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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Rebellion

드디어 수상관저로

by FraisGout 2020. 8. 15.

  고전 드라마의 법칙에 따라서  1932년 가을부터 근거 있는 의망을 일ㄲ우면서 
위기를 극복할 듯한 전환점이 사건진행에 나타났다.  마치 연출자의 상상혁이 작
동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근본적으로 국가사회주의의 상승을  도와주었던 전제
조건들이 한 번 더 혼란에 빠졌다. 아이러니의  한 순간 게임은 모든 국면ㄹ에서 
뒤집어지는 듯이 보였고, 히틀러의 과장된 권력 기대를 폭로하는 듯이 보였다가, 
장면은 급격히 무너져내렸다. 
  8월 13일 이후로 파펜은 히틀러의 뜻을 더 이상 받아주지 않겠다고 분명히 결
심하였다. 그의 설명이  그다지 맏을 만하지 않아서 그런 결심의  상세한 동기들
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대도 이렇게 뒤늦은  ㄲ달음에 도달한 계기는, 괴벨스가 
나증에 '겉보기 너그러움'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한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이중적인 
기만노선이었다.
  성공의 강요에 떠밀리던 당이 순간적으로 직면한  불안정한 상황은 , 지소적인 
거부의 전략  속에 어떠한 기회들이  들어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정부의 
권위기반이 약해서 수상은  하는 수 없이 포템파 재판을 흐지부지  만들었다. 그
러나 신경질적으로 된 히틀러가 살인자들에게 보낸 위로 전보는 그 자신의 속셈
을 폭로하고 말았다. 곧 이어서 그는 한 번 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파펜이 9월 12일에 소집한 의회에서 그는 얼결에 자신에게 전략적으로 불리하
기만 한 의회해산안을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라펜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생각을 앞서버렸다. 하원의장으로 선출된 헤르만  괴링의 도움으로 그는 수
상에게 도이치  정당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42대 512)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파펜은 보복으로 의회가 개원하기도 전에 만든 의회해산 명령을 적은 유명한 붉
은 지도를 의회에 내보이는  데 성공하였따. 의회 운영을 망치고 체면으; 손상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방금 개원한 새 의회는 약 한시간  가량의 회의를 
한 당음에 벌써 해산되었따. 새로운 선거날ㄹ짜는 11월 6일로 확정되었다.
  모든 증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히틀러는 원래 이러한 급변을 피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이해에 어긋나는  것이기 ㄸ문이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 모두 깜짝 놀라  것 같다. 아무도 우리가 이런 결정을 할 요긱를 가졌
다고는 다. 우리는 다만 기쁠 따름이다.
  그러나 병적인 전투욕구는 곧 사라져버리고 여러 해 전에 없어졌던 풀죽은 상
태에 빠졌다. 당은 변덕스런 유권자들 덕택에 눈부신 상승을 누렸다. 유권자들은 
패하지 ㅇ낳는다는 인상에서 그에게 승리를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히틀러 자신
이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8월  13일의 패배, 다시 대립을  ㅗ돌아선 것, 
포템파 사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갈등, 이 모든 것이 그를 선출해야 한다는 
믿음과, 그가 비할  바 없는 역할을 한다는 믿음을 손상시켰다는  사실을 분명하
게 느꼈다.  성공의 분위기가 한 번  뒤집히ㅁ 당의 내적인 법칙으로  보아 당의 
매력도 사라져버릴 것이고 바닥 없이 추락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파펜의 
무력화 전략이 성공한  것도 히틀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난 일년  동안 값비
싼 선거전들을 치르고 난 지금 당은 거의  힘의 한계에 도달하였다. 자금도 바닥
이 났다. 히틀러의  충신은 점점 더 의기소침한  태도로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적들도 우리가 이번 전투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힘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계
산하고 있다."
  4주 뒤에 그는  추종자들 사이에서 돈과 인력을 놓고 불화를  빚고 있다.고 말
한다. "조직은 수많은  선거전을 통해서 대단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너
무나 오랫동안 방공하 속에 엎드려 있는 중대처럼 과로하고 있다."
  근심어린 어조로 그는 자신의 낙관론을 펼친다. "우리의 기회는 나날이 좋아지
고 있다. 전망이 상당히  나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과 몇 주  전의 위안 없던 
전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다."
  히틀러만은 적절한 결심을 한  다음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에 넘쳐서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따. 10월 전반부에  그는 네 번ㅉ 독일 비행 
길에 올랐고,  점점 더 커지는 상승의  필요성에 맞게 연설의 숫자와  비행 거리 
기록을 갱신하였다.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을  방문해서 중무장낳ㄴ '군신의 아들
들'에 불러싸인 채, 호전적인  자동차 행렬을 이루어 포츠담의 전국 청년단 대회
까지 따라갔던 쿠어트  뤼데케에게 자시느이 생각을 들려주었다.  희망과 현실이 
뒤얽힌 상태에서 자신이 수상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도 힘의  한계에 도달한 듯 보였다. 자동차가 달리는  동안 수행원은 
미국에 대한  보고를 해서 그가 잠들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미국은  그에게 칼 
마이의 기억들로 가득 채워진 곳이었다. 그가  장담한 바에 따르면 위네토우, '늙
은 그림자  손'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강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는이 
감기려고 할 ㄸ마다 깜짝 놀라면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계속, 계속하라구, 
난 잠들면 안돼!"
  7만 명의 히틀러 청년단이 벌이는 인상적인 선전 쇼가 끝나고 이틀 뒤에 뤼데
케가 이틀러와 작별했을  ㄸ 히틀러는 완전히 지쳐 보였다. 기차의  좌석 구석에
서 겨우 힘 없는 작별인사를 할 힘밖에는 없었다.
  선거전의 흥분, 권력의 약속, 연극적인 등장,  숭배와 ㅈ비단착란 등이 그를 붙
잡고 있었따. 사흘 뒤 뮌헨의 지도자 대회에서 그는 괴벨스의 말대로 '형식상 대
단히 위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주  광범위한 전망을 ㅗ우리 투쟁의 발
전과 현상태에 동화와  같은 윤곽'을 부여하였다. "그는  사실상 우리 모두 위에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절망적인 분위기에 빠질 ㄸ마다 당을  깨워 일읕킨
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던 어려움은  점점 더 커졌으며 그들의 정ㅊ거인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자금 붑족이  분명하게 마비시키는 
기능ㅇ르 하였다. 파펜과 그의 '방동내각'과  대립전선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국가민족당  계열의 자본가 그룹과 적대적인 입장에 빠졌고,  그들의 기
부금은 당연히 전보다 더  적어졌다. "돈을 만들기가 극히 어렵다. '재산과  교영'
을 갖춘 어리신들은 모두 정부 편을 들고 있다. "
  선거전도 '귀족도당' '시민적 불량배' '타락한 귀족 클럽 정권'에  반대하는 방향
을 이루어졌다. 당의 선전지침도  입에서 입으로 '파펜과 그의 내각에 대한 직접
적인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구호들을 전파하는  것이었다.(시민정당들이 
이 도전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말한 선전지시에서 분노의  어조로 인용된, 
오이치 민족진영의 선전책자의  예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  선전책자에서는 국가
사회당은 마르크스주의 찌꺼기로  묘사되어 있거나 아니면 괴벨스는  '남자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욕을 얻고 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그의 일파는  나중에는 실망하고 말 것이지만 어ㅉ든 한 
번 더 위대한 희망의 시기를 맛보았다. '반동을 거부하자!'는 것이 히틀러가 내놓
은 공식적인 선거구호였다.  그것은 정부의 기업가 위주 경제 정책에  대한 열렬
한 공격, 도이치 민족주의 집회들을 강제해산시키기, 철모단 지도자들에 대한 조
직화된 기습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국가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여전히 강령이  없었고 학문 이전의,  주문을 읊는 
듯한 비유로만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매수되지 않는 도이치 
직업관료인 프로이센  장교의 업적주의 원칙이고,  성벽이며, 시청, 주교좌 교회, 
자유 제국도시의 구빈원이며, 그 모드든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또한 "노동자 계
층에서 노동자주의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직한 모호성이
야말로 그것을 민중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정직한 노동을 위한 정직한  살림'이라는 말이 야간 학습에서 배운 치유의 믿
음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경제체제의 분배기구가 자연
의 수확품을 제대로 분배하는 법을 모른다면 이 체제는 잘못된 것이고 변화되어
야 마땅하다." 이런 구호는, 모든 것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기본감정에 잘 들어맞
았다.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어떤 연설에서  '반자본주의적 동경'이라는 말을 했는
데 그것은 곧 표어가 되어서 당시 시대 분위기를 광봉무이하고도 이론적인 개념
으로 잡아냐는 가장 이닉있는 표현이 되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그레고어 슈
트라서가 그러한  표현을 찾아낸 것이다.  이 표현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위대한 시대 전환기 시대의 증거가 되었다.(이 구절의 전체 맥락은  다음과 같다. 
"국가 사회주의 운동의 상승은 노동과 자연스러운 생활의 재건의 권리를  거부하
는 구각에  대한 국민의 저항인  것이다. 오늘날 경제체제의  분배기구는 자연의 
풍부하 생산물을 제대로  나누어줄 줄 모른다. 이 체제는 잘못된  것이고 국민을 
위해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발전에서 본질적인 것은 우리  민족을 일관하는 
거대한 반자본주의적인 동경이다.  이러한 동경은 오늘날 의식, 무의식적으로 우
리 민족의  95퍼센트를 사로잡았다. 이  반자본주의적인 동경은... 우리가 거대한 
변화 앞에 서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극복과 경제에서  새로운 생
각을 일깨우고 국가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일걔워야 할 시간이다. " 국가 사회당 
내부에서 슈트라서의 정치적 영향력이 근본적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과대 평
가되어 온 것은 상당 부분 이러한 표현이 만들어낸 작용이다.)

    베를린 교통파업
  선거 며칠전 분명하게 지치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던 선거전이 막바
지에 이르렀을  때, 그 동안 당이  좌익 구호를 외쳐온 것이  진지한 의도였음을 
보여줄 기회가 찾아왔다.
  11월 초에 베를린  운수업체들의 파업이 발생했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투표결
과에 반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파업이었다. 그리고 기대와  달리 국가사회
주의자들이 이 파업에  곧바로 합류하였다. 돌격대와 붉은 전선은  공동으로 5일 
동안이나 대중교통 수단을 길거리에 세우고 철도의  구간들은 막았다. 파업 감시 
초소들을 세우고 일하려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ㅡ,  긴급을 ㅗ조직된 보조 교통
의 운행을 힘으로 방해하였다. 
  행동 통일은 언제나 좌익 과격파와 우익과격파의 운명적인 공통점이라고 평가
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 순간에 국가사화당에는 다른  선택의 여
지가 없었다. 시민적인 유권자들 사이에 두려움이  커져서 재정적인 후원이 거의 
전면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언론 
전체가 우리에게 욕을 퍼부어댄다. 이것이야말로 볼세비즘이란다. 그렇지만 우리
에게는ㄴ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도로공사 노동자들의 가장  원시적인 생존권이 
달려 있는 이 파업에서 우리가  빠졌다면 노동자 계층에 굳힌 우리의 확고한 지
위가 흔들렸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거 이전에 반동에 대항한  우리의 노선이 
정말로 내면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알릴 기
회를 가졌다."
  그리고 며칠 뒤 11월  5일자. "최후의 돌진이다. 패배에 맞서기 ndl한  당의 절
망적 몸부림... 마지막 순간에 1만  마르크를 구할 수 있었다. 그 돈은 토요일 오
후 선전비로 3들어가게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 이제 운명의 
결정만 남았다."

    11월 6일 선거 패배
  운명은 1930년 이후 처음으로 구각사회당원들의 권력요구에 불리한 판정을 내
렸다. 2백만 표를 잃고 의석 34석을 잃었다. 사회민주당도 의석 몇 개를 더 잃어
버렸다. 다만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11석,  공산주의자들이 14석을 더 얻었다. 전
체적으로 보아서 여러 해 전부터 진행된 시미적 중도정당들의 붕괴가 머증ㄴ 것
으로 여겨지는 결과였다.
  국가사회당의 후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것이 전국적으로 고루 일어난 현상
으로 지역적인 패배가 아니라 전체적인 패배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
난번 선거에서 가장  강력하고 믿을 많나 지원을 보여주었고, 원래  대도시 소시
민 정당의  이미지를 벼화시켜주었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저지  작센, 포메른 
같은 농ㅇ업지역에서도 국가사회당은 상당한 표를  잃었다. 지도자들은 "이 벌어
진 틈을 다시  메우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싸우겠노라."고  야속하였지만 다음 몇 
주 동안 이루어진 지방선거에서도 침체가 계속되었다.  당의 승리의 행진은 끝난 
것으로 보였다. 당이 아직도 대단한 약속을 할  수는 있었지만 이제 신화는 아니
었다. 당이 평범한  대정당으로 남느냐 아니면 신화로 남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
되었다.
 
    파펜의 독자노선
  선거 결과에 만족한 살마은 누구보다 파페니었다.  위대한 개인적 승리를 의식
하는 태도로 그는 히틀러에게 묵은 싸움을 그만두고 모든 민족주의 세력의 결속
을 시도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수상의 자신만만한 어조를 통해 오직 자신이 허약하다는 사실만 더욱 
뚜렷하게 의식하게 된  히틀러는 며칠 동안이고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채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저녁에 그는 정부와의 협상에  대한 생각
을 일찌감치 떨구어버리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룹는 공개되어 있고,  일부는 
은폐된 적들이 쓰러지기까지 가열찬 싸움을 계속할 것"을 선포하였다. 적들의 반
동적인 정책은 나라를 볼셰비즘의 팔에 밀어 넣는 것이라고 했다.
  파펜이 공식적인 서한을 보내왔을 때야  비로소 그는 며칠 더 잘 계산된 망설
ㄴ임을 보이고 나서  거부하는 답변을 보녔다. 이번에도 이룰 수  없는 조건들을 
여러 개나 붙인 거부였다.  수상은 다른 정당들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경우 날
카로운 거부의사로 받아들였다. 
  이제 정부는 거의 전국적인  불쾌감을 얻으면서 마지막 남은 대안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의회를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해서 위험할 뿐 아니라  비용이 많이 
드는 정치적인 유예기간을 한 번  더 만들거느 아니면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대
로 공식적으로 헌법에  손을 대고, 대통령과 군부의 힘을 빌어서  처음에 국가사
회당, 공산당, 그리고 가능하면ㅇ 다른  정당들도 금지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나서 의회의 우파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릭도 새로운 선거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를 일종의 초법적인  권위로 만들어서 그가 소집한 옛 지도층
의 대표자들 한가운데 안정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분명하게 실패한 민주적, 의회주의적인 '열등한  사람들의 지배'가 있은 다음에 
파펜의 주변에서 구상된 새로운 국가는 '우수한 사람들의 지배'를 허용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국가사회자의시그이 야만스런  독재체제를 바로잡게 될 것이라고 생
각하였다. 파펜이 10월  12일자 연설에서 몇 가지 부분을 드러내보인  이러한 해
결책의 세부사항은 아직 불분명하고 단순한 입장표명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래
도 전체적으로  보면 사고 유희의  단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힌덴부르크의 
이웃이며 친지인 늘긍ㄴ  올덴부르크 야누샤우는 반동ㅈ거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자기와 자기 친구들은 짧은 시간  안에 "도이치 민족에게 헌법을 낙
인으로 새겨주어서 민족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파펜이 "놀이공처럼 정치적, 사회적 힘들에 의해서 이리저리 던져지지 않고 그 
모든 힘들 위에 굳건히 서 있는 " 강력한 국가권력을 만들겠다는 의도를 알리자 
그는 갑자기 슐라이허측으로부터 생각지도 않는 저항을  받게 되었다. 장군은 파
펜이 광범위한 민족주의 연합을 펼쳐서  히틀러 당을 통제하는 데 쓸모 있는 유
순하고 민첩한 도구라고 여겼기 ㄸ문에 그를  기용하였다. 그런데 파펜은 도구가 
되기는커녕 히틀러와 성과 없는  개인적인 투쟁상태에 빠졌을 뿐 아니라 힌덴부
르크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회를 바탕으로, 여론에 등장하기를  꺼리는 장군에게 
쓸모있게 여겨졌던 유순한 특성마저 잃어버렸다.
  슐라이허는 때로 방문객을 향해 이렇게 비웃곤  하였다. "자 이제 무슨 마릉ㄹ 
하시겠소, 우리 귀여운 프란츠(파펜)가 자신을 발견했단 말씀이야."
  파펜과 달리 그는 1932년의  위기에 몰린 산업국가의 문제점을 기사의 관점에
서 보지  않았으며 국가가 무조건  강해야만 한다고 속접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수상의 모험적인  개혁안이 그를 화나게 했으며, 그는 그런  안을 위해서 
바우이군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이러한 계획은  구대를 국가사회당 및 공산당과 
내전 비슷한 대치 상황에 빠뜨릴 것이기  ㄸ문이다. 국가사회당과 공산당은 거의 
1천8백만의 지지자를 등에 업고  어쨌든 백만 단위를 헤아리는 군사적 추종세력
을 갖춘 집단이었다. 슐라이허가 결정적으로 전향하게 된 거승ㄴ, 그사이 변화된 
권력상황에서 국가사회당을 길들이고  서서히 마멸시킬 확실한 기회를 보았다고 
여겼기 ㄸ무닝다.
  그러한 생각을  품은 채 그는  파펜에게 형식적으로 물러서서,  당 지도자들과 
'우파 연합 내각'에 대한  협상을 대통령 자신에게 맡ㅋ기라는 제안을 하기도 하
였다. 파펜은 11월  17일에 이 제안을 따르면서 속으로는 대화가  실패로 돌아가
고 자신이 다시  기용되기를 바랐다. 이틀 뒤에 히틀러는 서둘러  소집된 사람들
의 환호를 받으면서  황제궁 호텔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대통령궁으로 차를 
달렸다. 그러나 이 대화도, 이어진 두 번ㅉ 회합도 성과 없이 끝났다. 
  히틀러는 고집스럽게 특수한  전권을 가진 대통령식 내각을  요구하였다. 그에 
반해서 파펜의  조종을 받은 힌덴부르크는  이런 전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라가 계속해서  비상사태법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면  파펜을 해임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히틀러를 의회의 다수파  정당 정권의 수상으로 임명
할 수는 있다고 했다.(대통령의 트구건을 누가 가질 것이가 하는 문제를 놓고 줄
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다. 히틀러는 대통령의 특권을  지닌 수상직을 요구하고 있
는 데 반해  대통령은 그것을 양보하려고 하지않는다).  국가사회상 당수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 ㄸ문에 힌덴부르크으 ㅣ국무비서관인 마이스너
는 11월 24일자 편지로 글에게 통보하였다. 

