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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Rebellion

큰 정치판에 뛰어들다

by FraisGout 2020. 8. 15.

  히틀러는 1929년 여름에 막 안정되고 있던 공화국 체제에 최초의 대규모 공격
을 시작하였다.그리고 순식간에 앞으로 돌격하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동원이 가
능한 구호를 찾고 있었는데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이 갑자기 공략기점을 제공
한 것이다. 이용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고, 새로 시작된 전쟁 배상금 논쟁
을 이용해서, 그는  국가 사회당을 고림된 파편 정당의 역학에서  해방시키고 큰 
정치판의 중심부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그의 이런 돌격이  ㄱ이어 나타나는 세계 경제 공황과 시각적,  심리적으로 밀
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치 전주곡처
럼 자신의 수단,  조직, 전략 등을 일단 시험해볼 기회를  가졌다. 전쟁 배상금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되는  지속적 위기의 첫 박자가 되었다. 이어지는  위기는 공
화국을 사로잡았고,  히틀러에게 붙잡혀  풍부한 발상으로 촉진되어서  공화국의 
종말에 이르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1929년 10월 초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죽음이 전환점이 
되었다. 도이치 외무장관은 복잡한 외교개념에 대한  저항에 부딪쳐서 많은 힘을 
소모하였다. 그의 생각은  '배상금 조건 이행 정책'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재로는 베르사유 조약의  점짐적인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것이었다.  죽기 직전
까지 그는 내심의 의혹이 없지는 안ㅎ으나 그래도 새로운 배상금 규정을 수용하
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새로운 규정이란  미국 은행가인 오웬 영이 이끄
는 배상 창구  위원회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그것은 유효한  조건들을 적잖
이 개선하려 했을  뿐 아니라, 슈트레제만의 고집과 외교적 능숙함  덕택으로 연
합국 점령군이 라인란트에서 일찍 척수하는 계획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국내에서 과격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리고 공화국이 강제상
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초기 연부금도 낼 수  없는 상황에
서 거의 60년 동안이나 지불 의무를 짊어진단느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칼 두이스베르크, 아돌프 하르나크,  막스 플랑크, 콘라트 아데나우어, 한스 루
터 등의 인물들이 끼여 있는, 재계, 학계,  정계의 유명 인사 2백여 명의 공개 성
명서에서 큰 우려를 표시하였다. 저쟁이 끝난지 11년이  지난 지금 이 계획은 시
대의 열망이 들어 있는 모든 종족이 한 가족이란느 이념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
렸다. 표면적인 수많은  화해의 몸짓 뒤에서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대립이 계
속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준 것이다.
  더욱이 1988년까지  계속되는 부채  상환 요구는 이미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231조 전범조항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도이치 민족의  자의식을 심하게 
손상시켰던 바고 그 조항이었다. 과격한 민족주의  단체들은 이 비현실적인 계획
을 보고 "도이치  사람들이 전부 지불하라"는 역효과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하였
다. 점차적으로 전쟁 결과 극복하는 과정이어야 하고, 따라서 공화국의 안정에도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 반대로 "바이마르 '체제'에 대한 원칙적  반대세력의 결정 
지점이 된 것이다."

    후겐베르크와 극우파의 결집
  1929년 7월 9일에 극우파는  '영 안에 반대하는 국민청원을 위한 전국 위원회'
아래 하나로  뭉쳤다. 협정에 서명이 이루어진  약 9개월 위까지  캠페인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고,  극좌파에서 공산당까지 가세하였다.  이 캠페인에서 위원회는 
협정의 철회를  추진하였다. 복잡한 종속  양상을 몇 마디  도발적인 슬로건으로 
축약시켜 수없이 되뇌었고, 그러써 날카롭게 전개된  원수 이미지에 증오가 자리
를 잡도록 애썼다.  이런 합의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고, '도이치  민족을 골고다'로 끌고가서 형리가  '비웃으면서 십자가에' 못을 
박는 짓이라고 했다. 동시에 여기서 처음으로  단결하여 뭉친 '범야권 연합'은 전
범조항 삭제,  모든 배상의 종결, 점령  지구에서의 조속한 철수,  도이치 민족의 
'노예화'에 협조한 모든 장관과 정부 대표의 처벌 등을 요구하였다.
  추밀 고문관 알프레드  후겐베르크가 이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는 야심만만하
지만 생각이  좁고 가차없는 63세의  남자였다. 처음에 동부의  거주 담당관으로 
출발해서 크루프 회사의 이사를 역임한 후 수많은 자회사를 거느린 언론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것은  광범위한 종류의 신문들과  출판사, 통신사, UFA 영화회사 
등을 거느린 것이었다.  중공업 분야의 정치적 신임 인물로서 그는  상당한 액수
의 돈을 다루고 있었고 이 모든 수단들을 이용해서 '사회 주의자 공화국'을 멸망
시키고, 노조를 파괴하고 그 자신의 말처럼  아래로부터의 계급 투쟁에 대항하여 
상류층의 계급 투쟁으로  응답하려 애썼다. 자그마하고 둥글둥글한  몸집에 커다
란 코밑수염, 짧게 깎은  머리 모양으로 그는 싸음 잘하는 은퇴한  수위 같은 느
낌을 풍겼다. 그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당당하고 원칙적이며 분노한  사람처럼 보
이지는 않았다.
  1928년 가을에 '어두에서 나온 사나이' 후겐베르크는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지
휘를 맡으면서 과격한  원한의 대변자가 되었다. 일단은 성공한 듯이  보이던 우
파의 공화국 합류는 즉시 패배하였다. 국가  민족당은 방법론으로나 개별적인 당 
강령에 이르기까지 히틀러 정당을 모방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히틀러 당을 시
민적으로 풍자한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후겐베르크는 증오스런 공화국에 대적
하는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안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는 동안 그는 어
떤 글에서 3천명의 미국 기업가들에게 최초의 위기 상태에 빠져든 이 나라에 차
관을 주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이 새로운 의자을 맞이하자마자 당원들의  약 절
반정도가 떠나버렸지만, 후겐베르크는 끄떡도 안 하고, 자기는 양 많은 죽보다는 
작아도 단단한 벽돌 덩어리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가 준비한 국민 청원은, 새로운 과격 노선의 첫 번째 절정이었으며, 그는 흩
어진 우파들, 특히  철모단(재향 군인회), 모든 도이치 당원, 지주  연맹, 국가 사
회주의자들을 자기 지휘아래 한데 모아서 공격을  조직하려고 했다. 잃어버린 영
향력을 일부나마 옛날 상류층에 얻으려는 것이었다. 
  우파는 1918년 혁명이 기회를  놓친 덕분에 아직도 영향력, 지위, 물질적 수단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중을 자기 편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천민당 지도자게 
비해 자기가 '더 나은 신사'라는 건방진 태도로 후겐베르크는 히틀러가 선동가적 
재능을 지녔다고 믿었다.  사회적 망상 속에 격리된 보수주의 활동  쪽으로 대중
을 다시 불러들이기에 적합한 재능이었다. 히틀러를  이용하다가 때가 되면 그를 
능가해서 제압해버리면 될 것이라고 후겐베르크는 생각하였다.
  히틀러의 생각도 그보다 덜 음흉하지는 않았다.  하인리히 로제의원은 이 결합 
소식을 들었을  때 근심스럽게 말했다.  "지도자(히틀러)가 후겐베르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기를 바랄 수 밖에요."
  그러나 히틀러는 속을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근느  분명하게 오만불손한 
태돌 등장하였다. 그리고  괴벨스의 표현대로 이 모든  '좀먹은 잿빛 귀족계급'과 
부르조아 반동분자인 후겐베르크에 대한 경멸감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당내 '좌파'가 시술ㄱ게 관찰하는 가운데 그는 상대방이 요구하는 모든 야오를 
철저히 거절하였다. 자기가  어떤 조건 아래서 그들을 도울 것인지  스스로 결정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따로 추진하기를 제안하였으나 마침내  연합활동에 동
의하였다. 물론 그는 선전을 위해서 완전히 독립성과, 준비된 재원 중의 상당 부
분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동지들을  일부러 혼란케 하거나  아니면 기를 
꺾을 셈으로,  자기 휘하의 가장 유명한  자본주의의 적, 그레고어 슈트라이서를 
공동의 재정 위원회에 자기 측 대표로 임명하였다.

    전략가 히틀러
  후겐베르크와의 동맹은  히틀러를 마침내 목적지를 데려다  줄 계속될 전략적 
승리 중에서 첫 번째  승리였다. 상황을 인식하고, 어디에 이익이 있는지 꿰뚫어
보고, 약점을 찾아내고, 순간의 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히틀러의 비상한 능력이
었다.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기에  더욱더 효과적인 이런 전략적 감각은, 연설 능
력, 군부, 산업체, 법, 갈색 부대 테러 등과 함께 그의 성공의 이유가 된다.
  히틀러의 출세 이야기에서 마적인 음모 혹은 완력의 요소를 지적하는 것이 한
동안 유행하였다. 그것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모든 반
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국가 사회당의 당수를 북치는 사람, 도구  등으로만 생각
하고, 히틀러가 정치  영역에서도 능력을 입증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데서 나
온 것이다.
  히틀러는 전략적인 능숙함, 처음의 망설임, 부분적으로 도전적이고 부분적으로 
불만스러운 협상  태도, 그리고 정직함, 명예욕,  정력 등을 가지고  있단느 인상 
등을 통해서, 상대방이 자신의 출세를 앞세어  재정적인 후원을 해주도록 만들었
다. 그들은 물론 정치적으로 그런 후원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의 성공은 자기 
측의 저항을 통해서도 얻어졌다. 당내 저항 세력은  그에게 전혀 양보를 하지 않
았고, 슈트라서의  전투적 출판사가 내는 신문들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굵은 
난을 치고 굵은 활자를 히틀러의 말을 인용  보도하였다. 도이치 민족에 대한 가
장 큰 위험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시민 정당들이라고 했다.
  히틀러의 전략적 승리를  평가하려면, 권력에 굶주린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라
는 보수파의 맹목성도 읽어내야 한다. 이  보수파는 국가사회주의의 힘과 활동성
에 기생하여, 속으로 경멸하기도 하고 경탄하기도  하는 반항아 히틀러와 연합해
서 오래 전에  미리 확증된 역사와의 이별을 늦춰보려고 하였다.  그래도 히틀러
의 성공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4년 반 동안이나  그는 기다리면서 준비를 갖추었다. 칼 뤼거의  잊지 못할 교
훈대로 저 '강력한 기관들',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과 연합하기 위
해서 애써왔다. 마침내 그런 제안이 나왔을 때  그는 지나친 권력욕의 인상을 만
들지 않도록 조심했다.  자신의 권력 장악 개념에 따라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
었지만, 오히려 냉정하고 자신감에 넘친 태도로 반응하고, 자신의 조건들을 내세
웠다.
  여러해 동안이나 눈에  띄지 않고 잠잠한, 아니면 비웃음이나 받은  과격파 정
당의 정상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개인적, 정치적 야심으로 삼아온  사람의 기분
을 짐작할 수  있어야만, 후겐베르크가 제안한 후원 약속이 그에게  얼마나 대단
한 의미르 가진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엉터리 혁명가라는 악명,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라는 악명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영향력 있는 시민 
후원자들에 둘러싸인 채 대중 앞에  나서서 존경 받는 유명 인사들의 평판을 이
용할 가능성을  돌려준 것이다. 그것은 전에도  한 번 가지고 놀아본  적이 있는 
기회였다. 이제 그는 그것을 좀더 신중하게 인식하는 확고함을 보여주었다.

