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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avelli's peace

육십 평생에

by FraisGout 2020. 8. 20.

  (기도하라, 유대의 왕이여! 그대에게 사면을 내리노라.)  그 사악한 돈 우고와 에스파냐의 장군들이 공손하지만 완강하게 그 div에서 무릎을 꿇고는 자신들이 저지른 신성 모독적인 무도 행위를 사면해 달라고 요구하자, 클레멘테 7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피렌체식 조소 외엔 메디치 교황이 그 정복자들에게 달리 되갚아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라서 그는 넉 달 간의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동안 롬바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콜론나파를 사면하고 협정을 준수한다는 표시로 필리포 스트로치를 인질로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트로치는 교황의 인척일 뿐 아니라 몸값이 무려 백만 두카토를 넘는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조약은 체격되었고, 이제 그가 이를 지키려고 하는 한, 그의 편에서 보자면 전쟁은 사실상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마키아벨리의 군 병영 생활도 끝났다.
  그토록 어리석은 행동이 가져온 그 엄청난 재앙에 귀차르디니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는 교섭이 아니라 강요에 의한 조약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항의도 하고, 이러저러한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끌어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군대를 피아첸치로 철수시키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고, 10월 9일에는 그 자신도 그곳으로 뒤따라갔다.  연하의 친구인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에게 장문의 편지 한 통을 썼는데, 여기에는 그 스스로 사태의 요점을 간추려두자는 의미도 일부 담겨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일찍이 빌라리가 공식 보고서라고 오인하였던 바로 그 편지였다.  여기서 그는 전쟁 과정에서 장군들이나 교황에 의해 저질러진 실수들에서부터 (그렇게 로마에 머물다 마치 어린애처럼 잡혀버린) 마지막 실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테는 (어린애들의 림보에) 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전부터 정말 진심으로 그를 그곳에 보내고 싶어했음에 틀림없다.
  휴전중인 상태에서 피아첸차에는 마키아벨 리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동안 비텔 리가 이끄는 피렌체 군은 로마로 향했다.  늦었지만 우선은 교황의 신변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교황이 그와 맺은 협정을 무시하기로 작정하는 대로, 그 신성 모두의 무례함을 안겨준 장본인인 폼페오 콜론나를 추기경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후, 그 가문의 영지를 칼과 불로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피렌체로 돌아갈 시점에 마키아벨리는 야코포 살비아티에게 자신은 군대와 동행했으면 한다는 편지를 썼다.  그것은 분명히 교황 사절의 자격으로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군대가 밀라노 인근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이미 그의 위치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강한 추측을 낳게 한다.  어쨌든 친구를 추천하는 귀차르디니의 편지를 받은 체사레 콜롬보가 이 문제를 교황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그에게 오라고 편지하라.  나도 그편이 좋아)라고 답하였고, 살비아티에게도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교황의 윤허가 기다리고 있는 피렌체로 곧장 가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일로 여기저기를 (둘러오라는) 귀차르디니의 부탁을 받고 있었으므로, 먼저 보르고 아 산 돈니노에 들러서 아마도 당시 휴전으로 크레모나를 떠나고 있던 에스파냐 군과 접촉하고는 이어서 모데나로 향한 듯하다.  그는 그곳에서 이틀 동안 머물려, 분노로 가득한 총감독관과 이를 감지하고는 심란해 있던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을 친구의 입장에서 위로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 하나는 그 자신 역시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귀도 랑고니 백작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심한 질책을 받았던 필리포 데 네를리 총독이었다.  네를 리가 불쑥 (도대체 내가 잘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라고 말을 꺼내자, 니콜로는 익살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재빨리 이렇게 말을 받았다.  (총독 각하, 그렇게 놀라지 마십시오.  그건 각하의 잘못이 아니라 잘한 일을 한 사람도 잘된 일도 하나 없었던 올해의 잘못이니까요.  황제를 보십시오.  그는 금년 내내 자신의 편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최악의 행동이죠.  에스파냐 군도 우리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고, 우리 역시 이길 수 있었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지요.  교황은 교황대로 천 명의 군사보다 펜 한번 휘두르는 것이 자신을 더 잘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제대로 행동한 것은 오직 시에나 사람들뿐인데, 미쳐서 돌아가는 시대에는 정작 미친 자들이 낫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총독 각하, 실수하는 것보다 무언가 괜찮은 일을 하는 쪽이 오히려 더 불길한 징조일 수도 있답니다.)  