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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Rebellion

권력의 문 앞에서

by FraisGout 2020. 8. 15.

  히틀러를 부상시킨 것은 선동거적인 기술, 전략적인 능력, 과격한 열광만은 아
니었다. 마치 반이성이  온갖 간계를 동원하여 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활동한 
듯이 보인다. 우연히도  1932년에 집중된 다섯 번의 대규모 선거들이  그가 자기 
고유의 선동영역에서 얼마나 우세한지 실증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봄에는 대통령의 임기가 끝났다. 선거의 위험과  과격화 효과를 피할 생각으로 
브뤼닝은 일찌감치  헌법 개정을 통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임기를 종신으로 
연잘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이란 오로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겨울 
동안 위기는 거의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1932년 2월에 실업자 수는 6
백만을 넘어섰다. 그러나  여기는 정치가의 적응력보다 전문가의  실무적인 고집
을 중요한 원칙으로  브뤼닝은 자신의 노선을 굳게 지켰다. 그는  전쟁 배상금의 
궁극적인 면제, 군축  회담 성공, 독일의 평등권 등을 추구하고  있었다. 봄을 기
다리면서 엄격한 내핍생활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의 엄격함이나 그의 희망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굶주
림과 추위와 비참함의 품위 없는 동반 현상들에  고통 받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
나 희생을 호소하면서 계속되는 비상사태를 미워하였다.  정부가 비상 사태를 없
애려고 노력하지 않고 비상사태를 유지, 관리 한다는 비난이 널리 퍼졌다. 
  브뤼닝의 가차없는 내핍 정책은 국민 경제의  관점에서 보아도 문제가 많았다. 
수상이란 자는 피와 땀과 눈물을 가지고도 있기 있는 정열적인 희생의 노랫가락
을 지어낼 줄 몰랐다. 그저 실무적인 냉정한  태도만을 보였기에 그의 정책은 정
치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사람들의 절망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다는 사실이  더 문제거리였다. 이  비참이 단순히 비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화국에 대한 거부감은 이러한  곤궁의 뜻을 밝힐 줄 모
르고, 자꾸 새로운 희생을 요구하면서 그 의미를  알려줄 줄 모르는 정치적 무능
에 주요한 원인이 있었다.
  브뤼닝의 시간 벌기  정책은 대통령의 지원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
라운 일이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려는 의도에 반대하였
다. 그는 이미  84세의 나이였고, 오래 전부터 대통령 직에  넌더리가 나 있었다. 
게다가 임기 연장 계획과 더불어 반드시 나타나게  될 자신에 대한 토론이, 이미 
실망한 우파 친구들의 새로운  공격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힌
덴무르크는 1918년 11월에 곤경에  처한 황제를 내버려주었다는 생각에 점점 더 
고통을 받았다. 대통령은, 권위ㅣ적인 개혁을 통해서 영국식 모범에 따른 입헌체
제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사회주의  독재위협을 방어하련느 브뤼닝의 생각을 거부
하고 옛날식 군주제의  직접적인 부활을 고집하였다. 힌덴부르크가  마치매 대통
령에 입후보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투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어야하고, 하
르츠부르크 전선을 폐쇄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임기 
연장이 2년으로 한정되고, 여러  사람이 나서서 설득하고, 특히 91세의 나이에도 
자신을 피곤할 새가 없다고  말했던 빌헬름 1세 황제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
소 그는 망설이면서  동의하였다. 그러나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한  사람이 브뤼
닝임을 간파한 대통령은 이 일로 해서 그에  대한 신뢰를 잃고 말았다. 브뤼닝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함으로써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브뤼닝의 장기놀이와 히틀러의 딜레마
  브뤼닝이 여러 정당들과 협상을 벌이는 가운데 히틀러가 어쩔 수 없이 중심인
무로 부상하였다. 어떠한  헌법개정도 그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이
다. 동시에 이러한  협상들은 그를 극히 위험한 선택의 기로에  세웠다. 그는 '체
제 수호자들'과  공동 전선을 펼체고  이런 방법으로 브뤼닝의  입장을 강화하고 
자신의 과격주의를 부정하든가,  아니면 여러 모로 경건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늙은 대통령, 국민의 구원자이며 대리 황제인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맞서서 선거
전을 치르는 일을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선거전은 당 운동의 성공 신화를 
극히 위태롭게  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서 힌덴부르크에 대한  대립을 노출시킬 
위험이 있었다. 힌덴부르크에게  대립하는 것은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서 대통령
의 권한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
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브뤼닝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하였지만 룀과 특히 
괴벨스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괴벨슨느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다. 브뤼닝 씨는 예상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자
신의 지위와  자기 내각을 안정시키려고 한다.  지도자(히틀러)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여러 방향으로 상황이 고려되어야 한다... 권력을 둔 장기게임이 시
작되었다. 어쩌면 한 해가  다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속도, 영리함, 그리고 부
분적으로는 교묘한 방식으로 장기말을 써야하는 한판  승부다. 중요한 점은 우리
가 강자로 남아 있고 절대로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브뤼닝의 장기수를 통해서 운명적인 처지로 끌려들어간 히틀러는 한동안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후겐베르크는 임의의 서투른 거부감으로  제안을 거절하였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망설이고만 있었고, 그가  마침내 내놓은 대답은  의심과 함께 
조심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후겐베르크는 언제나 히틀러의 과격주의  뒤에 숨
어서 끊임없이 상대방을  넘어서려고 애썼다. 히틀러는 과격주의를  도구로 히용
해서 간교한 합리성의  요소와 뒤섞으려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이  두사람의 반
응은 후겐베르크의 지겨운 전략적 판단과 히틀러의 차이점은 뚜렸하게 드러내주
었다. 어쨌든 히틀러는  너무나도 많은 조건들을 붙여서 거절 의사를  밝혔기 때
문에 그것은 협상을  계속해 나가자는 제안처럼 보였다. 그는 대통령과  수상 사
이에 거리감이 생겨난 것을 확실한  본능으로 간파하고 그것을 한 발자국 더 벌
려 놓으려고 애썼다. 요란한 수다를 떨면서 스스로 헌법의 수호자가 자처하였고, 
대통령의 맹세를 수호하려는 듯한  장기적인 전략으로 수상의 계획에 대해서 수
많은 법적인 이의를 내놓곤 하였다.

    출마를 결심하다
  히틀러는 근본적으로는 힌덴부르크에  맞서서 출마하기로 결심을 한 상태였지
만 이 결심을  공표하기까지 몇 주간을 질질 끌었다. 그의  생활철학은 대통령의 
'호의'를 얻는 것이지 그에 맞서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힌텐부
르크 신화에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신의 부하들보다 더욱 날카
롭게 간파하였다. 
  그러므로 괴벨스와  다른 사람들이 입후보 사실을  공표하라고 그를 졸랐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국가 사회당 소속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의 주내무장관 
클라게스의 도움으로  도이치 국적을  취득하라는 제안에는 동의하였다.  그것은 
입후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힌덴무르크는 1918년 11월에  곤경에 처한 
황제를 내버려주었다는 생각에 점점 더 고통을 받았다. 대통령은, 권위ㅣ적인 개
혁을 통해서 영국식 모범에 따른 입헌체제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사회주의 독재위
협을 방어하련느  브뤼닝의 생각을 거부하고 옛날식  군주제의 직접적인 부활을 
고집하였다. 힌덴부르크가 마치매 대통령에 입후보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투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어야하고,  하르츠부르크 전선을 폐쇄하지 않는다."는  조
건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의 망설임, 결정의 꺼림, 운명적인 상황에서 최
후의 순간에 결정이 저절로 무르잇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성향 등이 이번 경우에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 성향은 그가  몽유병자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
다는 이미지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내려져 있었다. 괴벨스의 일기장은  히틀러의 괴로운, 거의 기묘한 변덕을 한 걸
음 한 걸음 보여주고 있다. 

  1932년 1월 9일.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지도자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거대
한 수수께끼다. 다만  경탄할 따름이다! 1932년 1월 19일. 지도자와  대통령직 문
제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내가 나누었던 대화들을 보고하였다. 여전히 결정이 내
려지지 않았다. 나는 그 자신이 입후보라하고 열렬히 주장하였다. 진지한 의도에 
보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숫자 계산을 해보았다.  1월 21일. 
이 상황에서는 우리가  후보자를 내세우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힘들
고도 불쾌한 싸움이지만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 1월 25일. 당은 이제 전투 분위
기로 떨고 있다.  1월 27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위한,  혹은 반대하는 선거구호
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 1
월 29일. 힌덴부르크  위원회가 열리다. 우니른 이제 색깔을  드러내야 한다. 1월 
31일. 지도자의 결정은 수요일에 내려진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월 2일. 
지도자의 입후보 문제가 너무나도 중요해서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낮
에 지도자와  오랫동안 이야기하다. 그는 대통령  선거를 위한 견해를 피력했다. 
스스로 후보직을 수락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우선 상대방이 확정되어야 한다. 
사회민주당이 먼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결정을 공표하기로 
했다. 이것은 유례가 없는 고통의 싸움이다.  그러나 이겨내야 할 싸움이다. 지도
자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명석한 두뇌도 자신의  장기말을 놓고 있다. 2월 3일. 
관구 지도자들은  대통령 출마 선언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려도 헛일이다. 장기 
놀이판이 벌어져 있다. 어떤  말을 쓸지 미리 말하지는 않는다... 당은 온통 불안 
투성이고, 긴장되어 있지만 그래도  모두들 침묵 속에 기다리고 있다... 지도자는 
여가 시간에 새로운 당사 건물  설계와 수도의 대규모 개축 설계에 몰두하곤 한
다. 그는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전문가
처럼 다루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밤이면 충실하고 오랜 당원들이 내게로 온다. 
그들은 모두 아직  지도자의 결심을 모르기 때문에 풀죽어 있다.  그들은 지도자
가 너무 오래  기다린다고 걱정한다. 2월 9일.  모든 것이 아직도 불분명한 상태
다. 2월 10일. 바깥은  쨍하니 차가운 겨울 날씨. 맑은 결정들이  맑은 대기 속에 
놓여 있다.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2월  12일. 지도자와 함께 황제궁에서 한 
번 더 숫자들을 계산해보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감행되어야 한다. 결정은 내려졌
다... 지도자는 다시 뮌헨에 있다. 공개 발표는 며칠 연기되다. 2월 13일. 이번 주
에 대통령직에 대한 결심이 나와야 한다. 2월 15일. 이제 우리의 결정을 더 이상 
감출 필요는  없다. 2월 16일. 나는  선거전이 이미 시작된 것처럼  일하고 있다. 
몇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다.  지도자가 아직도 공식적으로  입후보 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월 19일. 황제궁 지도자 옆에서.  오랫동안 그와 단둘이 
이야기했다. 결정은 내려졌다.  2월 21일. 영원한 기다림에 거의  녹초가 되고 있
다. 
  다음날 저녁 괴벨스는  베를린 스포츠 궁에 당원대회를 소집하였다.  1월 25일 
그에게 연설금지가  내려진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선거날짜는  그사이 3주 
앞으로 다가와 있었으나 히틀러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이날 낮에 괴벨스는 
'황제궁' 호텔로 갔다.  히틀러에게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연설의 흐름을 알려주
기 위해서였다. 그가 후보  문제를 거론하자 히틀러의 결심을 알려도 좋다는, 거
의 절망적으로  기다려왔던 허락을 받아냈다. "천만다행이다!"라고  쓰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스포츠 궁은 대만원. 서부, 동부, 북부 지역의 당원대회. 처음부터 열광적인 환
영. 내가 한 시간이나 준비의 말을 한  다음 지도자의 입후보를 공식적으로 선언
하자 거의 10분 동안이나  열광의 폭풍이 일어났다. 지도자를 위한 힘찬 선언들. 
사람들은 일어서서 환호하고  외쳤다. 아치형 천장이 무너져내릴 듯했다. 장엄한 
광경.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움직임이다. 말로 할  수 없는 환희의 열광이 넘쳤
다. 밤늦게 지도자가 전화를 했다. 나는  보고하였다. 그러고나자 그는 우리 집으
로 왔다. 자신의 입후보 선언이 그토록 박수 갈채를 받은 것을 기뻐하였다. 그는 
역시 우리의 지도자다.