  매우 존경하는 히틀러씨,  대통령께서는 당신이 대통령식 내각의  지휘권을 인
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거듭해서 
배타적 특권을  강조해 왔고, 대통령  개인에 대해서나 그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정치적, 경제적 조치들에  대해서 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정당의 당수에
게 대통령의 전권을 넘겨주는 일이  도이치 국민 앞에서 책임질 수는 없다고 생
각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이ㅡ는 대통령식  내각이 결국
은 일당독재로  넘어가서, 도이치 alwrh에  존재하고 있는 대립들을  극단적으로 
날카롭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맹세와 자신의 양심을 걸고 그런 일을 초래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괴벨스가 '걸작'이라고 불렀던,  다음에 언급되는 히틀러의 글은 히틀러의  전략, 
엉터리 요설, 심리학 등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예리한 비난이었다. "혁명은 다시  닫힌 문 엎에 서  있다."고 
괴벨스는 분노한 어조로 적었다. 이번에는 패배가  언론에 알려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대통령에게 보내는)상세한 편지에서 그는  상당히 예리한 감각으로 
힌덴부르크가 내세운 조건들의  내적인 모순을 분석하고, 1월 30일  경정되는 해
결 방안의 기본적인  윤곽을 처음으로 그려 보였다. 통치방식을 헌법  48조에 따
라, 합헌적으로 가결된  전권위입법으로 대체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이  특히 대통
령궁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정ㅊ거인 거래에  희말려드는 일에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해방시켜주
고, 견디기 힘든 책임을 면제시켜줄 수 있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의 무게는 앞으
로의 발전 과정에서  지나치게 평가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마이스너의 편지에서 
그토록 분명하게 거부의사를 밝힌  대통령을 ㅗ하여금 이남자의 권력 요구에 결
국 항복하도록 만드는  데 상당히 기여한 것이었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
이 고작 체신부 장관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던 그 남자였다.
  
    슐라이허의 저항과 수상취임
  파펜은 물론 모든 협상이  결렬된 다음에 자신이 다시 수상직으로 복귀되리라
고 믿었지만 실망하고 말았다. 그 사이에  슐라이허가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통해
서 국가사회당과 접촉을 하면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을 자기가 이끄는 내각에 참여
시킬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활한 계획은, 이 너그러운 
제안이 히틀러의 부하들 사이에  상당한 폭발력을 지닌 갈 등을 만들어내리라는 
생각을 바탕으로한 것이다. 슈트라서는 최근 당의  패배를 보고 거듭 양보전략을 
주장하는 데 반해서 특히  괴벨스와 괴링이 고집스럽게 모든 '얼치기 해법'에 반
대하면서 분산되지 않는 전권을 요구하고 있었기 ㄸ문이다.
  슐라이허가 정타ㅁㄹ 계속하는 동안  그는 12월 1일 저녁에 파펜과 함께 대통
령구응로 부름을 받았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서 입장ㅍ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바독 파펜은 자기가 생각하는ㄴ 대로 국가전복  형식의 헌법개정안을 밝혔다. 이
럭승ㄴ 이미 여러 달 동안이나 공개적으로 거론한 다음 거의 형식적으로 대통령
의 승인을 요청한 것에  불과하였는데 슐라이허가 갑자기 극적인 반대의견을 펼
쳤다. 그는 파펜의 의견의 의견을 불필요하고도  위험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전
의 위험을  그려 보였다. 그리고 국가사회당에서  슈트라서 계보를 빼나고, 철모
단, 노조, 사회민주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요세력들을 모아서 자신이 지휘하는, 
당파를 초월한 내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힌덴부라크는 이
유도 제대로 캐보지  않고 고집스럽게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자신의  계회은 대
통령에게 맹세를 깨는  위험을 피하엑 해줄 것이라는 슐라이허의 지적도,  이 늙
은 대통령이 총애하는 파펜 수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헌법 문제를 초월할 정
도의 애착을 흔들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슐라이허는 패배할 사람이 아니었다. 대담이  끝난 직후 파펜이 장제력
을 통한 헌법개정을 위해서  방위군을 투입할 준비가 되었는지 물어보자 슐라이
허는 솔직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그리고  다음날 내각회의에서도 
국방부의 연구결과를 지적하였다.  즉 사흘 동안의 전쟁놀이의  결과를 요약하고 
베를린 교통파업에서도 드러났던  국가사회당과 공산당의 힘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할 만한 힘이 군대에 없다고 단언하였다.  더욱이 총파업과 더불어 동부국경
에서 폴안드가 침입해오는 경우를ㄹ 예상해보면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거의 스러져가는 소수파의 지원을 받는 수상과 그의 지나치
게 대담한  복구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당파를 초월한 방위군을  투입하는 일에 
대한 의혹을 드러냈다.  슐라이허의 설명이 내각구서우언들에게 미친  강력한 인
상을 보자 파페능ㄴ 자신이 속ㅎ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체없이 대통령을 방문해서  새로운 상황을 보고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 순간 
그는 슐라이허의 해임을 요구하고  새로운 국방장관과 자신의 계획을 계속 추진
할 결심을 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힌덴부르크가 그를 말려ㅆ. 이어서 나
온 눈물난는 장면을 파펜 자신이 상당히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거의 고통스럽게 울리는 음서응로 ... 그는  나를 향했다. '지금 내가 의견을 바
꾼다면, 친애하는  파펜 , 당신은 나를  악당이라고 여기겠지요,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에  내전에 대한 책임까지  떠맡기에는 이미 너무  늙었어.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으로 폰 슐라이허  씨가 자기 행운을 시험해보라고 놔두는 수밖에 
없소'
  이 거구의 강한 남자가 작별하기  위해 내게 손을 내밀 ㄸ 두 줄기 굵은 눈물
이 그의 뺨 위로 흘러내혔다. 우리는 협동기간이 끝난 것이다. 영적인 교감의 정
도는 ... 몇 시간 뒤에  장군께서 이별 기념으로 내게 주신 그림 아래에 적인 '나
는 동지를 가졌네!'라는 헌사를 보면 구외자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ㄹ은. 대통령의 마음을 재빨리 얻고,  또한 '정치적 위기에 사려 깊은 
가교를 놓을 마지막 기회르 걸고  승부를 가릴 수 있는 파펜에게 있어서 사임이
었을 뿐 이별을 나니었다.  생각지도 않돈 추락에 대해서 그가 느낀 모욕가ㅁㄴ, 
슐라이허가 이제는 배후의 은신처에서  앞으로 나와서 아무런 보호물도 없이 강
렬한 조명을 바덱  된데 반해, 자시능ㄴ 대통령 곁에 남아서  슐라이허가 해오던 
조언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을 보고 상당히 완화되었다.
  파펜이 공직에서 사임한 다음에도 국가와 재산을 장악한 사람의 자부부심을가
지고 대통령궁과 마당  하나 사이를 둔 수상관저에 계속 살았다는  사실은, 힌젠
부르크 대통령과의  '영적인 교감'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마이스너와 오스카 
폰 힌덴부르카까지 가세하면  그것은 일종으 ㅣ집안 공동체였다.  그들은 노회한 
슐라이허 장군의 여러 가지  노력드을 차갑고 불쾌한 눈길로 주시하면서 방해하
고 마침내 비싼 대가르 치르고 실패하도록 만든 사람들이었다.

    국가사회당의 위기
  시국은 슐라이허가 의도한 대로 아주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히틀러가 직
면한 위기느 거의  절정에 도달하였고, 그것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퇴각보다 
무거운 것이었다. 추종세력의  초조감과,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어서 모든 여역에
서 터져나오고, 당은 빚은 압사당할 지경이었다. 이제까지는 돈 있는 기부자들의 
기부금이 없어진 것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채권자들이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
다. 당 기관지들을 인쇄하는  인쇄업자, 제복 재단사들, 옷감 공급업자들, 사무소
의 임대인들,tkansg은 어음 소지자들이었다.
  히틀러는 뒷날 야비한 논리로 이렇게 고백하였다.  당시 자신은 수많은 채무증
서에 서명하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승리하면 지불하기가 쉬울것이요, 
패배하면 지불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기 ㄸ문이라고 했다.
  거리 모퉁이마다  돌격대원들이 빈둥거리면서  행인들에게 도장찍힌 모금함을 
내밀었다. "마치 전쟁 지휘자가 연금 대신 동냥질 허가증을 내주기라도"한 것 같
았다. "나쁜 나치를 좀 도와주시죠!"라고 그들은 냉소적으로 소리치고 하였다.
 콘라트 하이덴은 얼마나 많은 절망한 돌격대 하위장교들이 적대적인 정당과 신
문사로 달려가서, 비밀을 폭로하고 대신 현찰을 받아려고 했는지 알려주고 있다. 
당이 승승장구할 ㄸ는  큰소리로 불안하게 몰려들었던 오만가지 기회주의자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불안해 하면서 새로운 냄새를 맡기 시작한  것도 붕괴의 
조짐이었다. 그ㄸ까지만 해도 히틀러의  아성이었던 튀링겐 지압ㅇ의회 선거에서 
국가사회당은 가장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12월 6일 괴벨스는  일기장에 이렇
게 적었다. "상황은 거의 파국적이다. 튀링겐에서 우리는 7월 31일 이후 거의  40
퍼센트으 lthstlf을 입었다.  "나중에 그는 이 시기에 당 운동이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 휩싸였다고 공공연히 고백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사무실 마다 탈퇴서가 수북이 쌓였다.
  히틀러의 노선에 대해서도 분명한 회의가 나타나ㅆ.  그는 여전히 굽히지 않고 
절반의 권력을 거부하였다. 그렇다고 전권을 얻을 능력도 없었다. 슐라이허의 수
상취임은 승리냐 아니면 몰락이냐 하는  그의 최종적인 요구를 한 번 더 거절한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모든 패베, 실망, 위기를  넘어서까지 과격한 양자택일에 
집착하는 것은 분명히 경탄스런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잇 어떤 
해설가처럼 히틀러의 고집이 이제 어리석음으로 변했다고 물어볼 만하지 않겠는
가?"
  슈트라서, 프리크, 페더 등이 이끄는 일부 추종세력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여겼다. 당에 많은 이점을  가져다 주
었던 경제 위기는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고, 실업자 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 부분을 포함해서 1932년 10월 ㅂ러써 875만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
로 아ㅍㄹ 내다볼 수 없는  과격ㄱ한 효과를 불러올 혹독한 겨울에 진입하는 중
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르면 처음으로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지표
들이 전환점을 가리켜  보였다. 외교정책상으로도 그토록 오랫동안  질질 끌어오
던 협상이 진척되고 있었다.  히틀러으 ㅣ표어인 전부냐, 무냐 하는 것은 퓨트라
서 일파가 정확하게  인식하였듯이 합법화 전략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슐라이허
가 다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준비할지도 모른다는 구체적인 두려움
들은 사라졌다. 당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새로운  선거를 감당할 힘이 없었
다.
  슈트라서가 어떤 추종세력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당수의 명령
을 어기면서 까지  무엇보다 정치기구 책임자인 그를  따를 준비가 어느 정도나 
되어 있었는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63명의 국가사회당 의원들을 추종세력으
로 꼽고 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1백 명의 추종세력을 말한다. 히틀러 자신과 
특히 괴벨스는 국가사회당의 언론  기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슈트라서 일
파의 활동을 전혀 언론에 발표하지 않았따.  과격노선의 대표자로서 괴벨스는 언
제나 전부냐, 무냐 노선을  지지하였다.) 여러 가지 견해들 중 하나는  이런 추측
을 하고 있다. 히틀러가 처음에는 고지ㅂㄹ  굽히고 슈트라서의 입각에 동의하려
고 했을 것이다.  그런 방법은 적어도 그 자신의 절대권력의  요구를 지켜주면서 
당을 권력 주변에 둘 수 있기 ㄸ무닝다.  그러다가 괴링과 괴벨스가 히틀러를 원
래의 노선으로 되돌려놓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다른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
는 자신의  ㅗ선을 '냉정하고 분명하게'유지하였다고 한다.  슐라이허가 자시느이 
'반자본주의적 동경의 내각'(슐라이허  최초의 경제정치적인 조치들은 파펜의  반
동적인 조치들을 부분적으로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조치들은  이러한 특성
화를 부적합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구성을 위한 협상에서 슈트라서에게 
부수상과 노동부 장관 자리를 제안하였고, 그 대가로  당을 둘로 가르는 일에 동
의를 받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슈트라서가 히틀러를 속이려는 생각을 하기나 했는지,  아니면 그는 다만 자의
식 강한 당내  2인자의 권리의식에서 혀뵤ㅏ을 시작했을 뿐인지  명확하지 않다. 
예컨대 슐라이허에게 자신을 비행부 장관으로 임명하라고 요구했다는 괴링과 결
국 같은 행동을  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비밀 담합설,  약속에 대한 암시들, 
여러 가지 주장등이 혼합된 가운데 믿을  만한 기록문서가 전해지지않고 있으며,
(이런 배경에 대한 지식은 디트리히의 짤막한 언급에 근거하고 있다.) 단순히 뒤
죽박죽 음모, 여러 가지  모함들, 협의 ,분노한 경쟁 등만이 입증ㄱ되고 있다. 이
것이야 말로  이념적으로 동원력이 있고,  지도자 이념과 충성  원칙에 입각하고 
있으며 언제나 실무적인 고려가  아니라 오직 개인적인 고려에서만 결정을 내렸
던 당의  어두운 얼굴이었다. 히틀러를  둘러싼 당 지휘부는  마지막까지 격분한 
채 서로 싸우는  췬위병 무리로 남아 이었다. 그들은 어느ㄸ인가는  모두가 모두
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될 판이었다.
 
