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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avelli's peace

결말

by FraisGout 2020. 8. 20.

  육십 세 가량의 나이에, 머리는 기울어졌고 얼굴은 심적, 정신적 고뇌로 찌들린, 지치고 불행해 보이는 한 가엾은 남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라고 알려져 있는 피렌체 소재 채색 테라코타 흉상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니다.  지치고 고뇌에 찬 얼굴 아래로 예리하면서도 재기 어린 조소를 날리는 그 애수에 찬 표정은 바로 그의 특징 그대로이다.  만약 이 초상이 그의 것이라면, 어떠한 작가의 글도 마키아벨리의 비극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설사 그의 모습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그의 생애와 나의 책이 이르른 바로 이 시점에서 내가 상상한 그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그의 서간집을 읽을 때, 특히 그가 마지막 순간에 쓴 편지들을 읽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음속으로 이 고통스런 모습을, 삶의 활력과 드넓은 포부로 가득한 그를 보여주는 다른 모습과 함께 떠올리게 된다.  감옥에 갇혀서 팔다리는 고문으로 뒤틀린 채 그래도 농담과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인물.  바로 그러한 미소로 생애 내내 자신을 모른체한 군주들의 부당한 행동과 동료들의 무관시을 감내했던 인물.  그가 같자기 웃을을 잃고 스스로를 내팽겨쳤다.  심지어는 바르베라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의 (참회 권유)는 밀라노의 군 막사에서 돌아온 뒤인 바로 이 시기쯤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의 편지에서나 얼굴에서나 마찬가지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그 글 말미의 다음과 같은 페트라르카 풍 시구에 담긴 고원한 깨달음이 아닐지.
  이제 분명히 알겠네.
  세상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한바탕 잛은 꿈일 뿐이라는 것을.
  한편, 당시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그 끔찍한 전쟁이었다.  적군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고, 동맹군 역시 그러하였다.  총가독관에 의해 등을 떠밀린 그들은 이미 피렌체의 방어를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먼저 귀도 랑고니 백작의 군대가 왔고, 그 뒤를 이어 조반니 데 메디치 휘하에 있었던 보병들과 카이아초 백작의 보병 및 기병대가 차례로 도착하였다.  마지막으로 그 느려빠진 우르비노 공조차도 피렌체인들이 산 레오를 탈환한 데 자극받아 행국 속도를 높여 이동을 개시하였다.  18일 마키아벨리는 귀차르디니와 살루초 후작의 프랑스 군을 따라 브리시겔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베토리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어린 귀도가 17일에 포를리에서 보낸 짤막한 편지를 받았던 것도 바로 그곳에서였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귀도는 아버지가 돌아올 때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Metamorphoseos) 첫 권을 암송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약속하면서, 공부에 진전이 있음을 자랑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편지들만으로도 (그중 많은 수가 kan런 흔적도 없이 유실되어 버린 상태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니콜로가 그 불안의 와중에 가족에게 이례적일 만큼 자주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귀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나르도 앞으로 된 두 통의 편지를 언급하고 있는 외에도, 귀도의 17일자 편지 속에는 그가 마리에타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그것에 대한 답의 일부가 들어 있다.  군대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커다란 시련의 시간도 가까워졌다.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가족과 재산과 수확물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에 대한 오만 가지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골 농장들과 무방비 상태의 마을들은 언제나 군대의 첫 번째 희생물이었고, 더군다나 알베르가초는 큰길 가에 있었다.  따라서 수확물을 일부라도 도시 안으로 옮겨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혹시 도시가 포위되더라도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정무위원회에서 무슨 포고령이라도 내리게 되면 그것을 세금 조로 낼 수 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가재도구도 좋은 것들은 도시 안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근처의 성벽 도시 산 카쉬아노에 갖다놓아야만 했다.
  니콜로는 마치 자상한 가장처럼 편지를 통해 때로는 부탁하고 때로는 지시하기도 하면서, 시시콜콜 이러저러한 주의를 주었다.  가족들의 이수선하던 마음도 이제는 안정되었고, 그리하여 어린 귀도는 (우린 더 이상 란치 군에 대해 생각 않기로 했어요.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여기 게시기로 약속하셨으니까요)라고 썼다.  사실 그는 22일, 귀차르디니보다 하루 먼저 피렌체에 가 있었다.
