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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Rebellion

위기와 저항

by FraisGout 2020. 8. 15.

  히틀러가 란츠베르크에서 출감해보니 아닌게 아니라 용기를 꺾는 방향으
로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작년의  흥분은 잠잠해지고 히스테리  발작들은 
사라졌고 흩날리는 먼지와 연기 속에서  평범하고 비낭만적인 일상의 윤곽
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화폐가치가  안정되면서 자리잡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사회적 기반에 대한  신뢰감을 다시 회복하였고, 그 결과 무질서한  혼란을 
만들어내던 군사적 요소들, 극히 부족한 액수로만 유지되던  의용군과 준군
대 조직체계들에게서 물질적  기반을 빼앗아갔다. 공권력은 점차  확고함과 
권위를 되찾았다. 1923년  11월 9일에 선포된 비상사태는 1924년 2월  말레 
해체되었다. 1924년 한 해가 경과하는 동안 슈트레제만  시대의 친선정책이 
최초의 효과를 나타냈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들보다는  전체
적으로 개선된 독일의 심리적 태도로 설명되었다.
  전쟁기간이 낡은 증오심과 원한이 점차 풀리기 시작하였다.  도즈 안에서 
배상문제의 해결책이 눈에  보이게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루르  지방에서 
철수를 준비하였고 안전협약과  가입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들어
오기 시작한 미국의 차관자본이 수많은 경제문제들을 개선하였다.  거리 모
퉁이마다 빈민 구호소와 사회복지기관  앞에 늘어선 빈민들 모습에 끔찍한 
색깔을 부여하였던 실업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상황의 변화는 선거결과에도 반영되었다. 1924년 5월  선거에서는 과격파
세력은 한 번  더 성공할 수 있었지만 같은  해 12월 선거에서는 분명하게 
패배하였다. 바이에른에서만 민족주의  계열은 거의 70퍼센트의 지지를  잃
었다. 이러한 변화가 순식간에 민주적 중도파의 강화로  나타나지는 않았지
만 독일이 위기와  전복위협과 실망의 세월을 보낸  다음 마침내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갈가리 찢긴 추종세력
  이제 막 등장한 수많은  직업 없는 직업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도 
모험과 시민적이지 않은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불규칙한 존재기간을 끝
내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애송이 시절의  공포였던 '평화와 질서'
에 다시금 직면하게  되었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의 처지는 정말  희망이 
없었다. 연설의  힘으로 법정에서 승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별로 평가받지도 못하고 절반쯤  잊혀진 실패한 정치가의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은  온갖 조직을 금지  당했다. <민족 관찰자>도  마찬가지였다. 
방위군과 대부분의 개인 지지자들도  뒤로 물러섰고 내전놀이가 끝난 다음
에 다시금 일상의  의무와 사업으로 돌아가 버렸다. 1923년을 돌아보며  많
은 사람들은 어깨를 으슥하면서 정신나간 고약한 시대라고  여겼다. 디트리
히 에카르트와 쇼이브너 리히터는  죽었고 괴링은 망명 중이었고 크리벨도 
망명을 떠났다. 가까운 추종자들은 대부분 아직 복역중이거나  아니면 싸움
에서 지고 흩어져버렸다.
  체포되기 직전에 히틀러는 급히 연필로 휘갈겨 쓴 메모를 알프레트 로젠
베르크에게 남겼다. "친애하는 로젠베르크, 이제부터 당신이 운동을 이끌어 
주시오" 관련성이 풍부한  롤프 아이트할트라는 가명으로-철자를 흩었다가 
다시 배열하면 아들프 히틀러라는 이름이 나오다- 로젠베르크는 옛날 추종
자들 중 남은 사람들을 모아서 '큰 도이치  민족공동체'를 만들었다. 돌격대
는 수많은 스포츠단체들 합창단, 사격클럽 등으로 위장된 존속하였다.
  그러나 로젠베르크가 권위가 없고 말수가 많은 탓으로 ns동은 곧 적대적
으로 싸우는 패거리들로  찢어지고 말았다. 루덴도르프는 옛날  국가사회당 
당원과 폰 그레페와 레벤틀로브 백작이 이끄는 '도이치 민족자유당'의 통합
을 주장하였고  슈트라이허는 밤베르크에서 '바이에른 민족단'을  만들었다. 
그 또한 독자적인  요구를 내세웠다. '큰 도이치 민족 공동체'안에  남아 있
던 슈트라이허와에서,  아르투어 딘터 등은 각자  지휘권을 잡으려 하였다.  
딘터는 과도한  피의 망상들을 소설형식으로  썼고, 튀링겐 지방에  근거를 
둔 인물이었다. 그에  반해서 루덴도르프는 폰 그레페,  그레고어 슈트라서, 
이어서 에른스트 룀과 힘을  합쳐서 '국가사회중의  자유당'을 만들어서 모
든 민족주의 집단들의  통합단체로 조직해나가고 있었다.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기간을 이용하여 스스로 민족 운동 내부의 정상을 차지하거나 아니면 
히틀러를 지도적 지위에서 선전꾼의  역할을 끌어내리기 위하여 끝없는 싸
움과 간계들이 펼쳐졌다.
  이토록 실망스런 상황을  보고도 히틀러는 놀라지 않았다.  로젠베르크는 
나중에 고백하기를 히틀러가 자기를  임시지도자로 임명한 사실에 깜짝 놀
랐다고 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그런 결정은 의도적으로 당이  이와 같이 파
괴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닌가 하고 타당성이 있는 추측을  하였다. 뒷날 자
신의 지휘요구를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드물지 않게 나온  이런 
비난은 히틀러의 요구를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내
려진 운명의 부름까지  양도할 수는 없었다. 구원의 역사는 대리  구원자라
는 것을 알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로젠베르크, 슈트라이허, 에서, 룀, 아마, 슈트라서,  폰 그레페, 폰 레벤틀
로브, 루덴도르프 사이의 싸움질에서 히틀러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 추종자 한 사람이 말했듯이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
려 그는 적대자들을  번갈아 가면서 부추기고 민족주의  진영들 간의 통합 
열의를 방해하였다. 자기가  갇혀 있는 동안 가능하면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고 권력중심이 형성되거나 지휘요구의 근거가 마련도지 않도록 했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의회선거에서 참여한  것은 합법적인 권력쟁취라는 
새로운 전략에 합당한  것이었는데도 그것을 비난하였다. 국회의원은  면책
권을 통해서 어느  정도 독자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자유당이 1924년  5월의 제국의회선거에서 총의석  472석 중에서 32석이나 
차지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곧 이어서  보낸'공개서한'에서  그는 당 
지휘권을 포기하였다. 전권을  포기하고 정치적 동기에서 자신을  방문하는 
일을 일절 금지하였다.