    당이 무너지는 날이면...
  튀링겐에서 손실이 큰 선거가 있고 난 다음 12우러 5일 황제궁 호텔에서 열린 
지도3자 대회에서 격렬한 대립상황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슈트라서는 공공연
히 프리크에 의해서  곤경으로 몰렸고, 모든 것을 유린하는 히틀러의  연설의 힘
에 밀려서 고립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틀 뒤에 그는 같은 자리에서 한  번 더 수
많은 비난의 폭포를  겪고 음험함, 배신, 충성 남용 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아마
도 히틀러의 비난과,, 자신의  변명에 대한 회의 참석자들의 반응응ㄹ 보고 슈트
라서는 자시느이 노력이 전혀 전ㅁ\망이  없다는 사실을 ㄲ달ㅇ랐던 것 같다. 어
ㅉ든 그는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진 동안에 자시느이 물건들을 챙겨서 말도 인사
도 없이  슬며시 방을 떠났다. 호텔  방에 도착해서 그는 히틀러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지난  여러 해 동안의 그들의 관계를 요역하ㅓ고, 구제불능으로 
괴벨스와 괴링의 영향을  받은 당의 선동적인 과격화정책을  비난하고, 히틀러의 
일관성 없음을 비난하고,  그가 결국 '폭력행위와 ㄷ이치의  폐허 더미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고  나서 체념과 혐오가ㅁㄹ  느끼면서 모든 
당직에서 사퇴를 선언하였다.
  이 사직서는 당을  정망적인 침체상태로 몰아넣었다. 특히  편지에 슈트라서의 
앞날의 의도가 전혀  밝혀져 있지 않아서 더욱 심했다. 슈트라서의  가장 가까운 
추종세력인 에리히 코흐, 쿠베, 카우프만, 레벤 틀로브 백작, 페더 , 프리크,  슈퇴
어 같은 사람들만  어떤 표지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도  잔득 신경ㅇ이 
날카로워져서 공식적인 토의에서  의견차이를 조정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퓨
트라서를 찾을 수 없게  되자 불안은 점점 커졌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저
녁에 지도잦는  우리집으로 왔다. 분위기가 제대로  잡히지를 않았다. 우리 모두 
의기소침해쏙, 당전체가  분열되고 그 동안 해온  모든 일이 허사가 될  위험 쭬 
때문에 그랬다. 우리는 결정적인 시련 앞에 서 있다. " 나중에 자신의 호텔 방에
서 히틀러는 갑자기 침묵을 깨고 소리쳤다.  "당이 무너지는 날이면 나는 3분 안
에 권총으로 끝을 내고 말겠어"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두려운 슈트라서, 한순간 당의 운명을  자기 손
에 쥔 것으로 보인 슈트라서는  그날 오후를 친구와 함꼐 맥주를 마시면서 보냈
다. 체념한 사람의 편안한 심정으로 그는 여러  해 동안이나 억눌렸던 울분을 토
하고 욕하고 한숨 ntl고  들이켰다. 그러다가 지친 모습으로 저녁 기창에 올라타 
자신을 녹초로 만든  히틀러 곁을 떠나 휴가길에 올랐다. 자신의  추종세력은 아
무런 방책도 없이  남겨놓았다. 이러한 체념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여러  해 동안
이나 무조건적인 추종이  가져온 해약의 작용으로 보앙 할 것이다.  그레고어 슈
틀서는 너무나 오랫동안 충성을 다해왔기에  이제 독자적으로 설 수 없게 된 것
이다.
  슈트라서의 퇴직이 채 알려지기도 전인 다음날 벌써 히틀러는 당내 그의 계파
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번개처럼, 빠르게,  독특하고 격렬한  확고함으로 그는 
명령과 호소를 하였다.  돌격대 위기의 해법 모형에 알맞게 그는  슈트라서가 맡
고 있던 정치기구를 스스로 떠마고 벌써 여러해 전 하노버에서 맹목적인 충성을 
입증하였던 로버트 라이를 참모로 임명하였다. 갱니  ㅂ지서인 루돌프 헤스를 제 
3자의 권력욕에 맞서기 위한 경쟁기관인  정치부 중앙 상무처자응로 승진시켰다. 
나아가서 농업과 국민교육 담당영역들이 각기 독립되어 다레와 괴벨스에게 맡겨
졌다.
  이어서 히틀러는 간부들과 당소속 의원들을 의회의장인 헤르만 괴링의 관저로 
ㅅ빕해서 감동적인 충성서약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어서 자기가  언제나 슈트라
서에게 신의를  다하였는데, 그는 언제나 자기를  향한 신의를 깨뜨렸으며, 당을 
파멸의 가장자리로 이끌어 넣었다고 하였다. 승리  직전에도 이런 표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흐느끼면서 머리를  책상에 부딪쳐서 절망의 연기를ㄹ 
했는지 분명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괴벨스는 "그토록 강력한 개인적인 고미능
로 해서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여러해 전부터  당에서 흔들리지 
않고 싸우고 일해 온 오랜 동지들은 분노와  고통과 수치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저녁은 운동의단합을 위해 아주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히틀러는 슈트라서 추종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이러한 열정적인 압도의 자염ㄴ
에서 빼놓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공공연하게 굴종의 행동을 요구하였
다. "모두들 그에게 손을 내밀고 약속하였다. 무슨 일이든지 닥칠테면 닥쳐라, 그
와 더불어 계속  싸워나갈 것이며, 목수ㅁㄹ 걸어야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위대
한 일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슈트라서는  이제 완전히 고립되었다. 죽은 
사람이다."

    상대방의 무기력 
  그와 더불어 히틀러는 한 번 더 생애의  커다란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리고 붕
괴와 해체를 오히려 추종 강화의 계기로 만드는 놀라운 재능ㅇ르 한 ㅂ전 더 입
증하였다. 그에게  싸움도 타협도 강요하지  않은 슈트라서가 물론  그의 성공을 
쉽게 만들어주었고, 편리하게도  지난 몇 달 동안의 실패에 대한  속죄양 노릇을 
해주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적대자들이 싸울 주응ㄹ 모르고  감정을 억누르면서 
체념하고, jRO를 으쓱하며 직무에만  골몰하였다는 시실 또한 히틀러 상승에 나
타나는 동반현상의 하나였다. 힌덴부르크ㄹ  바음이 돌아서자마자 브뤼닝이 그랬
고,. 7월 20일에는  세베링이나 체진스키도그렇게 빨리 체ㅕ하였다.  이제는 슈트
라서와 그의 도당  그리고 후겐베르크와 다른 사람들 차례였다. 그들  모두 그의 
분노 앞에서  막대기를 내던지고 가버렸다.  히틀러와 달리 그들은  권력을 향한 
정열이 없었다. 한 번의  위기는 그들에게 패배나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그에 반
해서 그에게 있어 위기는 싸움을 위한 기회이며 새로운 확실성을 향한 출발점이 
되고 하였다. "속지 맙시다."하면서 그는 시민적인 적수의  유형을 날카로운 경멸
감으로 묘사해냐ㅐㅆ. "그들은 우리에게 저항하려 하지 않습니다. 저쪽에서  하는 
모든 말 속에 우리와 타협하자는 외침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열망하
고 권려ㅛ을  차지하고 기쁨을 느끼는  남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그들은 조용한 가운데 꽃을 보살피고, 습관이된 시간에 낚시
하러 가고 그밖에는 경건한 관찰을  하며서 삶을 보낼 수만 있으면 대단히 행ㅂ
족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1932년 12월 위기는  바로 이러한 오만불손한 이미지를  확인해준 것이었으며, 
전재으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패배와 붕괴에서 일어서서 승리자의 ㅎㄹ신을 가질 
필요가 있ㅇ르 ㄸ마다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예로 인용되고 하였다. 히틀러는 
과거를 돌어보며 이렇게 사람드르이 용기를 북돋우곤 하였다. 당시 자신은 "전혀 
다른 낭떠러지들 사이를 지나가야 했으며 존재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양자택
일에 바닥친 것도 여러 번이었다."는 것이다. 
  슈트라서 사건과 더불어 국가사회당의 정치적위기가 극복된 것은 전혀 아니었
다. 괴벨스가 쓴  일기자응ㄴ 다음 몇 중동안에도 계속해서 낙담의  표현들로 가
득 차 있었으며, '수만흥ㄴ 싸움질과 불화'를  기록하고 있다. 당 지도부, 특히 히
틀러, 괴벨스, 괴링, 라이 등은 당원들의  사기와 신뢰감을 회복하기 위해 주말이
면 관구들을 방문하였다. 대규모 선거전의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는 하루 
네 번까지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연설을 하고  하였다. 재정적인 결핍은 끝이 없
었다. 베를린 관구에서는 당 직원들의 봉급을 줄였고, 국가사회당 소속 프로이센 
지방의회 의원들은 의회 심부름꾼들에게 크리스마스 팁도 주지 못했다. 
  12월 23일에는 괴벨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시무시한 고독이 어두운 절망
처럼 나를 덮친다!"
  해가 바뀔 부렴 <프랑크푸르트 신문>은 '국가사회당의 마법에서 풀려나는  것'
을 축하하였다. 반면  영국 좌파의 지도적 지식인인 해럴드 래스키는  이렇게 확
인하였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생명이 위험하다고  묘사하던 시간은  지났다... 
우연이 사태를 바꿔놓지만 않는다면  늙은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시골 구석에 처
박혀서 저녁이면  맥주집에서 친구들에게 자기가 한때는  도이치 제국을 뒤엎을 
뻔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생을  마감하는 일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
다. "그에 대한 답변이라기도 한 것처럼 괴벨스는 불쾌한 몸짓으로 이렇게 썼다. 
"1932년은 영원한 악운의 실타래였다. 그것을 조각내 부수어야 한다... 모든  절망
과 희망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파펜의 음모
  그 순간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갑작스럽게 변화가 나타났다. 슐라이
허가 아무리 영리하게 수상직무를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벌써 모든 파벌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그는 
스스로 '사회주의적 장군'이라고  소개하였지만 노동자들을 향한 그의 고백은 사
회민주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기업가들은  그런 고백에 대해서 괘
씸하게 여겼다. 농부들은  노동자를 선호한 것에 대해서 분노하였고, 대지주들은 
예고한 계획경제의 이념들, 노동조합을  향한 접근 시도, 혹은 의회 상태의 회복
을 위한 노력 등 이 모든 것은 정직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오직 불
신과 저항만이 돌아왔다. 
  슐라이허가 표명한 낙관론은 수많은 적대자들이 자기에 대항하여 하나로 뭉칠 
처지에 있지  않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가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함께 
벌였던 음모는 일찌감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사건은 사기를 잃고  빚에 쪼들
리고 있던 국가사회당의 응집력에 무거운 손상을  입혔다. 히틀러의 도움 없이는 
반정부 전선이 아무런  폭발력도 갖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손상을  입은 히틀
러는 아직 동맹을 맺을 상대로 여겨지지 않았다.
  슐라이허의 이 모든 생각들을  꿰뚫어보고 국가 사회당에 예기치도 ㅇ은 기회
를 마련해중 사람은 다름아닌 프란츠 폰  파펜이었다. 슐라이허의 경쟁 상대자들
이 마침내 히틀러를 '공동 대표'로 점찍은 것이다. 
  슐라이허 장군이 수상이 된  지 2주만에 벌써 파펜은 퀄튼의 은행가인 쿠어트 
폰 슈뢰더에게 국가사회당 당수와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 이 접촉은 
그레고어 슈트라이서와의 결별과 맞물려있다.  그것은 산업계의 후원자들이 슈트
라서 사건을 당 내에서  혁명적이고 반자본즈의 분위기가 극복된 것은 아니라도 
어쨌든 그 수뇌가 제거되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1월 의회 선거가 강화시켜준  공산당의 목소리가 나날이 커진다는 사실도 히
틀러에 대한  기업가들의 망설임을  없애는데 기여하였다. 더욱이  국가사회당의 
선전은 이런 구호를  담도 있었다. 당이 내일이라도 무너지면 모래  독일에는 벌
써 1천만 명의 공산당이 더 생긴다는  것이다. 슈뢰더는 퀄튼 신사클럽의 대표로
서 라인 중공업계에  상당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히틀러를 위
해서 활동적으로 일을  벌인 적이 있었고, 1932년 11월 히얄마르  샤흐트가 히틀
러의 권력 요구와  관련된 청원서를 낼때도 거기 서명했다. 당시  파펜은 날카로
운 어조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부했지만 지금 슈뢰더가 1월 4일에 
히틀러와 약속이 되었다고 알리자 즐겁게 수락하였다. 
 