이처럼 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데야 네를리도 웃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 랑고니가 끼어들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총감독관께서는 여전히 화가 나 있으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니콜로의 재바른 대답.  (아닐 겁니다.  이젠 더 이상 옆에 화나게 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결국 모든 분노의 감정은 한바탕 웃음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러한 웃음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을 법하다.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피렌체에 도착했으나, 교황이 자신에게 새 임무를 맡기도록 했다는 살비아티의 때 지난 편지를 보고 기뻐한 것도 잠시, 그가 막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출행을 취소하는 또 다른 편지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비텔리는 길을 재촉한 반면, 그는 여정을 너무 지체했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오직 귀차르디니의 즉석 위로밖에는 없었지만, 그로서는 잃은 것이 그리 많이는 않았다.  왜냐하면 (콜론나가의 초막에) 머문다고 무슨 괜찮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은 풀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교황을 위시하여 피렌체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눈에도 어느 정도 들게 되었기 때문에, 비록 돈과 명예에서 얻는 것에 비해 수고는 많겠지만 소소한 일거리들은 마키아벨리에게 끊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둘 모두를 필요로 했지만, 당분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만으로 만족하고자 하였다.  이제 막 그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던 (피렌체사)의 비극을 다시는 스스로 겪지 않을 것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그는 자질구레한 임무들을 맡고 있었고, 11월 30일에는 8인집행위원회의 명령으로 당시 모데나에 있었던 귀차르디니에게로 보내졌다.
  한편, 당시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던 프룬치베르크 휘하의 독일 (란치 군 Lanzi) (Lanzichenecco(=Landsknecht)의 준말로, 16, 7세기 독일 황제력 Land 출신 용병을 일컫는다.  Georg von Frundsberg가 그 지휘관이었다-옮긴이)은 베네치아 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알프스 고갯길을 지나 포 강의 도하 지점에 이르렀고, 우르비노 공이 그곳에서 어떻게든 그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운 형평이었다.  결국 모든 희망은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끄는 소수의 군대와 그의 용감무쌍한 기개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11월 25일, 그는 평소 하던 대로 장군으로서보다는 병사의 한 사람으로서 싸우던 도중,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귀차르디니는 곧 이것이 단지 조반니 개인에 대해서뿐 아니라 전황 전체에 치명적 타격이 되리라는 점을 간파하였다.  이처럼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그 용감한 전사가 상처의 고통과 그것을 치료할 의사만으로 싸우고 있는 동안, 란치 군은 이탈리아의 심장을 향해 창 끝을 겨누면서 포 강을 건넜다.  그때가 11월 28일이었고, 30일에는 조반니데 메디치가 죽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같은 날 훈령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 내용은 별 것 없었고, 단지 (그러한 위치의) 사절에게 (형식적으로) 주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행간을 잘 읽어보면 피렌체 정부는 당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니콜로의 임무는 총감독관에게로 가서 도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는 이미 귀차르디니가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피렌체 시민들이 많은 돈을 주겟다는 제의보다는 조약의 체결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협상 내용과 시기는 각하의 생각에 일임하겠다)는 말을 전할 예정이었다.  사절 임무치고는 참 희한한 것이 아닌가!
  서둘러 말을 달리는 것이 이제는 괴로울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펜니노 산맥의 세찬 겨울 바람을 헤치고 밤낮으로 말을 몰아 12월 2일 아침 일직 모데나에 도착하였다.  그는 즉시 총감독관을 만나 현안들을 상의한 뒤에,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보낸 당일자 편지에서 그 내용과 의견들을 수합하여 보고하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은 한 점도 더하지 않고, 오직 귀차르디니의 말만을 의도적으로 옮겨 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일은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특이한 경우이다.  간단히 말해서 결론은 이러하였다.  즉 적군의 공격이 임박한 상황에서 피렌체인들에게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육칠천 명 정도의 교회 군 보병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설사 조약을 맺는다 해도, 그것은 전장에서가 아니라 로마나 피렌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엇다.  이 지루한 편지의 말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위원님들께서는 조반니 님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은 이미 늦은 것이었지만, 무릇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을 그냥 눌러놓고 있기란 어려운 법인 것이다.