    선전기구의 활용
  동맹체결과 동시에 국가 사회당은 처음으로 압도적인 선전기구를 펼쳐놓을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 비슷한 것은 독일이 한  번도 존재한 것이 없었다고 히틀
런느 어떤 편지에 썼다. "우리는 다른 어떤  정당도 한 적이 없는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헤집어 엎었습니다. " 그 오랜 기다림의 세월 동안 행동을 갈망하던 추종
자들의 분노가 이런 폭발로 분출된 것 같았다.
  민족주의 연합 파트너 중 누구도 국가 사회당의 거침 없고 날카롭고 선동적인 
재치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주 처으부터 국가 사회당은 영 안은  캠페인의 계기
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본적으로 이른바  무능과 배신에 
빠진 채 돈에만 관심을 갖는 '체제'를 소란스럽게 재판한다는 방향으로 선동하였
다. 히틀러는 11월 말 헤르스브루크에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독일 
붕괴에 대한 책임이 있ㄴ느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스러질 시간이 다가옵니다. 두
려운이 그들을 사로  잡을 것입니다. 그들은 재판관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
니다."
  후겐베르크와 다른 보수연합 동지들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거친 선동에 매혹
당한 채 자기들이  풀어 놓은 강력한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새로 부추기고 
용길르 주곤 하였다. 이미 오래 전에 자기들이  사태를 주도하고 있다는 눈먼 자
신감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캠페인이  외면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렵
지 않게 간파하였다. '도이치 민족의 노예화에  반대하는 법안'을 위한 초안은 국
민 청원을  위해 필요한, 유권자 10퍼센트의지지를  겨우 얻었을 뿐이다. 1929년 
12월 22일에  이루어진 국민 투표도  패배로 끝났다. 겨우  14펴센트의 찬성표로 
이번 국민 청원은 법안  통과 필요한 찬성표의 약 1/4 정도를 얻은 것에  불과하
였다. 그것은 일년 전에 의회 선거에 국가  사회당과 국가 민족당이 얻었던 표를 
하진 것보다 거의 5퍼센트나 적은 것이었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쨌든  큰 정치판으로 뛰어드는 마지막 통과 절차
였다. 후겐베르트 기업의  다양한 출판매제를 통한 후원 덕분에 그는  단번에 인
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방향을 잃고 흩어진 우파에  자신이 가장 강력한 에너지
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론에 '대단히 강력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
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당연하다는 듯이 건방지고 오만한, 아니면 어
리것은 태도로 당을 거부하던 성향이  이제 기대에 가득 찬 희망으로 바뀐 것이 
놀랍다." 고 했다.(언급된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다.)
  캠페인이 시작된 다음인 1929년  8울 3~4일에 그는 뉘른베르크에 전당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럼으로써 무엇보다도  자신의 보수 진영 파트너들에게  자기 당의 
힘과 파괴력을 보여주려고 했단느 추측이 가능하다. 그것은 전통적인 당 대회가, 
군사적으로 기획되고 연출의 규칙과  심리적 규칙에 따른 대중 집회로 넘어가는 
최초의 과도기 행사였다.
  숫자 정보가 맞는다면 약 20만  추종자의 30개가 넘는 특수 행렬이 독일 저국 
방방곡곡에서 이쪽으로 밀려왔다.  그들의 유니폼, 깃발, 악대등이  여러 날 동안
이나 뉘른베르크 시를 지배하였다. 장엄한 의식으로  축성을 받은 24개의 새로운 
연대기들 다수는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슐렌스비히  홀스타인에서 온 것들이었
다. 거창한 폐막식에서 약  6만 명의 돌격대 대원들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와전 
무장한 채로 세 시간 반 동안이나 행진 음악에 맞추어 히틀러 앞을 통과하는 분
열식을 거행하였다. 몇  개 부대는 이 며칠간의 쾌감에 빠져서  폭력적인 행동을 
하려고까지 했다.
  국가 사회당의  당내 과격파 건의의  배후에도 정부 참여를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금지'해야  한단느 분위기였다. 당을  '정치권력 쪽으로 데려다 줄'행동은 
모두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간결하면서도  독특한 말로 히틀러는 이런 건의를 거
절하였다. 히틀러의  합법화 노선은, 무엇보다도 빠른  속도로 커가는 당 군대의 
자신감에 의해서 거듭  위협받았다. 이미 그해 말에 돌격대 숫자는  방위군 숫자
와 같아졌다.

    재계화의 관게 구축
  후겐베르크와의 동맹은  히틀러에게 재계와의 광범위한  관계를 마련해주었다. 
재계는 여러  해 동안이나 슈트라이만의  외교 정책을 뒷받침해  왔으나, 지금은 
영 안에  정열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프리츠 티센 
같은 몇 명의  예외를 빼면 소규모 기업가들에게서만 물직적 후원을  받았다. 영
주들의 재산 몰수 문제에서 반사회주의적인, 사유  재산 옹호의 태도를 취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풍부한 재원에 접근할 길이 열렸다.
  연설금지 기간에도 그는 특별히 루프 지방을 차례로 여행하면서 수백 명의 대
개는, 회의적인 기업다들을 앞에 놓고 폐쇄적인  집회를 열어서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국가 사회주의는 사유  재산의 정열적인 
옹호자라고 주장하였다. 성공은 귀족의 증거라는 자기  생각에 맞게 그는 대기업
가란 지도하기  위해 태어난 더  높은 종족이라고 찬양하고,  전체적으로 자신은 
'기업주에게 불가능한 어떤 일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일깨웠다.
  그리고 뮌헨 사교계와의 관계도 다시 좋아졌다.  거기서 그는 언제나처럼 대단
히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엘자  브루크만 같은 여자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히틀
러를 '중공업계의 지도적인 사람들과 연결'시켜주는 것을 '생애의 과제'로 삼았다. 
1929년에 그녀는 늙은 에밀 키르도르프와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일생 동안 위를 
향해서 반대하고 아래를 향해서는 경멸해 온 이 거친 노인에게서 히틀러가 강한 
인상을 받았듯이, 키르도르프 역시 상대방에게 매료  당해서 한동안 그의 소중한 
후운자가 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생각을 팸플릿으로 쓰게 한 다음  그것을 개인 
비용으로 인쇄해서 산업가들 사이에 돌리기도 했다.  뉘른베르크 당 대회에 그는 
귀빈으로 참석하였고, 그  며칠동안 자신을 가득 채웠던 그 압도의  느낌을 절대
로 잊지 못할  것이라고 나중에 편지로 써보냈다.(키로도르프는  물론 다시 당과 
결별하였다. 당의  정강은 많은 점에서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934년에 재압 당했다.)
  1929년의 지방 의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이 모든 새로운 수단과 후원들은 내세
울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작센과 메클렌부르크 슈베린에서  국가 사회주의자들
은 봄에 이미  거의 5퍼센트의 득표를 하였다. 프로이센 지방  선거 진출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코부르크에서는 시장을 냈고, 투링겐에서는 빌헬름 프리크가 나와
서 국가 사회당 최초의 주 장관이 되었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 기도문을 학교에 
도입하고, 중앙 정부와 갈등을 만들어냄으로써 곧 자기 목소리를 냈다. 전체적으
로 자기 정당의 연합 정부 수립 능력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과시용 무대 장치
  과시적인 기질에 맞게 히틀러는  자신의 성공에 값비싼 배경 장치를 마련하려
고 했다. 그것은 다시  장래의 성공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안당사는 1925
년 이후 셸링 거리에 단순하지만 목적에 맞는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히
틀러는 프리츠 티센과 당원들이 모은 헌금으로 뮌헨의 브리엔 거리에 있는 바를
로브 궁을 사서 그것을 '갈색집'으로 개조하였다.
  건축가 파울 루트비히 트로스트와 함께 그는 뒤늦게 젊은 날의 꿈으로 되돌아
온 듯이 자신을 잊고 내부  설비를 구상하고, 가구며 문, 상감 세공 등을 스케치
ㅏ였다. 커다란 바깥 셰단을  올라가면 곧장 그의 집무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
에는 한두 개의 무거운 가구들 이외에는 오직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와 무솔
리니의 흉상, 플란더스  지방에서 리스트 연대가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등
만이 있었다.
  옆방의 고문관실에는 말굽 모양의 거대한 책상 주위로 붉은 모로코 가죽이 씌
워진 60개의 안락의자가 놓여있었다. 의자 등받이에는  당의 상징인 독수리가 새
겨져 있었고, 입구 양편에 있는 청동판엔느  1923년 11월 9일의 희생자들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방 안에는 비스마르크와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흉상이 놓여 있었
다. 이 홀은 원래의 목적으로 쓰이지 ㅇ고  다만 히틀러의 연극적 필요로만 쓰였
다. 히틀러는 오래 전부터 고문단을 두라는 모든 제안을 단호하게 물리쳐왔다.
  갈색집 지하에 있는 식당에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초상화 아래 '지도자 자리'
가 특별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몇 시간씩 부관들과  경건한 운전기
사들 사이에 앉아서  굉장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억누를  길 없는 수다 욕구를 
채우곤 하였다.
  그는 이제 개인적인  생활도 당의 자금 형편에 맞추었다. 1929년  이후에는 그
의 서류에서 상당히  불어난 부채의 갑작스런 이자 따위가 사라졌다.  동시에 그
는 윈헨의 상류 시민층 거주지인  왕자섭정 거시 16번지에 방 아홉 개짜리 큼직
한 집으로  들어갔다. 티르시 거리  셋집의 여주인라이헤르트 부인과  아니 빈터 
부인이 살림을 맡았다.
  이복 누이인 라우발 부인은 전처럼 윗소금간 기슭에 있는 바헨펠트 집 살림을 
맡았다. 조카딸인  겔리도 왕자 섭정 거리의  집으로 이사왔다. 그녀는 외삼촌인 
히틀러의 극장에 대한  열정으로 노래 수업과 연극 수업을 받았다.  숙질 관계에 
대한 소문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또한 비시민적인 자유와, 조카에  대한 애착 
속에 숨어 있는 거대하고 운명적인 삶의 연관을 소중하게 여겼다.

