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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Rebellion

싸움을 위해 일어서다

by FraisGout 2020. 8. 15.

  히틀러가 마주선 상황은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란츠베르크에
서 돌아온 다음 그를 둘러쌌고, 그의 도전들과  모욕과 분리책략 등에 대해서 구
원자이며 중재자라는 더 높은  권리를 부여하였던 메시아적인 후광은 일년이 지
나자 사라져버렸다. 당은 그  정도의 부담을 한 번 더 견디어낼  처지에 있지 않
았다. 정치적 전망을  지켜내려면 그는 반대자들을 파괴해서  자기들에게 끌어드
려야 했다. 북 도이치 사람들의 사회주의 성향과  파국 전략을 물리치고 당의 통
일성을 회복하여야  했으며, 에서, 아만 등  뭔헨 친구들과 화해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히틀러의  전략적 능숙함, 지금에 와서는  해독하기 힘든 인간ㅇ르 다루는 
기술, 그의 마법 등이 이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싸움을 위한  지렛대로 그는 영주 가문에  대한 재산몰수 문제를 이용하였
다. 사회주의  정당들에 의해서 제안된  국민투표는 모든 전선과  정치적 결속을 
막론하고 무처별적인 대립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현재의 파당을 무
너뜨리기에 특별히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하노버에서도 이  문제는 정열적으로 
토론되었고, 합의는 오직 타협적인 형식으로만 나왔다. 
  노동자 계층뿐 아니라  중산층, 소규모 저축자들과 재산가들 등 원래의  당 지
지계층은 , 영주  가문이 스스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각기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이전의 영주들이 맞서기  위해서 공산주의자
들과 동맹을 맺고, 재산을 몰수해서 혁명의  부당서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다는 생
각도 이들의 민족주의저  감성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싸
움질이 계속되었다.

    슈트라서를 굴복시키다
  이틀러느  ㄴ재빨리 결심해서  이러한  상황의 전략적인  이점을  이용하였다. 
1926년 2월 14일자로  그는 밤베르크에 전국적인 당 지도자  대회를 소집하였다. 
이 도시를  선택한 것부터아 이미  세심한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밤베르크는 
그에제 무조건 충성하는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의 아성이었다.
  몇 주 전 크리스마스 축제 때도 히틀러는  이곳 지구당에 나타났다. 그 빡에도 
그는 대개는 별스럽지 않은  지역조직을 가진 북 도이치 관구지도자들이 도착할 
때에 깃발장식과  눈에 띄는 플래카드,  밀집된 대형행사의 안내문  등을 통해서 
강력한 인상을 받도록,  그리고 가능하다면 용기를 조금  잃어버리도록 배려하였
다. 나아가서 그는 임시소집자와 참석자의 명단  조작을 통해서 자신의 지지자들
이 뚜렷한 다수가 되도록 만들었다.(노동 공동체의 모든 관구 지도자들이 초청되
지는 않았다. 루르  관구 지도자 칼 카우프만은 1926년 2월  12일자 편지에서 이 
점을 항의하고 있다.  다른 한편 당 지도부는 남부 독일의  충성스러운 당원들을 
초청하였다.)
  거의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된 연설로 그는 온종일 걸리는  일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영주재산  몰수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가르켜  유대인 은행주와 증권사주의 
재산을 보호하려 했다느  ㄴ이유로 성실하지 못 하다고 말했다. 그는  옛날의 영
주들이 권도 없는  것을 얻어서는 안된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것
을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당은 사유재산과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서 남 도이치  지지자들의 커가는 박수갈채  속에서 조목별로 
들어갔다.
  그러자 묵 도이치 사람들도 한 사람씩  망설이면서 이쪽으로 합류하였다. 슈트
라서 일파의 정택을 검토하고,  거기에 맞서 1920년의 당 정책을 내세웠다. 이것
은 "우리 종교와 세계관의 근본 취지입니다.  그것을 흔드는 것은 우리의 이념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배신 행위가 될 것입니다."
  괴벨스의 일기는 반대자들  사이에서 내심은 혼란이 커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얻어맞은 것 같다. 히틀러란  어떤 사람인가? 반동분자인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서투르고 불안하다.  러시아 문제는 완전히 옆으로 치워졌다. 이탈리아와 
영국은 자연의 동지들이란다, 끔찍하군!  우리의 과제는 볼셰비즘을 파괴하는 것
이란다. 볼셰비즘은 유대의  권력이라고! 우리가 러시아를 상속해야 한다고!  1억 
8천만명을!!! 재산문제에  대한 영주들과 정부의  계약이라고... ! 끔찍한  일이다! 
정책은 충분하단다. 그것으로 족하다. 페더는 고개를 끄덕인다. 라이도 끄덕인다. 
슈트라이허도 끄덕인다. 에서도 끄덕인다. 당신을 모임에서 만나니 내 영혼이 괴
롭구나!!! 짧막한 토론.  슈트라이서가 연설하고 있다. 말이 막히고, 더듬고,  떨면
서, 미숙한 돼지들 보다 별로 나을 게 없구나...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마
치 머리에 한방 맞은 것 같다."
  히틀러는 상대방이 의견을 철회하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슈트라서는 반볼셰비
즘은 본능에 어긋난다고  말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혼란정책을  위한 모범이라고 
불렀다, 반볼셰비즘은 민족주의  세력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착취자  이익에 봉
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패배는 완벽한 것이었다. 오토 슈트라서
는 뒷날 자기들의 굴복을 변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히틀러가 간교하게
도 평일에  이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래서  당직 이외의 직업을 가진  북 도이치 
관구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괴벨스만 
밤베르크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월 14일은 일요일이었다. 슈트라서 일파는  이름 있느 ㄴ거의 모든 대
표자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에서 온 힌리히로제, 폼베
이른 지방에서  온 테오도어 팔렌, 하노버의  루스트, 함부르크의 클란트 등이었
다. 그러나 좌파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옹호하기  위해서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자기들  중의 연설가인 요제프 괴벨스만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괴
벨스처럼 머리에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괴벨스가 히틀러의  최면술적인 힘에 
의해서, 그의 화려한 등장과, 자동차 행렬,  뮌헨 사람들의 기구와 물질적 경비에 
의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압도되고 있었다면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적어도 그 순
간에는 히틀러의 능숙함과 유혹의 힘에 패배하였다.
  '배신자 콘체른' 에 대한 공격이 절정에 달했을 때 히틀러는 갑자기 보란 듯이 
그에게 오더니 팔로  그의 어깨를 감쌌다. 이러한 행동이 슈트라서  자신을 되돌
려놓지는 못했지만, 거기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어떤 효과를 냈고, 슈트라로서로 
하여금 화해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강요하였다. 북부와 서부도이치  관구 지도자
들의 노동자 계층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들의 정책입안은  제대로 토론도 
되지 못했다. 영주들의 재산몰수는 거부되었다. 3주 뒤인 5월 5일에 그레고어 슈
트라는 등사된 서한을  동지들에게 보내서 정책입안서를 돌려보내달라고 긴급히 
요청하였다. "아주 특별한  이유에서"라고 그는 썼다. 자신은 "히틀러  씨를 위해
서 이 문서를 완전히  회수할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슈트라서는 
괴벨스ㄹ 배신에 화가나서 밤메르크 실패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괴벨스
가 히틀러와 뮌헨의 공격을 말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실상 그가 북부 독일에
서 떨어져 나오는 표지였다. 그러나 괴벨스는  밤베르크에서 아직 제대로 완성되
지 못했고, 그가  논쟁중에 일어서서 자신의 오류를 고백하고 자신이  히틀러 진
영으로 넘어갔다고 고백하였다는,  슈트라서가 퍼뜨린 소문은 확실한  것이 못된
다, 그것은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분명한 실패에 대해서 한 사람의  책임자를 찾
아내려는 시도였을  뿐이다, 칼 카우프만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괴벨스 자신은 
밤베르크 이후에도 히틀러가 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주장  했다고 한다. 역시 카
우프만에 따르면 그들은  밤베르크의 실패를 괴벨스 탓으로  돌리기는 하였지만, 
한참 동안으니 그르 ㄹ동지라고  여겼지 절대로 배신자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한
다.) 