  마지막 문장은 괴벨스가 지난  몇주동안 히틀러의 허약함을 보고 너무나 분명
하게 느꼈던  의혹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히틀러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의 하나이듯이 그가 결심을  하고 난 다음에 일에 덤벼든, 
무기력 상태에서 얻어낸 갑작스럽고  격렬한 에너지 또한 그에게 특징적인 것이
었다. 2월 26일에 그는 '황제궁'  호텔의 기념식에서 일주일 동안 브라운슈바이크 
참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럼으로써  도이치 국적을 취득하였다. 다음날 그는 스
포츠궁에서 적수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나는 당신들의 구호를 안다! 당신
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나는 이렇게 외치겠
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무너뜨리겠다'고... 나는 동지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어쨌든 행복하다." 그는 개채찍을 휘둘러서 자신을 독일에서 쫓아버리
겠다고 위협한 베를린  시 경찰총장 체진스키의 말을  받았다. "당신은 편안하게 
개채찍으로 내게 협박할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의 마지막에 채찍이  아직도 당신 
손에 남아있는지 두고봅시다." 동시에 그는  브뤼닝이 자기에게 강요한 힌덴부르
크에 대한 적대감을 피해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위대한 전쟁의 지도자로 도이치 
국민에게 그 이름이 길이 남아야 할' 힌덴부르크  장군께 이렇게 외치는 것이 자
기의무라고 말했다. "어르신, 우리는 어르신을 너무나 존경하기에 우리가  파괴하
려고 하는 자들이 어르신  뒤에 숨는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옆으로 물
러서 보십시오. 그들은 싸움을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싸우고 싶습니다." 괴벨
스는 너무나 행복해서 지도자는 '다시 상황의 꼭대기에' 올라섰다고 적었다.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그 사이 어느 정도까지 정치적 상황을 장악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그러써 분명해졌다. 힌덴부르크,  공산당 후보 에른스트 텔
만, 시민적인 극우파 후보인 테오도어 뒤스터베르크  등 세명의 후보들이 오래전
부터 이미 선거운동을 벌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이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다시금 거칠고 모든  것을 뛰어넘는 
힘을 보여주어다. 돌발적으로 진행되는 행사 활동은  당의 재정 형편이 나아졌다
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선동 지점의 그물망이 점점 더 촘촘하게 짜여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월에 벌써 괴벨스는  선전부를 베를린으로 이전시키고 선거전
은 '세계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 될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당의 
엘리트 연설가들이 소집되고,  히틀러 자신이 3우러 1일부터  11일까지 자동차를 
타고 독일을 종횡으로 돌아다니면서약 50만 명을  놓고 연설하였다. 그가 요구하
였던 대로 이  '위대한 스타일의 선동가' 옆에는 '고통 받는  민족의 정열을 채찍
질하는 몰이꾼 부대'가 나란히 섰다. 
  그들의 재치, 현대의 기술적인 매체들을 최초로  종원한 풍부한 아이디어 등이 
모든 경쟁자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다시 입증하였다. 축음기  음반을 5
만장이나 발송하고, 발성영화를 제작하여  영화관 주인들에게 시작전 프로그램으
로 방영하도록 강요하고, 선거 화보들을 발간하고, 괴벨스가 말한 것처럼 벽보와 
깃발 전쟁을 벌여서 하룻밤 사이 도시나 도시의 일부를 요란한 빨간색으로 도배
하다시피 하였다.  며칠씩이나 종대를  이루어서 화물차량들이 거리를  통과하며 
달렸다. 자동차에는 나부끼는  깃발아애 모자의 턱끈을 내린  돌격대 부대원들이 
서서 노래하거나  아니면 '독일이여 깨어나라!'를 외치곤  하였다. 이토록 요란한 
선전활동은 당 내에 자기 최면술적인 승리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예컨대 당선
축하를 위한  친위대의 술소비를 제한한 히믈러의  명령같은데서 이런 분위기가 
표현되고 있다. 
  상대편에는 이상스럽게도  고독한 브뤼닝의  모습만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에서 요란한 선거 운동을  제한하였다. 사회민주당이 
선거전에 참가하면  그들이 오직 히틀러를 물리치기  위해서 힌덴부르크를 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불쾌감에 
대해서는 힌덴부르크 자신이 응답해 주었다. 그는 딱  한 번 행했던 라디오 방공
연설에서 자기가 '검정-  빨강 연정 (카톨릭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의  연정)'측 후
보라는 비난을 물리쳐버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모든 전선을 뒤흔들어놓고, 모든 
충성심을 갈라놓은 선거는 힌덴부르크와 히틀러 사이의 싸움이라는 사실이 드러
났다. 선거 전날인  3월 21일에 베를린 <공격>지는 자신감에  넘쳐서 이렇게 말
했다. "내일이면 히틀러가 대통령이 된다."
  
    힌덴부르크의 승리

  그토록 고조된 기대에 대해서 결과는 상당히  충격적인 한방이었다. 그것은 상
당히 인상적인 힌덴부르크의  승리였다. 그는 49.6 퍼센트를 얻어서  30.1 퍼센트
를 얻은  히틀러를 기대 이상으로  따돌렸다. 오토 슈트라서는  승리감에 넘쳐서 
거리에다가 벽보를 붙이도록  했다.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역할을 맡
은 히틀러의 모습을  그린 벽보였다. 그림 아래에는  '대규모 군대는 파괴되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안녕하시다'고 적혀 있었다.  뒤스터 베르크는 6.8퍼센트를 얻었
다. 그이 이러한 페배는 민족주의 진영내  경쟁에서 히틀러에게 유리하게 판정된 
부분이었다. 텔만은 13.2 퍼센트의 표를 얻었다.  수많은 곳에서 국가 사회주의자
들은 갈고리 십자가 기를 절반 내려서 조기 형식으로 게양하였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도 헌법에 명시된  대로 절대 다수표를 얻지 못했으므로 재
선거를 해야만 했다. 히틀러가 이 상황에 대처한 모습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당 
내에서는 두려운 좌절감이 퍼졌고  개인에 따라서는 분명히 전망이 없는 2차 선
거를 포기하려는 생각까지 나돌고 있는 판에 히틀런는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
지 않고 선거 당일인 3월  13일 저녁에 벌써 당, 돌격대. 친위대, 히틀러 청년대, 
나치 운전기사대 등에게 더욱더 힘찬  새로운 활동을 호소하였다. "1차 선거전은 
끝났습니다. 2차 선거전이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2차전도 제가 직접 지휘하겠습
니다."고 알렸다. 괴벨스가 찬가에서 찬양한 대로 당은 '단 한나의 관현악적인 공
격정신'으로 다시  정비되었다. 그러나 가까운 수행원  한 사람이 늦은 밤시간에 
어두운 집에서 그를 만나보니 그는 침울한  사색에 빠져 있었다. "분수에 넘치게 
돈을 걸었다가 판을 잃은, 실망하고 용기를 잃은 도박꾼 같은 모습"이었다.   

    독일 하늘의 히틀러!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민족 관찰자>에서 용기를 잃은 추종자들을 격려하였
다. "독일이 아직 겪어보지  못한 분노와 가차없는 태도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우리 싸움의 이유는  우리에 맞선 모든 것에 대한  증오다. 이제 용서는 없다. " 
며칠 뒤에  거의 50명의 저명인사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섰다. 귀족들, 장군
들, 함부르크 명문가들,  교수들이었다. 선거날짜는 4월 10일로  잡혔다. 증오, 원
한, 내전 구호들로  무장한 좌우익 과격파의 선동을 억누를 속셈으로  정부는 부
활절이 다가온다는 명목으로  '당쟁 중지령'을 내렸다. 그것은  선거전을 대략 일
주일로 제한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구석으로 몰리면 언제나  그랬듯이 히틀러는 
바로 이러한 제약을 자신의 가장 효과적인  선전술로 바꾸어버렸다. 연설의 재능
을 가능하면  널리 이용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 앞에 직접  나서기 위해서 
그는 자신과 가까운 측근인  슈레크, 샤우프, 브뤼크너, 한프슈텡글, 오토 디트리
히, 하인리히 호프만 등을 위해서 비행기 한 대를 전세냈다.  
 4월 3일에 그는 처음으로 저 유명한  독일 비행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서 참모부에서 조직된  집회를 서너 개씩을 매일 돌았다. 도함  21개 대도시
에 기획된 ㅈㅂ회들이어ㅆ.  그리고 당 선전분느 이 비행 계획을  전설로 만들었
다. 이 비행기 여행은 풍ㅂ나 아이디어, 대담한 현대성, 공격욕,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섬뜩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독일  하늘의 히틀러!' 가 표어였다.  그 
이중적인 의미는 수맣은 기대와 수많은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자
신ㅇ르 둘러싼 환호성을 보면서 어느 정도 자아도취 상태에서 자기는 신의 도구
이며, 독일이르 해방시키기 위해서 뽑힌 사람이라고 말했다. 예측했던 대로 힌덴
부르크는 선거에서 53퍼센트,  2천만 표를 얻어서 힘들이지 않고  절대 다수표를 
확보하였다. 히늘러도 지난번보다 훨씬  더 많은 표를 얻었다. 1350만 표를 얻어
서 36.7퍼센트를 얻은  것이다. 뒤르터베르크는 아예 입후보하지  않았고, 텔만은 
10포센트 남짓의 표를 얻었을 뿐이었다. 
  같은 날 아직 피로와열기와  승리감에 도취된 분위기에서 히틀러는 14일 뒤로 
다가온 프로이센,  안할트,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함부르크 등지의 지방 의회 
선거전에 돌입하였다. 그것은 다시 주민의 4/5가 참가하는 거의 전국적인 규모의 
선거전이였다. "우리는 한 순간도 수지 않고 곧바로  결정한다."고 괴벨스는 적었
다. 히틀러는 또다시 독일 비행에 나섰다. 8일동안 스물다섯 개 도시에서 연설하
였다. 그의 측근은  한 개인이 만난 사람들  수로는 '세계기록'이라고 허풍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히틀러 개인의 모습은 쉬지 않는 
활동성 뒤로 사라져버렸다. 마치 "우리의 삶  전체가 성공과 권력을 향한 몰이사
냥이다."라는 활동원칙이 앞에 나서서 일을 하고 잇는 것 같았다.
  그럼으고써 이미 알기 어려ㅇ던 이 사람의 개성이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사라
져 없어지고, 전기 기록을 할 수 없게 만든다. 히틀러의 주면은 히틀러라는 현상
에 색깔, 독자성,  인간적 광채 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헛일이었다. 거의 
어떤 효과든지 다  말들어낼 수 있는 선전술조차도  이 문제에 부딪치면 한계를 
드러냈다. 괴벨스나 오토  디트리히의 일기와 체험담은 그 예를 웅변해  주고 있
다. 어린아이들의 친구, 길 잃은 비행기  속의 정확한 항해사, '절대로 안전한' 거
ㅜ총 사격수,  '빨갱이 무리' 한가운데 정신성  풍부한 두뇌 등의  일화들을 널리 
퍼드려보아도 그것은  삶에 대한 친밀성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감만을 만들어냈
다. 다만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소도구들만 어느 정도 개인적인  윤곽을 마련
해주었다. 레인 코트,  펠트 모자, 가죽 두건,  채찍, 짤막한 콧수염, 이마 옆으로 
쓸어넘긴 머리 등이어싸.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런 소도구
들조차 그의  개성을 오히려 없애버렸다.  괴벨스는 이 시기에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당원들을 사로잡았던, 모듬 개인적 윤곽을  지워버리는 분주함을 이렇게 묘
사하였다. 

  다시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서서, 걸으면서, 차 타고 가면서, 비행기 타고 가
면서도 계속 일이다. 가장  중요한 토론들은 계단이나 집 현관이나 문가에서, 그
리고 정거장으로  가는 차 속에서 이루어진다.  거의 생각할 겨를이  없다. 철도, 
자동차, 비행기로  독일 전국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시작하기 반 시간 전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ㅌ게 어떤 도시에 도착해서, 연단으로 올라가서 연설을 한다... 
연설이 끝나면 마치 옷을  다 입은 채로 뜨거운 온천에서 빠져  나온 꼴이다. 그
래도 다시 자동차에 올라서 두 시간을 달린다...

  성공을 위하여 줄곧 달리기만 하던 이 마지막 2년 반 동안 겨우 몇 번의 상황
만이 히틀러를 비개성적인  모습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
인 성격에 대한 한 순간의 조명이었다.