    후겐베르크와의 결별
  히틀러는 영 안에 대한  캠페인이 끝난 직후에위험 하지만 효과만점인 행동을 
통해서 새로 얻은 정치적 자신감을 알렸다.  후겐베르크를 둘러싼 보수파 파트너
들과 보란 듯이 관계를 끊은 것이다. 성의  없음, 약점, 국민 청원에 실패에 대한 
책임 등을 들어서  그들을 통해서 전혀 방해 받지  않는 그의 이러 배신 행동은 
그에게 한 번 더 전략적인 도움을 주었다. 갑작스런 방향 전환은 그가 '자본주의 
개새끼 후겐베르크'와 동맹했다고  비난하는(도이치 민족주의자들은 한결같은 우
월감에 잠긴채  히틀러가 당내 좌파와 겪었던  곤란이라는 측면에서 위원회와의 
갈등을 해석하였다. 물론 슈트라서 일파가 이  과저을 자신들의 승리라고 자랑ㅎ
다는 점도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레고어 슈
트라서는 위원회 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동맹의 종말에 적잖이 기여하였기 때문
이다.) 자기 진영의 불안한 비난을 침묵케 했을 뿐 아니라 공화국에 반대하는 우
익 진영 유일의  힘이라는 명성을 굳혀주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감당해야 할 
패배에 대한 책임을 부인 해버렸다.
  그와 같이 대담한 행동은 수적으로 여전히 열세인 작은 정당에는 거의 어울리
지 않는 것이기에  오히려 더욱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제 한 
번 일깨운 당 운동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라
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공격적인 의도에 알맞게  그는 중앙당을 새롭게 조직하였
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당  기구 제1분과(정치기구)를 맡고, 퇴역 대령 콘스탄틴 
히에를이 당 기구  제2분과(국가사회주의 국가=그림자 국가)를 맡았다. 괴벨스는 
전국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30년 2월 2일자 편지에서 히틀러는 '거의 예언
자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예언하였다. "길어봐야  2년 반이나 3년 안에... 우리 당
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계층으로 진출
  그는 후겐베르크와 결별한 뒤에  거의 중단하지 않고 변함없는 과격성으로 공
화국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계속하였다.  일년 전에 이미  당시 선전 
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서명을 받은 당 중앙의 지침서가 이른바 선전 활동의 
실천을 요청했다. 그것은 정치 선전의 새로운 전략을 표현한 것이다.   
  각 관구(지역구 혹은 히틀러 치하의 행정 구역)  조직은 조심스럽게 준비된 기
습적인 작전을  가지고 마지막 마을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갈 것. 
일주일 이내에 당의 모든 연설가는 수백 번의  행사에서 자기 능력의 '최후의 한
계까지' 다 쓸 것. 모든 도시와 지역은 이 기간 동안 히틀러가 손수 선정한 벽보
와 등사지, 삐라 등으로 완전히 넘쳐나도록 만들 것, '선전의 밤'을 조직할 것, 그
런 밤에는 악대의 행진곡에 맞추어 돌격대가 나타날 것. 돌격대가 "그 자리에 참
석하는 것말고 자체적으로 해도 괜찮은 일들은, 스포트 행사, 할인화, 연극 공연, 
노래, 돌격대 연설, 당  영화 상영 등이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1930년 6월  작센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은 그런 행사를 1천 3백 번 이상 치렀다.
  이러한 지방 투입은 특정한 사회 계층 안에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 특히 샐러
리 맨과 농부들을 상당수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렇게 강력하게 돌진해 들어
감으로써 당은 조합, 상공업 조합, 직업  조함 등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예를 
들ㅇ면 농톤에서 당은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농부들이 검은 깃발 아래 시위행진
을 벌일 때 처럼 긴급한  상황이 닥치면 '토지 개혁'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구호
로 맞서곤 하였다. 모든 것을 농부들의 잠재적인 반유대주의로 유도하였다. 어떤 
강습 지침서에 씌여진 바에 따르면 이 반유대주의는 '미칠 정도로 부추겨야'한다
고 했다.
  히틀러는 발터 다레라는 외국의 어떤 젊은 도이치 사람을 루돌프 헤스의 소개
로 알게 되었다. 그는 농업 정택에 대한  책을 완성해 1930년 3월 초에 출간하였
다. 이 책은 농부를 '민족의 가장 고귀한 계층'이라고 찬양하면서, 폭넓은 보조금
을 제안 한 것이었다.
  샐러리 맨들을  위해서도 당은 종전, 도시화,  사회적인 구조변화의 압력 드을 
가장 힘들게 겪은 이 계층에 널리 퍼진 일반적인 위기의식을 이용하였다.
  그에 반해 공장  노동자층은 처음부터 당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929년 초 
샐러리 맨과 농업  노동자들이 당에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이제  '모든 일하는 사
람의 정당'이라는 주장이  타당하게 되었다. 모든 계층이 몰려들면서 전국적으로 
작은 세포들과  후원 지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의  위대한 출발을 
위한 준비였다.

    검은 금요일
  이러한 성과들은 히틀러에  의해 쉬지 않고 추진된 당의 활동과,  또한 전통적
으로 분열된 우익의 어지럽고  감상적인 생각을 하나로 모아 전략적으로 강화하
는 히틀러의 능력 덕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그 사이 시작된 세계 경제 
공황 덕분이었다. 
  독일의 경제적 발전을  가능케 하고 특히 자치  단체의 경박스런 지출 경제를 
톡진시켰던 외국 차입금은  대부분 단기 차관이었다. 이제  불안해진 채권자들이 
차관을 회수하였다. 세계무역의 급격한 삼소로 인해  수출을 늘려서 이러한 손실
을 메울 전망도 없어졌다. 세계 시장 가격의  하락과 더불어 농업 경제도 위기에 
빠졌고 처음에는 지원금으로 근근이 꾸려나갔지만 지원금이 다시 일반적인 부담
이 되었다. 
  하나의 재앙이 다른 재앙을 불러 말 그대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주식 가격
의 폭락에 따라 실업자 수가 늘고, 작업  정지, 압류 등이 늘어났다. 신문마다 난
을 나누어서 강제 경매 공고가 나왔다. 정치적 반작용도 없을 수 없었다. 1928년 
선서 이후로 나라는  사회 민주당의 헤르만 뮐러를  수반으로 하는 대연합 정권 
아래서 힘들게 갈등을  겪으며 통치되고 있었다. 세금 수입이 줄어서  이제 엄격
한 절약이 필요해지자 정부내 보수파와 좌파 사이에 누가 위기의 부담을 떠맡아
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다툼이 벌어졌다. 

    총체적 위기
  아무도 이 시점에선  무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명백해졌다.  독일의 위기
는 총체적이라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었다.  경게적이고 사회적인 동반 위
기 상황은 영국이나  특히 미국에서도 민감한 현상이었다. 다만 이  나라들은 정
치적, 도덕적,  지걱 척도가 무너지고, 모든  원인을 넘어서서 기존  질서에 대한 
신뢰의 위기, 포괄적인 의식의 위기로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 위기가 독일에 가져온  변화는 객관적인 경제적 조건들만으로는 충분히 파
악되지 않는다. 위기는 오히려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영원히 계속되는 곤궁에 지
치고, 전쟁, 패배, 인플레이션  등으로 영적인 저항력은 약해지고, 이성과 명료함
을 계속 호소하는 민주주의의 멋진 말솜씨에 완전히 넌더리가 난 상태에서 사람
들은 이제 감정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들은 처음에는 물론 이 파국의 숙명적이고 꿰뚫어 볼 길 없는 힘 앞에서 비
정치적이고, 체념한  태도로 반응하였다. 개인적인  생존이 지속적인 근심거리였
다. 매일  노동청에 가보기, 식품 가게나  긴급 구호소에 줄서기,  살아남기 위한 
비참하고 하찮은 고통들,  쓸쓸한 주점이나 길모퉁이, 어두운 집구석에서 쓰라린 
생의 감정을 안고 무감각하고 절망적으로 어슬렁거리는 것.
  1930년 9월의  실업자 수는 3백만 한계를  넘어섰다. 일년 뒤에슨  거의 450만 
명이 되었고 1932년  9월에는 5백만이 넘었다. 통계수치는 1932년 초에  이미 임
시 노동자를 빼고도  6백만 명의 실업자 수를 기록하고 난  다음이었다. 두 가구 
중 한 가구가 실업을 당한 꼴이었다.  1500만에서 2천만 명의 사람들이 지원금에 
의지하였다. 미국 기자인  니커보커의 계산에 따르면, 구호 대상자가 지언금으로 
ㄱ어죽기 위해서는 10년 쯤 걸릴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 있기에 충분하
다고 할만큼, 보잘 것 없는 액수였다.
  전체적인 낙담과 무의미의  감정이 모든 것 위에 덮였다. 위기이  동반 현상들 
중에는 유례없는 자살 파동을 꼽을 수 있다.  그 희생자들은 처음에는 주로 파산
한 은행가와  실업가들이었지만 위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많은 중산층과 소시민 
계층 사람들로 번져갔다. 작은 상점의 주인들, 샐러리 맨, 연금 생활자 등이었다. 
그들의 예민한 계층 의식은 빈곤을 단순히  결핍으로만 여기지 않고, ㄱ사회적인 
계급 추락이라는, 훔위 손상  표지로 받아들였다. 때때로 온 가족이 함께 자살하
였다. 
  출생률이 떨어지고 사망률은 증가하면서  20개 대도시의 주민수가 줄어들었다. 
혼란된 그림의 전체 모습과  타락한 자본주의의 그로테스크한 비인간성은 한 시
대의 몰락이라는 자의식을 만드어냈다.  말기적인 분위기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전체적인 세계 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는  마음과 비합리적 동경이 깨어났다. 
야바위꾼, 점설술사, 예언가, 손금 보는 사람들, 영매들이 판을 쳤다. 기도는 아니
라도 거의  종교적인 감정들을 쳐주는,  그리고 분명하게 은총의  눈길이 끌리는 
곤궁의 시간이었다. 은총의 현상이란 인간의 일만이 아니라 규범, 질서, '정치' 이
상을 약속해주는, 즉 잃어버린 생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을 뜻하였다.