  그가 보기에, 도시의 분위기는 매우 뒤숭숭했고 폭동의 기미까지 보일 정도였다.  메디치 가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커져 가고 있었고, 친정부파들조차 불만을 표시하는 상태였다.  벼릴 없이 평온한 시기에도 정국을 겨우 지탱해 나갈 정도로 무능한 데다 운조차 나쁜 코르토나 추기경의 정부가, 전쟁 비용으로 멀쩡하게 눈 뜨고 껍질가지 벗겨질 판에 사람들로부터 용인될 턱이 없었다.  귀차르디니는 곧 이렇게 예측하였다.  (설사 도시가 지켜진다 해도, 정부는 스스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이렇게 덧붙였다.  (이 자만심에 들뜬 코르토나는, (...)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하려들면서도 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최근 클레멘테는 그를 보좌케 하려고 피렌체 대주교인 리돌피 추기경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친분상으로나 인척 관계로나 현정부에 적대적인 유력 시민들과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옴으로서 그 결과는 교황의 의도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치보 추기경까지 파견되어 왔지만, 그는 원래 외국인이라 아무런 권위도 시민들과의 교감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메디치 가로서는 상황이 더 악화된 셈이었다.  불길한 조짐이 처음으로 감지된 때는 마키아벨리가 돌아오고 4일 후였다.  도시 근교에 병사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아군이었지만, 적군보다 더 고약한 것이, 절도와 방화와 부녀자 강간을 일삼고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러한 수비군을 도시 안으로 들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기백 있는 청년들은 군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코르토나는 그들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대면 어쩌나 두려워서 주저했지만, 리돌피와 다른 유력 시민들이 주장에 따라 마침내 4월 26일 군대의 시내 배치를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정무궁 광장에는 성급한 청년들로 득시글거렸고, 일부 병사들의 고압적인 자세 때문에 약간의 소요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코르토나, 리돌피, 치보 추기경들과 아직은 어린 이폴리토가 우르비노 공을 맞기 위해 말을 타고 나오자, 당장 메디치 가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즉각적으로 사방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었고, 일순간 정무궁은 그들로 꽉 메워졌다.  원로 명사들과 메디치파 사람들까지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현정부이지 평시민들의 정부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곤팔로니에레로서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의 형인 뤼지까지도 문 앞으로 나와 일부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안으로 들임으로써, 자신이 그들이 편이며 평시민들이 원하는 바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안에서는 이제 통제 불능 상태가 된 청년들이 정무위원들에게 위협과 구타를 가하며 메디치 가를 반역자로 선포하여 추방하고 소데리니 시대와 같이 평시민 정부로 복귀할 것과,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대종을 울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무궁에서 이러한 일들로 격론을 벌이고 있는 사이, 그 소식을 들은 추기경들은 황급히 피렌체로 방향을 돌려 관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동맹국 소속 장군들과 많은 수의 병사들도 함께 들어왔다.  궁 안의 사람들은 돌로 자신들을 지키려 하고 있었고, 궁 밖의 사람들은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정무궁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상당수의 피렌체 시민들이 살해당할 것이고, 나아가 도시가지도 약탈될 가능성이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나라의 안위를 염려한 리돌피 추기경과 메쎄르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페데리고 다 보촐로로 하여금 정무궁으로 들어가 협상해 보라고 간청하였다.  첫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총감독관과 함께 다시 들어가 관련자 전원의 사면을 약속하고 협상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추기경들과 우르비노 공이 서명하였다.
