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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Rebellion

합법과 비합법

by FraisGout 2020. 8. 15.

  1930년 9월 14일은 바이마르 공화국 역사의  전환점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민주적인 정당  정부의 최후를 의미하였으며 전체적으로  국가의 최후의 비명이 
시작도고 있음을  알렸다. 새벽 3시경에 투표  결과가 나오자 모든  것이 갑자기 
바뀌고 말았다. 국가 사회당은  갑자기 권력의 바로 앞 대기실에 이르러 있었다. 
경탄과 비웃음을 함께 받는, 소란스런 아돌프  히틀러는 정치적 장면을 결정하는 
인물들 중 하나가  되었다. 공화국의 운명은 이미 낙인 찍혔고  이제는 추격전만 
남았다고 국가 사회당 기관지는 환호하였다.
  투표자의 18퍼센트 정도가 국가사회당의 호소에 호응하였다 당은 지난번 선거
에서 81만표를 얻었는데,  2년만에  640만 표를 얻게 된  것이다. 12석이 아니라, 
그리고 히틀러가 추측한 것처럼  50석이 아니라, 107석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사
회 민주당에 뒤이어 두 번째 정당으로 붕상하였다.
  정당사엔 이와 같은 비약이 없었다. 시민  정당들 중에서 오직 '카톨릭 중앙당'
만이 제 위치를 지켰다고  주장 할 수 있었다. 그 밖의  정당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네 개의  온건파 정당들은 겨우 72석만을  차지하였다. 후겐베르크의 '도
이치 국가 민족당'은 정확하게 반으로  줄었다. 지난번 선거에서 14.3 퍼센트였던 
것이 이번엔  7퍼센트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격 정당과 손잡은  것이 자살 
효과 비슷한 효과를 낸 것이다. 겨우 41석을  확보하여 국가 사회당에 대해서 외
견적으로만 패배한 것이 아니고  히틀러의 우익진영 지휘 요구를 확인해준 꼴이 
되었다. 
  사회 민주당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국가 사회당 말고는 공산당만  얼마 안 
되나마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지난번  선거에서 10.6퍼센트 였다가 13.1퍼센
트를 득표한  것이다. 그런데도 공산당들은  역사만 믿고 지겨운  자기 신격화에 
빠져서 선거 결과를 자기들이 승리라고만  해석했다. "9월 선거의 유일한 승리자
는 공산당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선거결과의 역사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였다. 강조점
은 각기 다르지만  정당정치의 깊은 위기,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질서의 
생명력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온 회의의 표현이라고 설명되었다.  그와 맞무려서 
모든 상황의 근본적인 변하에 대한 열망이 점점 더 커졌다. "과격 정당에 의석을 
선물해준 대부분의 투표자들은 전혀  과격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저 과거의 것에 
대한 믿음이 없을 뿐이다. " 1/3  이상이 이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지 알지도 못
하고 물어보지도  않은 채 현존 질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것은 '분노의 
투표'였다.
  이 자리에서 10년 전 공화국의  탄생을 특징지었고 결국 그것을 주인 없는 나
라로 만들게 도니 강제적 상황을 한 번 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제 공
화국에 반격을  가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공화국 체제란 국민의  인내를 얻었을 
뿐이며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역사의 공위 기간으로 여겨졌다.  어떤 낭만
적인 비판자가 말했듯이 '강력한 광경이 없는' '열광'과 대담한  파렴치'와 '지속적
인 말'과, '위대한 사람'을 배출하지 못한 과도적인 현상이었다. 
  좌파든 우파든 점점  더 광범위한 계층이 그런  위대한 사람과 더불어 국가가 
다시 제 본분을 찾기를,  그리고 전통적인 모습을 되찾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절
망적인 위기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적 정당 정권에 대한 억눌린 의심들, '도이치 
아닌' 정당정치에 대한 겅멸감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고 어떤 반론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히틀러가 수 없이 반복한 주장, 곧 이 국가는 적
들에 대한 공물이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가장  고약한 쇠사슬일 뿐이라는 주장은 
이제 상당한 공명을 얻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외국에서도 비슷한 판단들이  수 없이 나왔다.  특히 영국과 
미국의 신문들은 선거 결과를  평화 협정의 잔혹한 부조리와 승전국의 표리부동
한 태도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석하였다.   오직 프랑스만이 전체적으로 분개하였
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드러난 극우ㅜ 성향이 라인 강 건너편  이웃나라에 대해
서 더 엄격한  정책을 펼쳐나갈 핑곗거리와 정당화를  마련해 주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희망도 가졌다.
  흥분한 외국의 반응에서 처음으로 이후 약 10년 동안이나 히틀러의 정택을 따
라다닌 저 음성들 중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를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여겨 칭찬하면서  그의 침략과 도덕적인 도덕적인  도전들을 감싸주는 목소리였
다.
  <데일리 메일>지에 기고한  글에서 로더미어 경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남자의 
승리를 위험으로만 보지  말고, 그가 '온갖 이익들'을  제공한다는 사실도 인싱해
야 한다고 말이다. "그는 볼셰비즘에 대한 방어벽을 강화시켜줄 것이다. 유럽 문
명을 향한 소련의 전쟁이 독일 쪽으로 향하는 무서운 위험을 차단할 것이다."
  국가 사회당의 성공은 상당 부분이 젊은이들과 비정치적인 기권자들을 동원한 
덕분이었다. 투표 참가율은 1928년  선거에 비해 450만 명 가량이 늘어서 80.2퍼
센트에 이르렀다. 공산당은 물론 얼마 안 되는  숫자이지만 이 계층의 덕을 입었
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은 분명하게 민족주의적인 구호들을  동원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어느 정도로  자기들의 승리를 예상 못했던가 하는 것은 
그들이 당사자 수인 107명의 후보를 다  내세우지도 않았고, 처음에 그만한 후보
자를 당내에 준비해두지도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물론  도이치 국적을 
갖지 못한 히틀러 자신은 입후보 하지 못했다.

    미래의 물결
  선거 결과는 여러모로  '산사태'라고 묘사되었다. 그 파급은  산사태보다 더 절
망스러운 것이었다. 투표일 밤의 당혹감 속에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쿠데타가 계
획에 대한 조잡한  소문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상당한 금액의 외국  자본을 철수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미 파멸 단계에 있던  자본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 
하였다. 동시에 돌발적인 운동처럼 여론의 관심과  호기심이 새로운 정당에 집중
되었다. 경기를 타는  사람들, 걱정하는 사람들, 예감에  부풀어 오른 기회주의자
들이 변화된 권력 상황에 편승하였다. 
  특히 늘  깨어 있는 언론일들이  서둘러서 미래의 물결에  합세하려고 들었다. 
폭넓은 보도를 통해서  전통적인 나치, 언론의 약점을  보강하여 '미래의 물결'을 
이루었다. 이제 국가 사회당에 속한다는 것은 '현대적'인 일이 되었다. 황제의 아
들 중 하나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아우비)가 이미 봄에 입당하였으며, 히틀
러가 이끄는 곳은 어디든지 누구든지 따룰 수 있다고 말했다.
  영 안의 입안에 참가했고  처음에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 맞서 그것을 
옹호하였던 히얄마르 샤호트까지 입당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연
말인 두 달 동안에만 국가  사회당 당원은 거의 정확하게 10만명이 늘어서 38만 
9천명에 이르렀다. 이익  단체들도 이러한 거ㅜ력 이동과 변화된  성향에 따르려
고 하였다. "거의  자동적으로 국가 사회당에는 운동을  팽창시키고 견고하게 해 
줄 관계자들과 위치들이 늘어났다."
  "이제 거대한 대중이 만세를 부르며 우리에겐 합류한다면 우리는 패배한  것입
니다."라고 히틀러는 2년 전인 1928년 뮌헨의 지도자 대회에서 장담했다.  괴벨스
는 지금도 경멸감에 차서 '9월생들(9월 선거 이후 신참자들)'이라고 말했다. 자신
은 자주 "우수화 감동을  지니고 아직 우리가 나라전체에서 작은 분파만을 이루
고 있던  시절, 수도의 국가사회주의가  열서넛의 추종세력만을 가지고  있던 저 
좋던 시절을 되돌아본다."고 말했다.
  생각없는 대중이 당에  넘쳐 들어와 혁명적인 의지를  망치고 마침내 잊을 수 
없는 1923년의ㅣ, "인플레이션으로 축재하는 꼴'이 나서, 후퇴상황이 발생하면 곧
바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생겼다. "우리는 파산한 
시민 계급의 시체로  부담을 느껴서는 안된다."는 말이 선거  5일만에 나온 어떤 
건의서에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표현한  것처럼 예상과 달리 당은 별로 노력하지
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국가 사회주의 이념의 거대한 항아리로 몰려들어'와서 하
나로 녹아들었다.  당의 적수들이 여전히  진정시키는 표현들을 찾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계속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승리 직후가  공격에 가장 유리한 시기라는 
심리 원칙에 따라서 히틀러는 9월 14일 직후에 벌써 당에 새로운 성공을 가져다 
줄 행사들을 개시하였다.
  11어ㅜ 30일 브레멘  시으회 선거에서 당은 의회  선거보다 득표수를 거의 두 
배로 높이고  의석의 2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였다. 모든 다른  정당들은 손상을 
입었다. 단치히, 바덴, 메클렌부르크 등의 선거결과도 비슷하였다. 이러한 성공에 
도취해서 히틀러는 때때로  지금 이 순간에도 외부의 도움  없이 정부를 '선거로 
때려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합법화를 비웃음
  10월 13일에 소란스럽게  의회가 시작되었따. 아직도 계속되는  프로이센의 단
체복 금지에 대한 항의로 국가  사회당 소속 의원들은 의회 건물에서 갈색 셔츠
로 갈아입고 큰소리를 내면서 분명한 항의의  몸짓으로 회의실에 등장하였다. 정
열적인 연설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뻔뻔스러움과,  부패와 범죄의 체제'에 대
항하여 도전을   선언하였다. 자신의 정당은 최후의 수단으로 내전을  꺼리지 않
으며, 의회는 자기들의  목표를 막지 못한다고 말했다.  국민이 결정하는 것이며, 
국민은 이제 자기들 편에 있다고.
  그 동안 밖에서는 공산당과의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괴벨스가 조직한, 유대
인 상전과 행인들에 대한  최초의 박해가 이루어졌다 질문을 받은히틀러는 이러
한 폭력은 부랑다, 도둑, 공산당 도발자들이 일으킨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민족 
관찰자>는 덧붙이기를 제 3국에서 유대인 상점의  진열장은 지금 공산당 경찰이 
지키는 것보다 더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10만 명이 훨씬  넘는 금속 노
동자들이 공산당과 국가 사회당의 후원을 받아서  파업을 했따. 무너지는 질서를 
보여주는 풍경들이었다. 
  히틀러 자신은 한순간도  전략적인 태도로 망설이지 않은 것 같다.  1923년 11
월의 잊지 못할 교훈 중에는 붕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의 질서라고 하더라도 거리
의 공격보다 우세하다는 경험이 들어 있었다.  당내의 낭만적인 엉터리 혁명가들
은 탄약 연기 없는 혁명이란  상상도 못하고 9월 14일의 승리 직후에 다시 베를
린 진군과 혁명과 싸움판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맞서서 합법적 개념을  내세웠다. 합법화라고 하지만 물
론 순수하게 전략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뮌헨에서 말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정당정치를 추구하는 정당이 아닙니
다. 그것은 우리의 전체적인  관점과 모순되는 것이죠. 우리는 다만 억지로 정당
정치를 추구하는  정당일 뿐입니다. 우리를  강요하는 것은 헌법입니다... 우리가 
방금 거둔 승리에서 우리의 싸움을 위한 새로운 무기를 얻은 것에 불과합니다."
  괴링은 조소적인 태도로 사태를 정확하게 알려준느 이런 설명을 하였다. "우리
는 이 국가 현재의 체제와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파괴하려
고 한다. 그러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우리가 공화국을 수호하는 법을 갖
기 전에 우린 이 국가를 증오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법을 갖게 된 이후로 우
리는 국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우리가 말한느 것이 무슨  뜻인지 누구
나 잘 알고 있다."