  히틀러의 정력적인  반대는 슈트라서 일파의 좌파  강령보다는 오히려 좌파적 
생각을 향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념의 전조를 이념 
자체보다 더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으며, 언제라도  임의로 사회주의 관념들을 받
아들이거나 아니면  장식적으로 이용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괴벨스가  밤베르크 
당대회 전에 '히틀러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기'를 소망했던 것은 이우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당 운동에 대해서  무의미하고 치명적인 위험이라고 생
각한 것은, 토론하고 , 문제를 일으키는,  지적인 변명의 필요성과 의심의 영향을 
받는 국가사회주의자였다.
  그런 유형의 인물들이 슈트라이서 형제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히틀러는 슈
트라서 자신을 통해서 저 분파를 형성하는  유형이 돌아올까 두려워하였다. 그러
한 유형의 파괴적인 힘이 전에도 민족주의  운동을 파멸시켰다. 히틀러는 극단화
시키는 성향에 따라서 곧 모든 이념논쟁을  분파주의와 동일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는 추종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갈 등을  좋아하였고, 때로는 촉진시키기도 하였
지만 정책을 놓고  의견차이를 가지는 것만은 싫어하였다. 그런 일은  그의 생각
으로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외부로 향한 타격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
의 성공비밀 중  하나는 그 교리를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히틀러의 '카톨릭'  기질은 견고하고 변화되지 않는  형식을 고집하는 그의 
신념에 잘 나타나고 있다. 
  몇 주 뒤에  벌써 그는 어떤 기회를 이용해서  낡은 당 강령이 분명한 약점을 
자기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바로 이러한 낡
고 고색창연한 특성들이야말로 그것을 토론의 대상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질문들에 답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마련해주는 것
이라야 한다.  그가 엄격한 일관성을  가지고 지도자와 이념이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지도자, 변화될 수 없는  강령이라는 원칙과 
잘 들어맞는다. "맹목적  믿음은 산을 움직인다."고 히틀러는  말했다. 그의 심복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강령은 두 마디로 요약된다. 즉 '아돌프 히
틀러'다."(여름 위기 동안 히틀러는 벌써 앞으로 6년  동안 강령을 변화시키지 않
을 것을 요구하였고 자신이 당에 재입당하는 것을 그것과 연계시켰다.)

    이념논쟁의 종결
  밤베르크 당대회와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굴욕은 이미 국가사회주의 좌파의 종
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좌파는  시끄럽고, 특히 오토 슈트라서가 쓴 책에서 온
갖 소동을 일으켰지만 앞으로는 오직 방해하는 이론일 뿐 진지한 정치적 대안이 
되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비정치적인 애국주의 구호로 대체되었다. 정다의 선동
에서 '밀매 자본주의자'의 모습은 점차  물러나고,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나 다른 
정부 대표자 같은 '국가이익을 떨이로 파는  자들'이란 표현이 나타났다. 그와 동
시에 이대회는 국가사회당을  최종적으로  엄격한 지도자당으로  만들었다. 이제
부터는 마지막날까지 어떤이념적인  논점투쟁도 없게 되었다. 오직  자리와 총애
를 얻기 위한 싸움만 남게 된다. "우리 운동의 동화력은  무서울 정도다,"라고 히
틀러는만족스럽게 확인하였다.  동시에 국가사회주의는 자체적인  사회적 구상으
로 공화국 질서에 도전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국가사외주의는 공화국에 맞서 이념이 아니라 투입  준비가 된, 잘 훈련된, '지
도자'의 카리스마를 가진 전투력을 내세웠다.  히틀러의 설명대로 '우리의 높으신 
분들게 그 많은 공포심을 유발한' '일방성이라는 원시적 힘' 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이미지였지만 "독은  대립하는 독으로만 깨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남자의 주먹"을 내세웠다. "더  강한 두 개골, 가장  강력한 
결단력, 더 강력한 이상주의가 사태를  결정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자리에
서 그는 이렇게 학인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싸움은 '정신적'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광신주의로 싸우는 것이다."
  국가사회당을 다른 모든 정당과 정치적 투쟁운동과  구분하고, 또한 유연한 공
산당 간부들에 비해서도 분명한 우세를 확보해준 것은 이 정당의 가차없는 도구
적 성격이었다. 공산당 간부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일탈, 회의, 지적 거부의 요소
들이 나타나곤 하였다.  그러나 국가사회당에서는 반대파의 저항  없는 자진해체
와 더불어  광범위한 종속의지가 일깨워진  것 처럼 보인다.  슈트라서의 수많은 
추종자들은 이제 '정당운동을  지도자의 손에 쓰기 좋고,  흠없는 도구로' 만드는 
일을 명예로 삼게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최고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이제부터 날카로운 승마용 채찍으
로 절대적 명령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결정권조차
도 갖지 못했다. '좋은  국가사회주의자의 원형'은 '지도자를 위해서 언제하도 맞
아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전당대회는 히틀러를 제1의장으로 뽑자는 
확고한 제안을 형식적인  익살극처럼 명랑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실체로 괴링이 
나중에 말한 것처럼 '지도자'의 압도적인 권위  옆에서는 누구도 감히 '그가 올라
설 돌 이상' 이 되지 못했다. 
  히틀러 스스로 자신의 절대적 지휘권을 역사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1926년 당
대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개인숭배를 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상 모든 위대한 시대에 언제나 단 한 
사람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법이죠. 어떤 운동이  아니라 오직 사람들만이 역
사에서 거론되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보통 과도한 승리를  좋아하는 성격과는 달리 밤베르크ㄹ 성공을 유
화적인 태도와 결합시켰다. 그러고어 슈트라서가 자동차 사고를 당하자 그는 '엄
청난 꽃다발을  들고서' 환자를 찾아가서 환자의  편지에 따르면 '매우  친절' 한 
태도를 보였다. 슈트라서  일파의 대변인 중 한 사람으로서 뮌헨  당 지도부에서 
가장 나쁜 평판을 가졌던 괴벨스도 히틀러의 직접적인 구애를 받았다. 
  집회가 끝났을 때 히틀러는 압도된 태도로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포옹하
였다. "그는 부끄러울 정도로  우리에게 친절하다."고 괴벨스는 감동해서 적었다. 
동시에 히틀러는 새로 얻은 권위를 확고하게 제도로 굳혀나가기 시작하였다. 
  
    권력확보와 승리축하
  1926년 5월 22일 뮌헨에서 열린 전당대회는 국가사회당에 아주 노골적으로 히
틀러 개인을 위해 마련된 새로운 회직을 선보였다.  그에 따르면 당의 주인은 뮌
헨에 있는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연합이었다. 그 지도부는  동시에 전국지
도부가 된다. 최초의 의장은 연합법에 맞게 선출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지지기반인  뮌헨 지구당의 수천 명  당원이 당 전체를 위한 
선거 심의기구를 도맡아버렸다. 그로써 당은 와전히 금치산이 되고 말았다. 뮌헨 
지구당원들은 다시 극히  까다롭게 조정된 방식으로만 제1의장에게 설명을 요구
할 권한을 가지므로  의장의 당 지배권은 무제한이고 통제받지 않게  되었다. 다
수결정이라도 그에 대해서는  구속력이 없었다. 권력없는 파벌이  생기는 것마저 
원천보쇄하기 위해서 관구  지도자들도 지구당 대회에서 선출되지 않고 제1의장
이 임명하기로 하였다. 위원회 의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권력안전 체계를 한 번  더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조사 및 조정위원회
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일종의 당 재판소로서 개인이나 혹은 지구당  천제를 국
가사회당에서 제명할  권한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 최초의  의당은 퇴직 
육군준장인 하이네만 이었다. 그는 위원회를 당  내부의 부정과 부도덕에 해항한 
투쟁기구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부리기  좋은 발터 부흐 소령으
로 위원장을  바꾸었다. 위원으로는 열성이  있는 울리히 그라프와  젊은 변호사 
한스 프랑크를 임명하였다.