  루돌프 헤서는 어느정도 자만의 목소리를 깔고서 감옥에서 쓴 어떤 글에
서 추종자들의 '어리석은'을 말했다. 히틀러는 그의 높은  목소리를 보고 상
당한 보상감을  느꼈다. 란츠베르크에서 나왔을  때는 오직 페허만이  남아 
있었지만 어쨌든  진짜 경쟁자는 없었다.  확고한 반대자들의 전열  대신에 
그는 무능한 파벌들의 초조함을 보였다.
  그는 자시도 가세해서 만들어낸  쇠약증 상태에 빠진 민족운동이 오랫동
안 기다려온 구원자들로서 등장하였다. 히틀러는 이 폐허에서  논란의 여지
가 없는 지휘권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솔직하게 이렇게 고백하였다. 
"전에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당시 난 다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돌아오면서 멀리  뻗어나간 희망만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갈가
리 찢긴  추종자들의 극히 모순되는  요구들에 마주서게 되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우파 진영에서 모든 파벌들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이 정당에 분명
한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의 정치적 장래를 결정할 판이었
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주 뚜렷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다지 의미가 
크지 않아서 다양한 요구들을 한데로  합칠 수 잇는 그런 특성이어야만 했
다. 
  그가 루덴도르프와 함게 민족진영 연합운동을 조직하리라는 수많은 사람
들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그는 모든 것  위에 우뚝 서서 숭배의  높이까지 
올려진 지도자의 모습만이 자기가 생각한  통합의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으
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서둘러서 동맹을 맺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경계선을 긋는 조건 없는 개인적 요구를 발전시키는  일이 더 중
요하였다. 다음주 몇 주 동안 히틀러의 전략적 행동은  이러한 생각에서 나
온 것이었다.

    헬트와의 협상    
  푀너의 충고에 따라서 그는 우선  새로 바이에른 지사가 된 헬트에게 협
상을 요청하였다. 바이에른 민족당 당수인 헬트는 엄격한  카톨릭이고 연방
주의자였다. 히틀러와 그의 동지들은 한때 정열적으로 그와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1925년 1월  4일에 이루어진 이 만남의  흥미진진한 요소를 줄이기 
위해서 히틀러는, 아직도 란츠베르크에 남아 있는 동지들의  석방문제를 교
섭할 의도라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합법화의  일보를 내디딘 것이다. 
민족진영 내부의 비관자들은 그가 이러한 방문으로 '로마와의 평화'를 만들
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사실상  그는 공권력과의 평화를 원하고 있었다. 퓨
덴도르프와 달리 자신은 적들에게  자기가 그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예고할 마음이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 시도의 성공은 그의 앞으로의  정치적 운명을 위해서 민족 진영 내부
의 지도자 자리 확보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독재적으로 운영되는 군
사적 정당의 건설과 권력획득의  야심을 위해서 강력한 국가기관의 신뢰를 
회복하고 11월  9일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이 극히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즉 정치란 압도와 열광과 공격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이중적 존재여
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이중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는 새로운  역할을 해낼 수 있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적이면서도  동시에 기존질서의 옹호자로 보여야 한
다는 것,  과격하면서도 절제있게 보여야 한다는  것, 질서를 위협하면서도 
질서의 수호자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 정의를 파괴하면서도  그 회복을 위
해 노력한다는 믿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히틀러가 이러한  전
략의 모순을 이론적으로도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것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계속 전진해 나갔다.
  냉정한 지사에게 그는 우선  자신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앞으로는 합법적
으로 행동하겠고, 11월 9일의 쿠데타는 오류였다고 맹세하였다. 그 사이 자
신은 국가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자신은 이미  시민적 
애국자로서 힘닿는 대로  거기 공헌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의 
파괴적인 힘에 맞선 싸움에서 정부편에서 노력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주장
하였다. 물론 그런 활동을 위해서 자신의 정당과  <민족 관찰자>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가 이러한 제안을 민족주의당의  반 카톨릭주의와 어떻게 결합시킬 생
각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히틀러는 그것은 루덴도르프 개인의 망상이라
고 공격하였다.  자신은 그렇지 않아도  이 장군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으며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했다. 전부터 종파적인 싸움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시험이 끝난  민족주의 힘들이 서로 힘을 합쳐야 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헬트는 이러한 능변에 냉담하였다. 그는 히틀러가 마침내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주지사인 자신은 어차피 누구에게나  국
가 권위를 주장할 셈이었다. 11월 9일과 같은  사태가 바이에른에게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는 히틀러의 보호자이기도 하였던 개인적  친
구 귀르트너 박사의 권고를  받아서 마침내 국가사회당과 당기관지의 금지
를 해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히틀러와  회담을 하고 나서 "이  맹수는 
길들여졌다."고 회담의 인상을 요약하였다.
  
    굴복이냐, 제명이냐
  며칠 뒤에 히틀러는  지방의원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마치 당의  상태
가 충분히 고립되지 않았다는 듯이 그는 쓰라린 도전을  하였다. 이제 자신
의 소도구가 되어버린  하마가죽 채찍을 손에 들고서  그는 주의회 건물로 
들어섰다. 민족진영 의원들은 환영의 인사말을 기대하고 거기 모여 있었다. 
긴 서론도 빼고 그는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지도력 결핍과 개념 없음을 
비난하고, 그들이 헬트가  제안한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고  격분하
였다.
  깜짝 놀란 일행이  품행바른 사람이 포기할 수  없는 원칙들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적대자에게 도이치 민족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와 더불
어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법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의원 한  사람이 
히틀러가 이 연합정권과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때이른 석방을 얻어낸 모양
이라는 의심을 표시하자 히틀러는 운동을 위해서 자신의 석방은 스물댓 명
의 민족당 소속 의원들이 지키고 있는 원칙들보다 1천 배나 중요하다고 경
멸적으로 답변하였다. 
  실제로 그는 날카롭고도 도전적인  지휘 요구를 통해서 자기에게 복종하
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제명하려고 했던 듯하다. 그는  뒷날 반어적인 경멸
감을 가지고 당이  1923년에 '인플레이션 이익'을 얻었다고  이야기했다. 당
은 너무  빨리 성장하였으며, 그것이야말고  당의 취약성과 위기의  순간에 
저항력이 없는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거기서 결론을  이
끌어냈다. 민족주의 진영 지도자들은 협조하려 하지 않는  히틀러의 태도를 
비난하고 장군홀 앞에서 함께 흘린 피를 들먹였다.