  그는 다음날 8인집행위원회에다 새로운 사실을 약간 더한 다른 편지 한 통을 써 보냈다.  페라라 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자신이 황제 편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란치 군은 피아첸차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총감독관은 전쟁의 방향이 그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파르마로 갔다는 것, 그래서 그 자신 역시 내일 귀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가 이 편지를 쓴 때는 3일이었지만, (쓸데없이 힘을 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5일까지 기다렸다가 그날 느긋하게 말에 올랐다.  그는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1527년 2월 3일, 유난히도 눈비가 잦던 그 해 겨울도 한창일 무렵, 8인집행위원회의 지시로 그는 다시 한번 말을 타고 귀차르디니에게 갔다.  밀라노에서 나온 에스파냐 군은 이미 트레비아 강 쪽으로 넘어간 독일의 란치 군을 따라 포 강을 건넜다.  제국 군의 목표가 피렌체를 약탈하고, 로마마저도 약탈과 복수의 제물로 삼겠다는 것임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이제 피렌체인들은 얼마 안 되는 교황의 보병 부대와 그의 피렌체인 총감독관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므로, 마키아벨리는 도시 사람들의 생각과 소망을 총감독관에게 생생히 설명해 주어야만 했다.  이제 몸도 늙고 지친 상태였고 마음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갔다.  밀라노 부근의 진지에 도착할 무렵, 그는 당시 자신이 몇 통의 공한을 긁적이며 작업하고 있던 공책을 이번으로 영원히 덮어버렸다.  이후 그는 (피렌체사)를 다시는 펴보지 않았다.
  이번에 그는 좀더 천천히 길을 갔고, 위원회 쪽에는 (적군으로 인한 장애물들) 때문에 늦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는 7일에야 파르마에 닿았는데, 그곳에서는 8인집행위원회가 그의 파견을 결정하기 며칠 전 이미 코르토나 추기경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있었던 귀차르디니가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전령을 보내 빨리 오라고 재촉하기까지 하였다.  총감독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도시의 소망들을 그로부터 듣자는 것도, 또는 동맹으로부터 얻을 만한 어떤 원조의 가능성을 그에게 알리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바는 공화국 사절의 힘을 빌려 ((우르비노) 공작과 (살루초) 후작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설득함으로써) 그들로부터 더 많은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바로 그날로 마키아벨리를 공작에게 데리고 갔고, 그는 최선을 다해 (강력하고도 신속한 도움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어떤 결정을 내림에 있어 사태를 관망하는 성품인 공작은, 살루초로 하여금 전위 부대를 거느리고 토스카나로 들어가게 하고 반면 자신은 주력을 유지하며 적의 배후에 남겠다고 우겼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날 다시 만나 (모든 것을 문서로 작성하는 데) 합의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사항을 같은 날 8인집행위원회에 알렸다.  문서로 작성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즉 만일 적군이 폰티레몰리를 경유하여 토스카나 쪽으로 온다면, 프랑스 군, 베네치아 군, 교황 군 전체가 적을 앞지를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볼로냐로 향한다면, 토스카나에는 살루초 후작만 입성하고 공작은 뒤처지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으며, 뒤에는 후미에 붙어서 역시 전혀 움직이려 들지를 않았다.  2월 11일, 마키아벨리는 8인집행위원회에다 새로이 편지를 써서 적군의 동향이 오리무중임을 전한 후 이렇게 말을 맺었다.  (저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길이 어느 쪽을 향하는가를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부의 예상대로 방향을 잡는다면, 저는 그에 대한 처방의 종류와 방법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삼사 일 더 머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거의 석 달을 지체하였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물길이 에밀리아의 평원 지대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14일자로 8인집행위원회에다가 편지를 썼던 파르마에서부터 적군과 대치하면서 교황 군을 따라오다가, 스칸이아노와 사수올로를 거쳐 볼로냐에 도착하였다.  그때가 27일이었는데, 그는 그로부터 한 달 이상을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란치 군과 에스파냐 군은 처음에는 식량과 돈이 떨어져서, 뒤에는 나쁜 날씨 때문에 지체되어 지금은 온통 물과 눈으로 질퍽거리는 대평원에서 꼼짝않고 있었다.  우르비노 공은 그처럼 곤경에 빠져 있는 적군을 쉽사리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싸우려들지 않았으므로, 마키아벨리나 귀차르디니나 편지에서 보고할 거리라고는 적군이 기아와 악천후로 곤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볼로냐에서는 눈이 (도시 어디에서나 키 높이만큼이나 많이)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의 교황 사절은 교황의 사촌인 인노첸초 치보 추기경이었는데, 그는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유하는 편이었다.  