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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avelli's peace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이며 비극 작가

by FraisGout 2020. 8. 20.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그가 역사 집필로 다시 돌아갈 당시 입에 올린 것 외에는 비극 작품을 쓴 적도 없고 또 그렇게 하려고 작정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속은 자신이 (군주론) 마지막 장에서 기원한 일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군주들을 마치 극 속에서처럼 준엄하게 꾸짖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비극적 생각들로 가득하였다.  그는 이미, 대 로렌초의 죽음에 뒤따른 (외세의 침략)에서 출발하여 미켈란젤로식의 단축법으로 묘사된 기만과 오류의 미로를 거쳐, 앞에서 말한 최근의 편지에서 스스로 예언한 그 치명적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힘찬 필치로 그려내고 있었다.
  (모로네는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 공국은 빼앗기고 말았지.)  그에게는 자신이 그리고 있던 비극 작품의 마지막 막 마지막 장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사실 파비아 전투 이후 이탈리아의 지배자들이 재개했던 그 비열한 정치 게임을 종격함과 동시에 그 성격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교황 클레멘테는 그 스스로 황제의 수중에 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도, 또다시 에스파냐를 이탈리아에서, 특히 밀라노 국에서 축출하기 위한 동맹(1526년의 코냑 동맹-옮긴이)을 결성하고자 작정하였다.  밀라노에서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유명한 용병 대장이었다가 1450년에 밀라노 공이 된 프란체스코가 아니라, 그의 손자이자 흑안공 로도비코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즉 프란체스코 2세를 가리킨다-옮긴이)가 조약의 결과에 따라 (황제의 그늘 아래) 사실상 허수아비로 전락해 있었다.  일을 좀더 쉽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교황은 당시의 정치 관습에 따라 가장 비틸리고도 어려운 길을 택하였다.  즉 징병은 자기 편에서 한 뒤 통합군에 대한 지휘권은 페스카라 후작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출생이기는 했지만 출신 가문상으로 에스파냐계에다 이탈리아적 대의에 반하는 인물로, 더욱이 당시 교황이 싸우고자 하는 바로 그 에스파냐 군의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음모를 생각해 낸 자는 밀라노 공의 비서로 바람의 방향을 기막히게 알아냈던 지롤라모 모로네였다.
  페스카라는 이러한 제의를 별다른 항변 없이 그냥 듣기만 하다가, 즉시 황제에게 알였다.  이는 필요시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배반할 여지를 두면서도 현재의 위치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능란한 방책이었다.  물론 그가 이 경우만 그리고 그만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로네와 황제 사이에서도 그런 방법을 썼던 적이 있었다.  스포르차는 황제와 프랑스 왕 사이에서 그렇게 행동했고, 교황 역시 이쪽저쪽 자신의 강적들 틈바구니에서 그렇게 했다.  클레멘테는 한편으로 황제의 장국을 꼬드기면서 동시에 황제에게는 장국을 조심하라는 편지를 썼다.  그들 모두가 이중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페스카라와 모로네가 변절자라는 말이 나돌았던 적도 있지만(즉 모로네는 친구들을, 페스카라는 적에 대한 서약을 배반했다는 것), 결국 모로네는 옥에 갇히고 공국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에스파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탈리아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당시 클레멘테는 더울 취약해진 위치에다 황제의 의혹은 날로 커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와 힘을 합쳤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왕이 풀려나기 전에는 그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왕이 풀려나는 문제 또한 칼의 요구가 너무 지나쳐서 큰 난관에 봉착해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의 절망에 빠져 있다가, 페스카라 후작이 죽었다는 소식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적군의 주요 지휘관이 죽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이점으로 느껴졌다.  그는 이처럼 쓸데없는 희망 속에서 세월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란 사람은 베르니처럼,
  당신은 할 수 있느뇨, 파파 키멘티여,
  그렇게 무기력하고 그렇게 우둔한데도,
  하늘로 하여금 스스로를 눈멀게 귀멀게 하고
  더불어 모든 감각까지도 다 빼앗아가 버리도록?