    퀄른 회담
  엄격한 비밀조치 아래서 이루어진 대화는 1932년 8월 13일의 굴욕을 문제시하
는 히틀러의 분노와  비난에 찬 독백으로 시작되었다. 얼마동안 시간이  지난 뒤
에야 겨우 파펜은  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모두 
슬라이허의 책임이라고 돌리면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과 히틀러 사이에  일종의 양두제 성격으로 도이치 국가민족당과 국
가사회당의 연합을 제안하였다.  슈레더가 뉘른베르크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히
틀러는 다시 '긴  연설'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수상으로  임명될 경우 혼자서만 
정부의 수반이 되겠다는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파펜의 부하들
은 많은 변화의 정책을 함께 마련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 장관 자격으로 자신
의 내각에  들어올 수가 있다고 했다.  그가 암시한 변화들  중에는, 사회민주당, 
공산당, 유대인들을 독일의 지도적  위치에서 쫏아내겠다는 내용과 공공생활에서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히틀러는 
슐레이허가 의회를 해산  할 권한이 없다는 것, 따라서 국가사회당은  선거를 다
시 치를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아주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
  이 만남을 가리켜 '제3국의 탄생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타당한 일이
다.(여기 제시된 회동의 표현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파펜  자
신은 여기에 대해서  정열적으로 반대입장이었다. 그의 변명서인  회고록에 들어
있는 묘사들도 물론 상당 부분 독자의 신뢰를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회
동에 우연적이고 부수적인  의미만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거듭  그는 순수하
게 정보의 목적을  가진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슈뢰더의  확언만 여
기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그보다  몇 주 전에 파펜과 협상하기
를 거절했다. 파펜이 나중에 장담한  말, 곧 어떤 제안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사
실이라고 해도, 히틀러가 파펜의 말을 사실은  힌덴부르크의 말로 들었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여전히 결정적인 것이다. 파펜은 자신이  슐라이허의 이해
와지원을 얻기 위해서  이 회동을 가졌다고 믿게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양두체
제의 계획도 히틀러와 자신이 아닌, 히틀러와  슈라이허의 관계된 것이었다고 하
낟. 이 회동을  둘러쌌던 두려운 비밀주의는 이 만남의 부조리한  성격을 보여주
는 것이다.)
33. 특별히 산업체의  돈으로 획득한 영지는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서  형식상 힌
덴부르크가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선물되었다.  1932년 7월 20일  사태로 인해 
힌덴부르크는 상당히 걱정하였다. 브뤼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슐라이허가  수상
직에서 물러나기 4일 전 저녁에 병원에 있는 나를 방문한 에르빈 플랑크는 힌덴
부르크가 고발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정부ㄱ 직면하게 된 곤란점들을 설명하
였따.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데 히틀러가  동의한 까
닭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이 순간부터 1월 30일에 이르기까지 인과적인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1월 30일은 퀀른에서 이 순간  처음으로 윤곽이 
잡힌 연합의 표지를  지니고 탄생하였다. 이 만남은 히틀러의 야심을  지원해 온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빛을  주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 파멸에 가까운  다의 재정
상태에 대한  이야기와 빚을 청산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이 논의되었는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회담 자체가  이미 당의 지불 능력을 회복
시켰고 재무 자체는 하찮은 것으로 되돌려버렸다.  1월 2일만 해도 국가사회당의 
세무 고문관이 베를린 재무부에, 당이 독립성을  포기할 경우에만 세금을 지불할 
처지에 있다고 보고했다.  이제 괴벨스는 당이 '다시  호황기에' 들어섰다고 적었
다. 흔히 주장되는  대로 그것이 재정 상태를  '갑작스럽게 개선'시키지는 않더라
도 어쨌든 "조직의 나쁜 재정상태를 걱정할 마음은 전혀 없다. 이번에 일이 제대
로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퀼른 회담이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자신감과 승리의 기대를 회복시켜준 만큼 슐
라이허와 그의 정부에는 결정적인 일격이 되었다.  다가오는 위험을 의식하고 수
상은 돌아가면서 언론에  정보를 주고, 이어서 힌덴부르크에게 청원하였다. 대통
령이 앞으로는 파펜을 자기가있는 자리에서만 만나 달라는 청에 대해서 그는 엉
뚱한 대답을 들었다. 처음으로 자기 위치가 약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힌덴부
르크 대통령은 국가기관이나 올바른 직무수행의 원칙들을 자신의 '젊은 친구' 파
펜보다 우선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그는 대담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훌
륭한 이야기꾼이었다.
  이번 만남에서 파펜이 이미  대통령을 자기 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
다. 그는 사실과  다르게 히틀러가 마침내 양보하고 정부 권력을  혼자서 차지하
겠다는 요구를 철회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파펜이 제멋대로 한  것을 나
무라기는커녕 대통령은 "이런  설명(슬라이허의)이 맞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 말하고,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밀한 접촉을 유지하라고 부탁하였다. 마지막으
로 그는  자신의 국무비서인 마이스너에게 파펜의  의무에 대해서 슬라이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대통령 자신이 자기 수상에  반대하는 음모
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모든 정치의 끝
  이미 형성중이던 파펜-히틀러  공동전선은 곧 이어서 효과적으로  강화되었다. 
슬라이허가 점점 약해지는  자신감을 가지고 슈트라서, 노동조합, 정당들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동안  1월 11일에 지주연맹 대표가 대통령궁을 방문해서 정부
가 보호무역 정책을  취하지 않는다고 심한 불만을 토했다. 이러한  불만의 뒤에
는 브뤼닝 수상이  만들었고 최근 재개된 신도시  계획에 대한 지주들의 근심이 
숨어 있었다. 또한 그  동안 수많은 지주들에게 부당한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착
취 행위를 통해서 인기 없은 공화국에 근본적인 고민을 만들어준 동부 보조금ㅁ
에 대한 의회의 검토에 대한 근심이 숨어  있었다. 각료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대
통령은 대지주들의 이익 대변다 노릇을 하였다.  슐라이허가 금세 구속력이 있는 
수긍을 해주지 않자, 목격자의 보고에 따르면 노이데크의 지주(힌덴부르크)는 주
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면서 최후 선언을 하였다. "폰 슐라이허 수상, 당신에게 청
원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퇴역장교이니 청원이란 부드러운  형식이라는 사
실을 아실테지. 오늘  밤이라도 내각을 소집해서 법을 제정하고 내일  서명할 문
서를 내게 보내달라는 말이오."
  슐라이허는 처음에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러
나 몇  시간 뒤에 지주연합의 선동적인  결정을 알게 되자, 도전을  받아 들이고 
갑자기 협상을 결렬시켜버렸다.  그러고나서 이틀 뒤 그가  반동적인 후겐게르크
에게 경제장관직을 거절하고 자신의 사회정책적인 그의 반대편에 섰다. 
  사회민주당은 이 '장군'에게 처음부터 일체의  지원을 거절하였고, 노조 지도자 
라이파르트가 슐라이허와  협상하는 것도  방해하였다. 히틀러의 판단에  따르면 
사회민주당은 스스로의 이념적 상투어와 어설픈 사상으로 장식된 평이한 생각들
에 걸려 넘어졌다. 반대편의 보수적인  유명인사들이 '역사적 권능'이라는 특별의
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회민주당은 역사철학적 기반을 가진  자기만족에 빠져
서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진보에만 매달렸다. 그들은  히틀러가 해방된 질서의 최
종적인 실현에 앞선 짧은 우회로라고 여겼다. 
  슐라이허는 분명히 수많은 간계들과 정부기구에 어울리지 않는 음모들을 꾸며
서 자신의  신용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것만으론느 그를 히틀러보다  더 믿지 
못할 충분한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장군을 몰락하도록 내
버려둔 냉담성에는, 전통의 표상에 전혀 맞지  않았던 이국가에 반대한느 전통의 
어떤 신중성이 드러나  있다. 어쨌든 이 모든 신중성, 불쾌감,  반대를 통해서 슐
라이허가, 권력의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히틀러에 대항하여 그나마 마지
막 남겨진 대안이란느 인식이 붕괴되고 말았다. 대연정이  붕괴된 뒤 몇 해 동안 
사회민주당은 거의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이제 사회민주당이  한 번 더 벌떡 일
어섰지만 그럼으로써 얼마 남지 않은 공화국의 마지막 생존 기회마저 없앴을 뿐
이다. 

  약아빠진 수상은  기대보다 빠르게 출구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올바른 자기  생각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휘안 정책은 기업ㄷ가들을, 신도시 정책은  지주들을, 그의 츨신은 사회민주당을, 
슈트라서를 잡으려는 생각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헌법 개정
은 실현 불가증하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의회를  가진 정부도, 의회 없는 정부도, 
혹은 폭력 투입도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치  자체가 그와 더불어 종말에 이
른듯했다. 새로운 내각을 위한  교섭을 아직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
각 조직 문제는 반쯤 가려진 상태에서 열렬히 이루어지는 활동의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협상  위치를 강화하고 국가사회당의 권력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1월 15일로 예정된 리페 지역 지방의회 선거를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아부
었다. 비용이 가장 많이  투입된 선거전에서 그는 한 번 더  유명한 당 연설가들
을 전부 오인하우겐 남작의  성에 소집해서 저년마다 그들을 물림듯이 투입하였
다. 첫날 괴벨스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까지 합해서 세 번 연설하였다. "  히틀
러 자신도 며칠  사이에 열여덟번의 집회 연설을 하였다. 여러  번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냉담한  경멸감에 부딪쳐본 확고한 심리적 눈길을 가지고  그는 이 
선거가 가진 기회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처음부터  선거결과가 권럭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결정적인 시련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선거전을 펼쳤다.  실제로 여론은 
이런 관팡 방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약  10만 명 유권자들의 투표인 이 작은 
지역선거가 마치 '6800만 인구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시느이 판결인 것처럼 모
두 기다렸다. 
  이렇게 엄청난 투입에 알맞게 히틀러는 1월 15일에 전 해 7월 선거 이후 최초
의 승리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당은 39.5 퍼센트의 표를 얻어서 전해에 리페에서 
얻었던 득표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계열정당들은 
모두 합쳐서 히틀러  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그러나  국가사회당의 엄연한 
승리였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론은, 이 결과를 비할 바 없는 노력의 결실로 보지 
않고, 또한  탈진해서 대규모 선거전을  펼칠 능력이 없는  국가사회당에게 작은 
선거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는 상황의 이점을 고려하지  않고서, 이것을 
히틀러 정당이 패하지 않는다는 영광을 되찾은 것이라고 여겼다. 
  히틀러가 1월 18일 최근  자기에게 합류한 주류상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에 베
를린 달렘에 있는 집에서 프란트  폰 파펜을 만났을 때 높아진 자신감으로 수상
직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일 것이라는 
파펜의 대답으로 회담은 결렬 위기에 빠졌다. 
  며칠 뒤에 번거로운 비밀유지 조치 아래서 대통령 아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담
이 다시 진행되었다.  히틀러와 그 수행원들은 어둠 속에서 마당을  통해서 리벤
트로프의 집으로 들어가고,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국무비서  마이스너는 처음
에 보란 듯이  오페라에 참석하였다가 휴식 시간이  끝난 직후에 로열석을 떠났
다. 파펜은 리벤트로프의 자동차로 호송되엇다. 
  모든 참석자가 다 모이자마자 히틀러는 대통령  아들을 옆방으노 불러냈다. 마
이스너의 참석을 고집하였던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는 그로써 고립되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두시간에  걸친 둘만의 대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
는지 전혀 확실하지  않다. 자신의 전략적인 방법에 알맞게 히틀러는  아마도 적
절한 위협과 매수를 뒤섞어서 대통령 아들은 자기 편으로 붙잡으려고 애썼을 것
이다. 그중에 아마도  국가사회당측에서 이미 되풀이해서 확언했던  것으로 프로
이센에 대한  정부측의 쿠대타 행동의 책임을  물어 힌덴부르크를 고발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힌덴부르크일가가 노이테크 영지를 양도하면
서 나온 탈세 소문을 국가사회당이 밝혀 낼것이라고 오스카게에 암시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특별히  산업체의 돈으로 획득한 영지는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서 형식상 힌덴부르크가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선물되었다. 1932년 7월 20
일 사태로  인해 힌덴부르크는 상당히 걱정하였다.  브뤼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슐라이허가 수상직에서 물러나기 4일 전 저녁에 병원에 있는 나를 방문한 에르
빈 플랑크는  힌덴부르크가 고발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정부ㄱ 직면하게 된 
곤란점들을 설명하였따.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데 히
틀러가 동의한 까닭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나아가 히틀러의 최면적인 힘도 기회
주의적인 대통령 아들에게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리벤트로프의 
집으로 들어설 때는 히틀러에  대해 주저하던 오스카가 돌아오는 길에서 마으스
너에게, 이제  다른 가능성은 없다, 히틀러가  수상이 되어야 한다,  게다자 파펜 
자신도 부수상직에 동의를 하지 않았든냐고 말했다. 
  슐라이허는 이때쯤 해서냐  비로소 상황의 전체적인 위험성을  간파한 듯하다. 
1월 23일에 그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국가사회당을 분열시키고 의회의 비중
에 따라 내각을  조직하려는 자신의 의도는 실패하였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어서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사회당과 
공산당의 금지령을 선포할 전권을 청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2월 2일의 대립
을 상기시켰다. 그 당시 파펜이 비슷한  해결책을 제안했지만 슐라이허의 반대에 
부딪혀서 좌절되었다. 상황은 변했다는 수상의 암시를  늙은 대통령은 들으려 하
지 않았다. 그리고 마이스너와 의논한 다음 슐라이허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예상대로 대통령 주변 세력은 지체없이 슐라이허의  의도를 여론에 흘렸다. 사
방에서 격렬한 항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짐짓  화난 태도로 
국가 쿠데타 계획 '슐라이허 최고'를  비난하였다. 공산당원들도 당연한 일이지만 
화를 냈다. 수상은 민주적 중도당에서도 나머지 위신을 잃고 말았다. 
  한 목소리로 나오는 이런 반응이  힌덴 부르크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리 없었
고, 그래서 히틀러 내각의  계획에 더욱 마음이 쏠리게 되엇다. 1월 27일에 괴링
이 대통령궁으로 마이스너를 ㅌ아와서 '존경하는 사령관 각하께'히틀러는 슐라이
허와는 대대로 법을 깨뜨림으로써  대통령의 양심을 부담스럽게 하지 않고 엄격
하게 헌법을 준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포위작전
  그 사이 파펜은 끈질기게 계획을 더욱 앞으로  밀고 나갔다. 이 시점에서 그의 
계획은 장래의  내각조직에 도이치  국가민족당을 참여시키고, 대통령과  가까운 
철모단 지도자를 참여시켜서 이 계획을 대통령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데 집중되
었다. 도이스터베르크는 이른바 히틀러 내각의  '절박한 필요성'에 대해서 결정적
으로 반대하였지만 젤테와 후겐베르크는 파펜의 계획에  동이하였다. 지난 몇 해 
동안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후겐베르크는  "어떤 일도 일어날 리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및 바위군 최고 통수권자 자리에  남
고 파펜이 부수상이  되고 후겐베르크 자신은 경제 분야를, 젤테는  노동부를 맡
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히틀러를 포위하자는 겁니다."

    힌덴부르크의 흔들림
  힌덴부르크는 지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어쩌다 사태를 제대로 바라볼 능력이 
생기곤 하였다. 그는 물론 이 시점에도 여전히  히틀러를 부수상으로 한 파펜 내
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육군 사령관 하머슈타인 장국니 1월  26일에 정치적인 
움직임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을 때 힌덴부르크는 "극히 예민하게 정치적인  영향
을 일체 거부하였지만 아마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 듯 오스트리아 상병을 
국방 장관이나 수상으로  임명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정확하게 말하
자면 1933년 1월 26일  오전 11시 30분 한 명의 증으니 앞에서"라고 하머슈타인
은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다음 날 파펜이  나타나서 대통령에게 파펜 내각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힌덴부르크는 이제  히틀러의 임명에 반대하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다음날 하루 동안에  어떤 사정이 전기를 마련했는지  세부적으로 알 수가 없
다. 측근 세력의 강력한  노력이나 국가사회당의 위협, 대지주와 우파 그룹의 개
입이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그  누구에게도 슐라이허란느 
이름이 대안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한몫  하였다. 응석받이 재주꾼 파펜
이 새로운 정부에는 우파 대표들이 빠짐없이 참석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도 대통
령에게 작용하였다. 피로에 지친 힌덴부르크가  '노동조합 간부들의 지배'라고 여
겼던 상태에 끝을  내고 우파 방식으로 통치하자는  것이 슐라이허 이전 브뤼닝 
수상을 해임할 때 가장 결정적인 동기의 하나였다.  힌덴부르크가 한 번 더 자문
을 구한 정당은 당수들도  슐라이허에게 반대하고 파펜을 다시 수상으로 임명하
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합당한 안정감을 가진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해서 자기들이 그토롱 오랫동안 공들인 마모과정을 노출시킬 시간이 되었다
는 의견이었다. 즉 공화국은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1월 28일에 슐라이허는  판을 장악하려는 최후의 시도로 힌덴부르크에게 의회 
해산권을 요청하고 안 되면 해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정오경에 그는 대통령 궁
으로 갔다. 그가 이 시점에서도 거의 준비가  끝난 히틀러 내각에 대해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그가 영향력을 상실하였는지 분명하게 보
여주는 부분이다. 정반대로  그는 마지막까지 힌덴부르크가 자기 편이라고 믿고, 
언제라도 자기에게 해산권을 주겠다는 이전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여겼다. 그
랬기 때문에 대통령이 다시금  요청을 거절하자 그는 개인적으로 모욕을 받았다
고 느끼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 각하, 각하계서 저
의 직무수행 능력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실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4주 전만 해도 그 반대의 말씀을  서면으로 해주셨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각하꼐
서 임명한 수상의  등뒤에서 다른 사람하고 협정을  맺으실 권리를 인정할 수는 
없군요. 이것은 약속 위반입니다.         
  대통령이 가지는 한  발을 이미 무덤에 내려놓고  있으며 이런 결정을 언젠가 
하늘예서 후회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슐리이허는 화가 나서 냉정한 태
도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약속  위반을 하신 다음에도 각하께서 하
늘나라로 가실지 저로서는  확실치가 않군요."(힌덴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
다. "조국을 위해 당신이 애써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오, 장군. 이제는 신의 도
움으로 토끼가 어떻게 계속 달리는지 두고 봅시다.")
  슐라이허가 물러난 직후에 파펜이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마이스너와 함께 대
통령에게 히틀로를  수상으로 임명하자고  졸랐다.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힌덴부르크는 결정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엿다. 관례와는 달리  그는 히틀러 
자신이 새로운 정부 내각을 조직하도록 청하지  않고, 파펜을 "의회의 여러 정당
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정치적 위치를 분명하게 하고 현재의 가능성을 확정하가."
는 명령을 수행할 '대리인'으로 임명하였다. 