    겔리 라우발의 죽음
  독일을 종횡으로 달리는 몰이 사냥중이던 1931년 9월 초에 뉘른베르크를 뒤로 
하고 함부르크 여행하는  중 그는 조카인 겔리  라우발이 왕자섭정 거리에 있는 
집에서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고에  따르면 그는 완전히  놀라서 깊은 
충격을 받고 즉시  방향을 바꾸어 돌아갔다. 모든 증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의 생애의 어ㄸ너 사건도 이 사건만큼 그에게  깊은 충격으르 준 것은 없었더, 
여러 주 동안이나 그는 신경발작 상태에 빨져  있었고, 몇 번이나 정치를 그만두
겠다고 결심하였다. 극히 풀죽은 상태로 생명을 끊겠다고  암시를 한 것도 한 번 
이상이었다. 
  그의 불행한 생애의 순간들을 따라 다니는 바닥  없이 추락하는, 모든 것을 내
던져버리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다시 그의 존재의 과도한  긴장상태를 보여주었
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그대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영원히  애쓰는 사람의 
과도ㅇ 긴장이엇다. 그에게서  나온느 에너지는 강인한 인간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이로제에 걸린 인간의 동작인 것이다. 
  위대함은 감정이 없다는 그의 생각에 잘 맞는 일이지만 그는 사람들을 피해서 
여러 날 동안이나  테게른 호숫가에 있는 집에 틀어박혔다. 가까운  측근의 말에 
따르면 나중에도 조카 이야기를 시작하기만하면 그는 이따금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불문율에 따르면 아무도  그녀의 기억을 불러내서는 안 되었다. 죽음의 예
식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기질에 따라서 그는 그녀에 대한 추억돠 과도한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산장에  있는 그녀의 방은 그녀가 남겨두고 떠난  그대로 보
존되었다. 한편  그녀가 쓰러진 채로 발견도니  바닥에는 그녀의 흉상이 놓였다. 
히틀러는 해마다 기일이  되면 이곳으로 찾아와 몇  시간씩 묵상에 잠기곤 하였
다.(조카의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에 대한 지적은 슈페어가 전해준 
것이다.) 
  히틀러의 인간관계의  빈곤과 감정의 냉정함에 대해서  특별한 배격을 이루는 
과장된 찬양의 요소가  조카의 죽음에 대한 그의  반응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것은 그의  연국적 욕구와 자기 연민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닌 것 같다. 
이 사건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열소가 되는 사건들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 같
다. 이 사건은 이미 상당히 복잡했던 그의  여성 관계를 항구적인 것으로 고정시
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현존하는 증언들을 믿을 수 있다면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그에게 여자들은 오
직 보충적이거나 부수적인  역할만하였더. 남자 하숙집니아 뮌헨  맥주집에서 우
연히 어울린 사람들, 방공호, 군대 막사,  유니폼과 남자들 사이의 동료애로 특징
지어지는 정당 활동 등이 그의 세계였다. 이  세계를 보충하는 영역은 비록 혐오
스러운 것이긴 했지만  사창가였다. 그의 힘들고 뻣뻣한 기질로 해서  그나마 몹
시 어렵게 가지는 파렴치하고 일시적인 관계들  뿐이었다. 젊은이들의 우상인 슈
테파니에 대한 애착에서 여자들에 대한 그의 관계의  편협한 특성을 볼 수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여성  혐오자'로 여겨졌다. (여자들 사이에서 전혀 인기가 
없지도 않았던 멘트도 자주 히트럴의 비난을 샀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언제나 수많은  사회적 관계들 속에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그
의 주변에 있었건만 그의 전기에는 무서울 정도로 사람의 모습이 비어있고 개인
적인 관계들이 ㅇ벗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특별히 두려워하였기에, 측근의 표
현에 따르면  그는 언제나 '어떤 여자와의  소문에 휩싸이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게리 라우발의 모습과 더불어  처음으로 이러한 콤플렉스가 좀 느슨해지는 듯 
했다. 그녀는 '알프  삼촌'에 대해서 몽상적이고 처음에는  분명히 아직 어린애다
운 애착을  보엿다. 친척관계라는 사실을  통해서 양식화되지 못한  행동에 대한 
두려움, 정치가다운 자세를 포기할까 하는 두려움, 자신을 폭로하는 행동에 대한 
두려움 등이 어느 정도  줄었던 것 같다. 그래도 겔리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문
제 많은 의식수준에서  나온 것이었다. 열여섯 살 소녀를 집에  받아들였들 때의 
아버지 같은 애착, 그러고  난 다음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 노릇을  하기 전에 애
인으로 삼았지만 여기에는 근친관계의  요소가 남아있었다. 히틀러의 인생행로를 
스쳐간 수많은 여성들, 최초의 운전기사의 동생인  예니 하우크에서 헬레나 한프
슈텡글, 유니티  미트포드를 거쳐서, 그가 오스트리아식으로  '나의 공주님' '나의 
작은 백작 아가씨' '얌전이'  '바람둥이' 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여자들, 그리고  에
바 브라운에 이르기까지 그모든 관계에서 겔리 라우발과의 관계 만큼 중요한 것
은 없었다. 그년느 그의 유일한, 그리고 이런 말이 어울리지 않기는 하지만 어쨌
든 위대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금지의 느낌들, 트리스탄의  분위기, 비극적인 감
상으로 가득찬 관계였다. 
  더욱 특이한 것은 그가  언제나 능숙하게 사용한 심리적인 직감에도 불구하고 
아직 균형감각 없고 충동적인 젊은 아가씨의 분제적인 상황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 증엉네 따르면 이  자살은 삼촌과의 관계가 참을 수 
없게 도니데서  벗어나련느 절망적인 탈줄  행동이었던 듯 하다.  어떤 사람들은 
변태적인 히틀러가 어느 정도 뒤틀린 태도로 부추긴 끝에 소녀가 자살한 것이라
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일부는 둘  사이에 성적인 접촉 자체를 의문시하
기도 한다. 장화 신은  인물 히틀러에 대한 조카의 무분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히틀러가 조카와 함께 있으면서 정치적인 의무를 멀리 한다는  뷔르템베르크 관
구 지도자 문더의 불평이 그의  해임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삼촌의 명성
을 즐렸고, 그의 스타 의식을 나누어 가졌을 것이라는 것만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이나 함께 몽상하고,  오페라를 즐기고, 시골 소풍, 카페를 
돌아 다니는 즐거움 등을 함께  맛보던 이 관계는 점차 숨막히는 관계로 변화되
어 갔다. 히틀러의  어두운 측면들, 곧 그의 질투심, 끊임없이  나오는 지나친 요
구들, 예컨대  별 재능 없고 야심도  없는 어린 조카를 유명한  음악 선생들에게 
보내서 그녀를 바그너 오페라의 여주인고으로 만들려고  하는 식의 요구들, 그리
고 끊임없는 간섭  등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제한하였다. 히틀
러의 주변에서 나온 말에 따르면 함부르크로 떠나기 직전에 격렬한 싸움이 있었
다고 한다. 소녀가 얼마 동안 빈에 가겠다고 말한 데서 시작된 싸움이었다. 모든 
증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뒤엉키고 전혀 출구가 없어 보인느 상황이 
마침내 그녀를 자살로 몰아간 것이었다. 정치적  상대 진영에서 나와서 일시적으
로 떠돈 소문들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그들은  소녀가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
해서 거ㅜ총 자살을  했다고 비방하였다. 혹은 히틀러 자신이 살해의  책임이 있
다, 게리  라우발이 ㅣ삼촌에게 역사적  사명을 못하도록 말려서  친위대가 비밀 
처형해버렸다는 등의  소문이었더. 히틀러는 때로  이 '끔찍한  더러움'이 자신을 
파괴하였다고 탄식하고, 이 몇 주 동안 이런  소문을 퍼뜨린 적들을 절대로 용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두운 태도로  말했다.(겔리가 어떤 린츠 출신 유대인 미술
선생의 아이를 임신했던 사건을 보고하고 있다.  한프슈텡글은 겔리의 시체가 코
뼈가 부서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도  말하고 있으나 그에 대한 증거자룐느 거
론하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한프슈탱글은 필자에게 이 사건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잇었다고 설명했다.)

    치정살인 같은 연설
  그는 정신을 되찾자 곧바로  함부르크로 가서 수천명이 환호하는 가운데 자극
적인 연설을 했다 이런 연설이 진행될 때면 청중은 집단적인 황홀경에 빠져들었
다. 제약에서 벗어난 순간, 위대한 기쁨의  순간을 갈망하였다. 그러한 순간은 군
중의 날카로운 외침으로 드러나곤 하였다. 전체적인  맥락이 너무나 분명해서 그 
흐름을 놓칠 수  없을 정도다. 히틀러 연설의 승리는 공허하게  끝나는 성행위를 
대체한다고 해석 할 수 있다. 더욱 깊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히틀러는 곧
잘 대중을 '계집'에 비유하곤 하였다. <나의 투쟁>의 해당 페이지를 잠깐 들여다
보기만 해도  인간관계가 결핍된 이  고독한 청중을 굽어보면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분명해진다. 
  <나의 투쟁>에는 대중의  표상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철저히 에로틱한 열정
이 아주 특이한  문체상의 자유를 만들어내고 있다.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 말투
로 그는 대중을 자신의 '유일한 신부'라고  부른다. 연설을 통새서 느끼는 저항할 
길 없는 사정의 욕구는 똑같은 기분을 느끼는 대중을 찾아냄으로써 적잖은 자극
을 받았다. 지속적인 곤궁에 지쳐서 몇  가지 기본적인 욕구들만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대중은 이제 그의 연설을 듣고  '충동적인'반응을 해오는 것이다. 당시의 실
황녹음은 이러한 행사들이 가진 독특한 성적 교접의 특성을 분명하게 들려준다.
  시작 부분의 숨이  멎을 듯한 정적, 그러다가 대중의 짧막하고  날카로운 외침
들, 흥분의 고조,  최초의 해방의 외침, 그러다가  마침내 어지러운 소란, 새로운 
흥분,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연설의  오르가슴을 느끼며 내지르는 황홀경의 
신음소리.
  르네 시켈레 같은 시인은 때로 히틀러의 연설이 '치정 살인 같다'고 말하곤 했
다. 그리고 수많은 다른 관찰자들도 이  행사들의 날카롭고 감각적으로 달아오른 
분위기를 발푸르기스 밤과 마녀들의  무도장 같은 용어를 써써 표현하려고 하였
다.



================================== 09
    선동꾼 의식
  물론 연설가 히틀러의 성공 이유를 충동적이고 성적인 대용 효과를 노린 황홀
경만으로 설명하려는 사람은  실망하게 마련이다. 그의 특징인  도취상태와 합리
성이 여기서도  뒤섞여 이ㅆ. 무대 조명을  받으며 몸짓을 하고,  창백한 모습에, 
거칠고도 낭랑한 음성으로, 미난, 외침, 증오의  수다를 터뜨리는 그의 언제나 자
기 감정을  냉정하게 통제하는 사람이었고,  그 모든 경솔함  가운데서도 자신의 
본능에 일정한 방법을  부여한느 것을 방해받이 않앗다. 그것은 그의  모든 행동 
방식을 특징짓는 이중성이었다. 그 이중성이야말로 그의 성격의 기본사항이었다. 
이런 점에서 연설  기술은 합법화 전략과 같은  것이며, 뒷날 권력 쟁취의 방법, 
혹은 외교상의 조작술과  같은 것이다. 그가 세웠던 정거ㅜ 자체도  이러한 모습
을 띤 것이었고, 바로 그렇기에 '이중 국가'라고 정의되었던 것이다. 
  계획적으로 훈련된 심리적인 제압기술의  합리성, 광범위하게 확대된 기술살의 
도구들, 이런 것이 이  시기의 성공을 초기의 성공과 구분해주는 점들이다. 히틀
러의 성공은 언제나 그가  극단적인 한계까지 밀고나간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정상으로만 과격해진 것이  아니라 계산을 하는데 있어서
도 더욱 과격해졌다. 
  1920년 8월의 어떤 연설에서 이미 그는, 명료한 인식의 근거에서 '본능적인 것
을 일깨우고 채찍질하고 선동하는  것'(브라이팅레게 히틀러는 1931년 초에 이렇
게 말했다. "정신적인 싸움은 신념으로만이  아니라 이성으로도 이루어지는 법이
다. 대중에게  우리는 신념의 감정을  향해 호소해야 하지만  우리 지도부에서는 
신념을 논할 자리가 업삳. 모든 것은 냉정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을 자신의 의
무로 삼았다. 그 뒤에는  이미 그 자신의 대중적 성공의 비밀에  대한 개념이 숨
어있었다. 그러나  곧 세계 경제 공황이라는  비할 바 없이 예민한  조건 아래서 
이러한 통찰력은 그의 선동  스타일에 냉정하게 계삭해서 적용된느 방법을 만들
어내었다. 그것은 그가  모든 선전의 목적이라고 부른  심리적 '항복'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괴벨스에 따르면 선거전을 계획하면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항
목을 '가장  세부넉인 데 이르기까지 조직'하고  아무것도 우연에 내맡기지 않았
다. 노선, 투입되는 행진, 집회의 크기,  청중의 정확한 혼합 상태, 긴장을 고조시
키기 이ㅜ해서 깃발 펼치기, 행진곡 리듬, 열광적으로 외친느 하일 외침 소리 등
을 연출함녀서 연사의 등장을  언제나 일부러 늦추다가 갑자기 타오르는 조명을 
받은 연사가 목말라 애태우며 현기증을  느낄 준비가 된 대중 앞으로 나서는 것
이다. 
  어젠가 당의 초기 시절에 히틀러는 오전에  집회를 계호기하였다. 홀에 사람이 
가득 찼는데도 불구하고 이 청중들과 "매우 불행하게 전혀 어떤 결합도, 작은 접
촉도"이루지 못했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행사는  모두 저녁 시간으로 잡았다. 
독일 비행의 기간에도 그는 가능한 한 이  원칙을 지켰다. 그렇지 않아도 밀집된 
행사를 저녁 시간으로 모으는 일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들어냈다. 그
래서 슈트랄준트에 갔을 때처럼 때때로 그는 늦게 도착해서 새벽 두시 반뎡에야 
겨우 모습을 나타낸  경우도 있었다. 4만 명의 청중은 거의  일곱 시간을 기다렸
다. 그가 연설을 끝내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시간처럼 공간에 대해서도 그
는 특별한 의미를  두었다. <ㅎ파르시팔> 공연이 이루어지는  동안 어두운 바이
로이트 축제  극장의 '신비스런 마법'이나  '카톨릭 교회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그러나 신비스런 어둠'은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방해'하려  하는 선전꾼의 의도
를 한결 쉽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사고의 차단
  그는 간혹 자신의 인식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러나 진실로 그런 모든 행사는 두 개의  대립하는 힘의 싸움을 표혀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그의 생각에 따름면 모든 싸움에 어울리는 것이지만  선동꾼에게는 
모든 제압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혀옹되어 있다. '사고의 차단' '최면상태'  '광
신적 헌신에 의한 수용상태'를  만들어내야 한다. 공간, 시간, 행진곡, 조명,  대중 
집회 등이 심리기술적인  투쟁의 수단이다. 히틀러는 해설하듯이  이렇게 설명하
엿다. 한 개인이  "스스로 작은 존재라고 느끼던  일터나 대기업에서 빠져나와서 
처음으로 대규모 행사장에 들어서서 자기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수천 명의 사람
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보면, 무엇인가를 갈구하면서  이 최면 상태, 열광상태의 
강력한 효과 속으로 다른 3,4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휩쓸려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성공, 수천명의 공감이 이  새로운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주면, 그리
고 청므으로 이제까지  믿어온 것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는 벌써 우리가 
대중 최면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의 마법과 같은 영향에 굴복한  것이다. 의지
력과 동경, 그리고 다른  수천 명의 힘이 각각의 개인 속에  누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의심하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런 집회장에  들어온 사람은 내면의 확신을 
가진 상태로 집회장을 떠나게 된다. 근느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다. "
  그는 '모든 인간적 약점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자신의 발상법과 선동의 원칙들
에 '수학적' 성공의  확실성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두 번째  독일 비행을 하
는 동안 괴를리츠에서 연설을 하고 나서 조명을 받은 비행기가 밤하늘에서 수천 
명의 머리 위를 선회하는 비행이 만들어낸 효과를 발견한 다음부터는 언제나 이 
방법을 다시 사용하곤 하였다. 헌신과 지도자에  대한 동격의 분위기를 만들어내
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당 운동을  우해서 피의 증인들과 순교자를 베풀어주신 전능
자의 은총을  찬양하였다. 1차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다음에 그는  당 기관지를 
향해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이고,  자율적이자 못하고, 미지근하고 정열이  없다."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돌격대원들의 죽음에서 무엇을  만들어냈는가 질
문했다. 어떤 참석자가 그의  말을 기억한 것에 따르면, 자시들은 죽은 동지들을 
"북치고 피리 불며 파묻었다.  그런데 어째서 깨진 두 개골, 칼로 ㅉ긴 피투성이 
셔츠 등을 당 기관지의 진열창에 내놓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어째서 
이 신문들은  그 멍청한 정치적 헛소리를  떠드는 대신, 죽은 사람들의  관 옆에 
몰려든 민중을 선동하고,  살인자와 그 조종자들에 대하여  반항하도록 부추기지 
않았던가? 장갑 순양함 포템킨의 선원들은 나쁜 음식물에 대한 반감으로 혁명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우리는 동지들의 죽음을  가지고 국민적 해방  전쟁을 만들 
수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모든 생각들, 그의 모든 심리적인  정열은 언제나 다시 대중 집회
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것은 "작고 가여운 인간에게 작은 벌레가 거대한 용의 한 
부분이 된 것 간은  자부심에 찬 신념을 만들어낸다. 그 용의  빛나는 숨결 아래
서 증오스런 시민세계는 불꽃  속으로 날아가버릴 것"이라고 했다.(이 발언은 물
론 히틀러의 수많은 전략적  인식들이 그렇듯이 마르크스주의 적을 향산 것이었
다. 그러나 이것은 말솜씨였을  뿐이다.) 전략적이고 제의적인, 언젠나 똑같은 질
서를 행사진행의  바탕에 깔았다. 점점  더 효과적으로 자신의  출현을 드높이기 
위해서 그  질서를 이용하였다. 깃발, 행진곡의  박자. 기대에 찬  외침이 대중을 
점점 더 자극적인 불안으로 몰아넣는 동안 그  자신의 극도로 예민한 상태로, 쉬
지 않고 광천수를 마시면서  호텔 방안이나, 당 사무소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짧
은 간격으로 홀  분위기를 보고받았다. 이따금 그는 마지막 지시를  내리거나 악
센트를 담은  전달문으 ㄹ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드물지 않게  대중의 초조감이 
가라앉고 인위적으로 드높인 발작적인 분위기가 마비되려고 할 때쯤에야 일어서
곤 하였다. 