  그러나 그런  신비적인 감상주의보다 1923년의  속박상태에 대한 기억이 
히틀러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였다. 당시에 까다롭거나 고집스러운  수많은 
동지들을 계속 고려해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서 이끌어낸 결론, 즉 협
조체제란 일종의  속박상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바깥쪽, 즉 
공권력을 향해 공손한  자세를 취한 반면 운동  내부에는 끈질기게 복종의 
태도를 고집하였다. 그래서  이런 대립의 결과 24명의 주의회 의원들  중에
서 겨우 6명만이 그의 편에  남고 다수가 다른 당으로 넘어가는 일을 기꺼
이 감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초조하게  새로운 대립들
을 시작하였고 소규모로 변한 운동의 가장자리에 있는 다른 조각들을 계속 
떼어버렸다. 그는 다른 수많은 민족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집단과  자신을 구
별한 특성을  강조하곤 하였으며 모든  형태의 협동을 비난하였다.  14명의 
국회의원들 주에서 겨우 4명만이 그의 진영에 남게  되었고, 그들도 만만치 
않게 반발하면서 헤르만 에서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같은 수상쩍고 깨끗
하지 못한 추종자들과  결별하라고 요구하였다. 히틀러는 앞으로 몇 달  동
안의 괴로운 싸움은 깨끗함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당내 단독 지배권이 문
제라는 사실을 이들 반대자들보다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으므로 한 발
짝도 양보하지 않았다.
  
    루덴도르프와 결별하다
  그러는 사이 그는 루덴도르프와 결별을 준비하였다. 11월  9일 정오에 히
틀러가 장군홀 앞에서 도망친 일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일이고, 도이치 
장교는 그런 남자 밑에서  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장군의 용서할  수 없는 
발언만이 그런 조치의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남부 독일의 '총사령관'
이, 그 자신의 고집과  두 번째 부인이며 의사인 마틸데 폰  켐니츠의 과도
한 명예욕으로 해서 계속 새로운 분규에 휘말려들면서 당에 부담스러운 존
재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톨릭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고, 바이에른의 왕세자와  불필요한 체
면싸움을 일으켰고, 장교단과 사이가 나빠져서 상당수의 옛날  전우들이 그
에게 장교단에서의 추방을  통고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분파  이데올로기의 
준종교적인 우매함  속으로 점점 더  구제불능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수많은 모반의 공포들,  게르만 신들에 대한 믿음, 문명 비관
론 등과 같이 연관되어 있었다.
  히틀러 자신은 초기 시절의  보수반동주의, 란츠 폰 리벤펠스, 툴레 결사
의 정신나간 생각 등의 양상을  보이는 이런 성향과는 오래전에 이미 결별
하였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이러한 민중 낭만주의에  대한 경멸감을 표
현하였다. 사실은  자신의 관념세계도 어느  정도 유치하게 그러한  낭만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질투심도 작용하였다. 군사적으로 엄격
한 민족에게서 예전에 상병이었던 장군을 따라잡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사
실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징적인 일이지만 어떤 민족진영 그룹이 1925년 초 어떤 편지에서 루덴
도르프를 '영원한 각하,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른 반면 히틀러는 '오늘의 어
두운 상황에 불을 비치는 불의  정신'이러고 불렀다. 히틀러는 1차 세계 전
쟁의 장군이 자신의 수행원인  울리히 그라프를 군대식 명령으로 자신에게
서 빼간 것을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최초의 대담에서  벌써 
그에게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점차 끓어오르는  적대감으로 북부 
도이치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의 지도자들인  폰 그레페와 폰 레벤틀 로브
와의 대립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히틀러가 옛날의  권력을 되찾을 수는 없다. 그는 재
능있는 선동꾼이기  하지만 정치가는 아니라고 선언했다.  변화된 자신감을 
드러내는 뒷날의 편지에서 히틀러는 폰 그레페에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자
신은 전에 북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오직 독
일을 위해서일 뿐이며 "하느님께서 나는 도와주시는  한!" 절대로 그레페와 
그 패거리를 위해서 북치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당을 새로 창설함
  1925년 2월 26일에  처음으로 <민족관찰자>가 다시 발행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실패한 쿠데타 장소였던  시민 양조장에서 국가사회당이 새로운 창
설(재창설이 아니라)을 예고하였다  사설 '새로운 시작'에서, 그리고 동시에 
출간된 당조직을 위한 기본노선  책자에서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지휘권에 
대한 요구를 하였다. 우선  모든 전제조건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에서와 슈
트라이허에 대한 비난을 염두에 두고서 당을 이끌어가는 것은 그 주종자의 
도덕성이나 파벌들간의 갈등과는 별 상관이 없고, 정책을  추진하는 일이라
고 주장하였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는  '정치적 아이들'
이라고 불렀다. 그의  정력적인 진로에 대한 최초의 반응으로 온  나라에서 
충성 표명이 나왔다.
  
    모두 히틀러에게!
  다음날의 장면은 전략적으로  세심하게 고려되었다. 자신의 호소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히틀러는 두 달이나 연설 활동을 일절  중지했다. 이러한 방
식으로 그의  지지자들의 기대와 라이벌들의  신경질이 극단적으로 높아졌
다. 그는 방문객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외국의 대표단도 거절하였
고, 모든 정치적인  서한은 '읽지 않고 서류바구니에'  던져버린다고 알리게 
했다.
  이날 집회는  저녁 8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른  오후에 벌서 
'입장료 1마르크'짜리 최초의  참석자들이 나타났다. 6시에 경찰은  홀을 폐
쇄해야 했다. 약 4천 명의  지지자들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히틀러
가 홀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최초의 과도한 숭배의식으로  변했다. 참석자들
은 탁자 위로 올라가서 환호성을 지르고 돌로 된  1리터, 2리터들이 맥주조
끼를 흔들어대고, 행복에 겨워  서로 얼싸안았다. 막스 아만이 사회를 보았
다. 안톤 드렉슬러가  에서와 슈트라이허를 추출해야 참석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망설이는, 아니면 고집스런  이 모든 당원들을 향해서 히틀러는 두  시간
에 걸쳐서 대단히  효과적인 연설을 행했다. 그는 일반적인 이야기로  시작
해서 아리안족의  문화창조적인 업적들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외교정책을 
언급하면서 평화협정은 파괴되었고, 배상합의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그렇
지만 유대의 혈통 오염을 통해서 독일이 몰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옛날
의 강박관념으로 돌아가서 그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거리에 나타난 유대
인은 모두가 금발의  도이치 소녀를 팔에 끼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공산주
의는 "몰락할 수도 있고, 그에 대항해서  더 그럴싸하면서도 똑같이 잔인하
게 행동하는 다른 주의를 마주세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루덴도르프를 비판하였다.  그는 어디서나 적대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것을 적이라고  부르면서 실은 다른 것을  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핵심에 이르렀다.
  
  누군가 와서  내게 조건을 제시하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친구여, 우선 내가 자네에게 제시하는 조건을 기다려보게.  나는 대중을 얻
기 위해 애쓰지는 않네!' 라고  말입니다. 당원 여러분, 일년이 지나서 여러
분이 직접  판단해보십시오. 내가 올바르게 행동했다면  그야 좋은 일이죠. 