  이라고 적나라하게 모욕하는 것에보다는 비극시에 더 잘 어울리는, 영원한 불확실성을 지닌 극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교황의 그러한 무기력증을 비꼰 마키아벨리의 말도 없지는 않다.  (그는 시간이 있다 싶으면, 그것을 적에게 넘겨준다.)  어쨌든 당시와 같이 급박한 시점에 같은 피렌체인들의 정신과 태도를 숙고하기에 이른 그는, 자기 편이든 혹은 이탈리아의 다른 나라든 간에 (죽든 살든 무언가 대의로 삼을 만큼 명예롭고 용감한 일)이라고는 해온 적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이를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1525년 12월 19일자 편지에다 썼다.  이 내용을 제외하면 이 편지는 자신이 파엔차 체류 이후에 이미 말했던 것처럼, 교황에게 그의 세 딸을 위해 후한 지참금을 마련해 주십사 청할 것을 다시금 권하는 등, (신변잡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다시 단테에 의지하여 친구에게 로메오의 전례를 인용한다.
  그에게는 딸이 넷 있었고,  그 각각이 모두 여왕이었지...
  하지만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시인도, 시를 즐겨 읽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이 19일자 편지에대한 26일자의 답장에서, (로메오의 동화인지 설화인지 그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로마냐에 있는 단테의 책들을 모조리 훑었고) 결국에는 주석 없이 본문만 있는 것만을 겨우 입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속직히 고백하였다.  그리고는 이 제기발랄한 친구에 대해 반은 칭찬으로, 반은 미덥지 못하다는 투로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평소 자네가 가지고 있던 그 끝없는 저장고 속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어.)  로메오, 그는 누구였단 말인가?  (여기서 로메오란 바르셀로나 백이자 프로방스 후작이었던 레이몽 베랑귀에 4세(1131-1162)의 프로방스 궁 집사였던 로미외 드 빌레뇌브를 가리킨다.  마키아벨 리가 그를 언급하고 있는 1525년 12월 19일자 편지에 의하면, 로메오는 딸이 넷이었던 프로방스 공에게 첫딸이 출가를 잘 해야 나머지도 혼인이 순조로울 것이라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첫딸에게 후한 지참금을 주어 프랑스 왕(성왕 루이 9세)에게 시집보냈으며, 이어 나머지 딸들도 모두 유럽 왕가들에서 왕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키아벨 리가 로메오의 일화를 인용한 것은 귀차르디니 역시 교황에게 청을 넣어 딸에게 후한 지참금을 내리도록 해서 좋은 혼사를 마련하라는 뜻에서이다-옮긴이) 총독은 심지어 공적인 일에서조차 방향을 잃고,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그 대담한 선택에 자신은 싫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인 양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만을 남길 뿐이었다.  (나는 태풍이 불어오는데도 몸을 피할 생각도 않고, 우리처럼 길 가운데에서 아무런 방비도 없이 서 있는 사람은 들은 적이 없네.  그러므로, (...)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빼앗겼다고 하기보다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손에서 내팽개쳐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지.)
  사정이 이러하므로, 다른 것보다 (만드라골라)의 상연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는 편이 더 나았다.  사실 귀차르디니는 편지에서, (적어도 이 일만큼은 우리 권한 안에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이렇게 뒤숭숭한 때일수록 오락은 더 요긴한 법)이라며 만사 제쳐두고 이 분제부터 챙겼다.  배우들은 모두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아르구멘토 argumento), 즉 그예리하면서도 통렬한 색조의 아름다운 프롤로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식으로 고쳐 썼으면 하였다.  그러나 귀차르디니는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하여 청중들의 수즌에 맞추어 다른 대사를 쓰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제의하였다.  어차피 연극은 저자 자신이 아니라 청중들의 자화상이 될 터였다.  그는 그 해의 경우 2월 13일에 끝나는 사육제 마지막 날들 중 어느 하루를 잡아 무대를 꾸미고 싶어했고, 작가는 어떻게든 그곳에 참석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정월 그믐께쯤 와서 사순절까지 머물다 가라고 권유하였다.  그때쯤이면 (귀인을 모실 방들)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바르베라를 염두에 둔 마로, 그녀는 연극의 서두에 노래하게 되어 있었다.  귀차르디니는 (이 문제가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릴 일이 아니라면서) 그가 어떻게 하기로 작정했는지를 (심각한 어조로) 묻고는 편지를 끝맺었다.  그 자신이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점에서 볼 때 스스로가 사용하려고 단골 인쇄업자 지롤라모 손치노에게 부탁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작지만 훌륭한 연극 대본에서 잘 나타난다.  평소 그는 총독이 오락과는 거리가 먼 포고문 등속의 무거운 글들을 인쇄하기 위해 이용하곤 했던 사람인데, 이번에야말로 그도 맡은 일에 틀림없이 신나했을 것이다.