    자기최면
  그는 긴장을 높이는  긴 과정을 생각하고, 완전히 뒤에서 부터  연단에 등장하
곤 하였다. '바덴바일 행진곡'을  독자적인, 오직 자신만을 위한 입장음악으로 삼
았다. 그 음악이  멀리서 그의 입장을 알리며 울리면 속삭임이  가라앉고 사람들
은 팔을 쳐들고  허공을 향하여 외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증  의미를 이용
하여 행복한 존재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그'가 나타나 것이다. 당시의 수많은 
영상들은 그가 발을 구러며  흐느끼는 사람들의 울타리 사이로 조명등을 받으면
서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괴벨스가 적은대로 "살아있는  사람들로 이루어
진... 개선의  길을 통과하여" 등장하는 모습니다.  앞에는 드물지 않게  여자들이 
있고, 그 자신은 고독하고, 폐쇄되고, 영적  유린을 향한 욕망으로 도취된 모습니
다. 그는 자기 개인만  쓰는 도입연설아나 인사말을 거부하였다. 그는 연단에 서
서 한순간 기계쩍으로  손을 흔들면서 넋나간 모습으로, 쉬지 않고  눈길을 움직
이면서 대중의 회침 속에서 나타난 힘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밀려 올라가려고 
한다. 
  자주 몇 분  동안의 참을 수 없을 정도까지  집중을 위한 정적이 계속되고 난 
다음 최초의 말이 둔하게 쓰다듬듯이 정적  속으로 퍼져나간다. 시작부분은 단조
롭고 진부하고, 대개는  초기 시절의 전설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1918년 이름 
없는 병사였을 때... "이런 시작은 그가  후각을 곤두세우고 스스로 조율할 수 있
도록 도와준다.  그러다가 누군가 내지르는 외침이  그에게 영감을 준다. 하나의 
답변, 날카로운 언급이  나오면 열렬히 기다리던 최초의  박수갈채가 터져나오고 
그것은 상호접촉을 마련해 준다. 
  그는 격양되어 도취상태에  빠저들고, 어떤 관찰자가 언급한  것처럼 "약 15분 
쯤 지나면 옛날의 어ㅜ시적인 비유를  이용해서 표현 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난
다. 즉 정령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거칠고 폭발적인 움직임과 함께 쇳
소리로 변한 음성이 가차없이 절정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그는 말들은 마구잡이
로 토해낸다. 귀신을 부르듯 열광에 사로잡혀서  두주먹을 얼굴 위로 치켜올리고 
눈을 감고 대체 성행위의 흥분 상태에 완전히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의 연설은 조심스럽게 준비된 것이고, 언제나  앞에 놓여있는 메모를 철저하
게 지키는 편이지만  근본적으로 대중과의 긴밀한 의사소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시적으로 그의 추종자 노릇을 했던  어떤 사람의 눈에는 마치 그가 청중의 감
각을 호흡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런 비상한 민감성을 그의 주
변에 확실한 여성적 후광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민감성은 청중과의 밀교적인 결
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청중은 성서의 의미로 '그를 보고  자신을 아는' 것
이다. 그가 대중의  가장 비밀스런 움직임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혼란스런 상태
를 모범적인 방식으로 자기 안에 지니지 않았더라면, 심리적인 예민함도, 집회를 
연출하는 합리성도  그에게 그토록 엄청난  마법의 힘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중은 그의 연단  앞에서 만나 자신을 축하하고 자신을 숭배하였다.  그것은 병
적인 만남이엇고, 도취된  억압의 축제에서 개인적 위기의식과  집단적 위기의식
의 한판 만남이었다. 
  그러므로 히틀러는 어떤 집회에서나  그 집회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말하였
으며, 진짜 내용은 극히 표피적으로만 건드렸다는, 언제나 되풀이된느 주장이 정
확한 것이다. 근느 기회주ㅇ거인 대중적 말재주꾼이  아니라  제압, 공포, 증오란
느 수많은 감정들을  위한 입이엇다. 근느 그러한 감정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정
치적 동력으로 바꾸었다. 
  미국인 기자 니커보커는 뮌헨의 대중집회가 끝난 다음 이렇게 표현하였다. "히
틀러는 혼란스럼게 이야기했다.  그는 거대한 집회에서 설교한느 전도사였다. 도
이치 정계의 빌리  선데이(미국의 야구 선수, 복음 설교가)다. 그가  개종시킨 사
람들은 그와 함께 가고 그와 함께 웃고 그와  함께 느꼈다. 그들은 그와 함께 프
랑스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와 함께 공화국에 야유를 보냇다. "그러한  결합에서 
그는 "자신의 노이로제를 일반적  진리로체험하고, 집단 노이로제를 자신의 강박
관념에 대한 공명의 근거로 삼았다. "그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토록 자신의 성
과에 매달렸다. 연설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박수 갈채가 필요하였다. 
홀 안에  한 줄기 반대의 분위기만  있어도 방해 받았다. 처음부터  그가 어디에 
등장하든지 항상 데리고 다녔던 돌격대는 질서를 유지한느 역할만을 한 것이 아
니라 모든 반대와 저항의 느낌을 숨죽이게 만들고 협박을 통해서 환호성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히틀러는 불친절한 청중을  만나면 곧바로 연설의 실마
리를 잃어버리고, 연설을 중단하고 즉석에서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는 보고가 여
러개나 된다. 
  그는 극히 전통적인 의미에서 대중의 환호성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환호성
은 그를 일깨우고, 그를  긴장상태로 잡아두고, 계속 앞으로 나가게 했기 때문이
다. 그는 이런 소란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역사가 칼 알렉산더 폰 뭘러는 자신의 교욱과정에 참가했던 히틀러의 초기 연
설을 보고, 그가 청중들에게  흥분을 전달하고, 청중의 흥분이 그에게 다시 목소
리를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앗다. 물론 그는 탁월한 전략가이고, 유능한 권력 조직
자이며, 정확한 심리학자엿다. 온갖  단절, 빈자리, 열등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엇
지만 당시늬 비상한 공공  현상의 하나였다. 그를 온갖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저 
이겨내기 어려운 천재성을 그는 대중과의 결함에서  얻었다. 평범한 것을 강력한 
예언적인 구상으로 끌어올리고, 자신을 지도자로 변화시켰다. 일상적인 상태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은 그에게 언제나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기본상태
는 무감동이고, '오스트리아식의' 피로감에  물든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 모든 
게으름, 칼튼 찻집의 '즐거운  과부'와 초콜릿 케이크, 혹은 끝도 없는 건축 이야
기 등으로 만족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둘러싼 대중의  시끌벅적한 혼동이
야말로 그에게  저 영원한 의지의  행동을 위한 충동력을  부여하였다. 의지력은 
그에게 행동의 기쁨,  지속성, 확고한 공격성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시끌벅적한 
혼란 상태는 그가 쉬지 않고 필요로 하는 마약이었다. 
  1931년 10월 초에 처음으로 브뤼닝과 비공식적으로 만났을 때 그는 수상의 자
세한 설명이 끝난  다음에 한 시간동안이나 말을  계속했는데 말하는 동안 점점 
더 격렬해지고 거침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미리 돌격대에게  일정한 간격
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창 밑으로 행진해 가라고  명령을 해놓고 그들의 소리에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므뤼닝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자신의 마음
을 충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대중의 추종동기
  히틀러를 효과적인 선동가  이상으로 만드로, 예를 들면 요점을 잘  찍어서 사
람들을 휩쓸어가는 괴벨스에 비해서  확실하게 우위를 확보해준 것은 바로 대중
과의 이런 깊은 결합이었다. 선거 유세를  위해서 비행기를 이용하겠다는 발상은 
이러한 배경에 놓고 보아야만  그 재치를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등장하는 곳
마다 메시아적인 빛을 던졌따. 히틀러는 여러 시간이나 끈질기게 기다린, 부글부
글 끓어오르고 있는 대중  위에 구원자처럼 내려와서 그들을 둔감과 절망감에서 
끌어내어, 그 자신이 표현한 대로 '앞으로 밀어주는 히스테리'로 데려갔다. 
  괴벨스느 이런 집회를 '우리의 정치적  작업의 예배의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떤 함부르크의ㅣ여고사느 1932년  4월에 12만명이 모인 선거유세장을 찾은 다
음에 히틀러가 "도움을  주는 사람, 구원자의 모습으로, 지나치게 커진  곤궁에서 
해방시키는 사람"으로  등장했을 때의, '사람을 사로잡는  경건성'을 서술하고 있
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동생인 엘리자베트  푀르스터 니체는 히틀러가 바
이마르를 방문한 다음  그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사람이
라는 인상'을 받앗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게  하고, 그의 승리의 상승을 가능케 했던  것은 이념
적 요소들이 아니라  이런 형이상학적인 특징들이었다. 히틀러의  대중적인 성공
은 무엇보다도 종교심리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신념이라기보다는 오히
려 영적 상태로 보였다. 
  히틀러는 분명히 전통적인 사고와  반응방식의 확장된 체계와 결합할 줄도 알
고 있었다. 즉  권위에 대한 도이치의 애착, 비현실적인 사고  형성의 경향과, 깊
은 복종의 필요성, 정치에  대한 독특한 무관심 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일반적
인 접속 지점의  바로 뒤에서 벌써 일체감은 대개 끝나게  마련이었다. 히틀러의 
증오와 구호에 공명한  것은 무시무시한 도이치의 반유대주의ㅣ가  아니었다. 그
는 다만 눈에  보이는 적이라는 공격대상을 다시 붙잡은 것뿐이다.  그가 모아들
인 것은 아주 독특한 도이치 사람들의 전투정신이 아니라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자기 존경, 민족적 자존의 감정이었다. 대중은 그가 제약없ㄴ느 제국주의적 욕구
를 우크라이나  평원의 모습들로 유혹하였기  때문에 그를 따른  것이 아니였다. 
역사에 다시 동참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그를 따랐다. <나의 투쟁>이 엄청난 
부수로 발행되엇지만  실제로 그것을 읽은 극소수의  독자층은 히트럴의 구체적 
강령에 나타나는, 이념에 대한 지속적인 무관심을 지적하곤 하였다. 
  사람들이 종종 회고하듯이 국가사회당의 상승과 권력 획득은 제국주의와 반유
대주의라는 목적을 내걸고 도이치 사람들이 세계에  대항한 음모가 아니었다. 대
중 동어ㅜ 시적의 히틀러의 연설을 특이할  정도로 구체적인 의도표명이 적었다. 
그리고 그의  이념적인 고정 지점인 반유대주의와  생존공간에 대해서도 이상할 
정도로 소홀히 취급된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공허하고 일반적인 주제, 세계
관과 무관한 은유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잡히는 목표라는 점에서 그의 
연설들은 <나의 투쟁>의  공개적인 태도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엇다. 히틀러 자
신이 2차 세계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위기 한가운데
서, 자신이  여러해동안이나 무해정책을 펼쳤다고  고백하였다. 상황이 자신에게 
평화의지라는 가면을 쓰도록 강요하였다고 밝혔다. (1938년 10월 10일자 국내 언
론계의 주간들에게 행한 히틀러의  연설. 골드 만은 때때로, 1930년 선거들을 위
한 히틀러의 선언은  빽빽하게 인쇄된 13쪽에 국가  사회주의 관점에서 본 온갖 
적들과 배신자들을 차례로 나열하고 있지만 단 한마디로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곤 하였다.)
  위대한 연설가의 자의식을 가지고  그는 점점 더 내용과 구체적인 개념성으로
부터 자유롭게 되고  형식에 치중하였다. 지속적인 성공은  국가사회주의가 얼마
나 카리스마적인 운동이고, 얼마나 이념적이지 않은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강령이 아니라  지도자를 바라보는 운동이었다. 지도자를  통해서 비로
소 불명확한 이념 혼합이 윤곽과 맥락을 얻었다.  그는 이념이 둔하고 혼합된 상
태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이 따르는 것은 음조이고, 최면
을 거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남아잇는  동경과 주도적인 꿈들을 분명하
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에게 환호성을  올린 사람들 다수는 그의  연단 앞에서 
자기들의 피로와 자기들의  공포를 잊으려고 했다. 민스크나  키에브를 생각하지 
않앗고, 분명히  아우슈비츠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다수는 무엇보다도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랐다. 정치적인  고백은 현존하는 것의 맹목적인  거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구호와 표어들
  좌우익의 모든 경쟁자들보다 허ㅜ씬 날카롭게 히틀러는 이러한 부정의 심리에 
들어 있는 가능성들을 인식하였다. 그의 선동가적인 전략은 중상과 전망, 현실에 
대한 증오스런  트집잡기, 그리고 강력한 미래의  약속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강한 국가  찬양, 국민 추켜올리기, 민족의  재탄생요구, 정치적인 행동의 
자유 등이었다. 특별히  그는 도이치 통일의 필요선을  역설하엿고, 국민의 '자기
해체'를 탄식하였다. 계급투쟁을 '열등한 자들의 종교'라고 부르고, 구각 사회주의 
운동을 '국민의 가교'라고  불렀다. 그리고 도이치 사람들이  언젠가 다시 세계의 
'문화 비료'가 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일깨웠다. 
  자기 흥분과 대중 동원의 수단이 되는 그의 본래 주제는 현실의 평가절하하였
다. '독일의 폐허',  국민의 비참, 공산주의의 위험,  '정당국가의 반자연적인 음탕
함' '소규모 저축자의 비극', 배고픔,  실업, 자살 등이었다. 일부러 일반적인 형식
을 취한 비참의 서술은 그의대중적인 성공의 가장 큰 공통 분모를 마련해주었던 
것만이 아니다. 히틀러는 또한 정확한 의도표명이  정당의 내적인 분열을 일으키
며, 목표를  불확실하게 해야만 정당  운동의 추진력이 오히려  커진단느 사실을 
인식하였다. 대중,  그리고 최종적으로 권력은 현실의  가장 과격한 부인을 가장 
불명확한 미래의 약속과  결부시키는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특이하고도 수없이 변화해온 상과  대립상, 저주와 유토피아를 결합시켰
다. "우리 민족이 서른  개 당으로 찢어져 있다면, 그리고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면 그것이 도이치일까요? 이  모든 슬픈 정치갇르에게 나는 아ㄹ게 말하고 싶군
요. '독일은 단  하나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 영웅적인 위대한  민족의 정당이 되
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동시에 현존하는 것에 대한  엄격하고 선동적인 구호는 단순화의 기회를 그에
게 주었다. 그는 이러한 단순화가 바로 자신의  성공의 이유이며 나아가 자기 원
치ㅣ의 확실한 확인이라고  보았다. "모든 선전은 민속적으로 되어야 하며,  선전
의 정신적 수준은 가장 능력이 제한된  사람의 숭요능력에 맞추어야 한다."는 원
칙이었다.
  1932년 3월의  연설에서 나온 한 구절이  하나의 예를 보여준다.  이 연설에서 
그는 이 정권이  13년이나 유지되었으면서 오직 '파국의 결과들'만을 민들어냈다
고 비난하였다. 

