 일관되게 히틀러의 외교정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
나 이러한 생각은, 남부  티롤을 양도함으로서 이탈리아의 호의를 사고, 모
근 식민지 요구를  포기함으로써 영구고가 바라던 동맹을  맺는 등 독일이  
동쪽으로 방해받지  않고 진출하려는 전제조건들을  마련하는 가운데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1925년에 쓴 <나의 투쟁> 제 2권에서  이미 히틀러는 전적으로 비논리적
이고 우연하고, 너무 좁고, 군사 지리적인 목적에도 맞지 않는 국경선 회복
을 지향하는  수정주의 개념을 극히  날카롭게 거부하였다. 그것은  나아가 
독일을 이전의 전쟁상대국 모두에  대립시키고 뿔뿔이 흩어진 적들의 동맹
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줄 뿐이라고 했다.
  그는 강조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914년의 국경선 회복을 요
구하는 것은 자신을 범죄자로 드러내는 결과와 정도를 보이는 정치적 무의
미"라고 했다. 그 대신에  대 공간을 획득하는 일은 "신 앞에서, 그리고 우
리 도이치 후세 앞에서  피흘린"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유일한 행동이며 책
임있는 정치가들에게 그  어느 날인가 '민족을  희생하였다는 죄목을  벗겨
줄' 유일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공대함 속을 전쟁을  끌어들이는 것, '동쪽에 있는 옛날 도이치 
공간'에 거대한 대륙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게르만 대이동의 이념은  그때
부터 히틀러 정책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그 자신이 이 사상에 대해서 '분열
되지 않는 헌신'과  마지막 에너지의 힘'까지도 고백하였고,  의미심장한 정
치적 행동의 '유일한  목적'이러고 찬양하였다. 이러한 결정도  세속의 등급
을 얻었다.
  그럼으로써 우리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전쟁  이전 시대의 외교정책을  의
도적으로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6백년 전에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한
다. 우리는 서부와 남부 유럽을 향한 영원한 게르만  이동을 중단하고 눈길
을 동족에  있는 나라로 향한다. 우리는  마침내 전쟁 이전 시대의  식민지 
및 무역정책을 종결짓고 미래의 영토정책으로 넘어가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자신의 사고의 출발점들을  논리적으로 발전시켜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이론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제 3장에게서 얻은 것이냐 하는 
질문은 그대로  놔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준 생존공간 사상은 분명히  루돌프 헤스를 통해서 히틀러의 이념세
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헤스는 진자  추종자의 긴박감을 자고 가지고  히틀러를 '이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사람에 대한 열렬한 경탄 덕분으로  란츠베르크 시절에 모
든 경쟁자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고, 특히 에밀 모리스의  비서직위를 인정
하지 않았다. 헤스는  1922년 이미 히틀러와 자기 스승인 칼  하우스호퍼의 
개인적인 접촉을  알성하였다. 하우스호퍼는  영국인 핼포드  매카인더경이 
창설한 '지정학'의 결실  풍부한 생각을 제국주의적인 확장철학으로 발전시
킨 인물이었다. 히틀러의  정복개념을 특징짓는 온갖 마키아베리적인  냉담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복개념은 매카인더가 '심장땅'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몽롱한 확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지정학의 창시자가 약속한 바에  다르면 땅덩어리가 거대한 탓으로 어떤 
공격에서도 거대한 탓으로 어떤 공격에서도 보호되고 상처를 입지 않은 동
유럽과 유럽 족  러시아의 '세계 지배의 보루'였다. "심장땅을  정복한 자각 
세계를 지배한다" 이런 엉터리 학문 형식들에 잇는 마적인 합리주의야말로 
히틀러적 지성의 특수한 구조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지식도 그에게는 
영역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영향이 아무리 분명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히틀러의 비상
한 조합능력은 외교정책의 골격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외교정책의 개념은 여러  유럽 강대국 대한 독일의 관계, 프랑스
에 대한 보복의 필요성, 공간과 정복의 열망들d들, 시대변화의 요소와 다양
한 이념적인 고정관념들을 사상적으로  응집된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낸 것
이다. 이 개념은  종족사적인 테마로 돌아가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로써  하
나의 원이 완성되고 있다.