    대중정당으로 출발
  히틀러는 다른 누구보다 본능적으로 이러한 욕구를 파악하였고 사진에게 유리
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의미에서 그의 시간이었다. 지
난 시절에도 종종  나타나곤 하던 게으름의 발작, 개인적인 영역으로의  후퇴 성
향 등의 단번에 극복되었다.  그 동안에는 그의 열정에 적합한 계기가 부족했다. 
도즈 안, 점령군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 등은  적합한 공격 대상이 목 되었다. 
이러한 사정들과 자기가  불붙이려는 흥분 상태 사이의  불균형을 피할 수 없었
다.
  그러나 마치내 그는 자신의  선동가적인 활동에 극적ㅇ니 배경을 제공하는 파
국의 무대 장치가  세워진 것을 보았다. 그의 선동에서 고정적인  부분들은 파국
의 무대 장치가  세워진 것을 보았다. 그의 선동에서 고정적인  부분들은 메르사
유 조약과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 의회 주의, 프랑스 군의 점령, 자본 주의, 공
산 주의, 특히 유대인의  세계 음모 등이었다. 이제서야 이러한 개념 하나하나가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는 현재의 불쾌, 비참과 아주  잘 결합될 수 있게 된 것이
다.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히틀러가  우세한 점은 대중의 개인적인 소망과 절망감
에 정치적 결정의 색채를 주고, 서로 대립적인  기대들을 향해 자신의 의도를 알
리는 능력에  있었다. 다른 정당의 대변자들은  당황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어찌할 바  모른다ㅡ 사실을 인정함으로써그들은 파국을  맞이한 모든 무기력한 
사람들의 연대감에 의지하였다. 
  그와 반대로 히틀러는 낙관적,  공격적으로, 미래에 대해 확신에 찬 모습을 보
여주었고 증오심을 키웠다. "내 생애에 한 번도 이 시절처럼 기분 좋고 내적으로 
만족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수많은 경계경보를 울리며 그는 계급 
추락의 공포에 사로잡힌  혼란된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우파나 좌파, 자본주의
나 공산주의에 똑같이 짓눌린 느낌을 갖고,  현존질서가 자기들을 원조하기를 그
만두었다고 비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정책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것을 거정하였다. 반자본주의적, 반프롤
레타리아적, 혁명적, 복고적인 것이었고, 냉정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동시
에 그 좋았던 옛 시절의 향수 어린  그림들도 불러냈다. 예전의 계층으로 복권하
기를 열망하는 혁명적인  분노라는 모순에 알맞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의도적으
로 모든 전통적인  대립들을 교차시켰다. 히틀러는 '체제'의  바깥 멀리에 과격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현재의 곤궁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고 동시
에 현존질서에 대한 자신의 판결을 정당화 하였다.
  그의 말을 확증시켜주기라도 하듯 의회기구들의 최초의 적재력 시험에서 실패
하였다. 위기가 아직 정정에 도달하기도 전인 1930년 초에 대연적이 붕괴되었다. 
연정 붕괴는 공화국이 종말 조짐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속으로 타고 있던 의
견 차이가 표면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실업자 보험의 부담 나누기  문제에 대한 
좌우익 정당의 사소한 의견 차이였다.
   사실 헤르만 뮐러 정권은, 거의 모든  정치 진영에서 돌발적으로 드러난 반대
편으로 도망치려는 경향에 부ㄷ쳐 깨진 것이다.  과격파로 넘어간 주민들은 사회
민주당과 도이치 민족당이 이미 보여준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반복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공화국이 가지고  있는 뒷배경이 얼마나허약한가, 그리고  충성으 기초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공화국이 몇  년 아에 상당한 성취르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취의 
색깔은 잿빛이었다. 가장  호경기 때에도 공과국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지루하
게 만들었을 뿐이다. 
  히틀러가 비로소 공화국 정치가들이  일상적 쓸모에 지쳐서 알지도 못하고 받
아들이지도 못했던 추진력을 가동하였다.  유토피아와 개인을 넘어서는 목적들을 
향한 충동, 너그러운 마음과 헌신 의지를 향한 욕구, 지도자의 모습을 향한 원초
적인 동경 - 꿰뚫어보기 어려운  현대의 권력 과정들은 지도자의 모습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되기에 - 그리고 현재의 난군에 대한 영웅적인 해석을 향한 열망 
등이었다.
  '제 3의 가치'라는 구호의 공허한 경제적 약속을 훨씬 넘어 방향감각을 상실한 
대중을 국가 사회당의  길로 끌어들였다. 히틀러는 이제 대중 정당에  대한 망설
임을 없앴다. 처음으로 광범위한  당 조직을 위한 유연성이 입증되었다. 당 강령
이라는 쇠사슬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또한  특정한 계급적 제한에서도 자유로운 
상태로 국가  사회당은 극단적으로 대립적인 요소들을  힘들이지 않고 끌어모을 
수 있었다. 국가 사회당으 출신, 나이, 동기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여지
를 가지고  있었고, 당원의 이미지를 특정한  구조가 없으며, 엄격한 계급개념을 
모조리 부인하였다.
  히틀러 당을  단순히 경제적, 사회적  양상 아래서 반동적인  시민과 농부들의 
운동이라고 파악하고, 이러한  추종세력의 물질적 관심에서 그  역동성을 해석하
려고 한다면 히틀러 당의 상승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영세한 공장경영자, 농부, 대기업가, 소비자 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에 필
요불가결한 사람등이었는데 이들 사이의  다양한 대립이 벌써 계급 운동의 가능
성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모든  정당이 부딪쳤던 한계이기도 했
다. 계급적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고, 가장 힘든 경제적, 사회적 비
참의 시기에 모든  계층을 향한 공허한 약속이라는  전략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너무 많은  전문자들이 있었기에 아무도 속일 수 없는  문제였다. 물질
적인 소망에 관계하려고 하면  곧장, 임금은 높이고 물가는 낮추고, 배당금은 늘
리고 세금은 줄이고, 연금은 높이고 관세도 높이겠다고 약속하고, 농산물 생산이
라는 측면에서는 생산자들에게는  높은 가격을, 소비자들에게는 낮은  가격을 약
속해야만 대중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의 기술은, 열광적인  호소로 경제적인 모순들을 뛰어넘고, 적들과 분리
시켜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만 물리  관심을 이용하는 것이었
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이나 편한 생활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것만
을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사회주의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
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 수백만 명이 실업  수당을 받고 입을 것도 없는 처
지라면 우리가 국가주의자다로, '독일, 모든 것 위에 독일'이라고 외칠 권리가 없
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국가사회주의의  엄격한 계급적 특성은 특히 마르크스주
의 역사학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의 우세함,  사람들의 태도가 오직  경제적인 동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조재를  위한 초개인적인 동지를 가지려는 
그들이 욕구에 기댔다. 그리고  계급차를 뛰어넘는 '제3의 가치'를 믿었다. 즉 국
가적인 명예, 위대함, 결탁, 희생의 각오라는 구호들이 가지는 힘을 믿었다. 아무
런 이익도 없는  헌신의 각오를 믿은 것이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우리는 벌써 행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당의 대한 공감과 당에 몰려드는 세력은 여전히 중간층에 제한되어 있
었다. 그들은 기본적인 정치적 관념을 가졌고, 옛날부터 존재기반에 문제가 많아
지면 복잡하지 않고 냉정한 질서의 안정감 속으로 도망치려는 성향을 보였던 계
층이다. 그들의 소원,  원한, 관심은 현존하는 정당  영역에서 정확하게 대변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공화국 체제가 그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했다. 굶주림과 
두려움을 통해서 목적 없이  흔들리던 그들은 다시금 '자기들의' 당을 찾게 되었
다. 히틀러와의  만남에서 그들은 엄청난 선동가의  힘에 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운명 같은 것에 압도되었다.
  히틀러도 계급 추락의  두려움에 압도된 시민이었고, 수많은  시민적인 야심에 
패배한 사람이었다. 그후 그는 정치에 들어왔고, 그것이 그를 해방시키고 출세시
켰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정치가 그와  같은 마법으로 자기들에게도 작용하기를 
갈망하였다. 그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운명을 신격화 한 것이었다. 
  대중 정당으로의 출발  시기에 국가 사회당을 이끌어가고, 그 기간  동안 당의 
사회적 이미지를 주로 결정한 것은 이  '침몰하는 중간층' 이었다. 경제적 곤궁이 
직접적으로 국가 사회당의 구호들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었고 생각하는 것은 물
론 잘못이었다. 히틀러 당은 불황이 가장 깊이  타격을 입힌 대도 시와 산업지역
이 아니라 소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
로 흠을  입지 않은 질서라는 배경에서  보면, 비참의 침입은 어느  정도 곤궁과 
친숙해 있던 대도시보다 훨씬 더 원천적이고  파괴적으로 지방에 타격을 입혔다. 
여기서 혼란이라는 개념은 공산주의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었다. (립세트는 어떤 
조사에서 국가사회당의  이상적인 투표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중산층의 
자영업 개신교도, 농장이나 작은 마을에 살고, 전에는 대규모 산업체와 노동조합
의 영향에 반대하는 정치적 중간층이나 아니면 지역정당을 지지했던 사람") 
  위기가 진행됨에 따라 국가  사회당은 노동자 계층에서 최초의 성과들을 얻었
다.  기업세포조직(NSBO)을 동원해서  이른바 '기업  공산주의'를  극복하겠다는 
('나치 세포가 없는 일자리는 없다'고 괴벨스가  적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구
상은 전체적으로 실패하였다. 히틀러가 광범위한 국가  사회주의 노동 조합 조직
이라는 생각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의 예는 그에게 하나
의 정당이 어떻게 노동 조합과  동맹을 맺고 세계혁명이라는 이념을 얻을 수 있
으며, 그리고 나서 월급봉투 문제에 사로잡혀서  인류의 해방을 시야에서 놓쳐버
리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 것 같다. 
  어쨌든 사회 혁명적인  노동자당이 '반유대주의 소시민 정당'의 골짜기로 추락
하는 위험을 막으려는 나치 잔류 좌파의 시도를 그는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단 
한명의 노동자를 얻는  것은 열두명의 각하들이나 '높으신' 나으리들이 입당선언
을 하는 것보다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다."고 그들 중 한 명은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다시 자신의 생각으로 성과를  얻었다. 계급의식을 내세운 노
동자들에 대해서 국가사회당은  오랫동안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는데, 이
제 실업자 수가  증가하면서 그것이이루어졌다. 실업자의 이상적인  수용 그릇은 
특히 돌격대였다. 함부르크에서는  4500명의 대원 가운데 2600명이  일자리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거의 60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치다. 브레슬라우에서는 심한 
서리가 내렸을 때 중대 하나가 신발이 없어서 시찰을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조용한 내전
  실업자가 일주일에 두  번 나가야 하는 실업  확인소 앞에서 조직적인 신참자 
모집 부대가 당사자들이 근심과 곤궁에 알맞게 만들어진 선전지 <실업자>를 나
뉘주고 거기 늘어서 있는 사람들과 긴 토론을 벌이곤 하였다. 
  자기 영역에서  나치의 도전을 받았다고 생각한  공산주의자들이 반대 활동을 
벌이면서 주먹다짐과  거리 싸움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점차 양측에  더 많은 
사람들이 투입되면서 '조용한  내전' 상황으로 넘어갔다. 이런  내전 상태는 1933
년 1월까지 얼마간 끊이지  않는 피의 흔적을 남기다가 한편이 권력을 잡으면서 
갑자기 끝났다.
  1929년 3월의 디트마이셴에서  이미 괴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이 경
과하는 동안 두 명의 돌격대원인 농부 헤르만 슈미트와 소목수 오토 슈트라이벨
이 죽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때부터 대립은  점차 대도시로 퍼졌다. 대도시의  노동자 구역, 뒷골목 등이 
이 작은 전쟁의 어두운 배경이었다. 전쟁은  구석징 술집이나 지하술짐을 거점으
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돌격대 술집' 이라는  것으로 그것은 어떤 동시대인이 표
현한 것처럼 '전투지대의 방어진지'였다. 특히  대도시에서 돌격대와 공산당 전투
조인 붉은 전선 연맹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지곤  해서, 이따름 거리 전체를 소란
스럽게 만들고 전투와도 같은 소음으로 가득 채우며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곤 했
다. 종종 중무장한 경찰 부대를 대규모로 투입해야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칼 마르크스를 집어삼킨다!'
  베를린은 이제 점점 더 국가 사회주의 권력  장악 전략의 중심지가 되었다. 공
산주의 계열 당들이 옛날부터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전통적인 좌경 도시는 합법화 전략을 위해서 정복해야만 할 보루였던 것만이 아
니다. 국가 사회당은  베를린에 얼마 안 되는 도당을 거느린  괴벨스라는 인물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빨갱이'들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자만하고 있는 자기
들 힘의 중심부인 베를린에서  그들을 쫓아낼 만한 에너지와 뻔뻔스러움을 갖춘 
인물이었다. 
  '아돌푸 히틀러가 칼  마르크스를 집어삼킨다!' 는 것이 그가  싸움을 개시하며
서 내세운 대담한  구호들 중 하나였다. 국가 사회당은 그때까지  시민적인 교외 
지역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싸우면서  지부를 이끌어왔다. 
괴벨스는 이 교외에서 나와  도시 북부와 동부의 비참한 프롤레타리아적인 구역 
한 가운데로 대원들을 몰고가서  거리와 기업들을 장악하고 좌익에 시비를 걸었
다. 
  더블 단추가 달린 가죽 재킷을 입은 창백하고 수척한 그는 그 시절 인물 유형
에서 가장 특징적이 인물의 하나였다. 실망한  대중에게 너무 오랫동안 세계혁명
의 흉내만 보여오 좌파의 ㅜ안감은, 베를린  공산당 지도부가 1928년 8월에 괴벨
스식 경쟁에 대해 반응하면서 유명해진 구호에  잘 드러나 있다. "공장에서 파시
스트을 내몰아라! 어디서 만나든 그들을 패줘라!"는 구호였다.
  히틀러의 예에 따라  괴벨스는 적이 보인 모범을  보고 실천 방안을 발저시켰
다. 구호 합창, 악대 행렬,  대규모 시위, 아파트 문 앞의 소품 판매 행위 따위는 
사회 주의 정당의 선정  방법에서 얻어다가, 히틀러가 발전시킨 '위대한 뮌헨 스
타일'과 합친 것이다. 괴벨스는 당의 촌스러운 면모에다가 새로운 계층이 가져온 
대도회적이고 지적인 특성들을 가미하였다.
  그는 청중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신력이 풍부하고 뻔뻔스럽고 시니컬 
했다. 공화국의 구호인 "모두 공화국을  보호하라"의 머리 철자들을 모아서 유대 
말처럼 들리는 '샤드레(Schadre)'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의 선전에 쓰인 '
베를린 최고 악당'이란 말을 일종의 명예로운 타이틀처럼 자랑하고 다녔다.
  그리고 <공격>지에서 아주  꼼꼼하게 배열한 자살자 명단 위쪽에다가 아름다
움과 품위의 삶을 약속하였던 1918년 혁명시기의 구호를 이렇게 인용하였다. "아
름다움과 품위로 사는 이런 삶의 행복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
살자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적에게서 무제한 배울 각오가 되어있고, 권력에  따르는 건방진 태도와 잘난체
하지 않는다는  점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을 옛날  방식의 보수주의자들과 구별해 
주고, 그들의 노련함에 현대적인 면모를 부여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연한 일
이지만 시민적인 신문들보다는 극좌파 신문에 훨씬  더 주목하였다. 그리고 추종
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좌파 출판물에서 가져온  공산당의 훈령을 '주목할 만한 
구절들'에 싣곤 하였다. 공산당의  실천 방안에서 배운 것처럼 그들은 거칠게 등
장해서 상대방이 사기를  잃도록 만들려고 했고, 자기 편이 약할  경우에는 악의 
없는 이상주의의 결과로 돌리곤 하였다. 
  돌격대 지휘자 호르스트 베셀은  어떤 창녀를 놓고 공산주의 경쟁자와 다투다
가 부분적으로 질투심에  찬 상대방의 총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괴벨스는 멀쩡
한 태도로 '커다란 아이 심정을 가진 영웅' '그리스도 사회주의자'였다고 그를 추
켜세웠다. 붕대를 친친  감은 거리 싸움의 부상자들을 들것에 실어서  연단 옆에 
진열해 보여주는  것도 그의 호과  만점 무대 장치에  포함되었다. 디트마르셴의 
유혈사태에 대한  경찰 보고는 사상자의  선전에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피의 희생자를 내는 것이  히틀러 정당에 얼마나 효과적인 선전수단이었나를 확
인해준다. 그 결가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약 30펴센트 정도의  신규가입자들을 얻
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단순하고  늙은 농부 아낙네들이 갈색 앞치마에 갈고리 십자
가를 그려 붙이고 다녔다. 그러 노파들을 보면  금세 그들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
의 목표나  으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에서 정직한 모든  사람들은 이용만 당하고, 정부는 무능하고... 오직 
국가사회주의자들만이 자기들을  이런 비참에서 구해줄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