  혁명의 시절에 시작하여  질곡과 노예의 시절까지, 조약들과  비상사태의 시대
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실수에 실수, 붕괴에 붕괴, 비참에 비참이 쌓이는 것을 보
았으며, 낙담과 무기력,  희망 없음이 파국의 이정표였습니다...  농부들의 상태는 
오늘날 바닥까지 떨어졌고  생업으 붕괴되고 수백만이 저축한  돈을 잃어버렸고, 
이전에 위대하였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
이라면, 이 불행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과 정당들입니다. 그들으 오늘
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되풀이되고 변조된, 너무나도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러한 고발
형식들, 저항을 부채질하는 구호들, 조국, 명예, 위대함, 권력, 복수 등 애매한  처
방들을 가지고 그는  대중의 힘을 한데 모았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고발하면서 
만들어내는 혼돈을 감정의 흥분이 지속적을 부추기도록  신경을 썼다. 그리고 현
존하는 사정을 파괴하는  모든 것을 다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체제에서  모든 역
동성이 발전해 나와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
무도 변화에 대한 점점 더 커지는 욕구를 그보다 더 믿음직하고, 확고하고, 대중
적으로 요약해낸  사람은 없었다. 1932년  초에 베를린을 방문하고  나서 헤럴드 
니콜슨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절망해서ㅓ  '대안처럼 보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정도'라고 일기에 적었다. 
  사회적인 추진력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히틀런의 불확실한 선동은,  모든 사회
적인 갈등을 넘어서  대립들을 말로 덮어싸야 할 처지로 그를  몰고갔다. 베를린
의 프리드리히 숲에서 자정에  행해진 히틀러의 연설에 대해서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거기에는 모든  사회 하ㅌ민들이 모였다. 그들은 지도자의 연설에  완전
히 감동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주 잘 나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중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어마이스터라는 교수는 그를 '도이치 예술가
들의 후보자'로  추천하였고, '인간을 사로잡는  그의 연설기술의 심정의 소리'를 
찬양하였다. 
  지방 연합 지도자들과  국경 지방의 귀족 지도자들  앞에서 히틀러가 두 시간 
동안 위기, 이익, 사회적  갈등 등을 다룬 연설을 하고 났을  때 어떤 지주는 '모
두의 이름으로'토론을 하지 말자고 제안하였다. "방금 들은 것을 머리 속에서 신
성하게 만들어야 할 시간에  다른 것으로 방해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했
다.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을 충심으로 받아들여  줄 것을 요구하면서 회의론자들
과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으며, 하늘 나라도, 한  국가도 기습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댔다. 
   그의 표어들, 정충적인 철학  나부랭이, 날카롭게 기초를 만든 감정들을 긁어
보아 놓으면 누구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기서 찾아낼 수  있었다. 두려워하
는 시민층은 질서와 사회적 세력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혁면적인 젊은 세대는 
새롭고 낭만적인 사회의 수강을,  도덕을 잊은 노동자 계층은 안전과 빵을, 십만 
군대는 경려과 화려한  제복의 전망을 얻었다. 지식인들은 이성 경시과  생의 우
상화라는 유행하는 분위기에 대한 대담하고 생생한  답변을 얻었다. 이러한 다양
성은 사방을 향한 거짓말보다는 오히려 비정치적인 기본음조를 잡아내는 능력에 
기초한 것이다. 나폴레옹처럼 그는 누구라도 자신의 그물 속으로 들어오면, 자기
가 권력을 장악하는 날 그 어떤 희망이라도  자신의 그물 속으로 들어오면, 자기
가 권력을 장악하는 날 그  어떤 희망이라도 걸지 않을 계층은 없다고 말 할 수 
있었다. 
  1932년은 의심의 여지 없이 히틀러가 연설가로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시기였
다.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 따르면 그보다 이전 시기에  개별적인 집회에서는 
더욱 풍부하고, 믿음이 가는 연설을 했으며,  뒷날 수상시절, 완전히 제의적인 대
중집회에서 거의 측량할  수도 없이 수많은 대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구
원의 열망, 자신의 카리스마적인  전향력에 대한 의식, 하나의 ㅣ목적을 향한 극
단적인 긴장,  고통스런 비참의 배경을  앞에 놓고 자신이  선택받았단느 믿음이 
그토록 '연금술적인' 결합 상태에 이른 것은  없었다. 히틀러에게 이 시기는 깊은 
인상을 새겨넣는 원초적 체험의 시기였다. 그것은  언제나 되풀이해서 그의 결정
에 영향을 미쳤다. '영웅 서사시' '싸워서 극복해낸 지옥',  혹은 '거인들간의 싸움'
이라고 찬양되는 '투쟁시기'의 신화 속에 이러한 감정이 살아남았다.(히틀러가 전
쟁중에도 특히 두 번째 국면에서 후퇴를 앞에 놓고 이 투쟁 시절에서 어느 정도
의정보와 자신간을 얻었던가 하는 것은 뚜렸하게 나타나고 잇다.) 
  집회의 결말부분은 조심스럽게  계산된 시작부분의 제의 의식과  잘 어울렸다. 
악단은 소란과 환호성  사이로 독일 노래나 당 찬가 하나를  연주하였다. 그것은 
종결과 동감의 인상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히틀러가 전신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아직도 마비되고 긴장돤 모습으로 그 장소를 떠나서 기다린느 자동차에 올라
탈 때까지 모여든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역할도  하였다. 그는 대중이 모려들거나 
돌격대나 친위대가 넓은  종대를 이루어 횃불 행진을  하는 동안 운전기사 옆에 
서서 인사하고, 기계적으로 미소짓곤 하였다. 그는 피곤하고 힘이 빠지고 탈진한 
채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위대한 대중연설을 한 다음 집회의  과도한 분위기를 
마무리 짓는 어지러운  감정 탐닉에 빠진 상태였다. 이러한 순간에  그가 조용하
게 초점 없는 눈길로 멍하니  앞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어떤 관찰자에게 
부관인 브뤼크너가 길을  막아서면서 "그분을 놔두십쇼. 완전히 지쳤어요!" 하고 
말했다. 관구  지도자 한 사람은 이런  연설이 있은 다음날 아침에  호텔 방안에 
그가 '고독하게, 등을 구부린 채 피곤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둥근 탁자에 웅크리
고 앉아서 천천히 야채 수프를 떠먹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선거결과
  히틀러는 자기가 불러 일으킨 선동효과만으로 권력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프
로이센의 주의회 선거에서  국가 사회당은 36.3 퍼센트의 표를  얻어서 지금까지
의 사회 민주당과  온건파 정당 연합정권을 물리쳤다. 그러나 절대  다수를 얻지
는 못했다. 그것은 석달 뒤인 7월 31일 의회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은 230
석을 얻어서 지금ㄲ의  의석수를 두 배 이상으로  늘렸고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히틀러가 확장 가능성의  한계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중도파와 우파 시민 정당들에  큰 손실을 
주었거나 부분적으로  흡수해 버렸지만 그래도 중신으로의  진출은 아직도 막혀 
있었다. 
  엄청난 선거 비용, 끊임없는  대중 집회, 행진, 벽보와 삐라 부착, 당 연설가들
은 지쳐빠지도록 투입하고, 히틀러 자신도 세 번째 독일 비행에 올라ㅆ. 그는 보
름 만에 50개 도시에서 연설하였다. 이모든  일들은 프로이센 지방의회 선거에서 
당에 1퍼센트의 득표  증가를 가져다주었을 뿐이었다. 이미 당시에  괴벨스는 이 
결과에 대해서 이런 주석을 붙였다.. "이제 ㅁ무슨 일인가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
는 짧은 시일 내에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선거에서 이겨
서 죽을 것이다. "(그밖에 7월 선거가 끝난 다음 의회내 국가사회당 소속 의어ㅜ
들의 구성도 흥미롭다. 230명의  의원들 중에는 노동자와 봉급 생활자들이 55명, 
농부 50명, 상업, 기술,  산업계 대표자 43명, 당직자 29명, 공무원 20명, 교사  12
명, 전직 장교 9명 등이었다. )
  이러한 기대에 대해서 곧 최초의 연결점들이  나타났다. 순수한 긴급사태 체제
로 넘어가면서 특히 재선 이후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몇 명의 개인들에게 자신
의 직책을 맡기다시피 했다. 그리고 점점 더  뚜렸하고 멋대로 자신이 바라는 것
이 곧 국가의 복지라고 여겼다. 몇 명의  무책임한 조언자들에 의해서 그러한 생
각이 뒷받침되었다. 그들 중에는  그이 아들 오스카도 있었다. 당시의 인기 있는 
유행어에 따르면 '헌법에  안 나오는 인분'이었다. 특히  비서관인 마이스너와 슐
라이허 장군, 젊은 보수파  의ㅣ어ㅜ 게레케 박사, 혹은 힌덴부르크의 이웃 영지
의 주인인  폰 올덴부르크 야누샤우 등이었다.  그는 황제시대부터 '반동적 촌뜨
기'역을 해왔고, 예를 들면 언제라도 한 명의 소위와 열며의 병사로 의회를 해산
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단느 따위의 주장으로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던 인물이었
다. 그 밖에 몇 명의 동 프로이센 귀족들, 뒷날엔느 프란츠 폰 파펜도 그중에 들
었다. 
  다음 몇 달은 그들의 배후 작용 시기였다.  그들의 동기와 이익을 결정하는 것
은 언제나 분명하지  않았다. 강력하고 도전적인 덩어리처러머  히틀러는 정치무
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하였다.  그들의 의도는 그를 자기들에게 합류시키고, 좌익
에 대한 위협  수단으로 이용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식 독일이  망상적인 오
만에 사로잡혀서, 역사에 잃어버린 역할을 되찾으려고 애쓴 최후의 시도였다. 