내 행동이 옳지  못했다면 나는 내 직위를 여러분 손에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나  혼자서 당을 이끌
어가고, 내가 혼자서 책임을 지는 동안에는 다른 누구도  내게 조건을 제시
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운동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분노로 빨개진 얼굴로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적대감을 파묻
어버리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당내의  싸움을 끝내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추종하라고 청하지 않았고,  타협을 암시하지도 않았으며, 단순히 복종이냐 
아니면 결별이냐를 요구하였다.  마지막에 환호성이 울러퍼져서, 새로운 국
가사회당에서 자기 혼자 이끌어가는  지도자 정당의 권위적인 노선을 취하
려는 그의 의도를 확인해주었다.
  이러한 환호성의 한가운데로 막스  아만이 끼여들어서 대중을 향해서 소
리쳤다. "싸움은  이제 끝이다. 모두  히틀러에게 향하자!" 그 순간  갑자기 
단상에는 옛날의  적대자들이 나타났다.   슈트라이허, 에서, 페더,  프리크, 
뤼링겐의 기사  딘터, 바이에른 파벌지도자 부트만  등이었다. 이 압도적인 
장면에서 그들은 소리지르면서 의자와 탁자 위로 올라선 수천 명의 사람들
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손을 내밀었다. 슈트라이허는 약간 당황한  태도
로 '신의 사명'에 대해서 말했다. 최근에 지방의회파  앞에서 상병 히틀러에
게 날카롭고도 조롱섞인 반대로  표명하였던 부트만은 자기가 가졌던 온갖 
주저하는 마음이 "지도자가 말씀하시자 내  안에서 녹아 없어졌다."고 선언
하였다.
  루덴도르프의 압도적  모습으로도, 폰 그레페,  슈트라서, 로젠베르크, 룀 
등이 개별적으로나 혹인 연합해서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그는 약간의 조치
로 벌써 성취한 것이다. 이러한 체험이 그의 권위와  자신감을 강하게 만들
어주었다. 부트만의 표현대로  과거에도 있었지만 루덴도르프와 다른  경쟁
자들로 인해서 매우 제한적으로만  그에게 붙여졌던 칭호가 아날부터 논쟁
의 여지 없이 그의 것이 되었다. 즉 '지도자'였다.

    연설 금지령
  헤르만 에서가 표현한 것처럼 민족주의 진영의  경쟁자들이라는 '악당 같
고 저주스런 음모덩이'들과 대결해서 이전보다 더욱  독재적인 당의 지배권
을 확보하자마자 히틀러는  곧바로 두 번째 목표의 실현에 착수하였다.  곧 
국가사회당의 조직을 자신의 전략적  목적에 맞는 유연하고도 강력한 기구
로 만드는 일이었다. 
  폭력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혁명을  달성하려는 결심에 대해서 그는 이미 
란츠베르크에서 비웃는 추종자  한 사람에게 이렇게 확언하였다.  "내가 활
동을 다시  하게 된다면 나는 새로운  정책을 추구해야 할 겁니다.  무기의 
힘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과 공산당 의원들이 화를 내겠
지만 우리는 의회에 진출합니다. 투표로 이기려면 총으로  쏘아버리는 것보
다 시간이야 오래 걸리겠지요.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들의  헌법이 우리에게 
승리를 만들어줄 거예요. 합법적 절차는 모두 느린 법이니까요."
  그것은 히틀러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느리고 힘든 일이었다.  그리
고 언제나 다시 후퇴, 저항, 갈등을 맞이하였다. 그  자신이 최초의 힘든 불
운에 대해서 책임질 상황이  닥쳐왔다. 바이에른 정부는, 어떤 것을 적이라 
말하면서 다른 것을 뜻할 수도 있다는 그의 발언을 원래 뜻 그대로 헌법에 
대한 적대감의 표지로  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적이 자기 시체를  넘어가
든지 아니면 자기가  적의 시체를 넘어갈 것이라는  발언에 대해서도 화를 
냈다. 그는 이  말 끝에 계속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 투쟁이 다음번에 
나를 쓰러뜨리면 철십자가 내 시체를 덮는 천으로 쓰이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고백은 그의 충성 확인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일깨워서 처음에 
바이에른 당국이, 그리고 이어서 대다수의 주들도 그가  공식적으로 연설하
는 것을  일시 금지하였다. 집행유예와, 언제나  위협적인 추방령과 연관해
서, 전반적인 사정을 배경으로 놓고 보면 그에게 내려진  이 금지령은 일체
의 전망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노선의 일시적 실패를  의미하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안감이나  분노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년 반  전인 
1923년 여름에만 해도 한 번의 퇴각이 그를 길에서 밀쳐내서 젊은 날의 무
기력과 약점을 다시  불러왔다. 그러나 지금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연설 
금지라는 개인적인 타격을 입고 가장 중요한 수입원을 잃어버린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이제부터 당 기관지를 위해서  쓰는 사설의 사례
비로 생활비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는 자주 브루크만 집에서 40에서  60명 
정도의 소규모 손님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모든 마취제, 모
든 흥분제가 없어졌으므로 선전과 위장을 위해서 새로운 수단을 써야만 했
다.
  당시의 관찰자들은 모두 히틀러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에 변화했다는 사
실을 증언하고 있다. 생기 없는 정신병자 같은 모습에  처음으로 윤곽과 개
성을 마련해준 엄격하고  엄숙한 모습들을 알아본 것이다.  "좁고 창백하고 
병적이고, 자주 거의 텅  빈 듯하던 얼굴이 훨씬 더 강력한  형태로 집중되
었다. 이마부터 턱에  이르는 골격의 강한 구조가 이제 두드러지게  드러났
다. 전에 꿈꾸는 듯이 보였던 요소는 사라지고 이제  분명한 강인함의 모습
이 나타났다."