  히틀러의 엄격한 합법화 노선은 방위군을 적잖이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방위군 
때문에 자신의 국가를 전복하련느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뒷날 근느 
회고하였다. 공적인 질서가  무너져내릴수록 군의 권력과 영향력은  더욱 결정적
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쿠데타아ㅗ 새로 결성된 돌격대에 대한  접촉 금지령
은 국과 국가사회당 사이의 관계를 상당히 약화시켰다.
  1929년 3월에 벌써 히틀러는  군부를 향해 히틀러는 군부를 향해 최초의 조심
스런 제안을 했다. 그런 목적으로 행한 연설에서 그는 제크르 장군이 세운 '정치
와 무관한 군인들'이라는  원칙을 비난하고, 장교들에게 있어서 좌파가 승리하고 
난 다음의 미래란 '형리이며 정치적인  인민위원'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리고 국민
의 위대성과 무기에 대한 존경시에 기초한 자신의 의도를 더욱더 거창하게 추켜
세웠다.
  정확한 심리적 계산 덕분에 이  연설은 특히 ㅈ은 장교 그룹에서 효과가 있었
다. 9월 선거가 끝난 지 며칠 만에  라이프치히의 법정에서 세 명의 울름 수비대 
장교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따. 국방부의  명령을 어기고 국가사회당에 합류하고 
군대 내에서 당을  위한 선전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였다. 변호사  한스 프랑크의 
청을 받고 히틀러는 증인으로 출두하였다. 센세이션으로  평가된 이 재판은 그가 
대규모 청중 앞에서  군부에 대한 접근 노력을 계속하고,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밝힐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심문 사흘째인 1930년 9월 25일
에 그는 방금 최초의 승리로 오만해진, 성공한  당수의 자부심을 지닌 채 법정에 
출두하였다.
  질문이 계속되는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확신은 세가지 동기를 가진것임을 밝
혔다. 사방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민족이 외세에  굴복하는 국제화의 위협이 첫 
번째이고, 개성의 가치상실가 민주주의 사상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두 번째이
며, 도이치 민족이  평화주의 사상으로 위협적으로 오엽되는 것이 세  번째 동기
라고 했다.
  1918년 자신은 광신적인 도이치 정신, 당수의 절대적 권위, 무조건적인 투쟁의
욕을 가진 정당으로  이 불안한 경향들이 맞설 의도로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
나 자신은 군부에  반대할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군대를 망가뜨리는  자는 민족
의 적이다. 돌격대는  국가를 공격하련느 생각이나 군부와  경쟁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다음 그는 투쟁의 합법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히틀런느 국가사회당은 
폭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대담하게 선언하였다. "두세번만 선거를 거치면 국
가사회주의 운동은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국가주의 
혁명을 할 것입니다."그게 무슨 뜻인가 묻ㅈ 히틀러는 대답하였다.
  
  '국가주의 혁명'이란 순수하게 내부 정치적인  의미로 파악됩니다. 국가 사회주
의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노예상태에 빠진 오이치  정신을 높인다는 뜻이죠. 독일
은 평화조약으로 재갈이  물렸습니다. 도이치 입법이란 평화조약을  도이치 민족 
속에 뿌리내리려는  시동 불과합니다.  국가사회주의ㅣ자들은 이 조약을  법으로 
여기지 않고, 강요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인정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전혀 무고한 다음 세대에게 그러한 짐을  떠맡길 수는 없
습니다. 우리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수지않고 조약을 무시함으로써 그것
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에 맞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우리 자신을 방어하려면 우
리는 혁명의 길에 서게 됩니다.

  혁명의 개념을  외부세계로 돌리는 이런  대응은 물론 속마음을  감춘 것이다. 
외부를 향한 혁명은 불법적인 수단을 취하는가 하는 의잔의 질문을 받고 히틀러
는 거침없이 확언하였다.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불법적인 수단을 쓰
게 됩니다. "라고. 이른바 내부의 배신자들을 겨냥한 수많은 위협에 대항하여 질
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기 맹세하고  전능하신 신 앞에 섰습니다. 내가 합법적으로  권력에 오
르게 된다면 합법적인  정부 안에서 국가 법정을 열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
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법에 따라  심판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도 합법적으로 몇 명의 목이 나뒹굴겠지요.

  이어서 방청석에서 박수갈채가  터졌다는 사실은 법정의 분위기를   알려준다. 
국가사회당이 행한, 헌법에  반대되는 활돌들의 풍부한 증거를  제시한 내무부의 
반대증언은 주목받지 못했다..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않고 법정은 다음과 같
은 히틀러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자신은  권력을 얻기 위해  투쟁한느 동안에만 
헌법에 얽매인다고 여기며, 합법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자신은 헌법을 없애
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지배적인 이론에  따르면 합법적인 수단으로 헌법을 제거하는 것
은 엄격한 민주적  헌법의 이상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의  주권은 국민
의 자발적인 주권  포기도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붕괴의  구명이 있었고 
그 구멍을 통해서 히틀러는 방해받지 않고 돌진해 들어가서 모든 반대를 마비시
키고 국가를 정복하고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헌법에 대한 선서 뒤에는 그의 조소적인 성격에 분명히 드러
난 의지만  숨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폭력에 법조문이라는  외투를 입힐 
수 있을때까지만 폭력을  포기하겠다는 명백한 의지였다. 히틀러는  자신의 합법
화 노선에 불안한 이중성을 마련해주려는 분명한  노력을 보였다. 한편으로 자신
은 '합법성의 바닥 우에 단단하게'자리잡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다른 한편으론
느 추종자들을 향한 사나운 연설에서 은유와 불안한 상징으로 폭력 성향을 드러
냈다. "우리는 적으로 온 것입니다! 늑대가 양의 우리를 침이비하는 것처럼 우리
는 들어갑니다."
  당 지도부의 선언들만  엄격한 의미에서 합법적이었다. 그밖에  베를린 베딩의 
뒤뜰, 알토나와  에센의 밤거리에서는 살인과 패싸움,  법 위반이 지배하고 있었
다. 목격자들을 향해서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지역 단위부대들의 공격'이라고 얼
버무렸다.
  합법화 노선의 순전히 수사적인 성격을 괴벨스는 라이프치히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ㅈ은 장교에게 털어놓았다. 셰링거 소위에게  명랑하게 이렇게 설명했던 것
이다.. "나는 이 맹세(히틀러의)를 천재적인 장기의 한 수라고 생각해, 그 다음엔 
형재들이 우리에  대항해서 무슨 일을 하겠어?  그들은 공격할 기회ㅣ만 기다려 
온 거지, 이제 우리는 엄격하게 합법적이야, 합법 좋아하시네."
  히틀러이 의도의 이런  불확실성, 즉 헌법에 대한 충성의 맹세와  협박을 번갈
아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원래 의도가 그랬듯이  여러모로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의 태도는  광범위한 청중에게서 불안감을 완전히  빼앗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불안감을 완전히 빼앗지 않으면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불
안감이 수많은 투항자와  변절자들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그러한  태도는 정치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 특히 힌덴부르크와 군부에 대해서는 동맹의  약속을 포
함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아직도 베를린 진군을 기대하고 
있는 추종자들의 환상을  채워주었다. 마치 지도자가 천재성으로  상대반의 눈을 
속이고 있다고 눈을 찡긋거리며 알려주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히틀러의  라이프치히 맹세는 적잖은 효과를  거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모든 방향으로 문을 열어놓는다는 히틀러의 전략은 교활하고 
날카로운 계산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성격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본질에 깊
숙이 들어 있는  우유부단함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지나
치게 대담하며 고도의  균형감을 요구하는 일이었고, 그 점에서 그의  모험 욕구
와 잘 어울렸다. 실패할 경우,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성공 전망이 거의 없는 쿠
데타 아니면 정치에서 퇴각하는 길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돌아온 에른스트 룁
  히틀러에 의해서 추구된  전략의 이념, 그리고 그 위험과 어려움을  가장 분명
하게 드러내보인 것은 바로  돌격대였다. 히틀러의 복잡한 개념은, 갈색 셔츠 부
대(돌격대)안에서 법에 대한 형식적인 존경심과  정치적 투쟁의 낭만을 결합시키
는 것을 전제로 하고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를  버리기로 약속하면서도 무기의 정
신을 숭상해야만 하였다. 폰 페퍼는 바로 이  모순된 요구에 부딪쳐서 실패한 것
이다.
  1931년 초에 에른스트 룀이 최고 지휘자 직위를 넘겨받고 곧바로 돌격대를 군
대식으로 더욱 강하게  조직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전국을 5개의  주요지역과 18
개의 지역으로  분할하고, 각 연대(국가 사회당의  연대)는 황제시대에서 가져온 
연대번호를 받았다. 비행  돌격대, 해상 돌격대, 개척  돌격대, 위생 돌격대 등의 
특수한 군대단위 체계는 군대와 비슷한 구졸르  더욱 분명하게 해주었다. 동시에 
룀은 알기 어렵게 되어 있는 폰 페퍼의  개별적인 지침을 하나의 '돌격대 근무규
정'으로 요약하도록  했다. 마치 기계적인 강요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계획들은 시민 전쟁군대라는 옛날 이념을 목표로 삼았다. 
  히틀러가 1925년과 달리 이번에 그것을 허용해준 것은 그 사이 자신의 귄위에 
대한 확신이 생격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룀의 생각이 자신의  이중 노선
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폰 페퍼의 사임과  더불어 시작된 돌격대 개혁을 전체적
으로 살펴보면 히틀러식  엉터리 개혁의 모든 특성들을 알아볼 수  있다. 사태를 
명확하게 결정하는 대신 몇 명의 지휘자들이 바뀌었고, 충성 맹세가 이루어지고, 
경쟁적인 기구가 만들어진 것 등이다.
  돌격대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히틀런느 조심스럽게  친위대를  일종의 
대응조직으로 만들었따. 그것은  엘리트 '내부경찰' 조직이었다. 친위대는 1929년
에 280명까지 줄었으나  히틀러는 이것을 점차 룀에게서 독립시켜  나갔다. 그리
고 돌격대 개혁의 결말은  다른 모든 경우와 같았다. 피할 수  없는 갈등을 만들
어내는 성향을 가차없는 피의 기습전으로 해결한 것이다.
  룀의 지휘아래서 비로소  돌격대는 대형 부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지휘부의 비상한 조직능력 덕분에  1932년 말까지 대원이 거의 50만명으로 불어
났다. 돌격대의 집과 돌격대의 음식에 이끌려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갈색 부대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반사회적인  증오심은 부대안에 있는 모험가들의  원한과 합
쳐져서 비상한  공격성을 발전하였다. 룀  자신은 돌격대 지휘부에서  폰 페퍼의 
인맥을 몰아낸 다음 그 자리에 자신의 동성애  친구들을 앉혔다. 악명 높은 수많
은 친구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으므로, 곧 룀이  '개인 군대 속의 개인 군대'를 만
든다는 소문이 퍼졌다.
  점점 커지는 격력한  반대에 대해 히틀러는 유명한 명령으로 맞섰다.  그는 돌
격대 최고 지휘부의 벌받을 만한 행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그것을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극히 날카롭게'물리쳤다. 돌격대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남자들의  모임
이지... 양반집 따님들을 교육한느  도덕 기관이 아니다." 각 개인이 자기  의무를 
이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사생활은  국가 사회주의 세계관의 본질
적인 원칙들이 어긋날 경우에민 관찰 대상이 될 수 있다." 라고 했다.