  피렌체의 역사가들이 (금요일의 봉기 il tumulto del venerdi라고 부르는 이 잛은 혁명기 동안 마키아벨 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이 마지막 시기에 총감독관 및 교황 군 진영에서 수행했던 역할과 친분이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귀차르디니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알려져 있다.  귀차르디니는 추기경들에 앞서 그 날 아침 일찍 우리비노 공을 맞으러 갔었고, 마키아벨리 역시 같이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럴 경우, 귀차르디니와 함께 피렌체로 되돌아왔을 그는 공격하는 쪽에 끼어 광장에 있었겠지만, 정작 마음은 정무궁 안의 방어하는 쪽에 가 있었을 법하다.  그 안에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와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를 비롯한 모든 친구들이 있었고, 또한 자유 피렌체 공화국이 있었다.
  한편, 부르봉은 아르노 계곡을 내려와 도시 가까이로 들어왔다.  하지만 피렌체가 성벽과 군대의 측면에서 아주 잘 방비된 상태여서, 과일의 핵처럼 깨뜨리기가 힘든 곳임을 알아차린 그는, 더 신속한 행군을 위해 경포병대까지도 뒤에 암겨놓고는, 몬테바르키에서 갑자기 로마 쪽 길로 방향을 꺾었다.
  느림보 우리비노 공은 약간 뒤처져 그를 쫒아 나섰고, 교황 군은 그보다 하루 앞서 있었다.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5월 2일 피렌체를 떠났고, 마키아벨리는 그들을 위한 숙영지를 준비하기 위해 이미 길을 떠난 상태였다.  사실 그는 4월 27일 혹은 28일 필리네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2,3일 간격으로 동맹군을 앞서가고 있던 교황 군을 바짝 붙어 따라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누군가 기다릴 만한 사람을 구하러 가는 중인 병사들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질서와 속도를 유지하면서) 행군해 나갔다.  당시 부르봉의 군대는 훌륭한 장군도 규율도 없는 데다 포병까지도 뒤에 남겨놓은 오합지졸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겨우 2,3일의 시간 동안 로마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오직 랑고니 백작만이 (오천의 보병과 일천의 경기병을 이끌고 급히 로마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부르봉은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 5월 4일 저녁 그보다 먼저 로마에 닿았다.  그는 도시가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 군대를 규합한 그는 6일 아침 보르고와 산토 스피리토의 성문들 사이를 공격하였다.  부르봉은 그 첫 공격에서 벤베누토 첼리니가 자신이 쏘았다고 주장하는 화승총 한 발을 맞고 죽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막 승리하려는 순간 스스로의 배반에 대한 대가를 치른 셈이 되었다.  이후 그 광란의 무리는 오직 강탈과 강간의 탐욕에 사로잡혀 두 시간동안 매우 거칠게 싸웠다.  그들은 공성용 포대도 없이 거의 맨손으로 취약한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결국엔 그곳에 모여 있던 소수의 수비군들을 제압하였다.  교황은 황급히 카스텔로 안으로 피신하였고, 그 사이 더 이상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카톨릭교도인 에스파냐 군과 루터파인 란치 군은 서로 앞을 다투어 그 도시를 짓밟아버렸다.  과거 황제들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지금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그곳을 말이다.  당시 행해졌던 인명 살상과 성물 파괴, 잔인함과 모욕과 강탈과 강간 행위들을 여기서 새삼 되새기는 것은 오직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예언했던바, 그 묵시록적 종말을 미완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일 분이다.  몇 달 사이에 두 번째로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불경함이 더욱 길고 더욱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었다.