  운명 자신이 여기서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해주려고 하는 것 같다.  러시
아를 볼세비즘에 넘겨줌으로써 운명은  러시아 민족에게서 지금가지 그 국
가존속을 만들어내고 보장해 주었던 지성을 빼앗았다. 러시아  국제의 구조
는 러시아에 있는 슬라브 민족의 국가 정치적인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게르
만적 요소가 열등한 종족에게서  만들어내는 국가형성 작용에 대한 놀라운 
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부터 러시아는 상부  지도층의 이런 게르
만 핵에 의해서 소모되어  왔다. 이 핵은 오늘날 거의 흔적  없이 말살되고 
근절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잇다. 그 자리에 유대인이 들어섰다. 자신의 힘으
로 유대인의 질곡을  끊어버리는 것이 러시아에는 불가능한 일이듯이 ,  유
대인으로서도 이 강력한 제국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유대인은 조직의  요소가 아니라 해체의  효소다. 동족에 있는  거대왕국은 
붕괴할 시간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유대지배의 종말은 국가로서  러시아의 
종말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이러한 파국의  목격자가 되도록 
선택되었다. 그것은 민족적인 종족이론의정당성을 아주  강력하게 확인해주
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20년대 초에 벌써 뒷날 히틀러가 추구하게 될 외교정책
의 기본구상이 형성되었다. 초기에 영국과의 동맹 노력,  로마와의 축, 프랑
스에 대한 전쟁,  동부의 정복을 위한 말살정책,  그리고 '세계의 심장땅'의 
접수 등이었다. 도덕적인 고려들이  그런 일을 어렵게 하지는 않았다. 전쟁 
위도를 목적으로 포함하지 않는 동맹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그는 <나의 투
쟁>에서 확인하고  잇다. 국경선이란 언제나  사람들에 위해서 만들어지고 
변경되는 것이고 '생각 없는 약자만' 불변하는 것으로  여긴다. 정복자의 힘
이 권리를 입증하는  것이며 '가진 자가 갖는다'  그것이 그의 정치 도덕의 
원칙이었다.
  그가 자신의 악몽들과  역사이론들과 생물학적 곡론들, 그리고, 상황분석
에서 이끌어내 이 강령은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정신이상의 느낌이 들지만 
그 모든 과격성은남부 티롤이나  알사스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온건한 수
정주의측의 개념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공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민족주의 
파트너들과는 달리 히틀러의 독일이 현존하는 권력 및 체계 안에서는 기회
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정상적인 것에 대한 그의 깊은 원한이 그가 근본으로부터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을 때에 도움이 되었다.  게임을 거부한 자만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바깥을 향하고, 이 체계를 망가뜨리겠다고 공개적으로  협박하던 소련
에 대항함으로써 체계의 힘들이 그의 편이 되었다. 그  힘들은 모르는 사이
에 독일을 "대단히  강력하게 만들어서, 극히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제국의 
정복은 브롬베르크나 쾨니히스휘테를 따로 되찾는 일보다  더 쉬었고' 모스
크바 공격은 슈트라스부르크나 보첸 공격보다 훨씬 전망이 있었다.

    세계적 권력이, 아니면 몰락이냐
  목적이 그렇듯이 히틀러는  위험을 알아보았고 받아들였다. 그는  1933년
에 이전의 계획을 확실하게 실현시키려고 착수하였다. 그에게  있어 선택이
란 언제나 말뜻 그대로 정확하게  세계적 권력이냐 아니면 몰락이냐의  두 
가지 중  하나를 임하였다. 1930년에  에얼랑겐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앞에 
두고 행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존재는 확장을 지
향하고 모든  민족은 세계지배를 지향하는 법입니다"  그의 의견으로는 이 
명제는 다른 사정없이 자연법칙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디서나 
강자의 승리와 약자의 절멸 혹은 조건없는 굴복을 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게임에서 모든 것을 아  잃고 몰락을 눈앞에 둔 마지막 시점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때의 추종자들을  깊이 당혹케 하는, 일관된 발언을 알버
트 슈페어에게 하는 것이다.  '도이치 민족이 가장 원시적인 생존을 계속하
기 위해서 필요한 토대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민족은 "약자
로 판명이 났고, 그렇다면 미래는 오직 더 강력한  동방민족의 것이기 때문
이다.' 독일은 전쟁 이상의 것에서 패배하였다. 그는  완전히 희망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애와 사고에 명령을  내리는 판결기관이
었던 자연법칙, '모든 지혜의 잔인한 여왕'에게 굴복하였다.