  6주 뒤인 7월 초에 히틀러는 바이마르에서 당대회를 열어서 자신의 승리를 축
하하였다. 이 당대회는 새로운  시대의 발전과 성향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모
든 비판적인, 아니면 히틀러가 경멸적으로 말한 '정신력 풍부한 움직임, 모든 '익
지 않고 불확실한 이념들'은 억압되었고, 처음으로 뒷날의 당대회 운영방식이 드
러났다. '제1의장의 서명을  받은' 신청서들만 허용되었다. 당 정책상의 견해차이
를 드러내고 '말다툼'을  벌이는 정당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잘 용접된  지도부'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개별적인 특별대회 의장들은  히틀러가 '원칙적 노선' 안에  정해놓은 대로 '지
도자 라고 느끼되  표결결과의 집행기관으로 자처하지' 않아야 했다. 원칙적으로 
표결 자체가 금지되고 '끝없는 토론들을  중단해야'했다. 토론해봐야 정치적 문제
들을 '연합대회가 열리는  장소에서 해결할 수도 있으리라'는 오류만을 부채질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상의 연설시간이  엄격하게 제안되었다. '전체 프로그램
이 한 사람으로 해서 망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가 바이마르 국립극장  집회가 끝난 다음에 가죽혁대와  각반바지, 방풍 
재킷을 입은 모습으로 무개차에서  5천 명의 지지자들의 사열식을 검사할 때 처
음으로 이탈리아 파시스트  방식으로 팔을 쭉 뻗쳐서  인사를 했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는 있는  일이었다. 제복을 입은 돌격대 종대의 모습을  보고 괴벨스는 
환호하면서 제3제국이 다가오고 독일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았지만, 당시 관찰자
들의 판단에 따르면  모든 임의성을 억압한 것이  당에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을 
부여하였다. 이념의 빈곤과  의견이 없는 것을 휘황찬란한  의식으로 덮어버리는 
기술은 이때만 해도 뒷날처럼 아직 그토록 절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귀빈들 중에는 재향군인회  철모단 지휘자 테오도어 뒤스터베르크와,  곧 이어
서 돌격대로 자리를  옮기는 황제의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도 끼여 있었
다. 그리고 몇  개의 민족주의 단체들도 당의 통일성과 힘에  압도되어서 자기들
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국가 사회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레고어 슈트
라서의 입에서 나온 '죽은 국가사회주의'라는 공식이 바이마르의 인상이었다.

    돌격대의 역할문제
  돌격대는 아직도 불안과  반동적인 에너지의 마지막 요소로  남았다. 거기서는 
슈트라서 일파의 과격한 구호들이 특별히 오래  메아리를 울리고 있었다. 히틀러
는 륌을 퇴직시키고 난 다음  일년 이상을 기다렸다가 1926년 가을에 퇴직 소령
인 프란츠 페퍼  폰 살로몬을 새로운 돌격대의 최고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여러 의영군과  암살활동에 연루되었고,  나중에는 베스트팔랜 대관구  지도자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를 임명하면서 히틀러는 전톨적인  돌격대의 역할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즉 보조적인  군대조직도, 비밀조직이나 지역구의  싸움부대도 아니고, 중앙당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선전 및 대중테러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조직원칙을 발전시
키려고 하였다. 즉  보조적인 군대조직도, 비밀조직이나 지역구의 싸움부대도 아
니고, 중앙당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선전 및  대중테러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조
직원칙을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광신적이고 순수한 전투력
으로 돌격대를 당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그는 바이마르 국립극장에서 '충성서약'
과 신비스런 의식과 함께  새로운 단위부대들에게 자기가 손수 도안한 연대기들
을 넘겨주었다.
  그는 폰 페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 돌격대의 교육은 군사적 관
점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당 목적에  맞도록 이루어져야 합니다." 옛날 군대
식 조직이 강력하기는 하였지만 이념이 없었고  그래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비밀
조직과 암살 서클은, 적이 이름 없는 형태로  머리와 영혼에 작용하고 있으며 적
의 대변인들을 개별적으로 제거해서 적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쟁은 "작은 복수나  모반 행위의 분위기를 벗어나서 공
산주의와 그 조직체, 그리고 조종자들을 향한  세계관적인 파괴전쟁이 되어야 합
니다... 비밀집회의 형태가 아니라  강력한 대중행진의 형태로 일해야 하며, 단도
와 독, 피스톨이 아니라 거리를 점령함으로써 운동을  위한 길을 활짝 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른바 '돌격대 명령과 원칙적 지침'에서 폰 페러는 돌격대의 
특성과 활동 가능성을 구분하고 엄격한 훈련기술의  대중심리 효과 행진동작, 팔 
등어올리기, 혹은 '하일' 외침 등을 정하고, 대규모 장면의 효과를 조심스럽게 계
산하는 연출자처럼 느꼈다. 드물지 않게 그의  고지서는 심리기술적인 교훈의 성
격을 띠곤 했다.
  "돌격대가 대중 앞에 나서는 유일한 형식은  닫힌 장면이다. 그것은 동시에 가
장 강력한 선전형식들  중 하나다. 내면과 외면이 균형잡히고 잘  훈련된 수많은 
남자들을 보는 것은,  그들의 쉬지 않는 전투의지를 분명하게 보거나  짐작할 수 
있을 경우, 모든 도이치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문서와 연설
과 논리가 한 것보다 더 설득력 있고 감동시키는 언어로 가슴에 속삭이게 될 것
이다. 조용한 침착함과 자명성은  힘의 인상을 강조한다. 행진하는 부대의 힘 말
이다."
  그러나 돌격대를 무기 엇는  선전부대로 바꾸고 흥행적 매력을 부여하려는 시
도는 군대의  특수의식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모든 
대응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의 양순한 도구로 만들
려는 노력은  오직 제한적으로만 성공하였다.  그 이유는 이  직업군인들의 이념 
없는 시골식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고, 군대기구가 정치기구에  대해서 언제나 
특수한 지위를 차지해온 나라의 전통 때문이기도 했다.
  페퍼의 재교육 구호는 '투쟁운동'으로서의 돌격대가,  말하는 부분에 불과한 정
치기구(PO)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느낌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
다. 돌격대는 정치기구 'PO'를  'P-제로'라고 부르곤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돌
격대는 자신들을 '우리 기구의 왕관'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들은 우리의 돌격대를 
흉내내지 못한다."고 이른바 의회정당에 대한 경멸적인 생각을 품고서  으스댔다. 
물론 의회 정당은 이것을 지속적인 곤란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사회
당의 당 군대 조직에서 갱겨난 곤란한 점들로,  열등감에 가득 찬 세계전쟁의 장
교와 군인들에게 다음 세대나  가능한 굴종적이고 허약한 군주적 인간형의 가다
로운 행동 균형을 요구한다는 딜레마였다.
  머지않아 룀처럼 고집센데다  더욱 독자적이고 냉정하며 전임자처럼 감상적으
로 약해지지도 않는 폰 페퍼와 최초의 갈등이 나타난다. 이 '기력 없는 오스트리
아 사람(히틀러)'이 무섭지 않다고 프로이센  추밀고문관의 아들(폰 페퍼)이 말하
였다.