    독자적 형태의 청년운동
  국가사회당의 가장 특기할 만한 시작은 청년들  사이에 이루어졌다. 다른 정당
과도 달리 국가사회당은 청년세대의 기대와 희망을  이용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
운 일이지만 열여덟에서 서른 살의 세대는  현재의 대량실업사태에 직면해서, 명
예욕과 자기 입증  의지가 공허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위기에서 가장 심한 
상처를 입은 세대였다.
  그들은 과격하고  현실도피적이 되어서 거대한 공격적  잠ㄷ력을 가지고 있었
다. 그들은 주변세계, 양친의 집,   교육자들, 전래의 권위 등을 경멸하였다. 기성
세대는 오래 전에 물 건너간 옛날의 시민적 질서를 절망적으로 되찾으려고만 하
여다. "우리는 배후에 믿을 것이 없다. 그렇다고 부정하기에는 너무 건강하다!"는 
것은 어떤 시에 나오는 말이다. 
  지적인 청년층에서도 같은 분위기였다. 독일은 전쟁에  패했을 뿐 아니라 혁명
에도 패했으니 지금이라도  그것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젊은이
들은, 무기력을 찬양하고, 허약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민주주의의 타협의지라고 
자랑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경멸하였다.  젊은층은 사회주의 국가의  유물론과 
'쾌락주의적인 이상들'을 거부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들을 가득 채우는 비극
적인 생의 분이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공화국과 아울러 전통적인 정당 유형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청년 운동
에 의해 일깨워져서 전쟁에서 전설적으로 확인된 '유기적인' 공동체 형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지겹게 옳은 척하는 얼굴을 한 전통적인  정당 당
수의 사진을 보면서 '노인제들의 지배'에 대한  운한이 불붙었다. 이 넓적하고 자
기만족적인 얼굴에는 시민 계층  젊은이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불안, 거대한 '시
대변화'에 대한 의식 등이 도무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공산당에 합류하였따.  그러나 공산당의 계급투쟁적인 편
협함이 많은 사람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ㅈ은이들은 다양하게 모자
이크를 한 민족주의 볼셰비즘 운동에 자기들의 부서진 꿈인 박사학위 시험의 표
현들을 주려고 하였다. 다수의  청년들, 특히 대학을 마친 청년들은 국가 사회주
의에 넘어왔다.
  국가 사회당은 그들이 자연스러운  대안이었다. 국가사회주의 선전의 흔들리는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혁명적인 어조를 들었다. 그들은  기율과 희
생을 구하고 있었다.  나아가 언제나 합법성이 가장자리에서 힘들게 움직이면서, 
가차없는 헌신의지가 합법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는 이 운동의 낭
만성에 이끌렸다.  그것은 당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투 공동체로서, 한 남자의 
전부를 요구하였고 부서지는 세계에  맞서 군인다운 새로운 질서를 내세우는 운
동이었다. 
  젊은 대원들이 몰려들면서 국가 사회당은 대중 정당 이전에 독특한 양식의 청
년 운동의 특성을 얻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 관구에서는 1925년에 당원의 2/3
가 서른살 미만이었고,  할레세거는 86퍼센트나 되었고, 나머지 관구에서도 수치
가 비슷하였다. 1931년에 베를린 돌격대 대원이 70퍼센트가 서른 살 미망이었다. 
당 전체로 이 연령층은 거의 40퍼센트에 이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사회 민주당은 그 절반 정도도  못 미쳤다. 사회 민주당 의원들의 
10퍼센트 정도만 마흔 살 미만이었다면, 국가  사회주의자 정당에서는 거의 60퍼
센트나 되었다.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자극하고 책임을 맡기는  히틀러의 노력은 
정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괴벨스는 스물여덟에, 칼  카우프만은 스물다섯에 관구 지도자가 되었고, 발두
어 폰 사라흐는 스물 여섯에 전국  청년단장으로 임명되었고, 히믈러는 스물여덟
에 친위대(SS) 전국 지휘자로 이명되었다. 이런 젊은  지휘자들의 무조건적인 헌
신과 변함없는 신념의  힘, 그들의 '육체적인 순수한  에너지와 투쟁욕'은 나중에 
그들 중 한명이 회고한대로  "당의 추진력을 오래된 시민 정당들에선 그 비슷한 
것도 내세울 수 없는 힘이었다. "