    마지막 난제들
  그날 오후 재빨리  파펜은 장관직 두 개의  후겐베르크의 참여 약속을 받아냈
다. 그런 다음 국가회당의 당수를 찾았다. 광범위한 사전협상에서 이미 히틀러측
은 수상직 이외에 내무장관직과 괴링을 위해서 새로 만들어낸 시민 비행부 장관
직을 받기로 합의하였다.  히틀러는 그밖에도 프로이센 총독직과  프로이센 내무
장관직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프로이센 경찰 통수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밖데오 선걸르 다시 치를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금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되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다른 조건들에 대
해서 듣더기 다시  나쁜 예감에 사로잡힌 듯했다. 그러다 물로  ㄴ이중적인 의미
였지만 ' 이것이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라는 히틀러의 약속을 듣고 겨우 진정하
였다. 그리고  마친네 그는 준비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였다. 파펜이 
프로이센 총독직을 차지한 것만 빼면 히틀러의  요구는 모두 관철되었다. 결정은 
내려졌다. 
  1월 29일 슐라이허가  하머슈타인과 함께 포츠담 위수병에게 경계령을 내리고 
대통령을 체포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방위군을  장악하려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 결정은 더욱 속도가 붙었다. 늙은 대통령을 '납으로 봉인된 가죽 자동
차'에 태워서 노이데크로 데려가야 한다고 오스카  힌덴부르크의 부인은 며칠 동
안이나 화가 나서 떠들었다. 수상 광장에 있는  괴벨스의 집에서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대담한 선동가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즉각적으로 베를린 돌격대에 경
계령을 내렸을 뿐  아니라 기대하고 있는 권력에 미리 도취하여,  빌헬름 거리를 
점령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여섯 군데 경찰대대에 대기 명령을 내렸다.
  이 소문을 낸 사람이 누군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가 그 소문으
로 이익을 얻었는지는 아주 분명했다. 파펜은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는 데 이 위
협적인 군사 쿠데타의  유령을 이용하였다. 1월 30일 새벽에  블롬베르크 장군을 
제네바로 소환하여 다른  내각 구성원에 앞서서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이것은 
분명이 슐라이허가 마지막으로 절망적인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기선을 제압하
기 위해서였다. 슐라이허는 이제 자기 쪽에서 히틀러와 결탁하려고 하엿다. 히틀
러가 내놓은,  선거를 다시 하자는  조건에 강하게 반대하였던  후겐베르크도 이 
같은 위협으로 압력을 받았다. 
  파펜은 확인되지  않은 쿠데타 소식이 히틀러에게  들어가는 것ㅇ르 막으려는 
의도에서 1월 30일  아침 7시에 벌써 그를 이쪽으로  불러서 '격양된 흥분상태에
서' 그가 내세운 선거라는 조건을 바꾸려고 했다. "11시까지 새로운 정부가 구성
되지 않으면 방위군이(쿠데타를 위해) 행진할 것이오!"하고  그는 소리쳤다. 그러
나 후겐베르크는 파펜봐  더 날카롭게 히틀러의 속셈을  꿰뚫어보았다. 히틀러는 
무한한 국가재원을 투입해서 새로운 선거를 치름으로써 11월 6일의 선거 결과를 
만회할 기회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반대 의사를 
고집하였다. 
  파펜이 10시 10분 전에 계획된  내각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눈이 얇게 쌓인 정
원을 지나 대통령 궁의 마이스너의 집무실에서 장엄한 태도로 새 수상 히틀러에
게 인사했을 때 다시  모든 것이 한 번 더 위태로워지는  듯했다. 히틀러가 감사
의 말을 하면서 "이제 도이치 민족이 보통 선거를 통해서 이미 만들어진 내각구
성을 확인해 주어쟈 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후겐베르크의 완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대단히 격렬한 대입에서 히트러는 상대방에게 한  발 다
가서서 새로운 선거가 내각의 인적 구성을  바꾸지는 않으리라고 '화려한 약속의 
말'을 하였다. 자기는 "현재  이 자리에 계신 누구와도 작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파펜이 근심스럽게 뒤를 밀었다. "고문관님(후겐베르크), 어려움 속에서  이
루어진 합의를 위태롭게 할 생각입니까? 당신은 도이치 남자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히틀러가 포위해서 제어한다는 거대한 결의는 이로써 첫 시련에서 이미 그 약
점은 노출했다. 단순히 수적으로만 살펴보면 히틀러를  소수파로 만드는 데 성공
하였다. 국가 사회당원 세명이 여덟명의 보수파 장관들에 마수저는 것이며, 국가
의 결정ㅈ거인  열쇠가 되는 지위들은 모두  사회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단단하게 
결속된 동지들 손 안에 들어있었다. 다만  그를 포위한 사람들이 파펜, 노이라트, 
젤테, 슈베린 크로지크만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방어를 위한 가치의식도 에너지
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래되어  내려오는 특권을 지키는 것밖에는 
별 다른 관심도  없었다. 히틀러가 수적으로 불리한 합의를 기꺼이  수락한 것은 
그가 가진 자신감뿐 아니라 이들 보수파에 대한 상당한 경멸감을 보여주는 것이
다.
  방의 창가에서 이들 동맹자들은 힘을 합쳐서 저항하는 후겐베르크를 공격하였
다. 옆방에서는 대통령이  국무비서를 불러서 이렇게 지체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초조하게 물었다. 마이스너는  '손에 시계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여러분 대통령에 대한  선서가 11시에 정해져 잇습니다. 지금 11시  15분입니다, 
대통령 각하를 더 이상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사령관 대통령의 전설적
인 이름은 공화국 최후의  생사 순간에, 보수파 친구들의 공격도, 히틀러의 기습
하는 기술도, 파펜의 맹세도  하지 못했던 일을 갑자기 이루어냇다. 솔직한 자부
심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 타당하게  후겐베르크는 자신을 가리켜 '고집불통'이라
고 불렀다. 작년 8월에만  해도 근느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자신은 '히틀러에게
서 계약에 대한 충실성'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무슨 일을 하는 것
인지 잘 알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약속 시간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보였
다. 몇 분 뒤에 내각은 선서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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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함께 앞으로!
  파펜은 정말로 자신이 정치적인 걸작품을 만들어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슐라이허레게 복수를 했고,  히틀러 길들이기 작전을 실현하였다  예상치도 않았
던 수상직 역임 이후로  부조리하게 피어난 명예욕도 내각에 복귀함으로써 만족
시켰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국가를 양도하지 않고 책임 속으로 끌어들였다. 국가
사회당의 당순느 대통령 내각의  수상이 아니고 의회 다수파 수상직을 수락하였
기 때문이다.  그는 힌덴부르크의 특별한 신임도  얻지 못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기,  프란츠 폰 파펜의 것이다.  히틀러가 대통력과 만나는 자리마다 
동참한다는 유보조항을 넣은 것도 협상의 성과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부수상이며, 프로이센의  주인이었다. 내각에서 나치당원은 
고작해야 내부장관직을 차지했을  뿐이다. 지방 경찰은 내무장관에  속하지 않앗
다. 그리고 다른 장관직이래야  괴링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일 뿐, 실질
적인 권한은 갖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괴링은  플이센 내무 장관직도 겸임하겠지
만 파펜은 자신이 완강하게  그의 길을 막을 것이다. 내각에서 외무, 재무, 경제, 
노동, 농업부는 보수파의 손에 있었고, 방위군에 대해서는 정처럼 대통령이 통수
권자였다. 어쨌든 저 치명적인 히틀러 씨를  기업가와 대지주의 요구에 봉사하도
록 만들고, 권위적인 새 국가를 위한 파펜  자신의 계획에 봉사하도록 만들 것은 
날카롭고도 절묘한 배합이라고 생각했다. 
  수상직에서 실패한 파펜은, 위기에 처한 현대의  산업국가가 지나간 시대의 대
표자들에 의해서  통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던 것 같다. 약간  수상쩍은 이 
대중 조련사(히틀러)와  더불어 민중 없는  지도층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극복될 
것도 같았다. 파펜은 경고하는 사람들에게 정치  흥행사같은 말투로 자신감에 차
서 대꾸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시군요, 우리가 그를 참여시킨 겁니다. "
  히틀러는 무론 처음부터  이런 의도를 잘 간파하고 있었다. 새로운  선거의 요
구는 바로 그에  대한 전략적 대응책이엇다. 선거에 승리하면 그는  모든 약속을 
깨고 파펜이 만들어낸 틀을  부수고 자기에게 마련해준 꼭두각시 수상직을 극복
해버릴 속셈이엇다. 힌덴부르크가 "여러분, 이제 신과 함께 앞으로 나갑시다!" 하
는 말로 작별을 고하기도 전에 벌써 이 '민족주의농축 내각'은 서로 엇가리는 속
셈들을 감춘 체제가 되었다. 
  빌헬름 거리는 괴벨스가 소집한 말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의심, 희망, 
행운, 낙담 사이에서 이리저리 찢기면서' 맞은편 황제궁 호텔에서도 히틀러의 추
종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른스트 룀은 쌍안경을 들고서  신경질적으로 수상
관저 입구를  관측하였다. 맨 먼저  괴링이 나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외쳤고, 곧 이어서 히틀러의 자동차가 입구를 떠났다. 그ㅌ 선 채로 대중
의 환호성을 맞았다.  몇 분 뒤에 추종자들에 둘러싸여서 황제궁에  들어섰을 때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고 어떤  목격자가 전한다. 하느님이  자기를 도우시는 
한 자기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이미 여러 번이나 선언했다. 
  1월 30일 오후에 그는 최초의 조치로 이러한  의도를 한 번 더 확인하였다. 지
체 없이 이어진 각료회의에서 그는 이제 아무런 소용도 없어진 후겐베르크의 반
대를 무릎쓰고 의회  해산과 새로운 선거를 결정하였다. 파펜 자신이  교묘한 심
리전략으로 반대하는 후겐베르크를 대통령이 싫어하는 '당리당략' 이라고 밀어붙
여서 그의 의혹을 물리쳤다. 이어서 힌덴부르크가 이 결정에 서명하였다. 

    횃불행진
  그날 저녁  국가사회당원들은 어마어마한  횃불 행진을 하였다.  정부청사들이 
자리잡고 잇는 지역의  시위행위가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길에는  구경꾼들이 흥
분하고 소란스럽게 때를  이루어 몰려들었다. "베를린은 오늘  밤 완전히 사육제 
기분에 빠져 있다. " 그 사이로 중요한 일을 한다는 기쁨에 사로잡힌 공무요원들
이 질서를 잡았다. 저녁 7시부터 자정이 넘도록  제복을 입은 2만 5천 명의 히틀
러 추종자들이 철모단과 함께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서 수상관저 곁을 지나 행
진해 갔다. 얼굴들과 집의 담벼락에 불안한  그림자를 던지는 정열적인 횃불부대
였다. 불이 켜진  창문 한 곳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가볍게  오락가락하는 히
틀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옆에는 괴링, 괴벨스, 헤스가 있었다. 창문 몇 개 떨
어진 곳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근심스럽게, 행진해 가는  집단을 바라보면서 
막대기로 악단의 음악에 장단을 맞추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책임자들의 항의를 
무릎쓰고 괴벨스는 이 시위 장면을 라디오로  중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히틀러
가 불쾌한 태도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오직 뮌헨 방송국만  끝까지 거부하였다. 
자정이 지나서야 마지막  중대가 정부청사 지구를 지나쳐  행진해갔다. 괴벨스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는 가운데 
'도취의 비틀거림... 이 위대한 기적의 밤이 끝났다.'

    승리냐, 음모냐?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권력장악은 '기적'과 '동화'라고 찬양되엇다. 마법의 영역에
서 가져온 단어들이 정부의 선전 전문가들에 의해서 이 사건에 초자연적인 축복
의 후광을 부여하는 데 이용되었다. 히틀러 자신이 1월 30일에 어떤 추종자에게, 
"항구를 눈앞에 바라보면서 음모에 짓눌리고, 재정적 곤궁에 시달리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 다니는 1천 2백만 명의 무게에 짓눌려서 좌초하련느 것처
럼 보일 때" 오직 신의 섭리를 통해서 구원되었다고 말햇다. 그러한 형식들은 사
건에 분명히 어떤 급전의  요소, 믿을 수 없는 요소를 덧붙일  때 특별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당이  파열돠려는 위기에서  갑자기 
대통령 방 쪽으로 발기길을  바꾼 것,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보잘것없는 출발, 무
기력과 추락에서 갑작스렵게  권력의 정상에 선다는 급전이었다. 사실상 '거기서
는 뒤틀리기는 했지만 동화의 요소들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괴벨스가 도입한 기적이라는 생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해석
애 몇 가지 특징을 부여하였다. 그것은 히틀러를 악마로 여기고, 그의 성공을 어
떤 모르는 힘이  배후에서 작용한 탓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복수욕에  불타는 기
사 폰 파펜의  음모에 역사전환의 거대한 무게를  실어주려는 등의 모든 해석의 
시도에 쓸모가 있다. 이런  해석은 다양한 변이형태로, 권력 장악이 역사적 우연
이었다는 생각을 포함한다. 
  분명히 히틀러의 길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가능
성들은 우연, 경박,  불행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스스로의 길
을 착각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역사적이고 일부는 정치적인 특성을  가진 강
력한 성향들이 사태를  1월 30일까지 몰아갔다. 저항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아
마 그것이야말로 진까 기적이었을 것이다. 
  브뤼닝이 해임된  이후부터 공화국과 히틀러 사이에는  오직 정신이 흐릿해진 
노인의 흔들리는 의지력과  슐라이허의 음모, 픈란츠 폰 파펜의 눈먼  단순성 밖
에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바라본 사람이라면 배후의 음모, 이익 집단의 개입, 
독재적인 권모술수 등에는 오직 부찾거인 의미만을  부여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공화국이 붕괴했다는 상황에만 영향을 주었을  뿐이지, 붕괴 자체를 가져
온 것은 아니었다. 
  1932년 여름 이후로 그가 권력에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고 해도, 그 거
리는 너무 멀어 권력은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따. 그의 상대방들이 
그에게 그 모든  것, 즉 정당과 으회의  배제, 계속된 선거전, 헌법  남용의 습관 
등을 가져다주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저항하려고 일어서기만 하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나서서 그 행위를 가로막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의심의 여지 없이 마지막까지 상대바의 힘이 그의 힘보다 원
등하엿다. 그러나 그 힘들이 서로 싸우면서 그들은 서로를 상쇄시켰다. 국가사회
주가 모두의 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어렵지 않았다. 시민, 공산주의자와 마
르크스주의자, 유대인,  공화국주의자들의 적이었다. 그러나 눈멀고  허약한 상태
에서 자기들 모두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 참여하엿던 사람들의 자기  변호는 아직도 여전히 히틀러의 수상 임명은 
국가사회당이 가장 강력항 정당으로 부상한 결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핑곌
르 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회 민주당이 공화국 전기간 동안 1933년 1
월 30일 직전 몇 달 동안은 빼면 똑같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내각의 다수
파조차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헌법의 정신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지만, 히틀러가 철저히 헌법
의 공공연한 적대자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을  역시 놓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가사회주의잗르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온갖 저항
에 부딪쳤을 것이다. 사실상 히틀러의 보수파 조력자들은, 자기들의 의도가 비천
하기만 하지만 효과적으로  히틀러의 내면에도 간직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너무 늦게서야 그가 자기들과  자기들이 보호하려고 애쓴느 세계에 대해서 텔만
과는 다른 방법이지만 그 못지 않게 과격한 방법으로 대립되는 인물이라는 사실
을 깨달았다. 
  어떤 이름 없는 바이에른의  수사과 공무원이 1921년 여름에 국가사회당의 집
회를 방문한 다음에 보고하였다. 히틀러는 "제2의 붉은 군대  지휘자일 뿐이다. " 
이 공무원이 1933년의부패한 유명인사들보다 히틀러의 본질을 더욱 날카롭게 파
악하였다. 
  그토록 많은, 유리하게 작용한 힘들과 상황들을 보면서  이 몇 주 동안 히틀러
의 남다른 공ㅈ이란  대체 무엇일까 물어보게 된다. 사실상 1930년  1월 30일 직
전에 그의 독특한 능력이 이렇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공적이란 수동적인 
천성이었다. 극히 초조한  상황에서도 그는 기다리고 완고한  추종세력을 제어하
고 붕괴의 와중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대통령의 옆방
에서도 위대한 도박꾼의 냉정함으로 모든 위험에 맞서서 자신의 판세를 지킬 줄 
알았다.
  영 안에 반대하는 국민청원 이후  몇 년을 돌아보면 그가 소동과 선전의 국면
을 지나면서 정치가로서 얼마나  성장했는지 볼 수 있다. 지난 몇  주 동안의 경
험은 다시금 그의  도박사 기질을 강화시켰다. 이 시기에는 그는  자기가 포기하
고 난 다음엔 언제나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자신의 생애에서 놀라운 일이라고 말
했다. 
  