  이 강인함은 이제 모든 재앙을 통해서 그에게 끈질긴  특성을 주었다. 그
러한 끈질긴 힘으로 그는 30년대 초에 마침내 승리의 행진이 시작되기까지 
정체기간을 잘 견디어냈다. 1925년 여름에 모든 희망의  저점에서 국가사회
당의 지도자 모임에서 그에게 대리인을 내세우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그는 
당 운동은 자신과 함께 일어서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할 것이라는 도전적인 
이유를 들어서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의 가까운 주변을  보면 그의 말이 옳았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난 
몇 달 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충돌과 분리는  중간급의 아니면 종속적인 
추종자만 그의 곁에 남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측근은 다시 가
축상인, 운전기사, 경호원, 이전의  직업군인 무리로 한정되었다. 그는 당의 
처음 시작  시절부터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감상적이고, 거의  인간적인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  패거리의 대개 좋지 못한 평판이나 그들의  떠들썩
한 조잡함과 유치한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람들
과의 교류는 그가 시민적이고  탐미적인 원래의 출신계층과 얼마나 무관한 
사람이었던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때로 들어오는 항의에 대해서 그는 언젠가 어느 정도 불확실성의 흔적을 
지닌 채, 자기 생각으로도 측근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잘못이 없지 않은' 
인간의 본성 탓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수상이 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그가 좋아하는 측근이었다. 히틀러가  한때는 비스
마르크의 것이었던 방에서 영화를  즐기거나 아니면 시시한 대화를 위해서 
저고리 단추를 끄르고 무거운 안락의자에서  두 다리를 쭉 내뻗곤 하던 저 
길고 공허한 저녁의 사적인 모임에서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분위기를 지
배하였다. 배경도, 가족도, 직업도  없이, 성격이나 경력에서도 철저히 단면
만을 지닌 이런  사람들은 한때 남자 하숙집에  살았던 히틀러에게 수많은 
친근한 기억들을 일깨웠다.
  크리스치안 베버, 헤르만에서,  요제프 베르히톨트, 막스 아만  같은 사람
들에게서 다시 보았던  것은 저 빈 시절의 후광이나 냄새였을지도  모른다. 
경탄과 정직한 헌신만이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가 '오스테리
아 바바리아'나 '노이마이어  카페' 같은 곳에서 장광설의  독백을 시작하면 
그들은 놀란 모습으로  그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그들의 비판 없는  열광에
서 그가 마약처럼 꼭 필요로 하지만 참아야 했던 대중의 열광에 대한 대용
품을 보았다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이 마비의 시기에 히틀러가 얻은 빈약한 성공 중에는 무엇보다도 그레고
어 슈트라서를 얻은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패한 11월  쿠데타에 이
르기까지 란츠후트의 약사였고 저지  바이에른 대관구 지도관이었던 이 인
물은 가끔가다만 전면에 등장하곤 하였다.
  그는 원래 '전선 체험'을 통해서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히틀러가 없는 
기간을 이용하여 스스로 앞으로 나서려고 애쓰면서  그는 '국가사회주의 자
유운동'의 틀 안에서 특히 북부 독일과 루르 지방에서  어느 정도의 지지세
력을 만들어냈다. 뚱뚱하면서도 상당히 예민한 이 남자는  음식점들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호머를 그리스어 원전으로 읽고, 우울한  바이에른 소도시 
유명인사의 원형처럼 행동하였다.  그는 인상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연
설 재능 이외에도 기자인 동생 오토를 공격적인 동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부서지고 냉정하고  신경쇠약증에 걸린 히틀러와은 잘 어울리
기 어려웠다. 히틀러라는  사람과 지저분하고 비굴한 측근이 다 그의  마음
에 들지 않았다. 정치적인 견해에서 두 사람의 의견일치는  여러 가지로 해
석이 흔들리면서 전체적으로는 규정되지 않는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에만 
한정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마법과, 추종자를 모아  하나의 이념을 위해서 
동원하는 능력에 감탄하였다. 
  새로운 당 창설을  위한 모임에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1925년 
3월 초에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과  결별한 대가로 북부 독일 전역에 대해
서 상당히 독자적인 국가사회당  지휘권을 제안하자 슈트라서는 자기는 추
종자이지 대등한 동지로서 히틀러에게 합류할 수는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
는 도덕적인 주저와  의심을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
래를 위한 이념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히틀러 씨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에른스트 팀과의 결별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상당한 손실을  불러왔다. 슈트라서가 폭풍  같은 
에너지로 북부 독일에  당조직을 마련하고, 짧은 시간 안에 슐레스비히  홀
슈타인, 폼메른, 저지 잔센 사이에 7개의 새로운 대관구(국가사회당과 히틀
러 통치  시대의 행정구: 역주)를  만들어내는 동안 히틀러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많은 후퇴를 겪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권위와 노선을 지
키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에른스트 룀과 결별하였다.
  뭔헨의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면서도  석방된 전직 대위 룀은 즉시 
의용군과 전투동맹 시절의 옛 전우들을 긁어모아 새로운  모임, 즉 '전우회'
를 만들었다. 상황이  점차 정상화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이 영원한 병사들은 거의 예의 없이 룀의 전략적 능력과 조직능력 아래 
모여들었다.
  란츠베르크에서 이미 히틀러는  이런 활동을 근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
것은 자신의  조기석방, 민족주의 운동  내에서 권력확보와 새로운  전략을 
어느 정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23년 11월의 교훈에 따르면  이제
부터 군대조직과  그들의 무장한 자신감, 음모적인  행태, 병졸놀이 따위와 
결별해야 했다.  히틀러의 의지에 따르면  국가사회당이 필요로 하는  것은 
준군사적으로 조직된, 오직 정치적 지휘, 따라서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당의 
군대였다. 그에  반해서 룀은 방위군을  위한 비밀부대라는 한때의  이상에 
붙박여 있었고, 심지어  돌격대를 당과 완전히 분리시켜서 오직 자신의  전
우회 하부조직으로 만들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보면 돌격대의 명령권과  기능을 놓고 다투는 오래된 싸움이
었다. 느리고 둔한 룀과 달리  히틀러는 그 사이 원한과 인식을 얻었다. 그
는 로소브와 그 휘하 장교들이  11월 8일과 9일에 배신한 사실을 용서하지 
않았다. 또한 그날 밤의  사건에서, 맹세와 합법성은 장교들 대다수에게 있
어 뛰어넘을 수  없는 도덕적 장벽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로소브의  배신은 
관례에 어긋나고 명예스럽지 않는  불법적인 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망
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카르, 히틀러, 로소브 자신의 갈팡질팡하는 마음, 상
황이 그러한 불법적  일 속에서 군대를 이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히틀
러는 거기서 결론을 이끌어냈다. 군과는 어떤 형태로도 뒤섞이지 말 것. 바
로 거기에 온갖 불법성의 시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4월 초반에 갈등이  불거져 나왔다. 룀은 몽상적인 애착으로  히틀러에게 
매달렸다. 그는 정직하고 자발적이고, 자신의 견해와 친구들에 대해서 똑같
이 충성스러웠다. 히틀러는  정치 이력 초창기에 룀에게서 얼마나 많은  도
움을 받았는지 잊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시대가 변했고, 
한때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 그 사이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려 들지 않는 고
집스럽고 힘든 친구로 변했다는 사실도 보았다.
  얼마 동안 그는 망설이면서 룀의 고집에 양보를 했다.  그러나 마침내 아
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결별을 결심하였다.  4월 중순에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룀은 한 번 더 국가사회당과 돌격대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
하였다. 자신의 부대는 비정치적인 개인군대로 남아서 당과  일상적인 투쟁
과 무관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언성이 높아졌다.