  베를인 돌격대가  특별히 반항적으로  행동하였다. 이곳의 하부조직들은  그들 
특유의 번죄적 성향과 사기꾼 행동으로 특징 지을 수 있는 정팩을 계속 밀고 나
갔다. 관구 지도아 슐랑게  박사도 거기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정티기구의 베를
린 쪽 지도자들과 돌격대 지휘자들 사이의 싸움은 때로는 따귀를 주고받는 수준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소동은 베를린 국가사회당의  의미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곳 지구당은  당원이 채 1천명도 되지  못하는데다가 이제서야 겨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슈트라서  형제가 이른 여름에 이곳에서  신문업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926년 10월의 상황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달의 당 내부 
사정은 좃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관구에서는  베를린 조직의 완전한 파괴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날카로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지도자를  가져본 적이 
없나는 점이 이 관구의 비극이다."

    괴벨스, 히틀러에게 매료되다
  같은 달 중에 히틀러는 참을 수 없게 된  이 상황을 끝냈다. 그의 전략적인 섬
세함이 이런 행동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혼란을 틈타서 베를린 지역의 정당 
조직을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관할에서 빼내고, 그의  자강 유능한 추종자를 매수
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요제트 괴벨스를 수도의  새고운 관구 지도자로 임
명한 것이다. 7월에 이미 이 야심만만한 반대자는 뮌헨과 베르히테그가덴(히틀러
의 별장)으로 초대 받고 자신의 극좌파적인 신념에 대해서  일지강에다가 간결하
게 '천재'라고 묘사하였다. '신적인 운명의  창조적 도구'라고 하면서 마침내 이렇
게 고백하였다. " 나는 그의 앞에서 떨면서 서 있다. 그는 어린아이 같고, 사랑스
럽고, 선량하고, 자비롭다. 고양이처럼 간교하고 영리하고 능숙하며, 사자처럼 포
효하고 거인답다. 한 인간, 한 남자... 그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다룬다. 선량한 친
구이며 스승!"
  이렇게 과도한 생각은  이 약삭빠른 기회주의자가 슈트라서에게서 떨어져나오
면서 느낀 당혹감을  약간 힘들게 감추고 있다. 같은 자리에  슈트라이서에 대해
서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그는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여전히 마음만은 지니고 
있지만. 나는 때로  그를 매우 사랑한다." 히틀러는 이질감이 재빨리  진행되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는 괴벨스에게  직위를 주면서 특수한  전권을 함께 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고나구 지도가의 위상을 강화할 뿐만 아리나,  슈트라서와 마팔면을 만으러 내도
록 고려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분명하게 돌격대를  괴벨스 휘하에 들어가도록 만
들었다. 돌격대는 관구 지도자들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 보
통이었다.
  슈트라서를 달래기 위해서 혹은  그의 저항 에너지를 마비시키기 위해서 그를 
당의 선전부 책임자로  승진시켰다. 그러면서도 갈 등을 피할 수  없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괴벨스를 슈트라서의 영향권에서  다시 빼냈다. 옛날 친구
들과 동지들은 새로운 관구 지도자가 더러운  배신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모든  국가사회주의 좌익파들은 제각기 배신을 하였다. 배신을  안 할 
경우에는 슈트라서 형제처럼 파면당했다가 나중에 도망치거나 아니면 죽게 되었
다.
  괴벨스가 베를린 관구 지도자가 되면서 북 도이치 지역의 이미 흔들리던 좌익 
세력은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슈트라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헤스와 로젠
베르크 같은 뭔헨 당 간부의  저항을 무릎쓰고 자신의 동지를 임명해줄 것을 요
구하였다. 그러나 괴벨스는 히틀러의 비밀스런 의도를 더 잘 알아맞힌 듯했다.
  어쨌든 그는 곧바로 공산당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어제의 동지들을 향한 공개
적인 전투에 나섰다. 그는 싸움을 만들어내고, 슈트라서 형제에 대항항 경쟁지인 
뻔뻔스런 가두잡지 <공격>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유대인 형톨이며 대자
본가에게 매수되었다는 소문까지  펴뜨렸다. 자기는 나중에 괴벨스를  염두에 두
고 탄식하였다.
  냉정하고 뻔뻔스럽고,  꼬치꼬치 캐어묻는 감상적인  입증의 대가로, 괴벨스는 
정치적인 선동의 새로운 시대를 열였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정치선동의 현대
적 가능성을 잘 인신하였도 끝까지 이용하였다. 이름  없는 베를린 당 조직을 여
론에 올리기  위해서 그는 흉측한 곤봉부대를  모아서 확소하게 실내싸움, 소동, 
총싸움질 등을 일으켰다.  1927년 3월의 경찰보고에 따르면 리히터펠데  동부 정
거장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유혈싸움을 벌인 다음에 '그때까지  거기 있던 모든 것
이 폐허로 변했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베를린에서 국가사회당이 금지령을 받았지만 그런 일은 추종
자들에게 순교자 의식과 작당의 느낌을 만들어주었다.  의미 없는 지역이었던 베
를린 당 조직은  어쨌든 두드러지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른바 '빨갱이 베
를린'의 막강한 건선ㅇ르 상당부분 침입해들어가는 데 성공하였다.

    당 조직 확장
  히틀러는 이러한 당의  외부적인 확장 노력과 동시에  당 내부 조직의 꾸준한 
확장을 위해 정성을  들였다. 그는 유일한 지도자의 카리스마적인 모습  아해 폐
쇄적인 중앙집중 명력 구조를 목표로 삼았다. 서열에 따른 심습, 정장의 모든 고
지무들이 지닌  엄격한 명령 및   지시말투, 그리고 점차 더해가는  형태 단일화 
등으로 당의 준군대적  성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한  지휘형태는 전쟁체험의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괴벨스는 때로 당을 향해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든 당원들에 이르기까지 단추
를 극히 살짝만 눌러도'  복종해야 한다는 과제를 내걸곤 하였다. 당이 직면하고 
있던 제한과 관청의 통제는 이러한 의도들을  오히려 부추겼다. 외부의 적대감에 
대한 의식과, 당기구의 긴장감과,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지휘는 서로 맞물려 결정
적으로 진행되었다. 별  수고도 없이 뮌헨 중앙당은 가장 저급  단계까지 영향력
을 확대하였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 초판에서  고백하였듯이 보잘 것 없는 민
주적 요소를 제거하고 '게르만적 민주주의'를  '무조건적 지도자의 권위의 원칙으
로' 대체하였다. 이제 그는 '오직 싸움의  원천'일 뿐인 '지구당의 너무 많은 당원
집회'들을 경고하였다.
  당 조직 이외에도  잘 훈련되고, 수 많은 담당영역으로 분할된  관료조직이 생
겨났다. 그것은 국가사회당이  쿠데타를 일으킬 정도로 급격하게  상승한 다음에
도 여전히 남아있던 시골 조직의 성격을  마침내 제거하였다. 히틀러가 개인적인 
태도나 업무 스타일에서 무질서한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당원에 대한 3
중 등록체계를 자랑으로 삼았고,  새로운 사무소나 등록 카드, 혹은 분류함을 받
았다고 보고할 때면 몽상적인 어조에 빠져들곤 하였다. 
  예전의 군대상사식 원시 관료체계  대신에 점점 더 새로운 직급과 하부조직을 
가진 광범위한 그물망이  나타났다. 1926년 한 해에만 뮌헨 중앙당의  자리가 세 
배나 늘어났다. 국가 사회당의 당 기구는 곧 사회민주당(SPD)의 전설적인 당 조
직을 능가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원  숫자가 많지 않고, 아주 천천히 늘어나는 것
에 비해서 어울리지  않게 큰 것이었다. 더구나 히틀러는 당을  자그마하고 단단
한, 선전 및 폭력전문가로 이루어진 덩어리로 만들어내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1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조직은 어쩔 수 없이 평화로운 적이  되며, 당은 자발적
으로가 아니라 오직 광신주의적  소수파에 의해서만 행동하게 된다고 거듭 강조
하였다.