    수상직에서 하는 독백
  그날 방, 환호성이 가라앉고,  음악과 행진의 발걸음 소리가 멎었을 때 히틀러
는 이른 새벽까지 수상의  접견실 옆에 있는 작은 방에 머물렀다.  그 자리제 참
석한 사람 중 한 명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깊은 감동 상태에서 그는 끝없이 장
황한 독백에 빠져들었다. 그는 오전에 있었떤 선서식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자신
의 성공들을 기억하였다. '빨갱이' 적들이 말을 잃었음을 지적하고, 그 다음 자신
의 선전 원천으로  넘어갓다. 이번 선거처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  선거전은 없
엇다고 확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
신의 활약은 지구의  지배권을 놓고 백인, 즉 아리안족의 결정전을  벌이는 것이
다. 아리안 이외의  종족, 유색인종, 몽골인종은 볼셰비즘의  지배 아래 이끌려가
려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세계사게서 가장 위대한 게르만 종족 
혁명'이 시작된다.  종말론적인 전망들이 건축의  전망들과 뒤섞였다.  자신은 맨 
먼저 수상관저를 개축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수상관저는 '담배곽'일 뿐
이다. 아침  무렵에야 그는 뒤쪽으로 난  작은 물을 지나 건물을  떠나서 호텔로 
건너갔다.
  이날의 마비시키는 경험들,  그이 만족감과 보상 체험 등은 아직도  목적이 아
니었다. 그것은 목적으로 이르는 도중의 한 단계일 뿐이었다. 이날 밤의 긴 연설
에 나오는 선언이 아무리 불확실하게 울리는 것일지라도 그의 의도는 이제 전보
다 더욱 확실한 전망으로  다가오는 전망으로 다가오는 혁명을 지향하는 것이었
다. 진짜 혁명가처럼 그는  자기와 함께 역사의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특징적인 일이지만 그는  이러한 생각에 부정적인 색채를 입혔다. 이  시기에 그
는 벌써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바로  독일의 마지막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다."

    중간 관찰 : 도이치의 파국인가, 도이치의 계승인가?

  히틀러가 수상직을 넘겨받으면서 행산 횃불행진, 대중행진, 박수갈채를 동반한 
극적인 기념식은 사건의 헌법적인 의미에는 도무지  맞이 않은 것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사건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정부  내각 개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론은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 사건을 이전의 내각 개편과 비교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연합내각인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실패한 오스트리아 화
가를 제어하겠다."는 화려한 의도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처
음부터 권력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전략적인 
목적의식, 그리고 계획적인 연출에 의해서 진행된  열광의 압력파도는 새로운 ㅅ
가의 궤적을 만들어냈다.  그 궤적은 짧은 시간 안에 보수파를  붙들어 쫓아내게 
된다.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축하하며, 함께 통치하려는  파펜과 그의 동지들은 
온갖 시도는 숨을 헐떡이며 따라 뛰려  애쓴다는 인상만을 만들어냈다. 내각에서
의 수적인 우세,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 경제, 군대, 관리의 통제력 등을 확보하
고도 경쟁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했다. 
  비밀 암호에 따르기라도 한  듯이 1월 30일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사
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갓다. 혁명기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얻릉 수 있으며, 
배신, 계산, 두려움이 시대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한 번 더 확인되었다. 
그러나 성격도 없는 아첨 패거리만 대중의 정치적 전환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고 
드물지 않게 자발적인 으지가  나서서 모든 선입견, 이념, 사회적 한계를 부수고 
새로운 물결에 동참하였다 "우리 모두가 기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라고 고트
프리트 벤이 옛날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소란그럽게 진행되는 출발의 분위기
에 휩쓸려 들어갔던 저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강력한 전통적 정당들과 연맹들이 이러한 돌진의 와중에 무너져내려서 강제해
산과 금지령이  나오기도 전에 지도자 없는  도당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공화국, 
내면의 붕괴, 무기력 같은 과거는 끝났다. 새로운 것을 향한 격렬한 고백의 물결
에 끼지 않은  사람들은 빠르게 줄어들어 소수파가 되면서 점차  고립되었다. 그
들은 수십만  명이 동참한, 불켜진 대성당  아래의 대중 맹세,  지도자의 인사말, 
밤의 불놀이, 합창 등  새로운 공동체 의식의 압도적인 시위에서 제외되엇다. 최
초의 테러 표지들도 환호성을  줄어들게 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환호성을 동반하
였다. 대중의 의식은 테러를, 오랫동안 기다려 온 터져나오는 에너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커져가는  소음이 돌격대 참모진의 '영웅술집'에서  터져나도는 외
침들보다 더 컸던 것이다.
  
    역사 기록자들의 고민
  이렇게 열광적인 동반 상황이 히틀러의 권력장악에 불안정한 성격을 부여하였
다. 이런 열광은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역사적인 사고로, 음모나 어두운 배신으
로 표현하는 모든 주장에서 힘을 빼앗았다. 이  시기의 사건을 해석하다 보면 언
제나 되풀이해서, 국가사회주의가 도이치 민족처럼 정신적, 영적 모험을 겪은 오
랜 문화 민족에게서  어떻게 그토록 빠르게 힘도  들이지 않고 권력을 차지하고 
다수를 정복하였는가, 그리고  열광과 믿음과 헌신의 히스테릭한  상태로 이끌어
갈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민족들 중에 고급귀족'으로 여겨진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안정성들이 어떻게  그토록 분명하게 마비될 수 
있었단 말인가. 당시의  어떤 관찰자는 히틀러가 취임하기 이전에 이미  어떤 피
할 수 없는 결과들이 나타날 것인지  서술하였다. "독재, 의회 폐지, 모든 정신적 
자유의 억압, 인플레이션, 테러, 내전 등이 나타날 것이다. 반대파를 간단하게 없
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총파업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국기당과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히트러가  방위군을 장악하고 무기를 사
용한다고 해도, 수백만의 확고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수백만의 확고한 사람들은 없었고, 피의 공격도 없었다. 히틀러는 도둑
처럼 밤에 몰래 온  것도 아니었다. 다른 어떤 정치가도 그런  적이 없을 정도로 
요란하게 그는 모든 우회로와 전략적 조작을 통해서 자신이 민족을 어디로 이끌
어가려는지 분명하게 밝혔다. 곧 독재, 반유대주의, 생존공간의 정복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도이치 성향이라는 이론
  권력 장악의 쾌감은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수많은 관찰자들에게 독일이 이 몇 
주 동안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갔다는 인상을 일깨웠다. 공화국 헌법과  게임 규
칙들이 아직 타당한 것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독특한 방식으로 극복되고 버
려져서 낯선  것처럼 여겨졌다. 한  민족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이성과 진보라는 
유렵 전통을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나타나는 이 그림이 수십년
이 지나도록 이 사건에 대한 이해의 열쇠로 여겨졌다. 
  30년대에 이미 국가사회주의의 성공을 도이치 심성에 뿌리내린 어떤 특이성으
로 설명하려는 최초의 해석들이 나타나고 있다.  고집스러운 자부심을 지닌채 문
명과 교화에 대한 거리감을 선택된 문화민족의 '세계 불쾌감'이라고 이념화 시키
는 도이치 특성, 즉 결점으로만 가득 찬  해도하기 힘든 도이치 본질과 연관시키
려는 해석들이다.  비스마르크, 프리드리히 대왕을  거슬러 루터,  아니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9세기에 토이부르크 숲에서 라틴  사람이 도
이치 땅에 침입하는 것을  막아냈던 게르만 영주 아르마니우스까지 포함하는 조
상들을 예로 들면서, 히틀러 이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도이치 역사에 잠재해 있
던 히틀러주의의 전통을 구성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프랑스의 게르
만 학자 에드몽  베르메유의 저서에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잇다. 그것은  또한 한
동안 앵글로색슨계의 해석 방향을 특징지었다. 
  월리엄 쉬러의 책에서도 독일의  이미지에 몇 가지 특성을 부여하였는데 그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메유는 이렇게 썼다. "역사의 여러 단계에서 도
이치 사람들은  내면의 혼란과 허약함에서  아니면 반대로 제압되지  않고, 지지 
않는 힘의 표상에서 나온 절망적인 확신을 가지고서 자신들이 신의 사명을 완수
해야 하며 독일은 섭리에 의해 선택받았다고 믿었다. 
  로마 제국 찬탈, 한자 동맹, 종교개혁, 도이치 신비주의, 프로이센의 부상, 낭만
주의 등에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명 욕구가 은폐된 형태로 드러나 있다고 하였
다. 이러한 사명은 비스마르크의 '피와 강철의 정책', 황제제국의 세계권력의지와 
더불어 점점 더 공개적인 권력정책의 방향을 취하는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자면 도이치 역사에  '죄없는 현상'이란  없다. 목가에서도 
복종, 군국주의,  팽창의지 등을 읽을 수  있으며, 무한성을 향한  도이치의 동경 
또한 현실에서는 권력수단이 부족하지에 유령에 세계에서 지배권 행사를 하려는 
시도라고 한다. 그 모든 것은 마지막에 히틀러에게 집중된다. 그는 당시 어떤 유
명한 책의  제목처럼 '도이치 파국'(수없이  덧붙인 관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수백년 역사의 소실점을 두려는 시도들은 국가사회주의 해석과 비슷해질 위험에
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가사회주의해석은 스스로  한자동맹 신비주의, 프로이센 
정신, 낭만주의를  찬탈하고 제3제국을 도이치 역사의  자기실현이라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시도, 곧 구가사회주의와  전체주의를, 전통과뿌리깊
은 질서를 거부하는  민주 시대의 위기현상으로 보고, 그 사회적  반항심과 경제
적 허약함을 묘사하고,  이것을 도이치의 특성이  아니라 현대의  특성이라고 정
의하려고 한느 시도  역시 문제가 많다. 그것을 19세기의 수많은  염세적 예언들
이 말한 대로  전체주의 국가의 부정적 유토피아가 실현된 것으로  여겨ㅆ. 도이
치 쪽이세 나온,  이런 해석의 풀발점을 가진 묘사에서 히틀러는  이따금 지나치
게 낯선  현상으로 서술된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치우친 모든  해석의 시도들은 
현상의 특성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마르크스주의  해석모델의 경우에 그것이 가
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자신들의 원칙에 얽매이고, 한때는 굴복한 동지들에 대한 
경건한 심정에  얽매여서 이쪽 대표자들은  잘 알려진 자본에서  가장 반동적인, 
국수주의적, 제국주의적인 요소들이 공개적인 테러의 독재"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 사상을 마지막까지 추적해보면, 히틀러, 괴벨스, 슈트라이허가 
아니라 후겐베르크, 크루프, 테센  등을 국가사회주의의 핵심 인물로 볼 수 밖에 
없게 된다.)이 아니라 도이치의 계승이라는 것이다. 

    시대이론
  물론 국가사회주의에는 분명하게 도이치  특성들이 있었다. 그러나 베르메이유
나 쉬리가 말한 것과는  다른, 더 복잡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악의 계통나무라는 
말이나, 개별적인 설명은 이  사건의 본질은 정당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또
한 그것의 기원을 오직 현상에서만 추적하는 것도  맞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 
속에는 검은 구름 속에 번개가  숨어 있듯이 파국적인 성향에 분명히 숨어 있는 
것이다. 수많은 단순한 태도들,  혹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문제시되지 않은 태도
를, 미덕과 가치  개념들조차 국가사회주의의 성공을 도와주었다. 전체주의적 권
력체계는 한 민족의  퇴화된 혹은 범죄적인 성향들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 리
차드 3새를 악당이라고 규정해  버릴 수없듯이 한 민족을 악당이라고 규정할 수
는 없다는 것이 시대이론이다. 
  수많은 나라에 독일의 그것과 견줄만한 역사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들이 존재
하였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차이가 겨우 파시즘  지배를 막아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민주적 경향들과  실질적, 효과적으로 결합되지 못했던 뒤처진 국가의
식은 도이치의 특성만은 아니었다.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대립, 
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대립 역시 도이치의  특성만은 아니었다. 또한 독
일의 복수욕, 전투 이데올로기, 혹은 거대 권력의 꿈 등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
다 더욱 강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히틀러의 사고를 그토록 결정적으로 규정했떤 반유대주의도 도이치의 특수 현
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많은  나라들보다 도이치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약했다. 어쨌든  국가사회주의는 종족 감정으로 대중과 열광을 얻은  것은 아
니었다. 히틀러가 그 사실을 얼마나 잘 의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가 권력
장악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것을 숨기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에 잘 드러나고 있다.
(루마니아의 파시스트 지도자인 쿠드레아누는  20년대 초에 독일에 머물면서, 이
나라에는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반유대주의가 없다고 불평하였다.)  
  이 이기에 이탈리아, 터키,  폴란드,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등지에서 파시즘 혹
은 파시즘 아류  정권이 탄생하였다. 국가사회주의에서 분명한  도이치 특성이었
던 것은 이런  여러 나라들에 나타난 체제들과  비교해볼 경우에만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파시즘의 가장 과격한, 가장 절대적인 출현 방식이었다. 

    국가주의적 요소들
  지적인 영역과  실천적인 영역에 출현한 이러한  원칙적 과격함은 본질적으로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에 덧붙인 부분이었다.  사상을 날카롭게 현실에 대립시키
고, 현실에  맞서 사상에 힘을 부여하는  그의 방식으로 보면 그는  분명 도이치 
사람이었다. 지역정치가로 실패하고 티어쉬 거리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시절에 
그는 죽은 다음 명성을 위해 개선문과 둥근  지붕 홀을 구상하였다. 수상이 되어
서는 인간의 나이로 생각하지 않고  온갖 비웃음을 무릎쓰고 천 년 단위로 생각
하였다. 베르사유 조약과 독일의 무기력을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게르만 민족 이동의  결과들을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게르만 민
족 이동의 결과들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무솔리니의 명예욕이 역사적인 위대성
을 회복하자는 목적을  가졌고, 모라는 구제도와 '여신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하
려고 하였고, 그  밖의 다른 파시스트들도 미화된 것이긴 하지만  과거의 상태에
서 유혹을 받았다. 
  히틀러는 머리에서 만들어낸,  현실의 담보가 없는, 구조적인 목적을 실현시키
려고 생각하였다.  즉 종족적인 자기 주장  의지로 대서양에서 우랄, 나르빅에서 
수에즈에 이르는 세계왕국을  쟁취한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그에 반대
한다고? 그 나라들을 때려눕힐 것이다. 민족들이  자기 의지에 맞서 이주한다고?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시킬 것이다. 종족들이 자기  구상에 맞지 않는다고? 현
실이 자기의 생각에 맞게 될 때까지 그들을 선별하고, 더 훌륭하게 배양하고, 말
살할 것이다. 
  그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였다. 그의 발언에는 언제나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무모함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광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무
시무시하고도 냉혹한 선입견 없음으로 모두에게 마주서 있다. "고 그는 선언하였
다. 극단적인 과격성게서만 그는 본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사
회주의는 그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히틀러가 자신의 극단적인 과격주의를 위해 언제나 순종적인 하수인들을 찾아
냈다는 사실도 국가사회주의를 다른나라의 파시즘 운동과 구별하게 해주는 분명
한 민족적인 특성의  하나다. 이 정권의 인상을 분명하게 특징짓는  집중된 냉혹
함과 성실성의 인상을  어떤 인간적인 정부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  정권의 두
려운 모습은  주로 살인자와 고문관들이 계획적으로  실시한 잔인성에서 생겨난
다. 그리고 이  정권을 이해하는 인기 있는 이해방식은 이렇게  분명하게 범죄적
인 요소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렇나  요소들이 문학 
아니면 연예물의 서술에  등장하고 있다. 국가사회주의는 주먹에  채찍을 움켜쥔 
모습으로 의인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정권은 스스로를 그런식으로 유형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정권
은 특히 초기에  이러한 현상을 철저히 이용하기는 했으나, 그렇게  범죄적인 본
능을 풀어놓아서는 지속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가사회주
의의 본질을 구성하는  과격성은 감정을 동원하는 것이나, 책임 없는  충동 만족
의 약속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그것은 범죄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도착된 도덕
적 에너지의 문제였다.
  국가사회주의는 방향성이 없기는 하지만 강력한 도덕적 동경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호소하였다. 특히 친위대를 통해서 이러한  유형을 끌어들이고 엘리트 방식
으로 조직하려고  하였다. 이 공동체에게 끊임없이  요청되고, 밤의 제전의 횃불 
아래서 낭만적으로 강조되었던  '내적인 가치'의 요구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생각
에 따르면 다음의 덕목들을 포함하였다. 충성, 정직, 복종, 강건, 단정, 빈곤, 용감 
등이었다. 물론 모든  불필요한 관계체계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정권의 목적만을 
지향하는 방향을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도덕적 명령  아래서 그들 중 한 명이 썼던  것처럼 '차갑고 돌같은 
태도'를 지니고, '인간적인  감정을 갖기를 중단' 하였던 무감정의 하수인  유형이 
양성되었다. 이 유형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
하게 대하는  것을 정당화하였고, 말  그대로 시체를 넘어가는  능력을 요구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아를 죽였다. 이것은 제3자가  보기에는 범죄적 감정보다 더 과
격하게 보이는, 확고하고  기계적인 일관성이었다. 이러한 일관성의 즐거운 잔혹
성에는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여전히 압도적인 사회적, 지적, 혹은 인간적 원한
이 드러나 있다. 