  로마와 메디치 교황의 파멸이 피렌체에서 메디치 정권의 와해로 이어진 것은 필연이었다.  모든 그리스도교도와 모든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에 공포를 안겨다준 이 소식은 느지막이 11일이 되어서야 전해졌다.  그리고 피렌체인들은 이러한 공포 속에서도 곧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인지를 생각하였다.  16일 정무궁에 모인 8인집행위원회는 사보나롤라 체제하에 있었던 대평의회를 부활시키고, 아울러 두 명의 메디치 가 젊은이는 사적인 시민의 위치로 남게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사태는 결말이 지어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피렌체 사람들은 매를 둥지에 가둬두는 것으로 안전함을 느기지 못했다.  곧 질시와 의혹, 수군거림과 소문들이 난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자신들이 안전과 도시의 평화를 위하여 메디치 가가 떠나주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17일, 그들은 경의도 적의도 보이지 않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 망명길에 오름으로써 스스로가 민중의 뜻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교황은 자신이 그 같은 곤경에 빠져들었음을 이후에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마치 그것에 스스로 동의한 양 행동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이를 두고, 교황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무슨 선심이라도 쓴 양했다며 그를 조롱하게 될 것이다.  소데리니에 비해 마키아벨리에게 더 이익을 준 바도 없었고 더욱이 그 스스로 훨씬 더 바보짓만 골라서 했던 클레멘테 7세가 마키아벨리로부터 좋은 말을 듣기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마키아벨리는 교황의 일을 돕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귀차르디니와 함께 브라차노까지 갔는데, 그것은 역시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5월 19일, 총감독관 친구는 브라차노에서 정권이 바뀐 소식을 들었다.  곧 이어서 오르비에토 입성을 앞두고 (로마에 대한 그 무시무시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하나의 지진이 훑고 간 후 다시금 들이닥친 또 하나의 여진인 셈이었는데, 두 사람은 비록 한 배에 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소식을 듣고는 서로 전혀 다른 마음과 생각에 잠겼다.  마키아벨리는 즉시 친구에게 피렌체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친구는 그것을 허락하였다.  아니 더 나아가 그는 마키아벨리를 돕고자 자신이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보낸 21일자 편지의 부본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 편지의 내용인즉, 그는 교황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공화국 시민들을 방해할 생각이 없으나, 스스로는 (그는 이렇게 썼다) (제 군주의 사람으로서 그냥 이 군대와 함께 여기 있겠으니) 이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마키아벨리 역시 똑같은 이유로 교황의 사람들을 방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동일한 임무를 띠고 교황 군 진영에 와 있었던 프란체스코 반디니와 함께 안드레아 도리아의 함대가 있는 치비타베키아로 갔다.  그곳에서 다음날인 5월 22일, 그는 제독과 상의를 끝낸 후, 자신에게 이에 대한 임무를 주었던 총감독관 앞으로 상의 결과를 보고하는 편지를 썼다.  그의 (사절 생활) 중에 마지막으로 쓴 이 편지에서 그의 서명은 (딱 한번!) 프란체스코 반디니의 이름 위에 씌어져 있다.  이어서 그는 배에 올라 리보르노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피사 전쟁기 동안 청명한 날씨 속에서 수없이 지나쳤던 그 가로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는 마음으로는 공화주의자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교황과 메디치 정부를 위해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조국이 자유 공화국으로 바뀐 지금, 그는 또다시 패자의 편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주위에 거느린 사람도 별로 없이 깊은 상념에 잠긴 채, 한때 즐거웠던 시골 들녘과 마을들을 지나 순리와 자유로 되돌아간 피렌체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그는 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유를 너무나도 사랑하였다.)  무엇보다 그에게 후회스러운 일은, 나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이 조금도 애정을 준 적이 없는 교황과 그 (메디치 군주들)과 일함으로서 스스로의 앞날을 막는 바람에, 이제 행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진심을 다하여 자신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 정부 아래서 국가에 봉사하는 길마저 빼앗겨버린 점이었다.