 
    출감
  거의 일년이 지난 다음인  1924년 말에 벌서 히틀러가 '국비 대학교'라고 
불렀던 수감시기가  끝나게 되었다. 뮌헨  지방재판소 검찰의 요청을  받은 
교도소장 라이볼트는 1924년 9월  15일에 집행유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
게 만드는 보고서를 보냈다. "히틀러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동료죄
수들까지 질서와  기율을 지키는 사람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절제력이 
있고 겸손하며 친절하다. 아무런  요구도 없고, 조용하고 이해심이 있고 진
지하고 전혀 공격적이지 않고 감방생활의 제한들을 따르기 위해 최대한 노
력을 하고 있다. 그는 개인적인 허영심이 없는 사림이며, 감옥의 식사에 만
족하고, 담배나 술을  하지 않으며 동지애를 발휘하여 다른 수감자들  사이
에서 일종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히틀러는 민족주의 운동을 새로이  불
붙이려 하고 있으며 전처럼  폭력적이고 긴급상황에서 정부에 대항하는 수
단을 쓰지는 않고 정부와의 교감을 가지려고 한다."
  이 보고서가 서술하는 모범적인  생활과 전략은 법정이 내세운 6개월 형
량을 채운다음에 가능한 집행유예의 전제조건이었다.  집행유예를 박탈당한 
국가사회당 지도자가 어떻게 해서  이념적으로 부패한 장관의 독단으로 법
절차를 벗어낫는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여러해 동안이나 갖
은 불안과 싸움을 꾸며내고 중앙정부의 무효를 선언하고,  장관들을 체포하
고 사망자를 냈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보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검찰측 항의는 처음에 법원의 결정을 중지시키는 효력을  발휘하였다. 그
러나 국가권력은 범법자에 대해서  국가가 허약했던 점을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결과 국가권력은  법적으로 꼭 필요한 것으로  규정되어 
잇는 히틀러의 추방문제도  어설프게 처리하였다. 뮌헨 경찰청의 9월  22일 
중앙 정부 내무부 장관에게  보내 보고서에서 히틀러 추방을 '필수적인' 일
이라고 표현하였고  새로운 바이에른지사 헬트는  추방할 경우 오스트리아 
당국이 히틀러를 받아들일 것인지 알아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일도 없었다. 히틀러 자신이 처신을 바르게  하겠
다는 의사를 가능한  방식으로 알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그레
고어 슈트라서가 지방의회에서 히틀러가  계속 감옥에 있는 것은 바이에른
의 수치고 '돼지데, 개처럼 천한 돼지떼'가 바이에른  주를 통치한다고 말했
을 때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룀의 지하활동도 그의 신경에 거슬렸다.
  상황은 다시금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2월 7일 실시된  의회선거에
서 민족주의 진영은 겨우3퍼센트의 표만을 얻어서 그 이전까지는 31명이었
던 의원이  14명으로 줄어들었다. 극우파의  활동이 이미 절정을  지났다는 
생각도 12월19일의 상급 지방  법원의 집행유예를 반대하는 검찰의 불만을 
물리치고 서둘러서  히틀러의 석방결정을  내렸다. 12월20일  란츠베르크의 
수감자들이 크리스마스 축제를 준비하고 있을  때 뮌헨에서 온 전보 한 통
이 히틀러와 크리벨의 즉시석방을 명령하였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몇몇 친구와 추종자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감옥 
문 앞에서 히틀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망스러운 숫자였다. 운동은 산산조
각이 나고 추종자들은  흩어지거나 적이 되었다. 뮌헨의 집에는 헤르만  에
서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만 모습을 나타냈다. 위대한 등장도 아니었고, 승
리도 아니었다. 히틀러는 많이 풀죽은 모습으로 불안하고도  긴장된 태도를 
보였다.
  같은 날 저녁에 그는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을 찾아갔다.  집으로 들어서면
서 곧바로 고통스럽게  말했다. "사랑의 죽음을 연주해줘요." 란츠베르크에
서 이미 때때로 종말의 기분이 그를 엄습했다. 어떤  비꼬는 애도기사는 그
가 젊어서 죽었노라고 적었다. "게르만의 신들이 그를 정말 사랑했다"고

'Hitler's Rebell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싸움을 위해 일어서다  (0) 2020.08.15
위기와 저항  (0) 2020.08.15
쿠테타  (0) 2020.08.15
권력의 도전  (0) 2020.08.15
위대한 연설가  (0) 2020.08.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