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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avelli's peace25

첫 로마 사절 시기 마키아벨리가 내내 로마냐 사절의 임무에 매달리다가 돌아온 이후에도, 발렌티노와의 협상은 여전히 서기장으로서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발렌티노의 협상은 여전히 서기장으로서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 역시 그가 실패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협상이 순조로울 수 없었던 데에는, 피렌체인의 차가운 기질뿐 아니라 교황과 프랑스 왕 사이의 복잡다단한 정치 게임과 나폴리 왕국 내에서 에스퍄냐의 프랑스 간에 벌어지고 있던 전쟁의 불확실한 행로 등의 이유가 있었다. 교황은 왕과의 동맹으로 별 이익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야망이 와에 의해 여러번 좌절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참에 프랑스 군의 위세가 하락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자, 바로 지금이 자신의 군세와 계획을 에스.. 2020. 8. 20.
발렌티노에 대한 사절 시기 피렌체는 언제나 법률상의 결점을 시민들의 능력으로 보완해 왔으나, 이 즈음에 들어 상층 시민 cittadini migliori일수록 공직에서 더 소외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평시민들의 시기로 인해 마음이 이반되고 불만과 경계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재력을 국가를 위해 쓰려들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이익 관계와 세력간의 각축속에서 구습들이야말로 공화국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었다. 극히 짧은 임기의 정무위원을 추첨으로 선출하는 이상한 방식 때문에, 종종 아무런 능력도 경험도 없는 인물들이 권좌에 앉게 될 뿐 아니라 그들 역시 공직에 대한 경험을 쌓기도 전에 그 직에서 물러아야만 했다. 이러저러한 난맥상이 초래한 결과는 당시 공화국이 겪은 재난들 속에서 잘 나타나 있었다. 그러한 위험에.. 2020. 8. 20.
속국의 반란과 발렌티노의 행적 피사는 요새라는 무력을 통해 막고 피스토이아는 파양으 이용해서 지킨다는 거이 피렌체의 오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피사를 지킬 만한 히도 없고 피스코이아를 붙잡고 잇을 만큼 파당도 튼튼지 않은 상태로 보였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에 사절로 강 있었던 1500년 8월, 피렌체 정부가 약하고 분열된 모습을 보이자 도시를 가르고 있던 파당간의 묵은 원한이 때를 맞추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무리를 들고 일어난 법치파 i Cancellieri는 방화와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며 만복콕파(만복파,i Panciatici)를 내몰았다. ((법치파)란 평시민 정부를 지향하는 반메디치파이다. (cancelliere)란 법정의 수호자라는 뜻의 라틴어 (cancellarius)에서 유래하였다. 반면 (만복파)란 말은 .. 2020. 8. 20.
첫 프랑스 사절 시기 니콜로가 피사에서의 위험한 임무를 위해 출발하던 5월 10일 바로 그날에, 그는 아버지를 잃엇다. 어머니는 4년 전인 1496년 10월 11이레 세상을 떠났다. 누나들은 이미 결혼을 해서 프란체스코 베르나치와 베르나르도 미네르베티라는 남편을 맞았다. 그래서 이제 남은 사람은 단지 남동생인 토토뿐이었는데, 그는 사제의 길을 택하였거나 혹은 그러려고 하고 있었다. 분명히 니콜로는 아버지를 잃은 누구나가 그러한 것보다 그의 공백을 더욱 뚜렷이 느꼈을 것이며, 일생 중 그대로 고통이 덜한 때를 생각하며 달래게 마련인 충격의 흔적은 더 무겁게 그의 말음을 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메쎄르 베르나르도와 니콜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다. 둘은 익살맞고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거의 형제 사이와 같이 가까웠.. 2020. 8. 20.
첫 번째의 사절 임무들 마키아벨리가 서기장 직에 취임한 당시, 피렌체인들의 주요 관심사는 피사의 탈환 문제였다. 서기국을 거쳐 나가는 대내외의 모든 일들 중 이 전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피사의 반란은 샤를 8세의 간여와 동의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피렌체인들은 무엇보다 그것을 상실케 한 원인이었던 왕으로부터 그 도시를 돌려받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뒤, 속았다가 것을 깨닫고 거꾸로 기회를 엿보다가 배반하는 긴 시간을 보낸 후, 결국 그들은 군사력으로 그것을 다시 빼앗고자 하였다. 만일 피렌체가 과중할 정도였던 대외적 욕심을 버리고 프랑스와의 끈끈한 밀착 관계를 포기함으로써 당시 샤를 8세에 대항하여 뭉쳐있던 이탈리아 국가들의 적의를 사지 않도록 했더라면, 피렌체의 피사 탈.. 2020. 8. 20.
서기장 마키아벨리 1998년 5월 28일, 80인회는 까다로운 심사 절차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젊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제2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지 겨우 닷새 뒤의 일이었다. 전기 작가들은 지금까지 마키아벨리에게 이러한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의 몰락이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식으로 그는 당시의 경험으로부터 하나하나 교훈을 얻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미 그 해 2월부터 서기국의 한 하위 관직을 얻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든 그는 사보나몰라와 그를 따르던 읍도파의 몰라긍로 갑자기 더 좋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읍도파들 가운데는 다름아닌 제2서기장 알레싼드로 부라치가 들어 있었으며, 아울러 그의 자리를 놓고 니콜로와 경쟁했을 만한 몇몇 인물들로 끼어 있었던 서이다. 니콜로.. 2020. 8. 20.