  이 편지에는 희극과 비극이 시종일관 묘하게 뒤섞여 사람을 그는 특이한 매력이 있는데, 마키아벨리의 1월 3일자 담장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희극 문제에서 그는 과연 바르베라가 올 수 있을 것인지 확답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만한 애인들이 있기 때문이네.  하지만 어떻게든 일이 되도록 할 수 있을걸세.) 오, 가엾은 니콜로여! 하지만 그나 그의 연인이나 모두가 오고 싶어했고, 바로 이때를 위하여 막간곡으로 새로이 곡을 붙인 5곡의 노래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노랫말은 그의 편지 속에 적혀 있다.  비극의 측면을 보자.  만약 황제가 권력의 우위에 서고자 한다면 결코 왕을 풀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붙잡혀 있을 동안이라야 황제는 프랑스와든 교황과든 조약을 완전히 깨뜨리거나 혹은 거꾸로 체결해 버리지 않고 다만 조약의 가능성만을 남겨놓은 채, 그들을 가지고 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와 연합하려는 낌새가 보일 때면, 그는 또다시 프랑스와 협상에 나서 이탈리아와의 조약을 불발로 끝나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네.)
  며칠 전, 교황, 베네치아, 프랑스가 한편에 선 이탈리아 동맹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듣기로, 상황은 매우 괜찮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왕과 황제가 드디어 협상을 끝냈는데, 그 내용은 왕이 자신을 풀어주는 대가로 부르고뉴를 양도하고,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며,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의 황제권을 인정하고, 게다가 두 아들을 인질로 준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 왕이 받는 것은, 그것을 대가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승리자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는다는 것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판단으로는, 칼이 그렇게 협상을 끝냈다면 그 이면으로 프랑스가 교황과의 동맹을 파기했을 것이 틀림없고, 사태가 이렇다면 그가 프랑스와 했던 약속 역시 파기될 것이었다.
  교황과의 동맹이나 황제와의 협상에 관한 이처럼 삐걱거리는 소문들은 몇 주 후 약간 다른 점은 있었지만 거의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동맹에 대한 정보를 더 직접적으로 접하고 있던 귀차르디니는 친구가 선술집 잡담식으로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읽고는 틀림없이 웃었을 것이다.  그가 심중에 감춘 큰 비밀을 생각할 때, 그의 미소는 자신이 종종 마키아벨리의 입가에 번지는 것을 불안스레 바라보던 그의 조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 비밀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1월 중순경, 교황은 어떤 중요한 일로 그를 로마에 불러들였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슬쩍 전해 왔다.  프란체스코는 이리저리 숙고를 거둡하고 일에 대한 보수와 같은 (세부 조건)에서도 적지 않게 밀고 당기고 한 끝에 결국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12월 4일까지도 그는 과연 교황이 자신에게 무슨 일을 맡기려 하는지 듣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그 이후로도 여전히 추축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클레멘테가 프랑스와 연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에게 맡기려는 임무가 바로 먼저 그 문제를 담판짓고 이어서 전쟁을 치르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그는 평소에는 차가운 자신의 성품에도 불구하고 즉시 몸 전체가 확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듣기로, 이제 문제의 핵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 그는 (세부 조건)을 두고 그토록 밀고 당긴 자신의 태도를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이 임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만족은 성하께서 가만히 앉아 굴종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를 비밀로 하였다.  하지만 그가 사육제 동안의 연극 상연 건으로 마키아벨리에게 편지를 하고 그와 바르베라를 초청한 것이 자신의 심중을 감추자고 한 행동만은 아니었다.  홰냐하면, 그는 자신이 언제 일을 맡게 될는지도 잘 몰랐고, 더욱이 황제의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데다 교황 역시 우유부단해서 과연 그 계획이 실행될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다음 해인 1526년 1월 3일가지도 모든 것이 답보 상태였으므로, 귀차르디니는 계획이 거의 무산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6일, 움직이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20일 피렌체를 향해 길을 떠났고, 그곳에 도착하여 나흘을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온 이유를 비밀로 해야만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곳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비밀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즉 (만드라골라)의 파엔차 공연은 실행되지 못했으리라는 것, 설사 이루어졌다 해도 그 자리에 귀차르디니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마키아벨리도 참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에게는 위안 거리가 있었다.  