    브뤼닝 정권
  이 모든 표지들은 아직 당이 대규모의 비약적인 발정을 하기 이전인 1929년에 
이미 당의  구성을 특정지웠다. 그럼에도  당의 사회학적인 이미지는  어느 정도 
의도적인 요구와 숱한 통합구호 아에 흐려진 채 여전히 명확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러한 통합구호들  뒤에 숨어서, 정치 의식화된  노동자층을 얻으려
는 선정이 거의  성화를 보이지 않고, 국가 사회당이 대체로  원래의 지지기반에
만 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보려고 했다. 
  처음으로 국가적인 방해 공작이 나타났다. 1930년  6월 5일에 바이에른 주정부
는 단체복을 금지하였고, 일주일 뒤에 프로이센은 갈색 셔츠를 금지하였다. 그래
서 돌격대는 앞으로  흰색 셔츠를 입고 등장해야만 하였다. 다시  2주 뒤에 정부
는 공뭉원들에게 국가 사회당과 독일 공산당(KDP)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정부의 방어 의지는 늘어나는 소송 숫자로  나타났다. 1933년까지 약 4만건의 소
송이 이루어졌고, 14만 년의 징역과 거의 50만 마르크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런  몸짓도 '체제'에 분명히 스며  있는 허약함의 인상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대연정의 부끄러운 종말 이전에 이미  헌법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형식
상 헌법을 준수하고  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주변으로,  무능한 의원내각제를 
중단하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취하자는 생각이 흘러들어왔다. 
  대통령이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어디까지 저항을 했든 그는 새로운 정부 형성
에 처음으로 정열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개입하였다. 하인리히  브뤼닝을 수상으
로 선출한 것은  대통령이 장차 정부 업무에도  개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수상은 충성심,  성격의 엄격함, 의무의식 등을 낭
만적인 근엄성과 합친 사람으로, 언제라도 말없이  자기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
다. 
  힌데부르크는 자기  희생의 각오를 주변에  늘 요구해 왔다.  브뤼닝은 업무를 
인계받은 직후에, 실업자 수가  나날이 증가하고, 위기의 공포가 커가고 있던 시
점에, 의회 표결에서 패배를 겪더니 타협의  가능성을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서 
부당하게 서둘러서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내무장관 비르트는 반대파들에게 의회
의 위기가 체제의 위기에 이르지 않도록 승복하라고 하소연 하였으나 소용이 없
었다. 마치 민주주의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넌더리가 난 것 같았다. 새 선거는 
9월로 예정 되었다. 
  약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국가 사회주의 선전은 다시 불붙고 영 안에 반대
하는 싸움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저 날카로운 캠페인의  음조가 되살아났다. 
다시금 당의 선전지휘부가 몰려나와서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도시로 지방으로 흩
어져 들어갔다. 잠시도  중단하지 않고 거리 음악회,  스포츠 축제, 자전거 타기, 
소등 신호, 함께 교회 가기 등의 행사를  벌였다. 그들은 이성적일 줄도 알고, 과
격하거나 열광을 보일 줄도 알며, 상대방보다 더욱 민속적일 수도 있었다. 
  '인간 폐물을  쫓아내라! 그들이 낯짝에서  가면을 벗겨내라! 그들의  모가지를 
붙잡아라! 9월 14일에 그들의 기름 낀 배때기를 밟아주자, 그리고 영광의 빗자루
로 쓸어서 그들을 사원으로 쫓아보내자!" 전국 선전  책임자로 임명된 다음 처음
으로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괴벨스는 이렇게 썼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어리석은 열광'을 부정적으로 평가하
였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조차도 그들의 우세한 부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승
리를 확신하고 있었으면서 여전히 역사가 아니라  일상만 있는 것처럼 잿빛으로, 
별 기력 없는 활동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설자 코스를 마친 2,3 천명의 연설가들이 대규모로 투입되었다. 그들은 당의 
이념적 판단들을 원시적으로 배워 익혀서 떠드는 치들이라 거의 새로운 추종 세
력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수 많은 작은 선전꾼들이 때를  지어 몰려나오는 
것은 지치지 않고 활동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었고, 히틀ㄹ의 생각으로는 그것
은 광범위한 최면  효과를 가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실력을 입증한  관구 연설가
와 전국적 수준의  연설가들이 비싼 동을 들여 준비된 행사에  등장하였다. 프로
이센      내무부의 어떤 건의서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1천  명에서 1만 5천 명 
사이의 관중을 동원한 집회들은 대도시에서 매일  일어나는 현상이다. 미리 예정
된 집회 장소가 청중의 수에 맞지 않는 탓으로 하나 혹은 여러개의 동시 집회가 
열리는 경우도 많다. 
  지도자, 스타, 선거운동  조직자 등 모든 것의  정상에 히틀러 자신이 서 있었
다. 그는 바이마르의 대집회로 선거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로는 자동차, 비행
기, 철도를 이용하여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가 나타나는 곳은 어디든지 대중
이 모여들었다. 그가 계획도, 위기와 방어의  이론도 없었다고 해도 그랬다. 그러
나 그는 답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누구  책임인지 만할 수 있었다. 연합군, 부
패한 체제 정치자들,  공산주의자들, 유대인 등이었다. 그는  이러한 곤궁을 끝낼 
전제조건들도 알고 있었다. 의지와 자신감과 권력의 회복이었다.
  감정에 대한 호손느 언제나 제대로 작동하였다. "일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내개 
말하지 마십시오!" 도이치 민족은 일상의 문제로 망했다는 것이다. "일상의 문제
는 위대한 문제대 대한 시각을 흐려놓는 것입니다. " 그는 의회주의 체제 우기이 
이유로, 정당들과 그들의  목적이 지나치게 '일상적인 잡일'에  매달린 것을 들었
다. '사람들이  희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것 이상으로  잡일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주어신 처방을 따라서 당시의 수많은 불행들을  몇 가
지의 파악하기 위운  원인 탁으로 돌렸다. 무시무시한 배후 인물들이  음모를 꾸
미는 어두운 세계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면서 이  몇가지 원인들에 폭과 악마적 
후광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는 연설의 재능 못지 않게 장엄한 행사와 결연한 모습으로 효과를 만들어냈
다. 자신의 암시들이 표어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었다. 날카
롭고 지속적인 수많은 개념들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그가 퇴장한 다음에도 오랫
동안 통제되지 않는 의식의 심층부에 남아서 스스로  작용할 것이었다. 몇 주 동
안 그는 비상한  조직의 체험 이외에도 광범위하게  펼쳐진 맹열한 선거 운동에 
대한 심리적 기교를 터득하였다. 2년 위에 그것들이 이용될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선동의 에너지와 소란스러움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강령의 빈곤
은 국가사회당을 지속적으로 과소평가받도록  만들었다. 비판적인 동시대 사람들
은 우월감을  느끼며 국가 사회당을  약간 미친 시대의  소란스럽고 부담스러운, 
약간 미친 형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쿠어트 무홀스키는 히들러에  대해서 상당히 
정확하면서도 대단히 잘못된 평가를  하였다. " 그 남자는 전혀 없다. 그는 자기
가 만들어낸 소음일 뿐이다."(칼 폰 오이에츠키는 1930년 9월 선거 직전에 한 기
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 사회주의ㅣ 운동은 시끌벅적한  현재일 뿐 미래는 
아니다.") 
  형식적인 합법화 선언 뒤에 거의 숨김없이 드러나 있는 헌법에 적대적인 국가 
사회당의 특성을 밝혀 보인 내무부 건의서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 대
신 너무 빨리 성장한 정당 내면의 모순,  당 지도층의 지적인 평이함, 조잡함, 명
예욕 등에 자기 파괴적인 폭발물질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만 여겼다. 

    오토 슈트라서와의 결별
  이러한 기대는 1930년 여름에 국가사회당을 한 번 더 지속적으로 뒤흔든 위기
를 통해서  확인된 듯이 보였다. 뒷날의  관찰을 통해 그것은 당의  기강 확립과 
타격력에 도움을 준 숙청활동이었다.  사방의 격앙된 환호를 받으며, 점점 더 마
비시키며 다가오는 떨림  속에서, 되풀이될 수 없는 시회를 포착한  히틀러는 당
내 최후의 비판 세력과  독자적인 반대파를 숙청함으로써 스스로 무장을 갖추었
다. 
  처음에 그는 점차  모순 속으로 빠져들고 있던  당내 좌파에 대립을 강요하며 
계속 뒤로 밀쳐냈다. 국가사회당이 변두리 정당으로 남아있고, 오직 소동을 일으
켜야만  사람들 눈에 띄고, 의회나 정부에서  자기들의 원칙을 실천할 처지에 있
지 않은 동안에는 이념상의 의견 차를 그럭저럭 감출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지방선거의 성과는 계속해서 적절한  자기 해명을 요구하였다. 오
토 슈트라이서와 투쟁 출판사를 중심으로 한 그늬 추종 세력은 언제나 되풀이해
서 히틀러의 합법화 노선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격적인 '파국 전략을 찬성하였다. 
그들은 우악스러운 반자본주의를 자랑하였고, 폭넓은 국유화를 연설하였으며, 소
려과의 동맹을  촉구하고, 당 노선을 벗어나서  지방의 파업 활동을 지워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행동으로 그들은 방금 만들어낸, 당에 많은  이익을 가져
다주는 재계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강령을 확립하려는 과
격한 성향으로 히틀러의 전략인 강령 회피와 모든 계층을 향한 개방성을 어지럽
게 뒤흔들었다. 
  1월에 이미 국가사회당의  지도자는 오토 슈트라이서에게 투쟁 푸류ㅏ사를 내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앞 뒤  다르게, 온갖 아첨과 협박과 매수를 동시에 시도해 
보이다가 다시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반항적인 동지를 뮌헨 중앙당의 언론 총
책임자 자리에 임명했고, 출판사를 위해서는 약 8만 마르크를 제공하려 했다. 그
는 옛날 군인이며 오래된 국가 사회주의자인 슈트라서를 지원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슈트라서는 자신만이 참된 국가사회주의 이념의 승리자라고 여기고 모
든 제안과  위협으 거부하였다. 원칙적인 문제에  대한 다판이 1930년  5월 21일 
~22일에 당시 히틀러의 베를린  본부였던 링크 거리의 '상수시' 호텔에서 벌어졌
다. 막스 아만,  루돌트 헤스, 오토 슈트라서의 형 그레고어  등이 지켜보는 가운
데 두 적수는 일곱 시간 동안 흥분해서 각자의 주장을 주고받았다. 
  이 대화는 슈트라서의 수기에 기록되어 남았다.  뒷날 원탁에서 말없는 절망이
기도 했던 독학자의 광범위한 태도로 히틀러는 이 대화를 예술에 대한 설교조의 
표현으로 시작하였다. (예술은 혁명적인  단절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예술'로 존
재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것은 그리스, 북유럽적인  것뿐이다. 나머
지 모든 것은 오류이다. ) 그리고 나서 개성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종족, 
세계경제, 이탈리아 파시즘을 논하고,  그런 다음에는 처음부터 드러나 있던, '빌
라도 문제'인 사회주의 문제로 넘어갔다. 
  그는 슈트라서가 이념을 지도자보다 높은 자리에 둔다고 비난하였다. "모든 당 
동지에게 이념을 결정할 권리를 주고, 심지어는  지도자가 이른바 이념에 충실한
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할 권리까지도 주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  당에서 아무
런 의미도 없는 가장 나쁜 민주주의다. "라고 그는 흥분해서  외쳤다. "우리 당에
서는 지도자와 이념을 스스로 구현하고 있는 지도자가 명령하는 것을 따라야 한
다. " 그리고 자기는  동지들의 기율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당 조직이 '몇몇 
망상적인 문사들 손에 망가지도록 맡겨 둘'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서열적인 관계 이외의 인간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히틀러의 무능이 이대면에
서처럼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없다. 그는 지적인 반성의 경우에도  그렇듯이 모
든 생각, 모든 반대에 대해서 권력  문제를 마주세웠다. 누가 배치권을 가지는가, 
누가 명령하는 사람이며 누가  명령을 받은 사람인가? 모든 것은 지배자와 하인
의 대립으로 축소되었다. 거칠고  교육받지 못한 대중이 있고, 대중을 자기의 도
구와 조작대상으로  삼는 위대한 인물이  있다. 이 대중의  합법적으로 보호하고 
돌보려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 그것이 그의 생각에 따르면 사회주의였다.
  그가 시민적 반동세력과의 새로운 관계를 배려하느라 당의 혁면적인 사회주의
를 방해한다고 슈트라서가 비난하자 히틀러는  격분헤서 대답하였다. "나는 사회
주의자요. 예를 들면 재산이  많은 레벤틀로브 백작과는 달라요. 나는 단순한 노
동자로 출발했소. 오늘날에도  내가 운전기사와 다른 음식을  먹는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지만 당신이 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이해하ㅡ  것은 다만 극단적인 마르
크스 주의일 뿐이오. 노동자들은  대개 빵과 놀이 밖에는 구하지 않아요. 그들은 
어떤 이상에 대한 이해력이 없어요. 우리는  상당히 많은 노동자들을 얻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소. 우리는 그 어떤 도덕적 연민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신들이 
더 나은  종족이라는 이유에서 지배  권리를 분명히 확신하고,  광범위한 대중에 
대한 지배거ㅜ을  가차없이 내세우고 확보하는 새로운  주인 계층을 선별하려는 
것이오... 당신의 체계는 실제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탁상공론일 뿐이오."
  그는 자신의 출판사를 향해 말했다. "아만 씨, 당신은 속시 타이피스느가 갑자
기 당신의 말에 끼여드는  일을 참겠습니까? 생산품에 대한 책임을 지는 기업가
가 노동자들에게도 빵을 분배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기업가들은 돈을 긁어 모으
는 것, 잘사는  것 등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책임과 권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죠. 그들은 자기 자신의 쓸모로 해서 정상에 올라선 것이며, 더 높은 종족이 
입증하는 이러한 선별을 근거로 지도할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흥분된 토론을 마친 다음에 슈트라서가 그에게,  권력을 차지할 경우 생산체계
는 변하지 않는 거냐고 물었을 때 히틀러는 대답하였다. "그야 물론이죠. 당신은 
내가 경제를  방해할 만큼 돌았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국가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경우에만  국가가 개입할 것이오. 그렇다고 재산 몰수나  공동 결
정권이 필요한 것은 아니죠."
  현실적으로는 오직 하나의 체제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로는 책
임을, 아래로는  권위를'이라는 것이 수천년  전부터의 체계였으며,  지금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주변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극적으로 서술한,  상세한 
묘사. 전체적으로 대화의 진술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는 없다. 바로 뒤이어서 확
인된 비망록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수많은  발언에 나타난 히틀러의 주장
들은 다른 곳에서도 일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사회주의
  히틀러의 사회주의 개념에서는  인간적인 추진력도, 사회의 새로운  구상에 대
한 필요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자신이 확인한 것처럼 그의 사회주의는 "경제생
활의 기계적인 구조완느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주의'라는 단
어에 대한 보충 개념으로 개인에 대한  전체의 책임을 뜻한다. 반면에 '국가주의'
는 개인이 전체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국가 사회주의에서 이 두 가지
는 합쳐진다는 것이다. 
  이런 술책은 모든 이해 관계를 도와 정당성을 갖도록 해주고 개념들을 도박의 
칩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렸다. 히틀러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가 우선 성취되었다. 
사회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아래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국가 
사회주의는 권력 전략을 고려해서 좌익의 표지를  내걸었다. 그것은 안으로나 밖
으로나 강력한 국가를 요구하였으며, '익명의  대중' '영원한 미성년자 다수'에 대
한 확고한 지휘를 요구하였다. 
  당  역사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든 1930년에  국가 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
(NSDSP)은 히틀러의 생각에 따르면, 인기 있는 단어의 분위기를 이용하기 위해
서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그리고  역동적인 사회적 힘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
당'이기도 했다. 전통, 보수적 가치관이나  기독교에 대한 고백처럼 사회주의적인 
구호들도 조작이 가능한 이데올로기적인 전진기지였다. 
  그것은 위장, 교란 등에 이용되고, 기회에 따라 번갈아 표어를 바꿀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열광하여 입당한 어떤 젊으이는 괴벨스와  이야기 하는 중에 당 지휘
부가 강령의 언칙들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를 경허하였다. 페더의 농
노제도 중지는 사회주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말을  했다가, 그런 헛소리를 경청하
는 사람은 걔져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오토 슈트라서가 자신의 주장에 들어 있는 불합리성과 개념 조작을 그토록 당
당하게 밝혀낸 것이  히틀러의 마음을 대단히 상하게 만들었다. 아무말  없이 그
는 뮌헨으로 돌아와서,  그런 대립의 경우에 보이는 방식대로 여러  주 동안이나 
전혀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슈트라서는 불확실한 상태였다. 그가  "장
관 자린가 아니면 혁명인가?"라는 소책자에서  논쟁의 경과를 묘사하고, 당 지도
자 공동의 이념에 들어있는  사회주의 핵심 부분을 배신하였다고 비난하자 히틀
러는 반격하였다.  노여움이 너무 커서  문체상의 실수까지 보이는  편지를 써서 
그는 베를린 관구 지도자에게 슈트라서와 그의 추종자들을 즉각적으로 제명시키
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여러 달  전부터 나는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핵임있는  지도자로서, 당내 
운동 계역 속으로 불일치, 혼란, 기율 없음 등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주시해 왔
습니다. 사회주의를  위해서 싸우려 한다는 가면을  쓰고서 우리는 유대, 자유주
의, 공산당 적들과 똑같은 정책을 추구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들 그룹이 요구하는 
일은 바로 적들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을 해체시키는 이 요소들
을 가차 없고  예외 없이 당에서 쫓아내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운동의  본질적인 내용을 정했고 만들어놓았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 운동의 근간으로 삼았고,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감옥에서 
고생했던 것이며, 단절에서  그것을 끌어내어 오늘날의 이  높이까지 끌어올렸습
니다. 우리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운동의 바탕에 둔 본질적인 내용에 잘 
맞지 않는 사람은 이 운동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되고, 다시 이곳을 떠나야 합니
다. 국가사회주의 정당은  내가 지도자로 있는 한 뿌리 없는  문사들이나 혼란스
런 살롱 볼셰비스트의 논쟁 클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치적인 떠돌이의 공론
적인 어리석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계급  개념이 사라지게 될 독일의 
미래를 위해서 싸우는 조직체 입니다. 