  국가 사회당은 1923년에 5만  5천명이었다가 1925년 말에는 겨우 절반 수준이 
남았다. 그러던 것이 일년 뒤에는 당원 수가 거의 10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부
풀어오른 체계는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대중정당으로 
출발하기 위한 광범위한  틀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다른  세력을 후원
하고 분할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세력을 더욱 늘리고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림자 국가를 만들다
  같은 시기에 그림자  국가(Schattenstaat 의원내각제의 '그림자 내각'을 만들면
서 히틀러는 이런 이름을 붙였다)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 일은 정력적으로 추
진되고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나의 투쟁>에서  이미 히틀러는 자신이 계획하는 
국가전복을 위한 전제로서 하나의  운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자체 내
에 이미 미래의 국가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 자신이 국가의 완성
된 몸체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당 내부의 당 내부
의 당직들은 대신할  수 없는 참다운 민족의 이름으로 '바이마르  비국가'(바이마
르 공화국을 낮춰부른 것)의 기구들에 대항하는 경쟁을 선언하고  정당성을 물고
늘어지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림자 국가의 행정기구들은  정부측 행정기구에 맞추어서 생겨났다.  예를 들
면 국가 사회당의 외무부, 법무부, 국방부  등이었다. 다른 부처들은 국가 사회주
의의 우선정책 주제에 맞추어서 만들어졌다. 국민  건강 및 종족부, 선전부, 거주
부, 농업정책부 등이  있었고 부분적으로 대담하게 딜레탕트적인  구상과 입법계
획을 가진 새로운 국가를 준비하였다. 1926년 이후로 국가사회주의 의사연합, 법
수호자 연합, 대학생  연합, 교사 연합, 공무원 연합 등이  당 보조기구들로 생겨
났다. 심지어는 원예와  가금 경제 영역까지도 이런 조직체들 중에  버젓이 자리
를 차지하였다.
  1927년에 여성  돌격대의 결성을 잠깐  고려했다가 취소한 다음  이듬해 '붉은 
갈고리 심자가'(뒷날 나치  여성대)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점점  폭발적으로 늘어
나는 정치화된 여성들을  사로잡고, 동성연애적인 남성 정당  안에서 여성들에세 
실용적인 자선 분야에만  제한된 활동영역을 할당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괴벨스
가 1940년의 비밀  선언서에서 말했던 것과 사정이  꼭 같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도, 그러니까 1933년에 국가  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 조직과 경험과 
정신적, 영적 원칙들을  국가 단위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고,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생각해둔' '국가 속의  국가'라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고 하더라도, 어쨌든 국가 사외당이 권력에 대한  요구를 다른 어떤 정당보다 더 
효과적이고 도전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전국 지도자와 관구 지도자들은  1933년보다 오래 전부터 벌써 장관의 거동을 
보였다. 돌격대는  공식행사에서 일시적으로  경찰 임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드며 
드물지 않게 히틀러는  국제 회의에서 '야국'(야당이 아니라)  지도자로 향세하였
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 이념이 자주 사용된 정당 상징물에도 적용되었다. 즉 
갈고리 십자가는  점점 더 진정한, 명예로운  독일의 기호로 여겨지고,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가  그림자 국가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갈색 셔츠,  휘장, 기호와 
당 기념일 등은 국가와는 대립 할 수 밖에 없는 소속감을 만들어냈다.
  그 시절 국가사회주의가  발전시키고, 뒷날 미로와 같은 권력 체계  안에서 만
족을 얻게 되는 그 모든  관료주의적 열광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휘 방식은 강하
게 주관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주관적 요소들은 언제나 실용적
인 규범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급한 경우에 부닥치면 이런  규범은 임
의에 따르고, 법칙은 기분에 따르게 되었다.
  나아가서 거칠 것 없이 충동에 따르는 '지도자의 뜻'은 가장 높고 논의의 여지 
없는 헌법적 사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는  하부 지휘관들을 임명하고 해고하였
으며, 후보자의 선거인  명부를 결정하였고, 그들의 수입을  조절하고, 그들의 사
적인 사정가지 통제하였다.  지도자 원칙은 원칙적으로 제한이 없었다. 함부르크 
관구 지도자 알버트 크렙스가 1928년  초에 관구 내에서 갈등을 겪은 뒤 퇴직하
겠다고 선언했을 때  히틀러는 이 청원을 거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장황한 형식
의 서류심문을 거쳐서 지도자의 신뢰만이 권력있는 지위를 허용하거나 빼앗는다
는 사실을 당 전체에 보여주었다. 자기만이 업적을 칭찬하거나 잘못을 질책하고, 
조정하고, 감사하고, 용서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퇴직을 선언하였다.
 점점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히틀러라는 인물은  그러한 수단을 통해서 점점 
더 확정적으로 구조를 결정하였다. 당 기구조차도  그의 전기의 특성들을 반영하
였다. 광범위하고  기형적 단계를 가진 직책들에  대한 과도한 관료주의적 정열, 
직함의 숭배, 아무것도 아닌 권한의 숭배 등은  이미 관리 아들의 유산을 보여주
는 부분이다. 주관적 요소가 지배하는 것 역시  히틀러가 법도 없고 사회적 연결
고리도 없는 방위군이  밑바닥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래된 과대망상적 
성향도 끝없이 과장하는 대규모 질서에 드러나 있다.  가장 하잘 것 없는 기구들
에도 화려한 칭호를 제공한 것을 고등 사기꾼의 과욕에 불과하였다.
  그림자 국가라는 생각과 전국적 규모의 당 관료조직 설비는 미래에 대한 참을
성 없는 기대이며, 현실을 앞당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지치지 않는 집회활동은 
계속되었으니 1925년 한 해만 해도  히틀러에게 보고된 바에 따르면 약 2천 4백 
회의 시위를 벌였다. 여론은  거기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기 위한  이 모든 분노한 싸움질과  주먹질, 이 모든 소동은  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공화국은 안정되었던  그 몇 해 동안에  국가사회당은 괴벨스 말마따나 적들의 
미움조차도 받지  못했고 히틀러 자신도  성공을 의심하는 듯했다.  그러면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 숨막히는 전망으로 넘어가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확신을 미
래로 넘겼다. "우리의 이념이 승리를 거두기까지 20년 혹은 1백년이 걸릴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민족, 인류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보면 한 인간이란 무엇이겠습니
까?"라고 물었다.
 다른 기분일  때는 자기가 미래의 대규모  전쟁을 지휘하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한 번은 헤크 카페에서 케이크 접시를  앞에 놓고 슈테네스 대위에게 커다
른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면, 슈테네크, 우리가 승리하게 되면 승리의 가로를 만
들자구. 되버리츠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에 이르는 길에 60미터 넓이로, 오른쪽과 
원쪽에 트로피와 약탈품을 세워둔 승리의 가로 말이야."

    최초의 뉘른베르크 당 대회
  그 사이에 중앙당은 약 30개의 지구당(전체 수  대략 2백 개 중에서)이 1927년 
8월 중순으로 예정된 당대회를  위한 벽보를 주문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고 탄식
하였다. 그리고 대중 집회를 조직하는 일이 힘들다는 말도 했다. 아마도 이런 이
유에서 히틀러느  처음므오 당 대회를 오래된  제국도시 뉘른베르크의 낭만적인 
배경 속에서 치르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곳은  근처에 있는 밤베르크와 비슷하
게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다.