    정치적 범죄
  이러한 사면장은 돌격대 내부에서  사실상 무법적인 요소들이 판치는 것을 허
락해준 셈이었다. 온갖 합법적인 맹세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군대는 곧 유례없
는 소란과 공포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독재정권이 나타나야 한다는 요
구의 근거로 발전하였다. 경찰의 확인에 따르면  돌격대의 무기창고에서 온갖 종
류의 고전적인 범죄 무기들이 다 들어있었다. 납 곤봉, 손가락 마디에 끼우는 타
격용 반지무기, 고무 호스  등이었다. 그리고 피스톨은 들킬 위험이 있을 경우에 
반지 연맹의 모범에 따라서 '아가씨들'이 무기 소지자라고 자처하고 나섰다.
  돌격대에서 쓰인 속어들도 지하 번죄 세계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뮌헨의 부대
들은 지참하고 다니는 피스톨을 '라이터', 고무 곤봉을 '지우개'라고 불렀다.  베를
린 돌격대는 폭도의  뒤집힌 자존심으로 이 전투  집단의 이른바 혁명 맹세들이 
선전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별명들을 가졌다.  베딩에 있는 돌격대 중
대는 '도둑떼 중대'라는  이름이었고, 중심부의 부대는 '춤조합'이라고 했다.  어떤 
대원은 '맥주통  왕', 다른 대원은 '사격수',  또 다른 사람은 '리볼버  구멍'이라고 
불리는 식이었다. '베를린  돌격대 노래'에는 프롤레타리아식의 망상,  폭력 서양, 
이데올로기 부족 등의 특징들이 나타나 있다. 

  이마엔 노동의 땀방울
  그래도 뱃속은 텅 비었다.
  그래서 돌격대원은
  종족 전쟁 준비가 끝났다.
  유대놈이 피를 흘리면
  그때야 우린 자유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으로만 나타나는  두려운 뒷모습이었다. 앞모습은 행진하
는 종대의 엄격한 절제, 단체복과 명령하는 지도부 등이었고, 그것은 국민에게는 
질서의 상징으로 보였다. 히틀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독일은 이 혼란의 시
절에 질서를 살망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되찾고자 하였다고.
  깃발과 악대를 뒤따라서  자부심 강하게 행진하는 갈색  대열이 점점 더 자주 
이미 죽어버린 거리에 나타나곤 하였다. 그들의  엄격한 기율은 공산 주의자들의 
비참한 잿빛 행진에 비해서 두드러진 효과를  냈다. 공산주의들은 제대로 조직되
지 못한 모습으로 목관악기  악대의 자극적인 콧소리를 뒤따라 행진하염서 주먹
을 쥐고 "배고파!" 하는  구호를 외쳤다. 극히 가난한 사람들의 곤궁을 보여주기
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느 그림이었다. 그 시절 정치적인  작은 전쟁에
서 얼마나 확고한 희생의 각오를  가졌던가 하는 것은 어떤 서른네 살의 돌격대 
연대 지휘자가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다.

  나는 국가사회당을  위해서 일하면서 30번 이상  법정에 섰으며, 신체손상, 저
항, 그 밖에 나치에게는  당연한 법위반의 이유로 전과가 여덟 번이나 있습니다. 
벌금의 일부를 아직도  내야 하고, 게다가 또  다른 소송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밖에도 나는  적어도 스무번이나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뒷머리, 왼쪽 
어캐, 아랫 입술,  오른팔 팔꿈치 위에 칼자국  흉터가 있습니다. 그 밖에  단 한 
푼도 당비를 요구하거나 받아본  적이 없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업에서 번 
나 자신의 돈을 쓰면서  우리 운동을 위해 내 시간을 바쳤습니다.  오늘 나는 경
제적 파탄을 앞에 두고서...

  공화국은 이러한 확고한  의지에 맞설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히틀러 운동이 일단 커진  다음에는 시민전쟁 비슷한 상황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반대수단을 취할 힘도  없었다. 공화국 옹호자들은 반박논리의  힘으로 비합리주
의의 돌진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제도의 교
육적 파급을 믿고  인간적인 사회적 상태로 사태를  뒤집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
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미 낡은  진보사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러한 신념은 소
용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었다. 그러한 신념은 이성과 분별력을 전제로  한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두려움,  공포, 공격성이 뒤섞여서   판치고 
있었다. 히틀러 선전꾼들의 지성이 대단치 않아도, 위기의 두려움에 대한 그들의 
답변이 신통치 않아도,  반유대주의의 암시가 살벌하여도 사람들을  별로 노엽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전문가들의 분명한  반박에도 흔들리
지 않고 계속 상승 하였다. 1931년 초에  수상인 브뤼닝이 동 프로이센과 슬레지
엔의 비참한 지역을 순방할 때에 그는 차갑고  거의 적대적인 응대를 받았다. 대
중 사이에서 '기아  독재자'라는 제목이 붙은 삐라가  그를 맞았고, 휘파람소리가 
나곤 했다.

  그 사이 의회의  국가사회당 의원들은 '체제'의 파괴자이며 옹호자로서의 이상
적인 역할을 점점  더 잘해내게 되었다. 자기 파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와는 완전히 달리 의회를 마비시킬 힘이 있었다.  큰소리를 지르고 기율 없는 태
도를 보여서 '수다쟁이들의 집'이라는 의회의  명성을 거듭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사태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에  맞서서, 사태를 개선시켜봐야  조건이행 
정책에 도움을 줄 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정부가 국민에게 어떠한 희생을 
요구해도 국가반역 행위라는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그와 함께 그들은  의사진행 방해의 기술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였다. '공산주의
자'가 말을 하려고만 하면  소란, 의회규칙 어기기, 단체 퇴장 등을 행하였다. 의
회규칙 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107명  의원들에 대해서 무려 4백 번의 형벌 요
청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 일파의 관습을 무시한 공격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931년 2월 의언 면책 특권의 남용 가능성을 제한하는 법이 의결되었을 때 국
가사회당 소속 의원들, 이어서  도이치 국가 민족당, 이어서 공산당 의원들이 차
례로 완전히  의사당을 떠났다. 그들은  신문기사와 추종 세력  확보라는 면에서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길거리와 대중 집회장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괴벨스는 의사당에 남은  사람들을 '앉은뱅이 정당'이라고 비웃고,  4일만에 힘도 
없는 의회가 아니라 5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연설을 할 것이라고 예고
하였다. 물론 튀링겐  주 내무장관 프리크의 도움을 받아서 야당측의  의회 반대 
의회를 바이마르에서 열갰다는  선전 의도는 좌절되었다. 중앙  정부라 주정부에 
대해서 강제 집행권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의회국가 최후의 비명
  국가사회당 소속의원들의 의사당 탈출  결정은 물론 논리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의회를  마비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의회의 위신을 추락시키기 
위하여 온갖 행동을 다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회는 그와 상관 없이 어차
피 정치적  결정의 장소가 아니었다. 1930년  9월 선거가 있기도  전에 브뤼닝은 
파탄에 이른 의회를 무시하고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있는 대통령의 비상사태 
권한에 의존하여  국가 를 통치하고  있었다. 의회에서 정상적으로  다수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막힌 이후로 절반쯤 독재적인 통치 행휘를 계속하기 위해서 그
는 거의 오로지 대통령의 특별 권한을 이용하였다.
  이 사실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망 순간' 이라고 보는 사람은 이러한 권력 이
탈은 거의 모든 정당이 정치적인 책임을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
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사태가 권위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비정
치적인 대중'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 국
가구조'가 나타나기만 하면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는  모든 정당들은 위기의 순간
에 재빨리  체념하고서 대통령이라는 '대리황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만 하였
다. 각 정당들은  대통령 뒤에 숨어서,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인기 
없는 결단들과 자기  당이 직접적으로 연관을 갖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다. 국가
사회단 소속 의원들이 의사당을 떠났을 때 그들은 다른 정당들보다 정책적인 일
관성을 유지한 셈이었다. 그들의 성공 '비밀'은 그것과 상관이 있다.
  이젠느 더 이상 정당 국가도  아니지만 어쨌든 정당 국가에 대한 염증은 정부
가 안팎으로 분명하게 실패를 거듭하면서 더욱  커져만 갔다. 브뤼닝의 광범위하
고, 거의 자학적인  확신으로 계속된 엄격한 긴축 정책은 재정적인  어려움도 판
매위기도 군비축소 문제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는 9월  선거 결과
에 놀라 어떠한 양보에도 반대하면서 히스테리 발작을 보였다. 
  1931년 초에 무역  협정을 맺어서 경제 공황과 함께 시작된,  국가들간의 전반
적인 경제 전쟁을  끝내고 관세장벽을 허물려는 움직임마저  제지당하고 말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자발적으로 양국  경제 정책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관
세 협정을 맺고  다른 나라들의 가입을 촉구하였을 때, 프랑스는  그것을 베르사
유 조약의 주요조항을 깨려는 시도라고 여기고 당시 외교관 한 사람이 회고록에
도 쓰고 있다시피 "구대륙에서 평화가 다시 위협을 받는다."고 여겼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프랑스  은행들은 곧바로 단기어음들을 제시하였고, 
두 나라를 '엄청난 부도사태'로 몰아갔다. 이러한  사태는 두 나라가 가을로 예정
했던 계획을 수치스런  상황에서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오스트리아는  엄청난 경
제적 양보를 해야만 했다. 
  한편 독일에선느 히틀러와 급진  보수파가 정부의 체통 손상을 노골적으로 촉
하하였다. 이어서 계속된 협조 노력은 모든 사람의 비웃음과 무시를 받았다. 6어
ㅜ 20일에 미국  대통령 후버가 배상금 지급을  일년 동안 연기하자고 제안했을 
때 '전쟁 시작과  같은 분위기'가 프랑스 의회를 지배하였다. 이  계획과 가장 밀
접한 관련을 가진  프랑스는 그에 대한 협상을 질질 끌었다.  독일의 붕괴사슬이 
생각 이상으로 위기를 강화시킬 때까지 그러한 태도는 계속되었다.
  당시 어떤  관찰자는 베를린에서도 전쟁이 터지기  전의 시절이 연상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거리는  그때보다 오히려 더 텅  비어 있고, 도시와 도시의 극도의 
긴장된 분위기를 뒤덮고 있는 침묵이  그때보다 오히려 더 컸던 것이 특별히 기
억난다고 했다. 1931년 말에 히틀러는 엄청난 끝올림을  해서 지나간 한 해 동안 
당내에 50명의 사망자와 4천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발표하였다. 
  현실에서 그렇듯이 이론상으로 점점  눈에 띌 정도로 의회 민주주의의 후퇴가 
이루어졌다. 의회의 자포자기, 위기 관리의 무능,  거리 사건에 대한 정부 권위의 
실추 등은 헌법  개정 논의를 점차 활발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개혁한에는 우익
이나 좌익 과격파의 전체주의적  생각에 대한 염려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감이 합쳐져 나타났다. 특히 보수진영의  시사평론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국가'나 
법치국가의 독재' 등의 이론으로 만들어져 나온  답답한 생각들은 중도적인 방향
을 제시한 과격한 히틀러라는 대안을 수정해보려고는 의도를 담은 것들이었다.