이것을 보면, 그에게는 리구리아 사교 쪽보다는 대 로렌초의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추기경은 곧 마키아벨리에게 마음이 끌렸고, 그란 인물은 자신에게 닥쳤던 그 유명한 곤경들보다 이같이 따뜻한 호의에 훨씬 더 힘을 얻는 성품이었다.  오 가엾은 마키아벨리여!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그 스스로를 알지만, 자신이 오랫동안 사람과 운명에 의해 망각되어 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짓밟히고 잊혀져 오는 가운데, 그는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평범성을 잣대로 스스로의 비범성을 재곤 했다.  그는 스스로가 더 위대한 일에 소용이 닿은다고 느꼈지만, 동시에 영원히 하찮은 일에만 갇혀 있는 자신이 모습을 보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보여준 자신의 저작들조차도 그로 하여금 인간에 대해 당연히 가져야 할 존경심을 빼앗아가 버린 잔인함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는 한때 인간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이렇게 내내 그 자신을 갉아먹는 그러한 고질병을 앓고 있던 차에, 추기경이 보여준 각별한 마음 씀씀이는 마치 환자가 물불 가리지 않고 손에 넣으려 하는 특효약과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풍성한 볼로냐에서 이 치료약과 추기경의 아낀 없는 성찬 덕분에 그의 기력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그가 볼로냐에서 쓴 편지들에는 이처럼 짧지만 그래도 좋았던 시절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다.  우선 그것에는 생기가 넘쳐나고 있으며, 이전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번뜩이는 문체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과 하늘의 도움에 기대고자 하는 바람도 더 크다.  (만일 페라라 공이 머릿속에 약간의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고 게다가 이 같은 날씨가 이틀만 더 지속되어 준다면, 그는 앉아 잠깐 눈을 붙이는 사이에 이 전쟁을 끝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날씨는 여전했으나, 그 자신 이탈리아 사람임에도 언제나 황제편에 붙어 이탈리아를 제물로 삼았던 공작의 머릿속에는 아직 아무 생각도 없었다.  더 나쁜 것은 교황조차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바로 그 시간에 그는 평소의 바보 같은 짓을 또다시 저지르기까지 하였다.  그는 적과 새 협정을 맺음으로써 여러 가지로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반면 혼란에 빠져 있었던 제국 군은 프룬츠베르크가 죽은 후 부르봉의 지휘 아래 다시금 움직임을 재개하고 있었다.
  3월 그믐날, 교회 군이 볼로냐를 나와 적군의 앞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사이, 마키아벨리는 미리 숙영지를 마련해 놓으려고 이몰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슨 편지에서, 정부는 군대를 멈추는 대가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하는 부르봉의 협박에 켤코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당신들과 그들 사이에 여전히 알프스가 가로지르고 있고 당신들의 군대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데도 삼 일 내에 십만 피오리노를 내놓고 이어 열흘 안에 십오만 피오리노를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그런 유의 적과 무슨 희망으로 협상을 논한다는 것입니까?  알프스에서 내려오게 되면, 그들을 첫 번째로 당신들의 재산 모두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단지 당신들을 약탈하고자 하는 일념뿐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물론 그렇지 않으면 좋으련만!)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악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만 그것을 풀어버리는 것 외엔 아무런 치유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만 한다면, 그들이 당신들의 성벽 아래에까지 왔을 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알프스에서 행동에 옮기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탈리아를 구원한다든지, 혹은 어떤 망상적인 정치적 계획을 꾸미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야흐로 잔혹한 에스파냐 군과 야만적인 란치 군의 위협에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는 자신의 조국 피렌체를 위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더욱 살가운 애정이었다.  저 산들 너머엔 보호해야 할 성벽들이 있고, 그 성벽 안에는 자신의 가족과 아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장남인 베르나르도가 있었고, 아직은 어려서 그를 실망시키지 않고 여전히 어떤 환상을 품게 만드는 더 어리고 귀여운 이이들이 있었다.  귀도, 피에로, 바치나, 그리고 아직 갓난아기인 토토.