바이마르와는 달리 이번에는 히틀러의 연출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당의 폐쇄성과 
전투준비 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추종자 중 한  사람은 이날을 
계기로 그를 '대중지휘의  마술사'라고 불렀다. 실제로 이  대회에서 뒷날 인기있
는 의식으로 반전하는 최초의 시작을 볼 수  있다. 깃발과 삼각기와 악단을 동원
하고 특수한 행렬을 이루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돌격대와 당 조직부대들이 도
착하였다. 외국에서도 수많은  대표다들이 왔다. 그리고 일년전에 창설된 히틀러 
청년단이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바이마르에서 이미 다채롭게, 그러나 우연
적으로 작용한 단일화는 여기서 거의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히틀러 자신도 옛날 의용군  물푼에서 넘겨받아서 돌격대로 도입된 갈색 셔츠
를 입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물론 이 셔츠를 추하다고 여겼다. 루이트폴트 숲
에서 거행된 대규모 행사는 12개 연대기들의  화려한 축성식으로 끝났다. 그러고 
나서 히틀러는 시장광장에서 무재차에서 팡을 쭉 뻗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자
기 추종자들의 분열행ㅅ능 바라보았다. 갈색의 환상적  의상을 입은 여자들과 소
녀들은 히트러 앞으로 지나갈 허락을 받지 못했다. 
  당대회는 노조문제를  위한 '헌금반지'를 만들기로 결정하였고,  지적인 계ㅌ에
도 선전을 할 수 있도록 학회를 창설할  것을 요청하였다. 얼마 뒤에 함부르크에
서 히틀러는 처음으로 수천 명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농부들을 앞에 놓고 연설
하였다. 당의 정체현상으로  인해서 새로운 사회계층에서 지지세력을  구하지 않
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정지의 시기'에 벌어들인 '수입'들
  국가는 그 사이 1923~1924년의 안정화  요인들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새로
운 배상 협정,  로카르노 조약과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 켈로그  협약, 그리고 처
음으로 도이치 수상 슈트렌제만과  프랑스 수상 브리앙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으
로 시작해서 점차 공식적인 분위기로 넘어가게 된 츠랑스과의 상호이해 등이 분
명한 효력을 드러냈다.
  시대는 긴장완화와 국제적인  균형을 지향하고 있었다. 포괄적인  미국의 차관
은 공과국에 적지 않은 부채를 안겼지만 동시에 경제의 합리화와 현대화를 위한 
투자확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1923년에서 1928년 사이의  지표 상승은 거의 모
든 분야에서 다른 모든 유럽 국각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을 뿐만 아리나 영토가 
줄었는데도  전쟁 전  독일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1928년에 국민  소득은 
1923년의 소득보다 약 12퍼센트나 높았고, 사회적  개선들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
렀으며 실업자 수는 약 4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시대가 국가 사회주의의 과격주의와 반대 경향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였다. 히
틀러 자신도 때로는 몇 주 동안이나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채 오버잘츠베르크
(윗소금산)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나  그의 은둔은 그가 마침내 얼마나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간혹가다만 분명하게  계산된 거리
를 두고서 훈계나 위협을 해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1926년 12월 10일에  <나의 투쟁> 제 2권이 나왔다.  그러나 기대하였던 결정
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제 1권은 1925년에 거의 1만부를, 이듬해에는 거
의 7천부를  팔았지만 1927년 전작품의  매상은 5607권으로  줄었고, 1928년에는 
겨우 3015권에 이르렀다.
  어쨌든 그의 수입은 윗소금산에 있는 집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베히슈
타인 부인은  집의 설비비를 내주었고,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집안은  여러 가지 
침대보나 식탁보 등의  물품과 도자기 등을 보내주어  집안을 장식하게 해 주었
다. 그들은 나중에 바그너 전집과 그의  <로엔그린>의 원본 총보중 한 페이지를 
보내주었다. 그 무렵쯤  해서 히틀러는 2만 마르크를 내고 6인승에  덮개가 없는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하였다. 그 자동자는 그의 기술적, 과시적 욕구
에 잘 들어맞았다.
  전후에 발견된 그의 세금 자료를  보면 이 비용은 신고된 수입액을 훤씬 초과
하는 것입을 재정당국에  숨길 수가 없었다. 세무서에 보낸 편지는  군대 기피자
로 잡히고 난 뒤 린츠  시당국에 보냈던 편지를 생각나게 하는 감상적인 약삭빠
름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기 생활이  빈궁하고 소박하다고 
맹세하였다. "내것이라고 부를만한  부동산이나 금융재산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습
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구를  꼭 필수적인 것에만 한젓시키고 있습니다. 술도 담
배도 입에 대지 않으며 가장  저렴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약간의 집세를 빼고 
나면 정치적  문필가의 광고비에  속하지 않는 비용이라곤  아예 없다시피 합니
다... 이 자동차도 내게는  이런 목적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자동차는 있어야 일
상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니까요."
  1926년 9월에  그는 세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밝히면서 은행빚이 많다고 
거듭 말하였다. 몇 년  뒤에도 그는 때때로 이 시절의 계속적인  돈 부족을 회상
하였다. 때로는 사과만  먹고 산 적도 있다고  말했다. 티르쉬 거리에 있는 과부 
라이헤르트의 집에 얻은  셋방은 사실상 거의 돈이 들지 않았다.  자그마하고 옹
색한 가구가 딸린 방이었고, 바닥에는 닳아빠진 니놀륨 장판이 깔려 있었다.
  수입을 늘려보려고 히틀러는 헤르만 에서와 사진기사 하인리히 호프만과 함께 
<화보 관찰자?를  만들었다. 이 사진기사에세 그는  자기 그림에 대한 전매권을 
주었었다. 이 <화보 관찰자>를 위해서 그는  주석의 단조로움과 눈에 띌 정도로 
약화된 문체는 이 식의 주제 빈곤을 보여준다.
  이 기다림, 계획, 정지의  시기 한가운데인 1928년 여름에 그는 살아있는 동안
에는 출간되지  않는 두 번째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사이 다듬어진 
외교 개념들을  포괄적으로 묘사한 책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힘들여서, 그리고 
강력한 호소로써 다양한 힘에  의해서 불안하게 움직여가는 당을 한데로 붙잡고 
합법화 노선에 대한  불만을 물리쳤다. 공화국의 안정을 보고도 그는  자신의 추
종자들처럼 너무 빠른  결론으로 이끌리지 않았다. 모든 약한 것과  부서지기 쉬
운 것을 간파하는 그의 본능은 그의 원한에  참을성을 주었다. 특이한 어조로 그
는 상황의 저항들과  전망 없음을 보고 특별한 성공의 자신감을  잡아냈다. 그는 
자산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우리 운동이 승리한다는 무조건적인, 아니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근거는 바
로 그 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과격파 운동인  한, 여홀니 우리를 조목하는  한 , 
현재의 국가 상황이 우리에게 반대하는 한 우리는 가장 소중한 인적자원을 모아
들이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국가사회당의 뮌헨 지구 크리스마스  측제에서 그는 당의 처지, 박해, 곤궁 등
을 초기 기독교의 처지와 비교항ㅆ다. 그는  자신의 대담한 이미지와 크리스마스
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렇게 비교 확대하였다. 국가 사회주의는 '그리스도의 이
상을 현실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한 일은 그(히
틀러)가 완성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보다  앞서 진행된 아마추어  연극 <구
원>은 현재를 '곤궁과 노예상태'로 묘사함으로써 그늬 등장을  준바하였다. "성탄
절의 떠오르는 별은 구원자를 가지킨다."고 <민족  관찰자>에서 서술하였다. "막
이 갈라지면서 도이치 민족을  수치와 곤궁에서 구해내는 새로운 구원자를 보여
준다. 바로 우리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다."