  히틀러는 특히 룀의 생각이 1923년 여름처럼 아직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
의 의도를 위한  포로로 만들고, 또다시 '선전꾼' 으로 격하시키려는  데 자
존심이 상했다. 화가  잔뜩 나서 룀에게 우정을 배신하였다고 비난하지  룀
은 대화를 중단해버렸다. 다음날 그는 서면으로 돌격대  지휘권을 반납하였
고 히틀러는 답변하지 않았다.
  룀은 전우회 지휘권도 내놓고 난 다음 4월 말에 히틀러에게 한 번 더 편
지를 썼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함께 보냈던 아름답고 힘든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자네에게 그 전우
애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한 자네의 개인적인 우정만은  없애지 말아달라
고 부탁하고 싶네." 그러나  히틀러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
음날 민족주의 신문에 사직서를 넘겨주자 <민족관찰자>는 아무런 주석 없
이 그것을 실었다.

    세력 약화
  히틀러에게 불안정한 전망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  아니라, 주
로 이유에서 이루어진 루덴도르프와의 결별이 정치적으로 타당한 일이었음
을 알려주는 사건이  이 무렵 발생하였다. 1925년 말에 사회민주당  출신의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죽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권유로  민족주
의 진영은 '시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유능하지만 완전히  이름 없는 야레
스 박사에 맞서서 루덴도르프를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장군은 겨우 1퍼
센트 남짓한  표를 얻어서 완패하였고,  그것을 히틀러는 잔혹한  만족감이 
없지도 않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선거가 끝난 지  며칠 만에 그의 곁에 남은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믿을 
만하고 중요한 동지인  푀너 박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러자 그는  정말
로 정치적 경력의  마지막에 이른 것 처럼  보였다. 당은 뮌헨에 겨우  7백 
명의 당원이 있을  뿐이었다. 안톤 드렉스러는 그와 결별하고 자신의  온건
한 성향에 알맞는 정당을 창설하였다. 히틀러의 싸움부대는  그곳을 찾아가 
쑥밭으로 만들고  경쟁정당을 엉망으로 만들곤  하였다. 그와 비슷한  일이 
다른 유사 단체들에도  일어났다. 드물지 않게 히틀러 자신이 하마가죽  채
찍을 손에 들고서 집회에  쳐들어가서 연설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단상에
서 대중을 향하여  미소짓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
는 재선거에 앞서서  그는 지지자들에게 그 사이  입후보한 폰 힌덴부르크 
사령관을 지지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힌덴부르크를 지지한 것은  그 어떤 '장기적인 정치적 고려'에서 나
온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표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질서정당'의 
전선으로 합류하였음을 과시적으로  보여주었고, 거의 모든 강력한  기관들
에 대한 열쇠를 장악하였거나 앞으로 장악하게 될  남자, 이 '대리황제'에게 
접근해 갔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지속적인 후퇴가 히틀러의  당내 지위를 약화시켰다. 특히  튀링겐, 작센, 
뷔르템베르크 등지에서 지배권을 얻기 위해 계속 악전고투해야  했던 반면,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북부  독일에서 당의 건설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쉬
지 않고 움직였다.  대개의 밤을 기차나 대합실에서 보냈으며 낮  동안에는 
지지자들을 방문하고, 관구들을 창설하고, 당 임원들을 소집하고 회의를 하
거나 집회에 참석하곤  하였다. 1925년과 1926년에 그는 거의 1백  개의 회
합에서 주연설자로  토론을 맡았다. 반면에  히틀러는 침묵의 판결을  받고 
있었다. 
  슈트라서의 경쟁적인 명예욕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사정이 일시적으로 당
의 무게중심이 북부로  옮겨간 것 같다는 인상을 일깨웠다. 슈트라서의  충
성심 덕분에  히틀러의 지도적 지위는  전체적으로 인정되고 있었지만,  이 
멜로 드라마적이고 소시민적인  보헤미안(히틀러)과 그의 '로마 노선'에  대
한 냉정하고 청교도적인  북 도이치 사람들의 불신이  거듭 드러나곤 하였
다. 그리고 드물지 않게 뮌헨 중앙당에 대한 광범위한  독립의 인정을 전제
로 해서만 새로운 당원들을 얻을 수 있었다.
  지구당 지도자들을 당 지도부가 임명한다는 히틀러의 요구도 북부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당원지침서를 간행하는 권리를 사이에  둔 중앙당
과 관구들 사이의 갈등은 오랜 세월을 끌었다. 히틀러는  극도로 예민한 권
력의지를 가지고서 그러한 조직상의 부수적인 문제들이 중앙당이 통제력을 
가지느냐 아니면  무능하냐를 결정하는 문제가  되리라는 사실을 간파하였
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양보하지 않았으면서도 개별적인  관구
들의 독자적 권력을  오랫동안 참아야 했다. 북부 라인란트 관구는  1925년 
말에도 뮌헨 중앙당의 당원지침서를 이용하기를 거부하였다.

    '새로운 유형' 요제프 괴벨스
  엘버펠트에 자리잡은 라인란트  관구의 사무장은 젊은 인텔리였다. 기자, 
작가, 증권 브로커 등이 되어보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다음에 그는 마
침내 어떤 도이치 민족주의 정치가의 비서가 되어서  국가사회주의, 이어서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연결되었다.  그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라는  이름이었
다. 그를 슈트라서에게 끌어들인 요인은 무엇보다도 그의  지적 과격주의였
다.
  그는 정열적인 문학작품과 일기장에서  자기 자신에 전율을 느끼면서 이
렇게 확인하였다. "나는 가장 과격한 사람이다.  새로운 유형이다. 혁명가의 
유형이다." 그는 높고도 특이하게 매혹적인 음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시대
에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열정을 함축성과  결합시킨 문체를 가졌다. 그의 
과격주의는 주로 민족주의  이념과 사회주의 혁명이념을 이용하였다.  그의 
새로운 후원자인 슈트라서의 개념들과 주장들을 알팍하고 날카롭게 서술한 
것 같았다. 피가 통하지 않는, 이상스럽게도 추상적인 감정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히틀러와는  달리 감정적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전후시대의 곤궁과 
비참의 체험에서 낭만적인 특성을 가진 사회주의를 이끌어냈다.