  그는 또한 그 스스로와 가족에 대한 생각들로 괴로워했으며, 그 중 오해 마지않던 무료함과 (가난으로 인한 멸시)를 되새기며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그는 언젠가 메쎄르 니차의 입을 빌려 내뱉었던 그 말들을 혼자 되풀이해서 중얼거렸으리라.  (이곳에서 우리같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개도 짖지 않는다.)  1512년에 정권이 바뀔 때만 해도 그는 아직 젊은 나이여서 한창 힘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이제 1527년의 정권 교체에서는 그는 늙고 지치고 좌절한 상태였다.  옛날 그때는 써주기만 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만큼) 기백으로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마 더 이상은 알베르가초에서 위인들의 혼령과 더불어 공부하던 그 기억에 끌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능력 한도내에서 가능한 모든 불멸의 저작들을 깡그리 토해 냈다는 느낌을 받앗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가 (나 여기 있노라!) 라고 말을 걸 만한 사람도 없었다.  이탈리아가 파멸되는 상황에서도 이제 더 이상 불러낼만한 구원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 메디치 가가 제거된 지금, 한 대 그들이 그로부터 빼앗아갓던 것, 서기국의 그 애정 어린 자리로 복귀하리라는 희망은 전혀 없었다.  그는 도시 돌아가는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고, 읍도파 일색인 새 정부가 마키아벨리란 인물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 경우 의심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당시의 한 피렌체 사람의 말을 따르자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별히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뤼지 알라만니를 비롯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그 자리에 복귀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이 늙은 시인에게 한 가지만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여전히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는 사이, 그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6월 10일 그의 자리에 지금은 폐지된 8인집행위원회의 제1서기장으로 2년 간 봉직했던 프란체스코 타루지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또 한번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과거 메디치 정부는 공화 정부가 그에게 부여한 자리에 그를 그냥 두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공화 정부는 그의 옛 서기장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고 오히려 메디치 정부가 선임했던 한 서기장을 그 자리에 재임명하엿다.  앞의 메디치 정부는 마키아벨리보다 니콜로 미켈로치라는 인물을, 뒤의 공화 정부는 프란체스코 타루지라는 인물을 더 선호했던 것이다.
  한편, 다시 찾은 자유에 대한 환호성 속에, 길거리에서 서로 포옹하는 시민들도 눈에 띌 만큼 도시는 기쁨으로 가득 차 (거의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위대한 시민, 미켈란젤로와 함께 단테 이후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멸시당했다.  그가 메디치 가로부터 몇몇 보잘것없는 직위를 받았다는 사실 정도는 쉽사리 용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만든 그 행동 방식과 그 신랄한 말투와 그 거리낌없이 내보이는 결점으로 인해 용서받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의 (군주론) 때문에 그를 비워하였다.  부자에게는 (군주론)이 공작으로 하여금 그들이 재산을 모두 가로채려는, 빈자에게는 그들의 자유를 빼앗는 법을 가르치는 문서로 보였고, 읍도파에게 그는 이단으로 비쳤으며, 선인에게는 사악한 인물로, 악당에게는 자신들보다 더 악당이거나 더 능력 있는 인물로 생각되었으므로, 모두가 그를 미워하였다.)  부시니는 그렇게 썼다.  그는 심술궂고 악의로 가득찬 작가였으나, 적어도 이 말 속에는 그의 동향인에 대한 악의와 증오심이 일면이 충실히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한숨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가 기억을 더듬었고, 한숨 사이로 간간히 교황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조롱의 말들을 힘없이 내뱉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가 이미 늙고 인생이 별 기대를 가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래도 자신과 이탈리아에 대한 최후의 희망으로 뙤약볕과 눈비를 마다 않고 말을 달렸던 마지막 시간들로 인한 혹사 때문에, 그는 이제 그만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최근의 그 쓰라린 고통을 겪은 후, 흔히 그러하듯이 마음의 병은 곧 육신의 병으로 이어졌다.  그의 비웃는 듯한 조소와 거만하게 보이는 외양 아래 깊숙이 자리한 그 열정적인 성격도 그의 상태를 호전시키지는 못하였다.
  타루지의 임명 직후 병석에 누운 그는, 20일 자신이 평상시에 들던 약을 먹었다.  그가 어떤 병이든 걸렸다 하면 먹곤 하던 바로 그 유명한 환약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엾은 위인 니콜로에게는 자신이 그 시대의 군주와 장군들에게 내렸던 처방만큼이나 약효가 없었다.  사실 그 약들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곧 격심한 복통이 닥쳐왔고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어,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까지 생각될 정도였다.  주위에 그때까지 남아있던 몇 안되는 좋은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프란체스코 델 네로, 친절한 자노비 부온델몬티, 시인 뤼지 알라만니, 재능 있는 문인이자 훌륭한 시민이기까지 한 야코포 나르디, 또한 최근 조국의 해방에서 담당한 역할과 더불어, 이미 유서 깊은 가문과 부 덕분으로 자신에게 쏠리고 있던 선망과 질시를 한층 더 배가시킨 필리포 스트로치 등이 그들이었다.