    쿠어트 폰 슬라이허
  민주주의가 점차 퇴색하는 것을  보고 대통령 주변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권위
적, 반동적인 헌법안들도 같은 의도를 가졌다. 점차 왕조를 재건해서 민주정권과 
전통 및 국민이 복조적 성향을 화해시켜보겠다는 의도를 가진 이러한 생각의 가
장 무게 있는 대표자들은 수상인 브뤼닝, 국방 장관 그뢰너, 그의 정치적 심복이
자 국방부 차관  쿠어트 폰 슐라이허 장군 등이었다.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 대
통령과의 친분 덕분에 정치 무대의 결정적인 배후 인물로 부상한 사람이었다.
  브뤼닝을 수상으로 임명할 때 슐라이허는 이미  두드러진 역할을 했고, 능숙하
고 날카롭고 노회하게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서 이제부터 어떤 수상이나 장관
도 자신의 동의가  없이는 임명되거나 해임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치적인 특
성의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고, 섬세하게 짜여진 음모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만
드는 그의 특성은  곧 '군복 입은 실세'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섬세한 본성대
로 조소적이고,  충동적이며,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ㅗ  위험의 낌새를 
알아채면 줄타기 광대의 기질을 드러내곤 하였다.  군대가 자기 친구들과 이욱도 
감시하도록 만들었다.. 경박성,  책임감과 음모를 좋아하는 등 그의  성격은 공화
국 말기증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현상의 하나였다.
  슐라이허의 생각은 히틀러가 동원한 것 같은 공범위한 민중 운동은 국가의 권
력수단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출발하였다. 소란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잿빛의 대중 앞에 장교단이  마주섰을 때의 충격적인 혁명체험이 국방부의 깨어
있는 지도층에게 군대는 절대로 국민과 대립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슐라이허는 국가사회당의 당수를  심각하게 여기지를 않고, 그를 '몽상가이며 어
리석음의 우상'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래도  그는 히틀러에게 엄청나게  몰려드는 
사람들의 동기만은 존중하였다.
  이 운동의 의심스런  측면들, 무법성, 원한, 이념적  광신주의의 결합을-장교들 
중 한 사람이  국가사회당의 '러시아적 특성'이라고 불렀던-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특성들이야말로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서두르라고  자극하였다. 
힌덴부르크가 아직 살아있고 군부가 전체적으로 붕괴현상에서 아직 벗어나 있는 
동안에 그는 히틀러를  '교육시키고, 정치적 책임이라는 사슬에 붙잡아두어야 한
다고 여겼다. 또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제약을 앞두고 히틀러 추종세력을 '방어의
지' 강화에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는 룀과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통해서 조심스럽
게 히틀러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대중무대와 집회의 버릇없는  영웅에 대한 잃어버린 영향력을,  교육적 지도의 
형태로 되찾으려는  비슷한 생각이 마침 알프레드  후겐베르크를 움직이고 있었
다.힌덴부르크 대통령이 1931년 여름에 그에게  히틀러의 '이 열광한 젊은이들'에 
대해서 탄식하면서 국가사회당은 '믿을 만한 국민정당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을 때, 후겐베르크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는 데 이미 공헌한 바가 
있다고 말했다. 그 동안의 모든 실패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후겐베르크도 히틀
러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태도, 관계, 협상
  이렇게 사방에서  밀려든 접근 시도들은 마침  국가사회당 당수가 감행하려는 
전진 시도와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9월  선거의 성공이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였다. 선거결과는  그를 정치무대에서 
주요배우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지만, 고립이 계속되면서  그는 어느 정도 말
없는 역할만을 맡아왔다.
  어떤 관찰자는 이렇게  적었다. "히틀러는 넉 달을 잃어버렸다.그는 영원을  주
고도 다시 사지 못할  귀중한 시간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보내버린 것이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그에게  9월 15일 패배자들의 떨림과 관리들의 당혹감을 두 
번 다시 마련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때 시간은 도이치 지도자의 편이었다. 합법
적이냐, 불법적이냐, 누가 그런 걸 물었던가? 그러나 이 도이치 지도자는 비겁하
고 허약한 잠옷 입은 존재일 뿐이며, 얼른 살쪄버리는 소시민 폭도일 뿐이다. 운
명이 자신과 월계관을  한 번에 삭여버리는 산  속에 집어넣어도 아주 편안하게 
지내다가 뒤늦게야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이 북 치는 인간은  진영 안에서만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북을 쳤다... .브르투스는 잠들어 있다.
  정치적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하고 순간에 결정되는 감정에 따라 모여
든 추종세력을 이끄는 히틀러는 실제로 다른 누구보다도 높은 정도로 계속 새로
운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야 할 처지에 있었다. 당은 1931년에도  성공의 행진을 
계속하였다. 5월  초에 샤움부르크 리페의 지방의회에서  26.9퍼센트를 차지했고, 
2주 뒤에 있었던  올덴부르크 선거에서는 37.2퍼센트를 차지해서  처음으로 지방
의회에서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성공들은  9월 선거에서 이미 더 큰 차원에서 이루
었던 것을 작은  차원에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것으로 당이  권력에 다
가가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추종자들이  광장에서 혹은  좁은 길들을  통과하여 
'(권력의) 문 앞에 선 히틀러!'라는 구절을 읊어보아도 마치 그런 말은 바로 거기
까지만 간다는 말처럼 들렸다.
  의회를 마비시킨다는 전략에 따라서 의회에서도 어차피 큰 성과를 거들 수 없
는 처지였다. 그래서  점점 불어나는 당원 숫자, 집회 신기록,  혹은 새로운 순교
자에 대해서, 빨리 맥빠지는, 점점 더 긴장된 환호성민 남았다.
  봄이 되자 다시 발터  슈테네스크가 이끄는 베를린 돌격대에서 초조해 하면서 
지속적인 정체에 대한 원망이 밖으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돌격대 지휘자가 당에
서 공식적으로 이탈해서, 흔들리는 파벨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전에 히틀
러의 지위해체가 먼저 나왔다.  새로운 보증, 새로운 충성의 맹세를 통해서 반란
자들의 불쾌감이 가라앉았다.
  선거전을 통해서 '체제'를  쓰러뜨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히틀러는 광
범위한 활동에서 모든 영향력 있는 세력의 신뢰와 후원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
하였다. 대중들  사이의 성공만으로 정권을  장악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는 
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권력을 대통령과  그의 측근에서 넘겨주는 헌법 
48조는 의회권력과 선거 승리의 의미를 축소시켰다.  유권자 숫자가 아니라 대통
령의 의지가 수상직을 결정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다수를 얻는 것보다 힌덴부르
크의 신임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합법을 가장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히틀러는  여러 차원으로 한꺼번에 발을  내디ㄷ다. 라이프치
히 합법화 맹세는 품행 단정과 동맹의 제안을  포함한 것이었다. 연초에 폰 슬라
이허의 손가락이 그를 가리켰고,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국경수비에 동참하는 일
이 허락되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히틀러는  2월 20일자 명령을 통해서 돌격대
에게 거리싸움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카셀의 조직이  명령을 어기고 무기를 마련
하였다는 이유로 조직을 일시적으로 해체시켰다.
  한편, 룀은  4월의 건의서에서 히틀러가  수상직을 차지하면 돌격대는 '어쩌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착한 아돌프는  충성심
이 흘러  넘친다."고 그뢰너는 친구에게  써보냈다. 히틀러는 아무런 골칫거리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돌릭 주교들이 성명서를  통해 국가사회당에 날카롭게 경고해오자 히틀러는 
즉시 신뢰하는 부하인 헤르만  괘링을 로마로 보내 화해를 시도하였다. <데일리 
익스프레스>지를 위한 인터뷰에서 그는 배상을  중지하기 위ㅏ해서 독일 영국간
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통찰력과 성숙한 모습을 보이
면서 결속 요인을 강조하였다.
  공산당 의원인 빌헬름 피에크가, 붉은 군대는  내부의 혁명적인 해방군을 도우
러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자 히틀러는 미국 신문에  대고, 국가사회
당은 밀려오는 세계 볼세비즘에 대한 방벽이라고  설명하였다. 당시의 어떤 서술
은 이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욕을 훨신 덜 한다. 이제는 유대인을 아침
식사에 올리지" 않으며 "편집광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민적인 평판을 염려해서  그는 겉모습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베를린에 오
면 언제나 머물곤 하던 작고 초라한 '상수시' 호텔을 떠나서 약간 도전적인 의도
가 없지도 않지만 어쨌든 수상관저 건너편 빌헬름 광장에 있는 '황제궁(카이저호
프)' 호텔로 숙소를  바꾸었다. 길들이려는 생각을 가졌던 우익 지도자들은  히틀
러가 마침내 국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고 안심하였다.
  그는 아직 냉담한 태도를 보이던 기업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광범위한 차
원에서 노력하였다. '황제궁' 호텔에서 사교클럽을 열고, 유력인사들과 잘 통하는 
폰 디르크센 부인이  적절한 때에 나이든 여성친구의 역할을 다시  떠맡았다. 그
는 그녀의 열성  덕을 많이 보았다.베히슈타인 부인도 전처럼 그를  위해서 열심
히 활동을 벌였다.
  다른 관계들은 대가족을 이끌고 있는 괴링과 경제지 기자인 발터 퐁크의 소개
로 이루어졌다. 경제위기에 고생한 소기업가 빌헬름  케플러는 공감을 가진 실업
가들과 당을  연결해주고, '경제인 동호회'를  민들었다. 그것은 나중에 히틀러와 
결합해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광범위한 산업계 가문과 연결되어 있고,  8월부터 국가사회당의 언론부상을 맡
은 오토 디트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1931년 여름에 지도자는 뮌헨에서,  저항의 
중심부에 있는 표준적인 경제계  인사들과 그들이 중심이 된 시민적인 중도정당
의 인사들을 설득하기로 갑자기 결정하였다."  그는 광범위한 순회여행에 나서서 
독일 전국을 6인승 벤츠 자동차를 타고  돌면서 친근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중 
몇 개는 아무런 의심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한적한 숲의 초원, 신의 자유
로운 자연 속에서' 이루어  졌다. 키르도르프의 영지에서 그는 30명이 넘는 중공
업 사업가들에게 연설하엿다.
  사회주의적인 목적을 포기한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의회에서 '은행과 증시 
지배자들'의 재산 몰수를 요구하였던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고트프리트 페터에게 
그는 명확하게 제안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다. 공산당  소속 의원들이 그 제안을 
한 번 더 제출하엿을 때  그는 의원들에게 그 제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강요하
였다. 경제정책에 대해서 그는  이때부터 아주 애매한 의견 표시를 하였다. 동시
에 고집스러운 고트프리트 페터와  거리를 두고 그가 공개석상에 등장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7월 초에 히틀러는 마침내 베를린에서  후겐베르크와 만났다. 이어서 재향군인 
철모단 지휘자인 젤테와 뒤스터베르크와 협상을 가졌다.  그들은 다시 그와 동맹
을 맺고 싶어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폰  슬라이허와 육군 사령관 하머슈타인 에
크보르트 장군을 함께  만났다. 그리고 브뤼닝, 그뢰너와 만나고, 한  번 더 슬라
이허와 브뤼닝을 만났다. 그러한 대화들은 의도를 탐색하는 일과, 히틀러가 원칙
적으로 반대하는 체제 안으로  그를 이끌어들이려는 목표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뢰너 장군이 말했듯이 히틀러를  '이제 2중 3중으로 합법화의 
기둥에'붙들어 매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들 적수 중 누구도 히틀러의 단호함과 비타협적인 특성을 제대로 파
악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위장술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그 결과 국
가사회당 당수가 고립에서 벗어나서  대등한 협조자의 지위를 얻게 되었을 뿐이
다. 이러한  만남들은 추종자들을 자극하였고,적들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유권
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가 이러한 변화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 왔는가 
하는 것은 브뤼닝과의 대화를 위해서 베를린으로 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보여준 반응으로  알 수 있다. 헤스,  로젠베르크, 그의 대리인  바이스가 뮌헨의 
그의 곁에 있을 때 전보가 한 장 날아왔다.  그는 성급하게 펼쳐 보더니 거기 있
는 사람들에게 흥분해서 외쳤다.  "이제 그들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됐어! 그들은 
나를 대화 상대자로 인정했어."
  그가 얼마만큼이나 위장술을 보여줄  능력이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뢰너의 판
단이 알려주고 있다. "히틀러의 의도와  목적은 선하다.그는 다만 열광적이고, 불
타오르고,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호감이 가는 인상에, 겸손하고 점잖은 사람이고, 
열성파 독학자의 겉모습을  보여준다." 지도적 인사들과 친밀한  의견 교환을 할 
때면 그는, 약간 무시하는 듯한 아이러니가  바닥에 깔려 있기는 하지만 '아돌프'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슬라이허의 주선으로 10월 10일로 일정이 잡힌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만남은 
실패로 끝났다. 사실상 대통령 궁에서는 결정적인 망설임이 있었다. 대통령의 아
들인 오스카는 히틀러가 대통령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자는 소주를  마시
려고 할걸요."라고 심하게 비꼬았다. 괴링을 대동하고 찾아온 히틀러는  대통령과 
만나고 있는 동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자기  덩의 목적을 떠벌이느라고 나라의 
어려운 처지를 감안해서 정부를 후원하라는 대통령의  권고를 놓치고 말았다. 점
점 늘어가는 폭력행위에 대한  훈계에 대해서 그는 정작 상대방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면서 수다스럽게 단언을  하였다. 대통령은 어쨌든 이  '보헤미안 상사'를 체
신부 장관으로 만들 각오는 되어 있지만 수상만큼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소문
이 나중에 측근에서 새어나왔다.