  니콜로는 베르나르도를 성벽관리위원회에서 일하게 했지만, 그가 자신의 족적을 뒤쫓아오리라는 지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재능도 공부도 일천한 데다 공부에 대한 열의도 없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도는 이제 나이가 찼기 때문에, 적어도 시골집 정도는 돌보면서 아버지가 멀리 출타중이거나 장작 패는 일 아닌 다른 문제를 생각해야 될 때면 그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해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아들에게 두 번 편지를 보냈으나 전혀 답이 없었다.  그는 또 차남인 로도비코의 거친 성격 때문에 그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로도비코의 이러한 성격은 심지어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나고 있으며, 일찍이 8인감찰위원회의 눈에까지 띄었을 정도였다.  지금 그는 두 번째로 레반테 지방으로 가 장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직은 소년 티를 못 벗은 귀도와 피에로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제일 좋아한 아이는 귀도였을 텐데, 그는 조용하고 학구적인 성품이었지만 몸이 허약한 편이었다.  여러 자식들 가운데서도 오직 그만이 언젠가는 아버지가 어던 사람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아이였던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늙고 쓸쓸한 가슴도 그 생각 덕분에 한층 따뜻해졌으리라.
  알프스와 성벽에 관한 편지를 정무궁에 보낸 후인 4월 초이튿날, 그가 애정 어린 편지 한 통을 쓴 것도 다름아닌 어린 귀도에게였다.  (신께서 너와 나에게 긴 목숨을 허용하신다면, 네가 스스로의 몫을 할 준비가 되었을 때 난 너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을.)  그 어른 어린이는 아들에게 새로 사귄 치보 추기경과의 친분이 (너무 두터워 내 자신도 놀랄 지경)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추기경이 최근 그에게 베풀어준 명예를 덕분에, 그는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에게 진지하고도 애정 어린 충고를 해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  (네가 더 이상 몸 아픈 탓을 안해도 된다면, 문학과 음악을 배우는 수고를 아끼지 말거라.  나의 이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도 이렇게 맣은 명예를 누리는 모습을 너는 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 아들아, 네가 날 기쁘게 하고 너 자신도 이득과 명예를 누릴 양이면, 부디 잘 처신하고 열심히 배우거라.  우선 네가 네 스스로를 도와야 남도 너를 돕는 법이란다.)