    여러 가지 음모
  그들의 최초의 희생자는 아이러티컬하게도  브뤼닝이었다. 수상은 대통령의 후
원을 믿고서, 저 '강력한 인물' 중 몇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다. 그의 적인 히틀러
는 바로 그들의  호의를 받아서 그토록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정부는 
여러 모로 나타나는 산업계의  요구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산업
계는 점점 더  심하게 정부에 등을 돌려ㅆ. 이제는 힌덴부르크와  계급상의 동지
인 지주들도 정부에 등을  돌렸다. 그들은 특히, 어려움에 빠진 영지의 수익성에 
따라서 물질적 지원  여부를 결정하고, 희망없을 정도로 빚을 많이  진 영지들은 
실업들 완화시키기 이위한 대규모  신도시 건설에 이용하려고 하는 브뤼닝의 의
도에 분개하였다. 곧장  이익집당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어서, 수상이 볼셰
비즘 사상을 품고  있다는 빈나까지 나왔다. 늙고 판단력이 흐렴진  대통령에 대
한 여러 가지 압력들을 개별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브뤼닝과 결별하
려는 대통령의 결심에 일조한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이 재선과정에서 자신을 엉뚱한 진영과 대립하도록 만든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주변의 속삭임까지  가세하니 자기가 빠져들었던 깊은  개인적인 갈등을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브뤼닝은 군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슐라이허의 신임
을 잃어버리자 곧 정치적인 종말을 맞았다. 
  이 사건은, 정부의 활발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통치활동 내부의 감추어
진 대립이 밖으로 드러나고, 그와 함께 공화국  최후의 비명에 도니 돌격대와 친
위대의 금지령으로  대두되었다. 복스하임 문서가  발견되면서 국가사회주의자들
이 폭력적인 국가전복도 고려하고 있다는 새로운 근거가 노출된 셈이었다. 
  당 군대는 점점  더 초조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행동을 하였다.  히틀러는 이중
성을 가진 합법화 전략을 따르면서 때때로 걱정하는 듯한 태도로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갈색 셔츠  부대를 잡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루덴
도르프는 흥분해서 간혹 독일을 '돌격대  점령지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차 대
통령 선거 이틀 전에 괴벨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돌격대와 친위대 지휘
부와다음 며칠 동안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 논의했다. 어디나 불안 뿐이다. 쿠데
타라느 말이 유령처럼 떠돈다. "
  선거일에 룀은 돌격대 부대에 경계령을 내리고,  베를린을 갈색 셔츠로 포위해
버렸다. 프로이센 경찰은  몇 개의 돌격대 조직 중심들을 뒤지다가  중요한 문서
를 찾아냇다.  그것은 대규모의 반역  행위는 아니지만 히틀러의  당선이 확실한 
경우를 위한 세부적인 경계조치와 행동 조치들을  지시한 것이었으며, 구데타 암
호 '할머니가 죽었다'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폴란드가 침공해올 경우에 
국토 방위 참가를 거부하라는  명령이 동부지역 돌격대에 내려진 사실도 밝혀졌
다. 특히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칠만한 발견이었다. 몇 개 지방 정부
의 성급한 재촉에 따라  제안된 돌격대와 친위대의 금지령은 만장일치로 결정되
었으며, 이 결정은  오랫동안 품고 있었으면서 언제나 미루어 온  생각들을 종결
짓게 만들었다. 
  그러나 금지령이 내려지기 며칠  전에 몇가지 사건이 극적인 전환점을 마련하
였다. 금지령에 찬성하고  자신이 그것을 만들어냈다고 자랑하던 슐라이허가 '하
룻밤 새' 모든 생각을  뒤집고, 금지령이 내려지지 않도록 쉴새없이 반대 활동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반대 활동에는 곧 힌덴부르크 대통령까지 연루되었다. 슐라
이허는 대통령에게  금지령으로 이미 실망한 우익측  추종자들에게 더욱 인기를 
잃게 되리라고  암시했던 것이다. 슐라이허의 반대  행동은, 돌격대와 함께 예를 
들면 철모단과 공화국에  충성스런 국기단 같은 모든 군대 조직을  해체하고, 대
규모의 민방위군과  군 스포츠 연합을 만들어서  공화국 방위군의 하부조직으로 
삼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아가서 이런 행동은 과
격한 금지는 싫고 더욱 섬세하게  일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음모꾼 같은 
성격과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히틀러에게 돌격댈르  탈군대화 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요구들을 하였는데,  그러한 요구들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어서 
돌격대가 그것을 거부하면 히틀러가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될 만한 것들이었다. 
  어느 정도 주저하면서, 그리고 돌격대와  친위대에 근무한느 자신의 '옛전우들'
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금지령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4
월 14일에 경찰이 대대적인  활동을 한느 가운데 히틀러의 개인군대는 해체되고 
사령본부, 막사들, 학교, 병기창고 등이 점령되엇따. 그것은 1932년 11월 이후 국
가사회당에 대하여 국가공권력이  내린 가장 강력한 조치였다.  개별적인 인물들
이 아니라 개인 군대의 존재 자체가 금지령의 동기라는 당국의 설명은 오래간만
에 다시 국가의 자기 주장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조직된 권력을 유지한느 것
은 오직 국가만이  가지는 권한이다. 개인이 그러한 권력을 조직하고  국가가 이
것을 용인하면 그것은  이미 평화와 질서를 위ㅣ태롭게 한다...  권력국가에서 군
사력은 국가 헌법에 맞는 조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적인 군대  조직은 본질적으로 합법적인  조직이 될 
수가 없다... 해체 조치는 국가 유지 자체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
  룀은 처음으로 자신의 40만  군대의 공격성과 힘에 의지해서 실력행사를 햅보
이려고 결심했던 듯하다. 그러나  히틀러는 합법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곧 이
어서 그는 돌격대를  정치 기구 안에 흡수하였고,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에 손상
을 입히지 않았다. 파시즘 운동은 국가의 최초의  저항을 받으면 벌써 힙없이 싸
움터를 비운다는 사실이  다시 입증되었다. 1920년에 이탈리아에서  카브리엘 디
눈치오가 대포 단  한 방 쏘아서 퓨메시를  소탕하였던 것처럼 히틀러도 합법화 
전략에 따라서 금지 조치에 가장 엄밀하게 복종하였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총 한 방은 총 한 방 이상이 될  것이고, 금지령은 제한된 방어조치와는 다른 것
이었다. 그것은 보수파  지배와 혁명적인 민족 운동의  결합체인 '파시즘 정국'의 
무력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슐라이허나 그의 측근에서, 정부 내에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는 정보를 히틀러
에게 보내왔기 때문에 그는 아심하고 기꺼이  굴복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근느 자신의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는 아주 여유 있게 행동하였다. 히틀러 운동
을 제압한 조치가 내려진 그날 저녁에도 괴벨스는 황제궁 호텔에서 히틀러와 나
누었던 대화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ㅜ력을 떠맡게 도리 경우의 인
사문제를 논의하였다. 마치 우리가  이미 정부 내에 있는 것처럼, 내 생각으로는 
어떤 운동이 성공의 반대편에서 이토록 자신만만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브뤼닝의 몰락
  벌써 이튿날로 힌덴부르크가 그뢰너 국방장관에게 특별히 냉랭한 글을 써보낸 
것은 대규모 음모의  신호였다. 이 음모는 법률지들의 열렬한 캠페인과  함께 이
루어졌는데, 이러한 캠페인에  민족주의 진영의 유력인사들이 한  목소리로 합류
하였다. 황태자는 국방 장관이 "돌격대와 친위대에 소속되어 가치있는 교육을 받
고 잇는 놀라운 인적자원을 파괴하려는"일을 돕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
다.. 슐라이허는 자신을 언제나 '양자'처럼 대우해준 직속장관에게 사퇴를 권고하
였다. 그리고 악성  비방을 퍼뜨리거나 어쟀든 적어도 이런 비방을  반박하지 않
았다. 그뢰너 장관은 병들어  있으며 평화주의자다, 혹은 두 번째 결혼에서 아이
가 지나치게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군대가 악성 루머에 빠제게 되었다는 따위의 
비방들이었다. 대통력에게 슐라이허는,  이 아이는 방위군 안에서 핀란드 달리기 
선수의 이름을 따서 (아이가 너무 빨리  나와서) '누르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설명하였다. (에센부르크는 '제국  지도부의 기능'은 이 시점까지는 브뤼닝,  그뢰
너, 슐라어허, 힌덴부르크 사이의 인간적인 이해에 상당히 기초하고 잇었음을 지
적하였다. 독신상태가 상호의존의  정도를 강화시켰다." 그뢰너가 재혼하면서  이 
관계가 깨졌다. "그뢰너와  슐라이허는 이제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어졌고,  생각
을 교환하는 정도와 따라서 신뢰 관계가  차츰 멀어졌다. " 마찬가지로 힌덴부르
크에 대해서도 눈에  띄게 멀어졌다. 너무 일찍 태어난 아리고  인해서 그뢰너에 
대한 온갖  비난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힌덴부르크와 그의  친구들에게 있어서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도덕적인  규범도 포함해서 몰락의 징조였다.  이토록 부도
덕한 시대정신에 그뢰너까지 굴목한 셈이었다.  1931년 7월에 슐라이허도 결혼했
다. 그것도 자기 때문에  이혼하게 도니 장군의 부인과 결혼하였다. 이것도 힌덴
부르크의 엄격한 도덕심을 손상시켰다.)
  동시에 슐라이허는 국가사회당  지도부에 자신은 개인적으로 돌격대 금지령에 
전혀 찬성하지  않는다고 알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국가  사회당을 권력에 
참여시켜서 그  번개를 뺏을 생각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말처럼  영향력 있는 
전문가들의 내각으로 그들을 '포위하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개인 군대까지 거느
린 호민관에게 이런 마법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솔리니가 보여주
기도 했으련만 그렇게 생각하였다. 
  4월 말에 그는  히틀러와 최초의 협상을 하였다. "대화는  상당히 잘 진행되었
다."고 괴벨스는 적었다.  곧 이어서 마이스너가 오스카 폰 헨덴부르크까지  합세
한 두 번째 만남이 있었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것이 잘돼 간다...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브뤼닝 자신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주는 행복
한 느낌."
  드러나지 않도록 안에서 붕괴시키는 작업을  약 한 달쯤 한 뒤에 사태는 결정
되었다. 5월 10일에 그뢰너는 의회에서 우파의  분노한 공격에 맞서 돌격대 금지
령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연설 재주도 없는 그가 '국가  속의 국가'이고, '국가에 
맞선 국가'인 국가사회당에 반대한는  항의를 시작했지만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일
으킨 분노의 소동에  밀려 시작부분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였다. 어찌할  바 모르
고 혼란에 빠진,  이미 지쳐버린 장관과 더불어 그가 시작하였던  군사령관인 하
머슈타인 장군이 그에게 항명하면서  그는 방위군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퇴임해야 한다고 알였다.  그뢰너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호소하려  했으나 아
무 소용도 없다 이틀 뒤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들 도안의  계획에 의하면 어차피  그것은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외투를 
잡아당겼으니 당연히 그 외투를 입고 있던  공작도 딸려나올 형편이였다. 5월 12
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거의 2주  일정으로 노이데크로 출발하였다. 브뤼닝이 
면담을 요청하자 대통령은  못마땅하게 여기며 거절하였다. 대통령은  이때 분명
히 자신의 계급동지들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흔들리는  수상의 지
위를 맹공격하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였든 그것은 대지주들과  늙은 장교들의 
완고한 태도로 정직성과 원칙에 대한 고려 없이 나온 이유들이었다.
  힌덴부르크가 5월 말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수상과 결별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브뤼닝은 외교상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5월 30일 그가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 직전에도 군비축소 문제에서 결정적인 전기를 약속해주는 
정보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음모로 가득 찬 보고서는 마지막  순간에 그
가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보고할 기회를 막아버렸다. 일년 전만  해도 힌덴브르
크는 브뤼닝이  자신의 마지막 수상이다.  자신은 그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모욕적일 정도로 짧은 겨우 몇 분  간 면담한 상태
에서 해임되었다. 힌덴부르크는  소카게락 전투일을 기념하는 수병의  행진을 참
관하려고 하였다. 전쟁기념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군대행사가  공화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색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군축협상에서 좋은 방향으로 변화한단느 
정보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는 브뤼닝이 그것을 지나치
게 평가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프란츠 폰 파펜
  브뤼닝의 후임으로 슬라이허  장군은 대통령에게 정치경력이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있던 어떤  남자의 이름을 들먹였다. 프란츠 폰 파펜은  오래된 베스트팔
렌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봉건적인 기병연대에서 근무하였고,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에 대사관 무관으로서 음모사건에 연루된 탓으로 미국에서 추방되
었을 때에 처음으로  어느 정도 일반에 알려지게 된 인물이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솔하게도 자신의 비밀 활동에 대한 중요한 서류를 영국 관리에
게 넘겨주고 말았다. 자르의 중요한 산업계 인사의  딸과 결혼을 해서 그는 상당
한 정도의 부와  중요한 산업계 인사들과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카톨릭 
귀족으로서 고위 성직자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예전에 총사령부  장교였던 까닭
으로 방위군에도 다양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수많은  이익 집
단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슐라이허의 관심을 끌였던 것인지
도 모른다. 파펜은 거의 기묘한 방식으로 고풍스러웠다. 황고함, 오만함, 불평 많
은 건방진 태도 등으로  인해서 시사만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 인물
로 그려졌고, 당시 사람들은 그 그림이 그의 특성을 잘 그려낸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경박하고, 너무 서두른다고 알려졌으며 아무도  그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
았다. "일이 성공하면 그는 대단히 만족한다. 그러나 실패하면 전혀 반성하지 않
는다. "
  그러나 바로  이런 사치스럽고  용감하고  태평스러운 태도야말로 슐라이허의 
눈에 파펜이 특별한 적임자로  보이도록 만든 이유였다. 그러한 그의 특성은, 점
차 구체적으로 고려되고  있던, '온건한' 독재체제 아래서  의회 제도를 소멸시키
려는 계획을 밀고 나가기에  알맞은 특성으로 보였다. 경험 없고, 겉모양만 생각
하는 파펜은 수상직 자체와  그것을 가져다주는 대표기능 만으로 허영심을 만족
시킬 것이고 그 밖의 점에서는 쓰기 편한 도구가 되어주리라는 생각도 작용하였
다. 바로 이런 생각은 명예를 탐하면서도  공식석상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슐라
이혀의 기질에 잘  맞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파펜은 두뇌가 아니라고  깜짝 놀라
서 그를 말렸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는 두뇌일 필요도 없어, 모자 노
릇만 하면 되니까."
  파펜이 그런 광범위한 관계망 덕분으로 사회민주당보다 보수적인 모든 정당들
의 연합정부를 구성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의회주의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고 슐라이허가 믿었다면  그는 곧 실망하였다. 새로운 수상은 정치적  기반이 전
혀 없었다.  브뤼닝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카톨릭 중앙당은  과격한 반대파로 
변했고, 후겐베르크도 자신의 야망이 한 번 더  무시되었기 때문에 몹시 화를 냈
다. 공식적으로 적대적인 거부감에  부딪치자 새 수상인 파펜도 화가 났다. 그는 
수상직에 취임하자마자 브뤼닝이 마련했던 성공을 자기  것으로 감고, 로잔 회담
에서 배상금 문제를 종결지었는데도 기대했던 효과는  전혀 없었다. 사실상 그의 
내각은 민주적인 것도 아니었고, 각 분야별로  합법적인 조직으로 여겨지지도 않
았다. 그것은 대통령의  애국적 호소를 거절할 수 없었던 가문  출신의 남자들로
만 이루어진 것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일곱 명의 귀족, 두명의  합병기업 회장, 뮌헨 시절 히틀러의 보호자였던 프란
츠 귀르트너, 그리고 장군  한 명 등으로 구성된 내각이었다. 여기에는 중산층이
나 노동자층의 대표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은 이 늙은 지도층이 얼마나 현
실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당시 '귀족 내각'이라고 불렸으
며 순전히 힌덴부르크의 권위와 방위군의 힘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장부가 극단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하자 히틀러도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슐라이허와의 협상에서 그는 새로운 선거를 공고하고, 돌격대에 대한 금
지조치를 해제하고, 국가  사회당에 완전한 활동의 자유를 줄 경우  정부를 승인
하겠다고 약속했다. 
  브뤼닝이 해임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5월 30일 오후에 그는 파펜의 지명
에 동의하는가 하는 대통령의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새 수상이 7워 4
일에 으회해산으로 그의 불운한 조치들을 시작하고,  곧 이어서 돌격대 금지령의 
해제를 생각하고 있을 때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벌써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
였다. "우리는 시민적인  과도내각에서 가능한 한 빨리  물러나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예민한 감각의 문제다." 라고 괴벨스는 적었다. 며칠이 지나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시민적인 똘마니들 근처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공격>
지를 타고서 파펜 내각을 향하여 새로운 공격에 나서야겠다."
  돌격대 금지령이 기대했던 것처럼 곧바로 풀리지 않자 그는 어느 날 저녁 "금
지령에도 불구하고 항의하기 위해서 완전히 제복을 갖춘 40~50명의 돌격대 지휘
자들을 거느리고 포츠담 광장의 커다란 카페에  나타났다. 우리는 경찰이 우리를 
체포하기만을 원했다... 우리는  자정쯤 아주 천천히 포츠담 광장을  지나 포츠담 
거리를 걸어갔다. 그러나 어떤  자식도 움직이지 않았다. 순찰 대장은 몹시 당황
해서 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
  이틀 뒤인6월 16일에  금지령은 마침내 해제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의 망설임
은 오히려 '다가오는 새로운  세력 앞에서 국가 권력이 무릎을 꿇었다'는 인상만 
만들어냈다. 마지막 순간에 나온 그런 친절의  대가로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나중
에 정부에 참여한다는 동의를  얻어내려는 파펜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시도
는, 슐라이허가 미리 손을 썼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이미 너무 늦었다. 뿐만 아니
라 그것은 히틀러의 광범위하게  뻗은 궝력욕의 범위와 과격성에 대해서는 거의 
그로테스크할 정도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파펜은, 굽히지 않고 냉정하게 
온갖 반대 요구들로 공박해 오는 상대방에게서 의회선거가 끝난 다음에 만날 약
속을 얻어낸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네 갑자기 거리에서 내전 비슷한 대립 상황이 다시 벌어지더니 진짜 
절정에 도달하였다.  금지령이 해제되고  7월 20일까지 5주동안  프로이센에서만 
거의 5백 건의 충돌에 사망 99명, 부산자가 1125명이나 되었다. 7월 10일은 전국
에서 17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수많은 장소에서 방위군이 본격적인 싸움에 개입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른스트 텔만이 돌격대  금지령 해제는 공식적인 살인 권
유였다고 말한 것은  옳았다. 물론 그는 자기 편인 공산당  투쟁조직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지 소극적인 활동을 벌이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7월 17일에 함부르크 알토나에서 그해 여름에  가장 심각한 혈전이 벌어 졌다. 
약 7천명의 국가 사회당 항의 시위대가 공산당 노동자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보
고 공산주의자들은  지붕과 창문을 통해  불 공격으로 응답하였다.  그것은 다시 
과격한 대응을 불러일으켜 서둘러 바리케이트를 넘어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사
망자 17명과  수많은 중상자들을 냈다. 1932년  7월의 그 투쟁에서  목숨을 잃은 
68명 가운데 30명이 공산주의자였고, 38명이 국가사회주의자였다. 괴벨스는 이렇
게 적었다. "서로 두들겨패고 총을 쏘고 있다. 이 정권의 마지막 구경거리."

