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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avelli's peace25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서기장이 글 속에서 관직을 잃은 슬픔에 관해 언급한 곳은 몇 안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쓰디쓴 맛을 느끼게 한다. 아마 가장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경우는 그가 면직 이후의 시기를 표시하기 위해 적어놓은 간결한 문체의 (모든 것을 잃은 뒤 post res perditas) (이 어구는 1512년 메디치 가의 복귀로 마키아벨 리가 공직에서 해임되어 어쩔 수 없이 시골에 은거하게 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는 이 말을 자신의 (피렌체 곤사조직론 Discorso dell'ordinare lo stato di Firenze alle armi) (1506)의 개인 소장 사본에다 써놓았다. 또한 그의 글 (민병대 옹호론 La cagione dell'ordinanza, dove la si truove, .... 2020. 8. 20.
12시 정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로부터 보고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이었다. 즉 교황과 왕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있으리라는 것과 피렌체는 어쩔 수 없이 그 전쟁에 휘말리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먼저 군사적 측면을 고려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못 된다. 그의 기본 신념을 결국 보병이 전투를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기병과 맞싸울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반면 자신이 만든 민병대에는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곤팔로니에레와 10인위원회를 설득하여 민병대 편제 안에 새 기병이 아니라 석궁과 총을 휴대한 경기병으로 토스카나의 농촌 사람들로 채워질 수 있었다. 그들을 설득하는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510년 11월 7일 10인위원회는 서기장에게 (경기병 분견대를 만드는) 임무를 맡겼다.. 2020. 8. 20.
만토바, 베로나 사절시기 세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 피사 전쟁의 불꽃이 조용히 사그라들고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더 큰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캉브레에서 프랑스 왕과 막시밀리안 사이에 반베네치아 동맹이 맺어졌고, 여기에 주리오 2세와 아라곤 왕이 마지못해 가세하였다. 그리하여 바로 이해 1509년 봄이 되면서 레오네 디 산 마르코(마르코 성인의 사자, 즉 베네치아를 가리킴 - 옮긴이)가 이들 모두의 공격의 받는 상태가 되었다. 롬바르디아 지역의 경우, 베네치아 5월 14일 아다의 자갈밭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곧 베르가모와 브레쉬아르 잃었다. 로마냐에서는 24일 파엔차가 함락되고 연이어 라벤나도 넘어갔으며, 교황의 2개국 연합군에 밀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리미니와 체르비아를 포기해 버렸다.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듭하는 프랑.. 2020. 8. 20.
독일 사절의 시기 피사 전쟁과 탈환 소데리니 곤팔로니에레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고 좀더 나아진 경기 덕분으로, 피렌체는 다시 번영하였으며, 지도자가 훌륭하고 현명하며 정치를 잘 해나갈 때 그 나라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행복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는 도시가 파탄 지경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는, 자신의 사적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사에서도 극도의 절검 정책을 실시하는 등, 무엇보다도 재정을 일으켜 세우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유능한 행정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4년 뒤, 재정 상태가 개선되면서 국가의 신용은 되살아났고 세금은 경감되었다. 그는 시민을 신뢰하였고 시민들 역시 그를 믿었다. 반면에 그에 대한 일부 유력 시민들의 의심과 증오는 더욱 켜졌다. 알라만노 살비아티와 조잡바티스타 리돌피 등을 앞장세우고 있던 이 소수.. 2020. 8. 20.
마키아벨리와 피렌체사 줄리오 2세에 대한 두 번째 사절 시기 문필가에서 갑자기 군사를 다루는 위치에 서게 된 마키아벨리를 두고, 역사가든 전기 작다든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의 애국심을 노래하고 있다. 나라고 남보다 앞서 그의 이러한 덕성을 부정하는 인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당대인들조차도 인정했던 대로, 자신의 조그만 도시국가와 자신의 자유를 향한 애정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로서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았던 더 넓고 큰 조국 (이탈리아를 말함 - 옮긴이)에 대한 애국심을 당시의 다른 이탈리아인 누구보다도 더 확실히 보여준 인물로서 그를 지목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좀더 공평하게 평가하자면, 피렌체의 서기장이 민병대에 기울인 열성과 관심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재능을 믿고, 더불어 반대자들에 의해 그토록 심하게 .. 2020. 8. 20.
두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 첫 (십년기 ) 민병대 전쟁은 멀리 나폴리 왕국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프랑스와 행로를 같이하고 잇던 피렌체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에 사자로 가 있는 동안 계속해서 전쟁 소식을 전해 달라는 닦달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전투가 없다가 그가 떠난 직후인 12월 28일, 프랑스 군은 가릴리라노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에스파냐 균의 잘 닦인 군기와 보병대의 용맹성, 그리고 운과 재주를 겸비한 지휘관 콘살보 덕분이었다. 패전군은 설상가상으로 겨울의 매서운 날씨와 싸워야만 했다. 피에로 데 메디치 역시 바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다 익사했는데, 이는 시종 멍청하고도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프랑스 군.. 2020.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