바로 그 사육제 기간 동안 베네치아에서 자신의 작품이 전례없는 호평 속에 상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곳 피렌체 사회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려진 것인데, 같은 날 저녁 일단의 베네치아 신사들은 이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플라우투스의 (메니이크미 Menaecmi)를 번역하여 상연하였다.  이 연극은 최고의 배우들을 기용하고 무대와 의상에도 막대한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지만, 피렌체 희극과 비교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무대였다는 평을 받았다).  이렇게 (만드라골라)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로 그 베네치아 신사들과 배우들은 자신들의 연극을 상연했던 바로 그 저택에서 다시 한번 그 작품으로 무대를 꾸며 줄 것을 피렌체 사람들에게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이 공연을 본 관객들은 커다란 만족감을 표시했고 작가와 배우에게 열렬한 찬사의 말을 보냈다.  (만드라골라)가 베네치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누도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522년 사육제에 그것에 상연되었을 때, 엄청난 수의 관객이 쇄도하는 바람에 공연을 끝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고대인이라면 자동적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던 시대에 고대 작가와 겨류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희극에 대한 마키아베리의 예술적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 하겠다.
  하지만 희극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비극 작가인 그가 당시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은 희극 작품이 아니라 역사였다.  귀차르디니와 나눈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결코 비극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고 때로는 (그 일에 깊이 빠져 있기도) 했으나, 어쨌든 다시 역사 쓰기를 시작하였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이 끝나기 전 ante res perditas) (앞서 나왔던 (post res perditas)를 저자가 바꾸어 표현한 것-옮긴이) 피렌체 서기장들의 역사 찬술 전통을 이어받겠다는 작정으로 집무중에 수집, 발췌해 왔던 편지들을 간추리고 요약하는 작업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벌서 20년이나 묵어버린 이 서류들 속에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이미 역사 드라마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몇몇 인물들의 모습도 경쾌하게 스케치되고 있다.  알레싼드로 6세의 경우는 이렇다.  (사악한 교황.  머리에는 밀라노와 피렌체를 협잡하려는 간계가 가득하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다.)  흑안공에 대한 묘사는 또 이러하다.  (로도비코 스포르차.  가벼운 성격.  이것저것 수시로 바라고 두려워하고 집착하는 인물.)
  마키아벨리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이탈리아가 겪고 있던 모든 우환들은, 바로 이처럼 지나치게 간교하고 예민한 데 집착하다 오히려 빈약하고 우둔해져 버리는 인물들의 정책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든 또는 그같이 오랜 기원의 실마리들을 다시 묶든 간에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황제와 왕 사이의 협저에 체결된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2월 20일, 그 소식이 이탈리아에 알려지자마자, 사람들은 과연 황제가 약속대로 왕을 풀어줄 것인지 또는 만일 왕이 풀려난다면 그는 또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두고 입씨름을 시작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이 문제에 대해 (오만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한채)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에게는 그토록 신뢰성 없는 협상 조건들을 따로 살피지 않고도, (왕이 똑똑하게 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황제는 멍청이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입증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왕이 협정을 준수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아들들이 인질로 잡힌 데다가 그처럼 힘든 시간을 보낸 뒤라 조용히 지내고 싶은 생각도 있을 테고, 여기에 교황과 베네치아인들의 믿음 없는 정책으로 이탈리아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증오심이 솟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렇게 불확실한 정국의 와중에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였다.  사태가 어떻게 되더라도, 전쟁은 즉각적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고 이탈리아는 피로 뒤덮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이탈리아인들에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좋은 군대와 용기 있는 마음으로 무장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말을 하나 하겠네.  