    위로부터의 쿠데타
  돌격대를 인전한 것이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자의식을 강화시켰다는 사실을 깨
닫지 못하고 파펜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으뜸패를 내놓아서  거의 고립되어버린 
정부의 위신을 강화하고,  히틀러와 그 추종세력에게 화해적인  태돌르 보이려는 
희망에서 파펜은 7워 20일에  프로이센 주정부의 주도적인 인사 세명을 수상 집
무실로 부르더니 갑자기 비상권한으로 주지사 브라운과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주 
내무장관 세베링을 해임한다고 밝혔다.  비상계엄 사령관으로서 자신이 주지사의 
임무를 떠맡겠다고 선언하였다. 세베링이  강제력에 굴복해서만 자신의 집무실을 
비워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날  저녁에 일방적으로 경찰력을 행사하
겠다는, 수많은 비판을 받은 '협정'이 이루어졌다. 미리 준비된 두 번째의 비상사
태법에 힘입어 파펜은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일언에 군사적 비상 사태령을 내
리고 이렇게 해서 정치적 권한을 장악하였다.  저녁에 내무장관 집무실에 나타난 
세 명의 졍찰 간부의 요청을  받고 세베링은 자신은 오직 강제력에 굴복하여 자
기 자리를 내놓은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 곳을 떠나 옆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갔
다. 오후에 이미 그 비슷한 방법으로 아무런  저ㅇ도 받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이
었던 프로이센 경찰 지휘관들이 제압되었다. 베를린  시경찰 총장 체진스키와 부
총장인 바이스, 경감  하이만베르크 등이 잠깐 체포되어서  경찰청사의 마당으로 
끌려나갔을 때 전하는  바로는, 몇 명의 경찰관들이 총장에게 국기단  구호로 작
별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유!'하고 외쳤는데, 그토록  오랫동안 허약하였
고, 열의도 없었고, 이제는 체념상태에서 포기되는 바이마르의 자유에 대한 작별
인사로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이덴은 그밖에도 1932년 7월 20일에 사
회민주당의 경찰사회주의가 끝났다고  올바르게 지적하였다. "쓸데없인 인용되던 
아무런 의미도 없는 힘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이 정부는 여러해동안이나 경찰의 
칼날을 갈고 호통을 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것을  사용해야 할 순간이 되자 이 
아름다운 것을 감히 쓰지도 못했다. ")
  물론 광범위한 저항이  고려되었다. 어떤 관찰자에 따르면  체진스키와 하이만
스베르크 내무부 국장인 클라우제너와 힘을 합쳐서  세베링에게 '보든 수단을 동
원한 전투 실시'를 고집하였으며, 특히 '베를린 경찰의 체포, 그리고 대통령의 무
력화 선언'을 요구하였으나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고 한다. 
  저항은 효력도 없는 언론상의  항의와 국사범 재판소를 소집하는 것으로 그치
고 말았다. 이 때  프로이센 정부는  훈련받은 경찰병력 9만  명, 국기단, 공화주
의 정당들, 노동조합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밖에도 온갖  중요한 직
책을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내전에 대한 염려, 현재의 실업상황에서 총파업의 
효력에 대한 의심,  그밖에 수많은 비슷한 고려들이 저항 계획을  가로막고 말았
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적들의 수동적인 체념의 눈길만을 받으면서 
파펜은 '공화국의 가장 강력한 방법'의 권한을 장악하였다.
  프로이센 정치가들의 동기에 대해서는 무게와 존경을 금할 수 없으며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들의 결정이 합리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 앞에서 보면 그들의 합리성은 별 것  아니다. 항의 시위조차 생각하지 못했
다.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세베링과 신경쇠약에 걸리고 도덕적으로  파괴된 그의 
동지들은, 명예심과  하직함으로써 지난 13년  도안의 미숙과 태만을  잊게 만들 
뿐 아니라, 새로워진  민주적 자의식을 위한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
해보지 않았다. 1932년 7월 20일, 절대로 얕잡아 볼 수 없는 이날의 의미는 심리
적인 결과들로 나타난다.  그것은 공화국 수호자들의 저항이 얼마나 별  것 아닌
가를 보여주어서 한편의 용기를  빼앗고 다른 편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초조감만 키워놓았다.  이제는 세 개의 날카롭
게 대립하는 진영이  권력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첫째로는 파펜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으적, 군위주의적인 세력으로,  의회에서는 유권자의 10퍼센트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군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둘째로는 이
미 역할이 끝나버린  민주주의 세력, 그들은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여론의 지원
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적대하는, 국가 사회주의와 공산당이라
는 전체주의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합쳐서  53퍼센트라는 부정적 다수를 장악하
고 있었다. 이 두세력이  그렇듯이 모든 진영은 서로 차단되고 마비되어 있었다. 
1932년 여름과 가을 내내 계속  새로운 전략적 수단을 써서 상대 진영을 부수려
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파펜도 7월 20일의  행동을 이런 관점에서 
보았다. 아무런 요구도 받지 않았는데 그는 브뤼닝에게, 자신은 히트러를 권좌에 
오르게 할 계획이 없고, 다만 그를 속이려 할 뿐이라고 알려주었다.)
  8월 5일에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영주산(퓌르스텐베르크)에서 슐라
이허를 만났다. 여기서 처음으로 그는  전권을 요구하였다. 자신에게는 수상직을, 
그 밖에 내무,  법무, 농업, 항공 장관직과, 새로마든 선전부  장관직, 그리고 7월 
20일의 비상사태법에  근거해서 프로이센  주지사 및 내무장관직도  요구하였다. 
그리고 포고령을 통해서 통치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을 가진 가진 전권위임법
을 요구하였다. 괴벨스의 표현대로는 '권력을 차지하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는 내
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이레서 우리 시체를 끌어내지 않는 한 말이다. "
  권력을 넘겨받기 직전에 와 있다는 확신을 가진 채 히틀러는 슐라이허와 헤어
졌다. 헤어질 때  그는 명랑한 기분으로 영주산 집에서의 만남을  기념하여 기념
비를 세우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자시의 요구에 무게를  싣기 위하
여, 그리고 벌써 직장을 떠나서 승리의 날에  축하와 방종과 약속받은 직위를 준
비하려고 소동을  피우는 돌격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히틀러는  단위부대들이 
베를린을 둘러싸고 행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들은 점점 더 촘촘한  원을 이
루며 도시를 둘러쌌다. 
  1932년 시민 양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가 마지막 순간에 피스톨을 빼들려
는 것 같았다. 전국  방방곡고에서, 그러나 특히 슐레지엔과 동 프로이센에서 유
혈충돌이 더 많아졌다. 8월 9일에 나온 정치 테러 금지령은 "정치적인 싸움의 열
정에 사로잡혀  분노와 증오로 상대방을 공격하여  죽이려 하는" 자에게 사형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밤에 상부 슐레지엔에  있는 포템파라는 마을에서 정
복을 입은 다섯명의 돌격대원이 어떤 공산당 노동자의 집에 침입해서 그를 침대
에서 끌어내다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문자 그대로 발로 밟아서 죽였다. 
  