    현실감 상실
  도덕적 요구는  특별한 사명의식으로  보충되고 확대되었다. 묵시록적인  대립 
상황 속에 있다는 느낌, '더 높은  법칙'을 따른다는 느낌, 이념의 사도라는 느낌, 
그밖에도 무엇이 되었든  형이상학적인 확신의 그림과 구호들이었다.  이러한 형
이상학적인 확신이야말로 무자비함에 특별한  성스러움을 부여하였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사명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민족의 적'이라고 
청했다.(히틀러는 1938년  2월 20일자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  임무를 
방해하는 사람은 그가  볼셰비스트든 민주주의자든 혁명적 테러리스트든 반동적 
공상가든 상관없이 민족의 적입니다."  특별  사명을 받았다는 이런 사상은 형이
상학적인  요구를 바탕에  깔고서 한스  프랑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37년 2월 10일자 일기에 이런 기록을 하고 있다. "나는 독일에 대한 신앙을 고
백한다. 독일에 봉사하는 것은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어떤 고백도, 어떤 신앙
도,, 오늘날 그리스도가 온다면  도이치 사람일 것이라는 이 신념처럼 강한 것은 
없다. 우리는 진길로악을  없애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이름
으로 유대인과 볼셰비즘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하느님, 우리를 보호하소서!") 
끊임없이 더 깊은 깨달음과 더 높은 사명을 불러대는 이러한 엄숙주의에는 도이
치의 전통적인 정치에 대한  무관심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민족의 현실에 
대한 혼란스러운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이념은 현실에서  형태를 얻고 사람들이 체험하고,  사상은 현실 속에서 절망, 
공포, 미움, 놀라움 등으로 바꾸는 법인데  그런 현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강령이 
있고, 히틀러가 말한  바에 따르면 강령의 실현에서 오직 긍정적  활동과 부정적 
활동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시대의  주역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로 
널리 알려지게  된 유머능력의 결핍은  바로 이러한 현실감  상실의 표현이엇다. 
그것이야말로 국가사회주의에 나타난 분명하게  특징적인 도이치 요소였다. 그리
고 몇가지는 이러한 특성에서 여러 가지 연결통로가 멀리 도이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놓쳐버린 혁명
  역설적인 한 주장에 따르면 근대 도이치 역사의  가장 결실 풍부한 사건은 '일
어나지 않은  혁면'이었다. 혁명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 나라의 각시대의 정치적 
특성에 대한 소극적  태도와 완고한 목가상태를 마련해주었다.  혁명능력이 없다
는 것은 특별히  복종적인 특성의 표현이라고 여겨졌으며,  선량하고 전투적이지 
않고 몽상적인 도이치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자의식이 강한 이웃의 조롱을 받았
다. 사실상 모든 혁명에 대한 깊은 의구심은, 역사적 체험이 거의 철저히 위기감
으로만 체워진  한 민족의 반동일  뿐이었다. 지리상 유럽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관계로 이 나라는 아주 일찍부터 봉쇄 콤플렉스와 방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나라 전체가 황무지로 변했던 30년 전쟁(1618~1648년 
유럽전체의 종교전쟁, 독일  영토에서 대부분의 전투가 이루어졌고, 전쟁이 끝났
을 때 독일은  완전히 황폐한 상태였다.)의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 잔혹체험에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30년 전쟁의 가장  확실한 유산은, 완전히 남의 손에 떨어지는  악몽같은 느낌
과, 모든 혼란상태에 대한 깊은 공포심이었다. 그런 혼란상태는 여러세대에 걸쳐
서 자기  나라 영주들과 외국의  영주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착취되었다. 시민의 
첫 번째 의무로 여겨지는 평화는  또한 당국에 대한 시민의 첫 번째 요구이기도 
하였다. 공포와 곤궁을  나라에서 멀리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에
서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파악되었던 계몽주의 독일에선느 영주 계급
에 의해서 보호되고, 개별적으로 찬양받을 정도였다. 과거의 두려움이 너무 깊었
던 것이다. 
  도이치의 의식에 그토록 깊이  뿌리박은 질서, 기율, 자신에 대한 엄격성에 등
의 범주들,  국가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심급이며 '악을 멈추게  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 지도자에 대한  신앙 등은 그토록 잊을 수 없는  역사의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보호 욕구를 잊을 수 없다는  역사의 경험에 기
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보호욕구를 히틀러는 효과적으로 파악하며 
약간의 소질만으로 벌써 자신의 지배욕에 쓸모있게  만들었다. 복종에 대한 요구
를 이념으로 만든  지도자 숭배 사상으로, 혹은 혼란상태에 대한  뿌리깊은 방어 
본능을 눈에 보이게 만든 기하학적인 군대 행진을 통해서였다. 
  독일에 혁명이 없었따는  관점은 오직 절반의 진실이다. 이 민족의  왕의 머리
를 자른 적도 없고 승리에  찬 시민봉기도 알지 못하였지만 세계를 혁명으로 동
원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른바  혁명의 시대
에 도이치 민족은  가장 도전적인 인식들, 가장 날카로운 혁명의  구호들을 만들
어냈다. 그리고 피히테의 고양된 말이 따르면  사고의 바윗덩어리를 마구 쏟아내
서 이 사고의  바윗덩어리들로 미래 시대의 집을 지었다. 그러나  독일의 지적인 
과격성은 자신의 집을 짓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도이치 정신에 위대성과 능숙
함을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현실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실용적인 능력의 결핍
에 불과하다. 실용적인 대토에서  비로소 사고와 삶은 서로 화해하고, 이성은 이
성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도이치 정신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 도이
치 정신은 말뜻  그대로 반사회적었고 우익 쪽에도  좌익 쪽에도 서지 않았으며 
주고 삶에  대해서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절대적이고 집중되어  있고, '난 
달라질 수 없어' 하는 태도이며, '지적인 낭떠리지를 향한'거의  묵시록적인 '성향'
이었다. 
  세계의 뇌우가 내리칠 때에  심연의 가장자리에 인간의 진부한 현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시간들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삶이 내게 무슨 상관이랴, 신
이 나를 도와주실 텐데.
  사색의 영역을 정치의 영역에서  이렇게 분리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대체행
동이라는 성격을 가졌다.  이념의 과격성은 의지의 무기력을 감추려는 것이엇다. 
사색이 현존하는 것에  대항하는 힘이 되었다는 헤겔의  말은 승리에 찬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위로의 뜻을 품고 있다. 삶의  곤궁을 지닌 시골풍 도이치 소국들
의(19세기 초까지 독일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두 개의 대국과 상당히 독
립적인 수많은 소공국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백 년 묵은 딜레마는, 사상이 아
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거시적인  영역으로 상승하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정신력이 부족한, 혹은 프랑스를 모방하는 영주들을  통해서 사상이 오랫동안 무
시되어 왔다는 사정도 역시 사상이 거시적 영역으로 도주하는 일을 도왔다. 
  19세기 초의 가장 조잡한  글에서 1920년대의 정치적 잡문들에 이르기까지 이
러한 글들이 아무리 종속적이고,  읽히다 맑, 위축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정신
의 특이한 기본동작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외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고 맞서는, 
이상적인 내면의 왕국  건설 종사하려는, '시대를 시대  자신에게 떠맡기는' 정신
이었다. 정신은  판단의 과격성에 드러나는 복수의지를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정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은 현실에 대한 섬세한 복수욕이었다.  이제 현
실이 정신에 걸려서 멸망할 차례였다. 
  19세기 동안 정치적 해방  노력 과정에서 시민의식이 체험한 수많은 실망들을 
통해서 현실의 소외  과정이 더욱 강화하였다. 그 흔적들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볼 수 있다. 정치  사상의 허구적 특성에서, 빙켈만에서 바그너에 이르는 신화화 
이데올로기에서, 그리고 비현실적인 도이치 교양개념에서 볼 수 있다. 교양 개념
은 예술과 숭고에  의한 정신의 왕국만을 자신의 요소로 삼았다.  정치적인 것은 
교양의 바깥으로 밀렸다. 그것은 민족문화의 일부가 아니었다. 
  이러한 경향들이 집중된 사회적  유형의 인물은 도이치 본질을 극히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그러한 인물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사회적인  특권을 누려
왔다. 오래된  초상화에 그려진, 세상과 거리가  먼, 사유에 잠긴  남자들이 그런 
유형이다. 그들의 교수와 같은 얼굴은 이상적인  엄격함과 원칙에 대한 충실성을 
사유의 강조와 결합하엿고, 그들의 우직성을 내면에 심연도 포함하고 있다. 그들
은 거대한 크기로 사유하였고, 체계들을 파괴하고 새로 세우리도 하였으며, 그들
의 눈길은 먼 곳에서 온 것이었다. 동시에  분명한 사생활의 요소인 친밀성과 협
소한 가정적 분위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다. 파울 드 라가드네가 말한 것처럼 '책
들과 꿈들'이 그들의 요소였다. 그들의 창의력은 실질적인 현실의 결핍에 대하여 
풍부한 보상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자의식은 정신적인 지거업에서 온 것으며, 문
화에서, 그리고 자신이 문화에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즐거움을 만들어냈다. 

    비정치적인 정치의 욕구
  현실에 대한 경멸에 맞게 정치에 대해서도  점점 두드러진 경멸감이 나타낫다. 
정치는 가장 끈질기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현실이었다. 정치란 비천한 요소이고, 
20년대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열등한 자들의 지배'였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
기까지 독일의 정치 사상은, 도적적으로나 지적으로  비천한 현실보다는 어느 정
도 우월한 음조를  지녀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배후에는, 이상적인 '비
정치적 정치'를  향한 욕구가 작용하였다. 이러한  욕구는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정치적 무기력에서 나온 것이다. 고립상태에 빠진 극소수를 제외하면, 독일의 여
론은 정치에 대해서 무관한,  드물지 않게 당혹한 태도를 보였다. 여전히 정치를 
고달픈 관심사고, 자기설득이며,  널리 퍼진 견해에 따르면,  자기 소외엿던 것이
다. 도이치 세계는 개인적인  개념들, 목적들, 미덕들을 지향하였다. 어떤 사회적
인 약속도 개인적 세계의 파토스와 견줄 수 없었다. 그것은 가족의 행복, 자연에 
대한 감동, 학식있는  인식을 향한 조용한 열의였고 전망이 가능한  만족의 영역
이었다. 도이치 사람들은 숲의 신비가 아니라  '시장판의 소음'을 꿈의 자유가 아
니라 헌법의 권리를 얻으려고 그러한 영역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정치에 반대하는 정서
  이러한 감정도  과격화되었다. "정치적  인간은 역겹다."고 리하르트  바그너는 
프란츠 리스트에게  썼다. 그리고 그의  숭배자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자기 민족의  어떤 표현이었다면, 어쨌든 그가 도이치 였다면,  최고의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도이치 사람, 도이치 시민이었다면, 정치에 대한 미움이라
는 측면에서 그렇다."
  반정치적인 정서는  권력에 대한 도덕의  옹호,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간성의 
옹호, 정치에 대한 정신의 옹호라고 양식화되었다. 언제나 새롭고 깊은 논쟁적인 
사유과정에서, 시민적인 자기 반성의 중요한 주제들은  이러한 대립 쌍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러한 정서의 최고봉은 상당히 복잡한 고백으로 가득찬, 1918년에 출
간된 토마스 만의 <비정치적 인간의  관찰>이었다. 그것은 계몽적이고 서유럽적
인 '정치 테러리즘'에 대항하여 문화적인 자부심에 넘친 도이치 시민성을 옹호한 
것이다. 이미  제목에서 현실과 등을 돌린  낭만적인 목적의식, 비정치적 정치에 
대한 전통적 동경이 드러나고 있다. 

    예술을 통한 구원
  점차 광범위하고 미로 같은 논문들에서도 읽을 수  잇는 정치에 대한 미적, 지
적 원한은, 19세기  중엽부터 특이한 작용을 해온 구원의 표상에서  극단적인 표
현을 얻었다. 즉,  예술을 통한 구원이라는 사상이었다. 민족의  모든 이루어지지 
않은 꿈, 모든 실망한 동경들이 이 사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처음에 정치와 
문학의 밀접한 상호침투에  대한 낭만주의의 요구로 나타났다.  쇼펜하우어는 삶
의 투쟁에 비극적으로 휘말리는  일에서 특히 음악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생각으
로 여기에 주관적인  색채를 부여하였다. 그러다가 리하르트  바그너에서 그것은 
"'정치의 종말'과 인간성의  시작이라는 문화적인 꿈"이라는 형태로 극장을  통해
서 절정에 도달하엿다. 정치는  대형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고, 국가는 예술 작품
이 되고, 예술가가 정치가를 대신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예술은 신비고, 그 사
원은 바이로이트이며, 성사는 값진 한 사발의 아리안 피였다. 그 피는 쓰러진 암
포르타스에게 치유를 선물하고, 클링조르 안에  구현되어 나타난 유대주의, 정치, 
성애의 대립되는 힘을 상상의 성의 폐허 아래 묶어두었다. 
  세기말에는 랑벤이 렘브란트의 이름을 혁신 욕구의 상징으로 이용해서 바그너
의 성공에 거의 뒤지지 않는 성공을 거두었다.  예술이 광증에 이른 세계에 단순
성, 자연성, 직관성을 되돌려주고, 상업과 기술을 제거하고, 계급들을 완하시키고, 
민족을 합치고, 평화로워진  세계 속으로 잃어버린 통일성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예술은  위대한 정복자였다. 맨  마지막에는 모든  정치를 제거하고, 
정치를 도취, 권력, 카리스마, 천재성 등으로 되바꾸어 놓는 작업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일관성 있는  태도로 동경하는 새시대를 지배하는  일을 은총 입은 천재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위대한 예술적 영웅'  '카이사르 같은 예술가의 개성'의 몫이
었다. 
  도이치 사람들의  도피 행동은 이러한  동기들이 나타났다.  제1차 세계전쟁과 
전후 시대를 통해서  전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정치에 마주서게 되었을  때, 그들
은 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이러한 도피행동으로  반응하였다. 전통적인 도피 통로
는 그들을 미적인  혹은 신비적인 대체 영역으로 데려갔다. 정치에  대한 거부감
은 '더러운'혁명에 반대하는 정서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바이마르 시대의 지평선
을 어둡게 물들인 수많은  음모설에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후광의 배반설, 붉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황금(자본주의) 인터내셔널의 이중 위협설, 반유대주의, 
혹은 널리 펴져ㅣ던  프리메이슨과 예수회에 대한 공포 콤플렉스 등,  간단히 말
하면 현실에서 물러나서 배신,  고독, 기만당한 위대함 등 낭만적인 범주들로 가
득찬 공상적인 가상의 세계 속으로 물러나려는 온갖 징후들로 나타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사고로  전쟁체험의 이데올로기들, '젊은 민족들'  '총체적 
동원령' 혹은 '야만 독재 군주제' 등과  같은 비정치적인 이미지들과 범주들의 지
배를 받앗다. 이른바  보수파 혁명의 민족주의 유토피아적인  발상들과 표어들의 
홍수엿다. 그러한 표어들은  피히테의 말을 뒤집어서 세계에  비합리주의의 제복
을 입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정치  현실의 쉽ㅈ 않은 균형에 대비해서 
부조건적인 구호들을 내걸고, 장엄한 신화의 모습 안에 일상을 내세ㅇ다. 그러한 
것들은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으나, 혼란스러운 낭만적인  대안 
노릇을 해서 공화국의 지적인  기아 상태에 적지 않게 공헌하였다. 더욱이 '정치
에 대한 혐오감'은  증오스런 현실을 보면서 전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불타오
르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옹호자들은  부패하고 희망없는 체제의 옹호자들처럼 여겨
졌고, 자신들의 열정과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불쾌감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
을 메울 길이  없었다. 그에 반해서 우익측의 공격자들은 상상력에  넘치고 구상
력 풍부하게 신화, 몽상, 섬세한 쓴맛 나는 소재들을 이용해서 공화국에 대한 이
미지를 만들어냈다. '체제'를 향한  가장 경멸적인 비난들 중에는, 공화국 체제가 
국민의 소비와 소시민적 쾌락이라는 '작은 행복'에 길들인다는 것도 있엇따. 
  그에 반해서 모험,  비극, 몰락 등이 시대의 매혹적인 용어들이었다.  칼 폰 오
시에츠키는 지식인들 사이에 수많은, '이기적이지  않은 파국의 연인들, 세계정치
의 불운의 미식가들'을 보았다. 반면 어떤  프랑스의 관찰자는 30년대 초에, 독일
은 '너무 많은  정열과 과격주의로 위기를' 맞고 잇는 것이  아닌가 무었다. 사실
상 '지적 낭떠러지를 향한  성향'은 독일의 위기가 전체적으로 출구 없는 절망적
인 특성을 가진 데 대해서 부분 책임이  있다. 그러한 특성은 현실로부터의 도주
의 필요성을 대중 현상으로  만들고, 알지 못하는 것 속으로 낭만적, 영웅적으로 
도약하려는 이념을 극히 친숙한 생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현상은 이러한  이념적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 그는 이러한  태도와 콤
플렉스의 저질스런 생산품과 같다. 신화적 사고와  합리적 사고가 사회적으로 소
외된 지성의 극단적인  과격성 안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그의 연설에는  거의 알
려진 모든 반정치적 감정의 수사법들이 등장하고 있다. 당에 대한 증오, '체제'의 
타협적 특성에 대한 증오,  '위대성'의 결핍에 대한 증오 등이 나타난다. 그는 언
제나 정치를 운명의  이웃개념으로 보았다. 스스로는 무능하여  강한 남자, 예술, 
혹은 '섭리'라고 표현되는 더 높은 힘을 통하여 해방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여
겼다. 권력 장악 과정에 행한 중요한 연설들  중의 하나인 3월 21일 포츠담 연설
에서 그는  정치적인 무능, 예술을 통한  대체의 꿈과 구원 등의  맥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도이치 사람은 내면적으로  허물어지고, 정신으 통일되지 못하고, 의지는 갈라
지고, 행위는 무기력해서 자신의  삶을 주장할 힘을 잃고 있습니다. 그는 별에서
의 권리를 꿈꾸면서  지상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결국  언제나 내면으로 
향한 길만이 도이치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가수,  시인, 사상가로서 도이
치 민족은 다른 사림들이 살았던 세상만을  꿈꾸다가, 곤궁과 비참이 비인간적으
로 강타해 오면 그제애 비로소  높은 상승, 새로운 왕국, 새로운 삶을 향한 동경
이예술에서 솟아나오곤 했지요.