    하르츠부르크 우파 모임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만남에  이어서 히틀러는 하르츠부르크 온천으로 향했
다. 다음날 벌써  민족주의 계역 야당은 강력한 데모를 하면서  결속을 축하하고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의 틀을 만들었다.  한 번 더 후겐베르크는 광범위한 
열병식을 위해서 우파가 가지고 있는  거ㅜ력, 돈, 체면 등 모든 것을 긁어 모았
다. 국가 사회당과 도이치  국가 민족당, 경제당, 철모단, 제국 연맹 등의 지도자
들이 모였다. 나아가 수많은  후원자들, 두 명의 호엔촐레른 왕자를 위시한 예전 
왕가의 후손등, 모든 도이치 운도의 의장직을 맡은 법률 고문관 클라스, 폰 뤼트
비츠와 폰 제크트 같은 퇴역 장성들, 그리고  수많은 재계와 산업계의 유면한 이
름들, 그  중엔느 히얄마르 샤흐트, 연합  철강소의 에른스트 푄스겐,  철강 무역 
연합의 루이 라베네, 함부르크의  블롬, 그리고 폰 슈타우스, 렌겐단츠, 소게마이
어 등과 같은 은행가도 끼어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면 공화국의 적은 모
두 다 모인  꼴이었다. 원한과 목표로 하나가 된 불평분자들의  다채로운 모임었
다. 
  히틀러 자신은 극히 입을 조심하였다. 그는  마지못해 겨우 참석하겠다고 동의
를 했다.  아마도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방문한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그의 불쾌감을  높였던 것 같다. 영  안에 반대해서 단결했을 때처럼  그는 다시 
자기 편의 강력한  반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부르주아와의 
결합은 그 자신에게도 역시 불쾌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추종자들을 소집하고 프리크를 내세워 
'마구잡이로 뒤섞인시민계층'과의 동맹을 순수하게 전략적인 고려에서 나온 행동
이라고 변명하였다. 무솔린도  국가 주의 연합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권력을 장
악하지 않았던가. 프리크의  말이 끝나다마자 그는 효과적인  기습공격 스타일로 
개인적인 수행원을 거느리고 홀에 나타나서 추종자들이 화려한 의식으로 약속을 
하도록 하였다. '민족주의 통일전선'은 그 동안  온천 요양소에서 그이 등장을 기
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준비과정에서 이미 국가  사회당 당수에게 수많은 양보를 하였던 후겐
베르크에게 이번 모임은 아직은 마지막 굴욕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영향력 있는 
상대방의 민감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도전적으로 야심만만한 동맹개념을 여지
없이 깨뜨려버렸다. 그는  전날 밤에 모인 편집외의에도 빠졌고 그런  일은 쓸데
없는 시간  낭비라고 선언하였다. 집회의  열광적인 절정을 이루어야  할 마지막 
행진에서 돌격대 부대가 행진하고 난 다음 철모단이 다가오자 보란 듯이 무대를 
떠났다. 회식에도 참석하지 않고서, 수천명의 추종자들이 '굶은 상태로 근무'하고 
있는데 자신망 회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많은 참석자들에게 좋지 않
은 언론  보도를 피하려는 고려에서"  겨우 "공공연한 결렬"을 피했을  뿐이라고 
후겐베르크가 실망해서 탄식하였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하르츠부르크의 불협화음은  전략적인 술책은 아니었다. 불
만이 숭배자를 만들어낸다는 성모의 비결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만남은 이전보
다 더욱  초조하게 권력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후겐베르크의  단결 주장은 
이 축제를 개최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한 지휘요구를  담은 것이었다. 히틀러는 특
유의 일관성으로 협동은  곧 속박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어
쨌든 독일은  앞으로 우스꽝스럽게도 두 명의  '구원자'를 보게 되리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그런 혼란스런 인상을 몰아내기  위해서 그는 하르츠부르크 집회가 끝난지 일
주일 뒤에 브라운슈바이크의  플란츠 들판에서 대규모 시의를  벌이기로 하였다. 
10만 명  이상의 돌격대원들이 특별열차편으로  수송되어 왔다. 여섯  시간 동안 
분열식이 계속된느 동안 거대한  갈고리 십자가 자락을 늘어뜨린 비행기들이 공
중을 빙빙 돌았다.  히틀러는 연대기 축성식이 벌어지는 동안 이것은  권력 장악 
이전 마지막 축성식이 될 것이고, 당은  '권력의 1미터 앞'까지 와 있다고 선언하
였다. 모든 의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공격>지  10월 21일자는 다음과 같이 설
명하였다. "하르츠부르크는 전략적인 부분 목적이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변함없
는 궁극 목적을  알린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하르츠부르크가  아니라 브라운슈바
이크가 있는 것이다. "