  그런 선언은 바깥 세계에서 볼 때는 그를 둘러싼 낯선 후광을 더욱 강화 시키
는 것이었다. 경력의  초기 시절처럼 기묘한 출현에 대한 명성이  그를 따라다녔
다. 그러한 출현은 진진하게 고려된다기보다는 바이에른  정치의 그림 같은 특성
으로 설명되었다. 그의 습관이었고,  점점 확장되 가던 형식도 여러 가지로 의심
스런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장군홀로 진행해갈  때 가지고 갔던 깃발을 '피의 깃발'로 존경하도
록 하였다. 모든 군기의 축성식에서 이깃발의  끝을 거드림으로써 신비스런 힘을 
넘겨받는 것이다.  그리고 당원들은 종족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혈통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주고받을 때 서로  '도이치로 태어난 사람
들이여'라고 호칭하였다. 다른 활동들  역시 줄지 않는 형태로 국가 사회당이 자
신의 의도를 추구하는 진지함과 요구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1926년 말에 당은 
연설가 학교를 열었다.  추종자들에게 기술과 지식과 자료를  전해주기 위해서였
다. 자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1932년 말까지 약 6천명의  연설가를 교육하였다고 
한다.

     서커스 천막으로 들어오다
  1927년 이른 봄에 작센 정부와  바이에른 정부는 새로 얻은 근거와 국가 사회
당을 무시하는  마음으로 당의 지도자에 대한  연설금지를 해지하기로 결정하였
다. 히틀러는 기꺼이 그쪽에서  요구한 선언을 하였다. 즉 절대로 법에 어극나는 
목적을 추구하지도 않고, 법에 어극나는 수단을 쓰지도 않겠다는 맹세였다. 새빨
간 벽보들이 그가 3월 9일  20시에 왕관 서커스장에서 다시금 뮌헹 주민들을 향
하여 연설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경찰  보고서는 인상적으로 마치 모범적 
사례처럼 이 행사의 경과를 묘사하고 있다.

  서커스 장은  7시 10분에 벌써 절반이  넘게 들어찼다. 무대에서  아래로 하얀 
동그라미 속에 갈고리 십자가가 들어있는 붉은  깃발이 드리워졌다. 무대는 간부
당원들과 연설자들을  위한 것이다. 특별석들도  갈색 셔츠가 퍼져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당원들을 위한 것인 듯했다.  단상에는 악단이 자리잡았다. 특별한 
장식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흥분하고 기대에 넘쳐  있다. 사람들은 히틀러 이야기, 
그가 한때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괸장한 성공을  거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여
기저기 눈에 띄게 많이 섞여 있는 여자들도  그에게 열광한 듯이 보인다. 사람들
은 옛날 영광의  날들을 서로 이야기 하고 있다... 뜨겁고  달큰한 분위시 속에는 
센세이셔널한 욕구가 떠돌고 있다. 음악음 몇 개의  소리 맑은 둔대 음악을 연주
하고, 그 사이 계속  새로운 패거리들이 몰려들어온다. <민족 관찰자>는 이리저
리 돌아다니고 계속 칭찬을 듣은다. 카운터에서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강령
을 받았다. 입구에서는 종이 한 장 씩을 손에 들려준다. 거기에는 어떤 도전에도 
휩쓸려들지 말 것과 질서를 지키라는 경고가 들어  있다. 작은 깃발들을 팔고 있
다. '환영의 깃발,  각 10페니히'. 그 깃발들은 검정, 하양,  빨강이나 아주 빨간색 
바탕에 각기 갈고리 십자가가 들어 있다. 여자들이 열심히 사고 있다.
  그 사이 줄들이 채워진다. '전과 마찬가지고  해주십쇼!'하는 말이 들린다. 원형
의 공연장도  사람들이 들어차고 있다...  대개는 하류 직업인들로,  노동자, 과격 
노동 계층 대표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좋
은 옷을  입고 있으며 어떤 신사들은  연미복 차림이다. 서커스 장을  거의 가득 
채운 사람들은 어리잡아 7천 정도에 이르고 있다...
  7시 반의 사정이다.  그때 입구에서 '하일' 하는 외침이  들리고 갈색 셔츠들이 
행진해 들어온다, 음악이 울리고 서커스장은 떠나갈 듯한 환호성으로 가득 찬다. 
히틀러가 갈색 레인 코트를 입고  나타나서 심복들에 둘러싸인 채 서커스 장 전
체를 통과해서 단상으로 올라간다. 사람들은 기쁨으로  흥분한 몸짓을 하고 손짓
하고 계속 '하일'을 외치고 있으며, 의자에 올라서서 발릉 굴러댄다, 그러자 극장
처럼 나팔소리. 갑작스러운 조용함,
  구경꾼들의 열광적인 인사를  받으며 갈색 셔츠들이 대오를  이루어 들어온다. 
맨 앞에는 두 줄로  북치는 사람들, 다음은 깃발이다. 사람들은 파시스트 방식으
로 팔을 뻗어 인사한다.  관중은 그들에게 환호를 보낸다. 깃발들이 스쳐 지나가
고, 번쩍이는 연대기들이 지나간다. 화환 속의 갈고리 십자가, 독수리들, 옛 로마
의 군기를 흉내낸  것들이다. 약 2백 명 정도가  분열 행진을 했다. 그들은 둥근 
공연장을 채우고 거기에  자리 잡고 섰다. 군가와 연대기를 든  기수들이 무대를 
채운다. 
  히틀러는 서둘러 무대의 앞쪽으로 나선다. 그는 자유롭게 말한다, 처음에는 느
린 어조로, 나중에는 빠른  속도로 말하고, 과장도니 정열로 말한느 구절들은 못
고리를 낮추어서 서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다, 그는 팔짓과  손짓을 해보이고 
흥분해서 이리 저리  펄쩍펄쩍 뛰면서, 주의 깊게 자신을 바라보는  수천명의 관
객을 쉬지 않고  매혹시키려고 한다. 박수 갈채가 그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그는 
연극적으로 두 손을  번쩍 쳐든다. 연설의 뒷부분에  자주 들당하는 '아닙니다'하
는 말은  연극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강조된다.  연설 자체는... 
보고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다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되찾은 연설의 자유가 국가 사회당이 직면한  난제들을 해결새 주지는 않았다. 
그 동안의  연설 금지는 오히려  히틀러에게 유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가 
출연했더라도 어쩌면 집회의 홀들을  가닥 채우지는 못했을 즐거운 무관심의 시
대에 그의 이름이  마모되는 것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는  스스로 연
설 활동을 줄였다.
  1927년에는 공식 연설을  56회 했다. 2년 뒤에는  27회까지 줄여 버렸다. 그는 
이때쯤 해서야 반신적인 은둔상태가 어떠한 이점을 자겨다주는지 분명하게 깨달
은 것으로 보인다.  대중에게 돌아온 순간에 그는 불리한 상황의  압도적인 힘과 
경쟁 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곧 실패가 나타나고 그와 더불어 비판이 뒤따랐다. 
비판은 그의 지휘  방식과 엄격하게 지켜지는 합법화 정택을 향한  것이었다. 히
틀러에게 완전히 복종적이고, 지도자 숭배의 예언자  중 한 사람인 괴벨스조차도 
1927년의 팸플릿  <나치- 사회주의>에서  무조건적인 합법 노선을  비판하였다, 
다수는 얻으려는 노력이 실패 할  경우 당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저항적인 태도로 확언하였다. "무엇이라구?! 그럼 우린 이를 악물고 각오
가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국가에 맞서 행진하고, 독일을 얻기 위한 최후
의 위대한 일격을  감행하고 말의 혁명가는 행동의 혁명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혁명을 할 것이다.