  예술가의 꿈에서 벗어난 이후로  그는 자신이 이러한 구원자 현살이라고 생각
하였다. 예를  들어 정신적 전통의  맥락애서 보면 그는  자기가 비스마르크보다 
랑베렌의 '위대한  예술가 주인공'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그의 이런  여러 가지 
발언들로 미루어보아 비스마르크에  대해서는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위대
한 인간의 미적인 현상이라는 측면헤서 경탄하였다. 
  히틀러 자신에게 있어서도 정치는 위대함으로 데려가는 수단이고 화려한 대체
역할로서, 불충분한 예술적  재능을 보충해 주는 비할 바 없는  기회를 의미하였
다. 그는 정치가로서의  모든 요소를 배워 익혔고 그것을 임시  역할로 받아들였
다. 순간적인 영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히  신화적, 미적, 비현실적으로 생각하
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어떤 사람이 관찰한 대로 그는 예술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측근에 말에 따르면 '휴머니티' 같은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초기의 연설
이나 후기에 총통사령부의 원탁대화  같은 임의발언의 기록들은 그 사실을 증언
하고 있다. 아마도 그를 가리켜 1923년 체임벌린이 10월이 편지에서 '정치가와는 
정반대 유형'이라고 말한 것  이상의 칭찬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체임벌린은 당
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정치의 이상이란 아마도 정치를 갖지 않는 것인가를 봅
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치는 솔직하게 알려지고 세상에 보여야 하겠지요."  이
런 의미에서 히틀러는 정말로  정치를 갖지 않았다. 다만 거대하고, 암시적인 세
계이념과 운명 이념을 가졌다. 그는 광적인 집념으로  그 이념의 실현을 자기 삶
의 목표로 삼았다.

   정치의 미학화
  발터 벤야민은  파시즘을 가리켜 '정치의  미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도이치 
민족의 정치에 대한 관념은  전부터 이미 언제나 미학적인 것이었으므로 파시즘
은 도이치 사람들을  특별히 격렬한 힘으로 사로잡을 수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
국이 도이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정치를 오직 정치로만 알았다는 사실이 바
이마르 공화국 실패 원인의 일부엿따. 히틀러가  비로소 당당한 연막술로 연극적
인 장면들을 통해,  도취와 우상화 소동을 통해 동식적인 사건들을  친근하 ㄴ모
습으로 보여주었다. 그 적절한 상징으로 조명을 받은 것이 대성당들이었다. 대성
당들이 마법과 빛으로 이루어진 벽들이 어둡고 위협적인 바깥 세상을 차단할 것
이다. 도이치 사람들은 히틀러의 공간 열망,  그의 반유대주의, 그에게 붙어 잇는 
저속하고 잔인한 특성들에 공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다시금 거대
한 운명의 소리를  주고, 정치를 다시 전율과 뒤섞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박수갈
채를 보내고 그의 추종 세력이 되었다. 
  히틀러가 예술과 정치에 대한 생각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고, 정권을 예술과 
정치의 최종적인 화해라고  찬양한 것은 비정치적인 '아름다움의 국가'라는 이데
올로기와 잘 맞았다. 그는 자신을 페리클레스의  후예라고 여기고 그에 견줄만한 
것을 발전시켰다.  알버트 슈페어가 전한  바에 따르면 그는  고속도로를 자신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극히 진지한  의도로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
히 히믈러도, 루돌프  헤스도 '비음악적인 인간들'이기에 자신의  후예가 될 자격
이 없다, 반면에 슈페어는 히틀러의 관념 세계에서는 '음악적  인간'이고, '예술가'
고, '천재' 이기에 앞으로  높이 출세할 것이고, 자신의 총통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전쟁 초기에  예술가들을 풀어주었지만 
학자들, 기술자들은 아니었따.  새로운 무기를 선보이는 자리에서도 그는 미적인 
형태를 자세히  뜯어보았으며, 대포 총신의  '우아함'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예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는 음악적인 인간만이  야전 사령관 노릇을 제대
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학자와 기술자의 석방은 슈페어의 노력에 의해
서 1942년에야 이루어졌다. 슈페어가 사석에서 알려준  바에 따르면 히틀러는 지
역 방위군  사령부에 예술가들의 군대 서류를  요청해서 없애버림으로써 그들이 
석방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승리를 거든  다음에 정복자로서 파리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박물관 방문객 자격으로 그 땅을 밟았다.  일찍부터 나중에는 점점 더 초
조하게 되어버린 그의 사적인  복고적 노스탤지어도 이런 특성에서 나온 것이었
다. "나는 내  의지에 반하여 정치가가 되었다."고  그는 말하곤 하였다. "정치는 
내게 오직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내가 지금처럼 활동하지  않으면 힘들어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다! 정계에서 물러나서 이 모든  근심, 걱
정, 분노 따위를 뒤로 하게 되면 그것은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것
이다... 전쟁은 왔다가 스러져간다. 남는 것은 오직 문화의 작업들 뿐이다."
  한스 프랑크는 그러한 느낌들을 시대적 경향이라고 여겼다. 즉 "국가, 전쟁, 정
치 등과 결부된 모든 것을  쫓아버리고 문화적 활동이라는 높은 이상을 맨 앞에 
세운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국가사회주의 지도부의  상당수
가 행렬에 끼여들지  못한, 혹은 실패한 절반 예술가라는 사실이  무의미한 것만
은 아니다. 히틀러 이외에 디트리히 에카르트도 그런 사람이었고, 괴벨스는 소설
가가 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로젠베르크는 건축가로 시작하였고, 시라흐와 한스 
프랑크는 작가, 풍크는  음악가 노릇을 흉내냈다. 슈페어도 비정ㅊ거인 고립의지
라는 측면에서 이렇나 부류에 속하였고, 미화시키는 격문을 써서, 공허하고도 가
열차게 국가사회주의의 상승을 촉진하였던 저 지식인 유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적 세계태도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식인들의  일그러진 현실개념은 히틀러의 이념세계를 본
질적으로 특징지엇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대화중에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가곤 
하는 그의 경향을 증언하였다.  그러한 지대에서 그를 다시 '현실의 바탕으로 끌
어내려야 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윗소금산이나, 산장 위쪽 해발 2천  미터 높이의 목바위에 세운 독수
리 둥지에서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였다. 공기가  희박한 이곳 산들의 운명적인 
모습을 앞에 놓고 그는 자신의 계획들을 곰곰히  생각했으며, 그 자신이 가끔 말
했듯이 모든 중요한 결정을 이곳에서 내렸다고 한다. 
  우랄 산맥까지 이르는 거대 왕국의 상상,  거대 공간과 세계분할의 지정학적인 
과대사상, 민족들과 종족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포함하는 유전학적인 비전들, 초
인들의 꿈들, 혈통이 순수성과 성스러운 잔에 대한 환상들, 대륙 전체에 걸친 활
석 레일 체계, 군사 시설,  방어 마을 체계 등은 그 자체로 보아서 전혀 '도이치'
가 아니고  가깝거나 먼 원천들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여기서  도이치적인 것이 
있다면 그가 단편 조작들을 이어맞춘 지적이고  거친 일관성뿐이었다. 어떠한 결
론에 부딪쳐도 물러서지 않는 엄숙주의도 도이치적인 것이었다. 
  히틀러의 확고함은 기형적인  성격의 전제조건들과 분명히 관계가  있었다. 그
의 과격성에도 밑바닥의 과격성과 대담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의 확고함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이 나라의 지적 전통에  속하는 저 반정치적,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는 종족 투쟁적인, 혹은 확장적인 목
표 설정들로 도이치  역사의 연속선에 선 것이 아니었다. 이론적  확신에 가득차
서 현실을 거대한 높이에서  나온 범주적인 원칙들을 종속시킨 지식인의 한사람
으로서 그는 도이치 역사의 연속선에 서는 것이다.

    실현된 허구들
  그를 비슷한 유형들과  구분지었던 것은 정치적인 능력이었다.  그는 실질적으
로 권력을 이해하였던  예외적 지식인들이었다. 민족적 저술의  문학적 쓰레기더
미에 이르기까지 선구자들의 텍스트에서  그가 주장한느 것보다 더 과격한 주장
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의 공포에 대해서도, 현실 부정을 미화시
키는 데에 대해서도 더욱  격렬한 증언들이 있다. 예를 들면 마리네티는 '파렴치
한 현실'에서 벗어나  구원받기를 바라고, 1920년의 어떤  성명서에서는 '모든 권
력을 예술가에게' 양도하라고 요구하였다. 지배권은  '널리 퍼져있는 천재 프롤레
타리아들'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성명서들은 지식인
들이 무기력을 향해 그럴싸하게  애교를 부리면서 스스로를 우쭐대는 것에 지나
지 않았따. 마리네티는  '복수하는 바다'를 향해서 현실에  반대하는 주문을 말하
였다. 히틀러가 여기서도  예외엿던 것은 자신의 지적 허구를 말뜻  그대로 받아
들이고, 수백년  묵은 흥분된 사상의  표현들을 그 형태  그대로 집어삼켰다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전례가 없는 인물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이 독재자 페이시스
트라토스의 출현에  놀란 것처럼 도이치 사람들도  식탁에 앉아있다가 히틀러의 
출현에 놀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세계가 그랬듯이  도이치 사람들도 
충분히 경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지적인 비축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
도로 자신의 의도를 언제나 노골적으로 표현하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 
속의 현실과 사회적 현실을 전통적으로 분리해 왔기에 말은 별것이 아니라는 생
각이 오래 전부터 일깨워져 있었다. 그의 말처럼  사람들이 하찮게 여긴 말도 없
었다. 그것만이 히틀러에 대한 거대한 오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
대의 오판이기도했다. 의회의 사회민주당  의원대표인 루돌프 브라이차이트는 결
국 바이마르 근교의  너도밤나무숲 수용소에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히틀러
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그가 몰락하게 되었다고 기뻐서 
손뼉을 쳤다. 다른  사람들은 히틀러를 언제라도 표로 눌러버릴 수가  있을 것이
며 그가 절대로 헌법  개정에 필요한 정족수 2/3의 다수표를 얻을 수 없을  것이
라고 계산하였다. 역시  사회민주당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율리우스  레버는 온 
세상이 그랬듯이 마침애  '이 운동의 정신적인 토대를  알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도이치 시민 계급 대중에게 있어서 양심업슨 모험가의 손에  떨어졌다는 생각은 
'대단히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수많은  사회민주당원들은 히틀
러가 성급하기 파펜  및 힌덴부르크와 대립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이 제 
3자로서 미소지으며  무대에 등장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렇게 되면 
1918년과는  달리 청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프로이센의 전임 국무비서  아베그
가 그라프 케슬러와의 대화에서 위협하였다.)

    위험
  히틀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 같다. 다만  바라보는 거
리에 따라 시각의 날카롭기가 달랐을 뿐이다.  기다리던 외국의 제재조치들은 없
었다. 오히려 상당수의 외국 수도들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맹목, 제어의 희망, 허
약 등이 복합된 가운데 다가오는 몇 년을 위한 협정과 조약들을 맺을 채비를 하
엿다. 그러나 이렇게  매혹된 가운데서도 불안한 예감들이 개별적으로 나타났다. 
파리에 있던 어떤 도이치 사람은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 "마치 이웃 나라에서 화
산이라도 폭발한 듯한 감정"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폭발은 언제라도 자신들
의 들판과 도시를 페허로 만들 수 있으므로 두려운 마음으로 그 화산의 가장 작
은 움직임도 주시하고 있다.  거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맞이하는 자연 현상이다. 
독일은 오늘날 다시... 위대한 국제 스타가 되었다. 공포, 이해할 수 없음, 역겨운 
경탄 등이 뒤섞인 모습으로 신문마다, 극장마다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심술궂은 기쁨도 들어있다.  거대하고 비극적이고 무시무시하고 위험한 
모험의 인물이다."
  이 나라가 모험을 시작할 때  내건 이념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이 나라만의 것
은 없었다. 비인간적인  진지함이 도이치적인 것이다. 그러한 진지함으로 독일은 
상상 속의  존재에서 밖으로 나왔다. 위의  말한 경향과 감정들은 그  사이 모든 
것 위에  견딜 수 없게 뒤덮인  긴장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것은 수백년 
동안 형성된 혁명적  사상과 고정적 사회적 상황 사이의 긴장이었다.  이러한 경
향과 감정들은 그의 등장에 유례없는 무게와 때늦은 반동의 극단적인 특성을 부
여하였다. 도이치의 천둥이  마침애 목표를 이룬 것이다. 과거지향적인 유토피아
의 표지 속에서 현실을 부인하려는 절망적 시도는 이 천둥이 울려퍼지면서 붕괴
되었다. 
  그러나 과격하게 이상화된 관념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현실 거부는 억누르기가 
어렵다. 현실  거부는 자발적인 상상력과 관계가  있고, 사유의 위허성과 관계가 
있다. 그 정치적 문제성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도이치 정신은 과거의 유산을 
주로 현실 거부의 태도에서 얻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도이치의 
모든 길이 아무런 재치도 없이 언제나 아우슈비츠로만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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