  그러나 진지한 훈계 뒤에 공상 같은 이야기가 따르는 것도 역시 이 귀여운 아들과 함께 할 때이다.  그 내용은 어린 아들이 제일 좋아하던 작은 노새의 괴상한 행동에 관한 것이다.  (작은 노새 이 녀석은 미친 놈처럼 보이지만 다른 광인들과는 달리 다루어야만 된단다.  왜냐하면 다른 광인들은 묶여 있지만, 난 네가 그 녀석을 풀어주었으면 하기 때문이야.  노새를 반젤로에게 데리고 가.  그리고 그 녀석을 몬테풀리아노로 끌고 가서 마구며 재갈이며 다 풀어버리고 어디든지 그 녀석이 먹을 것을 얻고 그 미친 짓에서 벗어날 만한 곳으로 가도록 놔두라고 그에게 말하렴.  시골은 널따랗고, 이 짐승은 조그마니까 말이야...)  여기서 이 자상한 아버지는 몬테풀리아노의 널따란 숲속을 힝힝대며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이 조그만 노새를 그려 보임으로서, 어린 아들로 하여금 공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또한 독자들은 니콜로가 어린 아들에게도 역시 다른 사람들이 흉내내지 못할 만큼의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갑자기 그의 생각은 다시금 현재의 위험에 미치고, 불현 듯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오른다.  (마리에타 부인께 안부 전해 주렴.  그리고 내가 그 동안 내내,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이곳을 떠나고 싶어한다고 말해 다오.  내가 이때처럼 피렌체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는 말도 함께.  하지만 당분간은 여기 머물러 있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구나.  이곳에 어떤 위험이 닥치기 전에 돌아갈 것이라는 식으로 무엇이든 네 엄마가 듣고 기운이 날 만한 말만 하거라.  바치나, 피에로, 그리고 걔가 그곳에 있다면 토토에게도 뽀뽀해 주어라.  토토의 눈은 좀 괜찮아졌는지 어쩐지를 들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즐겁게 지내되 시간은 최대한 아끼거라...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사악함으로 악명 높고 냉소적이며 신을 부정하는 자로 알려진 그 사람은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어떤 위험)이 닥치기 전에 집에 돌아가 있겠다는 그의 약속은 빈말이 아니었다.  또 한 명의 위대한 피렌체인인 총감독관은 이미 오래 전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그와 상의하였고 또 그렇게 하기로 최근의 경계 근무중에 결정한 바 있었다.  즉 (작은 돈을 들이고 방어할 수 있을 때) 로마냐 지역을 방어하고, 그 이후로는 (최대한으로 이탈리아 군과 돈을 모아서 (...) 어떻게든 피렌체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토리에게 보낸 4월 5일자 편지에서 마키아벨리가 썼듯이, 이를 위해서는 적군보다 먼저 트스카나로 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반면 그 느려빠진 공작은 자신의 바람대로 후미에 처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교황의 우유부단함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이는 적군의 결단력이나 베네치아의 보잘것없고 의심스러운 기백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었다.  클레멘테는 전쟁을 계속할 돈도 없이, 그리고 마법사 시몬의 처방전은 훨씬 뒤에 아무런 이득도 없이 다만 비난만 받게 될 운명을 위해 간직한 채 여전히 쓰지 않으려 하면서(여기서 마법사 시몬이란 성경의 (Simon Magus)를 말한다.  그는 기원후 1세기경에 살았던 사마리아 출신 마법사로, 돈으로 성령을 주는 힘을 사려고 한 일로 비난받았던 인물이다.  성직 매매(죄)를 뜻하는 (시모니 simony)라는 용어가 나온 것도 바로 이러한 일화에서이다(사도행전 8장 9-20절).  따라서 본문 중의 (마법사 시몬의 처방전)을 쓴다는 말은 곧 뇌물을 써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려 한다는 의미가 된다-옮긴이), 매일같이 휴전에 대한 유치한 희망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가 최근에 겪었던 일들도 그에게는 전혀 교훈을 주지 못했다.  황제의 이름을 들먹이며 휴전을 주선해 왔던 에스파냐인 부왕은 황제군의 지휘관인 부르봉에게 진군을 멈추라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교황은 그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부르봉은 마치 아무것도 들은 바 없는 것처럼 진군을 게속했다.  부왕은 그에게 사절을 보냈고, 이어 그 스스로가 그를 만나 길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  클레멘테는 기대감 속에서 안도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르봉은 여전히 다가왔고, 교황이 그들을 패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음을 안 동맹국들은 더욱더 그로부터 멀어져 갔다.
  귀차르디니는 만약 제국 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공포로 변할 분이라며 그러한 조약 뒤에 숨어 있는 위험드레 대해 로마로 피렌체로 편지를 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같은 내용을 8인집행위원회는 물론, 피렌체 정부 내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던 베토리에게 써 보냈지만 허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바로 앞서 몇 마디 인용했던 4월 5일자 편지는 포를리에서 씌어진 것인데, 그는 귀차르디니 및 그들의통제 아래 남은 소수의 교황 군과 함께 그곳에 가 있었다.  그들은 뒤에 남겨놓고 온 도시들을 수비하기 위해 행군 도중 여기저기에 일단의 군병을 배치해 두었다.  그는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가는 4월 11일자 편지에서 (우리는 (...) 파르마에서부터 군사들을 떼어내기 시작하여, 여기 포를리에 오는 동안 조금씩조금씩 인원을 줄여나갔습니다)라고 썼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상황은 전쟁을 재개하든지 아니면 평화 조약을 맺든지 양단간에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와 있습니다.)