  그것은 국가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층에 침투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는 기대와 결합된 것이었다. 그는 한동안 요제프 괴벨스를  자기 동생 오토
와 나란히 자신의  정책노선의 지적인 대변자로 보았다. 이 노선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히틀러의 '파시스트적인' 남  도이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일종의 사회주의적 대안의 표현으로서만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슈트라서 일파와 그들의 생각
  불도이치 국가사회주의들의 특별의식을 처음에  1925년 9월 10일 하겐에
서 창설된 노동결사로 나타났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나란히  괴벨스가 모
습을 드러냈다. 참석자들은 거듭 뮌헨 중앙당에 대한  공격을 하였고, '서부 
블록'이나, '반대공격'이니 '뮌헨의 완고한  보스'니 하는 말을 하면서 당 지
도부가 당  정책 문제에 관심이  적다고 비난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민족관찰자>의 '끔찍하게 낮은 수준'을 탄식하였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수많은 비난들 중 어느  것도 히틀러 개인이나 
당수로서의 위치 자체를  향한 것은 없었다. 그의 지위 자체는  약화시키기
는커녕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생각이었다. 그가 아니라 '중앙
의 무질서한 살림'에 대해서,  그리고 에서와 슈트라이허의 '능숙한 허풍'에 
대한 비난이었다. 전체적으로 상황을 잘못 평가한 가운데  슈트라서 일파는 
'파멸적인 뮌헨 노선' '에서의  독재' 올가미에서 히틀러는 해방시키고 자신
의 일에 충실하도록 만들기를 희망하였다.
  이미 초기 시절부터  퍼져 있었고, 모든 증거와 외양에 반대하면서  마지
막까지 남아 있던 이해하기 힘든  관념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즉 '지
도자'는 불안하고 인간적인데  다만 잘못된 충고자들과, 이기적이거나 악의
적인 요소들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작자들이 지도자가 
자신의 정직한 의지를  좇는 것, 재앙의 흐름을 간파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집단의 정책은  괴벨스가 순수 작업하는 반원간 잡지  <국가사회주의 
편지>에 발표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운동의  시야를 현재로 향하도록 
하고, 동경에 가득 찬,  회고적인 중산층 이념의 협소함에서 벗어나려고 하
였다. 뮌헨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이 여기서는 의문으로 바
뀌거나 공공연히  부패로 여겨졌다." 특히  이 잡지는 북부의 다른  사회적 
조건, 그러니까  바이에른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적,  도시적인 사회구조를 
고려해서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강조하였다.
  어떤 베를린 당원이 편지에 쓴 것처럼  국가사회주의는 '과격화된 부르주
아'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노동자의 사회주의라는 말에 두려움'을 가져
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정책적 고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우
리는 사회주의자다.  경제적 약자를 착취하고, 부당한  보수를 주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철천지  원수들이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
라도 이러한 체계를 파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괴벨스는 (민족)국가주의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의 접근공식을 탐색하였고, 동일한 태도와 신념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는 
계급투쟁 이론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붕괴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에 대한 우리의 꿈을  영원히 파묻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전세계의 
원수 유대인이라는 히틀러의 이론에 분명한  의문을 표시하였다. "자본주의 
유대인과 볼셰비키 유대인이  동일한 존재라는 말은 사실이  아닐 듯하다." 
그리고 유대인 문제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대담하게 주장
하였다.
  외교정책도 뮌헨 지도부와 현저히 달랐다. 슈트라서 일파는  시대의 사회
주의적 호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향한 호소로 여기
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국민들을  위한 호소'로 이해하였다. 배신당하고, 치
욕을 겪고, 착취당한 독일이 그 국가들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은 세계를 억압하는 민족과 억압당한 민족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의 투
쟁>에서 '정치적 헛소리'라고 평가된 바 있는 수정주의적 요구를 하였다.
  외교정책도 뮌헨 지도부와 현저히  달랐다 슈트라서 일파는 시대의 사회
주의적 호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향한 호소로 여기
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국민들을 위한 호소'로 이해하였다  배신당하고, 치
욕을 겪고, 착취당한 독일이 그 국가들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은 세계를 억압하는 민족과 억압당한 민족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의 투
쟁>에서 '정치적 헛소리'라고 평가된 바 있는 수정주의적 요구를 하였다. 
  히틀러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광범위한 정복계획의 대상으로 여겼고,  로
젠베르크는 러시아를 '유대인 형리 식민지'라고  불렀다면, 괴벨스는 유토비
아를 향한 러시아의 의지를 극히 높이  평가하였다. 슈트라서 자신은 "프랑
스의 군국주의에 대항하여,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윌스트리트의 자
본주의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와의 동맹에 찬성하였다.  슈트라서 일파는 정
책 설명에서 대토지  소유를 없애고, 모든 소규모  기업은 조합에 들 것과, 
20명 이상의 노동자를 가진  모든 작업장의 부분적인 사회주의화를 주장하
였다. 민간업체의 경우 노동자에게 10퍼센트를  배당하고, 국가에 30퍼센트, 
지역에 6퍼센트, 소속구역에 5퍼센트를 배당하였다. 그들은 또한 입법의 간
편화, 계급차별 없는 학교, 보수를 부분적으로 현물로 지급하는 것 등의 제
안에 찬성하였다. 보수를 현물로 지급하는 것은 인플레이션  시대에 생겨난 
화폐에 대한 불신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하노버 당대화
  이러한 기본적 정책노선들은 1925년  11월 25일 하노버에서 열린 당대회
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제안하였다. 북부와 서부 도이치  관구들의 중앙
에 대한  저항과, 관구지도자 루스트가 표현해서  박수갈채를 받은 '뮌헨의 
교황'에 대한 저항적인 분위기는 예상한 정도를 넘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월 말에 다시 하노버에 있는 관구지도자 루스트의 집에서 열린 합의 모든 
쟁점을 기록하자 재빨리 문을 가리키며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자료들이 틀
리지 않는다면 그는 이  모임에서 "소 부르주아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사회
주의 당에서 쫓아내기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모반적인 어조보다도 실무적인 언급들이 더욱 뚜렷하게 히틀러의 
당내 신망이  그 사이 얼마나  추락하였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슈트라서는 
12월에 자신의 정책입안을 만들었다. 그것은 상당히 멋대로  조합한 옛날의 
25개 조항을  대체하고, 당을 소시민의  이해를 대표한다는 나쁜  평판에서 
구해내기 위한 정책안이었다.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12월 중에  널
리 퍼졌다.
  히틀러가 이러한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서 '분노'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아
무도 패더의 항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이 일로  인해서 모든 표결에서 
그에게 투표권을  거부하였다. 25명의 참석자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바보 
멍청이에 어쩌면  음모꾼'인 퀄른  관구지도자 로버트  라이만이, 괴벨스가 
'화폐가치 인상의 똥'이라고 부른 페더와 더불어 히틀러 편을 들었다.