아마 자네는 이 제안을 경속하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무언가 대담하고도 통상적이 아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러한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네.  (...)  며칠 전 피렌체에선 조반니 데 메디치 대인께서 어디든 유리한 쪽에서 싸우고자 과감히 깃발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네.  이 소문을 듣고 나는 정작 일반 사람들은 과연 그가 지금 해야 하는 행동에 관해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따져보게 되었다네.  물론 누구나가 믿고 있는 바이지만, 이탈리아인 가운데서 그 분만큼 병사들이 기꺼이 그 뒤를 따르려 하고 그 분보다 더 에스파냐 군이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은 사실일세.  그리고 모두가 조반니 님이 용기 있고 과감한 성격에다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결단을 내릴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도 알고 있네.  그러므로 우리는 비밀리에 그 분을 도와 그 휘하에 최대한의 기병과 보병을 결집시켜서 그 분으로 하여금 이 깃발을 휘날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고 보네.)  사람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어떤 목적이 있음을 에스파냐인들이 안다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들은 그것이 교황이나 왕의 계획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과의 약속을 파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좋고 나쁘고를 떠난 마키아벨리 그대로의 솔직한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큰 생각을 하다가도 다음과 같은 마음르로 후닥닥 넘어가는 것 역시 그보다 덜하지 않은 그의 특징이기도 하다.  (바르베라가 그곳에 있네.  만일 자네가 그녀를 어떻게든 보살펴줄 수가 있거든, 그녀더러 자네에게 가라고 하겠네.  나에게는 황제보다도 그녀가 훨씬 소중하기 때문이네.)
  마키아벨리의 이 편지들이 로마로 보내지자,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귀차르디니건 필리포 스트로치건 혹은 다른 누구건 간에 모두가 즉시 그것을 친구들에게 회람시키고 교황에게도 보였다.  이를테면 스트로치에게 보낸 3월 10일자 편지가 한 예인데, 여기에서 그는 여전히 황제와 와 사이의 협상 문제를 얘기하면서 그것이 과연 지켜질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교황은 (이를 매우 주의 깊게 듣고는 요소요소 칭찬의 말을 하면서, 세부 사항에 관한 정보 없이도 그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다했다고 크게 흡족해)하였다.  그러나 귀차르디니가 그로부터 받은 3월 15일자 편지를 보였을 때, 교황은 그 내용, 즉 자신이 돈을 대고 조반니에게는 지휘권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깃발을 올리게 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별로 탐탁해하지 않았다.  에스파냐인들이 그 깃발 뒤에 누가 있는가를 쉽게 알아차릴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점이었지만.  그러나 클레멘테가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은 것은 조반니에 대한 질시의 감정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단지 그 계획의 대담성이 그의 그릇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드디어 왕이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짐으로써, 그 동안의 온갖 추측은 사라지고 만사가 분명해졌다.  그리고 곧 그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도 확실해 보였다.  그러자 황제로서 (멍청이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책이, 자신이 3월 15일자 편지에서 썼듯이, (황제는 어떤 나쁜 결정을 내려도 스스로 해를 입지 않는 반면 왕은 아무리 좋은 판단을 내려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한 풍자시를 통해 당시의 기분을 토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아르고의 한 인물을 빌려 자신이 지닌 눈은 모두가 그리스도교국의 제후들로부터 빼앗아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이유라네.  그 바보 같은
  로마인들이 왕 칼과 그의 총독들이
  어찌될 줄도 모르고 왕을 풀어준 것 말이야
  따라서 전쟁은 어쩔 수 없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조소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방어하고 공격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였다.  방어의 측면에서 피렌체인 교황과 피렌체의 그 조신들은 무엇보다 피렌체를 최우선으로 todr가하였다.  그곳은 알프스 이북으로부터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군사 기술자인 피에트로 나바라 백작이 그에 대비하기 위해 그곳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변절한 에스파냐인이었던 그의 옆에 전술의 이론가이자 피렌체인인 마키아벨리를 두기로 결정되었다.  그는 언제나 움질일 채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귀차르디니가 4월 4일자로 교황의 명령을 그에게 전하자, 그는 코르토나의 추기경과 상의한 뒤, 다음날 이미 성벽에 올라 나바라와 대담한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마키아벨리가 쓴 보고서와 함께 로마로 보내졌는데, 이는 현대의 군사 사학자들에 의해서도 칭송될 정도이다.