    히틀러와 시민 계급
  하르츠부르크에서 쌀쌀했던 히틀러의  태도에는 시민세계에 대한 그의 반감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이러한 감정을 그는 완전히  통제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실크 해트, 프록 코트, 빳빳하게 풀 먹인  셔츠 깃 등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직함, 훈장, 자만심  등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지배 요구가 
도덕적인 이념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믿고,  기꺼이 자신의 '역사적인 역할'에 대
해서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허약함과 부패에 대해서  정확한 히틀러의 
감각은 이 완강한 의지력 뒤에  깨어지기 쉬운 특성이 숨어 있는 것을 냄새맡았
고, 중사층 태도를 지닌  이 미라 같은 패거리 안에 들어  있는 시대에 뒤떨어진 
요소를 알아챘다. 
  카페를 드나들던 젊은 멋쟁이, 저 빈둥거리는  예술가 지망생 히틀러의 동경은 
바로 이런 시민세계였다. 그는  온갖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의 사회적, 이념
적, 미적  가치관을 비판없이 받아들여서 오랫동안  간직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 사이 파산 상태에 이르러 공시선서를 해버린 세계였다. 
  그 세계의 대표자들과  달리 그는 이 사실을 잊지 않았다.  후겐베르크를 보면
서 그는 저 약고, 거만하며 허약한 폰 카르, 시민적인 유명인사들의 모습을 대표
하는 그 폰 카르를 다시 보는 듯 했다.  그들은 지배권의 요구와 개성을 지닌 사
람들이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벌써 거의  반사적으로 경멸적인 형용사들이 쏟
아져 나왔다. 특히 '비겁한' '멍청한' '바보 같은' '썩어빠진' 등과 같은 표현들이었
다. "어떤 계층도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른바 시민계층보다 더 멍청한 것은 
없다."고 그는  자주 강조하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오랫동안이나 소리지르는 
선전화 부정확한 태도를 가지고 일부러 이 계층을 당에서 멀리 떼어놓으려는 애
썼다고 했다. 
  <라이프치히 최신 뉴스>의 주필 리하르트 브라이팅이 1931년 5월에 인터뷰를 
하러 방문하자 히틀러는 이런 말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당신은 우리가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시민계층의 대표자군요." 그리고  자신은 죽어가는 시민계급을 구하
라고 뽑힌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시민 계층을 밀어내려고 하는  사람이며 공산
당보다도 그 쪽을  더 끝장내려고 한다고 했다. 긴장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문화시민적인 자신의 출발에 대해서 거리감을 강조하곤 하였다.
  "오늘날 어떤 없는 자가 내게 잔인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면 나는 이 잔인성
이 언젠가는 밖으로  분출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시민계층 사람이  꿈을 잃
고 돌아다니다가 문화니, 문명,  미적인 세계 만족 따위를 이야기하면 나는 그에
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도이치 민족에게는 끝장난 사람이다!' 넌 베를린 서부에 
속하는 인간이야! 그리로 가서 깜둥이 춤이나 끝까지 껑충거리다가 뒈져버려라!" 
  그는 간혹  자신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사회적인 
소속감보다 사회적인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인상을 절대로 떨쳐버리지 못했
다. "나는 절대로 시민성을 양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는 주장하곤 
하였다. 그가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던 노동자 계층에 대한 희망,  이 '참된 귀족 
계층'에 대한 감탄성  발언 속에는 노동하는 계층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거부한 다른 계층에 대한 증오심이 나타나고 있다. 
  시민계층에 대한 그의  증오심에는 근친상간적 혼합감정이 뒤섞여  있다. 처음
에는 거부되고 그  다음에는 속임을 당한 시민적  성향을 가진 사람의 실망감이 
언제나 다시 드러나곤  하였다. 그가 측근에 둔, 특별히 좋아한  건달 유형들, 이 
거칠고 원시적인 '운전기사 계층' 인 샤우프, 슈레크, 그라프, 모리스 등은 이러한 
원한을 반영하고 있다. 
  이 원한은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일시적으로 깨뜨려질 수 있는 감
정이었다. 예를 들면 에른스트 한프슈텡글, 알버트 슈페어 등과 같은 사람들이었
다. 단치히의  국제 연맹 위원인  칼 야콥 부르크하르트에게  히틀러는 1939년에 
'처량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겟느 낯선 세계 사람이군요."
  이 낯선  세계로 가는 통로는  없었다. 하르츠부르크 집회가  보여주듯이 오래 
계속되는 전략적인 관계로 만들어낼 수 없었다.  집권당에 대한 공동의 전략적인 
관계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집귄당에 대한 공동의 전략도, 이미 여러 번이나 논
의된 바가 있었지만  그림자 내각을 만들지도 못했고, 눈앞에 닥쳐온  대통령 선
거에 대비해서 후보  단일화로 이루지 못했다. 시민 진영이 갈색  돌격대를 바라
보면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생각하였던 공동의 투쟁이라는  생각도 자의식 강한 
히틀러 쪽 사람들의 조롱만 얻었을 뿐이다. 
  후겐베르크는 하르츠부르크에서 국가  사회당, 나머지 우파 진영, 그리고 돈과 
명예를 가진  그룹들 사이의 동맹관계를  만들어내려고 희망했다. 이  모든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여우같이 교활한 활동을 펼치는 자신이야말로 민족주의 진영
의 위대한 조종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를 밀어붙여서 완전히 굴복하
든가 아니면 민족주의  통일전선이라는 이념 자체를 포기하든지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과 시민적인 우익 사이의 '시험 결혼'이 언제나 그랬듯이 이
번의 시도로 실패하였고  하르츠부르크 집회의 시작이라기보다 오히려 종말이었
다. 그것은 후겐베르크에게는  자신이 조종자라는 망상과의 이별을 뜻했고, 우익 
진영이 생각했던, 북치는  사람, 비어홀 선동기, 환쟁이라는  히틀러에 대한 이미
지와의 결별을 뜻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동맹이라는 생각 자체를 버린다는 
뜻은 아니었다. 후겐베르크는  "우리 자신이 '뒤죽 박죽'이라고 느끼지도  않았고, 
보조기관차 노릇을  하고 나서 나중에  짓밟혀버릴 생각도 없었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그의 길은 계속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만 나갔다. 

    독점 자본주의 음모설
  그러므로 자주 거론되는 '하르츠부르크 전선'이라는 말은 역사적 사실이라지보
다는 정치적 전서의 개념에 가깝다. 그것은  제 3제국의 생성배경에 어두운 음모
들이 있다고 보고, 특히 훈장들로 빛나는  가슴, 프록코트, 계급적 태도에 히틀러
가 눈이 멀었다고 여기는 저 음모성을 위한  빛나는 증거라고 여겨지고 있다. 히
틀러는 타당한 일이지만 그들  시민적인 유력인사들을 경명하였다. 하르츠부르크 
전선은 특히  히틀러와 대자본 사이의 음모를  밝혀보이는 부분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물론 국가 사회당의 당수와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기업가 사이에 모종의 연결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당이 이러한 관계에서  물질적인 이익과 체면상승 효과를 
얻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이 이로웠던 것들은  다 부서져 가는 온건파 정당
들에게도 더 일찍부터, 그리고  더 높은 정도로 주어졌던 것들이다. 한편이 표를 
얻은 것이다 다른 편이 표를  잃은 것이나 이러한 재력 있는 후원자 관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히틀러는 기업가들의 소극적 자세를 거듭  불평하였다. 무솔리니는 "싸움이 훨
씬 쉬웠다. 그는 이탈리아 산업계를 자기 편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이치 
산업계는 도이치 민족의 재생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나. 아무 일도 안 한다!"
고 그는 말했다. 
  1932년 4월에도 그는 거의  붕괴된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자기 당보다 산업계
에서 더  많은 돈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당황하였다. 발터  풍크가 32년 
말에 루르 지방으로 모금 여행을  나섰을 때 그는 단 한 건의 2~3만 마르크짜리 
후원금을 얻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후원금 규모는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곤 하였다. 1930년에서  1933년 1
월 30일까지 약 6백만 마르크를 현실적이라고 보는  사람이라면, 약 1만 개의 지
역 조직, 광범위한  간부직, 거의 50만에 육박하는 개인 군대,  그리고 1932년 한 
해에만 열두 번이나 치러낸 선거전 등을 위해서는 돈이 두 배가 있어도 이런 거
대한 당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 사회당의 일년  예산은 콘라트 하
이덴이 밝힌 것처럼 실제로 이 시기에 6천만  내지 7천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그
러한 거대 조직은 히틀러가 때로 냉소적으로 자신을 도이치의 가장 위대한 경제 
지도자의 한 사람이라고 부르도록 만든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음모설이  진지한 증인들까지  내세우고 있지만, 그래도  대자본가와 
국가사회당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광범위하고 불분명한 개념들에 도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에 반해서 엉터리 학분적  논의에서 히틀러는 극히 진지하게,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본주의적인 '나치 도당'이 '힘들여서  비싼 돈을 주고 산 정
치 후보자'라고 여겨졌다. 그를  자본가들의 '공공관계'를 위한 매니저라고 본 것
이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기업가들 사이에,  그리고 산업 분야별로  뚜렸한 이해의 
차이가 존재하였다.  적잖은 유대인 기업들을  빼더라도 수출업자,  증귄계, 대형 
유통업자, 화학산업, 그리고 크루프, 회시, 보시, 클뢰크너 등과 같은 전통있는 기
업가 가문들은 적어도 1933년  이전까지는 히틀러에 대해서 대개는 경제적인 고
려에서 후원을  보류하였다. 히틀러가  라인 베스트팔렌 대기업계와  접촉하도록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오토 디트리히는 당시의 보고서에서 경제계가 "우리의  가
장 힘든  싸움의 시기에... 히틀러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고 탄식하였다.  1932년 
초에는 '상당한 숫자의 경제계의 저항'을 느낄 수 있었다. 
  뒤셀도르프 산업가 클럽을 앞에  놓고 행한 히틀러의 1932년 1월 26일가 유명
한 연설은 바로  이러한 저항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고나서  당에 주어
진 재정적인 후원금은 아주  긴급한 걱정은 없애주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바라던 
액수에 미치지 못하였다. 
  1932년 말에 샤흐트,  은행가인 폰 슈뢰더와 알버트  푀글러가 힌덴부르크에게 
제출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해달라는 진정서는 요구를 받은  기업가 다수가 
서명을 거절하는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다. 샤흐트는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심하기가 그토록 무거운 것을 보니 중공업은 과연 그 이름에 합당하다고 투덜
거렸다. 
  히틀러와 대자본가들 사이의  밀접한 결합설은, 어째서 수백만  유권자들이 산
업계의 수백만마르크보다 훨씬  앞서서 히틀러를 지지하였는가를 설명해주지 못
한다. 히틀러가 뒤셀도르프  연설을 했을 때 그의 정당은 680만  명 이상의 당원
과 추측컨대 1천만 명 이상의 유권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의 세력기반
이었으며, 그들을 사로잡았던 '거대한 반자본주의  열망'을 고집스럽고 완고한 기
업가들의 생각보다 더욱 고려해야 했다. 기업가들을  위해서는 똑똑한 척하는 오
토 슈트라서를 제물로  바쳤을 뿐이다. 오토 슈트라서는 어차피 그의  미움을 사
고 있었는데 이들 기업가들에 맞서 자신의 추종자들이 베를린 금속 노동자 파업
에 참가하도록 만들어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파업이 그래도 공산주의자들의 파
업보다 낫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히틀러 당이 대자본가에게 매수되었다는 주장은, 어째서 이 새로운 종류의, 거
의 무에서 출발한 대중운동이 전통 있고 탁월하게 조직된 도이치 좌파를 힘들이
지 않고 추월할 수 있었던가 하는 질문에 전혀  답을 하지 못한다. 그 주장은 원
래 이 문제에  답변하려고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답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악말르 믿는 일이거나 아니면  정통 공산주의
의 주장일 분이다.  그 어느 쭉이든 좌익측의 합리성 상실의  표현이며 말하자면 
'좌익의 반유대주의' (다렌도르프는  후원의 동기들에 관해서, 기업가들이 지배의 
전망을 가진 모든 정당에 재정적 도움을 주고  음모가 아니라 훨씬 방어적인, 배
후의 안전만을 생각하였다는 합당한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1919년에 나
온 후고 슈틴네스의  유명한 말에 따르면 '소요에 대항하는  사회적 안전의 보조
금'을 냈다. 할가르텐도  히틀러가 산업기금에서 강력한 지원을 받았지만 그것으
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요약하였다.  산업계까 히틀러를 권좌로 이끌어가지
는 않았지만 그들의 명백한  의지에 반대하여 권좌에 도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를 둘러싼 '호감' 또는 공감을  지적하는 것은, 산업계가 국가 사
회주의와 음모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과는 다른  일이다. 산업계 내부의 상당한 
세력들이 히틀러의 수상직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분명한 관심을  보였다. 그
리고 그를 물질적으로 후원할  마음은 없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선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감정을 어떤  수체적인 경제 정책상의 기대와 
결합시키지 않았으며, 국가  사회당 내부에 있는 사회주의적, 반시민적 분위기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버리지도 않았다. 공감을 느끼는 몇 명의  시업가들은 1932
년 여름에 당내 좌파의  경제적 과격주의에 맞서기 위해서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까지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기업가들은 시민 민주주의와  그 성과 요구,  대중의 권리 
등을 완전히 수긍한 적이  없었다. 공화국은 그들의 국가가 되지 못했다. 히틀러
가 약속한 질서의 회복이란  그들에게는 기업의 자율권, 세금 특혜, 노조 권력의 
종말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산업계의 대표자가 말한 적이 있는 '이 체제에서 구
원'이란 표어는 권위주의적인  질서관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 히얄마르 샤흐트는 하르츠부르크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9년 12월에 마지
막 의회정부가 붕괴되기 전에  어떤 연설가는 도이치 산업연합의 회원 모임에서 
청중의 박수를 받으며  독일에는 "10만 정당간부들이 나라 밖으로 추방되기까지
는 경제계의  평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기록은 이어서  터져나온 "브라
보!"하는 외침에 "무솔리니!"하느  소리도 끼여들었다고 되어 있다.  2년 뒤에 독
일 연합은 브뤼닝  정부의 '공동체 선언'에서 최종적으로  경제, 정치적인 요구들
을 하엿다. 그것은 참된 국민적 독재를 위한 격려를 담은 것이었다. 1931년 10월 
6일자 사설에서 기업가들에 가까운 <DZA>는 '독일 정치와  경제의 표준적인 힘
들'이 브뤼닝에게 등을 돌리려한다고 위협하였다.)
  도이치 사회구조의 어느 분야에도  이 기업가 그룹만큼 질기게 권위주의 국가
의 화석이 남아  있는 분야는 없었다. 그들의 기술적인 현대성은  자본주의 이전
의 사회관과 결합되어 있었다. 공동의 목표를  세웠거나 어두운 음모를 꾸며서가 
아니라, 공화국  '체제'를 극복하련느 반민주적인 풍토라는  점에서 대자본가들이 
국가 사회당의 상승에  일부 책입이 있는 것이다. 물론 대자본의  대표자들은 히
틀러에게 속았다. 그들은 히틀러가  펼쳐 보이는 질서의 태도, 완강한 권위 숭배
만을 보았으며, 과거 지향적인  면모들만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역시 지니고 있
던 미래지향적 측면을 보지 못하였다.  