  6월 30일에 괴벨스는 베를린 토끼숲 홀에서 관구 당 대회룰 소집하였다. "질서
에 편입되지 않는 자는 쫓겨나야 합니다!"라고 그는 외쳤다. 자신들의 견해를 밝
히려고 참석했던 오토 슈트라서와 그의 추종 세력은 돌격대에 의해서 강제로 홀
에서 쫓겨났다. 슈트라서  그룹은 '진짜배기 스ㅏ린 주의'라고  말하고 당 지도부
에 의한 의도적인  '사회주의자 탄압'이라고 떠들었지만 그들의 세력은 급격하게 
움츠러들었다.
  다음란 벌써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투쟁 출판사  신문의 발행인 자리를 내놓고, 
동생과는 극히 날카로운  형태로 거릴 두었다. 폰 레벤틀로브와 다른  유명한 좌
익 인사들도 이들 반란 그룹을 떠났다. 그러나  대대수는 의심할 바 없이 히틀러
가 그들에게 일깨우고  수많은 불충 행동들을 넘어서 지키도록  만든 '거의 도착
적인 충성심'으로 그런 행도을 하였다. 
  자신에 넘친 괴벨스는 당은  '이러한 태업 기도를 땀처럼 흘려 내보낼 것'이라
고 말했다. 7월  4일에 오토 슈트라서의 신문은 "사회주의자들이여, 국가  사회당
을 떠나자!"는 기사를  냈다. 그러나 거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에는 사회주의자가 거의 없었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행동은 이론적으로 해석하
려고 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었다. 
  오토 슈트라서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여, 처음엔느  '혁명적 국가사회주의자'
라고 칭했다가 나중에  '검은 전선'으로 불렀다. 그러나  문필가적인 분파 그룹이
라는 냄세를 아주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투쟁 출판사의 신문을 읽는  것은 히틀
러 당에서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종하하는 주제는 어차피 거의  주목을 받
지 못하던 참이었다. 
  지도부의 친숙한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은, 역사의 호소를 듣은 것처럼 보이는, 
확고하게 세계파국에 대항하는  싸움을 해온 국가사회주의 정당에는 현학적이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론적인  개념 논쟁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대중을 당의 강령이 아니라 히틀러라는  사람에게 희망과 치유의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 슈트라서의 탈퇴는 국가  사회당 내부에서 사회주의 원칙 논쟁을 끝냈을 
뿐만 아니라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는 엄청난 권력  상실을 의미하였다. 그 뒤로 
그는 집안의 배경도 신문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여선히 당의 전국 조직책
임자 자리에 있으면서 뮌헨에 거주하며 수많은 관계들을 장악하였으나 당원들과 
여론의 눈에서 점차 사라졌다.  반 년 전만 해도 <세계무대>지는 그가 '머지 않
은 장래에 주인인 히틀러를 구석으로'몰아 붙이고  스스로 당권을 장악할 것이라
고 예측했다.  지금 그는 권력을 잃어버리고  그럼으로써 2년 뒤의  패배에 미리 
도장을 찍은 셈이었다. 2년 지나서 그는  최후의 반항적인 몸짓으로 체념을 이겨
냈지만 결국 지치고 망가진 상태로 당에 등을 돌렸다.


=============================== 08
    슈테네스의 반란
  슈트라서 위기의 후유증으로 돌격대의 동부지역 부지휘자인 전직 경위 슈테네
스의 지휘 아래 있던 베를리 돌격대의 반란을  꼽을 수 있다. 당부대인 돌격대의 
불만은 사회주의 논쟁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정치기구(PO)측의 보스화, 
도당화의 표지들과, 힘든 선거운동에 비해 낮은 보수 등과 관계가 있었다.  
  돌격대가 지쳐빠진 상태로  저녁마다 '뼈빠지게' 일하는 동안 정치기구는 사치
스럽게 치장된 궁전을 세웠다는 것이 자주  나오는 비난이었다. 갈색집에 돌격대
를 위해서 대리석과 청동으로 된 기념비가 세어졌다는 반박에 대해서 그건 오히
려 비석처럼 보인다고 대꾸했다. 정치기구에는 "돌격대는 오직 죽기 위해서 존재
한다."는 확신이 퍼져 있다고 어떤 돌격대가 지휘자가 썼다. 
  괴벨스는 슐레지엔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히틀러와 친위대(SS)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반항적인  돌격대가 며칠 뒤에  헤데만 거리에 있는  관구 사무실로 
밀려들어 왔을 때 히믈러의  검은 부대(친위대)와 최초의 유혈사태를 빚었다. 히
틀러가 나타나자  일시적으로 반란이 멎었다는 사실은  히틀러의 권위를 조명해 
주는 부분이다. 
  당연하지만 그는 처음에 슈테네스가 말하기를 피하고 직접 부대원들을 설득하
려고 했다. 무장  친위대를 대동하고 돌격대 지부의 술집들을 하나씩  돌면서 단
위 부대에  하소연하고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승리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혁명의 병사인 그들에게 합당한 임금을 약속하였다. 임시로 그는 
그들에게 법률상의 보호와 더 나은 보스를 약속하였고 그 돈은 당원당 20페니히
씩 돌격대 특별세를 거두어서 중당하였다.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친위대는 자기
들의 표어를 얻었다. "너의 명예는 충성!"
  반란의 종결은 돌격대 최고 지휘자 폰페퍼의  사임을 뜻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저항 했지만 점차 체냠한 태도로 돌격대의 분명한 영향력 감소와 맞물린 정치기
구의 권력 증대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무게 중심 이동의 원인들  중에는 무엇보
다도 히틀러가 자기 주면에  만들어낸 비잔틴 양식, 곧 아침의 선호 때문이었다. 
대중의 환호가 나날이 자기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을 의식하면서 군대식 서열의
식을 가진 돌격대 지히자들보다 그러한 욕구에 더 잘 적응하였다. 
  그 결과 정치기구는 얼마 안 되는 돈을 분배할 때나 대의원 명단을 작성할 때
마다 다른 후견 활동을 입안할 때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갈 등의 배후에는 
엉터리 예술가인 남 도이치  보헤미안 유형과 다른 한편의 엄격한 '프로이센' 유
형사이에 존재한느 완전한  이질감도 작용하였다. 프로이센 유형은  폰 페퍼라는 
인물과 그의 협소한 지휘부 안에 한동안 더  남아 있었다. 돌격대 최고의 지휘자
의 계급상의 우어ㅜ감을  화난 눈초리로 지켜 보면서  히틀런느 때때로 그는 폰 
페퍼(후추)가 아니라 폰 퀘멜(퀘멜 열매)이라는 이름이 더 알맞을 것이라고 말하
곤 하였다.
  자눙에 1938년, 1941년에도  그런 것처럼 군사력고의 갈들이  일어나자마자 히
틀러는 8어ㅜ  말에 페퍼를 해임하고 직접  돌격대 최고 지휘자  자리를 맡았다. 
일상적인 지휘업무를 위해서 그  사이 볼리비아에서 군대교관 노릇을 하고 있던 
에른스트 룀을 불렀다. 히틀러는 그럼으로써  운동을 궁극적으로 지배하였다.. 폰 
페퍼가 발전시킨 돌격대의 특별 권리까지 이제 자기 안에 합치게 된 것이다.
  며칠 뒤에 벌써 히틀러는  모든 돌격대 지휘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충선 맹세'
를 의무화하였고, 이어서 모든 돌격대 대어ㅜ에게도 같은 의무를 부과하였다. 그 
밖에도 신규 가입할 때에 새로운 의무조항이 붙게 되었다 "모든 명령을 지체 없
이 확실하게 실천한다. 나의 지도자들은 불법적인  일을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항목이었다. 히틀러가 위기의 경과를  보고
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한 <민족 관찰자> 기사에는 '나'라는 말이  131번이
나 나온다.
  