  하지만 그 입안자가 즉시 로마로 불려간 것을 보면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칭찬한 사람은 클레멘테 7세와 그 조신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과 심지어는 귀차르디니까지도 자신의 계획에 찬동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4월 26일이나 27일 이행해야 할 지시 사항을 들고 머릿속에는 (성벽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그 사이에 피렌체에서는 로마에서의 논의 과정에서 마키아벨리 자신이 발의한 (5인성벽관리위원회 I Cinque Procuratori delle mura)라는 새로운 직제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는 그 감독관이자 서기장으로 임명되었고 아들인 베르나르도를 조수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는 다시 한번 정무궁에 근무하게 되었고 또다시 서기장이 되어 (공식 직함으로) 편지를 쓰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가 이 일로 얼마를 받았는지 혹은 (피렌체사) 에 대한 보수로 그냥 때웠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 위치를 불문하고 공화국에서 관직 얻기를 고대해 와TEk.  설사 그 직이 별반 중요하지 못한 것이었다 해도, 그는 스스로의 행동과 글과 그리고 필요하다면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그 자리를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가 맡은 새로운 직은 사실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그가 하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것이었다.  바로 조국이 방어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새로운 임무였고, 그는 즉시 적을 막는 보루를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시작부터 산 미니아토의 언덕들을 피렌체의 성벽 안에 두고 싶어하는 교황 클레멘테의 마음을 돌리고자 많은 것을 하고 많은 편지들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이 문제 때문에 하루는 귀차르디니에게 세 통의 편지를 써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머릿속이 성벽 문제로 꽉 찬 상태에서도, 마치 공상하듯이 그의 생각과 펜은 이탈리아 사태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당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던 귀차르디니에게 편지를 슨 것도 바로 이때쯤이었다.  (나에게는 왕에 의해 버림을 받은 황제가 교황에게 중요한 제의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네.  하지만 성하께서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지 않을걸세. (...)  자네도 알다시피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회를 잃어버렸나.  또다시 이번 기회를 놓치거나 사태를 방관하고 있어서는 안 되네.) (군주론)의 마지막 장을 썼던 바로 그 마음으로 그는 같은 편지에서 그 운명적인 기원의 언사를 큰 목소리로 외친다.  (그 오랜 근심 거리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라!)
  그가 이러한 선동이 말을 쓰고 있던 바로 그날인 5월 17일, 코냑에서 프랑스 왕, 교황, 피렌체, 베네치아 간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리고는 에스파냐 군이 눈치채지 못한 상태에서 왕이 제공하기로 했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전쟁을 선포하였다.  사실 그의 원군이라고 해봐야 시기상으로나 규모상으로나 기대할 바가 못 되었다.  베네치아는 우르비노 공의 지휘 하에 자국군을 보냈고, 교황군은 귀도 랑고니와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끌고 있었다.  비텔로 비텔리는 피렌체 군을 맡았고, (거의 절대적인 전권을 부여받은0 총감독관 격의 자리에는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가 있었다.  6월말, 이 대군세는 로디에 나타났고 그곳은 곧 점령되었다.  그리고는 밀라노 아래에다 진을 쳤다.  그들은 당시 그곳의 형편이 좋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쉽사리 공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하루 낮 하룻밤을 머문 뒤, 우리비노 공은 총감독관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군대를 빼내 가버리는 치욕적인 행동을 하였고, 이 때문에 그와 총감독관 사이에는 심한 말들이 오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우리비노 공의 행동과 그로 인한 언쟁은 장차 닥쳐올 비극적 사건들의 전조가 될 것이었다.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를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에서 보루를 설계하고 직무에 관한 편지를 쓰는 데 몰두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사실 전기 작가들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난국에 처했을 때 항상 그랬듯이 그는 첫 군사 이동 속에서 (행운의 동맹군(그렇게 부르도록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불운의 동맹군) 진영에 와 있었던 것이다.  8인집행위원회가 그 앞으로 발급한 신임장이나 허가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코르토나의 추기경에 의해 보내진 것인지 혹은 그의 총감독관 친구가 그를 휘하에 두고자 한 것인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사실 귀차르디니는 수시로 그를 불러 전쟁에 관련된 자신의 지시 사항들을 이곳저곳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귀차르디니의 편지 한 통을 통해 그가 무슨 일로 그곳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 마키아벨 리가 와 있네.  