    뒤셀드르프 산업가 클럽 연설
  히틀러는 뒤셀도르크  산업가 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비상한 공감 능력으로 
기업가들의 권위주의적이고,  권력과 질설르  중시하는 국가관을 파악해서  자기 
편으로 이끌어들였다.  이 연설은 그의  연설 기술을 가장  인상적으로 증언하는 
연설의 하나이다. 검은색 더블  양복을 입고, 세련되고 정확한 동작으로 그는 처
음에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대기업가들을 앞에 두고 자기 정책의 이념적 기
본을 설명하였다. 두 시간  반 동인 계속된 이 연설은 주장, 말투,  강조점 등 모
든 점에서 조심스럽게 청중의 특성에 맞춘 것이었다. 
  처음에 히틀러는 국내 정치 우선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독일의 운명은 
주로 외교관계에 달려 있다는 부뤼닝 수상의  노선에 명백하게 반대하였다. 외교
정책이란 오히려 민족의 "내적인 체질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
의 것은 모두 체념일 뿐이며, 국가적인 자포자기  혹은 통치 잘못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국가의 내적인 체질은 민주주의의  평준화 작용을 
통해서 파묻혀버렸다는 것이다. "한 국민의  소수에만 나타나는 유능한 두뇌들이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로 취급된다면,  천재의 능력과 개성 가치에도 
다수결의 원칙에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국민의  지배라고 잘못 말하는 다수
결의 원칙이죠. 이것은  국민의 지배가 아니라 사실상으로 어리석음의 지배이며, 
평범, 무능, 허약함, 불충분함의 지배입니다. 한 민족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 그것을  위해 태어난 개인들의 지배를 받고 인도를  받는 것이야
말로 국민의 지배입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각각의 영역에 대해서  잘 모르는 
다수의 지배를 받지 않고 말입니다. "
  민주적 평등원칙이란 사소한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중요한  이념이다. 그것
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힘을 뻗쳐서 천천히 민족을 오염시키
게 될 것이다. 그는 이 기업가들을 향해서, 사유 재산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 원
칙과는 합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민주주의의 논리적, 도덕적 합리화
는, 인간과 그의  업적이 서로 무관한 것이라는 확신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공격의 핵심부분에 도달하였다. 

  경제 영역에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고 정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
하는 것은 미친 소리입니다! 경제적인 삶은 업적,  개성의 가치라는 생각, 그러니
까 실질적으로 개성의 권위에 자리잡고, 정치적으로  개성의 귄위를 부정하고 다
수의 법칙,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경제적인 생각과 정치적인 생
각 사이에 천천히 틈새가 벌어지게 되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경제적인 영역도 
정치적인 영역과 똑같이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치적인 민주주
의와 비슷한 것이  경제 영역에서는 공산주의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두 가지 
기본원칙이 모든 영역에서 서로 싸움을 벌이는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가에는 어떻게 해도  민주화될 수 없는 하나의 조직체, 그러니까  군대가 있
습니다. 민주화되면 군대 자체가  해체될 것입니다... 군대란 아래를 향해서는 절
대적인 권위, 위를  향햐서는 절대적인 책임이라는, 절대적으로 반민주적인 기본
원칙이 유지되어야만 존속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생활이 완전히 - 읍  면 단위
에서 시작해서 의회에 이르기까지 - 민주주의 사고방식에 기초한 국가에서 군대
는 서서히 이질적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구조적 대립을 수많은 다른  예들에 적용하여 보여주고, 민주
적이고 따라서 공산주의적인 생각이 독일에서 두려울 정도로 퍼져나간다고 묘사
하였다. 그는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를 상세히 서술하였다.  그것은 '독일의 몇몇 
거리에서만 미쳐 날뛰는 무리'가 아니라, '아시아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고... 
전세계를 서서히 뒤흔들어  쓰러뜨리려고 하는 세계관'이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
서 이렇게 말하였다. 

  볼셰비즘은 중단되지 않으면 그  옛날의 기독교처럼 전세계를 완전히 변화 시
킬 것입니다... 세계관의 문제이니만큼 30년이나 50년이란 별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이후 3백 년  만에 기독교는 남유럽 전체를 천천히 장악하기 시작하였
습니다. 

  독일에서 공산주의는 특별히 정신적  혼란과 내적인 붕괴로 인해서 다른 어느 
나라보나 널리 퍼져 있다고 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공산주의에서 "자신들의 실
질적인 경제 상황을 세계관으로 보충하는 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
재의 어려움의 원인을 외부의 상황에서 찾고 외적인 수단으로 그것과 싸우려 하
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조치들이나 '스무 번의 비상사태 선포'
를 해도 민족의 파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추락의  원인은 정치적 특
성을 가진 것이므로,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것도 '근본적인  해결책'
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해결책)은 경제가  붕괴하는 것은 국가가  붕괴하기 때문이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 합니다. 번성하는 강력한  국가하는 보호세력 없이 번성하
는 경제는 없으며, 카르타고의 군함이 없이는  카르타고의 경제도 없었다는 사실
을 인식해야 합니다. 