    대통령의 거부
  이러한 과정들이 어디까지 국가사회당의 권력에 대한 기대를 방해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슐라이허 스스로 이미  길들인다는 생각을 
포기했던 것 같다.  어쨌든 히틀러를 우파 연합의 수상으로 임명해서  책임감 안
에 묶어두고 이런 방법으로 그의 인기를 줄여보겠다는 그의 계획은 우선 대통령
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대통령은 그 사이에 파펜의 민첩함과  뻔뻔스런 매
력에 반해서 아버지  같은 애착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런 파펜을  보헤미아의 광
신자이며 엉터리 메시아인  히틀러와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밖에도 
대통령이 좋아하는 대리황제 노릇을 문제로 삼고 있었다. 
  8월 13일에 국가 사회당  지도부와 확대 회담을 열었을 때 슐라이허는 파펜과 
힘을 합쳐서 히틀러의  전권 요구를 거절하고 그  대신 부수상 자격으로 현재의 
내각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하였다. 불같이 화가나서, 그리고 전부냐 무야 하는 기
분에 사로잡혀서 히틀러는 그따위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파펜이 어느 정도 
'서로 신뢰하고 성과가 있는 협조'의 시기가 지나면 히틀러에게 유리하도록 수상
직을 포기하ㅇ다는 너그러운 제안을  덧붙였는데도 고집스럽게 거절하였다. 그의 
연극적 상상력이,  먼지 속에 빠진  마비된 세계에 지배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보여주겠다는 상상을 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자동차로 베를린으로 오는 도중에 그는 킴  호숫가의 어떤 음식점에서 '커다란 
계란 케이크를 먹으면서'  자신의 지휘자들을 향해서 이미  공산주의자들에게 감
행할 살육의 모습을  그려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갑자기  자기가 기만당했다고 
여겨진 그의 삶에서 후퇴가 있을  때마다 실망에 이어 거대한 절망의 몸짓이 뒤
따랐다. 같은 날  오후에 힌덴부르크의 부름을 받았을 때도 그는  부름에 응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던 것 같다. 대통령궁측에서 아직  아ㅁ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분
명한 확인을 해주어서야 그에게 한번 더 희망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힌덴부르
크는 히틀러가 현재의 정부를  지지할 마음이 있는가 물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였
다. 히틀러는 물론 없다고  대답했다. 늙은 대통령이 개인들에게 자기 의사를 관
철할 때 잘 쓰곤 하던 애국심에 대한  호소도 히틀러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래
서 경고와, '얼음장 같은 작별'만 남았다. 돌아가는 길에 히틀러는 흥분해서 대통
령의 몰락을 예언하였다. (이 대담의 진행에 대한 견해들은 적잔힝  다르다. 힌덴
부ㄱ르크가 안  좋은 분위기레서 히들러를 세워둔채로  맞아들여서 짧은 대화를 
했고 이 과정에서 히틀러에게  과격주의가 드러나자 히트럴가 권력을 장악할 경
우 자기가 쏘아버리겠다는 위협을 해서 도로 ㅉ타버렸단느 견해가 널리 퍼져 있
다. 그러나 파펜이 자신의  회고록 224쪽에서 밝힌 의견은 다르다. 그는 이 만남
이 정확한 상황을 강조하면서 이별의  순간에만 "얼음장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마이스너는 같은 날에 대한 비망록에서,  힌덴부르크가 돌겨ㄱ가 방종한 행
도을 할 경우에는 날카로운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하기는 했지만 그런 다음에
는 친절하게 담화를 끝냇다고 한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래된 전우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나중에도 우리의 길이 서로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전우로 손을 내밀겠소.")
  곧이어 서둘러 발표된 성명서를  보고 히틀러는 자기가 또다시 당했다고 느끼
면서 분노는 더욱 커졌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요구를 "아주 분명하게 거절하
였다. 정부원력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국가 사회주의운동에  정부 권력 
전체를 넘겨주는 것은 양심상으로나  의무상으로 조국에 책임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성명서에 씌여  있었다. 또한 히틀러가 이전의 약속에 따라서  대
통령의 신임에 의해 만들어진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식적
인 유감이 표현되어 있었다. 관공서 용어로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약속위반
에 대한  비난이었고 과거의 인물들인, 자이서,  증오스런 폰카르 등을 기억나게 
하는 암시였다. 물론 몇 달 뒤에는 이런 생각들은 잊혀지고 말 것들이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지체없이  더욱 격렬한 반대를 계속하였고,  파펜에게 항
구적인 선불정책이 얼마나 생각없고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8월 22일에 정치적 테러 금지령에 근거해서 포템파의 살인자들이 사형선고를 받
게 되자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다시피 한  법정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정복 
차림으로 나타난  슐레지엔의 돌격대 지휘자 에드문트  하이네스는 법정에 대고 
요란하게 보복하겟다고 위협했다.  히틀러는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전보를 보
냈다. 그것은 '끔찍한 사형판결을 받은  동지들'에게 자시의 '무제한의 신의'를 보
장하고 빠른 해방을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2년 전부터 조심스럽게 지켜온 시민적 태도라는 가면을 과격한 태도로 벗어던
지고, 예전의 험악한 시절에 하던 대로 살인자들과 연대감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과격함은 그의 분노의 정도를 부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추종자들의 흥
분에 대한 고려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돌격대가 다시금 깊이 실망
하고 있었다. 돌격대는 이제 전국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전투조직으로서 난폭하
고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빌헬름 거리의 연미복 입은 부르주아들을 경멸하였
다. 돌격대측에서는 히틀러가 어떻게 계속되는 굴욕을  아무렇지 않게 참고 있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충성스런 전사들을 마침내 길거리로  내보내어 피
의 축제를 벌이도록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돌격대는 그런 축제를 
벌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히틀러도  이제는 돌격대를 전보다 더욱  위협적인 방식으로 이용하였
다. 열흘 동안이나 거의  쉬지 않고 캠페인을 벌인 끝에 9월  2일에 파펜이 양보
해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위신까지 손상시켰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
을 종신형으로 감형해  달라고 대통령 특사를 신청하였다. 그들은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종신형  감방에서 풀려났다. 9월  4일자 히틀러의 연설에도  속은 사람의 
분노와 노여움의 소리가 여전히 들어있다. 

  나는 나으리들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그들은 자리 몇  개를 내주고 
우리 입을  틀어막아 버리려는 거지요. 이  낡아빠진 마차로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죠, 여러분, 나는 흥정하고  팔고 에누리해주려고 당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당은 아무 양이나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라고  만든 사자가죽이 아
닙니다. 당은 당입니다. 그뿐입니다!... 나를  장관 자리 몇 개로 꼬실 수 있을 거
라고 절말 믿으셨나요? 나는 정말 당신들을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내게 있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무관한 일인지 나으리들은 전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사랑
하는 하느님께서 그러기를 바라셨더라면 우린 한 알짜리 안경을 가지고 이 세상
으로 왔겠지요. 가당치 않은 소리! 저들은 높은 자리들이 자기들 것이 아니기 때
문에 그것을 차고 앉아 있는 겁니다. 

  힌덴부르크와 파펜에 의해서 굴욕으로 거절당한 사건에 대한 히틀러의 분노는 
아주 강한 것이었기에 처음에  그는 합법화 노선을 포기하고 유혈봉기를 통해서 
권력을 차지할까  하는 유혹까지도 느꼈던  것 같다. 그  스캔들은 정치적으로만 
그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그의 시민적인 소속  욕구에도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
다. 전보다 더 자주 위협적인 문구가 집회장에 울려퍼졌다. "청산의 시간이 다가
옵니다!" 그는 파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카톨릭 중앙당과  협상을 시작했
다. 그 과정에서 한  번은 실망한 좌파의 도움을 받아서 의회의  결정과 국민 투
표를 거쳐서 힌덴부르크를 하야시키자는 모험적인 제안이  나온 적도 있었다. 그
리고 지난 몇 주 동안에  복수욕에 불타서 그는 자신과 측근에게 혁명적인 방식
으로 요직들을 점유하는  상황들을 힘으로 쓰러뜨리는 장면을  상상하였다. 어쨌
든 그가 몇 년 전부터  힘들여서 추구해 온 합법적인 길은 냉정하고 조심스러우
며 그의 본질의 의존 본능적인 측면에만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그
의 공격성, 지나치게 긴장된  상상력과, 피를 흘리지 않고는 역사적 위대성을 생
각할 수 없다는 발상법은 앞의 면모와 반대되는 것이다.  

    잔인성에 대한 명상
  국가 사회당 소속인 단치히  시장 헤르만 라우슈닝이 이때쯤 윗소금산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러한 내면의 모순이 그를 뒤흔들고  있었다. 라우슈닝
은 강력한  민중대표의 이러한 소시민적인  삶의 방식에 깜짝  놀랐다. 창가에는 
면직물 커튼, 이른바 농부들의 가구, 매달린  새장에는 지저귀는 새, 그리고 연로
한 부인들과의 교제등이 모두 놀라운 일이었다.  히틀러는 파펜에 대해서 격렬한 
인신공격을 하고, 민족주의적인 시민계급을 '독일의 진짜 적'이라고 불렀다. 포템
파 판결에 대한 항의는 상당히 교육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하였다. "우리는 잔인해
야 합니다. 잔인성을 위한 양심을 회복해야 합ㄴ.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우리 민
족에게서 상냥함과 감상적인  편협성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이 '평온함'과 초저
녁 술좌석의 즐거움 말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감정들을 위한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려면 민족을 강요해서 위대하게 만들
어야 합니다. "
  그는 그렇게 역사적인 도전의  전망 속에 빠져들어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스스
로를 비스마르크에 견주다가 갑자기  단치히와 독일 사이에는 국가간 범죄자 인
도 조약이  있는가 물었다. 라우슈닝이 그  질문을 제대로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괴벨스의 일기자에는  8월 25일자로 자우슈닝에게  한 히틀러의 질문을  설명해 
주는 기록을 하고 있다.  "지도자가 구류 상태라는 소문이 돌고 잇다. 하지만 그
건 어린애 장난이다. ") 
  그러고 나서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다시 자신감을 보였다. 파펜의 경박함, 단
순성, 양보의 각고, 모든  민족주의 요소들과 대통령이 노령에 대해서 느끼는 주
저하는 듯한 불안감, 이  모든 것이 그의 지구력을 강화시켜주었고, 그에게 안도
감을 주어서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포템파의 살인자들을 '동지'라고  부른 지 며
칠 지나지 않아 히틀러에게 권력이 돌아오리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서둘러서 경
제 계획에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이런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나
의 일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더라도 - 그리고 내가 성채 안에 갇혀 있는 경우
라도 - 나는 당신의 충실한 조력자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미국 통신사인  언합통신의 대표가 이 무렵  히틀러에게 무솔리니의 경우처럼 
베를린으로 행진할 생각인가 물어보았을 때 히틀러는 이중적인 의미로 대답하였
다. "무엇하러 베를린으로 행진해 갑니까? 난 이미  거기 있는데요!"(앞에서 말한 
힌덴부르크의 노력에 대한 히틀러의  조롱섞인 지적은 1932년 9월 4일자 연설에
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맥락이다. "오늘 나를 대통령 각하와 대립
시킨다면 나는 웃을  것입니다. 그 싸움을 나는 대통령 각하보다  훨씬 오랬동안 
견딜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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