원래 그는 민병대를 재조직하려고 왔지만, 사람들의 피폐해진 상황을 보고는 엄두가 나지 않는가보네.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으니, 다만 인간의 힘 없음을 웃어넘길 수밖에.)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바대로, 이는 마치 한 폭의 초상화를 보는 듯한 일필휘지의 묘사이다.  그가 언제 롬마르디아에 도착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성벽관리위원회 기록부는 6월 8일에서 끊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한 편지 단편에 의하면, 7월 13일에 자신이 (전장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후 사정으로 보아 그는 이미 앞서 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장은 마리냐노에 있었고, 며칠 뒤인 7월 22일에는 밀라노 근처 바디아 아 카사레토로 옮아갔다.  하지만 대군은 아무 하는 일 없이 그저 롬바르디아의 수도격인 그곳의 멋있는 첨탑들을 바라만 보면서 오랫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동안 마키아벨리는 군영을 배회하면서 그곳의 일들을 보고 들으며 군사 문제에 관한 자신의 단상들을 메모하거나, 혹은 (힘과 용맹에서 이 군영의 누구도 당할 자 없어 모두가 두려워하는) 조반니 데 미디치와 귀차르디니 사이에서 이리저리 시간을 쪼개어 그들과 만나고 있었다.  조반니는 거친 성격이었으나, 예컨대 아레티노와 같이 영민하고 재치 있는 사람들과 얘기하기를 즐겼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에 못지않게 당돌하고 재치가 넘치는 데다가 조반니에게는 스스로가 지닌 유일한 기술인 전쟁술에 관한 유명한 책까지 슨 인물이었으므로, 그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리 만무하였다.  그들간의 대화가 그저 담소 정도였다면, 그 마상 시합을 이끈 쪽은 분명히 마키아벨리였다.  화제가 군사 문제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조반니와 당당히 겨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어느 날 이 위대한 장군은 마키아벨리에게 그가 (전술론)에서 훌륭히 기술해 놓은 방식으로 삼천 명의 병사들을 한번 직접 지휘해 보라며 도발적으로 나왔다.  무릇 남을 속이려다가 자기가 속는 법.  마키아벨리는 두 시간 동안이나 몸이 달아서 이리저리 고함을 쳐댔으나, 도무지 제대로 대오를 갖추게 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병사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렸다.  마키아벨리도 땀은 났으나 긴장하여 오히려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조반니가 마침내 싱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자 이제 골치 아픈 일은 그만두고 식사나 하러 갑시다.)   그는 그리고는 드럼 소리에 맞추어 순식간에 군대를 여러 거지 진행으로 만들어 보였다.  그것은 이론가에 대한 실천가의 빛나고도 잔인한 복수인 셈이었다.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 니콜로는 니콜로대로 익살맞고 질척거리는 이야기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의 앙갚음을 하였다.  그곳에서 마테오 반델로라는 조반니의 손님이 또 한 사람 있었는데, 그도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미식가일 뿐 아니라 음담패설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느 유명한 도메니코 수도회 총장의 조카이면서 그 자신이 그 수도사이기도 한 그는 우리에게 그 음담을 전해 주었다.  비록 이야기한 사람의 재치와 스타일까지 전해 주지 못한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당분간 전투는 롬바르디아 평원의 땡볕 아래서 멈추어 서 있는 상태였다.  마키아벨리는 그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틀림없이 피렌체의 부드러운 언득과 유괘한 친구패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바르베라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녀의 편지가 끊기자 상심하여 포르나차이오에게 편지로 그녀의 안부를 물엇다.  그러자 고맙게도 포르나차이오는 바르베라에게 달려가 (욕을 한 무더기) 퍼부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녀로부터 자신이 피렌체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답을 못했다는 사과와 함께, 멀리 있는 특별한 친구에 대한 사랑의 서약과, 매주 편지하겠다는 약속과, 그가 하루바삐 피렌체로 돌아왔으면 하는 소망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가 그곳에 있을 때면 (그녀는 마치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잠드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를 바쁘게 만들고 그를 마음르로나마 피렌체로 돌아오도록 한 친구들과의 편지 교환이 있었다.  