  평화.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이번처럼 로마에서 체결하고 롬바르디아에서는 지키지 않는 그런 의심스럽고 기만적인) 조약이 아니라 확고한 평화였다(이틀 뒤, 그는 또 하나의 말벗인 베토리와의 대화중에 그렇게 말했다), 피렌체에서는 조약이 이제 거의 성사되었다는 편지들을 게속 보내왔다.  왜냐하면, 만일 어차피 전쟁이 있어야 한다면, 부르봉에게 조약의 대가로서 내주어야 할 첫 분할금 육만 두카토를 병사들의 급료로 쓰는 편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만약 계략에 빠져 조약을 맺음으로써, 그 대가로나 전쟁을 위해서나 양자 모두에 돈이 들어가게 되어 그 어느 쪽에도 돈을 쓰지 못하는 지경이 된다면, 이는 결국 우리만 손해를 보고 적은 이롭게 하는 결과에 이를 것이네.  적군은 오직 전쟁만을 생각하며 그쪽으로 진군하고 있을 뿐이고, 우리를 전쟁과 조약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라네.)
  바로 그 무렵,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같은 내용을, 때로는 거의 같은 말을 하면서 로마와 피렌체에 편지를 써 보내고 있었다.  수 개월에 걸쳐 함께 한 야영 생활과 그로부터 만들어진 공통된 생각들이 위대한 이 두 명의 정치가들 사이의 간격을 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귀족과 평시민, 실천가와 이론가, 산문과 시 사이의 모든 차이점이 사라져버렸다.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를 더 높이 보게 되었고, 마키아벨리는 귀차르디니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16일, 협상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에스파냐의 부왕은 부르봉의 군대를 정지시키고 조약을 준수하게 만들고자 피렌체로 왔다.  그러나 부르봉은 이에 개의치 않고 갈레아타 로를 따라 행군을 계속하였다.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8인집행위원회에다 이렇게 썼다.  (결코 이보다 더 혼란스럽고 위험한 사태는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저에게 가장 위험천마한 점으로 보이는 것은 토스카나에 적은 있을 망정 정작 군대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저는 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제 휘하의 군대 모두를 피렌체 족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엿습니다...)
  그것은 마키아벨 리가 원하던 결정이었고, 그렇게 하는 데는 아마도 그의 조언이 작용했을 것이다.  같은 날 귀차르디니와 같은 어조로 베토리에게 쓴 편지에서, 감정이 북받친 그 위대한 인물을 갑자기 이렇게 말문을 터뜨린다.  (나는 메쎄르 프라네스코 귀차르디니를 사랑하네.  그리고 나의 조국을 내 영혼보다도 더 사랑하네.  내 육십 평생의 경험을 두고 자네에게 감히 말하네만,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은 일찍이 없었다네.  평화는 필요하지만 전쟁을 그만둘 수는 없고, 게다가 우리의 군주는 평화나 전쟁 어느 쪽을 위해서든 필요한 일을 하기가 힘든 분이 아닌가.)  그 군주란 물론 가엾은 클레멘테였다.  그는 평소의 우유부단함 속에서 스스로 군주가 될 것인지 교황이 될 것인지를 아직 결정치 못하고 있었다.
  (육십 평생)이라니!  그는 아직 그만큼 나이를 먹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나이를 더한 것은 단지 자신의 말에 귄위를 세우기 위해서, 또는 그냥 별 뜻 없이 숫자를 부풀리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짊어져 온 수많은 세월과, 자신이 감내해온 모든 노고와, 자신이 겪어온 모든 좌절감과 그리고 위대한 인물이며 위대한 시인들을 말없는 가운데 좌절케 하는 모든 사소한 불행들까지, 문든 그 모든 것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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