  병자는 마음의 고통과 창자를 뜯는 듯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때로는 이상한 쾌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는 아이들과 자신이 나라와, 그리고 국정의 상태가 최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논하는 행복함을 맛보게 될 메쎄르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를 생각했다.  그는 또 알베르가초의 서재와 정무궁이 사무실을 생각했다.  그곳에서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의 것에 비하면 다만 무미건조할 뿐인 공한들을 쓰고 있을 터였다.  산 카쉬아노의 숲과 새잡이 그물도 생각났다.  그곳에서는 가을의 감미로운 안개 사이로 개똥지빠귀들이 다시 날아올 것이었다.  그에게는 아마 크고 작은 이 모든 것이 생각났을 것이며, 이제는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여인들과 생명에도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주금을 생각하명, 때로는 견딜 수 없다가도 또 때로는 그거시 피난처이자 휴식처인 듯도 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병약함과 불행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마키아 Machia) 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친구들과 더불어 자신의 불행을 웃어넘겼고, 스스로의 고통과 나아가 자신의 감정 자체에 반항하려 했을 것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누르면서, 웃고 농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담하게도 감히 죽음에 맞섬으로써 마치 자신의 마지막 영웅 조반니 데 메디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는 형편이 좋았던 옛날이나 별 다름 없이, 편안하게 자신이 꾼 어떤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그의 상상에서 나온 것일 뿐이었다.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비쩍 말라 병약해 보이는 빈자의 무리들을 드문드문 보았다고 얘기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누구냐고 묻자, 자신들은 천국의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들에 대해서는 성경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가난한 자는 축복받을지니 천국이 너희 것이라.) (마태복음 5장 3절-옮긴이) 그들이 사라지자, 왕이나 궁정의 예복을 입은 고상한 입성의 사람들 한떼가 나타났다.  그들은 진중히 국가사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타키투스를 비롯한 고대의 유명한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가 새로이 나타난 이 사람들에게 누구냐고 묻자, 자신들은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인데 그 이유는 (이러한 종류의 지식이 신의 뜻에 어긋나기) (이 말의 정확한 전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로마서 곳곳에 나오는 오만함에 대한 바울의 경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서 11장 20절, 12장 3절, 12장 16절 등을 볼 것-옮긴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사라지자, 그에게는 누구와 함께 있고 싶으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그는 대답하기를, 자신은 처음의 누더기를 걸친 무리들과 천국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고귀한 영혼들과 국가사를 논하며 지옥에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 존재가 거의 공개된 적이 없는 한 위대한 이야기꾼의 마지막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키아벨 리가 (이 유명한 꿈)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채 조소하며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친구들이 떠나고 가족들만이 남자 홀로 생각에 잠겼으며, 조용히 스스로 임종에 대비하면서 (마테오 신부를 불러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그리하여 신부는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6얼 21일 세상을 떠났고, 그 유해는 22일 산타 크로체에 묻혔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 생전에나 죽는 그 순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키아)가 곧 마키아벨리였고, 가면인 듯 보인 것이 곧 진면목이었다.  죽음 직전의 그 담대한 태도에서, 그리고 돌연히 스스로의ㅡ 평상심으로 되돌아가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바로 다음의 시를 썼던 바로 그 사람임을 본다.
  나는 웃네.  하지만 웃어도 마음은 허망하기만 하네.
  나는 태우네.  하지만 불꽃은 밖으로 피어나지가 않네.
  그는 저녁이 오면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훌륭한 옷으로 갈아입었던 바로 그런 사람이기에, 죽음에 임해서도 다시금 궁정의 의상을 차려입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시시껄렁한 농담 조의 말로 일관하다가 어느새 진지한 태도로 되돌아오던 것처럼, 그리고 (군주론) 말미에서 그랬던 것처럼, 틀림없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결국 (자신의 구원자)를 희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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