베토리는 그가 남긴 장문의 편지들 중 일부를 그에게 보냈는데, 자신의 (이탈리아사 대요 Sommario della storia d'Italia)에서처럼 사건들을 힘찬 필치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그는 최근 들어 황제의 운세가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는 것, 이탈리아와 교황의 행로는 이와 반대로 불운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교황은 최근에 시에나 정권을 무력으로 바꾸어놓으려 하다가, 보병 오천과 기병 수백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군대가 불과 사백 명에 지나지 않는 시에나 군에 의해 패퇴하는 꼴을 보기까지 하였다.  재치있는 생각들로 가득 찬 이러한 편지들을 읽고는 똑같이 재치 있는 답장을 쓰는 것이야말로 그토록 오랫동안 전장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가장 즐거운 일들 중 하나였다.  그의 답장은 군대와 장군들의 상황에 관해 많은 것을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와 정치상의 사건들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을 재기발랄한 문체로 써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피렌체의 친구들은 목을 빼고 편지를 기다렸다.  예컨데 베토리는 답장을 받자마자(그는 7월 31일자로 편지 한 통을 받았으며, 그러보터 8월 24일 사이에 적어도 세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으나 지금은 모두 유실되고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을 이폴리토 데 메디치에게 보내 읽도록 하거나, (그것이 전쟁에 무언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는) 로마의 필리포 스트로치에게 보내 교황이 보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편지들을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칭찬하였다.  오직 한 가지, 나폴리 왕국을 전쟁에 끌어들이자는 제안만이 소심한 클레멘테에게는 못마땅했을 뿐이었다.  니콜로는 결코 이 오랜 지기들과의 편지에 열중하느라 자신의 더 젊은 친구들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우리는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를 보게 된다.  그는 이제 곧 자신이 봉직할 두 공화국에서 드높은 명예를 얻게 될 것이었고, 그것은 다름아닌 피렌체 공화국과 문필 공화국이었다.
  바로 그때쯤, 동맹군의 일단은 크레모나를 죄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을 공격하는 기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9월 10일 귀차르디니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인 마키아벨리에게 신임장과 훈령을 주어 그곳으로 보냈다.  그가 할 일은 그곳 상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과연 무슨 희망이라도 보이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보기에 신속한 승리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면, 베네치아 군 지휘관인 페사로를 설득하여 포위를 풀고 제노바를 공략하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갔고 보았다.  페사로는 물론 우르비노 공과도 일을 논의했는데, 그라는 작자는 적 앞에서 소심하고 굼뜬 것만큼이나 이야기를 나눔에서는 생기 있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마키아벨리는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총감독관 앞으로 수많은 편지를 썼다.  간단히 말해서, 늘 그렇듯이 그는 힘 닿는 대로 일을 해나갔다.  9월 14일 저녁, 그는 밀라노 성벽 아래의 아군 진영으로 돌아왔고, 장군들뿐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신속한 승리를 얻을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었다.
  사실 실제적인 접수는 그달 말로 늦추어지기는 했지만, 그 도시가 함락된 때는 23일이었다.  그러나 동맹군 진영에서 이 희소식을 자축하고 있을 무렵, 로마에서 다른 최악의 소식이 전해졌고 이는 환호를 일시에 쓰라림과 비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어리석은 교황 클레멘테는 제국의 장군이자 대리인으로서 자칭 발렌티노의 사도인 돈 우고 다몬카다와 말을 맞춘 콜론나파에 속아서, 그가 제의한 기만적인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꼬임에 빠진 교황은 자신이 주변을 지키던 소수의 경비병들마저 해산시켰다.  9월 19일 밤, 그는 콜론나파의 군대에 의해 공격을 당했다.  그는 미처 몸을 숨길 시간도 없이 붙잡혀 가스텔 산탄젤로에 갖혀버렸고, 보르고 Borghi(단수는 Borgo. 도시 성벽 밖의 전원 지역 혹은 이전에 성벽 밖에 있었던 거리를 말함-옮긴이)와 교황궁과 심지어는 산 피에트로 교회까지도 처참하게 약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라고 읊은 마키아벨리의 예언은 놀라울 정도로 적중한 셈이다.  하지만 극적인 이 모든 사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는 단지 비극 마지막 장면의 예고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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