  그 사이 이  지역 여론에서 열렬하게 논의된 문제, 도이치  영주가문들의 
재산을 국유화하느냐, 아니면  1918년에 압류된 그들의 재산을  돌려주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노동결사는  히틀러는 전략적인 고려에서 영주들과 기
득권 세력을 편들 필요성을 보았다. 그에 반해서 슈트라서  일파는 좌파 정
당들과 마찬가지로 예전 영주들의 재산 박탈에 찬성하였다.
  물론 당 지도부를 공격할 의도는 아니라는 말뿐의 고백을 앞세우기는 하
였다. 그리고  뮌헨 중앙당의  동의도 받지 않고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자>라는 신문을  발간하고,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란츠후트에 있는 자신의 
약국을 저당  잡히고 얻은 돈으로  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금세 상당한 정도의  콘체른으로 발전하였다. 6주간의 신문으로 그는  일시
로 뮌헨 중앙당의  에어 출판사를 크기면에서 추월했을 뿐 아니라,  콘라트 
하이덴의 평가에 따르면  '정신적인 다양성과 정직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쪽
의 출판물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하노버에 모여든 이들 패거리가 히틀러와 권력시합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는 사실은, 히틀러가 추진하는 합법적 충성전략을 공격적이고  극단까지 이
르는 '파국정책'으로 바꾸자는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요구로 나타났다. 그는 
국가를 해치고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수단, 곧 쿠데타, 폭탄, 파업, 거리폭
동, 소동 등을 전투적인 권력정보 의지에 어울리는 것으로 여겼다. 바로 뒤
이어 괴벨스는  이 개념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 목적을 위해 배고픔, 
절망, 희생 등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민족 안에 등대불을 밝혀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절망의 위
대한 불을 일으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때까지 히틀러는 이  일파의 활동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들이  일
시적으로 당내 제2의  정부 형태로 보이는 권력중심을 만들어내고,  그레고
어 슈트라서의 이름이  북 독일에서 그 자신의  이름보다 '더 많은' 명성을 
날려도 그랬다. 괴벨스는 일기장에서  이렇게 환호성을 울렸다. "아무런 뮌
헨을 믿지 않는다. 엘버펠트가 도이치 사회주의의 메카가 되어야 한다." 자
신을 명예회장으로 끌어내리고,  흩어진 민족주의 진영을 더 큰 운동  안에 
포섭해 들이려는  의도에 대해서도 히틀러는  경멸적으로 무시하고, <나의 
투쟁>에서 그들에게 몇 페이지의 조롱을 보냈을 뿐이다.

    히틀러, 산 속의 평화에 파묻히다
  히틀러의 이러한 은둔은  부분적으로 개인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베히슈타인  부부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베르히테스가덴 
근처 오버잘츠베르크(윗소금산)에 있는 함부르크 상인의 별장을 세냈다. 그
것은 1층에 커다란  거실과 베란다가 있고, 2층에는  세 개의 방들이 있는,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집이었다. 방문객들에게는 이 집이 자기 것이  아
니라고 강조하곤 하였다. "다른 '정당거물'들의  고약한 행실을 본받아 보스
로서의 거동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이 과부가 된 이복누이  앙겔라 라우발에게 자기 집의 살림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열일곱  살 난 딸 겔 리가 그녀를  따라 왔다. 그는 이 
예쁘고, 경박스럽고, 조카라고  강조하곤 하던 소녀를 귀여워  하였다. 그것
은 곧 정열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물론 이 관계는 그의 참을성  없음과 낭
만적으로 과장된 여성에  대한 이상, 숙질 사이의 관계라는 스캔들  등으로 
인해서 곧 부담스러운 것으로 변했다가 절망적인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주 드물게  히틀러는 자신의 숙소를  떠났다. 그것도 보통은  조카딸과 
함께 뮌헨의 오페라를 보러 가거나  아니면 때로 시내에 있는 친구들을 방
문하러 갈  때뿐이었다. 친구들이라야 한프슈텡글,  브루크만, 에서, 호프만 
부부 등이었다.
  당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 독일에서도 그가  당지도자
의 일을 게을리하고, 당의  자금을 개인용도로 이용하며, 예쁜 조카딸과 함
께 시골의 파티만  즐긴다는 비판이 커졌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러한  비난
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1925년 여름에 <나의  투쟁> 제1권이 나왔다. 이 
책이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첫해에 1만 부도 팔리지 않았건만 히틀러
는 연설 욕구가 꽉 막혀 있는데다가 변명이 필요하기도 해서 제2권을 구술
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침착한 태도로 그는 이 산 속 평화에서 북 도이치 지지자들의 당 
정책 논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은둔을 결정을 내리는 일을 두려워하는  그
의 특성에 의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론에 대한  실용주의자의 무관심 탓
이기도 했다. 그는 개념들을 경멸하고 꼭 필요할 경우에는  어떤 용어를 써
서든지 어떤  일이든 막아내곤 하였다.  그는 또한 은밀한  란츠베르크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유희가 되풀이되기를 기대하였던 것 같다.  경쟁자들을 부
위를 높이는 방법 말이다. 슈트라서 파국전략으로 이제는  상황이 심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를 보고 그는 당연히 개인적인 도전의사를 알아보았다. 
그들의 의도는 자신의 집행유예와  아울러 정치적 장래까지 불안하게 만들
었던 룀의 기도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초조하게 기회를 기다렸다. 
적대자들에게 한방 먹이고 자신의 권위를 되찾을 기회였다.
  뒤돌아보면 히틀러의 초조하고도 지배적인 특성이 당의 성공적인 재출발 
뒤에 1923년 11월의 돌진에 못지않게 당을 파괴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성
질은 전략적인 개념들을 분명히 바보로 만들고 말았다.  1925년 8월에 어떤 
지구당은 1월에 138명의 당원이 있었는데 이제는 겨우 30명만 활동하고 있
다고 보고 하였다.  히틀러가 이 시기에 안톤 드렉슬러에게 행한  모욕주기 
작전에서 추종자이며 증인인 어떤 사람이 그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맺음말
에서 국가사회당은 그의 방법을  가지고는 장기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서두
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당신은 아주 슬픈 종말을 맺을 것입니다!"
  히틀러만은 계속되는 자신의 실패의  고리 속에서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의 세계관을 이미 형상화해낸 확고함과 고집은  이런 
위기를 어떤 의기소침의 흔적이나 체념적인 기분 없이  넘기도록 해주었다. 
극단적으로 극적인 상황에 마주섰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둘러싼 운명적
인 사건들에 얼마나 얽매이지 않았던가  하는 것은 이 시기에 그가 스케치
북이나 자그마한  편지함에 고풍스러운 과시용 건축물,  개선문, 멋진 둥근 
지붕 홀 등을 그렸다는 사실이 보여주고 있다. 숭고하게  통제된 여백을 가
진 극장 배경그림은,  깨지지 않는 세계정복 계획들, 세기의 기대,  그 모든 
실패와 당시의 통탄스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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