  히틀러의 개인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이 이루어졌다. 공로가  있는 동지드을 
얕보는 듯한 태도, 오랜  정당인이 바난한 것처럼 '히틀러 씨를 둘러싼 애창되는 
장벽' 그의 방만한  업무 집행, 혹은 조카딸에 대한 질투심  등에 ㄷ나 것이었다. 
1928년 이른 여름에  에밀 모리스가 겔리 라우발의  방에 있는 것을 히틀러에게 
들켰을 때 히틀러가 너무나 격분해서 드를 위협했기 때문에 그는 창문에서 뛰어
내려서 겨우 자신을 구했다고 한다.
  조사 및 조정 위원회의 의장인 발터 부흐는 자신이 ;노골적인 복종'을 하고 있
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자신의인상을 전달할 필요성을 느꼈다. "히틀러 씨,  당신
은 점차 인간에 대한 경렴에 이르는 것 같군요. 나는 두려운 근심을 느낍니다."

    오류 없음에 대한 요구
  당내의 시끄러운 분위기를 보고 히틀러는 1928년에 계획된 당대회를 취소하고 
그 대신 뮌헨에 지도자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모든 하부 조직에 준비 모임을 
금지하였다. 8월 31일 대회가  열리자 그는 흥분해서 복종과 기율을 칭찬하였다. 
오직 조건 없이 결탁한 엘리트만이 '역사의 소수파'로서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
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당은 많아야 60만에서 80만의  당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다. "그것은 쓸모 있는 인원입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단순한 지지자들로
서 당의 목적을 위해서 쓸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작은 그룹의 광신자들이 대
중을 이끌어갑니다. 러시아화 이탈리아를 보세요... 강력한 소수파를 가진 다음에 
비로소 다수를 얻기 위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자기 옆에 
'고문단'을 두라는 제안을 조소로써  물리쳤다. 자기는 조언자가 필요치 않다. 곧 
이어서 그  제안자인 튀링겐 관구  지도자 딘터를 당에서  제명해버렸다. 그보다 
앞선 서신 교환에서  그는 딘터에게 정치가로서 '무오류성을 요구한다'고 확언했
다.
  곧 이어서 이제 널리 쓸이게 된 명령 수령 형식에 따라 조직되지 않은 새로운 
당 대회가 소집되었다.  거기서 스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동안 보한  듯이 지루하
다는 얼굴을 하고서 침묵ㅇ르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점차 쓸모 없다는 느
낌과 마비의 느낌이 퍼지게  되어서 결국 대회는 전체적으로 의기소침한 가운데 
끝났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은 나중에, 히틀러가  이 대회의 개최에 동의한 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을 분명히 파괴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 추측하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러나 엄격하게 조직된 당의 지도자로서  히틀러는 자신
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용기를 잃어버릴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는 이제 처음으로 당내외적으로 자신의 독자성을  쟁취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부터 때때로 당은 공식적으로 '히틀러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영향력 있는 후원자와  강력한 기구를 통한 특별한  후원이 없어도 당은 자신의 
힘으로 승리까지는 아니라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연극을 시작해보자구"
  1028년 5월 20일에  새로운 중앙의회(국회) 선거가 있었다. 국가  사회당은 2.6
퍼센트의 표를  얻어서 9위를 차지했다. 그드의  열두 명 의원  중에는 그레고어 
슈트라서, 고트프리트 페더, 괴벨스, 프리크와 그  사이 재산 있ㄴ느 아내와 광범
위한 관계를 얻고서  스웨덴에서 돌아온 헤르만 괴링이 끼어 있었다.  히틀러 자
신은 '국가가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입후보하지 않았다. 
  자신의 곤궁과 당황을 장저으로  묘사해내는 특유의 능력으로 그는 이러한 장
애를 새로우 거리가으로  만들어내는 데 이용하였다. 결멸하는  의회제도를 인정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로  시대의 열망, 사럽, 욕망들보다 높은 곳에 서 있
는 독자적인 지도가한느 역할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랫동한 고심한 끝네 선거에 
참여하기로 한 결정으 당이 의ㄷ들의 특권을 얻는다는 생각에 적잖이 영향을 받
은 것이었다.
  괴벨스는 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  만에 쓴 기사에서 당의 합법화 맹세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발언을  하고 있다. "나는 으회의 성원이  아니다. 나는 IdI이고 
IdF이다. 즉 면책권 소지자고 무임 승차권 소지자다. 우리에게 의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의회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선풀된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위탁한 사람들
이 생각하는 대로 의물르 행 할 것이다... IdI는 쓰레기더미를 보고 쓰레기더미라
고 부르고 둘러대면서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사람이다." 이 고백
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이제 당신들은 놀았는가? 그러나 우리가 벌
써 끝에 와  있다고 믿지는 마시라... 당신들은 앞으로도 우리를  많이 놀릴 것이
다. 자 그러니 연극을 시작해 보자구."  
  
    제3의 가치
  이러한 발언의 경멸적인 광채는  그들의 스스로 달아오른 특성을 감추지 않았
다. 국가  사회당은 과장도니 몸짓의 파편정당이었다.  냉정하게 잘 준비를 갖추
고, 간부들을 투입해 좋고서 히틀러는 상황이  새로 과격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상황이 과격해지면 대중정당으로 나서려는 것이다.
  온갖 열의를  다하고, 온갖 조직적인  불안ㅇ르 다 동원했지만  그는 이제까지 
쓸모 있고 광채  없이 움직인느 공화국의 그늘에서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열정
적인 혼란 상태에서 그토록 효과만점이었던 그의 카리스마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부서져가려고 했다. 때때로 민족이  마침내 공화국과의 평화, 볼품 없는 회색 상
황과 평화를 맺을 준비가 된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 모든 만들어낸 현실, 영웅
적, 낭만적 추억을 잃어버리고, 일상적인 역사와  화해를 하려는 듯이 보였다. 의
회선거는 물론 중간 시민계층의 해체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수없이 등장
한 파편정당들의  모습으로 체계의 감추어진  위기를 알리고 있었다.  또한 당의 
투종 세력도 거의 15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다음해 초에도 여전히 본  대학 교수인 사회학자 요제프 슘페터는 "우리 사회 
상황이 아작도 대단히 큰, 어쩌면 더욱 커지는 안정"을 얻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도,  어떤 영역에서도, 어떤 방향으로도  일격, 비약, 혹은  파국은 
있을 법하지 않다."
  히틀러가 상황을 더욱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공화국의  이 짧은 행운의 시기에 
도이치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제3의 가치를 가지
고 있습니다.  즉 전투욕이죠. 그것은 외국  이론과 독트린의 폐허더미에 파묻혀 
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거대하고 강력한  정당은 그 반대를 증명하려
고 노력하고 있지만 갑자기 아주 낯익은 군악대가 와서 연줄르 시작하면 뒤따르
는 사라들은  꿈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행진하는 민족의 동지가  되어서 그들도 
함께 행진 할 것입니다. 오늘날이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에세는 더 나은 이 점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벌써 행진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는  행진의 시작ㅇ르 위한 표지만을 기다렸다. 당이  시대를 초
월하여 모든 허구의 허망한  신념의 체계인 자시의 역동성과 희망과 목적의식과 
선택된 지도자의 이미지를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1928년 5월의 선거를 분석하면서 오토 슈트라서는 '국가 사회주의의 구원복음'
이 대중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층에 
뚫고 들어가는 일에  실패했다고 탄식하였다. 사실상 당의 지지계층은 샐러리맨, 
영세 사업자, 농부들과 낭만적 저항을 생각하는  젊은 층이었다. '아주 낯익은 군
악대'가 깨우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민감하게 알아듣는 전위대인 젊은 
층이었다. 그러나 겨우 몇 달 뒤에 벌써 장면은 전체적으로 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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