  국가의 권력과 안녕은 내적인  조직, '어떤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공통의 세
계관의 확립' 결과라고 했다.  독일은 오늘날 거대한 내적 분열의 상태에 직면해 
있다. 국민의 절반을  넓은 의미에서 볼셰비스트고, 나머지 절반은 민족주의적이
다. 한편은 사유  재산을 옹호하고 다른 편은 그것을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생각
하고 있으며, 한쪽에서는  국가반역을 범죄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의무라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분열을 통제하고, 독일의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은 
이 운동과 세계관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분은 여기서  가장 탁월한 민족국가주의 감정에  넘치고,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서 지도자의 절대적 권위라는  생각에 기초하여 하나의 조직체를 보고 계
십니다. 국제주의적인 사상뿐 아니라 민주적 사상을 극복하고, 명령과 복종을 알
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처음으로 독일  정계에서 업적의 언칙에  따라 만들어진 
수백만의 조직을 만들어낸 유일한  정당입니다. 추종자들이 거침없는 전투의지로 
무장한 조직, 정치적인  적들이 '너희들의 등장은 우리에  대한 도전'이라고 선언
하면 물러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조직체입니다. 물러서지 않고 잔인
하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고,  적을 향해 이렇게 맞받아 소리치죠. 우리는 오
늘 싸운다! 우리는 내일도 싸운다!  너희가 오늘 우리의 모임을 보고 도전이라고 
여겨도 우리는 다음 주에 다시 또 다른 모임을 열 것이다... 우리더러 '거리로 나
가면 안 된다'고 하면  우리는 그래도 거리고 나갈 것이다! 우리더러  '그럼 우리
가 너희를 때리겠다!'고 하면 너희가 우리에게서 아무리 많은 희생자를 만드어내
고, 이 젊은  독일에서 마지막 뿌리까지 뽑아버리기로 확고하게 결심했으니까요. 
우리는 싸움을  좋아해서 이 결심을 한  것이 아닙니다. 독일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 다니는 것보다는 더 멋진 삶이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도이치 운명의 전환점 앞에 서 있습니다. 현재의 바전
이 계속된다면 독일은  어느 날인가 어쩔 수  없이 볼셰비즘의 혼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발전을 중단시키려면 우리 민족은 강철 같은  기율의 학교
에 들어가야  합니다... 정당들, 단체들, 통합  체제들, 세계관, 계급의 망상,  계급 
투쟁 따위의 이 모든 덩어리가 뭉쳐서 강철같이 단단한 민족 공동체가 만들어져 
나오는 일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독일은 이런 내부 결합에 실패하면서 결국 멸망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이런 말을 하지요. '당신은 민족주의 독일의 북 치는 사람일 뿐
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북  치는 사람일 뿐이라면 또 어때요?! 도이
치 민족 안으로 하나의 새로운  신념을 북을 쳐서 알린다면 그것은 현재의 신념
을 천천히 낭비해버리는 것보다 비랗  바 없이 위대한 정치적 행위가 될 것입니
다. (박수 갈채)...  신사 여러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거
리를 통해서 행진해가면, 그리고 갑자기 저녁때  소란이 일어나면 시민들은 커튼
을 걷어올리고 밖을 내다보며  말하지요. '또 밤잠을 설치게 생겼군... '하고 말입
니다. 그러나 그것이 희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국가사회주의에 소속된 수십
만 명 돌격대와 친위대  대원들이 트럭에 올라타고, 집회를 보호하고, 행진을 해
나가야 한다면, 밤마다 희생하고 아침 여명에 일터와 공장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실업자라서 실업 수당을  타러 간다면 말입니다... 국민 전체가  똑같은 이상주의
를 가지게 된다면, 독일은 세계의 눈앞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박수 갈채)

  수많은 박수 갈채가  터져나와서 '개성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적인 권
력국가과 기업가의 특권에 대한  히틀러의 변호를 일단 중단시키곤 했음에도 불
구하고 행사의  마지막에 프린츠 티센이 선창한  "하일, 히틀러 씨!"라는 외침을 
따라 한 사람은 참석자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연설의 물질적인 
수확은 오래 계속된 고립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었다.  히틀러가 아니라 이제 국
가가 점차 고립에  빠져들어 갔다. 사바에서 적대자들이  무너져내리는 공화국을 
둘러싸 포위해 버렸다.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연합 정부가  통치하던 프로이센 
지역에서, 국민 투표를  통해서 주의회를 해산시키려는 시도에는 철모단, 국가민
족당, 도이치 국가 민족당 등과 공산당까지 힘을 합쳤다. 그 모두를 합쳐봐야 유
귄자의 37퍼센트의 표를 얻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적대자들이 만들어낸 이런 
광범위한 전선은 지속적인 효과를 만들어내었다.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자들와 국가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 그 둘
이 합쳐서 경찰과 벌이는 싸움, 거리의 무질서, 주말의 유혈사태 등은 국가의 권
위가 망가졌다는  징후들이었다. 유대인의  설날에 그라프 헬도르프가  지휘하는 
베를린 돌격대는 심한 소동을 일으켰고, 대학에서는  인기 없는 교수들에게 항거
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당원들에 대한 재판에서  유래 없는 풍경들이 벌어졌다. 
시민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머리가 떨어져 구를  것이라는 히틀러의 
말은 여전히 국민의 귓속에 울리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유권자들의 공감과 의석
을 얻기 위하여  경쟁을 벌이는 정당들 사이의  유혈사태 이상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퍼져나갔다. 
  히틀러는 얼마 전에 이렇게 말했다. "시민  정당들 사이에는 파괴가 아니라 오
직 선거의 승리가 목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승리
하면 우리가 파괴되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우리도 다른  것은 기대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승리하면 공산주의는 파괴될 것이다. 그것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다. 우리도 관용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최후의 신문이 파괴되고, 최
후의 조직이 없어지고, 최후의 교육 장소가 제거되고, 최후의 공산주의자가 전향
하거나 제거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중도란 없다."
  거리에서 시작된 일은  내전의 전초전이었다. 그것은 1919년에  중단된 혁명의 
결정전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1933년 초에  '영웅 양조장'에서, 그리고 돌격대의 
강제 수용소에서 끝나게 될 일종의 전초전이었다. 

    복스하임 문서 사건
  이렇게 초긴장 상태의 분위기에서 히틀러를 극단으로 몰아가려는 생각이 적들
을 지배하였다. 1931년 말  국가사회당 의석의 38.5퍼센트를 얻어서 가장 강력한 
당으로 부상했던 헤센 주의  선거가 끝난지 열흘만에 어떤 국가사회당 변절자가 
프랑크푸르트 경찰 국장에게 공산당의  폭동 시도가 있을 경우 헤센 국가사회주
의자들의 행동방침을 적은 문서를 넘겼다. 이것은  히틀러 추종자들의 국가 반역
적인 집회가 열렸던, 보름스 근교에 위치한  영지의 이름을 따서 '복스하임 문서'
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돌격대와  유사 조직을 통해서 권력을  접수하고, '주민의 철저한 기
율'을 위해서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표현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모든 저
항 행위 혹은  불복종 행위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사형을 확정하고,  특수한 조
건 아래서는 '재판  없이 즉결 처형'을 실시하도록  되어있었다. 사유재산과 이자 
의무는 즉각 보류되고, 주민은  공개 석상에서 식사를 하고, 노동 의무를 이행해
야 한다. 유대인은  물론 의무나 식사에서 제외되었다. (배석판사인 베르너  베스
트 박사는 헤센의 주헌법재판소의  관구 사법부 대표로 선출되엇고 뒤에 제 3제
국 시절 덴마크 점령지구의 총독으로 승진하였다.)
  이 문서의 발각에 대한 히틀러의 반응은 그가 점점 더 의식적으로 적대자들의 
근심과 여론의  두려움을 전략적으로  유리함으로 바꾸었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그는 반 년 전 합법화  노선 위반이 있었을 때와는 달리 이 문서를 작성한 사람
에 대한 일체의  조치를 피하고 단순히 그에 대한 책임만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세부사항에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고  무엇보다도 절반쯤 사회주의 요소들 중 새
로운 노선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신이 항상 원하
던 권력 장악의 이상적인 상황을 표현하고 있었다. 
  공산당이 궐기 시도에 대한 그의 생각도 이  계획안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공
산당의 시도에  위협을 받은 국가  군력은 도와달라고 요청할  것이고, 돌격대는 
공권력과 더불어 계획을 실천할 것이다. 그러므로  합법성의 이름과 겉모습을 갖
추고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을 히틀러가  이미 
1923년 11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에 카르에게서 받아내려고 했으나 소용
이 없었던 바로 그 외침이었다. 
  그는 다른 수많은  정치가들처럼 단순히 권력을 얻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언
제나 공산당의 치명적인 포위에  맞서서 구원하는 군대를 이끌고 구원자로 나타
나서 지배권을 장악하고  싶어하였다. 이러한 결말부분은 그의  극적이고도 종말
론적인 성햐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성향은 언제나  지구를 둘러싸고 
어둠의 세력과 한판  붙는다는 생각과 맞물린 것이었으며,  바그너의 모티브들이
었다. 즉 백마의 기사 로엔그린, 성배와 위협을 받은 금발 여인의 모습이 막연히 
투영되어 있었다.  나중에 이러한 상황 설정이  나타나지 않고, 공산당의 쿠데타 
기도가 괴벨스의 표현처럼 '불붙지'않게 되자 그는 그런 일을 거의 꾸며내기까지 
하였다. 

    "가련한 체제여!"
  복스하임 문서가 발견되었어도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나
타나는 성급한 충성의  붕괴에 대해 한줄기 빛을 던져주었을 뿐이다.  이제는 관
료 계층도, 사법 기관도 국가 반역 사건을 공개적으로 추적할 수도 없었으며, 정
계도 어깨를 으쓱하며  체념한 태도로 이 사건을 처리했다. 그릭  최후의 순간에 
그것을 결정적인 행동의 계기로 삼을 기회마저  없애버렸다. 너무나 분명한 증거
자료를 놓고 히틀러를 체포해서  재판하지 못하고 그들은 오히려 협상하려 들었
다. 그것도 그의 위협에 불안을 느껴서 엉뚱한 방향으로 노력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슐라이허, 힌덴부르크 대통령,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 기
업가들, 유력 인사들에 의해서 대화 상대자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다
시 '대통령 각하'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경찰의  혹은 사법기관의 조
치가 국가 사회주의 운동을 이 시점에서 진지하게  위협할 수 있는지, 아니면 오
히려 생각지도 않은 심리적  효과만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게 되어 
버렸다. 
  어쨌든 프로이센의 내무장관  세베링은 1931년 12월에, 히틀러를  황제궁 호텔
의 기자회견장에서 기습 체포하여  프로이센에서 추방한다는 계획을 포기하였다. 
글고 폰 슐라이허는 그 무렵 어떤 기자회견 도중에 국가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적
절한 조치에 대한 요청이 나왔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럴 만한 힘이 
없어요.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만 제거될 것입니다!"
  히틀러 정당이 소시민  쓰레기이고, 선동적인 허풍꾼이라는 생각이  변하기 시
작하였다. 개별적으로, 그러나 분명한 형태로  마비의 느낌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자연력에 대한  무력감과 어느 정도 닮은  모습이었다. "이것은 '청년  운동'이다. 
이것은 멈출 수 없다."고 영국의 어떤 무관이 독일 장교들의 생각을 요약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지켜보게 될  국가사회당 부상의 역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쇠
약과 소멸의 역사라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저항할 힘이  없었을 뿐 아니
라 히틀러가 연설에서 제시해 보인 것 같은  미래의 비전도 없었다. 공화국이 계
속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가련한 체제여!"라고 괴벨스는 일기장에 냉소적으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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