    지도자와 교황
  히틀러의 절대적 요구가 그 사이 돌격대에서 아무런 반발도 일으키지 않은 것
은 기록할 만한  일이다. 제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당 운동은 마침에  도구적 구
조가 된 것이다.  히틀러는 과거의 모든 갈등에서도 그랬듯이 오히려  이 공격으
로 자신의 위치와 위신을 강화하였다.
  6월에 이미 그는 새로  지은 갈색집의 고문관실에서 몇 명의 선발된 당기자들
을 놓고 카톨릭 교회의 서열과 조직을 날카롭게 강조하면서 총체적인 당 지히ㅜ
방침을 발표하였다. 카톨릭 교회의 모범에 따라  당은 '민중 속에 서 있는... 정치
적 사제들이라는 광범위한  토대' 위에 피라미드적 지휘체계를 쌓아올린다. 그것
은 "단계별로 지역  지도자와 관구 지도자를 거쳐서  고문단, 그리고 최종적으로 
당 지도자 - 교황에 이르기까지 된다."
  한 참석자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관구 지도자와 주교, 장래의  고문관과 추기
경을 비교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아무 주저없이  종교적인 영역의 권위, 복종, 신
앙 등의 개념을 세속적인 영역에 혼란스럽게  섞여 받아들였다. 아무런 아이러니
도 없이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 자신은  "로마에 있는 교황이 
신앙 문에제 있어서 정신적인 - 아니면  종교적인이라고 해야 할까 - 오류 없음
에 대한 요구를 가진단느  사실에 이의가 없다, 나느 그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니까. 그런 만큼 정치는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교황도 앞으로는 나
의 요구에 대해서 이의를 갖지 않기를 바란다.  즉 나는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
을 이끌어감에 있어서 나 자신과 나의 추종자들에게 정치적인 오류 없음의 권한
을 요구하는 것이다. 세상이 교황의 요구에 이미  익숙해져 있듯이 이 요구에 대
해서도 즉시로 아무런 반대 없이 익숙해지기를 바란다."
  이런 발언 자체보다 더 사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당혹감이나 어떤 반발
을 보이는 반응이 일체 없었으며, 히틀러가  현학적인 에너지로 끈질기게 추구하
던 당내 복종 노선의 성과가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전제조건들
이 그  동안 그를 도와주었따. 당  운동은 점점 더 카리스마적이  되고 지휘권과 
신앙의 기율에 근거한 전투 공동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국가사회당은 이익과 당 강령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정당에 
비해 역동적인 자신감을  창출해ㅐ냈다. 동시에 당 운동은  '늙은 전사'들의 출신
과 경험을 토대로 하였다. 그들은 거의  모두 1차 세계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엄격
한 명령체계 속에서  형성괸 체험을 가졌고,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가정에서 이
미 엄격한 사관학교의  윤리관을 가진 교육방침에 따라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히틀러는 권위적인  교육체계에서 이익을 얻었다.  63명의 관구 지도자  주 20명 
이상이 교사 출신이라는 점은 우연 이상의 일이였다.
  1930년 여름 두 번의 당내  위기를 힘들이지 않고 조정하고 나자 국가 사회당
에는 히틀러가 나오지  않은 권한이나 권위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토 슈트
라서, 슈테네스, 혹은 폰 페퍼가 만들어내는 위험이 아무리 별 것 아니었다고 해
도, 그 이름들은 여전히 절대적인 권력 요구에ㅔ  제한을 가하는 이론적 대안 구
실을 하였다. 이제  남도이치 돌격대 대장 아우구스트 슈나이트 후버는  어떤 진
정서에 이렇게 적었다. 당 운동의 의미와 매력이  점차 커가는 것은 당 간부들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히틀러'라는 모토 덕분이다. 모두가 이  모토 아래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선전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리고  점점 더 의도적으로 종
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뒤섞은 가운데  '지도자'는 모든 반성, 비판이나 당내
의 표결 결과가 전혀 닿을 수 없는  고독한 기념비적 영역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관구 지도자와 갈등을 겪게 된 어떤 추종자 한 명이 그에게 하소연하자 그는 불
쾌한 어조로 이런 답장을 써보냈다. 자신은  당의 '하인'이 아니라 그 창설자이며 
지도자다, 모든 불만은 '나를  당신 가까이에 있는 당의 냄새만 피우는 사람보다 
더 눈이 멀었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이나, '가혹함' '뻔뻔스런  건방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사회당  기관지는 이제 오직 히틀러의 신격화, 유대인 공
격으로만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고 이 무렵의 어떤  관찰자가 적었다.(당 연설가 
헤르만 프리드리히는 공산당에서  국가사회당으로 옮겨와서 곧바로 여기 언급된 
히틀러와의 대립에 빠져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으로써  히틀러가 추종자에게서 멀어져서 지나치게 거리
르 둔다는 비난이 다시  강하게 일어났다. 슈나이트후버는 '거의 모든 돌격대 대
원'을 사로잡은  소외감을 표현하였다. "돌격대는  지도자와 더불어 그의 영혼을 
얻기 위해 싸웠으나 아직도 그 영혼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돌격대는 그 영혼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지도자를 향한 외침'은 메아리가 없다고 했다.      
  이미 전부터 개별적으로  등장하다가, 이제 괴벨스에 의해서  베를린에 도입된 
인사말이며 전투 명령어인 '하일 히틀러!(하일은 인사말에 쓰이지만 그밖에도 구
원, 안전, 건강, 이익, 행복 등을 뜻한다.)'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우연만이 아니
었다. 그 밖에도 행사 안내 벽보들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연설자를 알리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고, 그  대신 이름 없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지도자'라는 말만 등
장하게 되었다. 여행  중에도 그는 호텔 로비나 사무소 같은데서  흥분해서 자신
을 둘러싸는 당원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일가ㅗ 천박하게 알리려는 열
광에 넘쳐서 아는 척한느 것을 극도로 꺼렸다.  믿을 만한 당원들만 마지못해 소
개 받았고, 낯선 사람들과 친밀한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싫어했다.
  물론 그는 좌익의  특성을 극복해 버린 다음부터  유리한 특성들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판단에 따라서는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잡담을  나눌 수도 
있고, 소탈한 사람의 거친 태도로 노동자 동지와 이야기를 할 줄도 알고, 금발의 
어린이 얼굴을 향하여 아버지 같은 동지애를 보일 줄도 알았다. "잠잔 뺀 악수와 
눈을 올려뜨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고 당시의 관찰자가 지적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의도적인 허세가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어ㅓ 가까운 측근들
에게 감출  도리가 없었다. 끊임없이 그는  대중성, 감동적인 몸짓,  혹은 위대한 
몸직의 효과를 계산하였다. 아무도 자신의 이미지에  그토록 많은 주목을 기울인 
사람은 없었고  아무도 그처럼 의도적으로 자신을  흥미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단느 강박관념을 가졌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정확하게, 
그 시대에 스타의  유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장치가와  스타는 같은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민한 건강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리노 차
츰 술을  즐기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  두 가지 사실을 이용해서  그는 금욕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명성까지  얻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기 역할을  의식한 당시 
도이치 정치의 가장  현대적인 현상이었다. 민주주의적인 대중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그는 후겐베르크는 물론 브뤼닝에 이르는 자기 적수들보다 더 저오
학하게 판단하였다. 그들은 공적인 효과를 장악하지 못했으며, 출신과 과거의 사
정에 뿌리를 두고 사태를 판단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시간 이후로 아무도 히틀러에게 이렇다 할  만한, 입증 가증한 영향력을 행
사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디트리히 에카르트 시절, 그리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시절은 이제 아득한 옛날 일이었다. "나는 절대 잘못하지 않소! 내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역사적인 것이오."라고 근느 오토ㅗ 슈트라서와 최초의 담판 과정에서 소
리를 질렀다.  그가 '지도자 교황'의 모습으로  자신을 양식화 할수록  그의 학습 
욕구는 떨어졌다. 오직 경탄하는 사람들과 수행원들에게만  둘러싸인 채 그는 점
차 지적으로도 고립의 상태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젊어서 경탄을 보냈던 모범 인물인  칼 뤼거를 보면 그는 인간에 대한 염세적 
판단을 찬양하였따. 이제 그 자신이 적이나 추종자  구분 없이 인간에 대한 경멸
감을 거의 감추지 않았다.  보수적인 기본 본능에 맞게 그는, 인간이란 천성적으
로 약하다고 여겼고, 어떤  편지에서는 '땅 위를 어슬렁거리고 돌아 다니는 것들
'이라고 썼다. 그리고 "대중은 눈이 멀었고 어리석으며,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도 모른다."고 했다.

    선거전
  인간 경멸  못지 않게 그의 인간  소모도 컸다. 수지 안ㄴㅎ고  그는 사람들과 
지위를 경질하였다. 실각시키고, 처벌하거나 승진시켰다.  분명히 거기에 그의 성
공 비결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추종자란 가차없이 취급당하려  하고 지나치게 
승진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에서  배웠다. 그는 선전꾼들을 사
정없이 선거전으로 내모았다.  당 간부와 협력자들은 전통적으로  비정치적인 계
층 출신이었다. 그들은 아직  힘이 남아돌았고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칠 줄 모르
는 선거전에 열광하여 그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았다.
  그들의 저돌성은 기존의 정당들이 의무적으로 치르는 느슨한 태도의 선거전을 
매우 인상적인 방밥으로 추어ㅜ하였다.  선거전 이틀동안에만도 베를린에서 스붐
네번의 댜규모 국가 사회당 집회가 있었다. 그들의  벽보는 다시 모든 집기와 성
벽들과 정원 울타리들을 장식하여 도시를  새빨간 색깔로 물들였다. 1페히니짜리 
당 기관지는 엄청난 부수로  찍혀 대문 앞이나 기업체에 나너ㅜ주도록 당원들에
게 분배되었다. 
  히틀러 자신도 8월 3일과 9월  13일 사이에 스무 번 이상의 대규모 집회에 주
요 연사로 등장하였다.  추종자들의 선전 열의를 그는 일종의 선별  과정으로 여
겼다. "이제 자석이  거름더미를 스쳐지나간다. 그러고 나면 이 거름더미에  얼마
나 많은 쇠가 있었는지, 자석에는 얼마나 많은 쇠가 붙었는지 보게 될 것이다."
  선건느 1930년 9월 14일에 치러졌다. 히틀러는 50석, 기분이 좋을 때면 60에서 
80석을 내다보았다. 그는 붕괴된 중산층 유권자들, 처음으로 투표소에 나가는 젊
은이들, 그리고 여러해동안이나  기권한 사람들을 주요 지지층으로 보았다. 오랫
동안 기권해온 사람들은  정치적 논리로 보아 그를 지지할 것이  틀림없었다. 물
론 그들이 투표하러 나갈 경우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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